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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4/29
    라일락(6)
    손을 내밀어 우리
  2. 2005/04/22
    뭐했지?
    손을 내밀어 우리
  3. 2005/04/21
    과학의 날에 반가운 선물 하나
    손을 내밀어 우리
  4. 2005/04/15
    보건의료노조에 보낼 공문 초안(7)
    손을 내밀어 우리
  5. 2005/04/13
    화환 대신에 쌀을!(7)
    손을 내밀어 우리
  6. 2005/04/07
    4월 4일에 찍은 사진들(5)
    손을 내밀어 우리
  7. 2005/04/06
    번개, 오버페이스, 외박, 그리고 체육행사(13)
    손을 내밀어 우리
  8. 2005/04/04
    월요일 아침, 고속버스를 타다(3)
    손을 내밀어 우리
  9. 2005/04/02
    [알림] 번개라면 번개(18)
    손을 내밀어 우리
  10. 2005/04/02
    토요일 근무(1)
    손을 내밀어 우리

받은 편지함 4963통

틈틈이 스팸메일을 지우긴 지우는데 지우는 속도보다 쌓이는 속도가 더 빠르다. 그래도 진보넷은 블로그나 미디어참세상에 들어오는 길에 꼭 메일함에 들러서 스팸메일을 지우고 나가니까 나은 편. 문제는 이런저런 메일을 모아 받는 통합메일시스템이다. 지난 여름까지 넷피스를 쓰다가 스팸메일 공세에 1만통 이상의 메일을 남긴 채 1GB를 제공한다는 파란닷컴 메일로 옮겼는데, 선거며 교섭이며 일정이 넘쳐서 여러 날을 건너뛰어 메일함을 열면 1천통은 거뜬히 넘어선다. 오늘도 사무실에 오자마자 진보넷의 스팸메일을 지우고 파란닷컴으로 들어갔더니 1,200여통의 새 메일이 왔고, 받은 편지함에 쌓인 메일이 4,963통이다.#$%%$^%%&&^*& 저 속에서 많으면 5%쯤 차지하고 있을 의미있는 메일들을 지금부터 사냥해야 하는 처지이다. 스팸메일에 비교적 너그러운 편이었는데 간장오타맨이 알려준 선더버드를 써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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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맹 선거 연설문 초안

* 이 글은 손을 내밀어 우리님의 [공공연맹 임원선거에 나간다] 에 관련된 글입니다. 

아침에

차분하게 다시 한번 써 보았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3-4분,

현장의 분위기에 따라

즉석에서 어떤 내용으로 바뀌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일단 준비는 끝난 셈이다.

오랜만에 고속버스를 타고 가면서

잠이나 자야겠다.

 

 



 

동지들, 안녕하십니까? 기호 2번 사무처장 후보 이성우입니다.


저는, 소위 먹물 꽤나 들고 가방 끈이 길다면 제법 긴 과학기술노동자입니다. 대학교 다닐 때는 결핵퇴치운동을 한다고 연극을 만들기도 했고, 연구소에 들어와서는 항암제 개발과 관련된 연구를 했습니다. 그러나 항암제보다는 이 사회에서 암적 존재가 되고 있는 추악한 자본과 부패한 권력에 맞서서 싸우는 것이 더 급한 일로 생각되어, 지금껏 10년 이상 노동조합 활동에 매달렸습니다. 대학교에서 배우고 연구실에서 익힌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저는 노동현장의 조합원 동지들에게서 배웠습니다. 감히 말씀드리자면, 제 인생에서 노동조합은 큰 스승이었고, 조합원 동지들은 언제나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과기노조 위원장을 세 번이나 했고, 공공연맹의 대전충남지역본부장을 맡아 지역의 크고 작은 투쟁사업장과 열악한 노조 결성의 현장을 지켰습니다. 민주노동당 대전시지부장과 유성구지구당 위원장을 맡아 총선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저는 많이 부족하고 동지들에게서 배워야 할 것이 많습니다. 사무처장 후보로 나서기까지는 많은 고민과 망설임이 있었습니다. 도대체 연맹의 사무처장으로서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저 자신에게 묻고 또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무엇보다도, 아래로부터 혁신하는 연맹과 사무처를 만들겠습니다. 현장의 요구를 잘 수렴하고, 실천으로써 조합원들에게 믿음을 주는 연맹 집행부가 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혁신을 주장하고 실천을 강조하는 것은 모든 후보들이 다 똑같은데, 당신에게는 그 약속을 이행할 특별한 무기라도 있냐고 저에게 물으신다면, 우선 지난 세월을 일관되게 살아온 제 인생 자체를 증거물로 바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10년 이상 쉴새없이 현장에서 배우고 익혔고,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함께 하면서 저 자신을 단련시켜 왔습니다. 선거운동을 하느라 서울과 대전을 오가면서, 저는 각 후보들의 공약과 정책자료집들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여기 그 책자들이 있습니다. 제가 사무처장이 된다면 해야 할 일들이 저희들의 약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후보들의 공약과 자료에도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료만 겉치레로 읽는 것이 아니라 정파와 노선의 차이를 뛰어넘어 모든 동지들의 의견을 하나같이 소중히 듣고 챙기는 사무처장이 되겠습니다.


