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다생각_펌 - 2005/11/16 21:36

모블로깅 테스트중. 카페 들어왔는데 특이한 물건 많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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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16 21:36 2005/11/16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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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생각_펌 - 2005/11/16 12:00

2005년도 논술고사 예시 문제라는데...

 

'돌본다'는 행위는 어느 시대에나 사회적 약자에게 전가될만큼 혹독하고, 보살핌의 사슬은 이제 전지구화되고 있나보다.
조만간 정서노동 연구의 대가라는 Hochschild 의 원서 하나를 모임에서 강독할 예정인데 꽤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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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키 디아즈는 34세로서 다섯 아이의 엄마이다. 필리핀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학교 교사를 하다가 여행사에서 근무했던 그녀는 미국으로 건너왔다. 미국에서 비키는 로스엔젤레스의 비벌리힐스에 있는 부유한 가정의 가정부 겸 두 살짜리 아들의 보모로서 일한다. 그녀는 연구 조사자인 라첼 파레나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지금도 내 아이들은 내게 집으로 돌아오라고 설득한다. 아이들은 내가 떠날 때 화를 내지 않았다. 그때는 아이들이 아직 아주 어렸기 때문이다. 남편도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그것만이 아이들을 기로도록 내가 실제적으로 도울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아이들이 학교에 다닐 수가 있었다. 나는 매달 아이들에게 돈을 보낸다.

곧 출판될 자신의 저서 『전 지구적인 하인들(The Global Servants)』에서 라첼 파레나스는 ‘엄마 되기의 세계화’인 이 당혹스런 이야기를 소개한다. 비키는 그녀가 여기서 소개하는 여성 응답자의 이름이다.

비벌리힐스의 그 가족은 비키에게 주급 400달러를 지급한다. 그리고 비키는 다시 필리핀에 있는 자기 가족의 가정부에게 주급 40달러를 지급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전 지구적인 보살핌의 사슬’ 속에서 사는 것은 비키와 그녀의 가족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비키는 파레나스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보수가 많다 해도 일이 너무 힘들다. 옷을 다리고 있다가도 부엌에서 부르면 가서 그릇을 닦아야 한다. 그것은 또 울적한 상황이기도 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모든 사랑을 아이(두 살짜리 미국 아이)에게 주는 것뿐이다. 내 아이들과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사랑을 그 아이에게 주는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비키는 자신을 고용할 사람에게 자신의 아이들을 기른 경험이 있다고 말함으로써 일자리를 얻었다. 그녀의 얘기를 들어보자. “나는 신문 광고에서 그 자리를 알게 되었다. 나는 그들에게 전화했고, 그들은 나에게 와서 면접을 받으라고 얘기했다. 나는 결국 채용되었다. 그들은 나에게 아이를 어떻게 돌보는지 아느냐고 물었을 뿐이고, 나는 나에게도 다섯 명의 아이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이들을 보살핀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가정부가 그 일을 대신했기 때문이다.”

세계 자본주의는 무엇이든 그것이 만지는 것에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그것은 거의 모든 것을 만지는데, 그 중에는 내가 얘기하는 ‘전 지구적인 보살핌의 사슬’도 포함된다. 이것은 유급 혹은 무급의 보살피는 일을 바탕으로 한 전 세계 사람들간의 일련의 개인적 연결이다. 대개는 여자들이 이런 사슬을 만들지만, 어떤 경우에는 여자와 남자 모두가 만들고, 드문 경우에는 남자들만이 만든다. 이와 같은 보살핌의 사슬은 국지적, 국가적 혹은 전지구적일 수도 있다.

전 지구적인 사슬은 (비키 디아즈가 이에 해당하는데) 대개 가난한 나라에서 시작해 부자 나라에서 끝난다. 어떤 경우 그런 사슬은 가난한 나라들에서 시작하고, 바로 그 가난한 나라 안의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한다. 혹은 그것들이 하나의 가난한 나라에서 시작해 다른 약간 더 가난한 나라로 확장되고, 이어서 후자의 나라 안에서 하나의 장소와 다른 하나의 장소를 연결한다. 사슬들은 또 연결되는 지점의 수에서도 다양하다. 어떤 것은 하나이고, 어떤 것은 둘이나 셋이다. 그리고 연결되는 강도도 다양하다.

