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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7

  • 등록일
    2009/11/17 02:17
  • 수정일
    2009/11/17 02:17

어떻게 보면 한낱 경제라는 것이 삶의 중심에서 교교하게 그 삶을 좌우한다. 맞는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을 간과했다가는 큰 일일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러한 중추적인 요인을 짐짓, 또는 과감하게 물릴 줄 도 알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경우에 그렇게 물리는 것이 이후에 다른 실익이나 더 큰 명분을 가져다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특히나 그런 생각이 많이 든다. 하여간 앞으로 꽤 오랫동안은 내 경제의 규모를 너무 과소평가해서 가난을 자처하는 경우가 없을 것이라는 거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무엇보다 그 경제가 나의 이익이 아니라 나를 지탱하고, 또 나에게 그 온 생을 기댄 한 타자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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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에 새로운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는 느낌이다. 사람이 바뀌었고, 일이 다르게 진행되고 있으며, 내 각오도 다르다. 무엇보다 판단의 신중을 기하고, 집행에 책임을 지며, 반드시 다른 사람의 의견을 돌아 볼 줄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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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4

  • 등록일
    2009/11/14 11:54
  • 수정일
    2009/11/14 11:54

이번 호 [씨네21]을 보다가 영화 [파주]에 관한 김연수의 글에 인용된 중식(이선균 분)의 말이 한참 머리 속을 떠돌아 다닌다. 중식은 왜 이런 일을 하냐, 는 은모의 말에 "처음엔 멋있어 보여서 했고,  다음엔 갚을 빚이 생겨서 했는데, 지금은 일이 자꾸 들어 오네"라고 대꾸한다. 참으로 심드렁한, 그래서 너무나 슬픈 대답이다. 여기에 대한 김연수의 해석이 또 참 서글프고 아프지만 절절하다. 중식의 저 말은 그러니까, '생애전환기'(40대)에 처한 스스로에게 답한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난 저 중식의 말과 더불어 '생애전환기'라는 단어에 우뚝, 멈췄다. 생애전환기라... 맞는 말이다. 김연수도 그렇지만, 나도 생애전환기지 않은가?

 

학원 원장에게 대학 강의와 연구실 일로 일을 더 이상 못하겠다고 했다. 하긴 원장도 고등부 준비를 하면서 예전같지 않은데다, 내가 보기에 더 이상 내가 있어야 할 이유도 없다. 사표를 날리고 광주로 왔다. 생각했던 대로 그녀는 걱정이 앞서는 것 같다. "3시간 30분 전에 일 그만두고 광주로 달려 왔어요. 그런 얘긴 내일 해도 되지 않나요?" 난 내가 서운한 게 옳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그녀도 성급했다는 것을 인정하리라.

 

하여간 이제 생애전환기고, 난 그나마 안정적이던 돈줄을 내던졌고, 이제 다시 '안정'을 되찾아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더 심각한 결심도 남았다. 그건 일종의 내개 남은 삶 전반에 대한 성찰, 정도가 될 것 같다. 분명한 것은 내 생이 30대 이후로 또 한 풀 꺽여 돌아갈 것이라는 것이고, 또 그만큼 삶이 밀도 있게 전개될 것이라는 것이다. '밀도', 그래 밀도가 문제다. 그 밀도를 조절하는 것은 온전히 내 몫이고, 내가 얼마나 삶을 주도면밀하게 가져가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지금은 그렇다. 몇 가지 떠오르는 것. 잠을 줄이고,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고, 공부를 더 많이 하며, ... 시간을 지배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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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22

