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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 5일 장터

  • 등록일
    2004/10/28 09:18
  • 수정일
    2004/10/28 09:18

서울에서 조금 내려온 오산.... 지금은 사라진 장터가 이곳에 5일마다 어김없이 열린다.

어린시절 이외엔 다들 5일장에 대해서는 TV 프로그램인  한국의 美(KBS 프로그램)를 통해 소식을 접하거나 간간히 간접 경험을 하고 있을 것이다.

 

사라진 장터를 지키는 이들의 끈질긴 삶을 엿볼 수 있는 장터는 즐겁다.

장터는 즐거움과 풍요로움 그리고 사람내음 진하게 풍기는 마력을 지닌 곳이다. 시장을 가본 사람들이라면 사람들이 길가에 즐비하게 물건을 고르기 위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람내음 맛보고 싶으면 시장으로 가라는 말이 있듯이 시장은 사람들이 사는 풍경을 스케치 할 수 있는 좋은 장소이다.



 

나도 예전 시골장터에서 어김없이 부모님들과 나가 풀빵(국화빵 같은 밀가루 빵)을 사먹던 기억이 가물가물 난다. 그리고 오리, 토끼, 닭을 사와서 기르던 기억이 있는 장소...  그러나 지금은 다들 옛것으로 치부되 대형마트나 유통업체에 밀려 외지로 외지로 밀려나는 서글픔을 간직한 공간이기도 하다.

 

요즘아이들은 어떨까 장터를 경험하지 못함은 아이들에게 즐거움을 앗아가는 일이 아닐까? 즐비하게 잘 정비된 대형마트에서 가격 흥정없이 라벨로 표기된 가격을 보고 상품을 고르는 재미없는 물건사기... 물건을 흥정하며 비싸다 싸다 흥정하는 재미가 사라진 지금... 이야기 꺼리도 그만큼 줄어들고 우리내 정겨운 삶의 문화도 하나둘 서구화와 도시화에 밀려 제 위치를 잃어나고 있음이 서글프기 그지 없다.

 

사람이 사는 동네에는 이야기와 재미가 풍성하여야 하지만 우리내 삶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높이 더 높이 하늘을 치솟는 아파트와 도로에서 아이들의 놀이문화가 사라지고 아이들은 교육이라는 열병으로 학원으로 학원으로.... 우리내 정겺던 구슬치기, 다방구, 오징어 게임, 망치기, 자치기, 술레잡기, 동네 야산 산열매 따먹으로 산보가기 등 많은 놀이들은 이제 내 기억과 옛 것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져 가고 있다. 내가 어려서 부터 배웠던 놀이가 사라짐이 서글프고 더이상 아이들의 놀이가 아닌 것이 안타깝기 그지 없다. 이제 이러한 옛 문화를 라디오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옛소리를 찾아서에서 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머리가 띵하면서 과연 우리에게 문화란 무엇인가? 문화적 다양성 가치가 존재하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그리고 사라져 가는 장터를 보면서 언제까지 오산에 5일 장터가  이어질까 잠시 골똑히 생각해 보았다. 오늘 일이 없어 다솜교회로 돌아오는 길... 물건을 팔기 위해 미리나온 상인.. .준비하는 상인들의 모습에서 이 모습이 내일이면 내일이면 언제가 될지 모르는 내일이면 사라진다는 상상에 소스라쳐 눈을 똥그라니 뜨고 그 광경을 내 눈망울 속 깊숙한 곳에 담기고 또담겼다. 채워도 부족한 정겨운 이곳 사람내음이 있어 좋은 공간 이 곳은 내가 어릴적 봐온 시골장터의 모습은 아니지만 그나마 맥을 이어가고 있는 소중한 우리내 문화이다.

한번 시간이 된다면 서울에 있는 사람들은 성남 모란장.. 오산 5일장.,... 멀게는 정선 5일 장 또는 화개장터를 가보기를 권유한다.(화개장터를 이르는 길.... 대전-진주간 새로난 도로를 따라 남해고속도로를 이용하여 하동에 도착... 그리고 한국에서 가장아름다운 길이라 명명되고 참 아름다운 하동에서 구례까지 섬진강을 끼고 지리산 자락을 벗삼은 공간을 따라 화개장터-피아골이 있는 쌍계사 구례를 갈 것은 권유한다. 차가 있다면... 참 정겨운 공간이다. 대학때 무작정 도보 여행을 하였던 그 길이 내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가장 아픔답다고 생각한 길이다. 참 아름답다... 아기자기하지만 굵은 붓 글씨처럼 굵음이 있는 공간...) 

 

장터에는 없는 것이 없다. 구경거리가 있어 신명나고 먹을 거리가 풍성하여 즐거운 장소 장터이다.

 

오늘 오산 5일장터에 나가 사람내음 시장 상인들의 향기에 취하고 오련다. 풀빵은 아니지만 장터에서 먹을 꺼리도 먹고 물건도 사면서 사람들과 흥정하며 오늘 공친날을 보내련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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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참 행복한 놈이다.

  • 등록일
    2004/10/25 20:56
  • 수정일
    2004/10/25 20:56

* 이 글은 알엠님의 [파나마 사기극]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알엠님의 글을 보면서 난 참 행복한 놈임이라는 사실을 세삼 느끼게 되어  각인하는 계기가 몇자 끌적입니다.

 

노동정보화사업단 인천지부에서 내 삶을 이어나가게 되었다.

원래 내가 속한 정치조직에서 울산에 금속사업장에 이전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이들은 몇차례 만남을 갖은 후 연락이 두절되어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참후 알게된 사실이지만 이들중 한명(내 후배중에 한명이)의 반대하여 현장 이전준비는 무산되었고, 그 길로 난 술집과 학교 동아리방에 기생하며 무미건조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 당시 난 저녁마다 술에 쩔어서 운동을 포기할까 고민도 해보고 어떻게 운동을 할 수 있을까 불안한 마음을 술로 달래며 약 3개월의 기간을 알코올 중독자 처럼 지냈다. 그 당시 난 노동운동을 꼭 하고 싶었고, 잘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나를 알아주는 찾아주는 사람하나 없다는 사실에 두려웠고, 외로웠다. 캄캄한 암흑천지였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내 인생 가장 중요한 고비였고 참 힘들었던 시절이다. 교도소에서 나온지 별로 되지 않아서 그렇다고 동기와 후배들은 이야기하지만 참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냈다. 저녁마다 참 많은 근심을 껴앉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한 동기(나보다 나이는 많음.)가 찾아와 같이 인천에서 활동하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난  흔쾌히 동의하고 주저없이 98년 2월 인천으로 향했다.

설레임반 두려움반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일할 수 있다는 즐거움... 내가 그토록 열망하는 노동운동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난 세상 모든 것을 얻은 기분으로 뒤돌아보지 않고 인천으로 달려갔다.

 

인천에 도착... 기반이 없던 나는 인천에서 몇개월간 외롭게 지내야 했다.

인천이라 동네는 지역기반이 없으면 사업하기 어려운 곳이다. 그리고 과거 운동하던 단체들이 많아 이들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일정정도 현장과의 연계성을 갖지 않으면 단체로서의 생명은 곧 파산선고를 해야할 판이었다.

그러던 차... 노동정보화사업단(이하 노정단) 중앙에서 나우누리를 통한 민주노총 CUG(폐쇄통신망)이 민주노총내에서 조직적으로 활용시키고 민주노총과 연계사업을 하게되어 인천에서 나도 이덕을 톡톡히 보았다.

민주노총 인천지역본부 사람들이 이 당시만 해도 컴퓨터보다는 팩스를 주로 사용하였고, 통신을 하는 이들은 극히 일부라 나의 도움이 필요하였던 터였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난 이들에게 컴퓨터 교육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 교육을 통하여 난 많은 현장 조합간부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을 자산으로 하여 내가 속한 단체를 지역사회에 알릴 수 있었고, 종종 민주노총 인천지역본부 소속 조합들 컴퓨터 교육과 컴조립을 해주게 되었다.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무엇을 지역사회에서 할 수 있다는 것이.....

 

참 많은 컴퓨터를 조립해주고 인천을 떠나왔다.

내가 즐겨가던 참세상방송국 인터넷방송 사이트(지금은 없어진 Zoo님이 운영하던 사이트 게시판에.. 내 고민을 적고... 미련없이 떠나왔다... 그떄는 도망치기 바빳고 도망쳐야만 했다.. 지금은 변명이라 생각하지만 그때의 패배감과 절망감은 나에겐 크나큰 상처였다. 무엇을 할지 망막하여 무작정 그만두고 한 보름을 쉰후 난 노정단에 찾았다.)에 인천을 떠나오면서 들었던 생각을 써놓았다. 지금 그 글을 보면 변명이라 생각이 들지만 그 당시 나의 심정은 그랬다. 도망치고 싶었다.

 

아래 나의 심정을 쓰고 미련없이 떠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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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흔적의 여운을 들쳐보내며 떠납니다.  
 
