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공식 일정들을 따라 가면서 생긴 일들과 찍은 사진들

6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8/12/10
    취한 날(4)
    손을 내밀어 우리
  2. 2008/11/30
    한겨레에 실린 김준 동지 추모글(2)
    손을 내밀어 우리
  3. 2008/11/30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했던 동지여...
    손을 내밀어 우리
  4. 2008/11/25
    [부고] 고 김준 동지의 명복을 빕니다(3)
    손을 내밀어 우리
  5. 2008/10/02
    어느새(2)
    손을 내밀어 우리
  6. 2008/09/01
    투쟁, 거의 끝나다(4)
    손을 내밀어 우리
  7. 2008/05/31
    비오는 날, 출근투쟁 풍경
    손을 내밀어 우리
  8. 2008/02/21
    단병호 동지의 탈당의 변
    손을 내밀어 우리
  9. 2008/02/18
    당직 사퇴서(7)
    손을 내밀어 우리
  10. 2008/02/03
    방...콕(4)
    손을 내밀어 우리

취한 날

술을 물처럼 마시면

속절없이 취한다는 걸 알면서도

어젠

짧은 시간에 세 팀과 조우했고

제각기 사연은 출중했으므로

술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하여

일찌감치 취해서 귀가했고

 

집에 와서는

혹시라도 취하여 늦잠잘까 걱정하여

밀가루 입힌 말린 고추를 튀기고

쇠고기고추장볶음과

쥐눈이콩조림을 챙겨서

미리 도시락 반찬으로 준비하고야 잠들 수 있었다.

 

이른 아침

반쯤 채운 더운 물에 몸을 가두고

눈 감고 가만히 생각한다.

 

술 취했으면 자야지

세상 없어도 자야지

아침에 일찍도 일어났는데 뭔 걱정?

취해서 뜨거운 식용유라도 엎었으면 어쩔 뻔 했어?

도시락이야 하루쯤 건너뛰면 어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한겨레에 실린 김준 동지 추모글

[가신이의발자취] 김준, 그곳은 투명하더이까

김준 전 공공연구노조 산기평 부지부장

 
 

한겨레2008년 11월 29일 토요일 23쪽에 실림

 
 
 
» 김준(40)씨는 한국산업기술평가원에서 선임연구원으로 일하던 2003년 평가원의 기술료 500억원 부당사용을 폭로해 해고당했다. 그는 이듬해 법원에서 승소해 복직했다. 김씨는 이 과정에서 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 한국산업기술평가원 부지부장으로 있으면서 공익제보자 모임 창립을 주도했다.
 
산자부 내부고발로 벼랑끝 삶
당신의 열정·사랑 이어가려오

 

한참을 망설입니다. 소중한 동지를 다시 떠올려보니 무엇을 먼저 말해야 할지 한꺼번에 너무 많았던 일이 떠오릅니다. 항상 밝은 동안으로 웃음과 재치로 주위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었습니다. 너무나도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동료들의 영어선생님, 동시통역사도 마다않더니 국제공공부문노동조합연맹(PSI) 국제회의에 공공연맹 대표로 여러번 참가하였습니다.

 

동료의 어려움과 비정규직의 고통을 마치 자기 일인 양 먼저 생각하고 발 벗고 나섰습니다. 투명하고 깨끗한 세상을 만들고자, 부조리와 부패를 바로잡아 보자고 무척 노력하였습니다.

