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간장의 삶

256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4/12/16
    밤의 적막함을 간만에 느낀다.
    간장 오타맨...
  2. 2004/12/14
    카자흐스탄 러시아인 세르게이씨
    간장 오타맨...
  3. 2004/12/14
    오늘 일 나가다.(7)
    간장 오타맨...
  4. 2004/12/11
    좌파의 길...(2)
    간장 오타맨...
  5. 2004/12/10
    오늘 유난히 별이 밝아보였어...(1)
    간장 오타맨...

아저씨들과 함께 나눈 일주일 시간...

  • 등록일
    2004/12/19 22:59
  • 수정일
    2004/12/19 22:59

일거리가 도통 들어오지 않다 보니 아저씨들과 어울릴 시간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고스톱을 치거나 아니면 술을 먹으면서 아저씨들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아저씨들의 인생사 역정을 들으니 눈가에 눈물이 조금 고이더군요.

 

주로 박씨 아저씨와 명수 형님과 함께 술을 나눠 마시거나 고스톱을 칩니다.



박씨 아저씨는 오산에 온지는 3년이 되었고, 이전에는 다른 건설 현장에서 직영(건설회사에서 계약직으로 채용한 건설일용노동자)으로 일을 하였다고 합니다. IMF로 건설 경기가 불황을 타는 바람에 직영자리에서 내쫓기고 오산으로 내려오셨다고 합니다.

이전엔 오산 다른 역에 나갔는데 직냔 11월부터 내가 다니는 에 나와 일을 하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나이는 59세로 혼자 사십니다. 제 작년까지 동겨녀가 있었는데 경제적 사정이 악화되어 여자 분은 떠나셨다고 합니다. 현재는 오산 터미널 근처 모텔에서 생활을 하시고 있다고 합니다. 한 달에 15만원 모텔비를 내고 사신다고 합니다.

밥은 중앙시장에서 이런저런 술집에서 그냔 국밥 한 그릇에 소주를 마시면서 해결하신다고 합니다.

 

인생역정을 혼자 이겨온 우리 용역에서 제일 나이많이 먹은 박씨 아저씨.

 

명수 형님도 오산에 온지는 2년이 되었고, 이전에는 서울에서 건설현장 직영으로 근무를 하였다고 합니다,. 명수 형님 또한 혼자 살아간지 3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부인과 이혼을 하였기에... 부인이 도박 빚 때문에 건설회사에서 쫓겨난 후 오산에 내려와 건설일용직노동자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몇번을 말려보고 달래보고 해도 부인은 도박(경마)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고 도저히 함께 살 수가 없어 이혼을 하였다는 말이 가슴을 때리더군요. 그 동안 열심히 일해 돈모아 사놓은 집은 도박 빚으로 경매에 넘어가고 현재도 부인의 도박 빚을 월 50만원씩 갚아나간다고 합니다.

인생을 털어 모아놓은 돈 다 날려먹고 자식은 형님집에 맡겨놓고 홀로 벌어먹겠다고 오산에 내려와 모텔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유유상종이라고 그렇듯 처지가 비슷한 박씨아저씨와 명수형님은 절친한 술친구로 일거리가 없으면 함께 중앙시장을 누비며 술로 하루의 버거움을 날려버리고 살아갑니다. 일 없는 날 도저히 혼자 무료한 시간과 밀려드는 잡생각을 감당키 어려워 한두잔 한 술이 매일 먹는 술로 발전하는 것 우리내 모든 건설일용직노동자들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남들은 참 한심한 알코올 중독자들이라 말하겠지만 그 삶을 조금이라고 알고자 한다면 쉽게 알코올 중독자 또는 한심한 사람들이라고 폄하하지 못한 것입니다.  내가 경험해보지 않았다고 쉽게 규정내리는 우리내 인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

 

이런 이야기를 듣고 소주를 한잔하는데... 참 나라면 어떠할까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나라면 도저히 살 용기가 없을 것입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힘든 내색을 보이는 내가 어찌 아저씨들 처럼 인생의 굴곡을 당당히 버틸 수 있겠습니다.

 

저희 용역에는 박씨 아저씨, 명수형님, 모리스 아저씨, 명진 형님, 정수 아저씨 그리고 저 그렇게 매일 일거리를 기다리며 사무실에 나옵니다. 소장은 일을 나가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제외시키구요.