2000/03/25 00:45
 
그동안 정말 충고와 늘 즐겁게 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 제 위치에서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그리고 꼭 10년후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희망이라는 웃음을 가지고.....

여러 책들에 대한 것 특히 레닌의 무엇을 할것인가?(박종철 출판사 판은 읽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음. 난 아마 백의가 백두인가에서 나온 책을 읽어 보았 을 뿐.) 볼세비키와 맨셰비키을 두고 혁명적 전위세력과 사민주의 세력이라고 쉽게 단정하면서 우리는 늘 기회와 사민 그리고 교조주의에 대해 많은 말을 하곤 한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것은 보지 못한다.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위한 노력들...
87년 민중의당 그러나 범민주 단일후보라는 사회적 힘에 밀려 출마를  포기하고 정당의 발판을 마련하지 못했다.( 여기서 발판을 마련하지 못함은 내 개인적인 생각에 의거하면 그건 곧 정파주의의 한계가 말해주고 있다. 좌파의 소수 엘리트적인 직업적 혁명가에 의한 혁명주도와 우파라 지칭되고 주사파의 대중적 획득적 힘의 획득에 의한 사회변혁으로 대립되어진 시대적 상황에서의 다수에 힘에 대한 굴종.) 그러나 좌파의 위기는 또 하나 있다. 좌파가 혁명적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소수로밖에 남을 수 없었던 것은 서울대 그리고 여러 대학에서의 품성문제의 대두 즉, 혁명가들에게 제일 중요한 인간적인 품성이 문제가 되었다.=86년 서울대 품성론 사건(아마도 말지 통권호를  보면 이 사건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나와있을 것이다.)

 

우린 아마도 혁명이라는 사회적 거대흐름 속에서 시기적 정세 파악의  오류를 범하지 않았나 쉽다. 87노동자 대투쟁 시기와 국민들의 연이은 사회개혁 시위가 BGR(부르주아지혁명)으로 이어져 SOR(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화가 이루어진다는 시기적 오류 우린 이론적 성숙기와 사회적 요건을 충분히 가추지 못한 상태에서 노동자계급의 계급의식을 전혀 담보해내고 있지 못하였다. 아마  계획은 있었을 것이다. 공장으로의 대거 이전이 80년대 운동의 전형을 말해주고 있으니까.... 그러나 흔히 말하는 학출운동권 아직도 몇몇 학출운동권이 현장에 남아 열심히 투쟁을 전개하고 있으나, 과거에 비해 수 그리고 열의 그리고 자신의 운동노선에 대한 명확성이 전혀 없는 상태이다. 단지  노동조합 건설에 온힘을 기울였을 뿐 이후 투쟁에 대한 방향성은 동구권의 몰락이 가져온 충격으로 와해되었다. 몇몇 그룹만이 지금 존재하면서 자신의 운 동을 자족적으로 진행하고 있다.(이건 나의 사견임.)

 

민중의 당의 패배를 딛고 일어선 전민련이란 실험적 통일전선체 그러나 실험은 실험으로 그치고 말았다. 통일전선의 구축의 시도는 사상적인 이유와 각 정치조직간 이해와 요구의 충돌로 인해 전혀 합의되고 집행되지 못한 상황에서 통일전선은 그 의의만을 만기고 80년대 말 역사의 뒤안길에서 서서히 살아지고 말았다.

우린 6.25란 역사적 단절이 얼마나 뼈절이게 이 운동을 황폐화시키고 있었는지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1919년 부터 일기시작한 사회주의 운동이 단절이라는 시대적 상황에 의해 얼마나 처참히 깨지는가를...


정확히 말해 6.25라는 전쟁이 남겨준 우리에게 있어 반공이데올로기라는 허울 속에 기층 민중들과 소부르주아들의 정치적 이중성들을 즉시 할 수 있었다.


보수와 안정의 기성세대 그러나 그들은 말한다. 4.19의 혁명적 정신을  그러나 시대가 지나고 있는 지금 4.19의 주도세력은 어떠한가? 그들은 기존 정치권으로 편제되어져 그들의 엘리트적 기질을 발휘하여 한국사회의 피박받는 민중의 피를 뒤에 엎고 정치세력으로 정착하였다. 그리고 유신의 항거한 사람들 지금은 어떠한가?  80년 전두환을 일두로한 군부독재 잔당과 같이 정치적 동지로 서고 있지 않은가?


이처럼 많은 변절자를 보고 지금도 정치적 신물에 빠져 자족적으로 자위적으로 그들을 몰아세우며 찍을 사람이 없지만, 그들이 기존 보수세력이 사회적 안정을 기할 수 있다는 논리 하나만으로 자신의 뜻과는 반대로 기존 정당에게 표를 던진다. 아 너무나도 한심하지만 이게 우리내 현실이다.
그런데 운동권들은 어떠한가? 이런 사회적 변혁기회 전민련이란 통전체를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정파 싸움과 힘겨루기에만 연연하지 않았나, 사회적 대안세력 혁명의 정당성을 알리고 노동자계급의 정치성을 지도하기는 켜녕 현실운동적 사안에만 갑갑했다.(많은 혁명론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혁명론은 인텔리적인 운동의 피폐=인텔리적 운동의 한계는 늘 고정되어지고 있었다. 노동자 계급성만을 담지한 그들은 노동자의 정치세력 선두에 세우기는 켜녕 자신들의 조직의 정치적 헤게모니 장악 정파간 혁명 사상에  대한 우위만을 강조하였다. 성과도 있다 맑스주의란 단편적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자기 쇄신 즉. 학계의 맑스연구진행.. 그리고 여러 맑스주의에 대한 분석이 운동의 발전을 가져온 점이 있었다.

 

그러다 정반합이라는 유물론적인 합법칙성들은 상실되어져 갔다. 아마도 인텔리적 운동의 한계로 싸잡아 말할 수는 없지만, 이론적인  확장시기를 거치면서 많은 학문들에 대한 다양한 섭취를 못한 우리 운동의  한계성이 있기에 많은 정파운동이 자신들만의 외길 속에서 주도세력에서  사장세력으로 서서히 운동세력속에서 사라져가지 않았는가?


말을 하다보니 인텔리적 운동의 한계로 흘러갔군..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과거 통일전선체 운동이 충분한 중요성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실험적운동으로 실패하였는가를 잘 보아야 한다.

 

92년 총선과 대통령선거...
민중의독자적정치세력화(민독정)세력과 민중당, 한노당 그러나 그러나 그들은 부르주아 선거판에서 현실의 냉혹함 민중을 위한 진정한 세력으로 거듭나지 못함을 각인하는 계기를 분명히 얻었을 것이다.


민독정의 선거패배와 민중당의 선거당으로서만 역사에 무대에서 사라짐. 한노당의 의의성만을 강조하고 사라짐...  동구권의 몰락으로 인해 새로운 운동에 대한 대안마련과 모색을 위해 학계와 운동권(각 정치세력들)들의 암울한 시대였다.

이것을 정면 돌파하기위한 합법전술적 당운동..

당운동은 부르주아판에서 표를 획득하지 못하면 당으로서 존립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러한 한계가 있을을 극명히 우리에게 전달해 주었다.

 

그리고 민주대 반민주의 낡은 사슬을 버리지 못한 우파라 지칭하는 사람들의 민주정부 수립론(내생각으로 아마도 좌파에서 먼저 민중주도 임시  민주정부 수립의 기치를 먼져 들었다고 사료됨.)에 대한 환성에 젖은 비판적 지지론에 입각한 선거전술....

이러한 협격한 입장의 차이를 우린 운동세력들은 늘 염두해두지 않고 독불장군식으로 자신의 길만을 걸어갔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에 대한 이해와 객관적 비판을 하지 못하였다. 다만 정치세력들의 자신들의 이론적 입장에  근거한 비판만을 계속적으로 강화하였을 뿐이었다. 많은 좌파세력들은 민독정을 진행하면서 구로에서 안양에서 성동에서 노원에서 선거투쟁(학생들은 학생선거투쟁연합을 건설하여 나갔으며, 각  정치세력은 민독정에 결합하면서 각 조직에서 소속된 지역선거 본부로의   결합)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기대와 희망은 표라는 허울에 의해 처참히 뭉개져버리고 말았다.

혁명성도 투쟁성도 그리고 운동의 열정도 부르주아지 선거판에서는 표가 나오지 않으면 자족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난 이에 합법정당 한계는 표를 얻지 못하면 당으로 존립할 수 없다라는 결과를  도출해 내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백선본 이후의 선거판도 마찬가지이다.  92년 대선 백선본운동 또한 표가 나오지 않음으로 인해 많은 선본세력(각  정치세력의 이후 방향에 있어서의 구별정립이 가시화 되어지지 않았는지..... 이 자신의 궤도의 이탈 그리고 운동에 있어서의 조직의 존립적 근거가 희미해지 는 현상을 낳았다.  "내가 겪어온 운동 속에서 우린 너무나도 학생운동  그리고 일부조직된 운동권이 전체운동을 책임질 수 있다? 는 오판과 환상 속에서 패밀리적 운동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한다. 각각의 역활과  위치에맞는 활동이 배치되고 조율 되어져야 한다.

