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적요한 일상

90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0/09/07
    2010/09/07
    redbrigade
  2. 2010/08/30
    2010/08/30
    redbrigade
  3. 2010/08/27
    2010/08/27
    redbrigade
  4. 2010/08/27
    2010/08/27
    redbrigade
  5. 2010/08/27
    2010/08/27
    redbrigade
  6. 2010/08/24
    2010/08/24
    redbrigade
  7. 2010/08/21
    2010/08/21
    redbrigade
  8. 2010/08/16
    2010/08/16
    redbrigade
  9. 2010/08/14
    2010/08/14
    redbrigade
  10. 2010/08/12
    2010/08/12
    redbrigade

2010/09/07

  • 등록일
    2010/09/07 14:18
  • 수정일
    2010/09/07 14:19

오랜만에 좋은 날씨다. 장안문 근처에서 뒷바퀴에 펑크가 났다. 자전거를 끌며 걸어서 지동시장 근처 자전거점까지 왔다. 수원천이 옆으로 흐르고, 사람들은 어쩐지 나른해 보였다. 드문드문 나무 밑 벤취에 앉아 쉬는 사람들, 천변에 늘어선 점포들, 아직 따가운 햇살이 그 모든 생들에 비추고 있었다. 어쩌면 걸으며 휴식을 취하는 이 오후 한 나절이 내겐 가장 소중할지도 모른다. 천천히, 천천히, 얼마나 되뇌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늘 마음이 앞서곤 했다. 이제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긴 생이 저렇듯 나른하게 졸고 있는 노인의 어깨에 햇살처럼 기대어 있다 하더라도 어떤 날은 궂고 비가 오고 천둥이 칠 것이다. 그 누구든 이 반복되는 휴식과 분주함을 벗어나진 못한다. 하지만 이것은 비극적일 뿐, 죽음에까지 이르지는 않을 것이다. ...

 

 번역물을 접는다. ... 커피숍 통유리 밖으로 또 많은 차들이, 사람들이 지나간다. 나는 산책자가 되고 싶다. 도시를 유령처럼 떠도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명징한 의식을 가지고, 욕망을 적요한 심층에 달래고, 세상의 모든 우발성을 인정하면서, 그렇게 도시를 커다란 하나의 원형감옥처럼 바라보고 싶다. 저기 감시탑에는 사실상 아무도 없다. 실재와 환영을 만들어 내는 것은 오히려 이 원형감옥의 구조 자체. '환영의 한계', 짐 자무시는 [리미트 오브 컨트롤]을 만들면서 자신의 영화를 그렇게 규정했다.  실재 자체가 영화의 환영이라면 내가 걷고 보고 느끼는 이 모든 것은 실재일 것이고, 동시에 영화며, 또 동시에 환영이다. 그러나 현실은? 난 그것을 보고 싶다.

 

영화적인 여섯번째 감각? 또는 아뢰야식? 또는 신적 직관(스피노자)? 이것들이 현실을 보게 하는 것일까? 여전히 어떤 것도 명징하지 않다. 도대체 난 명징한 '무엇'을 보고 싶은 것일까? 오히려 난 그 '무엇'을 창조해 내는 편이 낫지 않을까? 현실이라니!  이 속도를 가늠하는 것은 과연 의미있는 짓일까? 나는 혹시 이 덧없는 것들 중에 가장 덧없는 어떤 것을 '현실'이라 명명하고 불가능한 탐색을 하는 것은 아닌가?

 

Sapere Aude! 하지만 아직 미명이다. 왜냐하면 아직 '덧없음'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0/08/30

  • 등록일
    2010/08/30 12:34
  • 수정일
    2010/08/30 12:35

일이 원만하게 해결되었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최악의 사태는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현재로서는 선생님들도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나는 그것을 이해한다. 그리고 일이 발생하게 된 정치적 맥락과 그 당사자들의 마음도 알 수 있다. 심정들의 착종. 감정들과 판단들. 그 모든 비물질적인 동시에 물질적인 동선들 가운데 '나'는 하나의 매듭으로 존재한다. 이 매듭을 풀고 조직의 평면이 매끄러워진다면, 나는 무언가의 아래(sub) 나 자신을 던질(ject)수 있다. 조직 보위적 사고? 그렇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모두가 사는 길일 것이다.

