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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6/25
    [가문비] 방과 후 학교를 마다하는 이유(23)
    손을 내밀어 우리
  2. 2009/06/22
    시처럼 쓰는 편지(2)
    손을 내밀어 우리
  3. 2009/06/22
    어떤 게시판에서...(7)
    손을 내밀어 우리
  4. 2009/06/09
    정희성의 시 두 편 + 하나 더(6)
    손을 내밀어 우리
  5. 2009/06/03
    비를 핑계로 쓴다(4)
    손을 내밀어 우리
  6. 2009/06/02
    애창곡에 어린 추억들(8)
    손을 내밀어 우리

[가문비] 방과 후 학교를 마다하는 이유

그저께 밤이었나,

새벽 2시쯤 집에 왔는데, 

느티는 자고 가문비는 아직 깨어 있다.

 

아빠를 보고는 가문비가 사인 받을 게 있다고 뭔가를 들고 왔다.

여름방학에 학교에서 실시하는 보충수업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그걸 부모도 동의한다는 의사표시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지 뭐.. 근데 뭐라고 써?

-아, 내가 이유서는 써놨어.

=어디 보자.

-여기...

 

아래, 가문비가 쓴 "방학 중 방과 후 학교 불희망 사유서"를 그대로 옮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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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학 중 공부는 자신에게 부족한 과목을 보충하는 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게 가장 취약한 과목은 영어이며, 그래서 이번 여름방학 때는 영어를 집중적으로 공부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동안 제가 들었던 학교의 영어 보충 수업은 저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하는 한국어 해석 방법보다는 영어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방법으로 영어를 배우고 싶고, 앞으로 그 방법으로 공부를 계속 해 나갈 생각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앞에서 선생님께서 불러주시는 단어의 뜻을 받아 적고 주요 숙어에 밑줄을 긋는 것보다는, 혼자 집에서 영어 뉴스를 반복해서 듣고 따라하며 머릿속에 청각 이미지가 자리 잡게 해 영어를 쉽게 파악하는 것을 공부하는 쪽이 훨씬 더 영어 공부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도상의 문제이겠지만, 방학 보충의 일관적이고 수박 겉핥기식인 수업도 맘에 들지 않습니다. 작년 겨울 방학, 수학 같은 경우에는 약 30시간 동안 수학1 전체 범위를 배웠는데, 짧은 시간 동안 어렵고 복잡한 내용들을 많이 배워서 효율이 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개념 설명을 듣고 대표적인 예제 몇 문제를 다룬 뒤 바로 다음 단원으로 넘어가 버리니까 무언가를 배웠는지조차 헷갈리고요. 다른 과목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어 같은 경우에도 현대문학, 고전문학, 비문학 등 많은 분야들이 있는데도 모든 학생들은 고전 문학만 배워야 했습니다. 과목마다 몇 분야로 나눠서 학생들이 원하는 수업을 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방학 보충이 진행된다면 좋겠지만, 현재 우리 학교는 그렇게 하지 못하니까 저는 그저 잘하는 부분 못하는 부분 상관없이 훑어보는 식의 수업을 하는 것이 시간낭비라고만 느껴집니다.


또한 저는 흔히들 말하는 야행성입니다. 동생이 잠자리에 들고 난 후인 밤 11시 이후에 공부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실제로 그 때 훨씬 효율이 좋기도 하고요. 방학 때만이라도 그런 생활 습관을 제가 조금 더 효율적인 시간대에 공부를 할 수 있는 쪽으로 바꿔서 공부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수능을 대비해서 아침형 인간이 되라고들 많이 말씀하시지만, 그건 내년에 가서 생각해도 될 문제이고 일단 조금이라도 더 효율적인 시간에 공부를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유들로 저는 이번 여름방학 보충 수업을 희망하지 않습니다. 의지만 있다면 집에서도 충분히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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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처럼 쓰는 편지

1.

그대의 얘기를 듣고 싶어서

나는 끝없이 얘기를 합니다.

 

얘기가 되풀이될수록

나는 시나브로 얘기들 뒤로 사라지고

 

침묵이 오래 흐를수록

그대는 반달같이 단아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내 얘기는 그저 껍데기일 뿐입니다.

그대는, 참인 명제입니다.

 

2.

늦은 밤에 간신히 잠들었다가

이내 가위에 눌렸습니다.

 

어두운 길에서 괴한이 나를 꼼짝못하게 하고

칼을 들이대면서 가진 것 모두 다 내놓으라고 합니다.

 

내 몸이 조금만 뒤틀려도

괴한의 칼이 내 옆구리로 날카롭게 파고 듭니다.

 

절체절명,

위기의 상황이거늘

나는 무엇을 내놓고 무엇을 지킬 것인가

복잡한 셈을 하고 있습니다.