이런 사슬의 한 가지 흔한 형태는 다음과 같다.

(1) 가난한 가족의 손위 딸이 동생들을 보살피고, 그동안에

(2) 어머니는 보모로 일하면서 다른 곳에 보모로 가 있는 사람의 아이들을 보살피고, 후자의 보모는 다시

(3) 부자 나라에 있는 가족의 아이를 보살핀다. 어떤 보살핌의 사슬은 보살핌의 대상(가령 아이나 혹은 돌봐야 할 나이 든 사람)에 기반하고, 어떤 사슬은 보살핌의 주체(보살피는 사람들 자신, 그들도 보살핌을 받기 때문에)에 기반한다. 각각의 사슬 종류는 보살핌의 비가시적인 인간 생태학을 표현하는데, 한 종류의 보살핌이 다른 종류의 보살핌에 의존하는 식이다.

 

- 알리 러셀 혹스차일드, 「보살핌 사슬과 감정의 잉여가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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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163.239.1.51/sogang/university/pride/albatross/v36/discourse_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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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16 12:00 2005/11/16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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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풍경관람기 - 2005/11/15 18:08

전통찻집이라 하기엔 메뉴가 허브차로 많이 선회한 듯 싶어요.

전통차는 몇가지 없는듯...

그래도 공간은 아늑하고 장난감집 같은 느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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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15 18:08 2005/11/15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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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풍경관람기 - 2005/11/15 17:39

2005 전국노동자대회 입니다.

앉아있느라고 별로 사진은 찍지 못했는데, 아~ 역시 추웠어...-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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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15 17:39 2005/11/15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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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풍경관람기 - 2005/11/15 17:30
13일 오후 1시 노동탄압 분쇄! 민주적 노사관계법 쟁취! 결의대회 사진입니다.



 

 

이번 집회 보육노조의 대표 모델이라고나 할까요?

등에는 근기법준수 적었지, 손에는 노동탄압 분쇄 들었지, 고개는 숙였지, 꽤 처량해보였답니다.

 

 


 

 


 

원래는 왼쪽 1,2차선 정도는 경찰이 깔려있었는데, 본대회 참석할 인원들이 더 들어오면서 몸싸움으로 밀어냈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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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15 17:30 2005/11/15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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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풍경관람기 - 2005/10/27 13:06

사무실 담쟁이 물든 게 좋아서 몇장 찍어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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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27 13:06 2005/10/27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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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풍경관람기 - 2005/10/27 11:26

* 민중언론 참세상["비정규직 철폐" 공공부문 비정규노동자들 나서] 에 관련된 글.

 

어제 세종로공원에서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 결의대회가 있었습니다.

주요 대오에 산업인력공단 비정규직 노동조합이 있었는데,

노조 조합원 전부 파업중입니다.

직종은 직업훈련원 강사들인데 모두 비정규직.




 

 

이용석 열사 분신 2주년을 맞아 열사정신계승을 다지는 헌화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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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27 11:26 2005/10/27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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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5/10/25 16:37

단 한번의 폭발 굉음도 없고,

테러리즘에 대한 어떠한 입장도 내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러에 관한 내용을 담은 영화가 있다.

 

말레이지아의 감독 우밍진(Woo Ming Jin)은 2002년도 발리에서 있었던 폭탄 테러 사건을 바라보면서, 이 영화 [월요일 아침의 천국 / Monday Morning Glory ]을 만들었다고 한다.

감독이 밝히는 이 영화는 '테러리즘이 아닌 테러리스트에 대한 영화'이며,

내가 보기에 이 영화는 빈곤하고 실업 상태에 놓인 말레이지아 청년이 선택한 직업에 관한 영화이다.

 

처음엔 낚시터를 운영하는 두 형제가 청년 두 사람을 일터에 채용한 줄 알았는데,

왠지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고 서로 심각하게 대화 나누고 하는 폼이 영 심상치 않다.

