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만화영화책 - 2006/03/21 22:01

스위스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활동한다는 작가 알폰소 휘피(Alfonso Hüppi).

이번 전시회에서의 다양한 사진과 드로잉들은 교수시설 학생들과 함께 여행했던 경험들이 녹아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인지 전시회 이름도 '감상적인 여행(Sentimental Journey)'.

들어가자마자 2층에 올라가면

북아프리카, 시리아, 터키 이란, 아르메니아, 한국 등지에서 찍은

대문과 문들의 사진이 작은 액자들에 빼곡히 담겨있다.

솔직히 한국 말고는 어느 나라의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 문들을 보면서 대략 추론해보건대

사진에 담긴 문들은 꽤 지방도시나 시골로 들어가야 나올 법한 서민들의 그것이었다.

시골 한 가운데 버려진 공장과 같은 문, 1층짜리 앉은뱅이 주택의 문, 빨강파랑 돌아가는 이발소 표시 옆에 있을 것 같은 문...

도시 문의 모양새이지만 더이상 도시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그래서 사뭇 정겨운 문들이다.

안타깝게도 그 와중에 우리나라 문이 제일 재미없어보이긴 한다. 여기 살아서 그런가?

다른 나라 문은 문에 꽤 아름다운 문양도 넣고 그러던데...



사진들을 열심히 보다보면 한쪽 벽에 서있는 거대한 문을 발견하게 된다.

[막스빌을 위한 대문]

이 문은 10개의 액자틀을 가지고 마치 문에 들어가는 느낌이 들도록 세워 만든 작품이다. 뭔가 현대적이면서도 깔끔하다는 생각이 든다. 동시에 문이 주는 정적 느낌을 벽에 세운 액자로 표현함으로써 마치 만화나 동화의 한 장면처럼 움직일 것 같은 느낌으로 변화시킨 것 같다.

 

[나무카페트]라는 작품들은 16개의 조각퍼즐같은 나무판 위에 파란색과 하얀색이 다양한 곡선으로 나뉘어 색칠되어 있는데, 희한하게도 어떠한 조합도 유연한 곡선이 끊기지 않고 이어져 있다. 마치 어른들을 위한 거대한 놀이 퍼즐을 만든 것 같은 느낌이다.

 

[6개의 엿보는 구멍]이라는 작품은 내 키보다 훨씬 긴 6개의 액자가 벽에 기대어 서있다. 각 액자 안에는 다양한 모양들이 있는데, 진짜 액자 속으로 마치 타 공간을 엿보고 있는 느낌이 든다.

 

[블라인드]라는 작품들은 아주 큰 커튼 대용 블라인드들에 그려진 그림들이다.

아래의 작품처럼 대체로 사람이나 새, 코끼리 등등 동물들을 그리면서 서로간에 뭔가 연결되어지도록 표현한다.

굉장히 담백하고 언뜻 보면 동양의 가벼운 채색화를 보는 느낌도 많이 든다.

 

[마지막 여행]이라는 작품들은 뭔가 살짝 무너진 옛 성당터같은 곳을 초점이 완전 나간 사진으로 찍은 후 그 위에 굵은 펜으로 그린 것들이다.

사실 위의 작품 말고 더 인상적이었던 그림은

머리에 붙은 머리카락들과 손의 손가락들이 사방으로 뻗어 벽과 천장에 붙는 그림이었는데, 뭔가 목소리 대신 외치는 듯, 움츠리지 않고 확장되고 싶은 욕구가 느껴졌다.

또 하나는 천장의 둥근 돔을 배로, 기둥과 돔 사이의 둥그런 부분을 팔로 그리면서

세로로 가는 창문에 육중한 몸이 올라간 모양을 나타낸 그림이었는데, 참 해학적이었다.

 

[삼각형]이라는 작품은 2가지가 있었는데, 액자 자체를 역삼각형으로 만든 것이 참 인상적이었다. 그 안의 얼굴들이 마치 이쪽 세상을 쳐다보고 있는 느낌이다.

 

2층과 3층의 전시실을 거쳐 다시 1층으로 내려오면 로비에 거대한 [대문]이라는 작품이 2가지 종류가 있다.

이 작품들 역시 거대한 액자 3개를 가지고 벽에 기대어 세워 만든 건데

벽에 세웠다는 것 자체가 문이 갖고 있는 무게감에 동적 변화를 주는 데, 거기다 더해서 액자중 하나를 비스듬히 세움으로써 더욱 역동성을 부여하였다.

 

처음 본 문과 대문들에 대한 사진이 소박하고 따사로운 느낌인 반면

나머지 작품들은 현대적이고 재치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문이나 구멍 같은 공간을 표현하는 작품들은 하나같이 다른 세계로의, 또는 다른 세계와의 소통을 갈구하고, 미지의 세계에 가슴 뛰어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그리하여 마치 그 문을 살짝 열어보면, 그 구멍을 살짝 엿보면, 그 액자 속을 살짝 들여다보면,

꽤나 재미있고 서로 관계를 맺을 만한 일이 생길 것 같다.

 

한편 블라인드와 같은 드로잉 작품들에서도 사람과 동물들이 서로 얼기설기 엮여있는 표현을 많이 보게 된다.

그 모습은 서로 먹고 먹힌 느낌이었다기보다

원래 그러했었던 것처럼, 마치 사람과 동물은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게 맞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모던하고 차분해지지만 은근히 마음 따사롭게 만들어준 전시.