 

"청년이 서야 나라가 선다." 그리고 "청년들의 시대적 책임성"난 이말에 대한 무진장 반감이 있다. 그건 추상적 구호에 지나지 않고 청년이 시대적 책임을 전부 전가할 세력인가?라는 생각에서 이다.


우린 청년과 민족이란 단어를 언제서부터인가 매우 자주 그리고 친근감 있게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들또한 한 시대의 청년임에 불과하다. 그리고  학생운동권과 젊은 노동자를 청년이란 단어로 묶어주기엔 너무나 청년이란 피상성이 내재하고 있다라 생각이 든다.

난 청년에서 기성세대로 접어들고 있는 이들이 진정한 혁명세력으로 거듭나기 위해 과연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수 있는 청년이 얼마나 될까?  얼마없다 라고 생각이 든다.

 

난 그들의 할수 있는 범위내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늘 운동성만을 상실치  말기를 바랄뿐이다.

 

혁명의 주도세력인 젊은 인텔리 계급은 러시아에 소수에 불과하였다.

혁명의 원동력은 혁명적 노동자들이 었지 레닌, 트로츠키, 카우츠키,스탈린이 아니었다.


러시아에서의 소비에트(노동자 평의회) 건설은 노동자 주력부대의  무장혁명에 의해 일구어낸 산물이다. 우린 레닌의 저술을 보면서 그의 뛰어남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레닌만의 고민에 의해 나온 전술과 전략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난 오판이라고 생각한다. 선진노동자 즉 인텔리들에 의해  지도되고 조직된 노동자들 계속적인 프략션을 통한 선진노동자 부위 내의 정치노선과 조직노선이라는 끊임없는 그들의 토론을 통한 산물이 지금 현재 우리에게 알려진 레닌저작선집의 책들이다.


그의 투쟁을 있게해준 배경들이 있었기에 레닌이 존재하였지 그의  천재성이 러시아 혁명을 완수하였다라고 볼수는 없다. 어느책에선가 러시아 혁명이 있은 당시 레닌은 혁명을 예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말은 얼마나 러시아의 노동자들이 조직되고 계급성을 담지 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 아닌지...

 

난 자신 지금 공부를 하건 열심히 산업현장에서 고된 노동을 하고 있건 자신의 운동에 대해 비젼을 가지고 살아가고 그것을 하루하루 실천하는 것이  더욱 더 절실하다고 말하고 싶다.

 

지금 운동을 시작하거나 운동의 변혁운동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운동에 대한 비젼을 가져야 된다고 본다. 그것이 당운동이던 아니면  여러가지 형태의 사회진보운동이건 무엇을 할것인가?와 어떻게 살것인가라는  자신의 철학이 없다면 그건 아마도 자족적이거나 자위적인 운동이라도 말하고 싶다. 그리고 청년만이 운동을 한다. 사회변혁을 일군다라는 말은 오판이다.


어떻게 선진 운동가로 아니 자신의 지위를 포기하고 운동을 통해  노동자에게 환원되어 질 것인가란 자신의 철학이 없다면, 기존의 정치적 야망에만 불타는 운동을 알것임은 뻔한 사실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돈이 없으면 굶어죽듯이 운동에 대한 자신의 목적성과 삶의 기본동력이 없이는 운동이란 환상자체라고 밖에는...   난 청년이란? 말과 청년의 시대적 역활 청년이 사회변혁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 자체는 피상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생각을 감히 해본다.


난 전진하고자 하는 자만이 쟁취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선진 학생운동가라면 노동자 현장에서 인텔리의 근성을 버리고 노동자 계급으로 새롭게 거듭나는게 더욱 올바른것은 아닌지... 감히 말해 본다.

 

또한 대학생신문에 글중 "혁명적 이론없이 혁명적 실천이 없다."라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난 지금 현실에선 "혁명적 실천없이 혁명적 이론은 없다."라는 말로 바뀌어야 하는게 아닌지... 내가 알기로는 실천이 이론보다 먼저 앞을 장식해 준다고 생각이 든다. 뭐 말의 앞위가 중요할 소냐


그러나 자신의 삶으로 가꾸면서 운동적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 그리고 노동자 계급성을 지도하는 사람들은 거의 드물기에 맑스를 이론의 잣대보다는 실천의 잣대를 더욱 높이 평가하는 게 올바르 않을까? 생각이 든다.

 

과연 우리가 말하는 진보정당은 대중정당인가? 혁명정당인가?

난 노동자 민중의 대중정당은 원초부터 존재 할 수 없다고 본다. 그건 선거라는 공간의 협소성과 자본주의 사회가 가지고 있는 내재적 모순속에서 결코 선거를 통한 혁명은 가능하지 않기때문이다.


이에 난 각각의 운동들이 분화되어지는 양산속에서 운동은 배치되고  집행되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현실의 운동은 그렇지 않다 너무나 패권의식과 정파적 패밀지 의식들이 파편적으로 조직의 분화양산을  게모니 장악을 위해 너무나 패권적으로 그치고 있기때문이다.

모든 운동들이 마찬가지 이겠지만 현시점의 진보정당운동 또한 마찬가지이다.

현재 정식정당으로 청년진보당이 진보정당으로 등록되어져 있고 그리고 기존 국민승리21이 민주노총(민주노총 강령에 진보정당 건설이 강령으로 존재한다 라는 말을 하는데 민노총 강령을 모른 나로서는 도무지 확인할 길이 없다 그래서 들은 말에 의해 진보정당강령에 의한 민노총의 진보정당 참여 한다는 이야기를 근거로 말한다.)의 과의 연계에 의해 진보정당건설추진위가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난 개인적으로 두 세력간의 구분점들을 모르겠다.


무엇이 그들을 이토록 두개의 당으로 양분해 진보정당운동을 전개하게 하는지를 아마도 기회와 사민세력과의 타협의 거부라면 난 진보정당  운동에서의 통전체적 당이 아니고서의 의미성들을 찾기 힘들다고 생각이 든다.


아마도 과거 제기한 합비합 동시건설론이란 차별성에 의한 진보정당 건설이라고 말하면 모를까?


이런 양분화된 구도 상호대립적 관계를 통해 자율경쟁을 통한 진정한 세력으로 거듭남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과연 대중정당이 혁명정당도 아니면서 이런 구분속에서 무엇을 찾기에 진보정당운동이 양분화되어져야 하는지 난 사실 잘 모르겠다. 맑스에 의한 당이라면 난 합법적 진보정당을 건설은 현시기적으로 무리하는 생각이다. 

 

그러나 더욱더 중요한 것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누구를 위한 당인가? 슬로건들은 과거에도 지금도 변한것이 없다. 민중의 정치세력, 노동자 정치세력화, 보수정치를 갈아없자는 슬로건 들....  그러나 이러한 현실적 구호들이 얼마나 민중들이라는 서민들 노동자에게 직간접적으로 피부로 다가올 말인가?


그냥 운동을 한 사람들의 필요성에 의한 운동으로 거듭나고 있다는 생각이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드는 생각이다. 당 그리고 단체 인천에서는 너무나도 학생에 대한 불신과 그리고 배신의 골이 깊다. 그건 당시 노조에 있는 사람들은 말은 안해주지만, 인텔리들의 배신 그리고 계급성의 한계들에 대한 불신임은 분명 사실이다.
그리고 한 조합을 들어가서 말을 들어보았다.


그 조합 간부는 진보정당이란 말을 해보았더니 피식웃으면서 집에서 효도나 하라고 나에게 말한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았더니... 그 조합간부는 진보정당 동의 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 세상을 바꿀 계획과 플렌을 당장 가져오면 지금 즉시 나도 진보정당 운동에 적극적으로 복무하겠다라고 말한다.

계획 만들면 되는것 아니냐...


그사람왈 말은 쉽지.... 운동권들이 정치적 프로가 되면 어떻게 되는지 아냐고 정치적 프로로 자리매김 되면 그들을 정치철세로 전락해 자신의 정치성을 잃지 않기 위해 어디론가 팔려가는 정치프로선수가 된다는 말을 한다.


남들은 쉽게 미리 부터 걱정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시민단체들 요즘 참여연대를 보라 그들을 비판하지만 그들만큼 정책에 대한 비판(한계성을 내재한 비판)을 하는 세력은 어디있는가? 난 없다라고 본다.
그럼 혹자들은 넌 무엇하러 운동하냐라고 한다. 그러면 난 그렇다 대안을 만들기 위해 한다. 대안이 무엇이냐 난 끊임없는 실천활동과 연구를 통한 산물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말을 들을면서 난 생각이 들었다.
정치세력화, 세상을 바꾸자!라는 말은 무성하다. 그러나 이후 선거에서 한석 아니 몇백년 후에 정치세력이 되었다고 치자! 그원칙을 늘 변치않고  가지고 집행 할 수 있는 우리의 사회전반적 계획은 가지고 있는지....