어느덧 제조된 폭탄에 대한 이야기를 열심히 나누더니 두 청년이 오토바이로 폭탄을 운반하다가 터져버리고, 결국 한 청년 A(이름 까먹었다-_-;;)만 살아남는다.



장면이 바뀌어 그들은 이미 경찰에 붙잡혀 수많은 기자들 앞에서 포박된 채 사건 재현을 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살아남은 한 청년 A는 보이지 않는다.

한편 경찰청장 비슷한 사람은 연신 폭탄테러범 생포에 대해 자랑을 늘어놓고 있다.

사건 재현의 순서에 따라 화면은 과거를 오고가며

실제 낚시터의 두 형제와 그들 조직의 지도자, 청년 A와 새로 채용된 또 하나의 청년이 행했던 폭탄 제조, 테러 장소 물색, 예비 연습 등의 장면들을 보여준다.

간간이 낚시터 두 형제와  지도자가 있을 때는 이번 투쟁의 의의를 언뜻언뜻 언급하고 청년들의 의지를 확인한다.

하지만 청년들끼리 있을 때는 이번 일의 위험성과 이번에 벌 수 있는 돈, 어디에 쓸까에 대한 대화가 오고간다.

 

결국 영화의 마지막 즈음이 되어 청년 A는 그들이 테러 목표로 정한 미국인이 많이 있을 것 같은 나이트클럽 화장실 변기에 폭탄 가방을 놓고 잠시 세면대에서 얼굴을 씼으면서 심하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킨다.

그리고 화장실을 나오려는 순간, 클럽 손님 중 하나가 그에게 가방을 놓고 갔다면서 다시 건네준다.

잠시 후 낚시터 두 형제가 클럽에서 나오고 등뒤로 들리는 폭발음,

그리고 청년 A의 애인이 청년A가 일한다고 데리고 온 적 있는 낚시터에서 물끄러미 물을 바라보고 있는 장면이 스친다.

 

 

우밍진 감독은 처음엔 폭발 장면을 넣어볼까 고민을 했다가 예산도 없고 오히려 극을 이끌어가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을 듯 싶어서 폭발 장면 전혀 없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실제 폭탄을 실고 가는 오토바이에서 한 명의 사망자가 나올 때에도 일어난 당시의 폭발은 자르고 그 이후 길가에 내팽겨쳐진 청년 A와 얼굴에 붕대를 덕지덕지 붙인 청년 A의 모습을 보여준다.

내가 보기에도 테러리즘보다는 테러리스트에게 초점을 맞춰 만들고 싶었다는 감독의 의지를 잘 드러낸 방식같다.

 

한편 이 영화는 내가 알고 있던 테러리스트에 대한 선입견을 완전히 깼다. 간혹 중동에서는 불행한 결혼 생활을 영위하는 주부들을 대상으로 자살폭탄테러를 시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도 마음으로 와닿지는 않았는데, 실제 생활고와 실업을 맞이하면서 직업처럼 선택하는 청년 A를 보니 그야말로 '실감이 난다'.

 

부가적으로 말레이지아 경찰이 테러리스트를 다루는 관행일지도 모르는 행위에 대해서도 언뜻 엿볼 수 있었다.

테러범으로 붙잡힌 낚시터 두 형제와 폭탄제조자, 지도자 등은 이번 테러의 정당성에 대해 끊임없이 역설한다. 그 와중에 경찰은 지도자를 풀어주고, 다음 날 지도자는 강가의 사체로 발견된다. 언론에 '도주'라고 표현된 이번 사건 이후로 낚시터 두 형제는 테러에 대해 자신들의 죄로 규정짓는 기자회견을 갖게 된다.

 

그냥 일반인과 하등 다를 것 없는 테러리스트의 삶과 생각에 대한 고찰.

테러리스트에게 테러는 이념의 실현, 체제의 저항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내지는 누군가에게는 - 타인과 자신의 목숨을 담보했음에도 불구하고 - 밥벌이의 수단이요, 삶의 한 꼭지이다.

 

왠지 자본주의와 미제국주의에 맞서는 테러리즘이

자본주의 사회의 빈곤과 실업의 심화를 통해서 

목숨조차도 걸고 흥정할 만큼 나락으로 떨어진 현실을 통해서

기존과는 좀 다른, 새로운 자본주의 모순의 도출로써 작동하고 있는 듯 하다.

