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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과 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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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0

  • 등록일
    2010/08/10 12:36
  • 수정일
    2010/08/10 12:36

어쨌든 현실은존재하는 것들의 조우과 교전이며, 나는 그 틈새에서 실존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간격을 나의 것으로 올곧게 전유하는 것. 사실상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고민들은 완전히 해결되지 못할 것이라는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회피할 것인가? 습관성의 도피. 이것은 가볍게 뛰어 넘을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매순간 그러한 극복의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 이러한 간격에 대한 습성이 교정되고 나면, 이제 권태가 찾아올지도 모른다.

 

사물들, 사람들, 그리고 그 관계성의 총체들. 나는 이 모든 것들을 다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지식이란, 또는 나아가 지혜란 무용지물이다. 무용지물에 대한 사랑. 그것이 철학이고, 철학을 하는 삶이기 때문에 인식 안에는 필연적으로 '덧없는 것들에 대한 회한'이 존재한다. 하긴 스피노자도 이러한 덧없음으로부터 철학을 시작했지 않은가? 간격(또는 괴리), 권태, 그리고 덧없음. 철학을 한다는 것은 이 세 가지 복합적인 삶의 범주들을 똑바로 마주 대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땅에 발을 디디고 하늘을 가리킬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그 반대로 땅에 발을 디디고 심층을 가리킬 수 있을 것인가? 

 

내가 겨냥하는 것들은 매우 높거나, 아니면 매우 낮다. 높을수록 가 닿을 수 없고, 낮을수록 팽팽한 긴장이 느껴진다. 현실성, 그리고 하나의 관념. 실천과 페시미즘. 돌연 내가 하는 모든 행위들이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지점에 있다고 느껴질때 그리고  그것이 시간의 순환 과정에서 임계지점, 나선의 출발지점에 와 있다고 느껴질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가 나를 가르치는 도제기간은 영원히 도래하는 것이지 한 점 안에 응축되거나, 중심에서 발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성의 과정이기에 한 번도 나를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한 번도 내 것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내 것이 아닌 사랑들아'(기형도). 그렇기 때문에  회피가 아니라 뒤로 물러 나는 것 이 필요하다. 물러나는 것, 매 순간 이러한 은둔을 적극적으로 행하는 것, 그것이 교전의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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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03

  • 등록일
    2010/08/03 13:23
  • 수정일
    2010/08/03 13:23

어쨌든 나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시기다. 아니, 앞으로 남은 생이 그렇게 될 것이다. 하나의 집중점, 고정점이 생기는 것, 그리고 어디로 가든 그 고정점 주변에서 또는 그 점과 더불어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요하고도 귀하다. 집중! 집중! 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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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28

  • 등록일
    2010/07/28 12:53
  • 수정일
    2010/07/28 12:53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분명 둘이라는 사실, 이 사실 앞에서 스스로를 다잡아 본다. 맑아져야 한다. 그 사람이 날 더 잘 볼 수 있도록. 깨끗해지고, 담백해져야 한다. 

 

이제 다른 날이, 다른 삶이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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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23

  • 등록일
    2010/07/23 10:22
  • 수정일
    2010/07/23 10:22

비가 쏟아진다. 어제는 상견례를 했고, 내 삶의 한 고비를 넘었다. 행복하다. 좀 느긋해지기로 한다. 이제 시간이 지나갈 때마다, 나 스스로에게 더 많은 자존감을 주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을 중심에 놓지 말고, 나 스스로를 하나의 동심원처럼 생각하는 것. 그 주위로 깨끗하고 명쾌한 선들이 생겨나게 하는 것. 그 선들을 타고 삶의 위도와 경도를 작성하는 것. 그런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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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과 테제

