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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용산학살, 7개월이 흐를 동안 나는 무엇을 했는가?

8월 19일 밤, 천안역에 오랜만에 촛불이 켜졌다.

 

작년 이맘 땐 충남지역 거의 모든 시군에 촛불이 켜졌다. 언제 머리에 구멍이 뚫려 죽을지 모르는 대중적 공포감이었는지, 꽉 막힌 일방통행식 통치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었는지, 아니면 신자유주의 10년이 만든 현실에 대한 분노의 폭발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땐 그랬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촛불이 켜지면 삼삼오오 모였고, 초를 나눠주었으며, 스스로 나가 발언대에 올랐다. 서울만큼은 아니었지만, 지역에서도 촛불은 꺼지지 않았었다.

 

지난 1월, 상상하기도 싫은 국가폭력의 실체를 낱낱이 드러낸 용산학살이 자행되었을 때, 분노만큼 컸던 ‘기대’가 있었다. 2008년 촛불 처럼 거대한 자발적 투쟁이 일어날 것이라 믿었고, 작년 촛불투쟁을 통해 많은 반성과 고민을 했던 조직노동자들과 운동단위들이 벌 떼처럼 일어나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런 후 7개월이 지났다. 기껏해야 내가 한 것은 검찰청 앞 1인시위였고, 어쩌다 한 번 용산에 올라가는 일이었다. 지역에서는 용산대책위가 만들어졌지만, 실은 거의 아무활동도 하지 못했다. 갑갑함과 답답함에 짓눌리는 시간들이었다.

 

용산학살 유가족들과 범대위, 지역 노동자와 시민들이 함께하는 촛불문화제는 두 시간 가량 진행됐다. 용산학살을 중심으로 한 지역 집회는 사실상 처음있는 집회다. 다른 촛불문화제와 다르게 사람들도 많이 와 앉아 있다. 공연과 동영상상영, 발언들이 이어졌다.

 

다른 말들은 거의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유가족 두 분의 발언이 계속 귓속을 맴돈다.

 

“유가족과 모두의 힘이 너무 약해 여기까지 왔나 봅니다.”

 

“약해서... 이명박 정권을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을 주십시오, 사랑이 고파서 왔습니다”

 

사랑이 고파서 왔다는 그 말에 저절로 눈물과 한숨이 나왔다. 조직운동을 하겠다는 내가, 계급투쟁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만들자고 떠들고 있는 내가 눈앞에 벌어진 폭력과 잔인한 학살에 조직적이지도 않고, 투쟁적이지도 않으며,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실천조차 하지 않는 것이 화가난다. 7개월이 넘는 시간동안 모든 것을 내놓고 투쟁한,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는 유가족들 앞에 눈물을 흘리고 있는 나에게 또 화가난다.

 

노동자들과 민중들의 투쟁, 그 어느 것 하나 패배할 수 없는 투쟁들이다. 더욱이 용산투쟁만큼은 기필코, 반드시 승리해야 하는 투쟁이다. 공황기의 초입단계에 들어선 지금, 자본주의의 폭력적 재구조화를 막아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지금 현재 벌어지는 폭력과 야만에 대항한 강력한 저항과 투쟁뿐이다. 여기에 용산의 투쟁이 있다.

장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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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소환제와 노동자정치

소환제란?

 

[주민소환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이 법은 “지방자치에 관한 주민의 직접참여를 확대하고 지방행정의 민주성과 책임성을 제고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되어 있다. 이는 지난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를 향한 노동자 민중의 투쟁의 귀중한 성과임에는 틀림없다. 

 

소환제도는 이미 오래 전부터 노동자계급의 요구였다. 최초의 노동자정부를 구성한 1871년 파리꼬뮌이 그것이다. 당시 기록을 보면 “코뮌은 파리의 각 지역에서 보통선거를 통해서 선출된 지방자치 위원들로 구성되었으며, 그들은 책임성이 있었고 언제나 국민소환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주민소환제가 지난 2006년 법안이 공포되고 2007년 5월 25일부터 발효되었고, 이번 제주도 도시자 소환투표가 진행되고 있다. 이것만 보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매우 진전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주민소환제는 그 대상을 지방자치단체로 하고 있어서 국회의원은 해당되지 않는다. 또한 절차자체가 매우 엄격한 제한 조건을 두고 있어서 그 실효성이 의문시 되어왔다. 이런 점에서 노동자계급이 소환의 대상을 지방자치단체장이나 지방의회에서 더욱 확대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과 기득권세력에게 유리한 기존의 법률조항들을 바꾸려는 운동을 전개하는 것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은 한걸음 더 앞으로 나가야 한다.

 

소환제를 넘어서 노동자민중 자신이 통치의 주체로!

 

자치라 함은 스스로 정부를 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작년 촛불 정국에서 가장 많이 외쳐진 구호중 하나가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였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권력은 형식적으로 국민으로부터 나올 뿐, 선출되자마자 그들은 국민들의 절대다수인 노동자 민중들 위에서 군림하고 우리들을 억압하고 있다. 진보적인 인사가 선출되면 좀 달라질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선거로 바꿀 수 있는 것은 근본적으로 제한적이다.

