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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4/02
    눈, 돼지국밥, 회의, 다시 눈(1)
    손을 내밀어 우리
  2. 2005/04/01
    이번주 사건들(1) - 교통사고
    손을 내밀어 우리
  3. 2005/03/28
    결핵의 날을 지나며(7)
    손을 내밀어 우리
  4. 2005/03/23
    안녕히 가세요...(9)
    손을 내밀어 우리
  5. 2005/03/23
    스페어, 혹은 대타(5)
    손을 내밀어 우리
  6. 2005/03/21
    무념 무상(5)
    손을 내밀어 우리
  7. 2005/03/21
    대대 무산 이후, 이런저런 흔적...(3)
    손을 내밀어 우리
  8. 2005/03/17
    연대는 연대 그 자체가 궁극의 목표(2)
    손을 내밀어 우리
  9. 2005/03/16
    민주노총은 물리력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4)
    손을 내밀어 우리
  10. 2005/03/16
    제3의 대안?
    손을 내밀어 우리

선거 출마, 그리고 상처에 대한 생각

* 이 글은 손을 내밀어 우리님의 [공공연맹 임원선거에 나간다] 에 관련된 글입니다.

중앙위원회가 비교적 순탄하게 끝났다. 나의 선거출마에 관한 건은 찬성 18표, 반대 5표, 무효 1표로 가결되었다. 표로 나타나지 않는 동지들의 걱정어린 마음들은 앞으로 서로가 함께 감당해야 할 일이겠지. 예정에도 없이 출마한다고 하자 내가 좋아(존경)하고 나를 아끼는(아낀다고 믿는) 동지들이 저마다 진심으로 걱정어린 참견을 했다. -되더라도 동지가 받을 상처가 걱정이네요. -(런닝메이트들이) 만만치 않은 사람들인데 견딜 수 있겠어요? -동지가 갈 길이 그게 아닌데...답답합니다. -무조건 반대표 조직해서 낙선운동할 겁니다. -이건 배신이예요. 끝이라구요. -(이성우) 주변 사람들이 정말로 밉네요. -차라리 부위원장 정도 나가서 다음을 기약하는 게 어때요? -선거를 통해서 제대로 바뀌는 거 봤어요? -왜 희생양이 되려고 나섭니까? -지역에서도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도대체 왜 그래요? 그래, 아니나 다를까, 연맹의 게시판이나 우리 노조 게시판에 선거전이 시작하기도 전에 인신공격성의 글들이 등장했다. 2년 전에 한차례 겪은 일이라서 이젠 어느 정도 덤덤하다. 그러나 나를 실명으로 거론하는 글에 대해서는 언제라도 실명으로 차분하게 대응하리라고 나름대로 원칙을 세워두었다. 어느 동지가 내 게시판에다가, "얇디얇은 귓바퀴로 주워들은 풍문들을 마치 진실인 양, 자신의 판단인 양 치부하면서 그 모진 인연의 실타래를 악연의 연줄로 확대재생산한다." 고 그런 선거판 풍토를 안타까워하면서 최소한의 인간에 대한 예의를 주문했다.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같은 처지의 동지들을 위해 함께 같은 길을 걸어온 사람을 향해 어느 날 등 뒤에서 비수를 꽂을 때 우리는 망연자실 할 수밖에 없다." 그런가? 글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말과 행동으로 누군가에게 꽂았을지도 모르는 나의 가해행위는 어떻게 돌이켜 반성할 수 있을까. =상처 따위 =거뜬히 이겨넘어야 =세상 살아간다고 할 수 있겠지요 뭐... 그 동지에게 나는 이렇게 썼다. 아무도 정답을 가르쳐주지 않고 저마다의 판단과 때로는 욕심까지도 나(혹은 누군가)에게 퍼붓고 요구하는 상황에서 상처는 가해자의 치유될 수 없는 상처(의 흔적)일 뿐이지 이미 숱한 상처로 벼린 나에게 더 이상의 아픔은 아니다. (혹시 둔감할 뿐인가, 아니, 누구에게나 자신의 상처가 가장 아프다) 지난 7월에 썼던 "상처"라는 글을 다시 새겨 읽는다. =상처는 =언젠가 치유되고 잊혀지고 =이윽고 흔적도 남지 않지만 =상처 하나하나에 대하여 =100조개의 세포들이 뜻과 힘 모아 =처절하게 맞선 투쟁의 기록이 =곧 한 사람의 인생이요 =인간으로 세상을 견디는 힘의 근원이다. =무시로 되풀이되는 =이 가슴앓이. 노동조합 하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20년전 10년 전의 나를 알던 많은 동무들이 그렇게 여기는 것처럼 다시금 천진함과 동글동글함으로 단단히 무장을 하여 내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시뻘건 홍수를 받아들이는 바다와 같이 넉넉하고 의연하게 늘 활짝 웃으며 세상의 상처들을 안고 보듬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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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연맹 임원선거에 나간다