  • 등록일
    2010/07/16 11:00
  • 수정일
    2010/07/16 11:00

주체의 '구성'이라는 과녁은 통상 정치철학의 주제로 등장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지고 있는 함축이 어떤 집단성(collectivity)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길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 데카르트에 대한 스콜라적 번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방면에서는 마리옹(Marion)의 기여가 참조점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 신학적 방식의 주체 구성은 필연적으로 대타자인 '신'의 위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인식론적으로는 주체가 우위를 점할지라도(ratio cognoscendi) 존재론적으로 신의 우위(ratio essendi)를 실토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는 결국 이러한 주체-타자 관계의 비대칭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리꾀르가 마리옹과 더불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것은 정치철학적으로 조우와 교전(encounter)인 것이 이들에게는 타자에 대한 ‘응답’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 신학적 방식의 기여가 주체의 정치철학적 구성이 겨냥하는 바를 불투명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일반적으로 주체의 정치철학적 구성을 프로이트와 맑스를 통해 거듭하는 방식 외에 신학적 매듭을 풀어야 한다는 생각도 한다. 여기에는 물론 프로이트와 맑스도 필요하겠지만, 라캉과 언어철학의 기여를 참조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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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09

  • 등록일
    2010/07/09 21:21
  • 수정일
    2010/07/09 21:21

바쁘고, 정신 없다. 그럴수록 난 조심한다. 스트레스에 약한 성향 때문이다. 마음이 느긋하게 돌아가지 못하면 어김없이 과부하가 오는 이 성벽이라니. 기형도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는 자신의 감성을 작은 충격에도 바르르 떠는 셀룰로이드에 비유했었다. 그 구절이 자꾸만 맴도는 것도 어쩌면 참, 문제다.

 

어쨌든 이 성향을 쉽게 고칠 수는 없는 것이고, 그래서 조심히 다룬다. 나 자신을 말이다. 양생술? 글쎄 그런 건 아직 없다. 마음을 시시각각 느끼는 것 밖에 다른 수가 없다.

 

지금은 [Green day]의 새로나온 베스트 앨범을 듣고 있다. 볼륨을 20까지 올렸다. 이리저리 흔들거리며 듣는다.

 

삶이 안녕하기만 바라는 것은 욕심일 것이다. 다만 조금씩 흔들리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제 새로운 가족이 나와 그녀를 통해 생겨날 것이다. 행복한 가족을 이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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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06

  • 등록일
    2010/07/06 21:52
  • 수정일
    2010/07/06 21:52

많은 일들이 지나간다. 모든 것이 사람과 사람, 가족과 가족 간에 일어난 일이기에 때로는 이 '이성'이라는 것이 속절없다. 근본적으로 이성은 '자기중심적'이다. 거기서 벗어나는 어떤 일상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된다. 하지만 삶은, 또는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다. 이래서 난 영원히 그저 먹물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먹물을 이상한 이물감을 가지고 받아들이는 것이고 말이다.

 

작은 창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면서 생각했다. 과연 철학이 또는 학문이 이 모든 일상의 '조우'와 우연성들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

 

분명한 것은 '환원'이라는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는 삶의 모든 것이 철학이 될 수 없다는  깨달음이다. 그것은, 철학은 삶의 예외이며, 삶은 철학에 있어서 '경악'이다.

 

칸트가 '경이'를 말했을 때 그것은 예술에 한한 것이었으나, 삶 자체에 이르러서 그것은 경악이 될 수밖에 없다. 이 방면에서 들뢰즈는 옳다. 그것은 경이를 넘어선 폭력이며, 그것을 통해서 사유는 단련된다. 이때 사유의 주체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이 이 주체를 확증할 것인가? 아닐 것이다.