 

소환제도 마찬가지이다. 소환이라는 것은 이미 선출된 자를 다시 끌어내리는 것이다. 그만큼 그 과정에는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으며, 기껏해야 전횡에 대한 심판의 성격을 갖는다. 심하게 말하면 사후약방문인 셈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선거는 결국 몇 년에 한 번씩 자신을 지배할 자들을 선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악순환을 끊어낼 방법은 없는 것인가? 노동자 민중을 지배하는 관료기구의 관료를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우리의 대표를 선출하고 우리 스스로 통치하는 세상은 가능할 것인가? 

 

이와 관련하여 파리코뮌을 비롯한 역사적 경험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가능성을 보여준바 있다. 첫째, 자치기구의 대표는 보통선거로 선출하며, 언제나 소환대상이 된다. 둘째, 억압적 국가기구 즉 상비군과 경찰 등은 해체하고, 만일 민병대나 자경단이 요구된다고 해도 선출과 소환의 원칙은 동일하게 적용한다. 셋째, 선출된 모든 대표나 공직자는 특권을 폐지하고 노동자들의 평균임금에 상응하는 보수를 지급한다. 넷째, 모든 자치기구는(그것이 중앙이던 지방이던)활동하는 행정기관인 동시에 입법기관으로 기능해야 한다. 

 

저들은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국가라 한다. 이는 자본가독재를 은폐하는 허울 좋은 기만극임에 틀림없다. 그렇다! 우리는 거짓된 민주주의를 거부하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우리 스스로 실현해야 한다. 소환제를 확대하자! 동시에 소환제를 넘어 우리 스스로가 통치의 주체임을 선언하고 실천하자! 

구남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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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죽음에 비친 ‘진보본색’

끝없는 애도, 노무현 신드롬
노무현의 죽음은 일대 사건이었다. 한국사회는 마치 노무현 생전과 생후를 기점으로 전혀 다른 사회가 되는 듯한 현상을 보였다. 상중에 벌어진 북의 2차 핵실험조차도 삼켜버릴 정도의 위력을 발휘했으며 500만에 가까운 사람이 직접 애도를 표하러 나설 만큼의 신드롬을 불러 일으켰다. 이쯤 되면 한국사회는 애도를 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으로 구분된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하겠다. 
국민장 기간 동안 보수진영도 일부 극우 인사를 제외하고는 노무현 추모 대열에 동참했다. 오히려 그 와중에 추모 자격 문제에 부딪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들은 직감적으로 노무현이 죽음에 이르게 된 데에 대한 부채가 있으며 그 원망의 화살이 자신들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들이 전전긍긍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독립된 정치세력으로 서지 못하고 있는 진보진영
문제는 진보진영이 보인 태도다. 진보진영은 보수진영이 보인 전전긍긍과는 정 반대로 조금 심하게 말하면 의기양양 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민주당이 노무현의 상주 역할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야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진보진영마저 마치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려는 심정과 같은 정서를 드러냈다. 진보진영에서도 노무현은 ‘서민’, ‘탈 권위’, ‘민주주의’의 상징이 되었으며 진보의 아이콘으로 격상되었다. 물론 몇 가지 작은 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인간 노무현과 대통령 노무현과는 구별해야 한다거나,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것과 그의 정책을 반대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거나, 노무현의 죽음을 미화하는 것과 노무현이 남긴 과제를 성찰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라는 등이 그것이다.
적어도 1987년 이후 한국의 노동자 민중운동 또는 노동자 정치의 핵심 과제는 기존 보수 정치 또는 부르주아 정치로부터 독립된 독자의 영역과 세력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민주노동당이 등장함으로써 형식적 독립은 이루었다. 그러나 그 내용에서 민주노동당은 자유주의 세력의 이중대라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 진보진영은 지난 10년 동안 자유주의 세력의 대체 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진보진영은 제 발로 서지 못하고 여전히 자유주의 세력에 기대고 있는 형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언제까지 대중의 뒤꽁무니만 따를 것인가
지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도 진보진영은 독자적인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오히려 대중의 뒤꽁무니를 따랐을 뿐이다. 탄핵을 반대하는 것은 충분히 그럴 수 있지만 탄핵 반대의 동력을 노동자 민중정치로 안내하지 못한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지난 ‘촛불 정국’에서도 같은 현상이 되풀이 되었다. 진보진영은 ‘촛불 대중’을 지지하고 그들과 함께하는 것을 넘어 그들로부터 정치적 지도력을 획득하는 데에는 전혀 미치지 못했다.  
이번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이 만들어 낸 정치 공간 속에서 진보정치는 자신의 한계, 즉 본색을 또 다시 극명하게 드러냈다. 그러나 이는 특별한 일이 아니다. 용산대참사라는 노무현의 죽음과는 또 다른 사건이 그 훨씬 전에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진보진영은 이를 전혀 대응하지 못했다. 용산대참사 초기에 보여준 노동자 민중의 분노는 결코 노무현의 죽음을 애도하는 열기에 비해 덜했다고 할 수 없다. 진보진영은 그 즉시 왜 전국에 분향소를 차리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는가. 노무현의 죽음에 대한 애도가 이명박 정권에 대한 불만을 간접적으로 표시하는 것이라면 용산대참사가 벌어진 당시에 대중은 이명박 정권에 대한 분노를 직접적으로 표출하지 않았던가. 울산 북구에서의 선거 승리는 도대체 지금 무슨 의미가 있는가. 노무현의 죽음이 일으킨 정치 현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그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제도 정치권의 구역질나는 위선을 탓하기에 앞서 진보진영, 진보정치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냉정히 돌아봐야 한다. 
고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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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스타일*의 일반시민 누리