12월에 내가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갖는 선거가 무려 5개나 있다. 그 중에 어디에도 피선거권을 내세우지는 않겠다고 오래 전부터 굳게 맘먹었는데 예의 우유부단함에다가 장고 끝에 악수라는 말까지 떠올리면서 그 중에서 가장 모질고 힘든 선거에 후보로 나서게 되었다. 고민할 때야 아니야 아니야 도리질 했지만 일단 결론을 내린 바에야 모든 것은 오로지 나의 책임으로 맡겨질 일이다. 이런 나에 대해서 나 자신도 이따금 연민을 느끼는데 어쩌겠나, 80년 이후로 내 인생이 늘 그렇게 이어왔거늘. 그래 내 인생은 분명히 나의 것인데 자주 내 것이 아닌 듯 나조차 낯설다. 충고와 걱정과 비판을 아끼지 않은 동지들, 심지어 나로 인한 배신감에 입맛까지 잃었던 동지여, 부디 용서하소서. 앞으로의 나에 대해서도 더 크고 단호하게 꾸짖어 주소서. 참, 조금 있다가 낮 1시부터 우리 노조 중앙위원회가 있다. 여러가지 얘기들이 쏟아질텐데, 내 지금 심정을 급하게 글로 써 봤다.


공공연맹 임원선거에 출마하면서 중앙위원 동지들께 드리는 글 -변함없는 관심과 성원, 그리고 비판을 고맙고 달게 받겠습니다, 도와 주십시오!- 1993년 12월 출근길에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신 유전공학연구소노동조합 고 박성오 위원장 동지의 뒤를 이어 위원장 직무대행을 맡으면서 저의 인생역정도 크게 바뀌었습니다. 1994년 과기노조가 출범했을 때, 저는 비전임이었지만 본부의 정책위원장과 유전공학연구소지부장을 겸했고, 1995년 1월 과기노조 합법화 이후 최초의 쟁의를 승리로 마감하면서 연구활동과 노동조합 활동을 병행하겠다는 당초의 소신을 꺾고 노동조합 전임자로서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1995년 여름 지부장 임기를 끝내고 다시 실험실로 돌아가려 했을 때, PBS는 일단 막고 봐야겠다고, 1년만 본부 전임을 하겠다고, 지부장 출신으로서는 최초의 본부 상근국장으로서 본부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벌써 9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세월 동안에 유전공학연구소지부장, 과기노조 초대 정책위원장, 과기노조 2대 조직쟁의국장, 과기노조 3-4대 위원장, 공익노련 부위원장, 공공연맹 대전충남지역본부장, 민주노동당 유성구지구당 위원장, 민주노동당 대전광역시지부장, 민주노동당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후보(유성구), 그리고 현재 과기노조 6대 위원장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저로서는 벅찬 직책과 역할을 맡아서 달려 왔습니다. 저에게 그러한 역할을 맡겼던 조합원들과 간부 동지들의 여망에 충분히 부응했느냐 하고 누가 물으신다면 여전히 부끄럽고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그러나 동지들의 뜻을 거슬러 일을 도모하고자 한 적은 없었으며, 한편으로는 조합원들의 뜻에 따라 개인적으로는 꿈도 꾸지 않았던 총선 출마까지 하기도 했습니다. 2000년 총선 출마는 제 삶의 전망과 진로에 크게 영향을 끼친 사건 중의 하나입니다. 조합원들과 지역 유권자들 앞에서 저는 이 땅의 진보와 노동자·서민이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싸우겠다고 큰소리쳤습니다. 지난 4월의 제17대 총선을 앞두고 출마 여부를 놓고 고심하면서 많은 동지들의 다양하고 진지한 의견들을 들으면서 제가 크게 고민했던 것은 2000년의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과기노조 내부 조직을 추스르는 것을 우선적인 임무로 생각하고 당 활동은 좀 더 장기적인 숙제로 남겨야 하겠다고 판단하고, 결국 제17대 총선 출마는 포기했습니다만, 과학기술운동과 지역운동, 노동운동의 현장에서 헌신과 열정으로 작은 성과들을 이루어내고 그 토대 위에서 지역에 기반하는 진보정치의 모범을 만들겠다는 저의 계획은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그런데 돌연 공공연맹 임원선거에 출마한다니요? 격려의 말씀을 보내시는 한편에서 저에 대한 애정을 아끼지 않는 여러 동지들의 항의와 비판이 이어졌습니다. 저에 대한 걱정에서 비롯된 것이든 과기노조와 공공연맹에 대한 우려에서 출발한 것이든, 안팎에서 저에게로 몰려든 사려깊은 의견과 질타에 대해서 참으로 고마운 마음으로 경청했습니다. 그 마음 너무도 잘 아는 저로서는, 지난 2월에 있었던 총선 출마와 관련한 고민보다도 더 큰 갈등과 번민으로 괴로웠습니다. 저에게 쏟아지는 갖가지 기대와 요구들을 한꺼번에 충족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결국에는 제가 계획하고 꿈꾸던 일과 저에 대한 동지들의 기대와 요구와 비판에 부응하는 일, 그리고 저의 공공연맹 임원선거 출마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로 만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당장에 과기노조 위원장직을 끝내고 나서 하고자 했던 저의 계획은 다소 차질이 생기겠지만, 진보정당으로서 민주노동당이 노동자중심성을 견지하고 연맹과 총연맹이 한국사회의 천박한 자본주의를 뛰어넘어 노동자계급의 전망을 새롭게 하는 단결된 힘을 갖추는데 누구든지 뛰어들어야 한다면, 제가 개인적인 어려움을 들어 피해갈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노동자로서의 지난 세월을 저는 그런 마음으로 살아왔습니다. 중앙위원 동지들, 그 동안 동지들의 활발한 의견들을 들으면서 무척 고마웠고 한편으로는 심란하고 고통스러웠습니다. 당선이 된다면 가야할 길은 더욱 힘들고 고통스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떨치고 더욱 새로운 마음을 가다듬어 지금보다 더 험한 길일망정 마다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혀 보겠습니다. 도와 주십시오. 지지하고 격려해 주십시오. 신명을 바치고 열정을 다해서 온몸으로 뛰겠습니다. 그러나 예기치 않게 동지들을 실망시키는 일이 있다면 언제라도 가차없이 비판해 주시고 혹여 저의 처신이 과기노조와 4천여 조합원들을 욕되게 했을 때는 즉각 소환해 주십시오. 지난 10년처럼 앞으로도 저는 과기노조 조합원임을 감사하며 한결같이 노동자로서의 삶을 살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2004년 11월 23일 이 성 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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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모습