이중 정수형님은 철근 기공이구, 모리스 아저씨(처조카까지 함께 한국으로 건너와 일을 하고 있습니다.)만 가족을 거느리고 다른 ㅂ문들은 결혼을 하였지만 이혼을 하거나 사별을 하신 분들입니다.

명진아저씨(나이 55세)는 부인이 4년 전에 병으로 돌아가셔서 재혼을 하려고 노력을 잠시 해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건설일용직노동자 일을 하니 자연스럽게 재혼 혼사처도 쉽지 않다고 합니다.

 

우리 아저씨들과 오늘 나눈 대화입니다. 전 이런 분들과 소주를 마시면서 일 없는 날 사무실에 죽치고 있습니다.

 

가슴이 참 아프게 다가옵니다. 비록 제 이야기는 아니지만 아저씨들의 주름진 얼굴이 더 주름져 보이더군요. 애써 미소를 지어보지만 그 미소 뒤에 숨겨진 씁쓸한 미소가 여운을 남깁니다.

이런 아저씨들에게 지금 일거리가 없는 겨울은 혹독하기만 합니다. 차라리 공공근로 나가자는 말이 한편 이해가 갑니다.

 

일이 없다보니 간혹 중국교포들이 와서 일거리 없냐고 하면서 오지만 일거리가 없으니 다른 용역으로 이동합니다. 그런데 다른 용역도 일거리가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아저씨들 이렇게 날씨가 포근한데 일거리가 없는 것이 이상타 하면서 건설경기가 불황이긴 불황이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작년엔 크리스마스 전까지 일을 했는데 이제 설날 전까지 일거리가 없겠다는 말을 많이들 합니다.

 

내년도 불투명한 건설경기와 경기불황으로 미칠 파장력을 예의주시하며 오산징역에서 일거리가 대폭 줄어들면 다른 지역으로 떠날까도 고민중이라고 합니다. 마음은 결코 좋지만은 않더라구요.

 

그러던 차 아저씨들 나보러 일 없더라도 올해 송년회 준비위원장 해라... 하시더군요. 졸지에 우리 용역 송년회 준비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또 술에 찌들겠군... 가뜩이나 술 많이 먹는다고 핀잔을 주고 있는데....

 

그러나 그 송년회 잘 준비해 볼렵니다. 아저씨들에게 고마운 마음 다하여 함께 송년회 준비하려고 합니다. 고마운 아저씨들에게 보답할 수 있는 마지막 자리가 될 것 같다는 생각에,.....

 

간장 오타맨이...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세르게이 잘가시요.

  • 등록일
    2004/12/19 10:27
  • 수정일
    2004/12/19 10:27

12월 19일 고생많고 서러움으로 가득찼던 한국생활을 접고 한 이주노동자가 고국으로 갔다.

새벽 5시 20분 누가 잠을 깨운다.

세르게이씨다. 친구 나 비행기 타고 모스크바에 간다며 인사를 한다.

난 부시시한 얼굴을 비비고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비록 말은 못알아 듣겠지만.. 친구 잘가... 언제 기회되면 당신이 손짓 발짓 써가며 공기 좋고 고기 많다던 카자흐스탄 호수가에 가서 낚시하고 고기구워먹읍시다.

마음속으로 인사하고 서로 악수를 하였다.



당신이 준 선물 잘 간직하고 일할때 소중히 사용하겠습니다.

당신의 채취로 가득찬 신발 감사히 받아 작업할때 작업화로 긴요히 쓰겠습니다.

지금쯤 인천국제공항에서 모스크바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겠죠.

아 참! 불법이라 목사님이 Green door에 가서 출국하라는 말 잘 들었지요.

벌금 내지 않고 가기를 빌어봅니다.

 

한국 생활 고달펐지만 우리 함께 짧은 만남으로 친구가 된 것도 그리 나쁘지 않았죠.

 

어제 세르게이씨 맥주한잔 하면서 친구 사진찍자며 함꼐 필리핀 카사만코 친구들 맴버와 인도네시아 모임 대표, 스리랑카 총무 같이 환송해 해주었죠.

 

씁쓸히 보내지 않아 그나마 위안이 됩니다.

언제 살아있다면 만나지요. 꼭 당신이 말한 그 호수에서 꼭꼭꼭 우리 만나 고기구워 먹읍시다.

