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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8/05
    단편과 테제(2009/7/29-8/3)
    redbrigade
  2. 2009/08/03
    형수가 죽었다(2)
    redbrigade
  3. 2009/07/29
    단편과 테제(2009/7/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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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9/07/19
    이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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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9/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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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과 테제(2009/6/26~200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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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과 테제(~2009/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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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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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9/06/06
    2009/06/06
    redbrigade

단편과 테제(2009/7/29-8/3)

  • 등록일
    2009/08/05 00:36
  • 수정일
    2009/08/05 00:36

-쌍차 투쟁이 진지전 양상으로 가면서 불분명했던 계급 관계가 점점 투명해지고 있다. 경찰과 사측의 진압공모사실이 언론에 폭로되면서 사측 논리의 정당성이 일정부분 훼손되고 있다. 여기저기서 연대의 손길도 일어 나고 있다. 쌍차 노동자들에게 '물을 갖다 주자'라는 캐치프레이즈는 매우 호소력 있어 보인다. 반면 금속노조 집행부는 여전히 무급순환휴직 카드를 들고 현장 투쟁력을 까먹고 있다. 7월 22일의 지리멸렬한 투쟁은 상당부분 금속노조 집행부의 기회주의적 전술에 책임이 있어 보인다. 

노동자대회는 피해만 안은채 끝났다. 폭력을 무릅쓰고 고생한 노동자-학생-시민들의 희생만큼 성과가 없었다. 난 화면을 통해 펼쳐지는 개들의 진압과 거기 속수무책으로 쓰러지는 노동자-시민들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다. 언제까지 우리는 이 희생의 스펙타클의 주인공으로 살아야 하는 것일까? 스펙타클을 깨고 실재의 현장에서 승리를 구가할 날을 과연 가까이 온 것일까?

현재로서는 희망이 조금씩 보인다. 무엇보다 쌍차 도장공장 내부에 남은 노동자들의 패기가 아직 시퍼렇다. 그거면 되지 않겠는가?

 

- 대상에 대한 열정, 개념에 대한 냉정. 이를테면 철학자들의 격언이 이래야 되지 않겠는가? 물론 열정에는 사랑도 있겠지만, '분노'도 있을 것이다. 냉정에는 분석도 있겠지만 통찰과 직관도 있겠다. 내가 보기에 전자로 과도하게 기울면 논변의 백치가 될 것이고, 후자로 치우치면 설익은 객관주의의 함정에 걸려들 것이다. 이 두 벡터를 모두 고려하는 것, 그것은 순전히 '사건' 다시 말해, 개념과 대상이 조우하고 교전하는 그 사건을 예견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야만 글쓰기도 제대로 된다. 논쟁도 제대로 된다.

 

-물음과 대답의 적분과정은 신학의 근방역일까? 아니다. 이 과정은 일종의 반신학, 안티크라이스트의 과정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덧셈이 아니라 뺄셈이며 규정이 아니라 미규정이며 코스모스가 아니라 카오스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적분은 완결된 아폴론이 아니라 언제나 미심쩍은 형태인 디오니소스를 불러내기 때문이다.

 

-유물론은 관념론의 대당이 아니다. 심층의 유물론은 이 대당 자체를 내재적으로 포월(Jaspers)한다. 이 유물론(내재-포월 유물론?)은 따라서 관계성과 비물질성조차 심층의 표면으로 이해한다. 심층은 오직 들끓을  뿐이다. 

 

- 호모폴리티쿠스는 그저 나온 규정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유적 본질인 기억과 관련있다. 즉 인간의 기억 자체가 매우 정치적이라는 게다. 프로이트는 이를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으며 라이히는 이를 분명히 했다. 따라서 기억의 정치라는 말은 동어반복이다. 문제는 이 동어반복의 사태를 해석하는 것이고 이 해석 안에서 계급투쟁을 복원하면서 승리하는 것이리라. 계급투쟁 속에 해석을 전유하는 것 말이다. 그러므로 리꾀르가 열정적으로 말한 '해석의 갈등'은 '해석의 계급투쟁'의 완곡어법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미래이익에 대한 과장과 손실에 대한 과소 평가. 이를 경영학에서는 투자유치를 위한 포트폴리오, 즉 홍보라고 일컫는다. MB의 일관된 거짓말은 이 천박한 마키아벨리즘에 근거한다. 이때 소통은 기만술 이상이 될 수 없지만 그 기만술의 행위주체 쪽에서 보자면 너무나 당연하고 확고한 전략인 셈이다. 이러니 MB는 죽었다 깨어나도 반성의 무능력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오히려 다중의 저항이 MB에게는 이해불가능할 뿐이다. 따라서 "초는 누가 대주는 거야?!"라는 짜증 섞인 질문은 영원히 해결되지 않고 그의 횡한 대뇌 어딘가에서 배회할 것이다. 이 대뇌 이상 증후군을 바로. 'candlephobia"라고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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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수가 죽었다