 

많은 일들이 지나간다. 모든 것이 사람과 사람, 가족과 가족 간에 일어난다. 이것은 '초월적'이다. 그리고 동시에 '내재적'이다. 이 이율배반은 칸트의 것보다 깊고, 들뢰즈의 것보다 심오하다. 다만... 너는 '해석'할 수 있을 뿐인가? 응답을 기다릴 뿐인가?(Ricoeur)...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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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설명한다는 것

  • 등록일
    2009/12/26 16:49
  • 수정일
    2009/12/26 16:49

한 가지 신기한 것은 내게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개인이력이 타인들에게는 낯설게 보인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서양철학, 그 중에서도 프랑스 철학을 전공으로( 이 말은 아마 '벌어먹고'라는 말과 같을 것이다) 하고 있지만, 내 학부 전공은 불교학, 그 중에서도 원시불교 쪽이었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면 사람들은 꽤나 신기하게 생각한다.

 

여기다가 고등학교를 검정고시로 조기졸업 했다는 사실까지 보태면 웬만한 사람들은 모두 엄청 혼란스러워한다. 게다가 대학은 또 1년 늦게 간 거다. 하긴 이게 뭐 상식적으로 아귀가 맞아 떨어지는 경로는 분명 아닐 것이다.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정리되는 내 이력은 그래서 대충,  "검정고시->1년 잠적->대학입학(불교학)->대학원석박사(프랑스철학)", 이렇게 된다. 아 하나 더 빠졌다. 대학 10년 수학. 입학년도와 졸업년도를 계산해 보면 딱 10년동안 대학이라는 곳에 있었던 게 된다. 이런 제길!

 

요즘에는 나이도 들고 이런 걸 꼬치꼬치 캐 묻는 '면접관'을 만날 일도 없고 해서 괜찮지만, 예전에는 이런 이상이력의 구멍들을 설명하기 위해 꽤나 심난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들이란 '상식'에 대한 무의식적인 종속심리가 있어서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죄다 '어둠의 세계'에 속한 것으로 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검정고시'로 조기졸업했다는 것까지는 그나마 괜찮지만, 대학 입학 전 1년을 뭐했는지(혹시 조폭의 세계? 혹은 어떤 종류의 음침한 오타쿠의 세계?), 또는 어째서 대학을 10년씩이나 다녔는지(학생운동 수배? 아니면 불우한 가정형편?)에 대해 설명하다 보면 갑자기 좌중이 숙연해지곤 했던 거다. 설명 안 하면 나란 물질이 온갖 의혹에 휩싸이게 되고, 설명하자니 도통 재미없고(왜냐면 사람들이 바라던 그런 '활극'은 없으니까)  그런 것이었다. 

 

또 사실대로 설명을 해도 반신반의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학교보다 시립도서관 인문과학실과 문학자료실에서 살았다는 둥,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를 읽고서 고승은 아니라도, 땡중이라도 되려 했다는 둥 ... 이런 식으로 말하면, 사람들은 당췌 '감'이 안 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 인생이 그들에게는 없었으니까.

 

결국에는 자기들 편한 대로 나를 야쿠자 세계에 접수시키거나(실제로 난 이런 분을 봤다. 그전에 실컷 위와 같은 설명을 해 드렸는데도 말이다), 불우한 환경을 딛고 공부하는 학자로 보거나(대체로 이렇게 본다. 하긴 집이 좀 가난하긴 했다. 서울 상경때 딱 5만원이 내 주머니에 있었으니까),  아니면 고맙게도 독학으로 상당한 경지에 이른 철학자로 보거나, 그래 주신다. 이 모든 소위 '파악'들이 공교롭게도 '내'가 아니다. 편하신대로들 생각하는 것일 뿐이다. 나로서는 난감하고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나'를 설명해야될 상황이 되면 그냥 귀찮다. 그렇다고 맘대로들 상상하시게 놔두자니 짜증의 쓰나미가 몰려온다. 괜히 애먼 사람들한테 화도 내게 되고 말이다. 

 

난 내 이런 상황이 개인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또 한국사회의 사회적 의식의 '보수성'을 가늠할 만한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타자에 대한 시선이 관습화되어 있고, 일생의 타임라인이 대체로 유사하고 고만고만한 삶만이 인지되는 사회에 우린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곳에서는 메인스트림이라는 것이 너무나 확고해서 거기 속하지 못한 모든 것들이 주변화되거나 소수화되기 쉽다. 