그리고 당신이 말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예쁜 딸도 만나뵙구요.

 

잘가시요. 세르게이씨...

 

간장 오타맨이...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참 좋은 곳에서 살군요.

  • 등록일
    2004/12/16 09:07
  • 수정일
    2004/12/16 09:07
* 이 글은 알엠님의 [제가 사는 곳] 에 관련된 글입니다.

참 좋은 곳에서 살군요. 사람들과 나누며 살아가는 나눔의 집이라는 곳에서 말입니다. 참 많은 식구둘과 함께 살아나가니 마음이 흐뭇하고 넉넉함이 절로 나오겠습니다. 봉천동이라 내가 서울에 처음 올라와 살았던 동네이다.


형과 누나가 이 곳에서 가까운 대학에 다녀서 나도 덩달아 이 산고개를 헐떡거리고 올라가는 높다란 마을에 살았다. 달동네(ebs 주중 오후 11시에 하는 대담에서 백기완 선생님이 달동네라는 말 내가 만들어낸 말이야 하며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더라... 그리고는 정보원에서 불려가 달동네가 뭐야 하며 연실 뭇매를 맞았다는 소리를 들었다. 마저 달동네 달과 가까이 맞다아 있는 동네.. 별도 초롱초롱 빛나고 길거리 가로등 빛 검푸른 골목을 감싸는 공간, 눈이라도 내리면 연탄으로 길내던 인심이 뭍어나던 동네.... 참살떡 메밀묵 아저씨의 구수한 목소리에 눈침이 돌던 그 동네.... 골목길이 아기자기하던 그 동네.... 하늘과 맞닿아 있어 높지만 참 정이 넘치는 동네이다.) 늘 정이넘치던 동네였다. 이 동네 주인아주머니 인심또한 넉넉한 분이였다. 집에서 돈이 안올라와 방세를 내지 못하는 달이면 아주머니 월세 달라고 타박하지 않고 우리를 안심시키곤 하였다.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뭐 돈이있냐며...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말씀해주셨다. 누나는 못내 미안해 아주머니에게 연거푸 미안하다는 말을 하였다. 그리고 집에 전화를 걸면 잠시만 기다리려 보라구... 그런 때가 있었구나 봉천동 월세방에서 형, 누나, 나 이렇게 살았던 때.... 참 외로웠지만 재미있었던 시절... 학교를 가는 길은 좋았지만, 오는 길이 힘겨웠던 길... 꼭대기 올라갈려면 어찌나 언덕이 가파른지... 그래도 쉬엄쉬엄 걸어갔다. 형이 군대가기전까지 살았던 공간.... 그리고 미아리 달동네로 이사가기 전까지 살았던 집... 참 정겨운 공간이었다. 여름 장판 깔고 나가서 놀고 동네 어른들이 들려주는 귀신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웠던 그 시절... 아 20년이 훌쩍 지난 시간이구나... 참 정이 넘쳤는데.... 먹을 것 나눠먹고 담도 높다랗지 않았지... 담이라기 보다 벽들이 집들이 따닥따닥 동네 소리가 다 들리던 집.... 개발이라는 미명하게 들어선 아파트 흉물로 인해 그 달동네의 넉넉함도 도시의 포근함도 다 포크레인 삽날에 날라가 버렸다. 돈암동이 그랬구 옥수동과 금호동이 그랬구 미아리가 그랬구 홍제동이 그랬구 서을 달동네란 곳은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하나둘 우리곁을 떠나갔다. 인심 또한 개발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간장 오타맨이...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밤의 적막함을 간만에 느낀다.

  • 등록일
    2004/12/16 03:02
  • 수정일
    2004/12/16 03:02
이전 난 이 시간대에 라디오를 듣거나 음악을 들으며 나만의 시간을 가졌었다. 올해 8월 말까지 나의 삶은 저녁 아니 새벽에 혼자 라디오를 들으며 잡생각을 하며 살아왔다. 그러다 오산에 내려와 내가 접해보지 못했던 삶을 접하고 일을 다니고 있다. 이 일도 이번달이면 끝이 난다. 그리고 내가 담았던 기억들을 정리라는 이름으로 차곡차곡 끄집어 내어 정리하겠지... 그러나 이 정리하는 작업은 잘 하지 못할 것 같다. 왜 난 정확히 말해 그들이 아니기에... 난 그 치열함이나 처절함에 대해 느끼지만 잘 알지 못하기에... 남의 삶을 이해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이해할 수도 없을 뿐더러... 다만 난 그들이 처한 현실에 대해 이야기만 할뿐이다.