  • 등록일
    2009/08/03 23:24
  • 수정일
    2009/08/03 23:24

늦게 일어나서 하루종일 집에 있었다. 원고를 정리하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가끔 멍하니 창문 너머 저~기 아파트 사이에 끼어 있는 하늘을 보았다. 깨느른하게 접혀 있는 하늘, 지금은 어두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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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은 토요일날 광주에서 돌아와 바로 하남으로 가야 했다. 사촌 형수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마흔 아홉에 암으로 세상을 떠나서 그런지 조문객들의 수가 적었다. 사촌형의 성격이 고립적인데다가 괴팍해서 인간관계가 좋지 않아서이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형수는 그 나이 동안 돈만 벌었다. 그걸 아이들에게 썼고, 집을 사고, 땅을 사고, 전원주택을 사는 데 썼으며, 이제 좀 더, 마음껏 자신만을 위해 펑펑 쓸 수 있는 시기가 되자, 죽었다. 인생 뭐 별거 있나, 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성남 인근에 있는 화장터에서 유골을 들고, 판교에 있는 집에 오기까지 사촌형은 초췌한 얼굴로 눈물만 훔쳤다. 한 마디도 없었다. 그리고 고모와 고모부, 숙모, 작은 사촌형과 나, 사촌형님과 그 아이 둘, 이렇게 거실에 주욱 둘러 앉아 정말 한 20분 동안 또 아무 말도 없이 있었다. 전원주택이라 주위는 고요했고, 거실 창문 너머 정리가 안 돼 웃자란 잡초들 사이로 고양이가 울고 지나갈 뿐이었다.

 

사촌형은 일가친척들에게도 인심을 잃었었다. 그리고 형수 쪽 친척들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거실에서의 그 침묵은 그 서먹하고, 때론 적대적이었던 오랜 감정의 골을 잔인하게 확인시켜 주고 있었던 거다. 내가 몇 마디 시덥잖은 농담을 했고, 고모가 이제 아이들과 힘 내서 살아라, 고 다짐한 후 점심을 먹고 일어섰다. 단 한 시간도 머물지 않은 거다.

 

헤어지면서, 난 형님에게 "연락 드릴게요"라고 했다. 형님은 순간 내 눈을 빤히 보았다. 난 그 말이 그저 인사치레라는 걸 그제야 알았고, 사촌지간에 할 말은 아니라는 것도 그때야 눈치챘다. "인제 가믄 언제 보노?"라고 작은 사촌형은 조카들에게 물었다. 차라리 그게 더 솔직한 말이었다. 사실 볼 일이 인제 있겠나, 싶었다. 그래도 조카들이 꼬마였을 때, 사촌형 내외가 대구에 있고, 나도 거기서 까까머리로 학교를 다닐 때 우린 한 자리에 종종 모였었다. 화투도 치고, 음식을 먹고, 일도 거들었었다. 아이들을 무등 태우기도 했고 말이다. 그런 즐거운 시절, 하하호호 하던 그 모든 날은 이제 간 것 같다. 왜냐하면 누군가 죽는 그 순간 그(녀)의 봄날도 우리의 봄날도 기어이 가고야 마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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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과 테제(2009/7/3-22)

  • 등록일
    2009/07/29 02:54
  • 수정일
    2009/07/29 02:54

- 무기계약노동자로 전환하지 않고 해고를 강행하는 사업장에 대한 소송을 준비하는 전략은 괜찮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도 분명하다. 비정규직법은 무조건 폐기되거나, 최소한 기준요건을 강화해야 한다.

