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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4/11/24
    Mrquez(마르쿠제)의 노벨상 수상 연설 전문(2)
    간장 오타맨...
  2. 2004/11/23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ㅈ
    간장 오타맨...
  3. 2004/11/22
    Belle & Sebastian - Marx And Engels
    간장 오타맨...
  4. 2004/11/22
    외롭지만 끈질긴 싸움 평택미군기지 이전 투쟁..
    간장 오타맨...
  5. 2004/11/22
    우린 같은 인간이고 노동자다
    간장 오타맨...

Mrquez(마르쿠제)의 노벨상 수상 연설 전문

  • 등록일
    2004/11/24 09:28
  • 수정일
    2004/11/24 09:28
마젤란과 함께 역사상 최초의 세계 일주 여행을 하였던 프로렌스 출신의 해양 탐험가 안토니오 피기페타는, 남아메리카 대륙을 지나가면서, 매우 정확한 기록을 남겨 놓았습니다. 마치 환상의 나라로 모험을 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는 기록이었습니다. 그는 허리에 배꼽이 달린 돼지, 수컷의 등에다 알을 낳는 발톱 없는 새, 숟가락처럼 생긴 부리를 한 혀 없는 펠리컨 비슷한 새 등 여러 진기한 동물을 보았다고 적었습니다. 그는 머리와 귀가 노새처럼 생기고, 몸통은 낙타 같고, 사슴의 다리를 하고, 말처럼 울음 소리를 내는 이상한 동물을 보았다고 기록했습니다. 파타고니아에서 처음 마주친 원주민에게 거울을 보여주자, 그 다혈질의 거인이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 무서워 어찌할 줄을 모르던 광경도 기술하였습니다.