그래도 부족한 저를 돕기 위해서, 몇 가지 무기가 제 몸의 일부가 되어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여기 소형녹음기가 있습니다. 이 속에는 술에 취해서도 담아낸 현장의 동지들의 비판과 욕설과 요구들이 간직되어 있습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리고 있는 약속들도 여기에 녹음되고 있습니다. 제 허리춤에는 디지털카메라가 있습니다. 유세 중에 처음 만난 동지들의 얼굴이 여기에 들어가 있고, 오며가며 집회현장의 목소리들이 여기에 동영상으로 보관됩니다. 이런 것들을 잠자기 전에, 기차와 버스를 타고 오고 갈 때, 다시 보고 들으면서, 동지들의 삶과 투쟁 자체를 곧 저의 것으로 소화할 것입니다.


동지들, 그래도 저에게 모자란 것이 있다면, 준비된 위원장 후보 양경규 동지와 연대와 실천의 모범 수석부위원장 후보 박정규 동지, 그리고 현장에서 다진 전문성과 투쟁성으로 무장한 6명의 부위원장 후보 동지들이 채워 주리라고 믿습니다. 민주노총에 거는 천오백만 노동자와 이 땅 민중들의 기대와 신뢰가 있고, 공공연맹 집행부에 바라는 10만 조합원의 희망어린 요구와 힘찬 함성이 있는 한, 저는 동지들을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현장의 조합원들을 대리하는 소중한 한 표 한 표를, 저희 2번 진영 후보들에게 던져 주십시오. 고맙습니다. (2004.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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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짧구나

아침 8시, ㅇ호텔 커피숍에서,

ㅍ연구원의 원장과 행정부장을 만났다.

만남을 애써 피해 왔었는데

발등의 불처럼 뜨거운 문제 하나 터지자

더 이상 피하기도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

시간을 다투는 문제이긴 하지만,

해법에 대해서는 서로가 의견을 충분히 나눈 셈이다.

쌍화차 한 잔 마셨다.

 

아침 9시, ㄱ연구원으로 가서

막 출근한 ㅈ원장을 만났다.

우리 노조 전 위원장 동지의 복직과 관련하여

(민사소송에서 이겼는데, 사측은 항소할 움직임이 있다)

당연면직규정이 하나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데

기관장협의회장이기도 한 ㅈ원장이

시대착오적인 이 규정을 개정하는데 앞장서 달라고,

그래서 장 위원장의 복직결정을 놓고

여기저기 눈치를 보고 있는

KINS ㅇ원장의 짐을 덜어달라고 부탁했다.

말은 흔쾌했지만 어떻게 했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ㄱ연구원에서,

아침 9시 30분부터 기관장들의 회의가 있었다.

 

10시 50분부터 12시 10분쯤까지

과학기술혁신본부장 일행과

우리 노조 간부들 열두어명이 간담회를 가졌다.

과학기술행정체계 개편, 연구회/출연연 혁신,

과학기술인공제회, 해고자 문제,

기관장 선임의 민주성 확보, PBS 등등

다양한 질문이 쏟아졌고

혁신본부장의 대답은 비교적 꼼꼼하고 성실했다.

좀 더 토론이 필요한 혁신에 관한 문제는

시간을 충분히 갖고 만나서 얘기해 보자고 했고

본부장은 기꺼이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노동조합의 치밀한 준비가 요구된다.