 

* 사진출처 : 대림미술관(http://www.daelimmuseum.org)

* 읽어볼 만한 글 : http://blog.empas.com/wopark/12975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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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21 22:01 2006/03/21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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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육 | 노조 | 이야기 - 2006/03/17 17:45

* 감정노동에 대한 영어강독 모임에서 이번에 내가 맡은 번역 부분.

(따.라.서. 매우 믿음직스럽지 못한 번역이겠지요?)

책[the managed heart] 中 public life 안의 극히 일부입니다.

 

공적 영역에서의 감정노동이 여성에게 어떤 방식으로 작동, 강화되어 차별로 기능하는 지 보여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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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men at work (일터에서의 여성)

대인 관계에서의 기술을 요구하는 거대 기업의 성장을 통해, 대인 관계 상황을 좋게 만드는 여성적 문화와 보다 공적 분야의 늘어나는 정서노동에 대한 요구가 점점 조직화되고 표준화된다. 이는 대체로 대중과의 접촉이 많은 중간층 여성들에게서 행해진다. 7장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감정노동을 포함하는 직업은 3위를 차지하지만, 남성들이 하는 직업 중 1/4만 차지하는 반면 여성이 종사하는 직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대중 접촉이 요구되는 직업은 대중에게 서비스 제공을 요구한다. Richard Sennett와 Jonathan Cobb( [The hidden Injuries of Class] 계급의 숨겨진 위협 )는 사람들이 다른 직업과 비교하여 어떻게 서비스노동에 순위를 매기는 지에 대해 평하였다. 순위의 하부에는 공장노동이 아니라 (개인이 어떤 개인에게 수행해야하는) 서비스업이 발견된다. 바텐더는 탄광노동자보다 아래, 택시운전수는 트럭운전수보다 하위 순위이다. 이러한 결과는 그들의 기능이 타인의 처분에 의존적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라고 예상된다).
서비스업은 남성(9%)보다 여성(21%)이 많기 때문에 그 계급에 속한 gender(사회적 성)의 숨겨진 위협(차별)인 셈이다.

대인 접촉이 있는 여성 직업의 세계에서도 새로운 패턴이 나타나는데,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남성들은 경험하는 복종의 수위가 낮다.(같은 직업을 갖더라도 여성이 복종을 더 경험한다)
승무는 여성 직업 중 하나이자 남성들에게 있어서는 또 다른 영역의 직업중 하나이다.

남성 승무원의 숨은 과제는 ‘여성들이 하는 직업’ 내에서

그의 남성성을 유지하고 여성 승무원을 거친 승객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

여성의 경우 그들의 숨은 과제는 사회적 보호가 부재한 상태에서 승객의 분노와 불만에 대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들의 낮은 지위가 다른 사람들의 태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걸까?
보다 근본적으로 감정의 상태와 취급 사이에 어떤 주요한 관련이 있는가?

 

높은 지위의 사람들은 그들의 감정을 주목하고 중요시 생각하게 하는 권한을 즐기는 경향이 있다. 보다 낮은 지위를 가진 사람의 감정은 주목받지 못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취급된다. H.E.Dale ( [The Higher Civil Service of Great Britain] 영국의 상류시민사회 )은 “감정주의(? 감정론? the doctrine of feeling)”이 존재한다고 봤다.
관리와 비서, 의사와 간호사, 정신과학자와 사회사업간사, 치과의사와 보조 사이에 권력의 차이점은 사회적 성의 차이점을 반영한다. 감정주의는 두 성(sex) 간의 또 다른 이중적 잣대(기준)이다.


낮은 지위 사람들의 감정은 두 가지 방식으로 무시당한다. 1) 이성적이라고 여기지만 별로 중요치 않게 생각하거나, 2) 비이성적인 까닭에 쉽게 해고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정치에서의 공격(폭력) : 여성은 이중 잣대로 판단되는가?”라는 제목의 기사는 여성정치가에 대한 조사 결과를 적고 있다.
모든 조사에서 그들은 정서적 이중 잣대를 확신하고 있다고 말한다. Frances Farenthold( 뉴욕 Aurora 웰즈대학교 총장)는 아래와 같이 밝혔다. “Henry Kissinger가 짤즈부르크에서 연기했던 방식을 기억하는지? (감정을 폭발시키지만) 그가 짜증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 연기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성 배역이라면? 여성연기자가 감정을 억누르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 배역이 감정적이고 불안정한 것이라고 고착하여 생각하게 된다. 대체로 여성을 묘사할 때 그러하다.”

공적 삶에서의 여성들은 다음과 같은 점에 동의한다. 남성이 화를 표현할 때 그것은 이성적 또는 이해 가능한 화(anger)로 간주된다. 그리고 이 화는 인물의 나약함이 아니라 깊이 있는 신념에 의한 것이다. 여성이 같은 수준의 화를 표현할 때, 개인의 불안정함의 신호로 해석된다. 이는 여성이 보다 감정적이며, 그들의 감정이 무효하다는 확신에 기반한다. 여성의 감정은 실제 사건의 결과로써가 아닌 ‘감정적’ 여성으로써 자신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감정주의”를 발견한다.