서인도 제도의 연대기 작가들은 우리에게 무수히 많은 기록들을 남겨 주었니다. 우리가 그토록 탐욕스럽게 찾아 온 환영 속에 존재하는 땅 <엘 도라도>는 오랜 세월을 두고 많은 지도에 표시되었으며, 지도 제작자들이 상상하는 대로 그 위치와 형태가 바뀌곤 했습니다. 영원한 청춘의 샘을 찾아서, 신화적인 인물이 된 알바르 누녜스 까베사 데 바까는 8년에 걸쳐 멕시코의 북부 지역을 탐험하였습니다. 환상에 사로잡혀 길을 떠났던 그의 탐험대는 서로가 서로의 인육을 먹는 참상 속에서, 처음 여행을 떠난 6백 명의 인원 가운데 단 다섯 명만이 살아 돌아왔습니다. 그 시대의 수많은 미해결 된 미스테리 중의 한 가지는, 아따후알빠의 몸값을 치르기 위해 어느 날 꾸스꼬를 출발하였으나 결코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한 채 사라져 버린 황금의 행방이었습니다. 한 마리에 1백 파운드씩의 금을 실은 1만 1천 마리의 노새가 실종된 사건이었습니다. 그 뒤 식민지 시대의 카르떼헤나 데 인디아스 지역에서는, 사금 땅에서 키운 닭들의 모래 주머니 속에서 조그만 금덩어리들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한 개척자의 황금에 대한 탐욕이 최근까지도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지난 세기에, 파나마 지협을 가로지르는 대양(大洋)간의 철도 부설 가능성을 검토하기 위해 구성된 독일의 파견단은, 한 가지 조건 하에 계획이 실현 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즉 철도를 이 지역에 나지 않았던 철로 만들 것이 아니라 금으로 만들면 된다는 결론이었습니다. 스페인의 지배 하에서 독립한 이후에도 우리는 광기의 손길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세 번에 걸쳐 멕시코의 독재자로 군림하였던 안또니오 로뻬스 데산따나 장군은 소위 그가 <빵전쟁>에서 잃었던 오른쪽 다리를 위해 성대한 장례식을 거행하였습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모레노 장군은 16년간 전제군 주로서 에쿠아도르를 통치하였습니다. 그가 죽자, 완전무결한 정장에 온통 훈장을 한 겹이 덮이도록 장식하여, 시체를 대통령 의자에 안치시켜 놓았습니다. 막시밀리아노 에르난데스 마르띠네스 장군은 엘살바도르의 견신론(見神論)적 전제군주로서 3만 명의 농민의 목숨을 앗아간 야만적인 학살을 자행하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먹는 음식에 독이 들어 있는지 여부를 탐지하는 진자를 발명해 냈고, 전염병으로 번지는 성홍열을 퇴치하기 위해 가로등을 붉은 종이로 싸라고 명령했습니다. 떼구시갈빠의 중앙 광장에 서 있는 프란시스꼬 모라산 장군의 동상은 사실상 원래 네이 원수의 동상이던 것을 파리의 어느 중고품 조각 상점에서 사다 놓은 것입니다. 11년 전, 우리 시대의 가장 뛰어난 시인 중의 한 사람인 칠레의 빠블로 네루다는 이 자리의 청중들에게 새로운 인식을 일깨우는 연설을 한 바 있습니다. 그 이후, 선의를 가진 유럽 인들은―그리고 때로는 악의를 가진 사람들도―라틴 아메리카로부터 전해지는 섬뜩한 소식에 점점 더 큰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라틴 아메리카는 그 불굴의 완강함이 전설로 아련히 남아 있는, 역사를 사는 남녀의 광대한 활동 무대가 되어 왔습니다. 우리는 한 순간도 쉴 여유가 없었습니다.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대통령이, 불타는 그의 궁전에서, 전 군대에 맞서 홀로 싸우다가 외롭게 죽어 갔습니다. 아직도 설명되지 않은 두 차례의 의문의 비행기 사고가, 또 하나의 위대한 대통령과 그의 국민의 존엄성을 되찾아 준 한 민주적 군인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다섯 차례의 전쟁과 열 일곱 번의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신의 이름 아래, 라틴 아메리카 대륙에서 우리 시대 최초의 종족 살인을 자행한 악마적인 독재자가 등장하였습니다. 그 동안, 2천만의 라틴 아메리카 아이들이 한 살이 채 못 되어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1970년이래 유럽에서 태어난 아기의 수보다도 많은 숫자였습니다. 압제로 인하여 실종된 숫자도 12만 명에 이르는데, 이것은 웁살라의 온 주민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얘기나 같습니다. 임신 중에 체포된 많은 여인들이 아르헨티나의 감옥에서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그 아기들은 비밀리에 입양되거나 군 당국의 명령에 의해 고아원으로 보내어져 아무도 자기 자식의 행방도 신원도 알아낼 길을 모르는 형편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바꾸어 보려고 애썼다는 이유로, 전 대륙에 걸쳐 20만 명에 달하는 남자와 여자가 죽어야 했습니다. 중앙 아메리카의 불운한 세 나라―니카라구아, 엘살바도르, 과테말라―에서는 10만 명 이상이 죽어 갔습니다. 만일 이것이 미국에서 벌어진 상황이라면, 비율로 보아 4년간에 걸쳐 1백 60만의 인명이 폭력으로 쓰러졌다는 말과 같습니다. 손님을 환대하는 전통을 가진 나라인 칠레에서는 1백만 명이 그 나라를 등지고 떠났습니다. 인구의 10퍼센트가 망명길에 오른 것입니다. 대륙에서 가장 개화된 나라라고 자부하던, 인구 2백 5십만의 조그만 나라 우루과이는 국민 다섯 명 가운데 하나의 비율로 나라를 떠났습니다. 1979년이래 엘살바도르의 내란은 매20분마다 한 명씩의 비율로 피난민을 놓았습니다. 라틴 아메리카의 이 모든 망명자들과 강제 이민들을 모아 나라를 세운다면 노르웨이의 인구보다도 많은 인구를 갖게 될 것입니다. 본인은 스웨덴 문예 학술원의 관심을 이끈 것이, 단지 그 문학적 표현이 아니라 이 엄청난 현실이리라고 생각합니다. 종이 위의 현실이 아니라, 우리들 속에서 살고, 매 순간마다 매일처럼 죽어 가는 우리의 무수한 죽음을 결정짓고, 만족할 줄 모르는 창조성의 원천이 되는 현실입니다. 그것은 비애미에 넘치는 현실이며, 이 향수에 젖어 유랑하는 컬럼비아는 운명의 여신에 의해 혜택받은 그 속의 하나의 하찮은 존재에 불과합니다. 시인과 거지들, 음악가와 예언자들, 전사와 악당들, 이 억제할 수 없는 현실의 모든 존재들에게, 우리는 상상력을 발휘하라고 요구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중심적인 문제는, 우리 인생을 믿을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 줄 통례적인 수단을 갖추지 못함으로써 빚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친구들이여, 이것이 우리들의 고독의 본체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본질적으로 공유하는 이러한 어려움 들이 우리를 가로막는 것이라면, 스스로의 문명에 도취된 지구의 이편 유럽 인들의 합리적인 재능으로도 우리를 이해할 온당한 방도를 찾지 못하는 것이 수긍이 갑니다. 