자정이 지나서

지역의 동지들이 전화를 했다.

함께 나눌 고민거리가 있으니

아파트 앞으로 나오라고.

"벤처의 꿈"에 가 있으라고 했다.

(두어 시간 전에

 노회찬 의원이 충남대 강연을 마치고 뒷풀이를 했던 곳인데,

 이미 당원 동지들은 모두 떠났다는 얘기를 뒤늦게 듣기는 했다)

 

가서 여러 동지들의 고민을 듣고

어느 정도 해결도 되었는데,

또다른 곳에서 전화가 왔다.

우리 노동조합의 비교적 젊은 활동가 동지들이다.

신성동에 있으니 오란다.

어은동에서 아직 얘기가 끝나지 않았으니 오라고 했다.

 

새벽 1시가 훨씬 지나서

신성동에 있던 동지들이 왔다.

술 제법 마신 지역 동지들은 이윽고 가고

새로 합류한 동지들과 술을 마시면서

내 거취 문제에 대한 깊고 강한 비판과 걱정들을 듣는다.

 

그 마음 내 모르랴.

하나도 반박할 얘기가 없다.

자세한 것은 또다른 기회가 주어지면 쓰기로 하고,

새벽 3시가 지난 밤 거리에

취한 동지들이 어깨를 걸고 앞서서 간다.

 

차를 몰고 조심스레 뒤따라 가는데

차창과 안개에 가려서

동지들의 모습이 흐릿하기는 하지만

나로 하여 여러날 쌓인 체증과 불만과 비판들로

휘청거리며 걷는 모습이

아프고

고맙고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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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 불감증의 시대를 뛰어넘어라

* 이 글은 산오리님의 [무디어져 가는 인간성 - 자극에 대한 면역] 에 관련된 글입니다.


노동조합이 대자보 하나만 붙여도 통하던 때가 있었다.
야간농성만 들어가도 사용자가 벌벌 떨던 시절이 있었
다. 이제는 아득한 옛날 얘기처럼 느껴진다. 90년대
초반만 해도 참 낯설게만 느껴졌던 삭발, 단식, 천막
투쟁, 거기다가 점거투쟁까지가 우리 투쟁사업의 일상
적 메뉴들이 되어버렸다. 자극이 되풀이되면 그것에
반응하여 어떤 행동을 이끌어내는 역치도 비례하여 상
승하는 법,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하고 있는 노동자에
게 배고프지 않느냐는 상식이하의 언행을 하는 사용자
까지 생겨났고, 급기야 사용자도 아닌 학생들이 노동
자들의 투쟁천막을 철거하는 엽기(?)적인 사건까지 생
겼다. 바야흐로 불감증의 시대, 더욱 새로운 충격요
법과 더 큰 자극제들이 아니고서는 어떠한 성취도 용
인하지 않겠다는 것이 천민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온갖 부패와 타락상을 짬뽕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모습
이다. 이러한 때에 우리 노동자·민중은 어떻게 살 것
인가. 세태에 덩달아서, 동지들의 고통 따위야 내 것
이 아닌 것으로 치고, 일상적 연대는 원론적수준의 술
안줏감으로 내던질 것인가, 아니면 엄동의 추위에도
견디며 이 세상을 따스하게 덮을 수 있는 크고 두꺼운
투쟁의 이불 하나 함께 만들겠는가. 올해 들어 가장
춥다는 날에, 정부의 강압적 구조조정과 시설 부문 사
유화·정리해고 기도에 맞서, 석 달 가까이 천막투쟁,
삭발단식투쟁, 파업투쟁을 벌이고 있는, 한국과학기술
원(KAIST) 조합원 동지들을 생각하며, 가슴이 실로 아
리다. (2000.12.26)

 

-어제 아침, 그 KAIST 파업으로 인한 업무방해 혐의로

 금고형(집행유예)이 확정되어 해고(당연면직)되었던

 우리 노조 장순식 전위원장에 대한 해고무효확인

 민사소송 1심 선고공판에서 이겼다. 그 소식을 들은

 직후 머리를 깎으면서, 옛 투쟁의 기억들이 주마등

 처럼 스쳐갔다.

 

-지금 대구로 간다. 쓰고 싶은 말을, 쓸 시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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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진도 올려 볼까?