 

만약 합리적 동선만이 있다면 그 조직은 죽은 것이다. 거기에는 반드시 아래에서 들끓는 지옥의 움직임이 존재해야 한다. 위험한 좁은 길과 증오의 불길이 일렁이는 그 무의식의 벼랑 앞에 서면 아찔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나는 거기서 마땅히 저 아래를, 그 심층을 주시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야 한다.  그리고 오랜 기다림이 찾아올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0/08/27

  • 등록일
    2010/08/27 13:48
  • 수정일
    2010/08/27 13:48

당대에 가장 흔하게 작동하는 심리 현상은 '원한'(ressentiment)과 원망(Wunsch)이 아닐까? 각자가 가지고 있는 그 원망, 가장 강한 그 무의식은 사실상 결코 그 대상(objet)을 쟁취할 수 없는 운명에 놓여 있다. 대상과의 동일시의 본질은, 그래서 '비동일시'가 된다. 문제는 이 비동일시의 운명 안에서 인간은 지속적으로 그것의 충족을 향해 맹목적으로 돌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기보다, 인간은 허무를 의지하기 때문이다(니체).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이러한 원망충족의 지향을 방해하는 것들이다. 이때 무의식의 카덱시스는 자신이 위장하고 있는 그 원망충족이라는 희망에 반해 '진실'을 알려주는 모든 대상들에게 적의를 품는다. '너는 끝내 좌절할 것이고, 남는 것은 허무밖에 없다'는 그 진실 말이다.

 

이 진실은 곧 생의 덧없음을 표현하는 것임에도, 원한에 휩싸인 자는 이 덧없음을 인정하기보다 거기에 화려한 미래라는 위장물을 덧씌운다. 그것이 바로 허무를 의지함으로써 원망충족의 좌절이 죽음에 이르지 않도록 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 끈질김, 이 무서운 집착. 이것들은 자신의 나르시스적 원망을 향하면서 끝없는 사랑을 고백하지만, 그것을 방해하는 것에 대해서는 목숨을 건 투쟁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이 당대적 현실이라면, 지금 인간들은 서로를 공멸로 몰고가지 않기 위해 안간힘 쓰는 것이 된다. 제도와 관습, 그리고 조직적 고려가 투여된 합의 같은 것들은 이런 각자의 투쟁을 공통된 이념 아래 포섭하고, 하나의 사회적이면서 동시에 선험적인 어떤 자아, 초월적 통각을 도출하기 위한 과정이며 그 매듭들이다. 본질적으로 분열적인 사회체는 이 과정을 통해 기능부전에 빠지지 않고, 각각의 매듭(노드)들을 통해 속도를 조절한다. 결국 분열증의 평면에 편집증의 매듭들. 이것이 사회체의 전체 구도라 할 수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0/08/27

  • 등록일
    2010/08/27 13:10
  • 수정일
    2010/08/27 13:10

내일 어떤 이야기들이 나올지 모두는 아닐지라도 일부  예상될 수 있다. 당시 내 거취에 관한 내용이 분명 다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때만 생각하면 끔찍하다. H는 얼마나 집요한가. 이렇게 해서 끝까지 나를 괴롭힐 것인가? 단호하게 행동해야 한다.  피도 눈물도 없다는 말은 이럴 때 하는 말일 것이다.

 

분명하게 밝히자. 그리고 앞으로의 내 거취도 함께 그렇게 하자. 조직 내에서 더 이상 나 자신의 자유를 희생해서는 안 된다. 이제 난 혼자가 아니니 더 그렇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0/08/27

  • 등록일
    2010/08/27 00:19
  • 수정일
    2010/08/27 00:20

원한이 깊은 자를 대하기는 두렵다. 이 사람은 사태를 보는 눈이 멀어 있으므로, 사랑을 모른다. 분노는 무지에서부터 나오고 사랑은 이해에서 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이 사람을 대할 때는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 하지만 더 끔찍한 것은 대개의 사람들이 이 사람과 같다는 사실이다.

 

원한이 깊은 자는 자신의 상처를 정당화하기 위해 타인의 고통을 필요로 한다. 그 고통이 곧 스스로의 상처가 영광스러운 것이라는 증거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맹목, 이 어두운 본능. 감정은 상상력이 동요하는 그 순간 상상력의 에너지를 먹고 자란다. 지혜로 향하지 않고 죽음으로 향하는 상상력은 곧 원한이 될 것이다. 그 원한이 다시 상상력의 방향을 재정립할 것이고, 지혜와는 더 멀어진다.