그들을 조직해야 한다는 당위는 사라지고 그들로 부터 삶을 하나씩 새롭게 배워야 한다. 내가 그들의 삶에 뛰어들지 않는 이상 난 그들 삶의 표피만을 이해할 뿐이다. 삶으로서 그들이 겪을 고통이나 분노들에 대해서도 정확히 이해할 수 없다. 짧은 시간이 아쉽기만 하다. 오래 하였으면 하는 바램이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앞으로 일 나가는 날도 2주 밖에 남지 않았다. 난 다른 삶을 살ㅤㄱㅖㅆ지... 뭐 운동이라면 운동이고 아니라면 아니겠지... 아쉽다. 처음 용역일을 나갈때의 두려움은 사라졌지만 이 짧은 기간 용역아저씨들과 친해진 상태에서 이별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 참 마음에 걸린다. 떠나보내는 것도 아닌데.... 앞으로 살아가면서 다른 조건에서 만날 수 있을까? 용역 아저씨들이 내가 지금 이렇게 와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어떠한 기분일까? 잠시 아르바이트로 돈 벌러왔다고 생각할까? 아닐 것이다. 서로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으로 대했는데 난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 배신감을 느낄 것이다. 일 팔려 나가기 전 짧은 아침시간에 나에게 해주었던 진심이 가득한 충고... 용역보다 공장에 들어가 안정된 직장을 잡아라... 결혼도 하고 자식을 낳아 열심히 살아라... 일이 없더라도 용기를 내고, 오늘 일이 없으면 내일엔 일거리가 있을 거란 희망을 갖고 살아라 등등 온갖 격려와 충고를 해준 아저씨들은 허망할 뿐이다. 정확히 말해 자신들을 이해하러 왔다는 자체부터 기분이 나쁠 것이다. 아니 거짓말을 하고 일 다닌 것에 대한 분노가 치밀 것이다. 용역은 공장과 조건이 다르다. 공장이야 일하러 왔다하면서 천천히 사람들을 알아가며 하나둘씩 자신은 어떠한 사람인가?를 밝히면 되지만 용역은 그렇지 않다. 스스로 건설일용직노동자가 되어 조직되지 않는 이상 조직하기는 녹녹치 않다. 이유야 뭐 많겠지만 일단 용역 사장이 일거리를 아예 주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정도 일을 잘 하지 않는 이상 건설일용직노동자로 살아가기란 쉽지가 않다. 이에 정리하는 지금 머리가 조금 복잡하다. 정들자 이별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도 그렇고 내가 함께 어울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던 분들과 더이상 같은 공간에서 같이 숨을 쉬고 술나누어 먹고 함께 웃고 욕하는 지껄이들을 못한다고 생각하니 아쉽다. 용역 잠시나가는 동안 참 행복했다. 내가 노동을 하였다는 것... 착취와 억압을 떠나 노동의 의미를 몸으로 배웠다는 자체가 기분좋다. 늘 노동을 해야 한다 이야기 하지만 나부터 입으로만 노동을 하지 않았던가? 그러던 차에 직접 몸을 써가며 일을 해보니 처음 땀이 나고 온 몸이 쑤시고 그랬는데 이제 적응이 되어 어느정도 몸은 괜찮다. 다만 일머리를 몰라 일할때 해맬뿐이다. 열심히 일할려구 노력은 하지만 몸으로 터득되지 않는 일이 어찌 쉽게 다가오겠는가? 어떠한 말을 하고 떠날까? 고민이다. 공장에 취직했다고 해야하나... 아니면 사실데로 이야기해야 하나... 고민이다. 사실데로 말하는 것이 올바르지만 그 분들이 이후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참 나란 인간도 어쩔수 없는 속물이다.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마무리를 잘하고 나눔을 실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만... 내가 나눠줄께 너무 적다. 아니 없다. 받은 것은 너무 많은데.... 마음으로 받은 것만해도 이후 살면서 갚기 어려운 것들인데.... 내가 뭐 나눔을 실천할게 뭐 있겠는가? 함께 어울리는 것 이외엔 없다. 아저씨들 미안해요. 저 아저씨들에게 많은 것 받은 만큼 열심히 살ㅤㄱㅖㅆ습니다. 그리고 제가 제 처지 이야기 못한 것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살면서 하나씩 아저씨들에게 받은 만큼 배풀겠습니다. 물질적 풍요는 주지 못하지만 함께 어려울때 나누는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남은 날 일이 비록 없지만 그래도 아저씨들이 곁에서 여러 조언을 해주어서 저 2달간 참 행복하게 일 다녔습니다. 아저씨들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아저씨들이 말해준 것 처럼 용기 잃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간장 오타맨이...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카자흐스탄 러시아인 세르게이씨