체제의 저항이었을 테러는 체제의 모순을 통해 점차 체제 내에 속한 일상의 하나로 재생산되고 있다.

 

* 사진출처 : PIFF (http://www.piff.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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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25 16:37 2005/10/25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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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육 | 노조 | 이야기 - 2005/10/21 17:18

최근 '영유아기 보육에서의 권력과 정서'에 대한 원서의 내용을 아는 모임에서 살펴보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어린이집에 다니는 만 3세이하 아이들의 생활 경험을 살펴보고, 그 안에 발생하는 문제적 경험들, 일상에 미시적으로 각인되어 있는 권력, 그 권력과 결합되어 있는 정서를 적어놓았다.

 

그중 이번에 내가 번역을 맡은 부분이 [정서]라는 장 중에서 '소외된 노동으로써의 보육'인데 한마디로 끔찍.

 

실제 나 역시 정서노동자로써의 보육노동자 입장에서
애정 충만한 정서에 대한 요구와
정서적 중립의 역할을 잘 수행하라는 전문성에 대한 요구
사이에서 매분매초 갈등했던 것 같다.
게다가 동시 다발적 사건사고와 아이들의 요구사항에 묻혀 스트레스가 가중되고 감정의 격양을 느낀다.
시간이 좀 더 흐르면서 이러한 정서 왜곡 상태를 참지 못하지만 아이들에게 쏟을 순 없으니 정서를 철회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일정 시간 지나면 아동과의 상호작용에서 나 자신도 무심하고 기계적인 대응을 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정서적 교감이 없는 돌봄, 이 정도 되면 어린이집은 소외가 계속 전이되면서 다양한 폭력의 피해자가 밀집된 느낌이다.

 

그런데 읽다보니 정서노동자에게 있어서 정서노동의 한계시간이란 건 경력이나 능력, 또는 노동조건의 향상 등과는 관련 없는 게 아닐까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를 테면 그 날 모임에서 자신이 아동과 정서적 교감 및 상호작용할 수 있는 시간의 한계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신참이냐 베테랑이냐에 관계없이, 1일 4시간에서 30분까지 다양했다.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모든 보육노동자는 아동과의 정서 교류를 중단하고 정서를 철회시킨 상태에서 기계적 대응 내지는 무대응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때는 오히려 아동과 있는 것보다 보육 준비활동을 하거나 심지어 청소, 사무 등의 잡무를 선호하는 사람도 다수이다.

보육노동자 1인에게 1일 4시간 초과의 아동 직접 돌봄을 수행하는 것은 양자간 인격 파괴 행위가 아닌가 싶다.
어여 1반 2교대, 3교대제를 실현시켜야 할텐데...

 

내 번역은 나도 못 믿겠으니, 조만간 여력이 되면 원본 타이핑을....(할 수 있을까여?-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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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Power and Emotion in Infant-Toddler Day Care]
저자 Robin Lynn Leavitt
출판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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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otion > Child care as Alienated Labor (p 63~66)
소외된 노동으로써의 보육

 

여기서 설명하는 보육노동자의 돌봄은 소외된 노동을 의미한다(Marx, 1844/1983).
소외된 노동은 (day care center를 포함해서) 사회적 합의로 인해 도출된 우선 순위가 정해지면서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이로 인해 노동을 함에 있어서 해당노동자는 자기 노동에 대한 통제력이 부족하고, 만족감과 행복한 삶을 상실하게 되며, 이런 경우엔 사회적 명예 역시 부족하다. 보육노동자는 종종 해당 프로그램 운영상의 결정 과정에서 제외된다. 예를 들어 영아를 새로운 방으로 이동시킬 때나 아동 대 교사비율을 조정할 때 등의 결정 과정에서 제외당하는 것이다. 보육노동자의 업무는 그들에게 부과되는 실제적인 압박에 저항하려는 시도를 통해 부분적이나마 서서히 발전해나가기도 한다. 그러나 보육노동자가 자신의 일을 수행하는 동안 지속적이고도 예측 불가능한 아이들의 요구에 직면하면서, 자신의 통제력이 감소하고 자신만의 자율성이 손실됨을 느끼게 된다.