 

어떻게 대할 것인가? 그의 원한이 타자의 고통을 수반한다는 그 사실을, 그리고 그 고통이 결코 자신의 상처보다 작지는 않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

 

--------------------------------------------------------------

내가 괴로워하는 사이에 사랑은 저 멀리 있다. 현격함. 또는 서러움.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이렇게 슬퍼한다. 내가 투쟁하는 그 지점에서 너는 저만치 떨어져 있고, 오히려 그것이 더 안전하다. 내가 원하는 것도 그것이다. 하지만 더러 이렇게 슬프다. 이런 경우 나는 어째서 홀로인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0/08/24

  • 등록일
    2010/08/24 12:18
  • 수정일
    2010/08/27 00:23

장안문

 

장안문 앞 카페. 어제부터 계속 비가 온다. 처서가 지났고, 폭염이 걷힐지도 모른다. 자꾸만 앞서가는 마음도 좀 갈앉힐 수있을 것인가? 어쨌든 삶의 위상은 내가 시시각각 생성되는 그 위도와 경도를 통과하면서 만들어진다. 어떤 지점, 또는 아무 곳도 아닌 그 지점(erehwon)에서 나는 시작하고 또 어딘가에서 잠정적인 결론을 내릴 것이다. 이 과정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은 환상이다. 하지만 운명이 허용하는 한도(meson) 내에서 최소한의 조정은 가능하다. 삶이 하나의 평면이라면 그것은 완전히 알 수 없는 많은 현실성의 선들과 실재의 운동이 조우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 평면과 운동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듯이, 자꾸만 그 평면을 초월하려는 이 정신적 과정과 평면에 긴박된 신체가 분리된 것도 아니다. 사실은 그러한 분리를 가정하는 순간 삶은 오히려 허구적인 어떤 것이 될 것이다. 초월성으로 이탈하려는 이 정신을 붙들어 매는 것, 또는 그것을 내재성의 평면으로 탈주시키는 것, 시시각각 첨예해지는 것은 이런 것이다. 그래서 일상의 매순간이 마치 셀룰로이드판처럼 바들거리며 진동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 긴장의 지속성, 속도와 질량의 차이들, 에네르기들의 교전, 따라서 삶은 내가 어느 순간 느낄 수 있는 안정감을 부여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차이의 반복을, 그 심연을 받아들이는 것이 편안하다. 허무에의 적극적인 의지. 그 의지를 매순간 고양시키기. 단, 내재성의 평면에서.

 

장안문, 왕은 저 문을 통해 모든 정치적 암중모색의 속도를 조절하면서 자신의 아버지를 향해 천천히 걸어 갔을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또 정신적으로도 그는 가끔 표면을 거닐기를 그만두고, 저렇게 심층으로 들어간 것이다. 삶은 점점 느려지고, 정신은 야릇한 공포와 더불어 죄책감을 덜어 내는 그 제의가 주는 편안함으로 팽팽하게 떨렸을것이다. 그때 그는 무엇을 느꼈을까? 심연은 곳곳에 있다. 저 문이 그곳으로 통하는 문 중 하나라면, 왕은 진정한 승부처에 도달한 것이다. 나와 또 다른 나, 분신과의 싸움, 마조히스틱한 쾌락, 그 에너지를 임계점까지 끌어 올리면 어떤 열락에 도달할 것인가? 죽음 충동을 넘어 생성 자체가 되는 그 쾌락 말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0/08/21

  • 등록일
    2010/08/21 12:25
  • 수정일
    2010/08/30 12:35

첨삭할 거리가 쌓여있다. 동녘에서 부탁한 원고교정도 밀려 있다. 번역을 몇일 째 못하고 있다. 방송대에 보낼 우편과 우리 카페 일도 밀려 있다. 무엇보다 논문 준비를 못하고 있다.

 

많은 일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다. 하나하나 해나가야 하리라. 하지만 많은 것들을  한꺼번에 생각하다보면 가슴께가 좀 묵직해진다. 바쁜 날들이다. 중심. 이 중심을 천천히 걷는 것. 그것이 필요하다. 중심을 천천히 되도록 아무 생각 없이 걸어가기. 천천히, 보다 천천히.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0/08/16

  • 등록일
    2010/08/16 11:58
  • 수정일
    2010/08/30 12:35

비가 온다. 오랜만에 산책하기로 한 계획을 접는다. 오래동안 비가 오면 우발성이 필연성이 되는 것일까? 시간의 작은 단위 안에 빗방울이 하나씩 떨어지는 것은 하나의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많은 빗방울들이 낙하하는 그 점 안에 어떤 필연성이 있을 것인가? 이를테면 이러한 우발성을 받아들이면서 내가 계획을 추진한다면, 그것은 의지의 자발성이 만들어내는 필연일 것이다. 실재(reality) 안에서 빗방울들은 일종의 법칙처럼 움직이지만, 현실(現實) 안에서 그것들은 완연한 우발성이다. 그렇다면 '나'는 실재하는 것이긴 하지만 현실은 아닐 것이다.