 

문제는 이런 주변화되거나 소수화되는 이력이나 삶이 매우 자주 사회적 폭력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이들은 이미 사회적 '인정투쟁'의 장에서 애초부터 애매모호한 위치를 점하고 있기 때문에 메인스트림과 그에 가까운 당사자들에게는 매우 거슬리는 이물감을 안겨다 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내 경우에서와 같이 이럴 경우 사람들은 스스로의 방어기제라는 것을 동원해서 이 이물감을 애써 없애 버리려고 하거나(기억의 왜곡), 제거하려고(차별화와 억압)한다. 왜냐하면 이것을 인정하기보다 이렇게 하는 것이 훨씬 손쉽기 때문이다. 말보다 주먹이 더 가깝기도 하고 말이다. 

 

어찌 보면 나란 물질이 어째서 평소에는 사람좋게 보이다가 문득문득 성격이 더러워지는지 그 원인을 알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여간 이 자본주의하고도 천박한 한국 사회에 살자니 편협한 시선들이 귀찮다 못해 멍청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 멍청한 시선으로 나를 훓어 보는 걸 견디지 못해서 쌍욕이 나오는 게다. 세상의 모든 마이너에게 느끼는 연민도 여기서 나오는 것일 게고 말이다.

 

하여간 메인스트림에서 비껴서 있는 마이너의 스탠스가 더 익숙해질 때가 올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면 짜증이 밀려오지 않고도 슬슬 웃어가며 능구렁이처럼 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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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17

  • 등록일
    2009/12/17 20:10
  • 수정일
    2009/12/17 20:10

오랜만에 집에서 늦잠을 자고, 오랜만에 하루 종일 집에서 이것 저것 공상도 하고, 정말, 오랜만에 아무 걱정 없이 있을 것 같았다. 하긴 그렇게 될 수 없을 것이다. 한 가지 늘 따라다니는 그늘이 난 있으니 말이다. 아니 이제는 한 가지가 아닌 것 같다.

 

난 사람들이 "때로는 슬프고, 기쁘고 한 게 인생이다" 는 식으로 말하는 걸 들으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때로는'이라는 식으로 기쁘고 슬프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삶에서 언제나 슬프다. 그 슬픔을 벗어나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스피노자도 고귀한 삶이 힘들고 드물다고 했던 것이고 말이다.

 

삶은 늘 슬픔이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웃는 낯에 숨어 있기 때문에 슬프고, 하나의 기쁨이 잠시 머물고 있는 순간에도 그 기쁨이 물러났을 때의 지독한 낯설음 때문에 또 슬프고, 그 슬픔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슬프다.

 

이 슬픔을 끝장내기 위해서는 죽음을 선택하거나, 세상을 버리고, 절대적인 어떤 것에 의지하면서 수도원이나 산사로 가는 길 밖에 없다. 난 감히 이 꿈을 꾸지는 않는다. 그래서 자잘하게나마 살아 가려고 하는 것이고, 작은 성취나마 고마워하는 것이고, 단 한 뼘의 진보나마 들뜨는 것이다.

 

오늘 같은 날은 많이 슬프다. 좀 더 늘어지게 쉴려고 했는데, 그게 안 되어서 심통이 난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언제나 '불안'을 짊어지고 사는 이 허튼 육체가 측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그녀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슬프고, 그것을 듣는 나도 슬프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해결하듯이 단칼에 해결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이상하게도 나이가 들수록 나 스스로에게 살의 같은 것을 느낀다. 그 살의는 이상하게도 건조하다. 그래서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저 세상으로 갈 수도 있을 것 같다. 왜 이 나이쯤 스스로 죽어간 사람들이 유언장을 쓰지 않고도 족했는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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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과 테제

  • 등록일
    2009/11/23 00:12
  • 수정일
    2009/11/23 00:12

- 영가진각이 육조혜능으로부터 깨달음을 얻고 나오면서 지은 게송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370 윌리엄 블레이크는 "한 송이 꽃에서 전 우주를 본다"고 했고, 라이프니쯔는 모나드가 하나의 무한한 세계 전체라고 했다. 여기엔 어떤 형이상학학적 공명이 존재한다. 그것이 무엇일까?