촛불스타일*의 일반시민 누리

Posted 2009/05/06 06:56
*촛불스타일. 내가 촛불이고, 우리 세대가 촛불이고, 모이는 데가 촛불이고, 하는 게 촛불이고, 드는 게 촛불이고, 방식이 촛불이고, 즐거운 게 촛불이고, 무엇보다 목적이 촛불이다.

촛불에 참여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작년 5월 중순부터 사진동호회에서 번개 겸해서 자연스럽게 참여했다. 거리 시위보다는 피켓 앞에 앉아 있는 정도였다가 5월 31일 경복궁사태라 불리는 동십자가까지 갔던 날 처음으로 가두시위를 했다. 물대포와 소화기를 맞고 들어왔는데, 내 바로 옆에서 연행되던 남학생을 지켜보기만 했던 게 마음에 걸렸다. 그 뒤로 확실히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나중에 시민기자단에도 들어갔는데, 기자보다는 거리 현장을 뛰는 게 더 좋았다.

연행당할 때의 상황을 듣고 싶다.
당시 시민기자단 활동을 하고 있었고, 새벽에 경찰의 채증과정을 보려고 나갔다가 연행되었다. 친구 한명이 경찰의 "쟤네 싸서 잡아라"는 명령을 들었다고 한다. 연행 전에 가투를 나갔다가 꿈에서 연행되곤 했는데, 실제 상황이 된 것이다. 이틀 뒤에 나와서 또 거리로 나갔으니까, 겁은 났지만 그리 위축되진 않았다. 나중에 연행자들과 심리치료프로그램을 받았고, 많이 좋아졌다.

촛불에서 좋았던 기억은?
내 의견을 표현하는 공간이 있다는 것, 그래서 집회에 나간 것 자체가 좋았다. 온라인이 아닌 오프라인에서 생각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확인하는 것이 굉장히 뿌듯했다. 그리고 촛불 예비군이나 개념찬 언니 등 쌈빡한 발상들도 너무 좋았다. 하이힐과 미니스커트의 집회 문화 상상이나 했겠나? 아, "살이 찐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먹거리가 많았다.

기존 운동권 집회와 무엇이 다르다고 보는가?
촛불을 들며 나는 소속이 없는 개인이다. 서로 다른 생각의 개인들이 가지는 공통된 관심이 촛불이었다. 그래서 다양하면서도 새로운 집회 문화가 만들어진 것 같다. 기존의 단체들은 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다. 만약 그런 단체들이 주도했다면 모두가 즐거운 문화가 만들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편으로 갈수록 한계도 많이 보였다. 경험부족이랄까? 여러가지 의제들로 확산되면서 촛불이 반정부 투쟁이 될수밖에 없었는데, 개인 촛불들은 소화가 어려웠다. 촛불 단체들도 많이 줄었다. 지금까지 꾸준히 나오는 촛불은 이제 운동권이 됐거나, 원래 운동권 아니냐는 소리들이 나오기도 한다.

촛불 시즌2에 대한 바램들이 회자되는데, 전망이 어떤가?
촛불은 리더가 따로 없고 수평적인 관계다. 촛불연석회의가 만들어졌지만 그 안에서 대표도 생기고 나름의 체계를 갖추며 수직구조가 생긴다면 그것이 촛불인가 싶다. 물론 동의하는 만큼 함께하겠지만, 촛불이라면 현장에서 직접 판단하고 움직일 것이다. 또 한편으로 촛불이 하나의 단체로 묶이길 희망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여론을 모으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다. 너무 다양하기 때문이다. 촛불연석회의가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신중하게 반영하길 바란다.
자의반 타의반 1년의 경험 속에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졌다. 처음부터 반정부 투쟁을 한 것은 아니지만 여러 의제들에 대해 자발적으로 학습하고 비판의식을 키워갔다는 건 시즌2를 여는데 긍정적인 조건이다. 어디서든 술마시면 결국 이명박을 욕하게 된다.

촛불 전과 달라진 것은?
대학 때 듣던 민중가요들을 MP3에 넣어 듣는다. 그리고 촛불 시작할 때는 금방 달라질 거란 기대가 컸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명박이 끌어내리는 것이 뭔가의 해결도 아니다. 천천히 많은 사람들과 함께 가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한사람의 열걸음보다 열사람의 한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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