 

이 부분, 바로 이  방면에서 나는 사유를 진행하고 있다. 현실성과 실재성. 실재하지만 현실은 아닌 것, 또는 그 역. 도대체 현실은 실재성의 운동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일까? 나는 지금 이 두 범주의 차이를 말하고 있다. 직관적으로 확증되는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도대체 아리스토텔레스가 최초로 완전태를 이야기했을 때 그것은 실재인가 현실인가? 프로이트가 실재(현실?)에 대해 이야기 했을 때 그것은 과연 이념의 혼동은 아니었을까? 

 

다시 빗방울이다. 개체로서의 빗방울들, 하지만 하나의 무한집합으로서의 빗방울들. 전체가 개별적인 것들의 총합 이상이라면 이 빗방울들은 실재 이상일 것이다. 그러나 '무한'이 되어서야 하나의 현실이 되는 이 비선형적인 운동들은 어디에서 비약을 이루는 것인가? 실재로부터 현실로, 또는 개별로부터 무한으로. 아니면 그것은 연속적인 어떤 것인가? 베르그송인가, 라이프니츠인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0/08/14

  • 등록일
    2010/08/14 12:43
  • 수정일
    2010/08/30 12:35

심상한 질투심, 혹은 적의라고 할까? 어쩌면 이것은 나 자신에 대해 내가 느끼는 감정인지도 모른다. 사실상 이 감정은 철학적으로는 무용하다. 문학적 잔영들. 감정이란 애초에 상상으로부터 나오며 그 방향이 내성을 향하느냐, 바깥을 향하느냐에 따라 어떤 질적인 변화를 노정한다. 질투는 바깥을 향할때 힘이 되지만, 내성을 갉아 먹기 시작할 때 문제가 된다. 

 

초연해지는 것, 그래서 내성의 명징함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항상 철학적 태도 안에서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철학하기는 그래서 지혜 외에는 어떤 것에도 매달리지 않는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0/08/12

  • 등록일
    2010/08/12 19:55
  • 수정일
    2010/08/30 12:35

이사를 마치고 팔달문 앞 '할리스'에 잠시 앉았다. 오늘 강선생님과의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점심 나절이면 끝날 것 같던 이사가 오후 늦게야 끝났기 때문이다. 가지 못할 것 같다는 내 말에 선생님은 그래도 흔쾌하신 것 같았다. 다른 동학들이 그 분 주위에 있었기 때문이리라. H는 전화를 받자마자 문자에 답하지 않아 서운한 듯이 말했다. 어쨌든 선생님은 내 질문을 잊지 않고 계셨다. 그게 중요하리라.

 

진리(truth)가 아니라 실재(reality)가 중요하지 않은가,라는 내 질문, 그리고 서양철학 전통 안에 실재성과 다른 현실성이 존재하는가, 라는 두 번째 질문. 몇 주 전부터 나를 이끄는 이 질문에 선생님은 한 번 계속 생각해 보라고 했다. 그리고 뒤이어 그러한 구별도 서양철학 전통 속에 존재한다고 귀뜸해 주셨다. 하지만 짧은 통화 내용으로는 그 근거에 대해 짐작하기는 어려웠다. 난 선생님의 첫번째 답변에 방점을 찍기로 했다. 좀 더 생각해 보는 것 말이다. 

 

아무튼 최근은 '은둔'의 사유가 시작된 시점이다. 그렇다고 현실로부터 물러나지는 않는다. 그럴 수도 없다. 사유 자체의 '물러남'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방향은 심층을 가리키는 것일까, 아니면 허공을 가리키는 것일까? 지금은 가늠이 안 된다. 더 생각해 볼 밖에.

 

이것저것 번쇄한 관념들을 하나로 모아 가는 과정이라는 건 분명하다. 내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이 경향은 내 정신이 내 생활과는 관련 없이 의지를 몰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집중하고자 하는 이 의지, 이제 불혹을 바라보면서 생기는 이 의지는 내 철학적 삶에 어떤 흔적을 남길 것인가? 묵묵히 걸어가 보는 거다. 아무도 이 길 위에 나와 더불어 있지 않으며, 그렇다고 나 혼자인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없다는 것은 곧 보편의 인격, 또는 득실대는 자연의 호명을, 그리고 이 도시의 충만한 부재, 다시 말해 모든 것과 함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떤 범신론도 아니고, 과대망상도 아니다. 다만 내 신체와 정신이 걸러내는 세계의 파편들을 나의 의지, 곧 '정신의 시중을 받는 의지'(자코토)가 가감 없이 철학으로 전환시키고 있다는 표식이다. 이 표식을 언제든 느끼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 철학적 기분 속에서 삶과 텍스트 모두에 향기를 부여하는 것, 그것이 지금은 중요하다. 과연 어떤 우발성이 내 정신에 가해질 것인가? 나는 매일매일이 하나의 사건 속에 있는 무수한 사건'들'처럼 나 자신을 다룬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