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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아힘 가우크 취임사 (이어서 2)

그리고 우리는 이런 공통성을 자유, 평화, 그리고 연대의 틀 안에서 더불어 살려고 하는, 유럽 안에 있는, 앞의 의미로서의 우리나라 안에서 발견합니다. 그렇긴 하지만 우리가 무지와 잘못 이해한 [정치적] 올바름에 눈이 어두워 현실적인 문제에 눈을 감는다면 그릇된 길로 들어 설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이미 연방대통령 요하네스 라우가 12년 전 베를린 연설에서 인상 깊게 그리고 명료하게 지적하였습니다.  그러나 [라우의 지적을 참작하면서] 우리는 더불어 사는 문제에 있어서 궁극적으로 앞에서 말했듯이 불안, 원망(르상티망), 그리고 부정적인 투사라는(negative Projektion) 길잡이에 의해서 인도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손님/이방인을] 환대하는, 열린 사회를 위해서 연방대통령 크리스티안 불프는 재임시 끈끈하고 탄탄한 자극을 주셨습니다. 연방대통령 불프님, 이런, 귀하의 마음이 밀접해 있는 것이 저의 마음에도 와 닫아 지속적으로 놓여 있게 될 것입니다. 귀빈 여러분, 우리 헌법은 모든 사람에게 어디서 왔든지, 뭘 믿든지, 어떤 언어를 사용하든지와 무관하게 똑 같은 위엄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우리 헌법은 성공한 사회융화의 대가로서 위엄을 부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회융화 거부에 대한 제재로서 위엄을 취소하지도 않습니다. 우리 헌법은 우리의 인간됨과 함께 우리에게 타자 안에서  형제자매로의 우리를 보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타고 난 참여와 권리를 갖는 형제자매로서 말입니다.  

철학자 한스-게오르크 가다머는 역사의 파격적인 진동이 지난 후 특히 유럽에 있는 우리 앞에 비좁기 짝이 없는 공간에서 함께 사는 [것을 배우는] „참다운 학교“가 기다리고 있다는 견해를 [피력한 적이] 있습니다. 인용하겠습니다. „타자와 함께 산다는 것은 타자의 타자로서 사는 것이다.“(„Mit dem anderen leben, als der andere des anderen leben.“). 그는 이런 맥락에서 유럽의 윤리적, 정치적 과제를 보았습니다. 이런 유럽을 향한 긍정도 이제 보존해야 합니다. 바로 위시시에 민족국가 차원으로 도피하려는 경향이 유별나게 두드려집니다. 유럽의 함께하기는 재차 확인하건데 연대란 삶의 숨결없이는 만들어 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위기시에 우리는 더 많은 유럽을 감행하기를 원한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바로 독일인 다수가 [다른 나라 사람들과] 함께 이런 유럽적 사유에 다시, 그리고 계속해서 미래를 주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확인합니다.  유럽은 우리 세대에겐  [다양한] 서양의 전통, 고대의 유산, 공통의 법질서, 기독교와 유태교적 유산 위에 세워질 미래의 약속이었습니다. 저의 손자손녀들에게는 유럽이 이미 국경을 넘나드는 자유와 기회와 열린사회의 걱정으로 [얼룩진] 가시화된 생활현실 입니다. 이런 생활현실이 저의 손자손녀들에게만 놀라운 득이 아닙니다.

이 나라가, 우리 아이들과 그 후손들이 „우리나라“라고 하기를 바라는 이 나라가 어떻게 더 모습을 갖춰야 할까요? 우리에게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그리고 그 외 다른 지역에서 대의민주주의가 그룹이익과 공동체[안녕]이익 [간의 분쟁을] 조정하는데 유일하게 적합한 체제 입니다. 이 체제의 특성은 완벽성이 아니라 배우는 시스템이란데 있습니다. 여기에 추가적으로 정당과 다양한 민주적인 기구 옆에 우리 민주주의의 제2의 축이 존재합니다. 능동적인 시민사회 입니다. 시민발안, [특정 사안에 대한] 즉석 행동(Ad-hoc-Bewegungen), 디지털 네트워크공동체의 일부 또한 그들의 앙가주망 뿐만 아니라 대항으로 역시 의회민주주의와 그 부족함을 보완하고 있습니다.