 

점심을 먹고

오늘 나에게 주어진 몫의 선거운동을 했다.

전화, 그리고 방문.

 

오후 3시부터

KAIST노조의 창립 17주년 기념행사가 있었다.

러플린 총장과 신 부총장이 참석한 것이 이채로왔다.

해고자 복직과 비정규직에 대한 문제의식 확산을 강조하면서

연대사를 했고,

최도은 동지의 언제나 힘차고 당당한 노랫가락을 듣고 나서

허기진 듯 떡 몇 개 집어 먹었다.

 

6시 직전에 마지막 선거운동랍시고

한 여성대의원에게 전화를 걸었고(여성에게는 처음이다),

곧바로, 요즘 익숙해진 KTX를 타고 서울로 간다.

 

선거대책본부가 있는 곳의 옆집은 중국집이다.

늦게 도착한 나는 혼자서 볶음밥을 먹었다.

다른 후보들 연설 준비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내가 좀처럼 하지 않던 '짓'을 한다.

유세용 원고를 쓴 것이다.

3-4분의 연설을 위해

하고 싶은 말들을 주르르 두들겨 쓰고는

1부 프린트했고, 파일은 저장해 두지 않았다.

내일 아침에 다시 한번 써 보고,

연설은 원고를 버리고 할 작정이다.

연설이 그다지 자신있는 것도 아니지만

원고는 자연스러움을 크게 해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연습하는 둥 마는 둥하다가

기차 시간을 핑계로 사무실을 벗어났다.

서울역에서 인터넷을 뒤지다가

한적한 기찻간에서 해묵은 메모들을 정리하다 보니 대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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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서울역에서...

저녁마다

서울에서 차시간에 쫓긴다.

 

오늘도 마지막 기차표를 끊어들고

100원에 3분짜리 공중전화 겸용 인터넷을 통해

동지들의 사는 모습들을 더듬는다.

 

내일 선거에서 당선이라도 되면

앞으로 2년 동안

이런 것이 내 일상이 될지도 모르겠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늘 같은 듯하면서도

흘러간 강물에 다시 발을 담글 수 없는 것처럼

날마다 다른 내 인생의 강이

오늘도 소리없이 나를 적신다.

 

시시각각

나인 듯 나 아닌 듯

지나는 모든 생명들이 분주하다.

 

차 타러 뛰어가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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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기평지부 임시투쟁본부 개소식 사진 2장

* 이 글은 산오리님의 [산기평 지부 투쟁본부 개소식...] 에 관련된 글입니다.

안형수 지부장, 그의 생애에서 가장 파란만장한 투쟁의 시기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미안하고 고맙고 존경스럽고 안쓰럽고...


 

 

산기평지부의 조합원들, 망명 지부사무실에서, 엎드려 절하며 무엇을 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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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선거를 통해 무엇이 바뀌겠느냐고 얘기들 하지만

그나마 선거가 아니었으면

말 끝마다 현장을 입에 달고 사는 후보들이

언제 전국의 다양하고 복잡하고 치열하고 처절하고 생생한 현장을

일일이 찾아다니겠느냐, 그 한가지만으로도

선거는 이따금 필요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서울지하철노조, 서울도시철도노조, 발전노조, 사회보험노조,

철도노조, 과기노조, 아시아나항공노조, 서울상의노조,

생산성본부노조, 경기도노조, 건설엔지니어링노조,

연구전문노조, 자동차운전학원노조, 서울도시가스노조,

부산교통공단노조...

해고자를 여럿 포함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번 연맹의 선거에 후보를 낸 조직들을 보니

자동차운전학원노조를 빼고 나면 영세한 사업장은 거의 없고

어떤 의미로든 잘 나가는 노동조합들이다.

그런 노조들의 지지와 지원 아래

19명의 후보들이 이 시간에도 전국을 누비면서

자신들이 미처 알지 못했던 투쟁의 현장을 새롭게 느끼고

그 투쟁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고 있다(고 믿는다).

160여개 노조 10만여명의 조합원들이 있다지만

연맹 중집위에 참가하고 있는 21개의 큰 노조에 속한

조합원숫자가 무려 8만명(후보들은 대체로 여기에 속함),

140여개 노조에 속한 2만여명의 조합원들은

장기악성투쟁사업장노조에 포함되지 않으면

평상시에 연맹의 사업에 참가하기가 결코 쉽지 않고(일상활동의 문제!),

선거는 어쨋거나 그들과의 중요한 소통의 마당이 될수밖에 없다.