 

다 버리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숨을 헐떡이면서 내가 취한 행동은

눈을 부릅뜨는 것이었습니다.

 

캄캄한 새벽,

장맛비,

세상은 빗소리가 그윽합니다. (2009.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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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게시판에서...

우연히 눈에 띄었고, 남겨두고 싶어서 여기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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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어떤 완성된 사람, 즉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 내었다가 (흔히 시민사회의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그렇듯이) 그 사람이 자신이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자 이내 실망해 버리는 어떤 "상"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이를 "형성하고", 발전시키고, 그 사람 이상의 것, 그 사람과는 다른 것을 만들어내는 생산적 태도이다. (...)


-브레히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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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성의 시 두 편 + 하나 더

두 아이의 학교가는 시간대가 다르고

요즘은 새벽같이 출장가는 일이 좀 드물어져서

아침마다 책읽을 시간이 짬짬이 난다.

 

잠깐식 읽을 때는

시 한두편이라도 읽어가는게 느긋하지.

 

오랜만에 정희성 시인의 최근 시집을 구해서 읽다가

아침부터 키득키득 혼자서 웃었다.

 

 

<시인 본색>

 

누가 듣기 좋은 말을 한답시고 저런 학 같은 시인하고

살면 사는 게 다 시가 아니겠냐고 이 말 듣고 속이 불편

해진 마누라가 그 자리에서 내색은 못하고 집에 돌아와

혼자 구시렁거리는데 학 좋아하네 지가 살아봤냐고 학은

무슨 학, 닭이다 닭, 닭 중에서도 오골계(烏骨鷄)!

 

ㅋㅋㅋㅋ...

오골계 드셔 보셨는지?

뼈가 까만 닭이다.

보약으로 곧잘 쓰는데

대학교 때 친구네 하숙집에 갔다가

늦은 밤에 출출해서

주방을 뒤지다가

채 식지 않은 닭백숙 냄비를 보고는

야 맛있겠다 해서 친구랑 열심히 먹었는데

아뿔사

그게 하숙집 주인의 남편을 위한 보양식이었다고....

미안해서

나중에 쌀 한말 사들고 그집에 다시 갔던 기억이 난다.

 

남들은 희디 흰 학이라고 남편을 칭송하지만

아내의 입장에서 보면 속까지 다 검은 닭이다?ㅋㅋ...

뭐 긴 설명이 필요없는, 긴 사연이 담긴 작품이네.

 

내 아내의 입장에서 날 보면

아마 오골계보다 더 할껴...-.-

 

 

또 하나...

 

 

<희망>

 

그 별은 아무에게나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 별은 어둠속에서 조용히

자기를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의 눈에나 모습을 드러낸다

 

 

그 전에 희망에 대해서 내가 주로 인용했던 말이라면

'희망은 결코 절망한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희망을 잃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는 말 정도....

 

근데 이 석 줄의 짧은 시에서는

나 자신에게서 희망을 일깨우고 갈무리하는 자세가 보인다.

정희성 시인도 제법 나이가 들었나 보다...

 

내가 이전에 술자리에서 노래 대신에 읆곤 하던 시가

정희성의 "새벽이 오기까지는"이었는데

그 시를 한번 보면 실감이 날 듯하다.

 

 

<새벽이 오기까지는>

 

새벽이 오기 전에

나는 머리를 감아야 한다

한탄강 청청한 얼음을 깨서

얼음 밑에 흐르는 물을 마시고

새벽이 오기 전엔

얼음보다 서늘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

 

새벽이 오기까지는

저 어질머리 어둠에 불을 지피고

타오르는 불꽃을 확인해야 한다

얼음 위에 불을 피우고

불보다 뜨거운 마음을 달궈야 한다

새벽이 오기까지는

 

나는 보리라

얼음 위에서 어떻게 불꽃이 튀는가를

겨울의 어둠과 싸우기 위해

동지들의 무참한 죽음과

보다 값진 사랑과

우리들의 피맺힌 자유를 위해

 

나는 보고 또 보리라

불이 어떻게 그대와 나의

얼어붙은 가슴을 뜨겁게 하고

저 막막하고 어두운 겨울 벌판에서

새벽이 어떻게 말달려 오는가를

아아 눈보라 채찍쳐

새벽이 어떻게 말달려 오는가를.

 

 

술자리에서 내가 이 시를 외우며 악을 쓰면

사람들은 마지막에 다그닥 다그닥 말달리는 소리를 내면서

술잔을 부딪히고는 했다...ㅋㅋ

 

회의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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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핑계로 쓴다

마알간 아침 하늘,

한 귀퉁이부터 캄캄하게 어둠이 밀려오더니

이내 비가 퍼붓고

우르르 쾅쾅 천둥이 칩니다.