  • 등록일
    2009/09/23 00:02
  • 수정일
    2009/09/23 00:02

확실히 직관이 정확할 때가 있다. 특히 사람에 관한 판단에서 말이다. 이를테면 끊임없이 긴장을 유발하는 인간관계는 어딘가 어긋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내가 그 긴장을 유발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저쪽에서 그 긴장을 유지하고 있으며, 의식적으로 그 긴장을 풀지 않았을 때, 그 직관은 어김없다. 대체로 그 느낌은 적중한다. 이럴 경우에는 좀 뻔뻔스러워질 필요가 있겠다. 그 긴장의 pool에 발을 담그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는 게다. 내 곤조대로 가는 것, 그게 최선일 것이다. CB 뭐 저런 기분 나쁜 새끼가 다 있어? 정도 ... 로 치부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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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나이를 먹은 게다. 어린 사람들과 있다보면 나도 모르게 손발이 오그라든다. 저들의 이상한 열정에 내 감수성이 내상을 입을 것 같은 ... 그런 ... 불안감. 나이를 먹는 건 어쨌든 겁쟁이가 되는 것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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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준비가 끝나고 긴장이 풀린 탓일까. 하루종일 혼곤하다. 피로와 쾌감이 겹치는 이상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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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15

  • 등록일
    2009/09/15 16:33
  • 수정일
    2009/09/15 16:33

새벽에 광주에 도착했다. 교육부 감사 때문에 거의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2주가 지났고, 그 와중에도 번역과 학원일을 하느라 머리속에 무슨 젖은 솜뭉치가 든 것 같이 노곤했다. 게다가 다음 주에 또 강의가 잡혀 있다. 

 

택시를 타고 그녀가 있는 곳으로 왔다. 구구를 안고 마중 나온 사람. 난 이 사람이 있어 복되다. 그 어떤 신앙도 이 마음 속에 든든하게 자리 잡은 신뢰와 사랑을 넘어 서지는 못할 것이다. 눈빛과 눈빛, 손과 그 움직임들, 몸이 가는 곳에 내 감각이 반응하는 이런 친숙한 느낌들, 이 모든 공유의 감정은 단 한 낱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들은 '유일하다.'

 

아침에 일어나 동물원에 갔다. 그녀가 치즈와 스크램블 그리고 맛살을 얹은 토스트 샌드위치를 만들었고, 난 그동안 방을 치우고 나갈 준비를 했다. 두 시에 그녀의 수업이 있었기 때문에 우린 좀 서둘렀다. 오늘은 구구도 동행이다. 

 

많은 동물들을 만났다.  새들, 원숭이들, 그리고 사자와 호랑이 곰들. 하나 같이 조금은 우울한 표정으로 우릴 바라보거나, 따가운 초가을 햇살을 피해 그늘에 깨느른하게 누워 있었다. 가끔씩 그녀가 작은 비명을 지르거나, 구구를 채근했다. 구구는 겁이 나는지 이동백 안에 고개를 자꾸만 파묻었다. 저와 똑같은 몸짓을 가진 호랑이나 표범을 보고는 코를 킁킁대다 연신 고개를 돌렸다. 

 

전남대 상대 뒤, 커피숍 [시애틀]. 수업을 마친 그녀가 왔다. 음운론 수업이 어렵다는 그녀. 그건 분석에 취약하기 때문이라고 말해준다. 상상력이 분석의 기초가 되겠지만, 그러한 지적 비약이 가능하기 위해선 오랜 동안의 도제기간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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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01

  • 등록일
    2009/09/01 14:35
  • 수정일
    2009/09/01 14:35

이번 학기 첫 강의를 마치고 연구실에 왔다. 새벽 6시에 일어나서 출발했는데도 한 30분 지각해 버렸다. 학생들과 첫 인사치고는 꽤나 데면데면했던 것 같다. 그래도 강의 시간은 술술 잘 흘러 갔다.

 

첫 주제가 '철학이란 무엇인가?' 였다. 이 질문을 하면서 라슐리외의 일화를 소개했다. 라슐리외가 첫 부임한 고등학교에 가서 "나는 철학을 모른다"라고 했다는 ... 학생들은 대실망했다고 했다. 사실 라슐리외가 정확하게 집어 낸 것이다. 어찌 내가 철학을 알겠는가?