* 이 글은 손을 내밀어 우리님의 [축사 또는 길눈이 말씀]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임원회의 끝나고 다들 사무실에 모여 있는데

창원이고 서울이고 먼길 가셔야 할 동지들이

느긋하게 정담을 나누거나 바둑을 두고 있다.

 

잠깐 틈을 내서,

날세동에게서 오늘 받은 사진 중에 두 장을 가려뽑는다.

 

하나는, 11월 7일, 길눈이 말씀을 하고 있는 나-

 

다른 하나는, 14일 노동자대회 끝무렵, 종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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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 얽힌 옛이야기(1)

* 이 글은 행인님의 [취했을 때는 지하철 타지 않기]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1.
몇번이나 써먹었던 얘기인데, 난 옛날 옛적 예비고사와 본고사를 거친 마지막 세대이다. 1979년 10월 26일에 박정희가 총 맞았다고 했을 때 우리는 11월 7일로 예정된 예비고사가 혹여 늦추어지지 않을까 하는 은근한 기대를 하기까지 했다.(젠장, 시험날이 연기되는 것은 그 다음해 대학교에 와서야 처음 경험했지. 5월 17일부터 휴교를 해서는 9월 12일인엔가 13일에 1학기를 연장해서 시작했고, 9월 하순에야 1학기말 시험을 봤으니까)

 

본고사 날짜가 1월 16일쯤이었던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암튼 예비고사를 끝낸 이후 그 결전의 날을 앞둔 두달여 동안에 나는 독서실에서 주로 머물렀다. 그러다가 좀이 쑤시면 몇 친구들과 어울려 하룻저녁 술을 마시는 것으로 갇힌 수험생의 스트레스르 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본고사를 아마 1-2주일 남겼던 날이었는데, 하룻밤 친구집에서 거나하게 술마시고 다음 날 아침에 갔더니, 독서실이 텅 비어 있었다. 사람만이 아니라 책상이며 각종 시설물들이 몽땅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 황당함이라니. 곧바로 수소문을 해보았더니, 그 독서실은 전날에 이사를 했고, 우리만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그 당시 본고사 준비하면서 가장 신경을 썼던 것이 수학이었는데 아마 1천페이지를 넘어갔던 해법수학II를 포함한 몇 권의 수험용 교재들을 그 바람에 몽땅 잃어버렸다. 감히 새로 살 엄두도 내지 못하고 다른 책으로 공부했다. 고3때, 교복을 입은 학생들에게 물컵에다가 한잔씩 소주를 덜어서 팔던 대구백화점 뒤 허름한 술집들이 아련한 풍경화로 남아있다.

 

2.



2.
대학교 1학년 때, 내가 주로 움직이던 공간은 명동 카톨릭회관(동아리 모임장소)과 혜화동, 이대입구, 그리고 신림동과 봉천동 사이였고, 142번 버스와 25번, 95번 버스가 그 공간들을 서로 연결해 주었다. 대학교 와서 새로 사귄 동아리 친구들은 전공은 다 달랐지만 술에 관한 한 거리낄 것이 없었던 지라 이내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오늘의 주인공들은 지금 부산에서 대학교 선생을 하고 있는 ㅊ, 대전의 어느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ㅈ, 그리고 현장에 투신했다가 제적된 후 옥살이까지 하고서 10여년 노동운동에 열심이다가 13년만에 다시 의과대학에 들어가서 늦깍이 의사가 된 ㅇ, 이렇게 3명이다.

 

주말 수련회(MT)에서 꼬박 밤샌 다음 날은 다들 피곤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었던지 평소의 나답지 않게 오전에 바로 학교 기숙사로 들어갔는데, 다른 멤버들은 아침에 새터에서 나와서 이대입구로 몰려가 술을 마셨다. 그 날 오후, 심심해진 나는 ㅊ의 방을 여러번 찾아갔는데, 밤이 이슥하도록 녀석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타 해서 다른 친구들을 찾았더니 모두 아무 일 없이 잘들 있었다. 이윽고 자정이 임박해서야 ㅊ은 기숙사로 돌아왔다. 야, 너 대체 어떻게 된 거고?

 

ㅊ의 사연은 이렇다. 아직도 해가 벌겋게 남은 대낮, 밤새 마신 술에 오전에 또 술을 마셨으니 얼콰하게 취했어. 일행과 헤어져서 곧바로 신림동으로 오는 142번 버스를 탔거든. 출입문쪽 맨 앞자리가 비었길래 그 자리에 앉았다 아이가. 몇번이나 우당탕쿵탕 버스 바닥으로 나딩굴어서 쪽 다 팔았다. 그러다 종점에 왔다길래 내려보니 수색이데. 다시 출발하는 버스를 탔어. 다시 종점이라고 해서 내렸더니 또 수색이더라. 아이고. 밤은 늦었고, 그래서 택시타고 왔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142번 버스는 노량진에서 신대방 삼거리, 신림동을 지나 서울대 정문에서 봉천동 고개를 넘고 상도터널을 지나서 수색 종점으로 가는데, 서소문으로 나와서 광화문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8자형 노선도를 버스 천장에 붙이고 다녔다. 수색 종점에서 나와 다시 돌아가는 시간은 대략 3시간 이상이니까, ㅊ은 적어도 6시간 이상을 버스에서 보낸 것이다.