 

- 현재 한국사회를 강한 의미에서든 약한 의미에서든 '파시즘'으로 규정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신자유주의라는 변수를 고려해야만 적확해진다. 다시 말해서 이때 파시즘이 근대적 의미를 넘어서고 있다는 것은 단순히 '경찰국가'라는 규정에서 더 나아간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파시즘은 경찰력을 안고서 정보사회 자본주의, 금융자본주의의 심장부를 지나간다. 정보사회 자본주의, 금융자본주의는 자본주의의 치부욕이 가장 노골적으로 그리고 가장 치밀하게 작동하는 사회구성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파시즘은 군사적 권력을 가장 대담하고 노골적으로 행사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실재로 그렇게 한다. 이 경로에서 또 중요한 것이 미디어다(베를루스코니, 이명박). 따라서 탈근대 파시즘은 전세계 다중을 자신의 극으로 놓고(이 파시즘은 그런데 결코 다중으로부터 독립할 수 없다. 모든 잉여가치가 이들로부터 나오니 말이다) 한 줌도 안 되는 금융자본가들과 정보자본가들을 자신의 뒤에 보호하면서, 그리고 화폐, 경찰, 핵을 무기로 하면서(그 각각에서 신용독점, 지역적-국제적 치안독점을 통한 불안을 양산하면서) 자신의 기생력을 이어간다.

 

-촛불을 가만히 살펴 보면, 하이데거의 그 악명 높은‘일상성'이란 테제가 오해 받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래 하이데거에게서 일상성은 피투된 현존재의 '빠져있음'으로부터 비롯된 현존재의 비본래적 실존양식이다. 하지만 하이데거가 이를 폄훼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현존재든 이러한 기본적인 비본래적 양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현존재 분석 자체도 여기에 기반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하이데거의 일상성이란 존재론적 차이 자체의 잠복기다. 그러나끼 일상성은 표면적인 비본래적 상태를 유지하지만 현존재의 본래성을 언제나 예상하는 '물러남'(withdrawal)이란 것이다. 이러한 일상성의 특질, 여기서 바로 예술적 영혼의 울림이 드러난다. 바하만의 말한 시인의 책무, 즉 "미래를 향해 예포를 울리는 자"라는 것과 들뢰즈의 '어두운 전조'는 촛불이라는 괴물을 예상하는 하이데거의 고요한 일상성의 외피를 둘러쓰고 우리 주위를 돌아 다닌다.   

 

-이런 생각 안하고 싶지만, 비정규직법 개악 정국 속에서 MBC 뉴스를 보다 보면, 이 사람들이 정말 미디어법과 비정규직법을 거래하는 건 아닐까, 라는 의문이 슬슬 든다. 그제는 법 적용 대상도 아닌 대학 연구원들을 들먹이더니, 오늘은 두 법안을 두고 여아간 줄다리기가 '답답'하다고 했다. 악의를 가지고 싶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독해되는 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명박이가 드디어 기부를 결정했다. 재단법인을 만들었다. '청계'란다. 그런데 재단법인 이사진들의 구성을 보는 순간 당장에 못미덥다는 생각이 든다. 저 돈이 결국 측근들에 의해 관리될 것이고 퇴임후에 그 돈이 실제 교육사업에 쓰이기도 하겠지만 또 어디에 쓰일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게 딴나라당 정치자금이 될 지 유럽 어디에 부동산을 사는 데 쓰일지 누가 감시한단 말인가? 공익재단을 만들고 이사진을 구성하려면 자기 측근을 기용할 일이 아닐 것이다. 아예 재단형식의 출연이 아닌 다른 방식도 있을 것이고 말이다. 그 '재단'을 이용해서 돈 세탁 따위가 이루어지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뒤가 구리다. 어째서 명박이는 무슨 짓을 해도 이리 찜찜하냐?
: 좀 전에 기사들을 봤는데, 역시 가관이다. 네티즌들이 아무도 그걸 '기부'라고 믿지 않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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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 등록일
    2009/07/19 22:50
  • 수정일
    2009/07/19 22:50

이사를 하고, 살림을 들이고, 동네에 적응하면서 일주일이 지나가 버렸다. 오늘 중고 냉장고가 거실에 들어 오는 것으로 나란 물질의 서식환경 변경이 얼추 완료된 것 같다.