지위가 낮을수록 보고 느끼는데 많은 예의를 요구하는 데, 이것이 오히려 (진짜 감정인가 싶은) 의심을 불러일으키기 쉽고, 불신을 크게 한다. ‘불합리한’ 감정은 지각력을 무력화시키는 것과 같다.

낮은 지위의 사람은 진행되는 일들의 결정 권한을 주장하기 어렵다. 따라서 신뢰가 점점 떨어진다고 판단하게 되고 존중이 사라지는 것으로 느끼게 된다. 이는 상대적으로 소수자의 시각, 인정받지 못하는 의견을 가진 여성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는 경우가 많다.


남성과 여성의 병에 대한 의학계 반응은 이에 적절한 사례를 제공한다. 한 연구에서는 의사가 52쌍의 부부를 대상으로 그들이 호소하는 등의 통증, 두통, 현기증, 가슴통증, 피로에 대한 육체적 불평에 어떻게 반응하는 지 살펴보았다. 의사들은 남편들의 불평을 여성들의 불평보다 더 의학적 반응인 것으로 유도하였다. 여기서 저자는 아래와 같이 끝맺고 있는데, “이 자료는 입증한다... 의사는... 여성보다 남성의 이야기를 듣고 보다 진지하게 병으로 인정하는 경향이 있다.”

184명의 남성 환자와 130명의 여성 환자를 대상으로 상호작용하는 의사들에 대한 연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한다. “의사들은 환자가 여성인 경우, 환자의 심리적 요소를 중요하게 고려하려 한다.” 물리적으로 아프다는 여성들의 주장은 진짜 아픈 게 아니라 “그저 그녀의 상상”이라거나 “주관적”인 것이라며 무시될 가능성이 있다.


수많은 여성들이 두 성(性)의 감정을 불평등하게 평가하는 방식에 대항하고자, 보다 진지하게 취급받기 위하여, 전면의 감정을 더욱 드러낸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악순환을 불러온다.

감정을 좀 더 표현한 것은 “감정주의”에 반대한다는 의미였으나 오히려 “감정적인” 인간이라는 이미지에 맞춰진다. 그들의 노력은 감정 표출의 사례인 양 폄하된다.

감정주의를 반대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회적 성과 지위 사이의 보다 근본적인 끈을 제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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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17 17:45 2006/03/17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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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6/03/11 23:16

요시나가 후미의 신작이 나왔다!

(근데 일본에선 후미 요시나가라고 부르는 것 같던데 왜 바꿔부르지?)

기이하게도 배경은 일본 막부시대 한 1700년대쯤 되는 것 같은데

'오오쿠'라는 것도 원래 작가가 굉장히 좋아하는 시대극 제목이란다.

 

다만 내용은 나오는 쇼군이 여자이고,

쇼군이 거느리는 삼천 궁남이 있다는 점이 약~~간 다를 뿐.




처음엔 곰에, 전염병에 사람들을 왕창왕창 죽이길래

당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시츄에이션인지 갈피를 못잡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남자 인구를 여자의 1/4로 확 줄이려는 설정.

 

이 설정이 끝나고나서부터의 세상을 묘사하는데,

읽으면서 내내 "쿡쿡"거리는 폭소 한마당이었다.

 

남자들이 얼마 안남았으니

농사도, 전쟁도 모든 집안밖의 일을 여자가 맡게 되었고,

가업도 여자가 이어받고,

혼인제도는 완전 붕괴되어 돈 있는 여자나 혼인, 없는 여자는 유곽에서 남자를 샀다.

 

그 와중에 막부라는 무가(武家)사회 시스템 역시 남녀 역할 교체. 워낙 관료화되어 있어서 교체가 비교적 용이했댄다. ㅋㅋ

 

워낙 일상 속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착착 달라붙는 구어체 묘사에 능한 작가이고,

인생 역전을 맛보는 상상의 나래가 겹쳐 흥미진진.

 

이를 테면, 들어온 혼담에 버티는 아들을 보고 어머니가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냉큼 장가를 가야지!"라고 외치거나,

혼인이 싫어 차라리 쇼군이 삼천궁남 거느리는 오오쿠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한 남자에게 여자 소꿉친구가

"좋은 옷을 입고 호사스런 생활을 하고 싶은 거?"라고 말하는 등의 장면은

역할이 바뀌었다면 충분히 예상되는 대화이다.

특히 오오쿠에 들어간 오노부가 검술이 꽤 훌륭하다는 선배를 이겼을 때,

그 선배가 하는 말,

"하! 너 따위보다 이 몸이 훨씬 훨씬 아름답다구!!"라고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외치는 장면에선 삼천명 중 살아남기 위한 나름의 몸부림이 진하게 느껴졌다.

 

요시나가 후미는 이러한 설정을 코믹으로 점철시키지 않는다.

그 시대는 마치 현실인 양 진지하고,

오오쿠는 아름다운 이들의 꿈같은 이상향이 아니라 쇼군의 애정에 목매야 하는 불신과 긴장의 세계이다.

동료와의 대화에서는 힘겨운 남자로써의 삶을 얼핏 이야기한다.

부모가 시켜 몸 팔았던 이야기, 장가들었는데 아이가 생기지 않자 밥도 않주고 결국 쫓겨난 이야기 등.