 

수년전 산업자원부(현 지식경제부) 국가연구개발예산 493억원의 부당전용에 대한 내부 고발로 삶은 더욱 치열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보복성 직위해제, 개인 휴업명령, 정리해고를 당하였으나 모두 하나같이 부당하다고 노동위원회와 법원이 판단했습니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비리와 부패의 구조를 척결하는데 앞장서 그 결실로(UN) 반부패연맹 한국본부 ‘투명사회기여상’(2004년), 흥사단 ‘투명상’(2006년), 국가청렴위원회 추천 ‘국무총리상’(2007년)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2006년 316일간의 공공기관 최장기 파업에서도 항상 새로운 아이디어와 불굴의 의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암(림프종 3기)이 발병하였지만 여전히 그 많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일에서와 같이 몹쓸 암과 처절하게 투병생활을 할 때 우리 모두 가슴을 졸이긴 했지만 그 강인한 열정으로 결국 이겨내리라 굳게 믿었습니다. 그 많은 법원 서류를 거침없이 써내려가 매번 승소하듯이 몹쓸 병마를 이겨내리라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우리 모두의 소망도 뒤로 한 채 떠나갔습니다. 허망합니다. 너무도 안타깝습니다. 남을 돕는 일에는 무한한 사랑으로 그리고 일과 투쟁에는 뜨거운 열정으로 살다간 당신, 진정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는 넓은 사랑과 뜨거운 열정으로 똘똘 뭉친 당신을 그리며 어리지만 늠름한 당신의 아들 태영과 함께 마음을 붙잡아 봅니다.

 

                                                                       2008년 11월27일, 양평 갑산공원묘지에

                                                                                            김준 동지를 홀로 두고 온 날

 

                              안형수(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 한국산업기술평가원지부 전 지부장) 드림


 
기사등록 : 2008-11-28 오후 06:44:58 기사수정 : 2008-11-28 오후 06:51:27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했던 동지여...

손을 내밀어 우리님의 [[부고] 고 김준 동지의 명복을 빕니다] 에 관련된 글.

 

 

 

김준 동지.

당신의 뜨거운 눈빛은 아직도 우리 가슴에서 형형하게 타오르고 있는데

지금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피를 나누고 40년 생애를 고스란히 간직해온 가족과 친지들의 오열,

사랑하는 아내 이선희와의 평생의 약속과

씩씩하고 튼튼하게 믿음직스럽게 자라고 있는 아들 태영의 모습,

태영이가 쓴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보고 있습니까?


세상의 온갖 신산스러운 추억까지 공유해온 오래된 벗들의 통곡,

노동자 민중이 모두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부패와 비리를 뿌리 뽑아 투명하고 깨끗한 사회를 만들겠다고

316일의 파업과 7년의 투쟁을 통해 뼛속까지 사무치게 서로에 대한 믿음을 확인했던

한국산업기술평가원지부 21명의 동지들,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우리 조합원들이 애타게 찾는 목소리를 여기 두고,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테헤란로를 떠도는 바람은 당신의 숨결입니까?

달리는 차량들의 분주한 경적소리가 당신의 목소리입니까?

벌거벗은 11월의 가로수 사이로 하늘이 걸리고

그 뒤편에서 말없이 떠올라 우리를 지켜보는 태양은 당신의 웃음입니까?

마치 영화의 스크린처럼 온 세상을 담아내는 이즈음의 짙은 새벽안개,

안개 속에서 더욱 선명해지는 이 도시의 또렷또렷한 이목구비가 당신의 얼굴입니까?

오늘 이 시간, 세상의 모든 존재는 바로 김준 동지 당신입니다.

그리하여 살아있는 우리 모두가 곧 당신입니다.


김준 동지.

우리는 당신과 함께 했던 일들이 너무나 많아 일일이 열거할 수가 없습니다.

1998년 11월, 꼭 10년 전 이맘때였습니다.

당신은 전국과학기술노동조합 한국산업기술평가원지부의 사무국장을 맡아서

현업의 일과 노동조합의 일을 반반씩 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는데,

당신은 사무국장으로서의 업무가 더 중요한 것이라면서 책상을 노동조합 사무실로 옮겼습니다.

그 때의 당당하고 자신감에 찬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백 마디 말보다 행동으로 책임지고 실천하는 당신의 모습은 그 후로도 한결같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연구원으로서의 맡은 바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을

지금껏 우리는 본 적이 없습니다.


김준 동지.

당신의 치열했던 생애, 그 중에서도 특히 지난 10년은 참 불꽃같은 삶이었습니다.