 

철학의 어원부터 시작해서 분과학문 분류 그리고 방법론을 한바퀴 돌고 나서, 그 유명한 플라톤, [국가] 7권의 동굴의 비유를 들어 가며 저 거대한 질문에 맞서 계란이나 던지는 수밖에 다른 뭐, 할 일이 있었겠는가?

 

예전부터 주장하는 바이지만, [철학개론]은 신출내기 강사가 강의할 만한 영역이 아니다. 이 강좌야말로 대철학자가 해야 한다. 오히려 세미나와 토론이 필요한 대학원 수업에서 공동연구의 작업을 강사가 하는 것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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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8

  • 등록일
    2009/08/28 01:55
  • 수정일
    2009/08/28 01:55

일정이 부대낀다. 관계가 꼬인다. 그로 인해 짜증이 밀려오고, 뜬금없는 분노가 명치를 치고 올라 온다. 씁쓸하다.  내 성향은 자기부정 따위를 견디지 못한다. 나 자신을 부정하는 건 정말 죽어도 싫은 것이다. 이 부정의 매뉴얼에는 이딴 것들이 있다. 후회, 회한, 자책, 원한, 굴욕감, 등등.

 

정말 답답하기 그지 없는 것은 내가 만들어 놓은 일에 내가 걸려 허우적대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다. 이건 누가 이해해 주지도 않는다. 아무도 그걸, 그 감정을, 그 느낌을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일은 온전히 내가, 나만이  최초의 마음가짐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최초의 마음이 '기쁨'이었는데 지금 이 지경이라면 그 '자기부정'의 감정은 더 심각하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고(번역에다 강의에다 연구실 일, 그리고 학교 일, 학원 일까지), 몸은 둘도 아니고, 머리도 둘이 아니다. 젠장, 이런 당연한 '불가능성'을 되뇌이면서 가슴을 치는 꼴이라니.

 

지금 내 상태는 내가 악을 쓰면서 외치고 싶은(그러나 그러지 못하는) 딱 한마디로 요약된다.

 

"냅둬!!!!"  

 

ps.술과 담배를 끊은 이후로 스트레스가 쌓이면 가슴이 갑갑하고 머리가 심하게 아프다. 지금 또 그렇다. 그러나, 이 상태인데도 난 내일 연구실에 가야 하고, 강의 준비를 해야하고, 돈도 벌어야 한다. 정말 대나무숲에라도 가서 대상 없는 쌍욕을 그냥 무더기무더기로 하고 싶다. 속좀 후련해 지게 말이다. 대뇌 어딘가에서 분열증으로 인한 망상이 나타나기 전에 이걸 해결해야 한다. 영화를 보러 가야 하나? 놀이 공원? 아니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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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과 테제(2009/8/18-24)

  • 등록일
    2009/08/25 10:54
  • 수정일
    2009/08/25 10:54

- 조정환에 의하면 문제는 '조직화'가 부재하니까, 조직이 필요하다는 게 아니라, 이미 네트워크 조직이 있으니까 새로운 조직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미네르바의촛불] p. 274). 앞의 '조직화'와 뒤의 조직화는 다른 의미다. 상당히 진일보된 관점임에 틀림없다. 이 관점을 일단 수용하고 나면 이제 남은 일은 한편으로는 새로운 네트워크 조직화를 급진적으로 일구어낼 인식론적, 존재론적 정당성을 발굴하고, 그를 통해 직접행동을 촉발하는 것이며, 한편에서는 기존의 네트워크에 이러한 직접행동을 강령화하면서 실물 수준에서 각 노드들(nods)에 활력을 흘려 보내는 것이 병행되어야 하겠다. 어디서 이에 대한 최신의 메뉴얼을 발견할 수 있을까? 싸빠띠스따? 시애틀? 프랑스 반CPE투쟁? 우리의 촛불들? 이 모두? 아니면 전혀 새로운 것?