그들이 스스로를 측량하는 척도로서 우리를 측정하려 들고, 거친 인생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정도로 닥치는 것이 아님을 잊고, 우리 스스로의 주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이 그들만큼이나 열렬하고 피맺힌 것임을 망각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닌 틀에 끼워 맞춰 우리의 현실을 해석하려 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더욱더 미몽에 몰아 놓고, 자유를 상실케 하고, 고독하게 만들고 말 것입니다. 만일 그 자신의 과거에 비추어 우리를 보려고 한다면, 훌륭한 유럽 인들은 좀더 통찰력 있는 시각을 지닐 수 있을 것입니다. 런던이 최초의 성벽을 쌓는 데 3백 년이라는 세월이 흘러야 했고, 주교를 맞이해 들이는데 또다시 3백 년이 소요되었습니다. 에트루리아의 왕이 로마를 역사의 수레바퀴 위에 올려놓기까지 로마는 불확실성의 그늘 속에서 2천 년을 보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부드러운 치즈와 무감동한 시계를 제공해 주는 평화로운 스위스 인은, 16세기까지도 용병으로서 유럽을 피로 물들인 국민이었습니다. 르네상스의 절정기에도 신성 로마 제국 군대에서 돈을 받고 싸우는 용병들이 로마를 약탈하며 황폐화시키고, 8천 명의 주민을 칼로 베었습니다. 53년 전, 토마스 만은 이 자리에서 고결한 북부와 정열적인 남부를 통합하자고 한 토니오 크뢰거의 이상을 찬양했었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여기서 그런 환상을 실현하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본인은 보다 정의롭고 인간적인 조국을 이루기 위해 이곳에서도 투쟁하고 있는 명철한 유럽 인들이, 우리에 대한 시각을 다시 고쳐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훨씬 큰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세계적인 분배의 문제에 있어서 그들 자신의 삶의 몫을 누리고자 하는 환상을 품은 모든 국민들에게 정당한 지원을 보내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한, 우리의 꿈에 공감만 해 준다고 해서 우리가 덜 고독해 질 수는 없습니다. 라틴 아메리카는 스스로의 의지에 상관없이 부당한 저당물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며, 그럴 이유도 없습니다. 서구에서도 라틴 아메리카의 독립과 독창성을 절실히 열망해야 하리라는 덧없는 생각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간의 거리를 접혀 준 항해술의 발달과 더불어, 우리 사이의 문화적인 차이는 반대로 더욱더 멀게만 느껴지고 있습니다. 문학에서는 그처럼 환영받는 우리의 독창성이, 사회의 변화를 모색하는 또 다른 노력에서는 그처럼 불신을 받고 거부당해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어째서 진보적인 유럽 인들이 자신의 나라에서 모색하는 사회 정의가, 다른 상황에서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는 라틴 아메리카의 목표가 될 수 없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역사에 점철된 그 엄청난 폭력과 고통은, 오랜 세월 쌓여 온 불공평한 상황과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쓰라린 경험이 낳은 결과였습니다. 단 한번의 음모로 우리의 조국에 3천 개의 단체가 뿌리를 내렸을 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유럽의 많은 지도자들과 사상가들은 구식 인간형의 어리석음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그러한 착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럽이 젊은 시절에 경험했던 유익한 방종을 이제 잊어버리고, 마치 세계가 두 거대한 주인의 뜻에 따르는 이외에 다른 운명을 개척할 도리가 없다고 체념한 듯합니다. 나의 친구들이여, 이것이 우리가 겪어야 하는 크나큰 고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억압받고, 약탈당하고, 버림받는 처지에서 삶으로써 대응하고자 합니다. 홍수도, 전염병도, 기근도, 사회의 대격변도, 수 세기를 두고 그침 없이 계속되는 영원한 전쟁조차도 언제나 삶이 죽음을 능가하고 있는 현실을 뒤바꾸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삶의 폭은 점점 더 커지고 빨라져 왔습니다. 매년 사망자 수보다도 7천 4백만이 많은 새 생명이 태어나고 있습니다. 매년 뉴욕 인구의 일곱 배의 인구 증가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들 대부분이 물론 라틴 아메리카 제국을 포함하는 가장 자원이 빈약한 나라들에서 태어납니다. 반대로 가장 번영을 누리는 나라들은, 오늘날 존재하는 전 인류뿐 아니라, 이 불운한 행성에 태어났던 모든 생물체를 백 번은 몰살시킬 수 있을 파괴력을 축적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오늘과 같은 날, 나의 스승 윌리엄 포크너는 <나는 인류의 종말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바 있었습니다. 32년 전 그가 인정하기를 거부했던 엄청난 비극이, 이제 인류가 존재한 이래 처음으로, 확연한 과학적 가능성으로 닥쳐왔음을 본인이 인식하지 못한다면, 저는 지금 그가 섰던 이 자리에 설 자격을 갖지 못할 것입니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완전한 유토피아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했을 이 가공한 현실을 마주 대하여, 이야기를 지어내고 어떤 일이라도 믿을 줄 아는 우리는, 아직 현재의 세계와 상반되는 유토피아를 건설하기에 시기가 너무 늦은 것은 아니라고 믿을 권한이 있습니다. 아무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결정하지 못하고, 사랑은 진실이며, 행복은 손에 넣을 수 있는 실체가 되고, 1백 년 동안의 고독을 저주받 은 종족이 마침내 영원히 지구상에서 제 2의 기회를 누리게 될, 새롭고 완전한 삶의 이상향을 말입니다. ― 1982년 12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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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ㅈ