하나 더 첨부하자면, 바이마르 민주주의와 달리 우리나라는 광신자와 테러리스트들의 몹쓸 정신을(Ungeist) 물리치는 민주주의자들이 넉넉 합니다. 이들 모두, 서로 다른 정치적 종교적 기반에서, 우리는 우리에게서 우리의 민주주의를 앗아가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라고 서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나라에 충성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나라에 충성하는 이유는 이 나라가 완벽하기 그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나라를 아직까지 한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민주주의를 경멸하는 우리 내 극우들에게 엄연명백하게 말합니다: 너희들의 증오가 우리를 고무한다. 우리는 우리 나라를 방치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너희들에게 우리의 불안을 선물로 주지 않을 것이다. 너희들은 과거로 떨어질 것이고 우리 민주주의 살 것이다.

다른 정치적 성향의 급진주의자들도 똑 같은 우리의 결단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종교라는 겉옷을 두르고 광신주의와 테러를 우리나라 안으로 가져오고, 유럽 계몽의 뒤로 떨어지는 자들을 멈추게 할 것입니다. 이들에게 말합니다: 민족들은 자유를 향해서 행군하고 있다. 너희들은 어쩌면 이 행군을 방해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은 궁극적으로 그 행군을 가로막지 못 할 것이다.

그렇다 치더라도, 민주적인 기구에 대한 시민의 거리감이 제게 걱정을 초래합니다. 낮은 선거참여율, 또 정치적 앙가주망에 대한, 정치와 정치가에 대한 폄하 혹은 심지어 경멸이 그리 합니다.  사적 공간에서 종종 이런 말을 듣게 됩니다. 뭐라고, 네 지역단체 회의에 참석하러 간다고?  내가 제대로 들었나, 노조 활동한다고? 그럼 적지 않은 이들이 그런 활동을 쿨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저는 종종 이렇게 묻습니다. 그런 활동들이 없었다면 대체 우리 사회가 어디에 있을까라고. 우리 모두 이런 통치자와 피통지자 간의 거리로 얻은 것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제가 통치자와 피통치자 양자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것 입니다: 점점 더 벌어지는 거리를 어쩔 수 없다고 하지 말아라. 이 말은 정치 행위자에게 우선 이런 뜻입니다: 열어놓고 명백하게 말하라. 그럼 상실한 신뢰를 다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피통치자 시민에게는 이런 걸 감당하라는 말 입니다: 소비자만 되지 말아라.  너희들은시민이다. 건설하는, 함께 건설하는 사람이란 말 입니다. 참여가 가능한 사람이 까닭 없이 참여를 포기하는 것은 인간 현존에 있어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큰 가능성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다. 즉  책임을 삶 속에서 사는 (Verantwortung leben)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끝으로 제가 여러분 모두에게 감히 선물 하나를 부탁하겠습니다. 신뢰입니다. 최종적으로 제 인격을 신뢰해 달라고 부탁 드립니다. 그 전에 우리 나라에서 책임을 떠맡고 있는 사람들을 신뢰해 달라고,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들이 다시 통일되고 건장하게 자란 이 나라의 주민들을 신뢰해 달라고  부탁 드립니다.

그리고 그 전에 다시 여러분 모든에게 과감하게 그리고 끊임 없이 자신의 [힘을] 신뢰하는 것에 굳건히 하라고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간디의 말 한 마디에 따르면 자신감이 있는 사람만이 진보할 수 있고 성공할 수 있습니다. 간디는 이건 한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한 나라에게도 적용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나라의 아이들에게 그리고 그 후손과 후손에게 돈을 물려줄지 혹을 재산을 물려줄지 모릅니다. 그리나 불안을 따르지 않고 용기를 선택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꿈꾸지만 않았습니다. 우리는 삶에서 보여 주었습니다. 신과 사람들에게 감사할 바입니다. 이런 유산은 우리 후손들이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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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아힘 가우크 취임사 (이어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민족주의로 각인되고 그 때문에 망한 나라의 총리가 된 콘라드 아데나우어가 미래지향적인 유럽통합의 창설자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먼 훗날1989년, 우리 기억자산이 된 다음 보물과 함께 감사하고 기뻐할 일입니다. 그때 동독인들은 평화로운 혁명, 평화로운 자유혁명을 수행할 능력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주권을 행사하는] 인민이(das Volk) 되었고 한 민족이(ein Volk)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은, 장벽이 무너지기 전에는 많은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능력에 자신했어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일어나 우리가 [주권을 행사하는] 인민이다라고 말할 때 비로서 우리는 한 민족이다라고 전할 수 있을 것이고 장벽이 무너질 것입니다.