 

여자들이 이렇게 왠지 유쾌, 상쾌, 통쾌할 것 같은 인생역전 시대극을 마련해줘도

단지 쇼군에게만 감정이입하지 못하는 것은

매 장면마다 묘사되는 힘겨운 남자들의 삶이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요시나가 후미가 바라보는 소소한 삶에 대한 통찰은 매우 놀랍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도록 해주면서도 

마지막 장이 끝나면 항상 가슴 한켠에 무언가를 남기는 결코 가볍다 볼 수 없는 깊이가 느껴진다.

 

수많은 여아가 태중에서 살해당하고 여자의 수가 심각하게 줄어드는 현상을 보고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래. 여자들 수가 적으면 상대적으로 대우받으며 살지 않을까?'

그런데 이 만화 보니 꽤 긴장된다.

어차피 일부일처제야 세상을 유지하기 위한 제도 중 하나일 뿐인데

그것으로 세상이 유지되지 않는다면 제도야 변할 것이 자명한 일.

보호한답시고 집안으로, 유곽으로 꼭꼭 숨기고, 권력에 따라붙는 물건으로 전락하는 건 역시 인간의 삶이 아니다.

노조에 온지 1년 좀 넘는 지금의 교훈, 세상은 쪽수로 승부를~! ㅋㅋ

 

벌써 1권밖에 안되었는데 작가가 어찌나 캐릭터들을 확확 없애는지...

남자들 싸그리 죽인 것도 모자라

검소한 쇼군은 막부에 돈 없다고 오오쿠의 남자들 50명 정도 해고시키고,

꽤 주인공 급일 것 같던 오노부는 벌써 역할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버렸다.

보통 캐릭터 만들면 애착이 장난 아닐 것 같은데 과감히 없앨 수 있는 것도 바로 작가의 힘?

 

아직 혼인하지 않은 쇼군과 잠자리하는 오오쿠 안의 남자는 죽임을 당하기 때문에

일부러 오오쿠의 남자들을 건드리지 않고 마당 쓸거나 방바닥 닦고 있는 하인 건드리는 쪽으로 우회하는 쇼군의 모습을 보는 것도 즐거움.

 

 

*참고로 혹시나 모르는 분들을 위해

쇼군(将軍, しょうぐん)은

일본의 특수한 최고위권력기관인 막부의 수장을 말한다. 세이타이쇼군(征夷大将軍, せいいたいしょうぐん)의 약자이다. 쇼군은 명목상으로는 천황의 신하로 최고위직 신하에 불과하나, 실제에 있어서는 천황의 의견과는 관계없이 정치, 행정, 경제를 실질적으로 이끌었고, 쇼군직을 세습했기때문에 군주와 같은 위치에 있던 자이다. 당시에는 왕이 두명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나, 실제로는 막부체제가 오랫동안 유지되므로써 천황이 유명무실해졌기 때문에 일반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쇼군이 왕대접을 받았고, 천황이 있는지 조차 모르는 백성들도 많았다고 한다.

출처 : http://ko.wikipedia.org/wiki/%EC%87%BC%EA%B5%B0

 

* 그림출처 : http://www.aladd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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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11 23:16 2006/03/11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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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육 | 노조 | 이야기 - 2006/03/09 14:04

요즈음 내 근처의 2가지가 정리되었다.

한가지는 참세상공동체에 연재되던 김하경선생님의 '천일야화'(http://go.jinbo.net/1001)가 3월 3일부로 1001일을 맞이하여 끝이 난 것,
다른 한가지는 회원으로 몸담고 있던 한국보육교사회가 해산한 것.

 

과정에서 별다르게 개입한 바 없지만 나름대로 의미있는 정리들인데,
스스로 정리에 대한 맞이가 무척 담담한 게 신기할 정도이다.
나 자신이 뭔가 정리하면서 새로이 시작을 맞이하는 기운을 뿜어내는 상태가 아니라서 그런가?

 

하긴 '천일야화'의 경우에는 김하경선생님 뵐 기회도 있을 것 같고, 책 출판도 하실 것 같고 하여 맺음이 아니라는 생각이 짙어서 그런가보다.
물론 김하경선생님께서 먼저 알고 전화 주신 건 어찌나 미안하던지...
어떻든 2003년 7월 10일에 처음 시작하여 3년을 이어온 연재의 끝이라니, 별로 한 것도 없는 데 괜히 뿌듯하고 기분 좋다.


한국보육교사회는 ...



86년 지역사회아동교사회에서 시작하여,
87년 지역사회탁아소연합회가 되었으며,
97년 한국보육교사회로 거듭난 단체로,
2006년에 해산총회를 가졌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보육 분야에서 20년을 굳건히 버틴 단체의 정리 작업은 1년이 약간 넘는 기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2005년 총회때 보육노조 건설이후 단체의 전망에 대해 논의할 전망논의팀을 만든 후 1년여를 논의하였고,
2006년 1월 15일에 해산총회하고,
2월 24일에 10년 활동을 정리한 자료집 한판 내면서 맺음자리 갖고,
3월 6일엔 있는 자료, 없는 재산을 몽땅 정리하고 남은 자산은 전국보육노동조합에 후원하였다.

 

자료를 파기하면서 역대 사무국장들, 욕 많이 먹었다. 귀 엄청 간지러웠을 것이여.
제때제때 버리지 못하고 쌓아놓은 원흉들, 이런 때 불러내 원죄를 물었어야 하는데...^^
(단체 사무국장님들, 명심하소서~!)