 

- '촛불조직화'라는 대의는 촛불 다중 내부와 그 내부로 끊임없이 진입을 시도하는 지식인-지도부들이라는 양방향 화살표로 대변될 수 있다. 이 양방향 화살표는 필연적으로 벡터 합력 제로를 형성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또한 비극적인 것이고 말이다. 사실 이 합력을 제로로 만드는 것은 다중 쪽이 아니다. 이 지식인-지도부들의 둔감한 정세판단력과 조직화(Organisation: 이는 작은 조직들을 의미하는 organs와는 다른 의미로 난 쓸 것이다) 가 일을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는 주범이다.

다중은 이들을 지도부로 인정할 것이다. 여기에 단서가 달리는데, 오직 '우리 옆에' 있으라는 것이다. 즉 '함께 가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지도부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리딩'하고자 하며, 전체를 유기체로 만들려고 하고, 절합(articulation)이 아니라 통합(unification)하려고 한다. 그것이 사단이다. 옆에 있으면서 부르면 지도력(오히려 전문성)을 발휘하라는데 자꾸 선을 넘는다. 조언을 하지 않고 명령한다. 입으로는 동지를 말하면서 하는 말이나 행동 뽄새는 상전(상집?)이다. 이들은 촛불조직화의 그 조직을 organs로 보지 않는다. 그들은 그것을 대문자 Organization으로 밖에 파악하지 못한다. 그들의 무능력이고, 그들의 운명이었다. 하지만 이 '운명' 자체가 운동의 질곡이 되고 있는 상황, 그것이 현재 한국사회 운동의 현실이다.

 

- MB정부의 분열증시작-김대중 서거: 내 생각에 여기서 부터다. 중요한 것은 이 분열의 탈주선이 정국주도권의 재탈취 과정과 함께 가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사회 정치의 향배는 촛불로부터 시작된 다중주도권이 저들에게로 넘어 가는 반경이 큰 전환국면이라 하겠다.

 

- 고통을 회피하고자 하는 것, 그것은 궁극적으로 죽음충동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 다중을 계급계념만으로 즉 공시적으로만 분류하는 것은 반드시 편벽한 결과를 낼 것이다. 다중의 변수에는 시간성이 필연적으로 부가되어야 한다. 척도 없는 영원성을 기반으로 하고서야 다중의 표현이 가늠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다중은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이 함께 고려될 수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의 활력을 잃지 않을 것이다. 철학적으로 이 정당화 과정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의 시간, 그리고 스피노자의 기호에서 직관, 지복으로의 시간에 의해 수행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할 수 있음’(can)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것이 역량(potentia)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칸트적인 방식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즉 can이 must로부터 나오진 않는다는 게다. 오히려 전자가 후자를 포괄하며 후자는 전자의 부정적 효과 안에서 긍정될 뿐이다.

 

- 김대중과 노무현의 민주주의는 신자유주의의 방벽에 막혀 왜곡되었다. 그런데 이명박의 끝물 신자유주의는 전세계적인 공황에 의해 폭력화되었다.

 

- 이제 더 중요한 것은 플라톤에 반대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 반대의 꼬리를 붙잡고 플라톤의 위대함을 재전유하는 것. 이로써 플라톤 자신뿐만 아니라 중세 전체가 이제 머리로 서기를 그만두고 두 발로 걷게 될 것이다.

 

- 한국 트로츠키주의 진영의 기관지라할 수 있는 [레프트21]에 흥미로운 주장이 실렸다. 옮겨본다. “따라서 노동조합 상층 지도부에 가해지는 보수적 압력에 맞서고 이를 상쇄하기 위한 독립적 움직임이 중요하다. 이는 현장노동자들의 지지와 행동을 조직하는 네트워크를 의미한다. ... 현장노동자와 투사들의 네트워크 ....” 그런데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회주의자들의 조직은 이런 네트워크 건설에 도움이 될 것이다. ... 사회주의자들은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에 모두 개입해야 하고 두 투쟁을 연결하여 체제에 도전하는 운동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 함께 연대해서 싸울 수 있도록 뒷받침할 수 있는 정치와 조직을 발전시켜야 한다.” 네트워크의 필요성에서 시작하여 정치조직으로, 연대에서 개입과 운동을 발전시켜야 하는 선도적 역할로. 흔들리는 젊은 사회주의자들. 이들이 비로소 언급한 바, 후자의 요소들의 가치를 과평가하는 것을 그치고, 전자의 요소들을 더 적극적으로 긍정하기까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 광기는 이성의 넓적다리에서 태어난다(제우스와 디오니소스). 광기는 그 추종자들에게 살해당하지만 끊임 없이 재생한다(디오니소스와 여신도들). 하지만 광기가 태어난 자리에 상흔을 안고 있는 이성은 끝내 감염되고 미치며 스스로를 혐오하면서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 신화며, 동시에 현대의 신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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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2