 

천둥이 하늘의 심장인 듯

박동소리가 다부지고 야무진데

내 심장의 미세한 울림과 떨림은

어느 한 사람에게라도 가닿을 수 있을까요?

 

비가 올 때마다

본능처럼 몰아치는 가슴앓이,

우산 버리고

하늘이 뚝뚝 떨어지는 나무 아래 서서

온 세상 넘치는 그리움으로 무장하고 싶습니다.

(2009.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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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창곡에 어린 추억들

지난 주에는 써야 할 것이 얼마나 많았던지 정신을 차릴 사이가 없었다.

그 중에 하나, 노동자 역사 <한내>(http://www.hannae.org)에 보낸 것을 여기 올려둔다.

실은 시간에 쫓겨서 오래 전에 썼던 것에 살을 좀 붙였다. 암튼...

 

 

[내가 살아온 길]

 

 애창곡에 어린 추억들


대학교에 꼭 가야 하나, 하는 사치스런 생각에 빠져 살던 사춘기 시절을 보내기도 했지만 그 시절에 나는 대학생활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곤 전혀 없었다. 지방 도시에까지 대학생 시위대가 거리를 휩쓸던 시기, 우리 고등학생들 사이에도 독재정권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대화가 끼어들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평생 하는 줄 알았던 대통령이 총 맞아 죽었고,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나의 20대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음악시간에 가창력 시험 칠 때 말고는 남들 노래할 때 입만 벙긋거렸던 나에게 노래가 일상의 한 부분으로 다가왔다. 운동가, 민중가요, 노동가요, 그런 이름으로. 그리고 그것들은 실제로 나의 인생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지난 30여년간 내가 불렀던 애창곡(?)들을 되새기면서 내 살아온 내력을 슬쩍 훑어본다.


내가 대학교에 들어갔을 때 자연스럽게 듣고 불렀던 운동가는 「아침이슬」, 「흔들리지 않게」, 「정의가」정도였고, 개사곡이 몇 개인가 더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노래실력은 그야말로 음치 수준이기는 했지만, 나는 집회에서나 술집에서나 어깨를 걸고 함께 부르는 「아침이슬」같은 노래들의 맛에 흠뻑 빠져들었고, 술 마시고 돌아가는 길에서 혼자서도 목청껏 불러젖히곤 했다. "정의와 용기는 젊음의 생명 승리의 깃발은 높이 솟았다...", 이렇게 시작하던 「정의가」는 그 시절에 내가 열린 공간에서 주먹을 내지르며 곧잘 부르던 노래였다. 그렇지만 동아리에서 수련회를 가거나 조용한 모임에서는 뒤늦게 김민기, 양희은, 한대수의 노래들을 하나씩 알게 되었다. 「금관의 예수」, 「가뭄」, 「강변에서」, 「기지촌」, 「친구」, 「작은 연못」, 「바다」와 같은 김민기의 노래들은 아직도 가사를 대부분 기억하고, 운전을 하다가 졸릴 때 이따금씩 부르는 노래들이다.


무리들 속에 파묻혀 조용히 지내던 내가 공식적으로 사람들 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농민가」를 통해서였다. "삼천만 잠들었을 때 우리는 깨어 배달의 농사형제 울부짖던 날..."을 부르면서 나는 연극반에서 배운 사박자 춤을 단과대학 체육대회에서 선보였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 이후 자주 사람들 앞에 나서게 되었다. 나를 아는 동지들은 도저히 믿지 못하겠지만, 판소리에서 유래한 「농부가」를 다른 단과대의 신입생들에게까지 가르치기도 했고, 일주일에 한 번씩 수업 후에 동급생들을 불러 모아 민요를 부르는 시간을 마련하기도 했다. 내가 아무리 노래를 못해도 제자(^^)들은 훌륭하게 잘 소화했기에, 나중에는 장단만 쳐주는 것으로 내 역할을 정리할 수 있었다. 「농민가」와 「농부가」는 나를 사람들과 호흡하게 해준 노래들이었고, 요즘도 거나한 술자리에서는 한 번씩 부르기도 한다. 농촌활동을 가서도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는 무기 중의 하나가 내 막걸리 실력이요, 그 다음이 이들 두 노래였다.