 

주민등록번호, 계좌번호가 있는 종이들은 모두 찢었다.
그놈의 카드명세서, 진짜 지랄맞다.

 

파기작업 과정에서 나름 크게(!) 깨달은 3가지 교훈은,
1. 클리어파일 사용하지 말 것.
 -> 비닐마다 적당량의 문서가 들어있어야 잘 빠지는 데, 근본적으로 안의 내용을 빼는 것 자체가 괴로운 작업이다.
2. 쓸데없이 주민번호 받지 말 것
 -> 이상하게 내부 영수증에도 주민번호 받는 만행을 서슴치 않고~! 단체 하나에서 쏟아져나오는 개인정보의 수준이 이 정도라니, 나라 전반에 퍼진 개인정보들의 양이 감히 상상되지 않을 정도이다.
3. 일하지 말 것
 -> 정말 공감 백배, 쌈박한 방법이다. 단체 활동가 일을 너무 많이 한다. 적당히들 할 것이지...^^

 

이 단체가,
5년 전에 문 닫았어야 했는 지, 지금의 해산이 가장 훌륭한 선택이었는 지, 좀 더 미래를 도모했어야 했는 지는 아무도 모른다.
중요한 건 해산이라는 결정조차
자신들의 의지가 살아있을 때, 조직 논리에 빠져 더이상 회원들의 매듭의 권한이 상실되기 전에 내려졌다는 점에서 약간은 명석했다고 판단할 뿐이다.

 

보육운동판에서의 몇 안되는 운동 구심체로써의 역할을 생각해보면 운동판 자체의 역량 손실은 명백하다.
반면 조직을 정리함으로써 묶여있는 개별 인자들의 소진을 막고, 확장적 고민을 도모하고, 밑바닥부터 다시 쌓아올리는 진보의 기운을 만들어내리라는 희망이 해산의 안타까움을 충분히 대신할 만 했다고 본다.

 

그보다 내가 좀 더 걸리는 안타까움은 조직이 찾은 해산의 의미보다는 기실 부차적인 것일 지 모르겠다.

최근 민의련 해산의 경우에도 활동가 재생산의 문제가 일부 언급되었던 것 같은데,
한국보육교사회 역시 조직이 할 몫에 대한 완수와 자축을 가장 큰 의미로 두고 있는 한편 활동가 재생산 문제를 짚는 회원들이 있다.

 

활동가가 재생산되지 못한다는 것은
아예 진입자체가 없다는 상황도 있겠지만,
누군가 잠시 진입했어도 그들을 붙잡지 못했다는 상황도 상당 유효한 이야기이다.
이렇게 후배로 들어와 조직 해산에 이르기까지 계속 후배로 남고, 누군가 새로이 진입했을 때 매력적으로 다가가지 못하는 이면에는
바로 조직 안에서 조직이 소진시키는 활동가의 모습이 있(지 않나 싶)다.

이런 기운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무의식 중에 알아챌 수 있는 기운이다.

 

인생의 후배들에게 사회운동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일깨우거나 관심을 가질만한 사회가 되도록 구조 변혁에 힘쓰는 것도 운동의 할 일이려니와,
운동이라는 이름의 지점에 들어온 스스로에게 소진의 과정이 아닌 힘 받고 희망 받고 행복 받는 과정을 마련하는 것 역시 모두를 위한 길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주 기본적인 노동조건 향상부터 고민해보는 건 어떨지 싶은데...ㅋㅋ

 

 

* 참고

 

한국보육교사회 해산공고

since 1986.2~2006.2

 

한국보육교사회는 1986년2월 지역사회아동교사회로 창립하여, 1987년 지역사회탁아소연합회로 명칭 변경하였고, 1997년 7월 한국보육교사회로 전환하여 육아의 사회화를 이루기 위해 활동하였습니다.
한국보육교사회는 영유아보육법 제정운동, 법제도 개선운동 등을 통해, 이땅의 “엄마에게 일할 권리를, 아이들에게 보호 교육받을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또한 
“보육의 질은 보육교사의 질을 넘지 못 한다”는 생각으로, 보육교사 재교육과 보육교사 처우개선을 위한 활동을 진행하였습니다.
2004년 보육교사 당사자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전국보육노동조합의 결성을 주도하였고, 이를 통해 2005년 전국보육노동조합이 결성되어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한국보육교사회는 지난 1월15일 제10차 총회에서 한국의 보육운동 속에서 우리 회가 올바른 보육의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였음을 자축하며, 조직의 해산을 결의하였습니다.

그동안 
한국보육교사회의 활동에 많은 지지와 후원을 보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한국보육교사회 회원일동 드림
2006.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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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09 14:04 2006/03/09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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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6/03/09 01:04

지난 2월 23일에 읽혀졌다는 부산 김진숙 지도위원의

부산지하철 매표소 비정규 해고노동자 고용승계 쟁취 결의대회 연설문을 읽었다.

 

'평등해야 강해진다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비정규직과 정규직에게 보내는 말이다.

 

이 문장을 보는 순간, 벌써 2주나 전에 씨네21에서 읽은 [별의임무 - 그저 빛나기] 이라는 글이 생각났다.

 

주요내용이라면 이런건데..

조폭 내부의 엄청난 빈부 격차 - 즉 형님은 외제차에, 뻑쩍지근 저택에, 수많은 이들의 경호를 받는 반면, 아우들은 합숙에, 패스트푸드 끼니에, 생명의 위협까지 받는 - 상황이 유지되는 이유를 스티븐 레빗의 괴짜경제학 논리를 빌어 설명하고 있다.