간선제 선거라는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표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장과 연맹 중앙이 진정으로 하나가 되고

큰 노조 작은 노조 할 것없이 함께 싸울 수 있는

커다란 계기로 만들어주기를, 나와 후보들 모두에게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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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꿈에서 나는 새벽 4시에 약속이 잡혀 있었다. 그 시간에 맞추어 기차표를 예매해 두었는데 어디선가 '술라'가 나타나더니 버스를 타고 가자고 했다. 지금은 없어진 옛 무궁화열차를 예매했던지, 5명이 한 줄에 나란히 앉아서 갈 계획이 틀어졌다고, 속으로는 아쉬워하면서 '술라'에게 예매를 맡겼다. 그리고 시간이 지났고 우리는 기다리는데 '술라'가 나타나지 않았다. 연신 시계를 보면서 초초해하는데 누군가 약속시간이 5시 37분이라고 했고 아직 차 시간이 넉넉하게 남았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5시 37분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한번도 사지 않은 로또 복권을 생각했다. 신의 계시인 듯 구체적인 5개의 숫자가 나에게 주어졌는데, 잠이 깨자마자 증발해 버렸다. 로또는 6개의 숫자를 맞추어야 하는데, 112를 11과 2로 풀 것인지 1과 12로 풀것인지를 고민했던 기억은 남았다. 버스를 탔는지 기차를 탔는지 약속장소에 갔다. 거기는 술집이었다. 술집은 빼곡하게 손님들로 가득 찼다. 전화를 했다. 약속했던 곳은 그 술집이 아니라 외딴 오두막에 사는 어떤 여성 동지의 집이라고, '이광오' 국장이 알려주었다. 아까는 술라였고 왜 이번에는 이광오일까, 꿈 속에서도 나는 궁금해졌지만, 다음 장면으로 곧바로 넘어간다. 약속장소를 찾아서 헤매다가 다른 동지들을 만났다. 동지들과 축구를 한다. 내가 던져넣기를 해야 하는데 공을 머리뒤로 빠뜨렸다. 관중의 야유. 그러나 곧 가운데있던 우리 편에게 공이 건네지고 그 공은 단 한방에 골대 안으로 그림처럼 빨려들어갔다. 그 장면은 아직도 생생하다. 문지기는 골이 들어가고 나서야 공이 거기에 있는 것을 알아챈 듯 분주했다. 약속이 뭐였는지 모르겠다. 그 약속이 끝나면 만나자고 연락을 받은 기억이 난다. 그 시간이 새벽 6시인데 나는 또 그러겠다고 한다. 잠은 언제 자나 한탄하면서 나는 꿈 속에서 연신 약속을 하고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고 또 꿈속에서 꿈을 꾸고 고민을 하고 그랬다. 증발한 꿈의 기억들은 내가 그림을 잘 그렸으면 좀 더 생생하게 들려줄 수 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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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 말

최근에 내가 했던 말 중에서 지금 불쑥 기억난 내용들;

 

"노동자, 민중의 삶을 벼랑 끝으로 몰아가는 이 천박한 자본주의 나라에서

 노동조합은 저에게 큰 스승이었고 조합원 동지들은 언제나 희망이었습니다."

(지난 토요일, 선거용 1분 동영상 촬영할 때 내가 읊조렸던 첫 대사)

 

"내가 노동조합을 통하여 세상을 바꾸지는 못했을지라도,

 노동조합이 내 삶을 바꾼 것은 분명해요.  

 노동조합은 내 삶을, 그것이 없는 것보다  훨씬 건강하게 만들어 주었으니까요.

 만약에 노동조합이 아니었으면 내 인생은 크게 망가졌을 것 같아요.

 구태여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을 이럴 때 빌어온다면,

 노동조합이 내 삶을 바꾼 이상 저 편에 있는 세상의 모습도

 아주 쬐금 바꾸지 않았을까 싶기도 해요.

 하지만, 당대에 조바심을 낼 이유는 없지요, 뭐.

 길게 보면서 대체로 난 낙관해요."

(진보네트워크 6주년 행사에 갔다가 돌아오는데, 배모 동지가 물었다.