 

말이 아닌 실천을 할 수 있는 대안들 사회의 모든 제반 부조리들에 대한 해법들을 가지고 기존썩은 정치권을 가라엎지 않는한 우린 룸펜적 운동가(늘 운동권에 있어 술은 빠지지 않는다 늘 술이란 매채를 통해 서로간의 결속력과 동질성을 각인한다. 그리고 몇몇 사과서적을 읽으면 맑스에 대해 이런 저런 말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는 다르다 문제에 대한 끊임 없는 진단 그리고 해안들을 제시할 수 있고 이걸 대안들을 가지고 투쟁을 만들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우린 항상 룸펜적 운동가=자족적 운동가로 머물를 수 밖에 없다.)로 적용될 것이다.

 

자신의 그늘을 보지못하면서 남의 그늘에만 안주하고 또한 자신의 그늘의 폭을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이 너무 한심하기 그지 없다.

그리고 너무나도 패밀리적인 운동의 한계성들이 우리 주변에 내재하고 있다. 너무 서글프다...

 

모두들 과거는 아름답다고 말하지만 과거는 과거일뿐 현재를 견디어 내야 합니다...

 

인천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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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난 그러했다.

 

지친 가슴을 부여잡고 난 노정단을 찾았다. 그러나 뜻밖에 여기서 일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고 난 노동네트워크 상근자로 또다시 이어가게 되었다.

 

내가 노동넷에서 한일은 이 공간에 썼고 내려오면서 내 생각을 정리해서 따로 글을 쓰지 않는다. 다만, 지금도 오산에서 이 끈을 부여잡고 있다.

 

그러나  이전과 다르게 나에게 단 한가지 소망이 있다.

이곳이 나의 마지막 안식처가 되어 평생을 이 곳에서 길을 겆게 해달라는 소박한 희망을....

 

난 학교때 잠시 고민을 하였을 뿐 별 탈없이 지금도 나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다만 단체를 바꿀적 마디마디마다 조금 힘들었을 뿐....

 

참 행복한 놈임을 다시금 느낀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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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장 풍경

  • 등록일
    2004/10/15 19:56
  • 수정일
    2004/10/15 19:56

공장엔 두가지 音이 있다.

기계소리와 작업종료를 알리는 벨소리이다.

작업종료를 알리는 벨소리가 울리면 현장 사람들은 일제히 어리론가 사라진다.

어김없는 풍경.... 흡연실 또는 자판기가 위치한 공간... 공장에서 쉬는 시간동안 제일많이 분비는 장소이다.

 

100분간의 작업에 10분의 짧은 휴식... 시계를 보면서 작업의 1/4가 흐르고, 2/4가 흐르고, 3/4가 흐르면 어김없이 흡연실과 자판기는 만원을 이루며, 작업시간동안 이야기하지 못한 말들을 서로가 번잡하게 한다. 참 보기 좋은 광경이다.

 

고된 노동시간에 꿀맛같은 짧은 휴식.... 공장 기계와 작업에 지친 육체의 휴식시간... 참 정겹고 기대되는 시간이다.

 

공장을 떠나온지 언 4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작업장 풍경은 그리 변한게 없다.

작업종료 소리도 예전 공장의 소리와 똑같은 소리이다. 참 정겹고 즐거운 소리이다.

 

요즘 용인 남사에 위치한 종이완충제(삼성과 엘지 전자 납품 박스공장) 공장에 용역사무실에서 파견나가 몇일간 일을 하였다.

 

종이포장이 이리도 힘든 일인지 처음알았다.

포장하는 것도 장난 아니지만 숙련공들의 손놀림이 장단 맞추지 못해서 고전하고 있습니다. 박스포장 기계에서 나오는 박스들을 가지런히 쌓아올려야 하는데 숙련공의 손놀림이 얼마나 빠른지... 계속해 쌓여가는 박스를 보면서 푸념만 휴~~~~ 하면서 일을 한답니다.

 

오늘도 그러나 어김없이 시간이 가서... 전 용역회사에서 나온 사람이라 인건비가 비싸 잔업하라는 소리를 안하더군요. 그래서 오늘 일당을 받고 내가 귀거하는 공간으로 왔답니다.

 

이전 공치는 날이 많았는데... 박스공장이 내 삶을 이어주고 있습니다. 하하하~~~ 돈 많이 벌어야 할텐데.... 이번달 대출금이 걱정이다.

 

그래도 죽기야 하곘냐.... 카드 돌려막기 명수의 진면목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씁씁함과 치밀구나...  그래도 좋은 날이 오겠지.....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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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첫출근....

  • 등록일
    2004/10/06 20:11
  • 수정일
    2004/10/06 20:11

새벽 공기를 가르며... 신새벽 스트를 하기 위해 출정하는 마음으로.... 오늘 용역회사로 달려갔다. 정확히 말해 어제 발암에서 오산까지 걸었던 터라 발 바닥에 물집이 잡혀 절뚝거리며 용역회사로 출발F....

 

신새벽을 가르며 갔건만 용역회사 사장은 나오지 않았다.

이에 공쳤냐구요. 아니요. 한 30분 기다렸더니 사장이 나오더군요. 그리고 나에게 던지는 한마디.... 어 아저씨 들어와서 기둘려... 네... 그리고 뭐하였던 분이야 물어본다. 그래서 제가 다니던 회사가 부도가 나서 어쩔 수 없이 일하러 왔다고 거짓말을 그럴싸하게 하고.... 용역회사 일용잡부로 등록....



 

용역회사 사장... 군대 어디나왔어 물어본다. 5사단이요... 병과가 뭐야... 행정병이요...  그리고 조금있다.. 나 5사단에서 근무하였는데.... 대광리 사단본부 근처에 있는 5사단 수색대에서 근무하였다며 아는 체를 한다. 용역회사 사장과 노가리를 1시간 풀고, 남들보다 쉬운 곳으로 나갔다.

 

오늘 돈 벌었다. 얼마 받을진 내일 또 신새벽을 가르며 출근해 봐야 알곘다.

하하 나 부자가 될 것 같다. 일당 6만5천원짜리 일용잡부니까... 하하 이제 밥걱정 없이 살겠구나 당분간은... 내일은 어디로 가나... 하루벌어 하루사는 일용직 잡부의 삶을 넘어 건설노동자로 거듭날 수 있을까...

 

공장 프로그램 일환이니 뭐.... 내가 건설노동자들의 삶까지 맞닿을 수 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제발 그 발 아래 발톱 만큼이라도 따라 가봤으면 좋겠다.

 

노가다 우리 일상 말로 막노동.... 내 적성에 딱 맞는 일이다.

 

하하..

 

간장 오타맨이....

 

p.S 내 옆에 지금 스리랑카 이주노동자가 스리랑카 인터넷 라디오 방송을 들으면서 고국 소식을 듣는다. 난 뭔 소린지 모르겠지만 그 친구 참 얼굴이 밝다. 참 행복하다는 것은 이런 걸까... 나도 스리랑카어 배워야 겠다. 아나운서 아저씨 목소리 넘 멋찌다. 그리고 아가씨 목소리도 허스키하고.... 내가 말은 모르지만... 팝송 하나는 똑같아 동질감이 조금 간다.

이 친구 장목사님에게 일자리 없어요 라는 질문을 자주한다. 회사 잔업없다는 말을 자주하며, 다른 일없냐고 물어본다. 스리랑카에서 온지 3년 내년이면 비자 기간 만료... 불법노동자의 길을 결의하지만.. 필리핀 이주노동자(카사만코 조직적 커뮤니티가 없고) 방글라데시처럼 조직적이지도 않기에.... 불법단속을 피할 묘안이 없다. 이도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노동자는 저력이 있지 않은가? 악법은 어겨서 깨트린다는 명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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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

  • 등록일
    2004/10/05 21:41
  • 수정일
    2004/10/05 21:41

** 이 글은 공장생활 프로그램으로 제출될 나의 생애 라이프 스토리를 써본 것입니다. 이 공간에 써 내려갔던 글과 내가 어린시절 기억이 닿은 생각들을 써내려 간 내용입니다. 그냥 올려놓아 봅니다.

 

@ 어린시절...
어린 시절 전남 영암 시종면 구산리 1리(원구산)에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후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내가 3살적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재혼을 하시어 내 동생들(남들은 이복동생이라 한다. 그래서 동생들의 성은 정씨이고 내 성은 김씨이다. 커서 생김 세와 키가 달라 다른 분들이 물어 볼 때 제일 난처한 질문이다.)을 낳으셨다.