  • 등록일
    2009/08/22 23:37
  • 수정일
    2009/08/22 23:37

무더운 날씨다. 줄창 비만 오더니 이제야 여름인 거다. 노무현 서거에다가 김대중 서거. 어떤 이는 주책맞게도(?) 백기완 선생 건강은 어떤지 궁금해 하기도 한다. 하긴 나쁜 일이 겹치다 보면 안 하던 걱정도 사서 하게 되는 거다. 한겨레에다가 김대중 서거에 관해 칼럼을 쓰신 걸 보니, 정정한 필력이 행간에 넘쳐나서 나도 반가웠다. 어쨌든 그 누구든 느닷없이 세상을 버려서는 곤란하다. 특히 정치적으로 올곶은 분들은 말이다. 오래오래 사셔서 더러운 '준심'(권력: 백기완 선생 표현이다)이 무너지고 '민중권력'이 들어 서는 걸 보셔야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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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 어제 도착했다. 그제 밤을 세고 새벽 차를 타고 와서 그런지 어제 하루 종일 잠에 약간씩 취해 있다가 초저녁에 까무룩 맛이 가 버렸다. 깨 보니 아침이더라.

 

구구는 더 건강해졌다. 그녀나 나나 구구가 이제 아이 같다. 경임이는 그런 우리가 꽤나 심각해 보이나 보다. 신기해 한다. 구구에게 이야기하고, 구구 눈을 살피고, 구구를 빗으로 빗어 주고, 구구를 이뻐하는 연인 ... . 그러고 보니 둘이 있을 때도 구구 이야기를 많이 한다. 조금전 버스 정류장에서 운암동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와중에도 그랬다. 구구를 놓고 도망가는 척, 숨는 놀이를 했다. 나나 그녀나 그런 걸 확신하는 것 같다. 아니 그렇다. 구구는 이제 한 가족이고, 그 녀석이 뭘 느끼는지('생각한다'고 하지는 않는다. 뭐 아직 냥이가 사유한다고 믿을만큼 나아가지는 않았다.) 우린 안다. 물론 구구도 우리 정서를 예민하게 느끼는 것 같고 말이다.

 

출판사 일 때문에 우리 둘, 신경을 많이 쓴다. 그 일, 참, 지지부진하다. 7월에 공고가 난다고 해서 기다렸더니, 8월에 난다고 했다. 그래서 또 기다린다. 문제는 그러는 동안에도 광주 일정이 흘러간다는 것이다. 정처 없는 서울 일정에 맞추었다가는 광주 일정이 틀어질 것 같아 불안하고, 광주 일정만 믿고 가자니 서울 일이 느닷없이 닥치면 또 곤란해질 것 같아 불안하다. 어서 공고라도 나야지 짐을 싸고 그녀와 구구 셋이서 공원을 거닐던지 할 건데 ... . 일단 화요일 확실한 정보를 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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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이 가기 전에 번역을 끝내야 하는데, 그게 잘 될지도 걱정이다. 아직 100페이지 넘게 분량이 남았다. 출판사에 다시 연락을 해야 할 지도 모른다. 한 달 정도 여유를 더 준다면 다 해낼 것 같은데 ... . 번역은 만만하게 볼 게 결코 아니다. 예전에 내 스승인 강영안 선생이 "번역 해서 죄짓지 마라"고 하신게 생각난다. 백번 지당하다. 그래도 이 작업이 마냥 지루한 것은 아니다. 나름 성취감도 있고, 공부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하지만 다시 번역 작업을 한다면 지금처럼 어리석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충분한 시일을 두고 차근차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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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과 테제(2009/8/4-17)