형님은 바로 아우들의 이상향이고, 그것이 바로 현실의 상황을 견디게 하는 인센티브라는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 내용인데,

그래서 신인배우에게 주어질 수 있는 인센티브라는 것이 바로 화려하게 빛나는 스타배우의 모습이라는 건데, '스타의 가장 큰 임무는, 비록 대중의 욕을 바가지로 먹는 한이 있어도 저 하늘의 별처럼 환히 빛나며 화려한 삶을 살아주는 것'이라 할 수 있댄다.

최고의 스타가 국민주택과 지하철 이용하는 날이 온다면 '영화계의 종말일거라는 생각이 든다'는 다소 과격한 표현까지 써가면서...



처음 든 생각은 씨네21 읽다가 뒤통수 맞았다싶어

이제 매체에 대한 더이상의 편견은 버려야 겠다는 점이었다.

예술은 사라지고 엔터테인먼트만 남았다더니 체감 백배의 순간.

 

다음 떠오른 생각은 '돈이란 게, 자본주의란 게 이런거구나' 싶었다.

당췌 인생이 빛나고 싶어도 돈을 통해서만이 빛날 수 있는 세상,

도대체 빛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미를 소거시키는 세상,

사람들과 신인배우들이 영화와 영화배우를 통해 얻는 꿈에 대해서 완전 왜곡시키는 세상.

 

어찌나 당당히 '스타는 돈으로 빛나야 한다'고 외치는 지 강호의 도는 애저녁에 땅바닥이라지만, 이젠 심지어 사람들이 진심으로 그것을 믿고 실천하는 세상이 되어간다.

마치 감정노동을 많이 하면서 자신의 진짜 감정을 구분할 수 없게 되는 것과 같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자아를 훼손시키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자본의 불평등 전략은 인간의 본성인양 점점 세련된 가면을 쓰고 다가오고,

그 안에서 부지불식간에 진행되는 것은

-아주 다양한 의미로- 평등할수록 얻을 수 있는 것, 강해질 수 있는 것에 대한 외면과 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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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09 01:04 2006/03/09 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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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육 | 노조 | 이야기 - 2006/03/05 21:50

1시부터 철도공사앞 집회 참여.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집회는 거의 20분이 지나서야 시작하고 1시간도 안되어 끝나버렸다.

 

2시부터 38여성대회가 있는 지라 부리나케 택시타고 용산구민회관으로 이동하는데,

용산역 철도조합원들의 대오가 보인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때맞춰 흘러나오는 택시 라디오의 파업중단 소식이라...



그리곤 민주노총, 전여농, 민주노동당이 주최하는 38 여성대회에 참석했는데,

평소 민주노총 행사에서 볼 수 없었던 즐거움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농민, 노동자 등 주체가 스스로 준비하는 개사곡, 촌극 등의 공연이라니 상당히 감동이었다.

(물론 공연 중에는 노조 조합원들의 엄청난 끼와 연기력에 감복할만했으나 내용이 전혀 이해가 안되는 공연도 있긴 했다. -_-;;)

 

그런데 뭔가 허하다.

왠지 여성이지만 농민이, 노동자가, 정치인이 아닌 자(특히 세조직 내의 사람이 아닌 자)는 참가하기 좀 거시기한 행사가 아니었다 싶다. 열려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리고 농민, 노동자, 정치인이기 이전에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모여 꿈꿀 수 있는 세상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장은 아니었다 싶다.

 

벌써 100년 가까이 되어가는 당시 미국 여성노동자들의 목숨을 건 참정권과 노동조건 보장의 요구가

(수위는 약간 높아졌을지 모르나) 여전히 우리의 화두라는 점은

앞으로 여성이 고민하고 갈 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지점이다.

 

때때로 비정규법안에 대한 노조의 투쟁이 대응보다 좀 더 공세적이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것과 같이

이 시점에서 차라리 여성 스스로 내리는 자신에 대한 정의, 여성이 해방되는 세상, 세상을 바꾸는 여성들의 행동에 대해

보다 진지한 토론을 진행하고 더이상 현실을 막는 행동이 아닌 현실을 바꾸는 행동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용산역까지 행진 후 집회를 하는데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떻든 용산구민회관에서 연 여성대회는 재미있는 공연과 기획이 있었는데,

행진 후 오히려 대중과 함께 하는 집회에선 왜 뻔한 연사발언과 투쟁가 합창이 다일까?

오히려 반대로 하는 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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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05 21:50 2006/03/05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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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육 | 노조 | 이야기 - 2006/03/02 01:14

* 뒤늦게 단단한마음님의 [요즘 집회에서 짜증났던 일들!] 에게 트랙백


 

총파업 첫날, 나름 격양된 분위기의 결의대회.

 

그런데 연사 중 한명이 연설 내내 "노동형제"를 부른다.

옆에 앉아있던 동료에게서 "벌써 몇년 전부터 쓰지 말자 하던 건데!"라는 이유 명백(!)한 항의성 발언이 터져나온다.

 

나야 경험이 짧아 '노동형제'라는 단어의 역사성은 잘 모르겠으나,

듣는 노동자매로서 매우 짜증나는 건 확실하다.

 

이럴 때마다 불현듯 깨닫게 된다.