또한 당시 완전히 무혈적인 경로를 통해서 수십년동안 지속되었던 냉전시대의 동서대립의 [불을] 꺼졌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성장한 전쟁위험이 굴복되고 제거되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서 뜻하는 바는 제가 단지 그늘진 면만, 잘못과 좌초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우리 역사의 저 부분, 즉 자유에 입각한 정치문화의 신축, 삶 속에서 재현된 책임, 우리 민족의 평화능력과 연대를 포괄하는 부분도 잊혀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것은 기억문화에서의 페러다임교체가 아닙니다. 페러다임보완입니다. 이런 보안은 반드시 우리의 용기를 북돋아 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난 날에 누차 달성하였듯이, 현시에서 우리의 도전을 요구하는 것들을 과감하게 받아들이고, 그런 과제를 최선을 다하여, 곧바로 이상적이진 않을지라도, 해결하게 할 것입니다. 이런 기억문화는 미래에 있어서도 우리의 용기를 크게 북돋아 줄 것입니다. 그럼 이 나라가, 우리 아이들과 그 후손들이 우리나라라고 할 이 나라가 지금 어떤 모습이어야 할 까요? 이 나라가 사회정의, 참여, 그리고 승진기회와 연관되어 있을 때 우리나라가 될 것입니다.

거기로 향하는 길은 어렴풋한 가부장적인 구제정책이 아니라, 장래에 필요한 것을 대비하고 자력을 심어주는 복지국가입니다. 우리는 기회균등이 없어서 어린이들이 자기소질을 펼치지 못하는 상황을 허용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힘써봤자 자기들에게는 돌아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없고, 승진의 길은, 그들이 있는 힘을 다하여 애쓴 들, 막혀있다는 인상을 받는 상황을 허용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가난하기 때문에 혹은 나이가 많기 때문에 혹은 장애자이기 때문에 우리사회의 일부가 아니라는 인상을 받는 상황을 허용해서는 안됩니다.

자유는 정의의 필수부가결한 조건 그 하나 입니다. 왜내하면, 정의가, 사회정의가 의미하는 것과 우리가 거기에 다가가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은 가부장적으로 지시될 수 없고, 오로지 심도 있는 민주적인 토론과 논쟁을 통해서만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거꾸로, 정의를 둘러싼 애씀이 자유를 보존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입니다. 국가가 사회에서의 정의로운 질서를 신념으로 하면서 그걸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는 사람의 수가 늘어나면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가 떨어집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는 둘을 [하나로] 묶는 나라여야 합니다. 정의의 조건으로서의 자유와 자유와 자기실현을 체험할 수 있는 조건으로서의 정의 말입니다. 그 다음 바로 요구되는 것은 여기서 사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 나라“에서 자기 집을 찾고 살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고려할 필요가 전혀 없었던 독어와 기독교 전통 곁을 이슬람과 같은 [다양한] 종교가 나란히 하는 국가에서 살고 있습니다. 다른 언어, 다른 전통과 문화도 있고 국가가, 점차 사라지는, 자국민의 민족적인 소속에 의해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민들의 정치적 윤리적 가치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으로 정의되는 국가에서 살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생성된 운명공동체가 배타적으로 공동체체제를 규정하는 국가가 아니라 점점 더 차이를 빗는 것들의 공통을 향한 열망으로 규정되는 국가에서 살고 있습니다. 즉 이런 의미로서의 유럽 안에서의 우리 국가입니다.