 

다음 ㅈ과 ㅇ의 이야기. 둘이 어느 날 신촌에서 미팅을 한다고 일찌감치 학교를 나갔는데, 그 날 밤 둘 다 돌아오지 않았다. 그 때에도 세상 걱정은 혼자서 짊어졌던 나는 몇 번이나 그 친구들 방을 들락거렸다. 다음날 아침 식당에 가고 있는데 ㅈ이 저만치서 후줄그레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야, 무언 일이고?

 

그 당시만 해도 통금이라는 것이 있었다. 밤 12시 사이렌이 울리면 삼라만상이 정적에 파묻히고 그 정적을 깨뜨리는 것은 순찰을 도는 경찰들의 이따금 부는 호각소리 정도, 그 호각소리에 걸리면 즉결심판으로 넘어가서 벌금인지 과태료인지를 물어야 했다. 미팅(아, 미팅이라고 하고 보니 그냥 꼭 미팅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에서 만난 짝들과 어울려 신나라 하고 술을 마시던 이 친구들, 통금시간이 임박하자 서둘러 서울역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그리고 총알같이 달려서 전철승강장으로 갔는데, 다행히도 전철이 아직 남아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통금이 임박한 시간이라 인천행 전철은 러시아워를 방불할만큼 사람이 꽉찼는데, ㅈ만 타고 ㅇ이 타려는 순간에 그만 문이 닫혀버린 것이다. 의리의 사나이 ㅈ은 남영동에 내려서 고민했다. 이게 필시 막차인데, 저 친구를 혼자 남겨두어서는 안돼. 빨리 되돌아가서 ㅇ과 고락을 함께 해야겠다. 마침 서울역으로 가는 전철이 한대 남아 있었고, ㅈ은 급하게 서울역으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그 시간에 서울역에서는 마지막 전철이 남아있었고, ㅇ은 별다른 고민없이 노량진역에 내리면 ㅈ이 기다릴 것으로 생각하고, 그 막차를 탔다. 

 

지하 서울역에 내린 ㅈ은, ㅇ은 감쪽같이 사라졌지, 전철은 끊어졌지, 통금이 있으니 노숙자도 있을 수 없지, 택시비도 없지, 하릴없이 서울역 주변을 서성이다가 통금직전에 작심을 한다. 서울역 화장실에서 밤을 지내기로. 사람들 모두 사라지기를 기다려 남자화장실에 가서 문을 잠그고 쪼그리고 앉았다. 이윽고 불은 꺼지고 사람도 차도 다니지 못하는 새벽 4시까지 좌변기도 아닌 그 변기 옆에 앉아서 억지로 잠을 청한다. 새벽녘에 청소부들이 왔다 갔지만, 굳이 잠긴 문을 부수어 그를 발견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아침해가 뜰 때까지 그렇게 자다가 버스타고 기숙사로 들어오다가 우리를 만난 것이다. 그런데, ㅇ은 안왔냐?

 

ㅇ은 그 날 오후가 되어서야 어떤 아저씨와 함께 나타났다. 막차를 타고 혼자서 노량진역에 내린 그, ㅈ이 없다는 것을 거듭 확인하고 나서, 버스도 끊어진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는 노량진에서 상도동과 봉천동 고개를 넘어서 학교 기숙사까지 걸어가겠다고 결심한다. 쥐새끼도 얼씬하지 않는 밤길을 걷는데, 순찰차가 나타났다. 당신 누구야? 대학생인데요, 차가 끊겨서 기숙사까지 걸어서 가는 중입니다. 조심해서 가셔. 그런데 얼마 가지 못해 또다른 순찰차가 나타났다. 당신 누구야? 대학생인데요... 야, 대학생이면 다야? 빨리 타. 순찰차에 타서 영등포경찰서 유치장으로 직행했다. 거기에서 팔자 늘어지게 자고 나서 곧바로 즉결심판장으로 갔더니, 4천원,땅땅땅! 돈 한푼 없던 이 친구, 함께 즉결에 넘어간 어떤 아저씨에게 4천원을 빌어서 내고, 그 아저씨에게 돈 갚는다고 학교까지 함께 온 것이란다.

 

통금. 여기에 얽힌 사건들은 이 다음에 이어가자. 오타도 나중에 고쳐야겠다. 지금 갑자기, 너무 바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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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또 하루

늘 그렇고 그런 일정들,

심심풀이로 그냥 주절거려 본다.

 

<월요일 오전>

7시에 집을 나서려는데

요즘 귀가 성적이 시원치 않다고 아내가 타박을 한다.

무어라고 변명을 남기고 택시타러 서둘렀다.

월요일이라서 시내가 더 일찍 막히기 시작하니

7시 40분 창원행 버스를 타려던 계획을

7시 53분 밀양행 KTX로 한순간에 바꾸었다.

빠르다.

 

9시 20분쯤에 밀양역에 도착하니

창원행 시외버스가 기다리고 있길래 곧바로 탔다.

오전 10시가 조금 지났는데

창원역앞에서 버스를 내려

전기연구원지부 사무국장을 만나 기계연구원지부로 가고 있다.