정부에 맞서서, 국민의 돈 500억원을 부당하게 집행하는 정부에 감히 맞서서,

2002년 이후 7년간 온몸을 바쳐 투쟁에 앞장서 왔습니다.

아직도 완전히 끝나지 않은 이 투쟁 과정에서

기상천외한 개인 휴업명령과 정리해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으면서도

당신은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법원은 당신과 우리 동지들이 옳았음을 판결로 증명했고,

UN 반부패연맹 한국본부 ‘투명사회기여상’, 2006년 흥사단 투명상,

국가청렴위 추천 국무총리상 수상 등 이 사회가 당신의 의로움에 함께 했습니다.


2004년, 산업기술센터 13층에 노동조합 사무실이 있을 때,

사무실 안쪽 우리 눈높이쯤 되는 곳에 쓰였던 경구(警句)를 동지는 기억합니까?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

정부와 사용자의 탄압은 가혹하고 엄중하고 끝을 알 수 없었던 그 때,

혹시라도 우리가 약해질까봐 누군가 걱정이 되었던가 봅니다.

그 때 동지는 그 말뜻을 우리한테 풀어주고는 했습니다.

김준 동지.

우리는 이성적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을

우리들 의지, 힘을 모아 하나씩 헤쳐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당신이 살고자 했던 세상,

당신이 꿈꾸었던 세계,

당신이 가고자 했던 미래,

오늘 이 순간 우리의 꿈과 소망과 포부로 이어받겠습니다.


김준 동지.

혹여 남겨 두었을지도 모르는 당신 몫의 일일랑 이젠 거두고

오로지 당신을 그리는 가족과 벗들과 동지들의 사랑만 보듬고

평화롭고 평등한 새 세상에서 고이 잠드소서.

우리 모두, 동지를 사랑합니다.


고이고이 잠드소서


2008년 11월 27일



 

68년  1월 서울 출생

95년 12월 산업기술정책연구소 기술협력부 연구원 입사

98년 11월 전국과학기술노동조합 한국산업기술평가원지부 3대 사무국장

98년 12월 PSI(국제공공부문노동조합연맹)국제회의 공공연맹 대표로 참가

03년  7월 내부고발(기술료 500억 부당사용) 당사자로 보복성 직위해제

03년 11월, 12월 개인휴업명령 및 경영악화 명목 보복성 정리해고: 이후 서울지노위, 서울중앙지법 등 내부고발의심 해고무효 확인

04년 10월 서울중앙지법 해고무효소송 승소 후 복직

04년 12월 UN 반부패연맹 한국본부 “투명사회기여상” 수상

06년  2월 ~ 12월 한국산업기술평가원지부 316일간 파업투쟁

06년  9월 “나부터 정직하게 다함께 투명사회” 2006년 흥사단 투명상 수상

07년  3월 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 한국산업기술평가원지부 8대 부지부장

07년  5월 국무총리상 수상(국가청렴위 추천)

07년  9월 최초 암 발병(혈액암 일종 림프종 3기) 및 항암치료 시작

08년  3월 완전관해(완쾌)로 판정되었으나 2주 후 재발병

08년  4월 ~ 9월 항암치료 다시 시작, 자가조혈모 이식수술

08년 11월 18일 여의도 성모병원 재입원(합병증 폐렴 증세 악화)

08년 11월 25일 새벽 4시 45분 운명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부고] 고 김준 동지의 명복을 빕니다

새벽에 문자가 왔다.

 

[김준동지 운명했습니다]

오늘 04시 10분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11/25 4:34 am

 

동지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내 몸을 드나들던

슬픔, 분노, 기도, 비통, 애절 따위

수많은 낱말들 모두 사라지고

 

세상이 하얘졌다가 노래졌다가 한다.

 

예정된 모든 일정과 계획 미루고

우선 서울로 간다.