 

난 유년시절 그냥 시골 들판을 뛰어놀기를 좋아하였던 철부지였지만, 늘 어머니에게 짐 같은 존재였던 것 같다. 나로 인해 어머니는 많이 힘들어하였던 기억이 내 눈에 선하다. 눈물도 많이 흘리셨고, 나로 이해 가슴 졸이는 날이 만났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래서 내 유년시절은 그리 밝지만은 않다.(그 이유는 외가 집에서 나를 친가로 보내라는 삼촌들의 성화와 양아버지 친척들에서 받았던 설움이었을 것이다. 참 내가 어려 어머니 방패막이 되어주지 못함이 어린내 마음을 때렸던 것으로 기억난다.)



이 유년시절 나를 이끌었던 것은 아마도 어머니 다음으로 누나였다. 누나는 나에게 늘 자신감을 주는 존재였으며, 나와 피한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늘 내편이 되어주었던 존재이다. 지금도 내편이다. 내가 무엇을 하고자 하면 늘 누나와 상의를 한다. 누나는 나에게 어머니와 같은 또 다른 존재이다. 내가 커가면서 늘 누나의 그늘에서 안식과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힘을 준 존재였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그나마 나의 유년시절은 풍성하지는 않지만 그리 나쁘지도 않았다. 어머니가 재혼한 것 이외에는 별 다른 가정과 다를 바가 없이 살았다. 다만 낮선 친척들이 속닥거리는 소리만 제외하면 시골에서 농사 일 도와가며 초등학교까지 시골에서 유년기를 보내었다.

 

양아버지와 난 대화가 없이 지내는 사이이다. 그냥 시키는 일 이외엔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는 그냥 아버지 빈자리를 묵묵히 채워주는 존재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은 몸이 아파서 고생하시지만 그래도 나를 믿고 이해해주시는 분이다. 지금은 병원에 오고가고 하시느라 제대로 가보지 못하지만 늘 마음 한편에 고마움을 간직하시게 해주신 분이다. 내가 지금 이 같은 삶을 살 수 있는 것 또한 그분의 노력이 아니고서는 어려운 일이라 생각한다. 마음 한쪽 늘 고마움의 대상이신 분이다.    

 

산과 들에게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이 많았고, 놀이문화가 많았다. 아이들과 소나무에 올라가 치타가 되어보기도 하였고, 강가에서 멱감(수영)으며 놀고, 산과 들에서 이리저리 뛰어놀았다. 그리고 농사일은 뭐 이리도 많은지 소여물 줘야지,... 닭과 돼지 밥 줘야지..... 놀고 뛰고 일하고 정말 정신없이 자연과 벗 삼아 일상생활을 하였다. 지금 초등학생 1학년  아이들에게 학교를 가기 위해 15리(6Km)거리를 도보로 등교하였다.. 그나마 난 학교 친구들 중에 그리 멀지 않는 거리를 걸어 다녔다. 최고로 멀리 오는 친구는 한 25리(10Km)를 걸어오는 초등학교 같은 반 급우가 있었다. 이렇듯 나와 내 동네친구들 그리고 내 친구들은 시골에서 이렇게 학교를 다녔다. 읍내나 면 중심에 살지 않는 사람들은 다 이렇게 도보로 학교를 다녔다. 대중교통 수단은 꿈도 꾸지 못하였다. 대중교통 수단이 아예 없었으니까? 길은 구불구불... 저수지를 지나서 산을 넘고 또 산을 넘고... 개천을 넘어서 도착한 학교면 중심은 나에게 신천지였다. 신기하게 많았으니까... 촌에서 살면 다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촌에서 살아도 5일장 날은 정말 분비는 날이다. 먹 거리도 풍성하고 그 시골 동네 모든 사람들이 나와서 자신이 직접 재배하거나 채취한 것이나 기른 것들은 교환하고 분주하다. 또 가을운동회는 면 전체민의 축제의 장이다. 하하 재미난 것들이 많았다. 지금은 사라져 버렸지만....

 

인생의 길잡이인 선생님을 만나 막연히 공부해야겠다는 고민을 갖게 됨.
5학년과 6학년 담임선생님이었던 김인호 선생님을 만나면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됨. 그 당시 깡촌에서 보기 어려운 세계명작동화 100권과 세계위인전 100권을 전부 통독하게 하였다. 이 때 나도 그 위인처럼 큰 인물이 되어보겠다는 생각을 막연히 가졌었다. 그리고 선생님은 늘 우리에게 사람이 살아가면서 최우선적으로 남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소리를 무척 많이 들었다. 이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늘 회초리보다 마음으로 가르쳐준 내 스승 중 가장 기억이 남는 인물이다. 

 

내 유년시절 이렇다 할 이야기는 별로 없다. 다만 남들과 같이 산과 들로 들과 산을 벗 삼아 이리저리 뛰어놀던 시절 친구가 있어 좋았고, 삶은 그리 풍족함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았던 유년시절. 하늘의 구름을 보며 감탄하구 쏟아지는 별빛이 있어 좋았던 고장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기억이 납니다. 

 

@ 중학교 서울 상경
초등학교는 영산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는 고장에서 살았고, 이 곳 면소재지에 위치해 있는 시종국민학교(지금은 초등학교) 졸업하고 서울로 중학교를 유학 왔습니다.

서울 상경... 외롭고 낮선 공간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1학년을 거의 혼자 보내었던 기억이 납니다.

 

형이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니고 누나가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어서 나는 광주로 학교를 가지 않고 서울로 상경하였습니다. 외가 집이 서울에 있어서 부모님은 광주보다는 서울이 낮다고 판단하고 서울에서 중학교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촌놈의 서울상경이 시작되었습니다. 부모님 왈 니 중학교 여기서 다니면 농사꾼밖에 못될 것 같으니 서울 가서 서울 물 좀 먹고 공부 좀 하라고 신신당부하며 서울에서 형과 누나와 함께 유학생활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주로 외가에 늘 주말마다 눈도장 찍으러 가야했고, 외숙모는 우리가 잘 살고 있는지 늘 불시에 검문을 하러 오셨습니다. 그래서 형과 누나 나는 늘 외가의 감시 속에서 자취생활을 하였습니다. 도시락은 외숙모가 종종 저녁에 와서 싸주고 가셨다. 반찬은 떨어질 만하면 외숙모가 갖다 놓아서 먹을거리는 늘 풍성했습니다. 쌀은 집에서 올라오지 과일도 집에서 올라오지 부족함이 없는 유학생활을 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촌놈의 상경.
비둘기호를 타고 여행을 가거나 시골에서 올라와본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비둘기호는 통일호와 무궁화호와 다르게 역마다 다 썼다. 그래서 비둘기호는 말 그대로 비둘기 집과 같이 시골사람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기차였습니다.

 

언제든가 방송에서 기차 안에서 시암 닭이 있고, 참기름, 시골할머니와 아낙네들의 개나리 짐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가시는 어른신의 풍경.. 광고를 본 기억이 난다. 거의 그랬다. 시골 인심은 서울에 있는 자식들에게 줄 농산물이 가득히 싸가지고 비둘기호를 타고 서울로 상경하는 이들의 모습은 아직도 추억저편 잊혀 지지 않습니다.

 

부모님은 우리를 공부시키기 위해 소를 많이 키우셨다. 난 그런 소 키우는 일이 싫었습니다. 내가 소 여물을 쓸어야하고 여물을 주어야 하기에 참 싫었습니다. 마냥 놀고만 싶었던 시절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내가 서울로 뜨고 이건 내 동생 몫이 되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없는 살림에 소(오늘따라 우리 집 누렁이가 기억난다. 시골에 상경하여 공부중인 형과 누나 학비를 내던 날이면 어김없이 누렁이 새끼 송아지를 장에 나가 파는 날이다. 누렁이는 음메 음메~~~~ 소리를 내가며 자기 자식이 팔려 감을 알고 그 큰 눈동자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 모습. 이 모습은 연중행사였다. 누렁이가 낳은 새끼들은 몇 마리 남기고는 거의 팔려나갔다. 매년 자식을 낳고 팔고 하기를 반복 누렁이의 생명탄생은 우리의 공부에 죄다 사용되었습니다. 참 고마운 우리 집 소. 지금은 죽어 없지만 참 고맙다. 부모님은 형들과 누나 나까지 공부시킨 누렁이를 잡아먹지 못하고 우리 집 뒷산에 묻었다. 소에 대한 예의였을 것이다. 집안 농사일에 불평불만 없이 기꺼이 자신의 노동력을 주었고, 자신이 생명분신인 자식을 우리에게 기꺼이 헌납하였던 누렁이. 아니지 우리가 강제로 빼앗은 것이 맞겠지. 그런 누렁이에 대한 예의였을 것이다.)까지 없었으면 어떻게 형, 누나, 나, 동생까지 대학커녕 고등학교 보내지 못하였을 것이다. 누렁이와 부모님에게 그래서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서울 생활은 그리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시골에 비해서는 좋았습니다. 시골 생활보다 안락하게 공부를 할 수 있어서 좋았다. 무엇보다 형이 애지중지해 하는 라디오가 있어 좋았던 시절입니다. 이 라디오를 들으면서 밤에 공부도 하고 노래도 듣고 참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라디오를 통해서 나는 외국 노래를 접하게 된 계기로 서울로 상경하여 중학생이었던 때였다. 형은 거의 대학생이라서 술 먹는 날이 많아서 라디오를 거의 듣지 않았고, 누나는 집에 돈을 보태기 위해 과외를 해서 학교를 파하고 온 집에는 거의 나 혼자 있었다, 간혹 외숙모(외숙모가 오는 날이면 나는 외숙모를 따라서 외식을 하였다. 서울에 뭐 이리도 맛난 것이 많은지... 외숙모는 우리들에게 어머니 존재였던 것으로 기억난다. 어머니는 농사일과 우리 막내 여동생을 낳아서 거의 움직이지 못하였다. 막내여동생과 나와의 나이 차이는 13살차...^^)가 오면 반찬과 도시락 꺼리를 가지고 오시는 날 이외에는 거의 혼자였다. 난 라디오가 중학교 1학년 때 제일 친한 친구였다. 친구가 생겼어도 라디오와 친구사이는 끝질 못했다. 좋은 노래도 듣고 가슴 아픈 사연 많이 들었다. 중학생인 내가 이해하기는 어려운 글들의 사연이 많았는데. 가슴 뭉클함은 이해와는 상관없이 내 가슴을 때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참 라디오 많이 들었습니다.