 

10시 20분경부터 기계지부 창원 상집간부들을 만나

간담회를 겸한 교육 20분 남짓,

11시 10분경부터 전기지부 상집과 대의원들을 만나

또 20분 남짓 교육.

그리고 2004년도 단체협약 조인식이 이어졌다.

 

<월요일 오후>

단체협약 조인식 끝나고

노사가 함께 중국집에서 점심을 먹는다.

아침부터 서둘러서 진행했더니

하루 종일 걸렸어야 할 일정이 한나절에 끝났다.

 

목포에 가서

고 이용석 열사의 어머님의 빈소를 찾을까 생각했는데

너무 멀고 차편도 마땅치 않다.

 

곧바로 대구로 가기로 한다.

택시를 타고 창원역으로 부리나케 달려가니

곧바로 무궁화호 열차가 달려든다.

 

점심때 고량주 몇 잔 걸쳤더니

이내 잠이 쏟아지고 

1시간 40분쯤이 그냥 흘러갔다.

 

대구역에서

공중인터넷을 발견하고 몇가지 업무를 챙기다가

마중나온 패션센터지부장의 차를 타고

대구시청 앞 어떤 소담한 음식점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창원에서 미리 연락을 한 덕에

패션사무국장, 섬유개발연구원지부의 지부장과 사무국장도 곧 합석했다.

 

5시도 안되었는데

소주 몇잔 들이키면서 서로의 상황을 나눈다.

 

섬유개발연구원지부는

원장이 노조의 요구는 들어주겠다면서도

서명은 죽어도 못하겠다고 버티고 있단다.

노동자대회 끝나자마자

원장하고는 본교섭을 잡고

이사장하고는 면담일정을 잡자고 했다.

 

조합원들의 무관심에 힘이 쭉쭉 빠지는데다가

갖가지 스트레스에 몸까지 상하고 있다는

한 동지에게,

힘내자고, 의지로 낙관하자고, 말로만 위로를 바쳤다.

 

<월요일 밤>

사무처 동지가 집들이한다고 했다.

KTX를 타면 동대구에서 대전까지는 50분도 안걸린다.

대전역에서 진잠 근처 대정동 새 아파트까지는

좌석버스와 택시를 번갈아 타고 1시간이 훨씬 더 걸렸다.

 

늦게 도착해서 또 술이다.

소주 몇 잔 마시고 있으니

한 동지가 맥주잔에 소주를 한잔씩 섞어서 권한다.

시원스럽게 마시고 가볍게 놀다가

자정이 가까워지자 모두 헤어졌다.

 

대리운전을 부르던가

술을 깨고 나서 운전을 하든가

알아서 갈 길 잘도 챙기는데,

차 없이 하루 다니고 보니 역시 느긋하고 편하더라.

 

<화요일 오전>

어제,

동대구역에서 황남빵을 사왔더니

그게 모두에게 아침식사가 되더라.

 

밥 차리는 수고를 덜고, 피씨 앞에서 시간을 죽인다.

 

12시에 서울에서 건자재지부 천막투쟁 출정식이 있으니까

오늘은 서울행이다.

방송차에 다섯명이 타고서

익숙하게 고속도로를 달려간다, 나는 맨 뒷자리에서 잘 잤다.

 

<화요일 오후>

천막은 외양만 갖춰놓고

간부들과 조합원들 이삼십명 모여

출정식을 한다.

 

노동의례, 투쟁사에 투쟁사, 구호 몇 마디,

간단해서 좋다.

 

점심을 함께 먹고

예정된 임원회의를 하렸더니

2명의 임원이 결석이다, (술)병나고 연락못받고.

몇가지 확인만 하고 간단히 회의 마쳤다.

 

서울에서 저녁 9시에 모임 약속이 있는데

시간도 어지간하고 기분도 별로인데다가

대전에서 할일이 쌓여 있어서

모임에는 못가겠다고 연락하고

건자재지부의 교섭은 교섭위원들에게 맡겨둔채

대전으로 달린다.

 

벌써 5시가 다되었다,

간단한 서울 집회 하나 챙기고 와도

하루가 이렇게 그냥 지나가 버린다.

 

지구당 운영위원회에도 오라는 연락,

생일파티가 있으니 오라는 연락,

오늘은 어느 것도 기꺼이 응하지 못하고

미뤄둔 사적인 약속 하나 간신히 챙겼다.

 

<화요일 밤>

그냥 그렇게 흘렀다.

내일 일과를 훑어 본다.

 

오전 10시, 연맹 중집위 참석은

대전 일정을 이유로 수석부위원장께 부탁했다.

(수석은 건자재지부 천막에서 이 밤을 지새고 있다)

오후 2시에 과기정보연구원지부 교육이 있고,

오후 4시에 지질자원지부의 임금조인식 있고,

오후 5시에 항공지부의 임단협 조인식이 있고,

저녁에는 원자력지부 수석부지부장 부친상에도 가야 하고,

그렇게 그렇게 수요일도 갈 것이다.

 

참, 내일은 아내의 생일이다.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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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사 또는 길눈이 말씀

작년 5월에 난데없이 주례 한번 맡고 나서

너무 어리다고, 젊다고 타박을 많이 받아

섣부른 경거망동(?)을 삼가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전통혼례의 축사(길눈이 말씀)를 하라는

신랑신부의 청탁(!)을 결국 뿌리치지 못했다.