  • 등록일
    2004/11/23 21:50
  • 수정일
    2004/11/23 21:50
이 문자 참 쉽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렵게 느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 공부방 1학년 아이를 우연히 일을 갔다와 가르쳤습니다. 요즘 교육이 워낙 빨라 한글을 ㅤㄲㅒㅤ우치고 학교에 간다고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들도 있습니다. 교육은 상대적이라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사교육 열풍이 한반도 남단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고 하지만 돈이 없거나 그렇지 못한 처지에 있는 사교육 소외자들은 사교육 혜택을 받은 아이들 처럼 쉽게 교육의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는 것을 느껴보았고, 학교라는 공교육에서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를 이 오늘 가르친 아이를 보면서 느껴보았습니다.


아 한글 문자가 어려운 것이구나.... 외우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운것이 문자가 아니던가? 남들은 쉽다고 하지만 내가 가르친 아이는 한글을 접하면서 어떠한 생각을 가졌을까? 그런 아이에게 난 무엇을 가르쳐 줄 수 있을까? 쉽게 외우라고 말하지만 결코 쉽게 외워지지 않는 단어를 강요한 듯한 느낌이 들어 마음이 불편합니다. 말을 듣지 않아 엉덩이를 몇대 때린 것이 후회됩니다. 문자를 외우기 이전 이 아이에게 교육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가를 먼저 말해주어야 했거늘 그렇지 못하고 외 못외우니 그리고 소리 높여 읽어보라고 몇번 써보라고 말 한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내 욕심에선 글자를 알면 아 글자가 이렇게 아름답게 조화를 이룰 수 있구나 가르치고 싶지만 이는 내 욕심이 앞선 의욕입니다. 그래서 이 아이와 오늘 약속하나를 하였습니다. 하루에 한자 한자를 외워 일주일내에 ㄱ, ㄴ, ㄷ, ㄹ -----ㅎ까지 다 읽을 수 있게 함께 공부하자고, 세끼 손가락을 걸며, 엄지손가락 도장을 찍으며 약속했습니다. 한참 뛰어놀 아이를 붙잡아 놓는 것이 못내 미안하지만 그래도 한글을 깨우쳐야 한다는 생각에 이 약속을 일방적으로 감행하여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이 아이는 순서대로 ㄱ, ㄴ, ㄷ, ㄹ, ㅁ, ㅂ, ---- ㅎ 까지는 외우고 있으나 정작 문자 판독이 되지 않아 고전하고 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동화책이다 만화책이다 읽고 쓰고 그러는데 이 아이만 다른 아이들보다 뒤쳐져 있어 학교에 가는 것도 그리 달갑지 않은 것 같아 내가 얼떨결에 이 아이에게 한글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내가 가르치면 남들과 다를 줄 알았는데 저 또한 간사한 인간인지라 내 뜻대로 되지 않고 아이가 투정을 부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손이 볼기짝으로 향해 한 4개를 때렸습니다. 때린 것이 못내 미안하군요. 이 아이가 부디 이 입문과정에서 득도하여 한글의 아름다움 언어의 의미를 알아나갔으면 합니다. 잘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일을 거울 삼아 결코 손이 먼저 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겠습니다. 사랑으로 아이를 다스리지는 못하지만 아이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여 오늘 하루 내 행동을 반성해 봅니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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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lle & Sebastian - Marx And Engels

  • 등록일
    2004/11/22 15:46
  • 수정일
    2004/11/22 15:46

♪ Belle & Sebastian - Marx And Engels ♪


Belle & Sebastian - Marx And Engels *There's misery in all I hear and see From people on TV After their tea when life begins again They'll be happier than me There are a thousand meals being made on Saturday From the view I saw today I took a bet inside the launderette With a girl from Wallasey* She spoke in dialect I could not understand But one thing that she made clear There was no coming on to her There was no way I n s t r u m e n t a l *~* She spoke in dialect I could not understand But one thing that she made clear There was no coming on to her There was no intellect That she could respect If it couldn't see That the girl just wants to be Left alone with Marx and Engels for a while She's writing in the style Of any riot girl Belle & Sebastian - Marx And Engels I'm Waking Up to Us Tracks : 1. I'm Waking Up to Us 2. I Love My Car 3. Marx and Engels Release Date : 27 November,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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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지만 끈질긴 싸움 평택미군기지 이전 투쟁..

  • 등록일
    2004/11/22 15:20
  • 수정일
    2004/11/22 15:20

용산미군기지 이전 싸움이 승리하였던가? 과연 미군이 용산에서 철수 한것을 두고 우린 어떠한 평가를 내려야 하는가? 미군의 평택기지 이전의 의미에 대해 깊은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 그리고 평화운동가들의 적극적인 평택미군기지 이전에 대한 연대투쟁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다. 이전 평택에서의 평화축제가 일회성 행사가 아닌 연대를 위한 전단계였다면 이제 연대와 지지를 위한 응답이 필요하지 않을까? 개인적인 생각을 가져본다.

 

난 견습생이라 여러 곳을 돌아다닐 수 없는 몸이지만 이 곳 다솜공부방 아이들이 보고 온 평택 미군기지 이전 촛불집회는 뜨거웠다고 한다.

늙은 나이에 자신의 삶을 터를 쫒겨나야 만 하는 어르신들은 아무런 연대도 없이 80일간의 촛불시위를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아~~ 자신의 삶을 터전을 지키는 투쟁에서 미군기지 이전이 갖는 동북아 군사전략이라는 거대한 미명은 잘 모르지만 그래도 실천을 위한 그들의 끝없는 투쟁은 어떠한 명분이고 어떠한 목적없이 오로지 자신의 삶을 터전을 지키기 위한 순결한투쟁으로 전개되어지고 있다.



이라크 전쟁 관련 투쟁, 한반도 평화협적 체결과 평화통일을 위한 활동, 대북 지원사업 등 굴직한 활동들이 남한내에서 전개되어져 왔다. 그러나 이 굵직한 투쟁은 투쟁의 이슈시기가 지나면 뭍히고 만다. 정확히 말해 관심밖이 되면 그들만의 싸움으로 그칠 수 밖에 없는 운동적 한계를 지니고 지금까지 활동은 전개되어져 왔다.

 