내 기억으로는 82-84년 사이에 학교에서 부르는 노래들이 무척 다양해졌다. 광주항쟁에서 비롯된「임을 위한 행진곡」이 바로 이 시기에 집회에 등장했고, 「광야에서」, 「불나비」,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단결하세」, 「선봉에 서서」를 기억한다. 그리고 샹송의 곡에 가사를 붙인「오월의 노래」도 해마다 5월이면 불끈불끈 불렀던 노래들이었다.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는 젊은 내 가슴을 분노로 들끓게 하기에 충분했다. 도서관 난관에 밧줄을 타고 올라가 시위를 이끌다가 떨어져 죽기도 하고, 날마다 수천의 학생들이 도서관 앞 광장에 모여서 군사독재정권에 항거하던 때, 학교측은 도서관 창밖에는 쇠창살을 치고 잔디광장에는 수백 포기 가시 돋힌 장미나무를 심음으로써 집회를 효과적으로 막으려 했다. 어느 봄이었던가, 독재 타도와 졸업정원제 폐지를 외치던 집회 대오들은 한순간에 잔디광장을 채우고 있던 장미나무들을 모두 뽑아버렸는데, 그 사건 이후 내가 이따금 불렀던 노래가 있다. "장미꽃 만발한 아크로폴리스, 쇠창살 둘러친 면학의 도서관, 붉은 넋 쓰러져간 그 때 그 자리, 피 흘리던 그 목소리 벌써 잊었나, 학우여 들리는가......".


이른바 아크로폴리스는 어떤 대학을 상징하는 것이었고, 조합원으로서 활동을 막 시작했던 90년대 초반에도 가끔씩 옛 생각에 젖어 술자리에서 그 노래를 부르곤 했다. 그러다가 한 번 호된 질책을 겸한 조언을 들었다. “동지에게서는 아직도 그 대학의 냄새가 나, 노동자 냄새가 안 나고 말이야!” 술이 확 깨는 듯했다. 노동자로 살겠다고 발버둥치는데 아직도 출신 대학의 냄새나 풍기고 다니다니, 그 날 이후 아무리 취했어도 다시는 그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그 대신에 진짜 노동자들의 투쟁을 얘기하는 노래를 불렀다. 80년대 중반까지는 학생들이 자신들이 부르던 노래를 노동자에게 배급했다면, 87년 이후에는 노동자들의 노래가 학내로 마구 유입되기 시작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통하여 바야흐로 노동자들이 우리 사회 변혁운동의 중심에 서기 시작했다는 증거이다. 89년에 직장에 들어와서 조합원이 되자마자 잘 불렀던 노래가 「파업가」와 「전노협진군가」이다. 전노협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 알기도 전에 「전노협진군가」를 통해서 나는 노동해방의 길로 달려가는 노동자 군대의 위용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사랑한다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동지들이여 우리들의 결사투쟁은 이다지도 끝이 없구나"로 시작하던 「골리앗의 그림자」가 내 30대 초반에 가장 열심히 불렀던 노래였다. 집 어귀에 들어서면 아내뿐만 아니라 온 동네 사람들이 노래 소리만 듣고 내가 오는 것을 알아챘을 정도로, 엉망으로 취한 날이면 꼭 이 노래를 불렀다. 그만큼 노동조합에 대한 열정과 연대에 대한 갈망이 아직 젊었던 내 가슴을 채우고 있었고, 나는 평생을 투쟁하며 살리라 생각했다. 90년대 들어서서 영화 <파업전야>의 감동은 「철의 노동자」를 급속히 전파했고, 그 후로도 참 많은 노래들이 쏟아져나왔다. 그러나 90년대 중반 이후 어디서나 부르던 우리들의 투쟁노래들은 노래방과 단란주점으로 포위되고 급기야 투항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제부터였나, 우리는 노래를 부르지 않게 되었다. 우리가 부르던 노래들이 휘황한 조명을 받으며 무대에서 공연되면 박수치며 감상하기 시작했다. TV에는 나오지 않아도 투쟁현장에는 어디나 온다는 노래활동가 동지들이 투쟁사업장에 왔을 때 노래를 따라 부르기보다는 박수치고 환호하기에 바쁘다. 투쟁가 한 가락이라도 가사를 보지 않고 부르는 동지들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반면에 술자리에서나 수련회 뒷풀이에서 개인적인 푸념이나 세상에 대한 원망들이 투쟁의 노래를 대신하여 여과없이 술술 흘러나온다.


좀 과장스럽기는 해도 20대 이후의 내 삶은 노래와 함께 흘러왔고, 그것은 곧 노동자 민중의 투쟁의 한 역사이기도 했다. 우리가 부르는 투쟁의 노래들도 다채롭고 풍성해지고 또 분화하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 내 삶에서 노래가 차지하는 자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은, 어쩌면 노동운동의 역동성이 퇴화되고 있다는 한 증거가 아닐까 생각한다. 세상을 단번에 바꾸는 혁명의 노래라고 해도 우리가 함께 부르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다시금 내 삶이 동지들과 함께 부르는 노래로 채워지기를 고대한다. "사랑을 하려거든 목숨 바쳐라 사랑은 그럴 때 아름다워라..."고 밤하늘의 정적을 깼던 그 옛날의 술판 하나가 불현듯 감동으로 되살아난다. (2009. 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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