  • 등록일
    2004/12/14 20:51
  • 수정일
    2004/12/14 20:51
세르게이씨와 함께 어제 막걸리를 먹었다. 한국에 온지 1년하고도 몇개월이 지났다는 세르게이씨는 12월 19일 모스크바로 떠난다. 모스크바에서 형을 만나서 함께 카자흐스탄으로 간다. 카자흐스탄 음악인이었던 세르게이씨는 한국에 와서 고생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 어머님의 병치레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관광비자로 무작정 한국행으로 왔다고 장목사님에게 들었다. 얼마나 급했으면 관광비자로 와서 일거리를 찾기 위해 왔을까?


카자흐스탄엔 73세의 어머니와 부인과 자식이 하나 있다고 한다. 한국에와서 한국어를 몰라 고생하였고, 일거리를 찾기 위해 지금 내가 나가는 동네 용역에 나가보았지만 일거리가 없어 매일 다솜교회로 오곤 하였다고 한다. 한국어를 구사하지 못하니 자연스럽게 세르게이씨는 일거리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한 2달간 이렇게 다솜교회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러시아인 친구를 사귀어서 그 친구가 송탄에 있는 공장으로 데려가서 일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임금 70만원에 일거리를 찾았다고 한다. 세르게이씨 일거리를 찾아 행복했을 생각을 잠시 해본다. 그러나 이 행복도 잠시... 일을 못했던 세르게이씨에게 일거리는 참 중요한 의미로 다가오겠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세르게이씨가 받은 70만원이란 임금이 눈에 걸린다. 우리내 70만원 돈을 보고 적다는 이야기를 종종하지 않던가? 이 임금에 행복해 하였을 세르게이씨 그러나 세르게이씨에 대한 정당한 노동의 댓가는 지불되지 않은 것 같다 내가 괜시리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한국에 대한 세르게이씨의 인상은 어떠했을까? 별로 좋지 않았을 것이다. 돈 밖에 모르는 사람들에게 온갖 욕을 먹었을 것이다. 세르게이씨의 입에서 나오는 한국말... 서툴지만 또렷한 씨발이라는 말이 가슴 뭉클하게 만든다. 얼마나 욕을 많이 먹었으면 한국말을 제대로 못하는 세르게이씨가 정확한 발음으로 씨발이라는 단어를 말한다. 그리고 불법이라는 말도 종종한다. 모두다 타향에서의 배타적 차별이 때문이겠지... 세르게이씨가 사준 막걸리를 마시면서 아마도 이 막걸리 세르게이씨의 눈물이 아닐까? 상상해 보았다. 12월 19일이면 떠나는 그... 연실 장목사님에게 몸짓을 써가며 자신의 나라에 오면 낚시해서 고기 구워먹자고 하는 모습을 보여가며 이야기 한다. 이에 장목사님 꼭 연락처 남기면 카자흐스탄에 놀러간다고 이야기 해주었다. 세르게이씨 고생을 많이했다고 장목사님이 이야기해주었다. 장목사님은 이어 세르게이씨에게 고생많았다라고 이야기를 해주었다. 연실 고국에 갈 생각에 뜰떠있는 세르게이씨 모든 힘든 일 잊어버린듯 얼굴에 환한 미소를 뛰우고 있다. 모든 이주노동자들이 세르게이씨와 같이 환한 미소 잃지 않기를 바램해 본다. 그래 나도 오산에서 길을 거닐며 많은 이주노동자들을 만나지만 마음은 눈인사라도 해야지 하면서 눈인사는 커녕 눈길 마주치기 어렵다. 간장 오타맨이...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