MD문제도 평화단체에서는 일상사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광주 패트리어트 미사일 배치만 해도 광주지역주민들만의 투쟁으로 그치고 있다. 몇몇 활동단위에서 결합하여 활동을 전개하고 있지만 그 활동은 전국적으로 파장되지 못하고 지역사안으로 묶어져 있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운동사회내에서 운동을 지향하는 이들이(난 활동가라는 말은 자임하는 말이기에 올바르지 않다는 생각을 이전부터 가져왔다. 정확히 말해 우린 운동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활동가라는 말은 자신이 붙이는 말이 아닌 타자에 의해서 명명되어지는 말이라는 사견을 가지고 있음.) 아직도 수가 부족하여 전 사안을 책임지지 못하고 있다. 안타깝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사안이 있으면 한사안을 끝까지 책임을 지고 나가는 추진력이나 책임성은 이전에 비해 많이 상쇄되어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여름 김선일씨의 피살사건으로 뜨거워진 이라크 파병반대 투쟁은 언제부터인가? 사그러 들더니 이라크 전범재판 배너가 달려있다. 이라크 전범재판 기소 투쟁 또한 중요하다. 그러나 이 투쟁은 운동을 지향하는 이들의 투쟁으로 그칠 위험이 농후하지 않던가?  무수한 사안들이 생성되고 소멸하는 과정...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은채... 마음이 무거웠던 기억... 우리는 투쟁을 쫒아다니는 사람이 아니지만 역량과 밀려오는 사안에 떠밀려서인지 중요한 우리의 투쟁들은 함께 뭍혀지는 일을 일상활동에서 많이 겪고 느끼지 않았던가? 이 문제중 우리가 과연 해결하기 위해 끝까지 간 것은 몇개 있을까? 많다고 할 이들도 있지만... 내가 보기엔 해결된 문제보다 미해결된 문제들이 무수히 많지 않았던가?

이라크 관련 투쟁 사안이 어떻고 저쩌고 난 잘 모르겠다. 다만 이라크 전투병 철회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다면 투쟁을 통해 관철시켜야 되지 않던가? 우리가 언제 승리를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던가?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고 투쟁을 전개하다보면 패배하더라도 그 활동 속에 같이 땀흘린 동지들이 만지 않았던가?

 

인천에 있을때 어느 노동자가 이런 말을 해주었답니다. "조직은 망해도 사람은 남는다." 참 중요한 말인 것 같습니다. 조직은 언제 바뀔지 모르다 그 속에서 단련되고 동지애를 쌓은 사람들이 어디 가겠습니까? 함께 나가겠죠.

 

이렇듯 이라크 파병, 한반도 평화, 전지구적 평화연대를 위한 활동이 한 방향으로 목소리를 낼 수는 없지만 운동의제로 내걸었던 사안만큼은 우리 끝까지 부여잡고 갔으면 한다.

부문운동이 확장되어 다양한 영역이 분화되었지만 이라크 전쟁은 분명 제국주의에 대한 대항투쟁이 아니던가? 부문의 확장은 중요하다고 하지만, 어찌보면 섹션화되는 운동이 전문화라는 포장속에서 우리가 또다른 운동적 소외현상을 낳고 있지는 않은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때가 많다. 길은 한 방향이다. 그러나 그 도착점에 있어서 다양한 길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활동을 지향하는 사람이지 전문가가 되고자 하는 이들이 아니지 않던가? 우리가 부족한 점은 채워나가면 된다. 이 채워나가는 과정엔 무수한 사람들이 있겠지....

 

한번 끝장내는 투쟁을 보고 싶다. 평택미군기지 이전은 미군의 북침 대응을 위한 한반도 전략의 일환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가져보며. 부디 미국 기지 이전 그리고 SOFA개정,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이라크 전쟁반대의 목소리가 다양한 운동에서 터저나오는 사안의 중요성 처럼 일정하게 다루어졌으면 한다. 운동 또한 그렇고....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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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같은 인간이고 노동자다

  • 등록일
    2004/11/22 14:56
  • 수정일
    2004/11/22 14:56

한국 생활 10년만에 강제추방된 서멀 타파  
 
편집부 editor@digitalmal.com
 
 
전현준  본지 편집위원

 

글머리부터 수수께끼 하나를 내보자. 상대성 이론의 창시자 아인슈타인, 문화이론가 스튜어트 홀, 정치학자 랄프 밀리반드, 언어기호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 중국의 실용적 국가주의 지도자 등소평, 트로츠키주의 경제학자 알렉스 켈리니코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올 2월 15일 서울 대학로 혜화동에서 한국에 온 지 10년째 되는 이른바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 청년 한명이 대한민국 법무부 출입국관리직원들에게 연행되어 한반도 남단 여수보호소로 끌려갔다. 그는 ‘강제추방저지’, ‘노동비자(노동허가권) 쟁취’, ‘사업장 이동의 자유쟁취’를 요구하며 보호소에 수용된 지 이틀만인 2월 17일 단식투쟁에 돌입, 31일간의 단식투쟁을 벌였다. 단식투쟁을 끝낸 지 열흘만인 4월 1일, 그는 정부군과 반정부군 사이에 내전이 격화되고 있는 그의 조국 네팔로 강제송환 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불순분자로 낙인찍혀 제 나라 땅에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 법무부에 의해 저질러진 ‘21세기 한국의 야만적 행동’으로 기록될 이 사건의 당사자가 바로 서멀 타파(Samar Thapa)이다.