 

- 한국사회에선 선거에 이기고 권력에 획득하기 위해서는 교육과 주택에 관한 납득될만한 거짓말을 해야한다는 건 선거꾼들이라면 다 동의할 것이다. 문제는 좌파 선거 정당이 과연 이 짓을 해야하냐는 것이다. 만약 좌파의 정치적 양식에 어긋나지 않고 권력을 획득하려면 이 조건에 급진적 전망을 부가해야 하는데, 그렇게 된다면 이해타산에 밝은 소위 서민-중산층 중 어느 누구도 이 전망에 솔깃하지 않을 것이다. 선거좌파들의 고민은 여기서부터다. 이들은 지금부터라도 이에 대한 선거전략 회의에 들어가야 하는데, 여기에는 불수의한 또는 미필적인 임무방기가 생긴다. 만약 이 유동적인 서민-중산층 계급의 이해타산을 흡족하게 할 만한 정책을 내놓는다면, 그것은 분명 주택-교육 정책일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정책은 결코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이익을 위한 것이 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거정당'이 이들의 요구를 저버릴 것인가? 무리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증후가 드러난다. 즉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노동자계급의 이익만을 정책적 대안으로 내세우면서 집권할만한 역량을 가진 진정한 노동자계급정당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덫이 있기 때문이다. 주택과 교육, 노동자계급정당은 이에 대한 확실한 비판과, 그보다 더 중요하게는 그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 진리에의 선의지, 그것은 마땅히 플라톤을 위해서만 남겨두자. 우리는 그를 이해하면서 더 심층으로 가야 하리라. 사유의 지층에는 진리보다 거짓이 선보다 사악한 아름다움이 더 많다는 것 .그래서 이제 철학자는 정치가이면서 고고학자, 문헌학자 더우기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 철학적 사유는 수학적 계산이나 예술작업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것이다. 무기력한 철학은 이 사실을 자주 망각하지만 활력 넘치는 철학은 이 사실을 부단히 의식한다. 왜냐하면 선의지란 마땅히 미적 활력과 욕망의 표면에 서식하는 이념인 것이며 이 이념이 발생은 미적 무의미 차원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은 그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더 자주 예술에 경의를 표하곤 했던 것이다. 

 

- 편의상 나누자면 프랑스 철학의 한국적 갈래는 현재 두 계열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는 현상학과 해석학을 기반으로 논변을 중심에 놓고 체계를 겨냥하는 계열이 있고, 또 한편에는 실증적 과학을 기반으로 논변만이 아니라 개념에 집중하면서 체계보다 현실에 접근해가는 계열이 있다. 전자에는 다수의 아카데미 학자들, 예컨대 일세대 프랑스철학 연구자들이라 불리우는 박이문 등과 그 다음 세대이면서 보다 기독교적이고 전통과 문헌학적 감수성을 중시하는 강영안과 서동욱이 있으며 후자 쪽에는 주로 아카데미 외부에서 활동해 온 이정우, 류종렬, 이진경, 김재인 등이 있겠다. 문제는 이 계열이 좀 더 긴장감 있게 길항하면서 학문의 반성과 비판을 도모한다기보다 각자의 영역에 자족적으로 머물면서 후속세대들에게 어떤 길을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는데 있다. 특히 실물적 기반을 쥔 강단파에 유학이후 또는 박사 이후 세대원들이 대거 몰리면서 자칫 프랑스철학이 현상학적 해석학적 기반에만 관련된다는 식의 허구가 유포되고 있는 듯하다는 것이다. 