  • 등록일
    2009/08/18 00:26
  • 수정일
    2009/08/18 00:26

- 첫째, 논쟁 당사자의 논변을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논쟁 중 빠지기 쉬운 가장 유치한 함정은 바로 논변이 아니라 상대방의 정서를 분석하려고 할 때 일어난다. 그가 지금 어떤 감정 상태인지 상관하지 말라. 중요한 것은 그가 한 '말'이며, 그 말이 이끌어 가는 '논리'며, 그 논리의 '사실관계'일 뿐이다. 둘째, 상대방의 논변을 분석한 후에 결론을 항상 유보하라. 항상 의문형으로 '되물어라'. 그것이 진정 소크라테스적이다. 논쟁에 있어서 우리는 그때 이후로 한 발짝도 진보하지 못한 것 같다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셋째, 절대 이기려고 하지 마라. 스스로를 진실을 찾아 가는 오디세우스라고 생각하라. 그 외에 어떤 승패에도 얽매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십중팔구 평상심을 잃고 자기감정에 휩쓸리고 말 것이다.

 

- 이를테면 '흘러넘침'의 이념이 존재하고, '빼기'(결핍)의 이념이 존재한다. 고대 이래(플로티누스)로 전자는 신적 본질이었고, 후자는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악의 본성이었다(칸트는 이 방면에서도 획기적이었다. 그는 악을 결핍으로 본 것이 아니라, '전도'로 보았다. 즉 악은 기피해야 할 것이지만 '온전한 것'이라는 거다). 기독교 신앙은 철학적 관념의 올바른 부침조차 강박적으로 만들었다. 이 관념의 분위기를 부수고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아래로부터의 들끓음, 그것은 민중과 다중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역량의 표현이며, 그것은 흘러넘치는 것이라기 보다, 자본의 숨막힐 듯한 밀도 안에서 스스로를 빼 버림으로써 거기 새로운 활력, 혁명의 숨길을 터 놓는 존재론을 말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바와는 달리 악마야말로 저 천상의 꼭대기에서 빛나고 있을 뿐이다. 신과 천사는 바로 이 땅 위 빛이 없는 어딘가에서 남루한 복장을 하고, 상기된 눈을 뜨고 헤매는 자들 속에 뒤섞여 있는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기독교적 관념-해방신학에서조차-으로는 충족될 수 없는 생각이다. 차라리 이는 불교, 특히 대승불교의 보살사상이나 정토사상에서 더 쉽게 이념적인 적합성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 철학이 정치의 평면에 도달하는 순간은 어떤 때일까? 그러니까 이건 정치의 철학 즉 ‘정치철학’이 아니라 ‘철학의 정치’가 이루어지는 순간일 것이다. 이것이 그렇다고 플라톤적인 철인정치가 아님을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철학의 정치가 “관념의 오솔길이 아니라 대도시의 거리”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Deleuze). 그런데 바로 이 점이 철학의 정치를 어렵게 한다는것도 분명하다. 어떻게 이념을 저 거리의 활력과 더불어 ‘살게’ 할 것인가 말이다. 이념의 역동성을 표면으로 운반하는 것, 그것이 또한 정치술 다시 말해, 'polis-craft'일 것이다.

하나의 종합적 질문: 철학정치가 맑스/레닌이라면 정치술은 마키아벨리/한비자일 수 있는가?

 

- 시공간을 무화시키는 특이점은 물리학적 실재다. 그런데 그 특이점으로부터 모든 것이 발생한다는 사유는 새로운 것이지 않은가? 이를테면 잠재성을 취급하는 모든 발생론적 사유는 이런 식이다. 구조주의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우리는 조푸루아 식의 그 괴물로부터 벗어나 다른 식으로 특이점을 사유할 수는 없을까? 그러니까 좀 더 벤냐민적으로 좀 더 테크놀로지에 가깝게 말이다. 로봇공학? 아님면 영화나 홀로그램?