내전의 조국으로 강제송환된 이주노동자

 

앞서 냈던 수수께끼의 답을 말할 때가 된 것 같다. 이들은 모두 이주자 혹은 이주노동자로서, 이주한 그 나라에서 큰 족적을 남긴 이들이다. 하지만 21세기 한국사회의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의 처지는 어떠한가? 보다시피 한국사회의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앞에 아주 사납게 노출되어 있을 뿐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서멀의 지나온 삶의 궤적을 따라가 보자. 서멀 타파는 1973년 석가모니의 고향인 네팔 룸비니에서 가까운 부터월 이란 고장에서 태어났다. 네팔 인민대학(Nepal People's College)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며 초등학교 수학교사로 일하던 중 1994년 5월 30일 선업연수생의 신분으로 한국에 들어 왔다. “고생이 되더라도 3년 동안 기술을 배운 후, 3년간 돈을 모아 돌아가겠다.”던 그의 코리안 드림은 그런데 처음부터 어긋나기 시작됐다. 그가 노무현 대통령 앞으로 보낸 2004년 3월 8일 편지에 따르면, 영등포의 한 중소기업에서 일을 했던 그는 당시 월급 40만원 가운데 19만원을 관리회사가 떼어 가는데 항의하다 입국 8개월 만에 불법체류자 신세가 되어 버렸다. 월 임금 21만원을 받고 기숙사에 갇혀 강제노동과 임금착취를 당하는 것보다 단속에 걸려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고 그는 자유를 선택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 후 서멀은 새시공장, 양계장, 전자부품회사 등에서 저임금 노동자로 일해 오다가 1999년 3월 신문 배달을 하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아주 많이 다쳤지만 돈이 없어서 수술도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 무렵 안양 전진상복지관 (관장 이금연)의 도움으로 한 5개월가량 그곳에서 같이 생활하면서 다친 몸을 추스릴 수 있었다. 그리고 2000년에는 공장에서 일하며 성공회대학교가 주관하였던 이주노동자지도자과정을 마치고, 2002년 민주노총산하 평등노조 이주지부 안양군포 분회장에 선출되었다. 얼마 후 그 해 11월에는 28개 네팔공동체의 연합조직인 UNMA(United Nepalese Migrant Association)을 각 공동체 대표자들과 조직하여 사무국장을 맡아 일하던 중 2003년 평등노조 이주지부 지부장에 선출되었다. 그때까지 그는 무려 14~15차례 직장이동을 거쳐 왔다고 한다.

 

사실 서멀 타파와의 인터뷰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매우 힘들게 이루어졌다. 애초 올해 4월 1일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서멀이 강제 추방된 이후 그를 아는 한국친구들은 앞서 말한 대로 그의 안위를 크게 걱정했었다. 그러던 중 2004년 메이데이를 맞아 민주노총과 한국의 시민사회단체 관계자 일부가 네팔 노총(GEFONT)의 초청으로 네팔을 방문해 서멀 타파와 감격적인 해후를 가졌다. 그리고 다시 필자가 7월 중순 네팔 고문피해센타(CVICT)을 취재하러 갔을 때 서멀과 연락이 닿는다는 사람의 휴대전화 번호를 하나 갖고 갔는데 그 전화는 네팔을 떠날 때 까지 내내 연락이 되지 않았다. 서멀 역시 집에 전화가 없다. 그 후로 서울에 돌아와 서멀과 전화인터뷰를 가지려고 한 30여 차례 시도 했지만 뜻대로 잘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같은 네팔출신 이주노동자 레기미 보드라저와 나렌드라 구릉의 도움으로 서멀과 전화통화가 이뤄진 것은 10월 3일 오후 4시경이었다.

 

“여보세요, 서멀?”
“아, 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서멀입니다.”

네팔 출입국 관리들도 입국 거부

비행기로 쉬지 않고 가도 8시간 30분이나 걸리는 거리에서 전화선을 타고 흐르는 그의 목소리는 예상 밖으로 맑고 차분했다. 그간의 자초지종은 얘기하고 나서 본격적인 인터뷰를 하기 시작했다.

 

올해 2004년 4월 1일 한국정부에 의해 서멀이 강제출국 당했을 때 많은 한국의 친구들은 당신의 신변에 대해 걱정을 했다. 말지의 지면을 빌려 현재 네팔에서의 생활에 대해 말해 달라.

“지난 4월 1일 한국 법무부 출입국관리직원 3명과 함께 인천공항에서 네팔로 강제출국 당하는 비행기를 탔을 때 나의 기분은 뭐라 말하기 힘들 정도로 착잡했다. 네팔 국영항공의 비행기를 기다린 시간까지 무려 18시간 만에 카트만두 트리부번 공항에 도착하였을 때 사실 걱정이 많았다. 공항에서 입국심사를 받을 때 나의 입국서류는 여권도, 비자도 없이 달랑 여권복사본 1장만이 전부였다. 동행한 한국 출입국관리직원들은 나를 네팔 출입국직원들에게 빨리 인계하려고 했고, 네팔 출입국직원들은 나의 신변 인수를 거부하였다. 공항에 나와 있던 한국대사관 직원이 내가 한국에 불법체류를 하다가 강제 추방된 사실을 알리자 네팔 출입국직원들은 그때서야 마지못해 나의 신변을 인수했다.

 

그 과정에서 별다른 위협을 받지 않았지만, 새벽 3시 무렵 자세한 조사를 하겠다며 나를 카트만두 시내 모처로 연행하였다. 당시 나는 31일간의 단식을 끝낸 지 얼마 되지 않아 아픈 몸으로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다행히 네팔 노총에 전화 걸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 네팔 노총관계자와 변호사들의 도움을 받아 조사를 받고 무사히 풀려 날 수 있었다. 네팔에 돌아와 나는 예전에 다니던 인민대학 경제학과에 다시 복교해서 아침 6시 30분에서 9시 30분까지 3시간씩 공부하며 그 이후로는 네팔 노총에서 현재 상근자로 일하고 있다.”

 

산업연수생에서 불법체류자로, 불법체류자에서 다시 강제출국까지 한국에서의 10년 생활이 후회스럽다고 생각하지 않나?