 

먹물 아니랄까봐 책이 요물단지였다. 두 박스를 버리고도 족히 10박스가 넘었다. 그게 또 좀 무거우냐. 정말이지 공부께나 한다는 물질이 이사를 하려면 이삿짐 노동자에게 추가수당이라도 줘야할 판이다. 결혼을 하고 살림이 더 늘면 이사다니는 게 어찌 큰 일이 아닐까. 여튼 직장과 좀 멀더라도, 그놈에 부동산 투자 가치니 뭐니 따지면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것보다, 한 군데 줄창 눌러 사는 게 이 부류의 물질들이 애국하는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번 토요일에 그녀도 올라 와서 하루를 있다가 갔는데, 뛸듯이 기뻐 ... 했다면, 거짓말이고, 적이 '안심'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하긴 흑석동 그 지하방 천정에서 떨어지던 붉으죽죽한 정체불명의 누수물을 생각하면 온 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이제 여긴 작은 거실까지 딸린 3층이고, 사방이 트여 있으니 장마철에 살갗 여기 저기서 곰팡이가 번지고 있다는 악몽에 시달리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사실 이사 첫날 밤을 지나고 창문으로 들이치는 햇살을 두 눈꺼풀 위로 느낄 때 기분이란, 마치 ... !

 

서울까지 오가는 시간에 버스 안에서 할 일들을 생각하고(그래봐야 책읽거나 영화보거나 일 것이고), 일일 계획을 조금씩 수정하느라 오늘 낮을 보냈다. 이제 그녀가 집에 들어 오면 된다. 그 일이 남았고, 내겐 일생일대의 큰 일이 될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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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3

  • 등록일
    2009/07/03 13:59
  • 수정일
    2009/07/03 13:59

2009년7월3일의 단골 커피숍아침에 그녀가, 왜 요즘은 블로그에 '글' 쓰지 않느냐, 고 했다. 응? 아, 일상 얘기?, 라고 대답하고 문득 요사이 내 생활의 보폭을 생각하게 된다. 가만히 보니, 다시 잰걸음이다. 천천히 걷자고, 둘러보며 걷자고, 그렇게 다짐하고, 말하고 했는데 어쩌다 보면 어느새 걸음이 빨라져 있다. 

 

다시 느긋해지기로 한다. 번역은 꾸준히 진행중이고, 8월까지는 무난히 해 낼 것이다. 논문관련 책들을 읽고, 틈틈이 의뢰 받은 글과 칼럼글을 쓰면 된다. 독서계획도 별 어긋남 없이 진행 중이다. 다음 주면 이사를 갈 것이고, 이제는 정말 햇살을 받으며 아침을 맞을 수 있다! 지하생활자는 ya basta ~~

 

지금 있는 여기 커피숍도 이제 올 일이 없어질 것이다. 새 터전에 또 익숙해져야 하리라. 조용하고 싼 커피숍이 있으면 좋으련만 ... . 공원이 근처에 있다는데 반드시 가봐야 할 것 같다. 무엇보다 나 혼자 살 곳이 아니니까, 그 사람과 함께 조곤조곤 얘기하면서 걸어다닐 산책로가 거기 있으면 좋겠다. 여름이면 과일 싸가서 자리 펴고 먹고, 겨울이면 뽀드득거리는 눈을 밟을 수 있게 말이다. 

 

아, 그리고 꽤나 놀라운 책을 발견했다. 내 논문 주제를 그대로 담고 있는 새 책이 곧 출간될 예정이란다.논문 주제를 '강탈'당한 느낌이 들어서 처음엔 좀 충격이긴 했지만,  한 번 더 생각해 보니, 나와 흡사한 생각을 저 먼 곳에서 같이 하고 있는 이 학자가 매우 친근하게 느껴졌다. 대뜸 한 번 만나보고 싶다, 는 생각도 들고 말이다. 계속 관심을 가질 듯...   

 Deleuze and Ricoeur: Disavowed Affinities and the Narrative Self, by Declan Sheerin

 

리꾀르의 'the self'를 들뢰즈의 주체화 양식 비판을 통해 재구성하고 극복하려는 시도로 보이는데, 내 의도와는 좀 다르다. 한 번 읽어 봐야 정확히 알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논문의 범위와는 좀 차이가 있을 듯 ...

 

아,,, 비가 한참 오더니 날씨가 개고 있다. 어제는 굉장한 천둥-번개였다. 연구실 선생님 한 분이 오는 도중 뒷차에 벼락이 떨어진 현장을 목격했다고 겁에(?) 질린 채로 상황 설명을 했었다. 옆에 있던 분이 그러시더라. 어째 벼락 맞을 놈들은 안 맞고  (이 말에는 분명 명바기 패거리들은 안 뒈지고, 라는 함축이 있다. 점잖은 분이라 표현이 그렇지 않은 거다) ...  