 

- 주체는 잔여(residue)다. 우리는 항상 그런 식으로 밖에 인식할 수 없다. 피카소가 면을 통해 주체를 사유하기 전에는 그러니까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나신>(1913) 이 있었던 거다(물론 이는 연대적 순서와는 상관 없다). 신체는 어떤 충만한 기관이 처음이 아니라 움직이는 잔영, 즉 잔여가 처음인 것이다. “양과 질 이전의 극화”라는 들뢰즈-니체의 테제는 따라서 콤플렉스 이전의 오이디푸스를 가리킨다. 우리-주체들은 그 오이디푸스를 완전히 다르게 변주한다. 그래서 때로 오이디푸스는 햄릿이기도 했다.

 

- 이 시기 한국사회에 그나마 존재하는 강단좌파는 부단히 스스로를 이론적으로 일신해 나가야 한다. 그들이 교육자라서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또한 당대의 지식이 그룹을 대표하는 그런 체제가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에 더 그러하다. 그래서 이들은 마땅히 새로운 개념에 대해 기본적인 똘레랑스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교조적인 담론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그를 통해 집단적인 문화이윤을 수취하면서 이 메커니즘을 교육과 학회활동을 통해 재생산하는 것 그것만이 자신의 임무인 것처럼 여기는 기풍이 이미 심각한 수준이다. 이런 조건은 다시 이데올로기 층위에서 교조주의를 강화한다. 게다가 이 카르텔과 폐쇄순환구조가 학벌과 연고 등과 얽히면 말 그대로 학문적 지옥도가 펼쳐지는 것이다. 한국사회 아카데미즘은 이 지옥의 입구로로부터 얼마나 멀리까지 들어와 있는가?

 

- 비가 많이 온다. 사당가는 7001번 버스 맨 앞좌석에 앉아 있다. 운전석 유리로 들이치는 빗물들. 이런 도로 위를 이런 찬 비를 보며 간다는 것, 언제나 그런 게 사는 거다. 별다른 것 없는 고뇌의 연속 말이다.

 

- 연대 이전에 중요한 것은 물론 전선이다. 연대는 사회적 합의에 의해 조성되지만 전선은 언제나 정치적 적대에 의해 구성된다. 전선과 연대의 인식론적 선후관계도 중요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더 유념해야 하는 것은, 현장에서는 존재론적인 구성의 관점(perspective)이 더 결정적이라는 것이다. 연대 안의 전선과 전선 안에서의 연대를 구성하는 것은 그 매번의 관점에 달려 있으며, 싸움의 효과와 승패 모두가 이 능란한 관점 구성에 우선 달려 있기 때문에 더 그러하다. 따라서 모든 레닌주의와 운동론의 ABC는 여기서부터다.

전선은 확고하게 연대는 느슨하게 그리고 “전략과 전술에 있어서 적들을 앞서 가는 것”(Guattrai).

 