 

2004년 11월 7일 12시 30분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잔디밭

신랑 김동중

신부 권도경

 

일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맺어진 동지들이니

행복하게 잘 살 것이라 믿는다.

 



 

안녕하십니까?

저의 동료들이자 사랑스런 후배들인 신랑 김동중 동지와 신부 권도경 동지의 혼례를 축하하러 오신 분들께 우선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요즘 결혼식에서 주례사에 해당하는 이 길눈이 말씀은 저보다 좀 더 연륜이 쌓이고 경험도 많은 어른께서 하셔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신랑 신부와의 적지 않은 인연이 저를 끝내 이 자리에 서게 하였습니다. 이 자리에 오신 분들 모두 신랑과 신부에게 한마디씩 덕담을 선물하셨을 것입니다. 그 덕담 하나하나가 모두 제가 지금 드리는 말씀 이상으로 신랑 신부에 대한 애정과 격려가 실려 있습니다. 사진과 비디오 촬영이 그것을 모두 담아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신랑과 신부는 일생에 단 한번 두 사람의 삶에 모든 부모, 친지, 동료, 선후배 하객들의 염원이 집중되는 이 시간을 기억 속에 뚜렷하게 아로새겨 인생을 참되게 사는 힘으로 삼아주기를 바랍니다.

저는 신랑과 신부를 각각 훌륭한 동지로서 오래 전부터 만나 왔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사랑하는 마음이 일고, 그 마음이 기다림 속에서 저마다의 고통 속에서 입술이 마르고 애가 타고, 이윽고 젖은 장작이 서서히 불씨를 키우듯이, 이렇게 두 사람이 활활 타는 젊은 불꽃으로 만나서 부부의 연을 맺는 오늘까지 두 사람을 가까이에서 멀리에서 지켜봐 왔습니다.

사랑은 뜨거운 몸뚱아리를 아낌없이 던지는 것이요, 사랑은 거대한 불구덩이에도 망설이지 않고 뛰어드는 것이요, 그래서 바다와 같이 깊은 가슴으로 모든 것을 끌어안는 것이요, 하늘과 같이 넓은 마음으로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것이요,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가 되고 그래서 새로운 세계로 열리는 것이라고, 그렇게 저는 사랑을 노래한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랑은 부부사랑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함께 나누는 소망과 장래에 대한 공동체의 희망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나 그런 사랑의 마음이 넘치고 또 넘쳐야 한다는 것을, 그러한 사랑이 참으로 소중한 것이라고 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신랑과 신부는 그 동안 둘만의 사랑을 다지는 것 이상으로 이 나라 이 땅의 사람들을 위한 사랑의 약속을 함께 해왔습니다. 청첩장을 보신 분은 이미 느끼셨겠지만, 오늘의 신랑 신부가 참 자유 참 평등의 부부가 되기 위해서 나누었던 숱한 다짐과 약속, 진실로 이 사회의 진보를 갈구하고 그것을 위해 열심히 활동하고 싸우고자 하는 두 사람의 굳은 마음, 모든 사람들이 고루 함께 잘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어떠한 역경도 무릅쓰고야 말겠다는 두 사람의 각오, 그러한 소중한 것들을 우리 모두 오래도록 기억합시다. 그리고 혹시라도 신랑 신부가 힘겨워할 때 오늘까지 지녀왔던 관심과 애정으로 격려하도록 합시다.

이제 신랑 신부의 부모님께, 신랑 신부와 이 자리에 모인 모든 하객들을 대신하여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어머님, 아버님, 신랑 신부를 이토록 건강하게 키워 주시고 부부로 이어주신데 대해 엎드려 감사드립니다. 결혼은 단순히 두 사람만의 결합이 아니라 두 집안의 문화가 만나고 교류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신랑 신부가 보듬고 키워온 사랑이 두 집안이 오래도록 지녀온 전통과 풍습과 교훈들과 서로 잘 어우러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똑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님들께서도 익히 경험하셨듯이, 사회도 생물체처럼 변화하고 바뀌어갑니다. 삶의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는 이 부부가 스스로 새로운 전통과 풍습과 교훈의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두 집안의 친지분들과 함께 젊은 마음으로 도와 주시기를 바랍니다.

신랑과 신부는 이 사회의 극심한 분열과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고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 오기를 바랍니다. 어서 빨리 통일이 되어 겨레가 하나되기를 바랍니다. 노동자와 서민이 살맛나는 세상이 오기를 바랍니다. 부모님 그리고 하객 여러분, 신랑 신부가 바라는 세상은 우리가 함께 바라고 만들어야 할 세상 아니겠습니까?