 

기사스크랩을 좀 더 하고, 수업을 갈 것이다. 감기가 한 달 넘게 그녀를 따라 다닌다. 뭘 먹어야 건강해 질런지 ... 어디 히말라야 정상에 핀 연꽃이라도 따다 다려 주려나 ... 음. 갑자기 골똘해지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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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과 테제(2009/6/26~2009/7/2)

  • 등록일
    2009/07/03 01:02
  • 수정일
    2009/07/03 01:02

- 뭐 이런 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일단 피켓을 들고 시청 광장에 선다. 이때 경찰들을 채증할 동지 한 사람이 옆에 있어야 한다. 사진채증을 담당한 동지는 피켓팅하는 동지가 연행될 때 그 장면을 찍는다. 동영상이면 더 좋다. 저들이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지 않고, '불법'에 대한 근거를 대지 못하는 장면을 음성과 함께 담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 이 자료를 근거로 채증된 경찰의 신원을 파악한 후 고소한다. 그리고 소장에, 경찰은 조직의 일원이므로 명령권자의 처벌도 함께 원한다고 쓴다. 만일 경찰 상층이 명령에 복종하기만 한 이 한낱 이경, 일경 등이 처벌되는 것을 수수방관한다면 윤리적인 비난을 받을 것이고, 만약 개입한다 하더라도 비난을 당할 것이다. 너무 순진한 생각인가? 해 볼만 하지 않은가?

 

- 대기업과 신문사 방송진출이 핵심인 미디어법의 노림수가 과연 '여론 분점' 나아가 '부르주아지의 여론 독점'에만 있는 것일까? 내 생각에 이게 일차적 목적이란 건 분명한데, 두 번째 경우의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만약 미디어법이 통과되어 찌라시들과 이건희 일가가 방송을 해댄다면, 기존의 합리적 여론과 이후의 노예적 여론이 극명하게 날을 세울 것이다. 이건 곧 여론 분점을 경유해서 여론 갈등이 촉발될 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중대한 사안마다 사람들의 의견이 뚝뚝 갈라지는 걸 상상하는 건 어려운 게 아니다. 물론 이런 갈등 상황에서 이익을 보는 것은 부르주아지들이 될 게 뻔하다. 사람들은 이 일련의 사태들 속에서 정치적 무관심, 절망감, 냉소주의에 빠질 것이고 말이다. 이 마지막의 사태, 곧 전 인민의 정치적 무기력이 바로 부르주아지들이 노리는 바이기도 하다는 것. 이를 위해서 미디어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없다. 베를루스코니의 이탈리아를 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 미디어는 중립적일 수 없고, 그 때문에 더 장악하기 쉬우며, 그 결과 우민을 더 쉽게 양산할 수 있다. 괴벨스는 이 이치를 너무나 잘 꿰뚫어 보고 있었지 않나?

 

- 조정환이 촛불의 폭력을 '절대적 폭력'으로 표현하면서, 그것의 존엄성이 부르주아지의 '선제폭력'이나 촛불들의 '방어폭력'보다 더 높은 권능을 가진다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옳다. 하지만 그 절대적 폭력은 실재적인 폭력의 잠재성도 함축하고 있다고 해야 정당하다. 혁명적 폭력은 다중의 혁명적 조건의 최상의 성숙, 그 자체를 '증명'하는 것이다. 만약 그 폭력이 부르주아지의 탄압이라는 객관적 정세 하에서 발생하였다면, 그에 뒤이어 나타나는 다중의 실재적 폭력은 무람없이 절대적 폭력의 발현이라고 해야 한다. 이 면에서 조정환은 너무 소심하다.