 

중학교 때 개인적으로 낭만적 삶을 영위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을이면 제 자신에게 엽서를 쓰든가 아니면 친한 친구들에게 엽서 한 장을 사서 마음에 있는 이야기들을 주고받던 기억이 납니다. 먼 옛날의 이야기가 된 지금 저는 낭만이라는 것에 대하여 이제는 매료되지는 않지만 그 당시 사춘기적 열망을 낭만과 사랑이라는 것에 대한 막연한 신뢰와 희망을 가지면 저의 개인적 안위를 불태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웃음 짓게 하지만 그 당시 저의 인식과 사고는 오로지 저 개인을 향해 있었습니다.

 

@ 고등학교 생활
고등학교는 별 탈 없이 다녔다. 다만, 난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한 가지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꿈은 고등학교 내내 저의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학입시에서 제가 원하는 과에 입학하지 못하면서 저는 자의반 타의반 화학 선생님이 되는 꿈이었다. 유난히 난 화학과목을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초등학교 5, 6학년 은사이신 김인호 선생님의 영향도 컸을 것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남들은 사춘기다 이성 친구 사귀기 분주할 때 저는 저의 꿈을 먼저 이루기 위해서 학교와 학원만을 오가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친구는 거의 반 급우 아이들.. 지금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때 사귀었던 친구는 몇몇 반 급우 빼놓고는 없습니다. 이에 제 선택을 위해 고등학교를 보내었던 것이 지금 살아오면서 후회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공부보다는 친구 사귀는데 열중하였어야 하는데... 친구 사귀기도 보다 공부에만 전념하여 많은 친구가 없다는 것이 때론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고등학교 생활은 거의 학원과 학교를 오가는 기억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고, 남들과 달리 시골에서 어렵게 보내주는 돈으로 공부를 해서 그런 이유도 있지만.... 꼭 재수하지 않고 대학에 들어가 부모님에게 효도하여야겠다는 막연한 생각... 그리고 남들보다 조금 편하게 살 욕망에 사로잡혀 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나보다 낮은 이들을 봐야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살아오면서 그때 취한 태도 때문에 종종 같은 반 급우들에게 미안할 때가 많습니다.
 

@대학기간
서울에 있는 대학입학.... 원하던 화학과는 떨어지고 2지망으로 지원한 화학공학과에 입학하였습니다.

호남향우회(호남에 적을 두고 있는 이들의 모임)에 가서 저는 호남향우회 회장 겸 우리과 선배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 선배는 수 없이 들어오지 않아 과에서 거의 볼 수 없었고, 다만 선배들의 말로는 운동권 선배이고, 참 멋있는 선배라는 말을 들었던 선배입니다.

이 선배가 자신의 동아리에 오면 늘 술을 융성해 대접해주겠다는 말이 화근이 되어 저는 이 선배가 있는 사회과학동아리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동아리에 가입하고 활동은 거의 하지 않고 전 술 얻어  먹는 일에만 열중하였습니다. 그런 내가 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이 선배가 군대에 입대하고 얼마 후 의문사 하였다는 소식과 이 의문사 대책위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운동에 입문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시작도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동구사회주의권의 붕괴는 선배들에게 크나큰 충격이었습니다. 같은 조직내 있던 선배들 반 이상이 운동을 정리하고 자신의 길을 걷게 된 계기이기도 합니다.(저희 동아리는 한국사회구성체 논쟁 3편, 출판사 죽산에서 출간한 조직논쟁 편에서 나오듯이 CA그룹(제헌의회)에 속해있던 사람들이며, 87년 범민주단일후보와 민중후보론으로 갈라진 CA그룹 소수파였습니다. 선배들의 대부분이 다수파였고, 그나마 소수파였던 선배는 이전 백태웅(가명 이진경)과 박기평(가명 박노해)가 결성한 노동해동을 모태로한 ND(민족민주운동그룹, NDR론: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 기반한 남한에서 러시아형태의 이 단계 {부르주아 혁명을 통한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이행}혁명을 주창하던 맑스-레닌그룹입니다.

현장에 나갔던 선배나 비합운동을 하였던 선배 대부분의 정리는 저를 또 동아리에서 혼자이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90년 후배들을 받았습니다.

 

정파조직의 범람은 제가 속한 학교도 피해가지 않았습니다. 후배들과의 논쟁.. 그리고 분리.... 저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모욕감으로 학교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다른 서울에 있는 타 대학으로의 입학 그리고 새롭게 이전 조직적 끈을 갖고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이 곳 또한 자유로운 공간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공간에서 저는 학생운동을 넘어 노동운동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92년 총선... 민중당의 출현과 민중의독자적정치세력화(이하 민독정)을 위해 결성된 학생선거투쟁연합(이하 학선투련)에 결합하면서 성동구 옥수동에 있는 김철수(서울대 신문과 77학번) 선배의 선거캠프에 결합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저의 역할은 응봉도 조직책이었습니다. 총선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노동자들의 정치세력화가 왜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 선거투쟁에 결합하면서 하나하나 배워나갔습니다.

 

잊혀 지지 않는 노동자... 저는 진정한 노동자분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노동자의 역동성을 알았습니다. 당당한 그분들... 왜 노동자가 정치의 주인이 되어야하는지 늘 길거리 유세를 통해 서울 성동구 주민들에게 알려나갔습니다. 늘 힘찬 나날들이었습니다. 무엇이 올바른지 자명하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노동자 형과의 대화 현장의 어려움을 알았고, 노동자들의 처한 주객관적 조건을 일정정도 알아나갈 수 있었습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길거리로 정치의 주인으로 나서게 하였는지 몸소 느낄 수 있는 계기였죠. 그분들의 사고는 분명하였습니다.

 

선거는 그러나 우리 예상과 다르게 4000표 득표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래도 예상보다 많은 득표하였다는 위안으로 92년 뜨거웠던 총선투쟁은 이렇게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92년 백기완 민중대통령후보선거본부(이하 백선본) 결합하여 92년 총선의 아픔을 딛고 민중후보를 알리는 작업을 12월 겨울 동대문 나눔의 집이 위치한 서울시립대 근처에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겨울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그때 나는 동기들과 함께 벽자보 붙이러 동대문 일대를 돌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추운 겨울 벽자보 붙이는 손이 얼어 손을 마구 비벼대며 추위를 이겨냈던 기억들... 춥지만 마음 따스한 겨울을 보냈습니다. 아직도 잊혀 지지 않는 그림 백선생님이 머리를 휘날리며 연설하던 기억.... 그리고 그 때 백선본 만원후원회 조직을 위해 팔던 책... “그들이 대통령이 되면 누가 백성노릇을 할꼬”라는 책... 정주영의 아파트 반 값 선언 등... 그러나 3당 야합으로 출마한 김영삼이 문민정부라는 정부를 출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던 기억이 아련합니다.

 

93년 총액임금분쇄 투쟁 현장... 대통령이 된 김영삼은 문민정부를 자처하며 노동자들의 임금을 현재 유지되는 연봉제 개념의 총액임금제를 시행할 것을 공표하자 노동자들은 일제히 한양대로 집결하여 이 투쟁에 대한 저지 및 임·단협 쟁취를 위한 투쟁을 하였던 기억이 아련합니다. 그 당시 전노협 깃발을 내걸었던 수많은 노조들의 힘찬 함성은 87년 각성된 노동자를 벗어나 역사의 주체로 노동자가 위치해 주었음을 확인하는 계기였습니다.      
 