'당췌 이놈의 세상은 여자를 끼워주지 않는 구만.'

 

(피해의식 취급 아이템? ㅋㅋ)

 



집회 끝나고 가는 길에 그 동료에게 얘기해봤다.

"노동형제 안쓰기 운동 해볼까? 일단 여기저기 글을 써보고..."

 

그런데 이런 거 한 두번 하면

대수롭지 않은 것을 건드리는 소심, 쪼잔, 까탈스런 젊은 여활가의 표본이 될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런 표본이 되기도 전에 '왜 세상은 기본을 모르지?' 좌절하며 혼자 내부 수렴 절차에 돌입할 가능성이 더 높다.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사소한 것 가지고 여성을 자극하는 감정적인 글'이라는 결코(!)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들을 것 같아 머리속이 지저분하다. 소심쟁이..)

 

하지만 사람들, 잘 고민해보시라.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하기 쉽고 논리정연한 사실이다.

그렇게나 쉽게 딱지를 붙이거나 혹은 붙여줄 딱지를 붙여주지 않음으로써

새삼 가운데는 거대한 주류가 도도히 흐르고, 일군은 심지어 구석도 아닌 밖으로 나가라는 내몰림을 체감하게 된다.

 

그렇게 당신이 '노동형제'를 찾는 동안

수많은 '노동자매'들은 분명 자신들 역시 존재하는 세계인데도 불구하고 설 자리를 잃게 되고, 혹여 노동형제들과 전선 그으며 새로운 세계를 찾는 게 지당한 것인지에 대해 중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과연 이 '대수롭지 않은' 단어는 몇년이 흘렀다는 지금 이후로, 앞으로 몇년의 세월을 기약해야 보다 보편타당한 단어로 변화할 수 있을까?

 

* 사족1

이제 남자들이 '여자들은 잘 모르겠다', '왜 화내는 지 이유를 모르겠다' 라는 식의 말은 믿지 않을까 한다.

그래봤자 결국 누구나 '사람' 아닌가? 

성녀, 악녀 나누는 것이 약간 지겨운 수준이었는데, 요즘엔 '이건 진짜 아니다' 싶다.

외계인 취급 사양, 물건 취급 사양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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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02 01:14 2006/03/02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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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풍경관람기 - 2006/03/01 23:08

총파업이 시작되었다. 민주노총 15만이 파업중.

국회앞 집회 때는 언제봐도 미묘하게 교차되는 국회 뚜껑과 집회 대오.





 

수도권 풍물패가 모였다는데 실력 빵빵(-.-)b

'삶터' 이던가? 거기 소속인 분이 풍물에 맞춰서 소리하시는 게 정말 멋졌습니다.

 

 

 

 

집회 후 신이문역으로 철도노조 파업 연대집회하러 잠시 들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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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01 23:08 2006/03/01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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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생각_펌 - 2006/02/27 15:02

랄라^^*님의 [오호...나도 '네 인생의~~'] 에 관련된 글.

Four Jobs I’ve had in my life(일생에 가졌던 네 개의 직업)

 

[어린이집 교사] 2,3년?
[진보넷 활동가] 4,5년?
[한국보육교사회 활동가] 헉 정말 약간 2,3개월?...
[전국보육노동조합 활동가] 2년째... ^^;;
 

I can watch over and over(몇 번이나 다시 볼 수 있는 네 가지 영화)

 

[time to leave] - 삶이 퍽퍽하다고 느낄 때마다, 죽음이 공포로 다가올 때마다, 무엇을 하고 있는 지 잠시 헷갈릴 때마다
[패왕별희] - '무극' 때문에 감독에게 화가 날만큼 좋은 영화라 생각했는데, 음... 혹시 장국영 때문?
주성치의 [서유기] 시리즈 - 언제봐도 절대 질릴 리 없는...

[센과 치히로의 모험] -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이라면 뭘 봐도 몇번이나 볼 수 있을 듯한...

(추가로 [음양사] - 2편은 실망했으나 시리즈로 나왔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 - 지금 가장 기다리고 있는 영화)

 

Four places I have lived(살았던 적이 있는 네 곳의 장소)

 

(5살 전에 남대문에서 살았다던데 기억 안나니 빼고)
[서초동]에서 한 10년?
[신대방동]에서 한 10년?
[신림동]에서 1,2년?
지금은 [봉천동]...^^

 

Four TV shows I love to watch(좋아하는 네 가지 TV 프로그램)

 

나도 랄라 처럼 집에 TV가 없는데 그나마 요즘 자주 보게 되는 거라면...

 

[비타민] ㅋㅋㅋ
[연예정보 프로그램]
[이누야샤 6기](보고 싶으니 보기 거의 불가능한...T.T)

 

그동안 봤던 TV 프로그램 중에 제일 재미있었던 건

 

[카우보이 비밥]

 

Four places I have been on vacation(휴가 중 갔었던 네 곳의 장소)

 

중국 + 백두산 천지(엄청 오랜전 이야기네)
계룡산(작년에... 엄청난 청량감)
홍천(여름마다 꽤 갔었는데 그야말로 홀로 있을 수 있는 곳)
동해안(점점 수영장보다 바다가 좋다)

 

Four websites I visit daily(매일 방문하는 네 개의 웹싸이트)
 