 

- 흐린 날은 모든 사물이 신비롭다/호남선 고속버스 안/노변에 이제 막 생긴 마을이/경운기를 세워 두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 본다

 

-우선은 이런 것이다. 즉 '대통령 소환제'를 법률적으로 구성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것을 인정하고, 기반으로 잡은 상태에서 그 제도화에서 파생되는 것들을 상상하고, 보완하라는 것이다. 법률적 말단에서 시작하지 말고 제헌적 상상력에서  시작하여 제도화를 완성하는 것, 그것이 꼬뮨이 실물화되는 최초 동력, 부동의 원동력(the unmoved mover)인 게다. 상상하라, 반성하라, 행동하라, 가 아니라, 상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반성은 미네르바의 부엉이들에게 맡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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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과 테제(~2009/6/28)

  • 등록일
    2009/06/28 14:37
  • 수정일
    2009/06/28 14:37

- 새 검찰총장과 국세청장에 또 정치검찰과 최측근을 앉혔다. 정말 이쯤 되면 막나가자는 것이다. 자, 어떻게 해야 할까? 지방선거와 총선을 통해 한나라당을 압박하는 건 정해진 방법이고, 다른 방법은 없을 것인가? 내 생각에 사람들은 이 정권에 대한 대항마가 등장하는 순간, 정권 퇴진 투쟁을 실질적으로 조직할 것이라는 게다. 소위 '대안'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지독한'(?) 습관이 남한 민중들에게 있으니 말이다. 여튼, 과연 부르주아 정치판에 누가 대항마가 될 것인가? 이명박의 정치력 이 지금보다 더 바닥으로 내려 가면, 자연스럽게 그것이 생겨날 것이지만 ... . 간절한 것은 이렇다. 제발, 박근혜는 아니기를. 지금은 여전히 이 여자가 대세라 한다. 재수 없게도 말이다.
 
- 다중과 촛불에 대한 조정환의 사유를 따라가다 보면 존재론적으로 다중이 더 심층적인지 촛불이 더 심층적인지 애매할 때가 있다. 어떤 경우에는 촛불이 존재론적 심층이고, 이때 다중은 이들을 그저 '명명'하는 계기일 뿐이라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다중이 더 심층이며 촛불은 그 '영원한 시간'이 현실화된 표면이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애매함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 궁극적으로 '정치'는 소멸해야 한다. 오해하지 말자. '소멸'은 억압되어 해체된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의식의 층위에서 무의식으로, 제도에서 삶으로, 구조에서 에피스테메(Foucault)로 내려가는 것이다. 소멸이란 여기서, 다시 말해 '대안적 삶'이다. 부르주아적 정치(대문자 정치, 플라톤적 정치)는 애저녁에 사라진 자리, 군사적 대결과 착취가 사라진 자리에 '소멸'의 과정이 들어선다. 여기서 헤겔에 대한 좌파들의 오래된 애증이 실현될 것이다. 현실적인 것이 이념이 되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이념이 현실이 될 것이다. 로두스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로두스로 가는 길은 험난하다. 이 길은 혁명의 오디세이아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한예종 사태에 대응하는 황지우와 진중권을 비롯한 사람들을 살펴보면, 이 야비한 정권을 제대로 상대하기 위해서는 선제저항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걸 잘 아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이 단순무식한 2MB정권이 노무현을 정치살인하면서 끌고간 정치공작은 순서가 딱 정해진 것이다.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1차여론공작: 찌라시들이 공격대상에 영점 조준을 하면서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흘린다. 2. 명박이 패거리들이 이 말을 받아 '문제'를 '사실'로 둔갑시킨 후 '조사해 봐야 한다'는 식으로 입장을 밝힌다. 3. 떡검이 조사에 착수한다. 4.  2차여론공작: 다시 찌라시들이 나서는데, 이번에는 강도가 틀리다. 검찰 내부 '빨대'를 동원하여 공격대상을 제대로 사격하기 시작한다. 5. 다시 딴날당과 정권이 이를 받아 표적을 '범죄자' 취급한다. 6. 삼각편대(명박이 패거리+찌라시+떡검)의 모양새가 완벽하게 갖춰지면서, 표적을 둘러싼 파상공세가 매일  전개된다. 7. 결국 표적이 사살된다. 똥물을 뒤집어 쓰고, 인격 살해를 당하거나, 정치생명이 끊어지거나, 또는 이 둘 모두를 당하고 목숨을 끊는다.
한예종 교수들은 이 수순의 맨 처음에 선제저항을 하기 시작한 거다. 황지우는 사표를 던짐으로써, 진중권은 진보신당 탈당을 선언하고 전쟁을 선포함으로써 말이다. 내 생각에는 실제로 이 저항 때문에 인초니와 명박이 패거리들이 적지 않게 당황하고 있지 않나 싶다. 대한늬우스나 만들겠다고 지랄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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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과 테제들(~2009/6/21)

  • 등록일
    2009/06/21 14:50
  • 수정일
    2009/06/21 14:50

*생각나는대로 수첩과 컴 메모장에 끄적였던 것들...