신랑 신부가 지나온 세월, 부모님 품 안에서 놀던 코흘리개 어린 시절부터, 인연을 맺기 전에 따로 살아온 30년 세월은 말할 것 없고, 흙바람 부는 연구단지와 대화동의 저녁 거리와 막걸리잔 거나한 주막을 오가며, 힘찬 노랫가락에 신명으로 얼싸안았던 청춘의 모든 시기들, 그 만남의 또렷한 기억들, 그러면서 굳게 다진 사랑과 서로의 삶에 대한 약속들, 하나하나 새롭게 새기고 보듬어 가면서, 아무리 모진 일이 닥친다 하여도 오로지 처음 그 마음과 그 사랑으로 이겨 낼 수 있도록, 부모님과 가족 친지들, 그리고 이 자리에 모인 분들 모두, 이제 두 사람 함께 내딛는 걸음마다 우리 모두의 염원이 축복으로 그 위에 얹힐 수 있도록 힘찬 함성과 박수로 이 좋은 잔치마당에 함께 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2004.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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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오후

어느 지부가 요청한 성명서 한 시간이면 거뜬히 해치웠을 일인데 내 싫은 일은 남에게 맡기기도 싫어서 이 일과 저 핑계로 일주일을 버티다가 추어탕에 반주 한잔 걸친 낮에 그 지부 사무실에 직접 가서 식곤증에 시달리며 기어이 끝장을 봤다. 날마다 차로 쌩쌩 달리던 길을 나뭇잎들을 즈려 밟고 낙엽들을 비맞으며 유유자적 걸으니 남은 일들일랑 잊고 오늘 끝까지 걷고 싶다. 차분하게 생각할수록 헝클어지는 이즈음의 우리 동네 화두라는 것이 선거, 선거, 선거, 투쟁, 투쟁, 투쟁, 막다른 골목으로 쫓기는 쥐가 되어 사생결단 덤벼야 하는 일도 곱빼기가 있구나. 내 속한 투표구로 어서 가서 파업찬반투표부터 하고나 보자. 얼럴럴럴 상사디야, 둥 두둥 두둥 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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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캐이원'들이여, <합의회의>에서 배우라

<월간 네트워커> 11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 '구캐이원'들이여, <합의회의>에서 배우라 우연히 20년 전의 낡은 비망록을 뒤적이다가 어느 신문의 4컷 만화가 스크랩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1) 두 사람이 멱살잡이를 하면서 싸우고 있다, 2) 그 옆에서 두 신사가 드잡이를 하고 있다, 두 패가 서로 시선이 마주치자, 3) 두 신사 왈, “고만 두세. 시정배와 같아서야 되나”, 4) 첫 장면에서 싸우던 두 사람, “고만 두세. ‘구캐이원’과 닮아서야 쓰나”, 하고서 사이좋게 술집에 들어간다. 영락없이 요즘의 국회 모습 그대로이다. 지난 10월에 있었던 “전력정책의 미래에 대한 시민합의회의”에 관한 기사들을 뒤늦게 간추려 읽으면서 불현듯 국회를 떠올린 것은 그 4컷 만화 옆에 나란히 끼여 있었던 당시의 신문기사 탓인 듯하다. 80년 5월 이후 대학에서 집회나 시위를 주도했다가 1,427명이 제적되었다는 기사, 내가 알기로도 지금 권력의 핵심이나 여의도의 선량들 상당수가 그 당시 제적생들이었는데, 국회는 다시금 파행중이라니, 미워하면서 닮는다는 말을 이런데다 써도 되나. 어이, ‘구캐이원’ 나으리들, 놀지 말고 이리 와서 합의회의에나 참석해 보시오. 합의회의는 과학기술과 같이 주로 전문가의 판단에만 맡겨졌던 사회적 쟁점들에 대하여 일반 시민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고안된 제도이다. “전력정책의 미래에 대한 시민합의회의”에서는 원자력에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고 연령과 성, 직업, 거주지역 등이 서로 다른 평범한 16명의 시민들이 공개 모집으로 시민패널이 되었다. 이들은 정부(과기부, 산자부), 학계, 원자력산업계, 환경단체, 원전지역 주민을 대표하는 전문가들에게 강의를 듣고, 관련 내용에 대하여 토론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며, 중립적인 조정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3개월에 걸친 교육과 토론, 그리고 3박 4일의 합숙토론을 거쳐 합의된 시민패널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원자력 중심의 전력정책,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주제에 대한 보고서의 결론은 현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원자력발전소의 신규 건설을 중지하고 중장기적인 대안(신재생에너지에 대한 과감한 투자 등)을 마련하라는 것이었다. 원자력발전과 전력산업 전반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지 못한 일반 시민들이 모여, 충분하고 균형 잡힌 정보들이 제공되는 가운데, 자유로운 토론을 거쳐 내린 결론이 정부의 기존 정책을 통렬히 꾸짖는 것이라니, 우리 ‘구캐이원’ 나으리들, 이쯤에서 깊이 반성해야겠다.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30년 이상 지속되어 온 원자력 중심의 전력정책에 보통 시민 수준의 토론 한번 벌이지 못하고, 17년째 표류하고 있는 핵폐기물처리장 문제도 강 건너 불구경만 하고 있는지, 이번 합의회의를 보면서 좀 배울 일이다. 덴마크 등지에서는 의회에서 직접 합의회의를 주관하고, 의회와 정부가 합의회의에서 내린 결정을 최대한 존중한다는 것도 알아 두길 바란다. 끝으로 한마디, 이 땅의 어떤 더러운 이해관계에서도 자유롭지 않는 당신네 ‘구캐이원’들은 건강한 시민패널로는 아예 자격상실이라는 것. 그래도 더 알고 싶으면 인터넷 검색창에 “합의회의” 또는 “전력정책합의회의”라고 써 보실 것. (2004.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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