 노동운동을 하면서 세상을 얼마나 바꾼 것 같으냐고, 힘들지 않냐고?

 마침 고모 동지도 함께 있어서 우리 둘에게 동시에 던진 질문이었고,

 거기에 대한 내 답의 요지가 이랬음)

 

내가 했던 말을

나는 잊고 다른 사람이 기억해낼 때처럼

당황스럽고 미안하고 부끄러운 일이 또 있을까.

이따금 내가 한 얘기들을 되새겨보곤 하는 까닭이다.

글 또한 그렇겠지.

 

**

오늘 잠깐이나마 만난 분들;

진보넷 식구들, 블로거들, 여러 단체의 활동가들, 노동조합 간부와 조합원들,

모두 반가웠습니다. 행복하고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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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고 실없는 얘기 한 편

<네트워커>에 보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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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골치 아픈 투정 좀 해야겠다. 이른바 이공계 기피라는 것이 현실로 드러나기 전에도 과학기술계 정부출연기관 종사자들은 ‘어려서 과학자 꿈 커서 보니 처량하다’는 따위의 구호를 들이밀며 처우에 불만을 토로하곤 했다. 노후보장에 관한 불만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는데, 그럴 때면 단골로 등장하는 것이 연금타령이다. 가방 끈이 길어도 한참 길고 평생 국가발전을 위해 헌신하는데 과학기술연금같은 것이 왜 없느냐 하는 말이렷다.

 

원성이 되풀이되자 10년 전쯤 과학기술처가 연금제도 도입을 검토했지만 문제가 만만치 않아 포기했던 일도 있다. 그 후에도 과학기술자들의 노후보장 문제가 빈번하게 등장하고 이공계 기피현상이 사회적 관심을 모으자, 2002년에 드디어 ‘과학기술인공제회법’이라는 것이 만들어졌고, 이어 과학기술인공제회가 출범하기에 이르렀다. 과학기술인공제회는 국민연금에 묶인 출연기관 종사자들의 노후소득을 사학연금 가입자와 비슷한 수준으로 만들기 위해 개인이 부담하는 퇴직금(연급여의 1/12, 약 8.3%)과 사용자가 부담하는 연급여의 5%, 그리고 정부가 추가로 부담하는 연급여의 2.7%의 보험료를 재원으로 하여 연금(퇴직공제)사업을 설계했다.

 

정부가 공제회 사업을 자랑삼아 떠들어대자 사람들은 막연한 기대에 들뜨기도 했는데, 내용을 들여다보니 그야말로 빛 좋은 개살구였다. 다른 공제회에 정부예산을 지원한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2.7%의 정부 부담분은 일찌감치 날아갔다. 국민연금, 의료보험 등 갖가지 법정부담금에 시달려온 사용자들에게 5%의 추가 부담분은 자칫 임금인상분에서 빼내야 할 판이니, 노후를 대비한답시고 오히려 실질임금이 깎이게 생겼다. 게다가, 운용실적에 따라 퇴직급여가 연동되는 확정갹출형이라, 이래저래 남는 게 없는 장사가 될게 뻔했다.

 

이렇듯 돈도 부족하고, 제도 자체도 부실하니 그냥 없던 일로 하면 될 것 같지만, 그게 또 간단치 않다. IMF 환란을 빌미로 퇴직금누진제까지 폐지한 이후 더욱 불안해진 노후보장의 측면에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데 자기 퇴직금 8.3%에 사용자가 5%의 덤(?)을 얹어준다니 좋아라 하는 입장, 일단 시작하면 정부가 어떻게든 추가로 지원하지 않겠느냐는 기대, 무릇 모든 제도라는 것이 시행착오를 거쳐야 제대로 자리잡게 된다고 하는 언설까지 뒤섞이면서, 퇴직공제사업에 대한 반대를 피력해온 과기노조의 최근 입장도 “재원부족, 제도부실, 공제사업의 ‘졸속추진’을 반대한다”고 재정적 지원 확충과 제도적 보완에 다소 무게가 실려 발표되었다. 