 

- 해석학적 지평이란 곧 해석의 지평이기도 할 것이다. 해석은 해석학적 대상의 앞과 뒤로 들고 나기도 하지만 그 해석이 시간 자체를 앞뒤로 들고나기도 한다. 하이데거가 다시 정당화된다. 즉 해석이 시간이 곧 실존의 시간이라는 것. 난 이 경우를 대중분석의 많은 예에서 본다([씨네 21] 720호 특집 참조). 

 

- 물론 핵심은 칸트적인 통찰이다. 즉 질문보다 그 질문의 가능조건 말이다. 하지만 이로부터 다시 칸트와 결별이 필연적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범주론이 아니라 감성론이며 변증론이 아니라 이념론 그것도 차이의 이념론이기 때문이다. 

 

- 인식근거에서 존재근거로의 전회는 칸트의 코페르니쿠스가 아니라(사실 이 코페르니쿠스는 가짜다), 맑스와 들뢰즈의 코페르니쿠스라야 가능하다. 존재란 의심할 여지 없이 하나의 신체다. 이로써 데카르트의 학문의 나무도 그 뿌리를 바로 하고 서게 된다. 이 뿌리는 형이상학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존재론이며 곧 윤리학이고 정치철학인 게다. 형이상학은 여기서 이 뿌리의 양분을 길어 자라난 열매일 것이고, 이 열매가 바로 일상이고 습관이며, 세계관(Weltanschauung)이다. 

 

- 철학의 적은 분열증이라기보다 언제나 강박증이었다. 강박을 적으로 삼음으로써 철학은 결국 예술보다 빈곤한 어떤 것이 되었으며 그 외부에 스스로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타자를 남겨두게 되었다. 마치 디오니소스처럼.

 

- 최근 정성일의 말처럼 영화는 상영과 관람을 통해 한시적인 코뮌을 구성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제영화 내재적 가치와 형이상학 아래에 놓인 영화의 정치학일 것이다.  이때 영화는 영화보기이며 행위주체들은 씨네필이길 넘어 씨네워리어 또는 씨네밀리탕트일 것이다. 68년 혁명 당시 씨네마떼끄 프랑세즈를 지켜낸 누벨바거들이 그들일 것이다.

 

- 한때의 적멸이 스친다. 등언저리가 서늘하다. 여기는 도저한 실재의 난만지대. 난 순간순간 스스로를 잡았다가 놓치기를 반복한다. 포르트다포르트다포르트다...

 

- '非'인가 '反'인가? 하긴 회의론은 스스로에 모순된다. 하지만 회의론이 스스로에게 진리를 요구하지 않는 순간 그것은 진리의 유령, 그것의 도플갱어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니체의 디오니소스는 한번도 존재한 적이 없으며 다만 생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 생성이 '순진무구'한가?

 

- 이제 철학의 임무는 과학과 해석학을 조우시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조우는 형이상학과 정치경제학과 자연과학이라는 삼위격 안으로 수렴되고 그로부터 발산할 것이다.

 

- 의미론의 연속된 두 층위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첫째 층위는 천문학적 알레고리로 주로 설명되는 고도로 추상화된 층위(형이상학)이고 둘째는 주로 기계적 역설을 횡단하는 가장 구체적이고 극사실적인 층위(예술)다. 이 두 층위의 극단적 스팩트럼으로 갈수록 개념과 이념은 점점 더 희박해진 공기 속에서 탄생하며 외연은 뚜렷해지는 대신 내포는 복잡해진다. 그래서 개별성이 보편성보다 앞서는 것이다(이 방면에서 예술과 철학은 구분되지 않는다). 상식(doxa)은 이 두 층위의 혼효면 위에 서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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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할 것인가? 권력이 권능을 멸시하고, 거기에 봉사하기보다 자신의 위세에 나르시시즘적으로 집착하기 시작한다면 말이다. 만약 이 권력이 그 나르시시즘으로 인해 파쇼화되고 권능의 외침을 정치적으로 '고립'시킴으로써 다중 낱낱이 서로 무관한 듯이 취급한다면 말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단결은 아니고 공명이 이루어지려면 여기서 어떤 전술이 필요할 것인가? 절대적 폭력을 동원해 권력을 단두대로 이끌 것인가, 아니면 권력을 똑같이 멸시하는 방법을 통해, 권력 스스로가 자신의 노예적 신분을 깨닫도록 할 것인가? 혹은 이대로 멸시와 모멸을 감내하면서 노예의 가면을 마다하지 않으며, 삶을 소모할 것인가?      