보육노동자는 무력함, 무의미함, 고립, 자기소외라는 형태의 소외감을 경험한다. 보육은 미국에서 낮은 임금의 직업이다(Modigliani, 1986). 보육노동자의 일상은 고역스러운 절차의 과제로 채워져 있다. 이를 테면 기저귀를 교체하고, 급간식을 하는 등의 활동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이다. 보육노동자의 물리적 행복에 영향을 주는 직업적 위험요소는 거의 보고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아이를 자주 안아줌으로써 무리하게 되고 전염성 질병에 노출하는 등이 바로 그것이다. 대부분 아이들이 지속적으로 우는 행위는 두통이 나타나고 위장이 뒤집히는 등의 스트레스를 유발한다(Reynolds, 1990). 거기에 감정적 철회(틀어박히기)까지... 보육노동자는 1,2명의 성인과 함께 일하지만, 통상 성인 사회에서 고립되어 있고 아이들은 끊임없이 그들의 주의를 요구한다. 보육노동자들은 아이들 사이의 분쟁과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요구들이 일상을 이룸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제도적 자원의 부족뿐 아니라 돌봄 수행에 있어서 해결 곤란한 상황들을 더욱 악화시킨다.
소외는 결핍과 소원함(or 이간, 불화)이다(Schwalbe,1986). 이는 소원한 상태를 말한다(Goffman,1987). 소외된 정서노동으로써의 아동 보육은 보육노동자와 아동의 정서 인지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보육노동자가 아동의 행동, 정서적 표현을 인지하고, 이해하고, 반응하는데 실패하는 한, 그리고 아동과의 상호 동등한 관계의 형성을 이루지 못하는 한, 아이들 내부의 아이들만의 모습 또는 어린 시절의 모습을 깨닫지 못하는 한, 보육노동자의 “피로한 노동”은 소외되고 소외시키게 된다. 보육노동자의 소외는 아동에게 전이되고, 아동은 소외된 보육노동자의 노동 속에서 그들의 소외를 경험하게 된다.

 

2명의 보육노동자가 4명의 영아와 함께 마루에 앉아있었다. 또 한명의 아이 Alan(생후 7개월)은 그들 위로 기어오르며 엄청나게 좋아하고 있었는데, 한 보육노동자가 그에게 말했다. “안돼, 무게 많이 나가서 싫어. 뚱보, 비켜!”. 그리곤 "Martha(다른 보육노동자)에게 가봐라“라고 말했다. Alan이 Marth를 바라보자, Martha는 ”안~돼, 난 안돼, 거기 있어“라고 말했다. Alan은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리고나서 첫 번째 보육노동자가 그를 아기 놀이 울타리 안에 옮겨놓고는 ”여기서 놀아, Alan"이라고 말하곤 자리로 돌아갔다. Alan은 아기놀이 울타리 밖으로 기어오르려했으나 보육노동자가 Alan에게 호통을 치자 그만두었다.

 

보육노동자가 Brad(생후 6개월)에게 점심 우유병을 주고 있었다. Brad는 작은 탁자 위에 있는 영아용 의자에 앉아있었고, 보육노동자는 그 옆에 있는 의자에 우유병을 든 채 앉아있었다. Brad는 우유를 천천히 마시고 있었고, 모빌이 매달려 있는 천장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보육노동자는 반복적으로 Brad의 입에 우유병을 넣었다 뺐다, 앞으로 뒤로 움직였다. 그리곤 “자, Brad, 세상에 아니 이 방에 아기가 너 하나 뿐인 줄 아니? 꾸물거리지 말고 어서 먹어.”

위와 같은 현장의 모습을 통해 소외된 정서 노동으로써 보육은 보육노동자가 아동을 적개심을 품은(또는 부적절한) 대상으로써 맞닥뜨리면서 악의에 차고(또는 부적절하고) 고통스러운 감정의 현장이 된다. 보육노동자가 느끼는 소원함, 소외, 적개심은 -아동을 통제하고 처벌하고 무시하는- 부정적 권력의 습득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이번 장의 구석구석에 인용된 현장의 모습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그리고 아래와 같이 표현된다.