 

이 땅의 어떤 노동자에게도 낭떠러지를 비켜가는 쉬운 길은 없다. 노동자, 서민에게 큰 힘이 되어야 할 국민연금이 표류하고 있는 상황에서, ‘노후소득 보장’이란 명분 아래 정부가 추진 중인 ‘기업연금제(퇴직연금제)’마저 그대로 도입되면 퇴직금 제도는 사실상 해체되고 영세 사업장과 비정규 노동자는 또 여지없이 소외될 것인즉, 노동자들이 끼리끼리 나뉘어 고민하지 말고 하나로 똘똘 뭉쳐 오늘의 삶이든 먼 미래의 전망이든 단번에 바꿔보자고 하면, 뜬금없고 실없는 얘기가 되나? 총투표로 총파업 결의는 했건만, 힘이 펄펄 넘치는 총파업은 여전히 미지수인 오늘! (2004.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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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전 흔적

지금은 거의 죽어버린 게시판에서

9년전에 과기노조 상근자로 처음 나설 때의 소감을

다시 찾아서 읽어본다.

내심으로는, 그리고 아내와 약속하기로도,

딱 1년만 일하고 실험실로 돌아가겠다는 것이었지만,

글 속에서는 '얼마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하고

마치 오늘의 나를 예고하고 있었던 듯도 하다.-_-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왔지만,

되돌아볼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은 행복하다(사치일까).

2000년 10월에 4대 위원장으로서 임기를 끝냈을 때도

이 글을 찾아읽으며 내 삶을 돌아다본 적이 있는데,

다시 이러고 있는 것은

지금도 분명 내 인생의 중요한 한 고비라는 것이겠지.

암튼, 

여전히 어리고 여리고 두려움이 많은 나,

처음의 그 마음을 기억하며

매사 의지로 낙관하면서 살아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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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결국, 과기노조 본부로 가다.
작성일  1995년 09월 12일 08시 43분 45초
 
오랜 번민과 갈등 끝에
얼마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실험실을 떠나 있기로 하였습니다.
서로 열심히 살자,
12년 선배이자 팀장이기도 한
이 박사는 그렇게 착잡한 표정으로
나를 놓아 주었습니다.
하긴, 더이상 잡고자 해 봤댔자
서로에게 더욱 힘든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연구자로서의 나의 꿈, 나의 장래는
일단 저만치 멀어져 간 셈입니다.
그저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언제나 변함없이 살아가는 것이
내 삶의 뜻이었다면
참으로 큰 변화와 시련을 동시에
나는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나는
일찍 실험실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실험실에서 하는 저마다의 일들이
참된 가치를 찾을 수 있도록 만들고 난 다음에야
적어도 그런 버팀목은 세우고 난 다음에야
누구든지 제자리에 돌아감이 불편하지 않고
누구든지 그의 복귀를 기꺼워할 것이니,
내가 즐겁게 돌아갈 날은 정말 언제일까요?
그 날이 어서 오기를
함께 빌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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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 관련글이 하나 달렸는데,

당시 참세상 대표로 있던 김아무개 동지의 것이다.

그는, 84년, 학도호국단을 해체하고 학생회를 부활시킨

공대의 주역 중의 하나였고, 그 때문에 제적되었지, 아마.

 

 

 



[바람] 다시 실험실에서...
작성일  1995년 09월 12일 11시 23분 34초
 
아마도 자연/공학계열을 전공한 사람들이 가지는 아련한 꿈하나가 있죠.
하얀 가운을 입고 무언가를 골똘히 연구하는 모습.저 또한 그런 생활이 좋아 공대
에 들어갔지만 지금은 이미 멀어져도 한참 멀어진 느낌입니다.

 

누가 저에게 전공이 무어냐고 물어봅니다.
그러면 제어계측이라고 하지요.
그러면 그사람왈.
"전공대로군요.."라고 현재 하는 일과 연관시키려 합니다.

 

그럴 때 저는 주장하지요. 학창시절 전공은 사회과학이라고. 현재 하는일은
사회주특기라고.사회에 나와서 배운 풍월이라고.

 

아마도 95년 하반기는 돌아갈 수도 있는 길을 포기한 해일 것입니다. 저에게.
쉽게 말하면 졸업할 수 있는 마지막기회를 포기한 것이죠. 포기를 자의반타의반
결정했을 때 무언가 아쉬움이 남더군요. 아마도 가문비님의 느낌이 저의 느낌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경우는 다르지만......

 

듣기에 상근자가 되신 것같은데.아무쪼록 좋은 성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대안의 작은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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