 

김준,

그가 누구인지 얼마나 치열하게 투쟁해왔는지는

나중에 쓰기로 하고...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투쟁, 거의 끝나다

완전한 승리라고 하기에는 좀 이르지만 통합은 일단 막아냈다. 이번 주까지는 확인이 필요하긴 하다. 오늘 속보에는 이렇게 썼다.

▣ 향후 투쟁에 대한 안내

생공투 속보 82호를 통해서 이미 알려드렸습니다만, 노동조합은 강제통합 저지를 위한 투쟁을 지난 주말(8/29)로 일단 중단하고, 앞으로의 상황을 예의 주시하기로 하였습니다.

생명연-KAIST 강제통합에 관련해서는, △강제통합의 가장 중요한 진원지였던 청와대가 통합이 아닌 협력방안으로 방향을 선회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고, △교과부 또한 협력방안에 무게를 싣고 있으며, △공공부문 선진화 방안 2차 발표에서 제외되었고 이후 발표에서도 두 기관의 통합은 포함되지 않을 것이 확실시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내일(9/2)로 예정되었던 교과부 앞 1인 시위도 더 이상 하지 않습니다. 그 동안 1인 시위에 앞장섰던 조합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본관동 앞과 연구동 현관에 설치되었던 대형 플랭카드 3개와 정문과 후문에 내걸었던 플랭카드들도 지난 주말에 모두 철거하였습니다. 관심을 보여 주시고 성원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또한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강제통합 저지투쟁이 완전히 마무리되는 시점은 생명연과 KAIST가 발전적 협력방안을 공식화하는 때라고 판단하고 있고, 구조조정에 대한 정부 입장을 더 확인하고 대응할 필요가 있기에, 아직 투쟁 종료 선언은 하지 않고 생공투 체제도 계속 유지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생공투 속보도 오늘(9/1)부터는 매일 발행하지 않고 조합원과 직원 여러분에게 출연(연) 구조조정과 관련하여 알려드릴 일이 생길 때마다 수시로 배포하게 됩니다. 생공투 속보에 대한 관심을 계속 유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출연(연) 10% 감원 계획?

한편, 조만간 발표될 정부의 3차 공공부문 선진화 방안은 공공기관의 효율성을 최소 10% 이상 높인다는 목표 아래 인력과 예산 효율화에 초점이 맞춰질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3년 동안 전체 출연(연) 인원의 10% 감원, △성과에 따른 급여 차등폭 확대 등 일반 공기업에 준하는 계획이 포함될 것이 유력합니다.

노동조합은 강제통합과 마찬가지로 정부의 강압적이고 일방적인 구조조정에 대해서 조합원의 뜻과 힘을 모아 최선을 다해 대응할 것입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비오는 날, 출근투쟁 풍경

손을 내밀어 우리님의 [두 갈래 길 앞에서] 에 관련된 글.

 

 

3월 28일, 처연하게 비가 내리던 날 아침 출근길,

KAIST 정문에서 출근투쟁을 하러 나온 조합원과 직원들이 170여명인가 그랬다.

그 날 우리 조합원이 찍은 사진...

클릭하면 조금은 크게 볼 수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단병호 동지의 탈당의 변

단병호 위원장이 민주노동당을 탈당하고 민주노총 지도위원을 사퇴하면서 발표한 글.

...마음이 무겁다

...내가 새겨들을 대목도 많다.

 

------------------------

 

그동안 민주노동당을 아끼고 사랑해 주신 국민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민주노동당에 보내주신 격려와 성원은 한국사회의 변화를 바라는 국민들의 간절한 염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그 뜻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 평생 무거운 짐 될 것

그리고 민주노동당을 여기까지 함께 만들어 온 모든 당직자 동지들과 당원 동지 여러분 미안합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우리는 사회변혁의 꿈 하나를 안고 견디어 왔습니다. 정말 고생 많았습니다. 좀더 잘했더라면 당이 이런 상황까지는 오지 않았을 텐데 하는 이 회한은 제 평생을 두고 무거운 짐이 될 것 같습니다.