- 개념실체론과 마찬가지로 계급실체론은 칸트적 의미에서 사용이 제한되어야 하는데 이번에는 초월적 사용이 문제가 아니라 경험적 사용이 문제일 것이다. 계급의 이념적 사용은 사실상 예지계에서 뿐만 아니라 감각계에서도 허용될 것이다. 하지만 이념이란 항상 그것의 그림자인 반입자를 가지고 있는 법인데 이를 미분화라 한다. 경험계에 이를수록 미분화는 계급이라는 몰적 이념의 자루에 쓸어 담기에 차고 넘치는 분자들로 들끓을 것이다. 이 지점을 들뢰즈는 특이점이라고 했으며 칸트는 숭고함이라고 했고 맑스는 프롤레타리아라 했다. 그러니까 엄밀하게 말해서 맑스에게서 계급‘론’이라는 게 없다는 것이다. 알튀세르의 말마따나 이는 단지 “경향적”인데 경향이란 건 일종의 반(半)목적의식적인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아나코-들뢰즈의 지평에서 이는 단지 브라운 운동이겠지만 본질적으로는 같은 말이다. 따라서 ‘계급’이 이런 미분적 투쟁과정이나 현장 안에서 초재적으로 사용되면 거기에는 반드시 몰적 선별과 플라톤적인 배제가 작동한다. 결국 현상은 기이하게 뒤틀리고 차이는 억압당하며 마침내 ‘아버지’가 등장하는데 이를 보통 ‘이론가’ 또는 ‘철학자’라고 부른다. 계급의 경향성이 정치의 내재면에 그리는 오이디푸스 삼각형의 경로 위에서 모든 혁명은 적법성의 내기에 걸리고 필패할 것이다. 그러므로 로두스는 계급의 산맥이 아니라 특이점의 고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조정환과 이택광(그리고 최원?)이 벌인 촛불성격논쟁은 그 생동감에도 불구하고 감정과잉과 이론의 빈곤으로 귀착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 이론이란 과학이 아니라 바로 철학이며, 또는 그 둘의 공명지점과 차이를 드러내는 역랼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특히 둘의 논쟁이 서로의 취미판단을 분석하면서(마치 그것이 분석될 수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반지성주의와 쁘띠부르주아 지식인론으로 비화될 때 일어난다. 이들은 이 주장의 철학적-고고학적 근거를 제시하기를 포기하면서 등을 돌린채 고성을 질러댄 것이다. 전자의 철학적 근거는 바로 데카르트와 칸트, 헤겔로 이어지는 근대 이성중심주의에 있을 것이며 후자의 경우엔 엥겔스의 맑스 혹은 레닌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 조정환은 한 가지 필수불가결한 계보적 사항을 더 첨가하는데 그것이 들뢰즈다. 그러므로 이 논쟁은 마땅히 이 근거들의 심층 안에서 독자적인 2라운드에 돌입했어야 옳았다. 하지만 이 둘은 근거와해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이 근거들의 어두운 지대(zone obscure), 이념의 고딕풍 놀이터로 들어오기를 거부했으며 각자의 과학의 방으로 돌아갔다. 한 차례 서로의 “방만 바꾸었을 뿐 혁명은 없었다”(김수영).

 

- 인격적 관계성은 불가능하다. 엄밀하고 가혹하게 대답하자. 당신은 내 코나투스의 인격성 따위를 논할 수 없다. 그런 건 애초에 없다고 말이다. 다만 당신과 나 사이엔 거리가 존재하며 그것은 기반으로 해서만 평가(evaluation)가 가능하며 기쁨의 생산도 가능하다고 말이다. 나든 당신이든 인격이라는 유기체적 조직으로 총체화하기는 불가능하다. 이는 모든 루카치식 ‘전형적 총체성’에 대한 고별 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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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11

  • 등록일
    2009/08/11 14:04
  • 수정일
    2009/08/11 14:04

서글픈 한 때다. 비는 오고, 당신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 애써 어루만지려 해도 충분히 가닿지 않는다. 게다가 요새는 이렇게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모든 것, 모든 결정, 모든 행운, 모든 기쁨도 채 절반의 만족도 주지 못하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녀 일이 잘 풀렸으면 좋겠다. 행여 잘 되지 않는다 해도 그 불운으로 인해 우리가 이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정말 큰 슬픔으로 다가오지 않았으면 싶다. 잘 하려고 한 짓이 오히려 악연이 되면 너무나 사는 게 헛될 것 같기 때문이다.

 

살아 가는 길에 함께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축복인가. 그 축복을 느끼며 살기에도 짧은 생이다. 난, 우린이제 얼마를 살 것인가? 30년? 40년? 너무 짧다. 그리고 서글픔은 너무 길다. 이건 불공평하다. 바로 잡아야 한다. 힘을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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