- 좌파 진영 내의 중도파를 알기 위해서는 당연히 백낙청과 최장집을 읽어야 한다. 이들이 어떤 행보를 보이느냐, 어떤 책을 내느냐에 따라 이데올로기 진영의 형세가 변동하기 때문이다. 최근 백낙청이 [어디가 중도이며, 어째서 변혁인가]를 냈고, 최장집은 [민중에서 시민으로]를 냈다. 제목만 봐도 내용이 어떠할 지 윤곽이 잡히는 바다. 어떻게 하면 이들을 효과적으로 비판하고 넘어설 수 있을까? 이것이 좌파내 급진 진영의 또 하나의 과제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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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6시 수원터미널. 틀어 놓은 티비 두 대에서 각기 다른 방송국의 각기 다른 애국가가 나온다. 터미널 안이 온통 왕왕 울린다. 밖은 짙은 안개가 이미 점령했다. 안개를 뚫고 그 옛날 박정희의 탱크가 불쑥 포신을 내밀 것 같다. 심상치 않은 수원의 새벽이다. 난 광주로 간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말이다. 박정희 따위는 발톱에 때만한 가치도 없지 않은가? 사랑은 역사보다 더 오래 되었고, 역사보다 더 훌륭하니까.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동선이 점점 활발해진다. 대기하고 있던 버스들, 좌측 옆구리에에서 불빛이 흘러 나온다. 6시 9분. 이제 날이 훤하다.

 

- 사람 사이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다. 그것이 깨지면 그 이상의 '연대'도 '협력'도 불가능하다. 이명박을 봐라. 어째서 국민 대다수가 그에게 마음으로 협력하지 않는지를.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대자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건 그저 평범한 사람살이의 규칙이지만, 가장 기본적인 것이라는 걸 말하고 싶은 거다. 요즘 들어 한 가지 일 때문에 자꾸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된다. 혹시 나도 또한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한 적은 없는가, 또는 나도 모르게 신뢰를 저버린 적은 없는가, 자꾸 묻게 된다. 한 번 신뢰가 깎이면 돌이킬 수 없다. 이후로 신뢰에 관련되었던 그 누구도 그를 완전히 믿지 않을 것이다.

 

- 이제 글을 거두어들일 때다. 한동안 외부에 글을 쓰는 것을 줄여야 하겠다.  

 

- 논쟁적 서평쓰기가 거쳐야 할 것들: 원전대조→발췌→다른 서평 참고→사전숙고→쓰기

 

- 나는 ‘다른’ 글을 쓰고 싶은 거다. 섬 바위에 새기는 외딴 글. 그러나 날빛 글.

 

- 새벽 2시. 혼곤한 정신이다. 머리 속에 N극만 있는 자석 덩어리가 해마 근처에 떡하니 버티고 앉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풀벌레  소리가 온 동네에 왕왕 울린다. 멀쩡하게 버틸 수 있을까?

 

-강의준비: 강의교재검토->2차자료검토(프랑스철학+강영안)

 

- 흐린 날, 라디오에서 나오는 피아노는 Listz일까? 낯익다. 감사 때문에 상태가 영 좋지 않은 게 분명하다. 어서 이 기간이 좀 갔으면 싶다. 아무리 그래도 연구실에 하루 종일 앉아 있는 건 그리 좋은 게 아닌 듯 싶다. 어쨌든 내 시간이 충분히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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