“1994년 5월 내가 산업연수생 신분으로 한국에 왔을 때 처음에 어려움이 많았다. 특히 연수생 관리회사가 우리가 받아야할 임금을 중간에서 착취하고, 네팔에서 했던 계약을 우리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자기들 멋대로 바꿨다. 그때는 한국말도 모르고 아무 것도 몰라서 참을 수 밖에 없었다. 산업연수생 제도에서 받았던 인권침해와 탄압에서 벗어나 불법체류자가 되었지만 더 힘들었다. 불법체류자라는 이유로 임금도 제대로 주지 않고 강제로 일을 시키고, 일하다가 다쳐도 산재처리도 안 되고 갖가지 차별과 탄압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10년 동안 생활하면서 한국 문화와 음식과 생활 그리고 한국인 친구들을 알게 되면서 한국을 알아 가면서 좋은 것도 많이 배우게 되었다. 강제출국 되기 전까지 10년간 한국에서 일하고 노동운동하면서 나 개인적으로는 인생을 사는 법과 노동과 노동자의 삶이 무엇인지 배우게 되었다. 이주노동자들을 동등한 인간으로 받아 주지 않는 한국 정부를 제외하고 한국인들에 대한 감정은 정말 없다. 우리는 모두 진짜 좋은 친구(good friends)로 만나야 한다.”

 

“노동자의 삶, 한국에서 배웠다”

한국정부는 그 동안 문제가 많았던 산업연수생 제도를 고용허가제로 바꿔 이제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침해가 사라졌다고 한다. 과연 그렇다고 생각하나?

 

“2003년 7월 새 제도인 ‘고용허가제’가 한국 국회를 통과했다. 물론 고용허가제는 우리들(외국인노동자들)이 노동자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업장 이동의 자유’가 역시 빠져있다. 그리고 그나마 한국 체류 3년 미만자만이 합법적인 신분을 얻을 수 있다. 4년 이상 불법 체류한 이주노동자는 모두 한국에서 떠나야 한다.

 

또한 한국 정부는 지난 2월말까지 자진 출국하는 이주노동자들을 올해 8월에 고용허가제로 다시 입국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주노동자들 입장에서 보면 한번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한국에 다시 오기는 쉽지 않다. 또 다시 큰돈을 내지 않으면 아무리 한국 정부가 입국을 보장하더라도 올 수가 없다.

 

현재 한국정부는 한국거주 4년 이상의 불법체류 이주노동자 10만 명을 강력하게 단속하고강제추방하고 있다. 한국정부의 대책 없는 추방결정이 막다른 골목에 몰린 이주노동자 14명의 아까운 목숨을 앗아갔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는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의 생계를 송두리째 뽑아 버리는 중대한 인권침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서멀 타파 당신을 비롯한 이주노동자들의 요구사항은 무엇인가?

“지난 2003년 11월 15일 명동성당에서 80여명의 이주노동자들과 20명의 한국 실무자들이 함께 농성에 들어간 지 벌써 300여일이 지났다. 우리들의 요구는 ‘대책 없는 단속추방저지’. ‘이주노동자 전면합법화’ ‘사업장 이동의 자유’이다. 그런데 농성이 1년이 다 되어가는 대도 한국정부는 모른척하고 있다. 잘하는 것 많이 없지만 내가 우리 농성단의 이주노동자 대표를 맡아왔다. 그 동안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제 우리 이주노동자들을 차별과 탄압에서 벗겨주고, 똑같은 노동자로 인정하면서 우리들의 인권과 자유로운 노동권을 보장해야 한다.”

지난 8월 한국의 민주노동당사 앞에서 “이주노동자들이 한국노동자들의 일자릴 뺏어 간다.”며 외국인노동자를 몰아내자는 일단의 한국인 노동자들의 시위가 있었다. 이런 일단의 한국 현실을 감안하면서 한국 내 이주노동자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질 것으로 보는가?

 

“이 문제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한국의 노동자 동지들, 지금 한국에 40만명의 이주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다. 정말 많은 숫자다, 그런데 한국 정부와 자본은 이주노동자를 더 많이 받으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예전에는 건설, 제조업체만 있었지만 이제는 더 많이 농업과 축산업 서비스업 등으로 늘어나고 있다. 이것뿐만 아니라 이제 대기업까지 이주노동자를 받기 시작하였다.

 

한국의 노동자 동지들에게 : “우린 같은 인간이다”

한국 정부와 자본은 매일 경제가 어렵다, 회사가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회사 돈 빼내어 비자금 챙기고, 값싼 노동자들을 찾아 세계 여러 나라로 떠나고 있다. 결국 피해를 받는 것은 전체 노동자들이다. 자본가들은 자유롭게 이 니라, 저 나라 다니면서 우리 노동자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같은 나라가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하고 제대로 대우하지 않고, 인권침해 하면서 노동자들을 노예처럼 일만 시키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어려움은 우리 이주노동자들만 갖고 있는 거 아니다. 많은 한국 노동자 동지들도 참을 수 없는 탄압과 차별 때문에 분신하고 자살하지 않았나. 그런데 한국 정부와 자본들은 아무 아픔이 없다. 아무 평가가 없다. 이게 바로 한국 땅에서 우리 노동자 농민, 빈민과 힘없는 사람들의 현실이다. 이제 우리 모두가 단결하여 모든 탄압에서 벗어날 필요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이주노동자들도 같은 인간이고 노동자다. 더 이상 서로를 모른척하고 흩어지고 갈라지지 말자. 분리하고 분열시키는 것은 자본의 술책이다. 한국노동자와 이주노동자가 하나 되면 세계 노동자가 하나가 될 수 있다.