 

(계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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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아힘 가우크 독일연방대통령 취임사

어제(2012.3.23) 요아힘 가우크의 독일연방대통령 취임식이 있었다. 그간 좀 씹었는데 취임사 전문을 소개하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일 것 같다.

 

아래 쪼개서 번역해 올린다.

 

번역 주석은 달지 않았다.

 

원문은 쥐드도이체짜이뚱에 게재된 것을 사용했다.
 

독일연방하원 의장님, 제가 존경해 마지않는 귀빈 여러분, 친애하고 존경하는  너나할것 없는 내외 시민 여러분1! 먼저 의장님께 이 자리를 견줄 수 없게 지도해 주시고 정치가 기쁨을 만들 수 있다는 모범을 우리나라 안으로 빛나게 해 주신데 대하여 더없이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의장님, 귀하는 저 뿐만 아니라 분명 연방대통령 불프에게도 심금을 울리고 잊혀지지 않는 반향을 남겼습니다. 감사합니다.


친애하는 동반자시민 여러분, [수 많은 이야기가 오가는] 지금, 이 나라가, 언젠가 우리 아이들과 그 후손들이 우리나라라고 할 이 나라가 진정 어떤 모습이어야 합니까? 이 나라에서 개별화가 계속될 것인가요?  빈곤과 부의 가위가 더 벌어질 것인가요? 세계화가 우리를 삼켜버릴 것인가요? 사회 주변으로 떨어지면 사람들이 패자라고 느끼게 될 것인가요?  인종적 혹은 종교적 소수가, 의도된 아니면 한탄의 대상이 되는 격리에서, 반문화를 만들까요? 유럽에 뿌리하는2 이상이 존립할까요? 근동에 새로운 전쟁의 기운이 도는가요?


독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악을 행하는 광신주의가 온순한 사람들을 계속 위협하고 주눅들게 하고 죽일 수 있을까요? 매일, 매체를 접하는 매 순간이 새로운  두려움과 걱정들을 가득히 가져다 줍니다. 그럼 적지 않은 사람들이 도피길 모색에 안달하고,  미래를 불신하고, 현재를 무서워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게 도대체 무슨 삶인가, 무슨 자유인가하면서 자신을 둘러보고 따짐니다. 그럼 저의 평생주제인 자유는 그들에게 아무런 미래를 제시하지 못하고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는, 단지 안위를 앗아가는 것이 될 뿐입니다.


저는 이런 반응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런 반응을 부추킬 의사는 없습니다. 저도 불안을, 제게 허용된, 한 사람의 오랜 삶 속에서3 경험하고 이런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불안은 용기와 함께 자신감을 축소시킵니다. 종종 결정적으로 축소시켜 우리가 둘 다 상실할 수도 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진전되면 심지어 비겁을 미덕으로, 도피를 정치적 공간에서 취할 수 있는 정당한 몸가짐으로  삼게 되기까지 합니다. 저는 이런 반응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걸 넘어서 저의 기억을 저와 우리를 가르치고 움직이게 하는 힘과 힘의 원천으로 사용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저는 또한 부디 바라건데, 나찌 독재의 이루 말할 수 없는 범죄를 뒤로 하고  전쟁의 참상이 지난 후에,  우리나라에서 이룩된 것에 대한 살아있는 기억을 소원합니다. 독일의 서편에서는 이렇게 이룩된 것이 처음엔 경제기적이라고 이름되었습니다. 독일은 다시 서게 되었습니다. 고향에서 쫒겨난 사람들에게, 아니 폭격으로 집이 산산조각나 몸 둘 곳이 없는 사람들에게 주거공간이 주어졌습니다. 궁핍으로 이어지는 수년 후에 일반시민이 불어나는 복지에 참여하였습니다. 물론, 모든이가 똑 같은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저에게는 자동차, 냉장고, 그리고 새로운 번영에 새롭게 빛나는 이 모든 것들이 전후 첫 십년의 기적이 아닙니다. 저는 제가 살고 있는 이 나라는 무엇보다 먼저 민주주의 기적의 나라라고 느낍니다.