94년 사랑의 열병을 알았습니다.
같은 동아리 후배를 짝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연애는 혁명의 적이라 늘 선배들에게 못이 탈토록 들었던 제가 동아리 여 후배가 내 가슴에 들어오더군요. 참 힘들었던 시기였습니다. 좋아했지만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었고, 늘 보고 싶지만 보고 싶단 말 할 수 없는 심정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용기 내어 삐삐 문자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정중히 거절당하였을 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연애를 하고 있다는 말을 남겼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을 알겠더군요. 왜 빨리 말하지 못하였을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가슴이 아리더군요. 이 고통이 한 2달간 가더군요. 내 생애 누구를 그토록 마음에 두어본 적이 처음이었던 만큼 시간이 오래갔습니다. 거의 그 2달간 학교 후배 선배 동기들 날 위로해주기 위해 같이 활동하는 이들 애간장 태우게 하였습니다. 저의 짝사랑은 2달간의 위로기를 거치고 막을 내리고, 전 이 충격에서 인지 모르겠지만 사람을 마음에 담아두는 것을 하지 않았습니다. 좋은 감정이 생기기 이전 제가 먼저 그 고리를 잘라버리게 되더군요. 아픔이 크긴 컸던 것 같습니다.   

 

95년 후배의 죽음...
군대에 입대한 후배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후배 집에 방문하였습니다. 어찌된 일이냐고,... 그러나 부모님은 시신도 확인하지 못하고 화장되어 있는 함을 들고 왔다고 아무도 왜 죽었는지 이야기를 해주지 않더라고 저희에게 말해주시더군요. 눈시울이 붉어지시면서... 그러나 저희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습니다. 그 당시 국방부에 탄원서도 내보고 진상조사를 해달라고 목청 높여 왜 쳤지만 공염불입니다. 사진 한 장 없이 사고사로 죽었다란 말만 국방부와 사단관계자는 말하더군요. 95년 후배하나를 가슴에 묻어야 했습니다.

 

96년 조직사건으로 수배 및 구속
사회주의학생연합 사건으로 수배 및 구속이 되었습니다. 실형 2년에 자격정지 2년의 형량을 받고 대전교도소에 이감되었습니다. 교도소를 들어가 본 사람이라면 그곳이 갖고 있는 폐쇄성과 그 곳이 갖고 있는 고립에 대한 경험을 하였을 것입니다.

 

잡범이 아니라 정치사범으로 들어간 이들에겐 그나마 그 공간이 자신을 가꾸거나 신심을 쌓은 공간이었습니다.

 

교도소도 군대와 마찬가지로 매우 춥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선 사람내음이 간절합니다. 매주 누군가의 면회를 기다리며 하루하루의 삶을 지탱하는 것 또한 도통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누군가 왔다면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있어서 좋고, 세상사를 알 수 있어 짧은 만남이지만 매우 유의미한 시간입니다. 그래서 교도소에 수복을 입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주말이 갖는 의미는 다른 사람이 갖는 의미와 사뭇 다릅니다. 늘 기대되는 날입니다.

 

후배들이 면회를 오면 학교소식을 접할 수 있고, 가족들이 오면 그동안 가족들에게 제대로 하지 못한 자신을 책망해 봅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은 지극히 자연적인 것이지만 교도소에서 수복을 입고 있는 사람은 그 자연스러운 것이 그리움으로 점철 될 때가 많습니다. 그리움에 목마르고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어 미치도록 사뭇 칩니다.

 

문자를 잊지 않기 위해서 책을 보는 것인지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 책을 보는 것인지 그 의미는 서로 다르지만 그곳의 시간은 군대에서 말하는 시계가 꺼꾸로 돌아간다는 것처럼 하루하루 시간이 손살 같이 흐르지 않습니다.

 

저 마다 죄목은 다르지만 서로 아픔을 가지고 이곳에 온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곳도 자본주의에 맞닿아 있는 곳이라 돈이 있는 놈들은 호의호식하고 돈 없는 사람들은 궁핍하게 연연해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유가 박탈당한 것도 억울한데 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천대받는 것은 사회나 교도소나 다름없습니다.

 

면회를 자주 오는 이들은 당연히 영치금이 많이 들어옵니다. 그리고 사회에서 한 가닥 한 이들 조폭이나 정치 관료들은 교도소장이 특별대우를 해줍니다. 그들의 사회적 지위가 그대로 들어나는 곳 그곳이 교도소입니다.

 

법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지만 정녕 돈없고 뺵없고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이는 통용되는 단어가 아니며, 통용되는 사회도 아닙니다. 돈이 없다는 것으로 멸시받아 분을 삭이지 못해 범죄를 저지른 이가 부지기 수 입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 이유가 있습니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는 말을 이 곳에서 절실히 느낍니다. 그러나 이곳 수의를 입고 함께 생활하는 이들은 사회가 규정한 범죄라는 행위로 인해 법 집행을 통해 형 집행을 받고 있으나 형 집행은 돈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갈라놓습니다. 그래서 이곳에서도 돈 있는 사람들에게 비러 붙는 간신배와 같은 존재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저는 교도소에서 청소반장 요직입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소장의 특별배려로 맡아서 진행하였습니다. 청소반장은 다른 사람들보다 교도소 내 이동이 조금은 자유롭습니다. 그래서 운동할 시간도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많고, 종종 교도관이 버린 담배꽁초를 가지고 피워가면서 담배가 주는 희로애락에 농락당하기도 하지만... 자유에 갈망은 끝이질 않더군요.

 

저는 1년하고 조금 넘는 기간을 교도소에서 생활을 하였는데... 이곳에서 몇 년 아니 반평생을 지닌 사람들을 보면 참 가슴이 뭉클합니다. 

 

@대학 졸업시기의 고민
제가 운동할 당시만 해도 이렇게 부문운동이 확장되고, 사회적 목소리를 내지 못한 상황이었지요. 운동의 사회적 확대가 미진한 상황이었다고 개인적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의 시대상황은 정치사회적 명확성과 합목적성은 있었습니다. 거대한 담론도 아니었으며 참 소박하지만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절박한 상황이었죠. 유신철폐, 근로기준법 준수, 호헌철폐 독재타도, 민주주의 쟁취, 민주노조 사수, 노동해방, 전노협 건설, 민중의독자적정치세력화(이하 민독정), 노동자민중의정치세력화, 사회주의, 사민주의 등 년도를 거듭할수록 사회적 정치투쟁에 대한 정치적 각성과 스스로가 정치적으로 발전하던 시기였습니다. 이를 보고 어떤 이들은 사회적 운동이 확장되지 않았던 시기에 나타날 수밖에 없는 전형적 운동방식이고, 당면 운동에서 군부독재에 의해 필연적으로 파생된 문제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맞는 말일 수 있습니다.

 

이 는 저의 짧은 소견으로 보았을 때 89년을 정점으로 한 이념운동의 르네상스시대에서 나타난 현상이 아니었을 까요. 명확한 타도의 대상이 있었고, 이를 통해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해결해야할 절박한 심정에 대한 전사회적 공감대가 있었기에 가능하였습니다. 학생들은 학생 나름 데로 군부 탄압이 있었고, 노동자들은 노동자들에 대한 필요가 있었습니다. 노동운동이 70년대에서 90년대 초반까지 주요한 운동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어찌 보면 그들의 계급성이기보다는 운동이라는 지형에서 투쟁하고 실천하는 단위가 그들뿐이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라는 개인적 판단을 가져봅니다.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저는 이렇게 판단이 들더군요.

 