또한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염원하며 힘들게 노동을 하면서도 당의 발전을 위해 묵묵히 그리고 헌신적으로 활동해 오신 노동자 동지들 감사합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해 국회에 들어간다고 약속하였는데 그 약속 제대로 지키지 못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이제 민주노동당을 탈당하려고 합니다. 민주노동당이 어려울 때 그리고 그 책임이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국회의원의 직을 가지고 일한 사람으로서 탈당의 결단은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정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민주노동당은 위기의 본질을 통찰하고 있지 못하고, 따라서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민주노동당의 위기는 이미 예고되어 있었습니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국회의원 10명이 당선되는 등 민주노동당은 급성장을 했습니다. 그러나 토대가 튼튼하게 다져지지 않은 상태에서 당의 화려한 성장은 작은 충격에도 쉽게 무너질 수 있는 사상누각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민주노동당의 토대를 굳건하게 다져야 할 때에 2008년 제일야당, 2012년 집권이라는 신기루를 쫓아다니며 허송세월을 보냈습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 실패가 위기 본질

 

당 위기의 본질은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실패가 그 첫째입니다. 민주노동당 당원의 40%가 노동자 입니다. 그 대다수가 민주노총 조합원입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 내에 민주노총 조합원은 있지만 민주노총 내에 민주노동당 당원은 없었습니다.

당의 강령과 기본정책 그리고 당면한 정치방침을 가지고 노동현장에서 일상적으로 정치사업을 수행할 수 있는 당원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노동자 대중은 행사와 선거 때 그리고 재정을 조달하는데 필요한 대상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민주노동당은 노동자 당원을 당의 중심에 세우기 위한 재조직화의 노력을 게을리 하였습니다. 그나마 있었다면 현장분회 조직화 방침이 유일한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민주노총에 위임된 것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와 민주노동당의 노동부문 할당제는 결과적으로 당의 질적 발전을 가로막는 역기능으로 작용했다고 저는 판단합니다.

민주노동당은 언제부터인가 운동의 건강한 풍토는 사라지고 보수정치판의 잘못된 풍토가 당을 지배하는 형국이 되어버렸습니다. 보수 정당과 달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강점은 열정과 헌신성, 책임성과 도덕성 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민주노동당에 이런 강점은 사라져버렸습니다.

 

수많은 토론과 결정에 비해 실천은 항상 미미하였습니다. 사업에 대해 진지하게 평가하고, 그 평가에 대해 진솔하고 겸허하게 수용하는 기풍은 사라지고 논쟁만 남아 있습니다. 공은 가까이하려 하면서도 과와 책임은 멀리하려고 합니다. 진보정당에서 가장 경계하고 멀리해야 할 풍토들이 또아리를 틀고 굳어져 있는 것입니다.

내가 민주노동당을 떠나는 이유

 

비대위에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단 한 차례도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당명을 바꾸고, 강령을 개정하고, 시민단체 명망가 몇 명이 더 당에 합류한다고 해서 진보정당이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국사회에서 제대로 된 진보정당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그 중심에 의식화된 노동자 대오가 굳건하게 세워질 때만 가능하다고 확신합니다. 현재까지 민주노동당은 이러한 문제인식에 충실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기대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합니다. 이것이 제가 민주노동당을 떠나는 이유 입니다.

민주노총 지도위원을 사임합니다. 저는 4년 6개월 동안 민주노총 위원장으로 일을 하였습니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과의 관계설정, 노동부문 할당제, 배타적 지지 등 모든 것이 제가 위원장으로 있을 때 결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모든 결정이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질적 발전을 저해하는 잘못된 것이었다는 책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민주노총은 이러한 잘못된 결정을 여전히 조직적 방침으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쉽게 바뀌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방침은 빨리 고치고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상반된 입장을 가지고 있으면서 민주노총 지도위원직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합니다.