전후 당시 연합군이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전후 독일에서는 보복주의가 다수의 지지를 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었습니다.  물론, 나찌 사상의 여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독일] 건설에 현실적으로 참여하는 세력이 되지 못했습니다.  연합군이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견고한 민주주의 질서가 생겨났습니다. 독일-서편은 자유로운 서구세계의 한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과거사를 파헤치는 일은 부족한 상태에 머물렀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자신에게는 잘못이 없는듯 감추고, 나찌레짐의 희생자와 함께하는 마음가짐의 결여가 당시의 시대정신에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68세대에 이르러 비로소 끈끈하게 바뀌었습니다.


당시 제가 속한 세대는 우리 부모 세대가 교만, 살인, 그리고 전쟁으로 우리들의 이웃들을 [독일] 안에서 뿐만 아니라 [독일] 밖에서 범한, 독일 역사의 바닥이 안보이는 새까만 구렁텅이와 마주하면서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 역사를] 새롭게, 달리, 그리고 더 깊게 우리 안에 담을4 수 있게 된 것은 이 세대, 즉 68세대의 공로였으며 또 그들의 공로로 남을 것입니다. 그것은 힘겹게 몸부림하여 달성한 행운입니다. 68세대의 분노와 저항을 동반하기도 했던 모든 그릇된 길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나찌 잘못에 대한] 역사적인 책임을 [독일] 공동체 의식에 바로 세웠습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하고 가치를 지향하는 과거되새겨정립하기는5 1989년 이후의 동독에 있었던 우리들에게만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전체주의적인 혹은 폭군적인 멍에를 걷어차 버렸지만 과거의 짐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는 많은 사회들이 모범적이라고 느낀 것이었습니다. 유럽으로 향하는 서독인들의 결의찬 찬성은 독일 전후역사의 또다른 값비싼 자산 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하게 남아있어야 할 기억자산 입니다.

 

(계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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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원문: "Mitbürgerinnen und Mitbürger aus dem In- und Ausland". Mitbürger의 mit가 번역하기 어렵다. 주지하다시피 inclusion 담론에서 나온 표현이다. 독일의 경우 이주노동자들이 독일사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현상이 된후 등장한 표현이다. 가우크의 표현에 더 인상 깊은 것은 전 세계인민을 Mitbürger로 하는 경향이다. 한국 노무현 대통령 조차 취임식에서 국민여러분 했던 것과 비교하면 의식수준의 차이가 너무 뚜렸하다. 암튼, mit를 너나할것 없이 다 똑 같은, 내국인이건 외국인이건 차이가 없는이란 의미로 번역해 보았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2. 원문: "die europäische Idee". 정관사 die가 종을 말하고 있다. 유럽 종적 이념이라고 번역하려다 유럽에 뿌리한으로 고쳤다.텍스트로 돌아가기
  3. 원문: "einem langen Leben". 부정관사에 하나, 한사람이란 의미와 함께 그 하나를 절대화시키지 않는 겸손이 엿보여서 이렇게 좀 장황하게 번역했다.텍스트로 돌아가기
  4. 원문: "erinnern". 기억하다를 한자를 풀듯이 풀어 번역했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5. 원문: "Aufarbeitung der Vergangenheit". 보통 과거청산으로 번역되는데, 역자는 청산이란 말에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aufarbeiten이 aufräumen과 같은 청산이 아니기도 하고. 못다한 일을 다시 한다는 원래 의미를 살려 번역했다.텍스트로 돌아가기

2012/03/24

신의 이름이야 어쨌든 간에 절대자를 상실한 사유는 재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수준이 확 떨어진다.

보토슈트라우스의 아직 아도르노의 변증법을 따르는 „Paare, Passanrten“(짝을 맺는 사람, 지나가는 사람)은 보물 창고인데, 실존 사회주의 붕괴에 한방 얻어 맞고 나 자빠져 „이젠 할 수 없어도, 단번에 멍청해 지더라도 변증법을 버리고 사유해야 한다“면서 포퍼를 따르는 „Beginnlosigkeit“(시작이 없는 상태)는 횡설수설의 표본.

변증법이 절대자를 사유하는 것이란 재차 강조할 필요가 없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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