 

우리 이주노동자들은 아직 예비활동가이다. 동지들의 연대가 정말로 필요하다. 동지들에 연대하면 다 같이 더 나은 세상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같이 투쟁하는 노동자와 살아있는 노동의 힘이 되고 싶다. 서울 경지지역 많은 동지들은 우리 이주노동자들의 실태를 잘 알고 있었지만 지방에 있는 동지들을 아직 잘 모르고 있어서 더 많은 관심을 부탁한다. 동지들의 관심과 연대에서 우리 전체노동자의 해방이 올 수 있다. 각 사업장에 이주노동자들을 조합원으로 받아 주시고 또 각 지역에 있는 지역본부에서 우리들 조직할 수 있는 사업 만들었으면 좋겠다.”

31일간의 단식 투쟁과 여수출입국 관리사무소 내 보호소에서의 생활은 어떠했는지 말해 달라.

 

나는 연행되자마자 바로 여수보호소에 수용되었고, 2월 17일부터 단식을 시작했다. 단식시작하면서 식사시간마다 나는 아지테이션(선동)과 투쟁 노래를 불렀다. 그러자 보호소 직원이 나한테 와서는 계속 소리치면 독방에 넣겠다고 협박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권리 있다. 협박하지 마시라”고 말했다. 그래도 계속 협박했다.

 

그리고 방마다 있는 공중전화기를 17일 직원 한명이 와서 이제부터 밤 11시부터 다음날 오후 1:00시까지 전활 할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나는 갑자기 왜 이렇게 하는 건지 묻고, 다른 방에 있던 이주노동자들도 전화 연결하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우리 요구를 보호소 직원들은 무시했다. 또 보호소안 각 방마다 CC카메라 설치되어 있다. 방안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을 카메라가 감시한다. 직원들은 우리의 안전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카메라 때문에 안전을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갖고 있는 문제를 제대로 상담하고 해결하는 방법이 제일 안전한 거라고 생각한다.”

 

“한국 정부가 일제 식민지 비판할 수 있나”

한국정부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10만 명이 넘는 우리 4년 이상 체류한 이주노동자들, 일하다 많이 죽고, 장애인이 되면서 이 나라 경제를 위해 많은 피와 땀을 흘렸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갑자기 4년 이상 체류자는 모두 2003년 11월 15일까지 한국에서 나가야 한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한국 정부가 어떻게 이러한 결정을 할 수 있을까? 그토록 피해 받고 죽은 이주노동자들 가족에게 한국 정부는 언제 보상 한번 해줬나? 아니다. 이러고도 한국정부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비판할 수 있나?

그동안 사업장 이동 자유가 없어서 산업연수생들은 어쩔 수 없이 ‘불법체류자’라는 딱지를 붙이고 살아왔다. 바로 불법체류자라는 이유만으로 많이 이용당해 왔다. 또 많은 이주여성노동자들이 한국인들한테 성폭행을 당했다. 대한민국 법무부와 노동부직원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열심히 일이나 하지 왜 집회를 하느냐?’, ‘ 집회하는 것 불법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도 우리처럼 임금체불 당하고, 일하다가 산재 입어서 보상 못 받고, 똑같이 일하면서 차별받고, 그리고 성폭행까지 당한다면 마음이 어떨까? 이렇게 입 다물게 하고 이주노동자들을 언제까지 써먹을 것인지 정말 알 수가 없다.

 

참을 때까지 참아왔다.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본다. 이제는 우리들의 현실을 제대로 알려야 한다. ‘우리는 한국 땅의 노예가 아니다.’, ‘ 이 나라에 살아 움직이는 노동의 힘이다.’, ‘더 이상 노예처럼 일시키는 산업연수생제도, 사업장 이동의 자유가 없는 고용허가제는 우리들을 보호하고 노동권을 보장할 수 없다. 이제 우리 이주노동자들에게 한국정부는 노동비자(노동허가제)를 인정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당신을 알고 걱정하는 한국의 많은 친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한국동지들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했다. 어제도 목숨 걸고 우리 동지들 보호하기 위하여 싸웠다. 많이 다쳤다고 들어서 마음 아팠지만 동지들의 영원한 연대가 항상 있어서 오늘 우리가 여기까지 투쟁할 수 있는 거 사실이다. 바로 동지들께 많은 것 배웠다. 동지들과 함께 ‘평등한 세상 만들 수 있다’는 것 알게 되었다. 그리고 특히 안양 전진상 복지관과 여수 보호소에 있을 때 사랑과 연대의 정을 베풀어 주신 한국동지들한테 정말 고맙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힘내고, 서로 열심히 투쟁합시다.

 

마지막으로 우리 자랑스러운 농성투쟁단 동지들 절대 포기하지 맙시다. 절대 흩어지지 맙시다. 끝까지 투쟁합시다. 또 같이 연대해주시는 인권단체들, 사회단체들, 문화단체 동지들, 그리고 민주노총 동지들, 학생 동지들 많이많이 보고 싶습니다. 모두 건강하시고 좋은 시간 보내시기 바란다. 마지막 날까지 투쟁하겠습니다!”

 

명동성당 이주노동자농성단 후원계좌
농협 386-12-109380
예금주 kabir
연락전화 017-209-4822 서 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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