18대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하지 않겠습니다. 포항 남구에서 민주노동당과 함께 포항의 변화를 만들어 보자고 열심히 주민들에게 호소하고 지지를 요청했습니다. 2월 2일까지 그렇게 열심히 선거운동을 하면서 민주노동당이 서민의 행복을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민주노동당과는 함께 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정치적인 도의가 아니라고 봅니다. 국민의 성원을 소중하게 키워내지 못한 책임에 대해 조용히 성찰하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이 바른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제 한 사람의 평범한 노동자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이러한 결단이 정치활동의 중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해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해서라면 누구와도 만날 것입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한 일이라면 누구와도 함께 하겠습니다.

민주노동당의 노동자 정치세력화 실패로 좌절하고 있을 노동자 동지들께서도 다시 한번 떨쳐 일어나 정말 제대로 된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만들어 나갑시다. 감사합니다.

2008년 2월 20일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단병호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당직 사퇴서

당직 사퇴서

 

민주노동당 대전광역시당 정책위원장직을 사퇴합니다.

 

2008. 2. 13.

 

이 성 우 (서명)

 

----------------------------

 

1월 13일 오전에 대전시당 당직자 탈당선언 기자회견이 있었다.

점심을 먹고 있는데 시당 사무처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기자회견문을 봤고, 오늘 급히 운영위원회를 해야겠는데

당직사퇴를 하면 고맙겠다고, 성원에 문제가 있다고....

 

기꺼이, 곧바로 미디어충청 사무실에 가서 한 줄의 사퇴서를 써서 팩스로 보냈다.

 

국민승리21부터 시작하면 11년쯤 되었구나,

총선에 출마한 것 빼고는 당의 일에만 온전히 몰입했던 건 얼마 되지도 않고

특히 이번 정책위원장역은 거의 안했다고 하는 게 맞지만

그래도 회한은 많다.

 

숱한 모임에 들고는 했지만

내 스스로 탈퇴한 최초의 조직이 민주노동당이 되겠구나.

당원번호 75번, 세월 지나도 의미있는 기억으로 남게 될까....모르겠네

 

또 새로운 일을 벌여야 한다는 게 작지 않게 마음의 짐이 되지만

이런 게 내 팔자려니, 하고 산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방...콕

당대회를 가지 않고

오후 내내 인터넷 생중계를 켜놓고 있었다.

 

이른바 '일심회" 관련하여

원안 삭제안이 통과되자마자 우르르 퇴장들 하고

지금 의사정족수 662명에서 8명이 모자라는 654명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덕우 의장이 막 산회선언을 했다.

9시간 내내 흐르게 두었던 생중계 화면을 끌 시간이 되었다.

 

중계되지도 않을 무수한 자리마다

넘치는 울분과 비탄과 통곡들은 어디로 흘러들 갈까,

나는

이제 어디에 몸과 마음을 두어야 하나....

 

내가 붙박힌 곳에서부터 무어라도 시작해야겠지.

연휴가 임박해 있으니

당분간은 방콕모드로 가지 모.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어제, 2007. 3. 27. 화요일

1994년 4월 15일

처음으로 기업별노조를 해체하고 초기업(소산별) 노조로 출범했던

전국과학기술노동조합이 깃발을 내렸고,

전국공공연구전문노동조합과 함께

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으로 다시 출범했다.

 

어떤 이는 이름에서 과학기술이 빠진 것 때문에

따로 술을 펑펑 마시며 울부짖었고

어떤 이는 공식 뒷풀이에서 주고받은 술로 취한 상태에서

우리 집으로 와서 술을 또 펑펑 마셨다.

 

메모 하나 남길 수 없을 정도로 술에 젖었기에

이 아침 FTA 저지 출근 선전전에도 안가려고 하다가 늦게서야 합류했고

사무실에 와서 다시 생각해 보아도

어제 하루의 사건이 가볍지 않아 일단 흔적부터 남긴다.

 

13년  세월동안

걸러가며 6년씩이나 위원장을 맡았던 처지에서

무어라 평가나 소회는 남겨야 되지 않겠는가.

조만간....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