89년 동구사회주의권의 붕괴는 좌파라 통칭하는 운동단위에게 있어서 시련과 모색이라는  명제를 던져주는 참혹한 고통의 시작 기였습니다. 그 수많았던 강단좌파들은 하나둘 모델 사회주의 실패를 보면서 자신의 이론적 업적과 이념을 폐기하거나 수정하는 기간이었습니다. 이들은 포스트주의의 선봉장으로 대거 이탈하였습니다. 이외에 모델 사회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유고의 티토즘을 차용하거나, 이탈리아 그람시, 프랑스의 알튀세르. 헝가리 루카치 등 다양한 사상가들에 대한 활동에 대한 사상에 대한 접근적 시도가 한창 남한 좌파운동의 부흥이라는 미명하게 진행되던 시기이도 합니다. 맑스와 레닌 책도 다 읽어보지 못했는데... 이들 책까지 읽어야 한다는 것은 어렵지만, 모색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작업이었습니다. 일부에서는 더욱더 맑스-레닌주의에 귀착하여 모색하기도 하였으나 이 기류는 막지 못하였습니다. 참으로 갑갑한 현실이었습니다. 90년대 중초반과 후반에 나온 노래들을 보시면 다 서정적이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자신의 최면에 빠진 노래가사들을 접할 것입니다. 96년 말 97년 초 노동악법철폐투쟁이 노동자계급의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하기 이전까지 모든 운동단위들은 모색이라는 미명하에 수없는 단체들이 형성되고 없어지고 다른 형태로 운동을 보존하는 활동들이 주를 이루면서 운동을 이끌어갔습니다. 참 혹독하게도 유의미한 단체들이 운동적 전망과 비전이라는 혹은 이론적 자기 도그마에 빠져 수 없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은 또 다른 자양분을 만들었습니다. 시민사회운동의 형성.... 경실련의 출현과 참여연대.... 그리고 환경운동연합.... 초기 이들이 만들어지는 것을 지켜보고 바라본 저로서는 초기 그 당시만 해도 그들 활동에 대해서 그리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제 판단 준거는 그들 운동은 명확히 개량적이고 계급대중에 대한 이해를 복무하는 운동이 아니기에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이 메이저 운동을 자청하면서 모든 사안에 있어서 그들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 실천적 활동은 미약하였다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해 그들만큼 우린 대중 활동공간에서 멀어져 나갔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장기인 조직화, 교육, 정치투쟁은 위기이니 시련이니 모색이라는 자신의 도그마에 빠져서 수렁의 늪을 빠져나오지 못하였습니다. 제가 판단하기로 노동법개악저지투쟁 이전까지는 이러하였습니다. 우리는 97년 초반의 힘을 갖고 대중 활동에 대하여 힘찬 전진의 발판은 마련하였지만, 장기인 조직화 선전선동, 투쟁은 이전에 비해 많이 거세되었습니다. 지금 민주노총이 버티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97년 투쟁과 비정규직, 이주, 장애, 여성노동자와 중소영세사업장투쟁, 장기투쟁사업장의 투쟁 신심으로 버티고 있다 판단이 듭니다. 우린 우리스스로 자랑찬 노동자임을 간혹 망각할 때는 없는지... 민주적 회의체인 노동조합이 노동조합 조합원의 이익집단이라고 자본과 정권에 의해 규정받는 것은 이전에 비해 노동조합의 정치사회적 투쟁이 많이 약화되었기에 자본과 정권으로부터 직접적 공세를 받고 있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노동조합은 엄연히 이익집단일 수밖에 없습니다. 노동자계급의 이익집단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목소리를 내는 가장 민주적이고 조합원 대중들과 호흡하는 대중조직입니다. 이전 전투적 노동조합론, 민주적 노동조합론, 자주적 노동조합론 등 노동조합을 둘러싼 노동조합 대중운동론은 정치세력화가 미약한 우리 지형에서 가장 유용한 무기였고, 해방구였고, 투쟁의 구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린 90년대의 무수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분을 빼앗기거나 스스로 잃어버리도록 방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책임이 노동조합의 문제는 아닙니다. 이를 이끌었던 활동단위의 근시안적이고 자신의 이념적 토대를 형성하기 위한 자기 도그마에 빠져 송두리 채 우리 스스로가 팽개친 것입니다. 누구를 탓할 수 있습니다. 선배열사들이 자신의 몸을 사르며 지키고자 하였던 그 공간은 많이 변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부정하는 이도 있겠으나 과거에 비해 많이 변하였습니다. 발전적으로 변화 하였나 결코 발전적으로 변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심각한 수준은 아니지만 이전에 비해 많은 문제점이 있다고 저는 판단이 듭니다. 

 

@ 공장생활
제가 근무하던 곳은 남동공단 다성이라는 대우자동차 차체 부속을 제조하던 업체로 스폿(점) 용점,  산소용접, 프레스를 주로 하는 업체로 레간자, 라노스, 누비라 차체 생산라인이었습니다.
 
그 당시 주야 맞교대로 근무로 근무하면서 노동현실의 어려움을 몸소 느꼈습니다. 노조를 건설하려고 들어갔는데 중소영세사업장의 어려움만 몸으로 느끼고 나왔죠. 정확히 말해 현장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1년이란 짧은 현장생활을 마감하였습니다.

 

일이 힘들어서도 아니고, 몸이 피곤해서도, 아니면 생산현장의 열악한 노동현실 때문에 퇴사를 한 것은 아닙니다. 이전 구속경험이 있다 보니 남동경찰서 정보과에서 나와 위장취업 심사에 걸려 짧지만 소중한 경험을 마감하여야만 했습니다.

 

제가 다니던 현장에서는 아이엠에프로 인해 상여금이 대폭 삭감되고 년차 수당이 없어 졌습니다. 저는 남자라 일당 13,000원으로 계약(정규직의 경우도 일당을 계약하고 현장에 취업해야함, 중소사업장의 경우는 부지기수임.)하여 월(주 44시간 노동기준 기준) 39만원의 기본급에 잔업수당, 야근수당, 특근수당을 보태야 월 80만원의 봉급을 받을 수 있는 현장에서 근무하였습니다. 이 땅의 모든 노동자의 현실이 아직 변화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대공장의 경우는 기본급과 상여금의 수준이 높이 책정되어져 있기에 높지 않은 임금이라 말하지만 중소영세사업장의 경우는 상상을 초월하는 임금입니다.

 

상여금은 말할 것도 없고, 더욱이 문제시 되는 것은 여성노동자의 경우 저보다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저보다 숙련되고 오랜 기간 노동하던 어느 늙은 여성노동자(경력 10년)의 일당을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저보다 500원이 적은 일당으로 노동을 강요받고 있더군요. 그분은 설날, 추석을 빼고(제가 1년 현장생활을 겪을 때 노동한 시간)매일 나오시는 분이었는데, 월급봉투를 보니(국민연금, 의료보험, 산재보험, 고용보험, 갑근세 제외, 잔업 68시간- 주간 노동의 경우 매일 10시 야근과 포함한 시간 임. 여성노동자의 경우 출근시간이 오전 8시인데 수동 스폿(점) 용접기를 정비하기 위해 현장 근무를 위해서 오전 7시까지 출근해야 함.-, 특근 4일 포함)하고 72 만원을 수령하더군요. 이게 노동의 현실이라 생각하니 암울하더군요. 저야 대학이라도 나와 마음만 먹으면 공무원 시험, 고시 등 다른 방법으로 돈 벌 수단을 찾을 수 있는데, 그 분들은 이 월급에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을 보면서 나를 되돌아보았습니다. 저의 삶의 목적이 형성 되었습니다


@ 운동적 바램
시민사회운동세력은 스스로 대중과의 접점을 만들어가며 자신의 운동영역을 계급적 기반에는 복무하지 않았지만 형성하여 나갔습니다. 그리고 무수한 담론들이 형성되면서 운동에 있어서 동일성은 많이 희석 되었습니다. 이전 이론의 빈약함에서 그런 것인지는 판단할 수 없지만 정보의 홍수에서 우린 지킬 것과 계승할 것에 대한 많은 사안들을 정리하지 못한 채 새로운 이념 모색과 위기극복이라는 미명하에 우리의 발전 동력은 정리하지 못한 점이 정말 아쉽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원동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그 당시에 대한 활동들은 회자하지만 그 회자는 술안주가 된지 오랜 시간이 경과되었습니다. 활동가들의 치열함은 존재하나 그 회자가 술안주로 전락한 지금,,,,, 우리의 진단이 얼마나 정확할 수 있을까요. 단적으로 구호는 과격하되 실천은 부재한 우리의 모습에 전 서글픔이 밀려옵니다.

 

부문운동의 발전은 또 다른 운동의 원동력을 낳았습니다. 이런 원동력에 우린 다시금 귀 기울여야 합니다. 운동사회내성폭력, 노동자계급을 위한 커뮤니케이션 전략(정보통신 및 미디어 전략), 평화와 인권, 빈민, 소수자(장애, 이주, 여성, 성적소수자, 비정규직 등) 운동이 그 단적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늘 존재하였지만 운동이라는 대의에 의해 그들의 목소리는 무마되거나 사장되었습니다. 그들의 목소리는 조직발전과 운동발전이라는 우스운 논리 앞에 무력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그들이 이제는 그들의 목소리를 내면서 계급성과 노동자계급연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들이야 말로 지금 투쟁하는 노동자계급입니다. 노동자계급운동에 복무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운동은 이전 우리가 이루어내야 할 운동적 최우선 과제였습니다. 민주노조 쟁취이니 독재타도이니 이러한 사안에서도 우린 그들의 상황에 대해 우리의 목소리를 내었어야 합니다. 그들이 스스로 나서기 이전에 하였어야 합니다. 그들이 나서는 모습에 부끄러움이 들어서 어디론가 숨고 싶었습니다. 저는 그들의 고민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갖고 있는 문제, 그들이 가져왔던 운동사회 내에서의 억압과 자본과 정권으로부터 억압과 착취라는 이중적 탄압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 알 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현재진행형이기도 합니다. 지금 운동의 동력인 이들이 아직도 사회적으로 그들의 지휘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음이 안타깝습니다.

 

저의 짧은 소견으로는 이제 희망을 우리가 말해야 할 때입니다.
파편화되어지고 전문화되어진 현재 우리의 모습이 과연 올바른가에 대한 진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운동의 대상의 명확성과 사회적 공익성이라는 명제에 대해서 우린 천명해 줄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연대가 단체 간 연대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안별 투쟁을 통하여 우린 우리 스스로의 단위가 규정한 운동범주에 머물지 않고, 광범위한 연대가 필요합니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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