보육노조
http://kcwu.nodong.org | 공공연맹 http://public.nodong.org | 민주노총 http://www.nodong.org
진보넷 http://www.jinbo.net | 진보블로그 http://blog.jinbo.net
포털(주로 구글, 다음)
미술관 사이트 몇개

 

Four of my favorite foods(가장 좋아하는 네 가지 음식)

 

빵과 우유
떡볶이
생선회
뻥튀기

 

Four places I would rather be right now(지금 있고 싶은 네 곳의 장소)

 

앙코르와트 사원(2년째 가장 가보고 싶은 곳)
이탈리아(한국 사람과 비슷하다던데...)
마사지실(어깨가 돌덩이다)
빔프로젝터나 홈시어터 있는 방

 

Four bloggers I’m tagging(태그를 넘기는 네 명의 블로거)

 

음... 생각나면 적어야 겠어여..-_-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6/02/27 15:02 2006/02/27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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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6/02/22 23:55

요즘 열나 바쁜데... 그런데... 그래서그런가?

보고싶은 영화가 많다.

 

어제 본 영화 [Time to leave].

죽음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날, 과연 나는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움직이고, 누군가들과 어떠한 관계를 정리해나갈까?


 

 



젊은 나이에 꽤 잘 나가는 사진작가, 로맹은 암이 퍼져 시한부 3개월을 선고받는다.

의사는 그에게 항암치료를 권하지만 그는 좀 다른 일을 해나간다.

 

끊는 시간

부모와 여동생에겐 알려야 할 것 같아서 거울을 보며 열심히 연습한다. "저 곧 죽는데요."

하지만 그는 가족과의 저녁식사에서 여동생에게 "그러니까 남편이 널 떠나지"라며 독설을 퍼붓는다.

그리고는 동거중인 애인 사샤에게 애정이 식었다며 나가라고 한다.

할머니를 만나러가던 길에 있던 식당의 불임부부가 제안한 정자 기증, 아기는 딱 질색이라며 단번에 거절한다.

 

이렇게 주변의 모든 관계를 끊음으로써 죽음을 준비하는 듯한 로맹.

그러던 로맹이 유일하게 자신의 죽음을 알린 존재는 바로 할머니다.

할머니가 묻는다. 왜 나에게는 알렸냐고?

로맹이 답한다. 당신은 나와 똑같으니까.

 

다시 맺는 시간

몸이 조금씩 안좋아지고 구토와 약이 반복되는 어느날, 동생에게서 화해의 편지가 도착한다.

로맹은 핸드폰으로 동생에게 사과하고 동생은 이내 오빠를 용서한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만나자는 제안을 일이 바쁘다며 회피한다.

 

오랜만에 연락해서 다시 만난 사샤. 격했던 감정은 이내 차분해졌다.

그날 로맹은 마지막으로 섹스를 부탁했지만 사샤는 거부했다.

로맹은 사샤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 갖다대고 잠시 누웠다. 그렇게 자신이 (아직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물론 사샤는 그 의미를 알아채지 못했겠지만.

 

다음엔 바로 불임부부를 찾아가 3명이 아기를 갖기 위해 함께 섹스를 한다.

 

그리고 드디어, 떠날 시간

로맹은 유언장을 작성하고 유산 상속자를 곧 태어날 아기로 하였다.

그리곤 이불 한장, 물안경 하나를 들고 해변가로 찾아간다.

열심히 수영을 하는 그. 왠지 숨을 쉰다는 것이 굉장히 고귀한 행위처럼 보이는 장면이었다.

모래사장으로 나와 이불 위에 누운 그는, 그러나 모두가 해변을 떠나고 노을이 지고 해가 지도록 더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혼자 가는 시간, 혼자 죽는 장면.

이런 장면은 왠지 고독하고 서글픈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Time to leave]가 보여준 죽음은 뭔가 색달라 보인다.

 

로맹의 애인 사샤는 이런 말을 했다. "애인이 생긴거지? 너는 혼자서 못살잖아."

그러나 혼자서 살지 못했던 로맹은 오로지 혼자서 죽음을 준비해나간다.

그는 처음에 고독과 서글픔이 배어나는 방식으로 주변의 관계를 끊어갔으나,

이내 끊은 관계들을 아주 조금 회복해나갔다.

마치 그들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충분히 확인시켜주면서도, 결코 자신의 죽음에 몰입하지 않도록 배려하듯.

 

죽음을 준비하면서 점점 더 혼자가 되어가는 로맹.

그러나 희한하게도 그의 죽음은 외로워보이지 않는다.

죽음의 마지막 순간, 지는 해를 뒤로 한 그의 모습조차 오히려 편안해보이기까지 한다.

그리하여 그가 떠난 시간, 떠남을 준비했던 시간은 꽤 행복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음이 두렵고,

- 인간이란 워낙 혼자 사는 존재라지만 - 특히 혼자 맞이하는 죽음에 공포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로맹을 보면서 어쩌면 혼자 맞이하는 죽음이라는 것에 편견이 있었던 건 아닌 지,

과연 나는 죽음을 잘 준비할 자세가 되어 있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 사족

음... 그런데 로맹은 왜 아기를 남겨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을까나?

요즘 저출산 얘기를 하도 많이 듣다보니 잠시 '홍보영화?'가 아닐까하는 생각이...ㅋㅋㅋ

 

* 사진 출처 : 씨네21(http://www.cine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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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22 23:55 2006/02/22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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