 

   우리가 애를 잡는 건 아니잖아.
   저리 가줄래? 그거 꺼. 듣기 싫다.
   다 사라졌으면 좋겠다.
   조용히 해!
   누가 나 좀 여기서 내보내줘!       <------------- 오, 공감 백배
   난 ~~거 싫어... 저리 가!  

 

정서적으로 소외된 보육노동자가 보이는 모습은 부모에게 제공하기 위해 보육프로그램 리플렛에 등장하는 사진과는 대조적으로 아이러니하고 적나라하다. 이런 리플렛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아래와 같은 문구들을 살펴봐라. 애정 넘치는 돌봄의 신화를 조장하고 있다.

 

   돌보는 성인들...
   따뜻하고 신뢰감있는 분위기...
   매일의 일과는 아이들을 기르는데 초점을 맞춰 수행되고 있다...
   아이들은 안전하고 애정넘치는...
   따뜻하고 아이를 기르는 분위기...
   돌보는 자는 모든 아이들과 성실하고 참된 상호작용을 한다...
   우리는 배움이 놀이라고 확신한다...
   따뜻하고 애정 넘치고 안전한 환경...  

 

엄마 수준까지의 사랑이란 건 팔기 좋은 상품이고, 종일 보육은 어떤 면에서 우리들의 문화 속에 굳건히 지키고 싶은 인간 감정을 상업화시킨 또 하나의 예라고 볼 수 있다(Hochschild, 1983). 보육 노동은 이 사회에서 사람들이 맞닥뜨리게 되는 경험 중 소외되고 자기 파괴적인 정서적 현장의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다(Denzin, 1984). 무제한적으로 주어지는, 풍요로운 사랑의 신화는 몰락했다. 영아보육은 친밀감이 드는 잘 알고 있는 세상에서 낯선 자로 가득 찬 잘 모르는 세상으로의 이동을 포함한다(Loseke & Cahill).

 

보육노동자가 아이를 매우 사랑하는 엄마처럼 되어야 한다는 이상향과는 관계없이 이윤 창출을 위한 업무 형태가 그들을 종사자로 변형시키고 엄마라는 존재와 구분짓게 만든다(Loseke, 1989).

 

종사자로써의 보육노동자는 비슷한 연령의 많은 아기들을 책임져야 하고, 행동반경이 한 곳으로 제한된다. 그들은 관련 없는 다른 보육노동자와 자신의 일을 공유하고, 운영책임자와 부모, 지자체 감사 등 법적 책임을 가진 대상에게 설명할 의무를 지닌다. 보육노동자가 애정어린 돌봄을 제공한다는 생각은 동시에 그들이 정서적 중립의 역할로 이해하게 되는 “전문가”로써의 기대와 모순된다. Sheldon White(1983)는 보육노동자가 “아동의 정서적 삶에 들어가야 함을 거절하고 있고 ... 그렇게 하지 않는다 (내지는 오히려 보육노동자가 그렇게 하더라도 그것은 예측, 측정 불가능한데다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은 방식을 취하고 있다)”라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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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21 17:18 2005/10/21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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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육 | 노조 | 이야기 - 2005/10/18 16:49

현재 서울시보육정보센터에서 이탈리아의 유아교육방법인 레지오에밀리아를 적용한 전시회가 있댄다. (내가 가본 건 아니고)

가본 사람이 아이들이 만든 브로셔 하나를 집어왔는데, 정보도 알차고 넘넘 재미있음(O.O)b

이 브로셔는 둥근마을 어린이집 아이들이 다른 어린이집 아이들에게 문수산성을 소개하기 위해 만든 홍보물이다.

 

특히 뒷면에 있는 문수산성을 소개하는 [문수산성 이야기] 중에서

'우리가 가봤는데 산성에 나쁜 사람은 없어'에서 뒤집어졌음..^__^

 

앞면(클릭해서 보세요. 오른쪽 좀 잘렸음)

 

뒷면(클릭해서 보세요. 오른쪽 좀 잘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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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18 16:49 2005/10/18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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