- 해석학의 보편성은 정치의 보편성이다. 따라서 정치의 당파성은 해석학의 당파성이다.


-부산대 신해철 특강에 수백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특강 제목은 [대학생에게 말해주고 싶은 한국의 진보]다. 이 학생들은 '진보'보다 속을 '확' 뚫어줄 신해철의 독설이 더 듣고 싶은 것이다.


- 정리하자: 노무현에 대한 '해석투쟁'이 있다. 그러나 이는 점점 더 비본래적인 부르주아 당파투쟁으로 전락하고 있다. 노동계급 제조직들은 이 죽음에는 관심이 없는 듯 행동한다. 그러나 이 모든 움직임에 앞서, 즉 해석에 앞서 본래적인 '진실'이 조금이라도 드러나야 한다. 검찰 수사의 전모가 드러나야 하는 이유다. 검찰 수사를 종결하라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그의 죽음의 이유에 만족스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지금까지의 수사기록을 공개하고 다시 수사하라는 것이다. 


- 조정환은 그의 책에서 촛불의 사회정치적 차원과 존재론적 차원을 나누고 그것을 시간성의 측면에서 고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현실화된 아이온으로서의 촛불과 잠재적 카이로스로서의 촛불 말이다. 내 생각에 이런 방식의 시각은 이분법이라는 경직성에 걸려 들지만 않는다면(아마 조정환 선생 자신이 이런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정신이라 생각 들지만) 매우 고무적인 것이라 사려된다. 부언하고 싶은 것은 이런 것이다. 이때 존재론은 관념론이 아니라 유물론의 전통을 따라야 한다는 것 말이다. 혹은 이때 유물론은 들끓는 잠재성으로부터 나와야 하는 것이지 이미 선별된(진리의 선의지에 따라) 이데아로부터 나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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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8

  • 등록일
    2009/06/18 03:16
  • 수정일
    2009/06/18 03:16

지금까지 잠을 자지 않았던 적이 꽤 오래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동안 되도록이면 새벽 1시를 넘기지 않고 취침했었는데, 그건 굳이 무슨 '아침형 인간'이 되고자 노력한 것도 아니고, 단지 늦게 잠 들어서 벌건 대낮에 일어나 어기적거리는 게 한심한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오늘 밤은 잠이 쉽게 오지 않는다. 여러 사념들이 '셀룰로이드판 같은'(기형도) 내 영혼의 얼개를 툭툭 치고 지나 다닌다. 살짝 괴롭다.

 

우선, 이놈에 방이 문제다. 지난 금요일부터 천장이 새기 시작했다. 책상 바로 위에 지구본을 펼쳐 놓은 듯한 자국이 선명하다. 주인 말로는 4층 어딘가에서 누수가 일어난 것이란다. 그런데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사실 말이지, 집 전체의 균열들을 X-ray 를 들이대어 찍어 대지 않는  이상 누수의 근원을 찾기는 힘들다는 거다. 따라서 내 방 천장을 물들이고 있는 저 요상한 자국도, 한 5분 간격으로 똑똑 떨어지는 저 정체불명의 붉은 물방울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거다. 결론은 이사다.

 

그녀와 화상채팅하면서 여기저기 집을 알아본다. 어디로 갈 것인가? 머리통이 거대한 나침반이 된 듯한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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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6

  • 등록일
    2009/06/06 15:06
  • 수정일
    2009/06/06 15:06

이번 주 주말은 광주를 가지 않는다. 오랜만에 자주 가던 커피숍에 앉았다. 무더운 날씨다. 사람들은 연신 땀을 훔치며 거리를 쏘다닌다.

 

광주를 가지 않는 대신 내겐 스스로 지운 과제가 있다. 집안 일을 하나씩 해결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꿈에도 나타난다. 큰 형님과 아버님, 그리고 다시 담배를 피우는 나, 이렇게 셋이서 꿈 속에서 이런저런 갈등을 겪는다. 어머님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게 신기하다.

 

그녀는 담양 대나무 숲을 거닐고 있다. 전화로 더운 날씨에  매우 고생중이라고 알려 왔다. 구구까지 들고 다니려니 더 그럴 것이다. 

 

... 전경이 조금씩 흔들리는 날이다. 아지랑이처럼 미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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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두 편,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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