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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새벽을 접하는 나의 잡생각...

  • 등록일
    2004/12/09 21:04
  • 수정일
    2004/12/09 21:04
* 이 글은 간장 오타맨...님의 [‘노동의 새벽’ 20주년 기념 콘서트에 부쳐] 에 관련된 글입니다.

아래 덧글에 행인님이 80년대 노동자 민중의 처절한 삶을 노래한 박노해라는 사람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결코 땔 수 없는 관계이기에 박노해란 사람은 죽고 박기평이 살아있다는 이야기를 덧글로 달았던 기억이 납니다. 노동의 새벽 출간 20년을 기념하여 행사가 개최된다고 하지만 전 하나도 기쁘지 않습니다.


그 당시 처절하게 살았던 사람들 지금 어떠한 대우를 받고 있나요.(대우 받기위해 싸운 것은 아닙니다. 노동자가 역사의 주체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살아갔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왜 패배의식에 젖어 지금 살아가고 있습니다. 공지영의 후일담 문학은 그들의 패배를 외면합니다. 80년대 활동가들은 아름다웠지만 성급했고 미숙했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를 따랐던 수많은 노동자들은 지금 어떠한 처지 어떠한 생각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가슴 한켠 싸늘하게 다가옵니다. 그들 현장에서 ㅤㅉㅗㅈ겨난 것은 감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족으로부터 외면 받거나 버림 받은 것도 감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주체라 믿어왔고 그렇게 실천한 그들은 지금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요. 현장에 복귀하지 못하고 노점상 또는 주변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아가면서 자신이 가졌던 그 역사적 주체의식에 대한 생각에 조금은 회의썩인 생각을 갖거나 아니면 운동에 반편양을 나타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선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따르고 믿었던 사람이 그렇게 무너진다는 것은 같이 동고동락했던 많은 사람들 또한 무너진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조직은 망해도 사람은 남습니다. 그러나 철저한 조직적 관계를 맺어온 사람들은 조직이 망해도 사람이 남기는 그리 쉽지 않더라구요.... 참 모질기도 합니다. 다는 아니지만 아직도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벅참이 한순간 모닥불로 꺼질때 그 처절함이란 겪어보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습니다. 저도 말로 지껄이거나 안다고 자부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고통을 단지 짐작만 할 뿐입니다. 그들의 절망은 어떠할까... 그래서 그 노동의 새벽이라는 말만 들어도 전 개인적으로 알레르기 반응이 나타납니다. 저에게 있어서 만큼은 요.... 자랑스러움이 부끄러움으로 변할때 심정이라고 할까요.) 공장을 떠난 공지영은 소설로서 80년대 후일담 문학을 한다고 하고 있으며, 박기평은 감옥에서 나와 사람만이 희망이다. 그리고 여타 시를 통해 그 당시 성급했다는 말을 하고 강단을 돌아다니고 있고, 이정로라는 가명을 쓰던 백태웅은 캐나다 인가에서 변호가 겸, 국제학 관련 대학강단에 서있다. 난 그들의 선택에 대해서 뭐 할말은 없다. 다만, 그들이 지껄인 만들에 대해 책임을 지지 못하고 있음에 분개하고 있다. 나 또한 그들과 연관성이 없지는 않다. 그들과 같은 혁명론을 갖고 89년 전민학련(전국민주주의학생연맹 일명 DSL)깃발 아래 학생운동을 하였던 터라... 그리고 그들을 보며 행당동 사람들이라고 말하며 그들 실천에 대해 무한 신뢰를 갖고 운동이라는 것을 경험했고 내 인생으로 받아 들었다.(운동을 접하고 한 정파를 선택할때 다 마찬가지 이겠지만 내가 알고 선택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속해있던 곳이 이곳이라 난 이를 타랐고 실천하며 선택하였다.) 내가 접한 그들.. 그리고 늘 소수였고, 신념을 지키기 위해 버거웠지만 실천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돌아서는 모습을 보았을때.. 가슴이 무거지는 심정이었다. 남들은 89년 동구사회주의권 붕괴가 운동의 진로에 있어 희망이 사라졌다고 하였지만 나에게 있어서 만큼은 89년 충격(그 당시 일학년이 뭐 알겠나.)보다 더했다. 그리고 선배들은 88년 CA 소수파와 다수파 논쟁에서 분리되는 과정보다 89년 동구사회주의권 붕괴보다 그들의 돌아선 모습 아니 94년 그들의 손에 의해 재건될거라 확신되던 사회주의노동자동맹(이하 사노맹)이 합법화 후 자신 해산되는 과정을 지켜본 사람들이라면 나와 같으리라... 충격은 그야 말로 대단하였다. 남한 사회구성체논쟁의 맨 선두에서 이름을 날린 조직의 대표선수라 하는 박기평(필명 박노해)과 백태웅(필명 이정로)는 언제나 든든한 선배요 든든한 이론적 바탕이였다. 그래서 무모한 싸움도 마다하지 않았고, 희망도 보았다. 노동자 민중이 왜 중요한 지도 이 사회에 있어서 왜 사회주의가 필요한 것인지도 그리고 한국사회가 왜 신식민지인가?(95년 들어서면서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가 해체 되고 초국적자본이 대두되었다라는 여러가지 글을 있다. 특히 창작과 비평에서 나온 92년 봄호(93년 봄호 인가)는 일본인 교수겸 활동가인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사람이 신자유주의 대두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고 초국적 자본의 대두,,, 진보와 보수의 구도를 넘어 총노동대 총자본의 대두 서막이 막이 오르던 시기.... 이 시기 진보정당 건설이라는 화두가 남한 운동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다. 합비합동시건설론 대두 그러나 민중당과 민중의독자적정치세력화(이하 민독정) 실패... 대선에서 백기완선생님의 출마 그러나 30만표에 못미치는 결과....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그리고 좌파는 통일전선 활동은 역사에 사라지고 각자 길을 걷게 된다. 다만, 사추위(사회당추진위원회)와 민중회의가 조직통합을 하여 만들어낸 민정련(민중정치연합)... 몇년 횟수를 더해가며 민정련은 나뉘어진다. 이 사건이 있기전 사노맹은 전격적으로 1994년 합법화를 내걸고 자신이 갖고 있던 기존노선을 포기한채 대중정치조직(이하 대정조)로 변모를 꿈꾼다. 그동안 비합활동을 하였던 많은 활동가들은 자수를 하고 대중공간으로 나선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진보정당운동에 뛰어든다. 국민승리21에 대거 결합한 세력이 있고, 갈무리 출판사를 운영하며 부문운동과 네그리 적 바탕은 네트워크를 한축으로 한 소통과 연대를 추진하기 위한 왑이라는 공간이 있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그럴것이다. 그들은 쉽게 젊어서 너무 성급하였다. 말을 하며 그때 오류를 지적할 수 있지만 따르는 사람의 입장은 다르다. 이렇듯 내가 정치노선과 조직노선을 갖고 활동하던 정파는 90년대 중반 한국 운동사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80년대 그 수많았던 사람들 또한 함께 사라졌다는게 더 큰 아픔이다. 백무산 시인은 강령이라는 시에서 우리의 강령은 틀림없다고 하지만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우리 강령은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과연 많이 있을까? 지금.... 박노해를 기억하기 이전 박기평의 현재 모습을 우리는 기억하고 그를 봐라봐야 한다고 난 생각한다. 그가 선량한 사람으로서 대중운동을 위해 열심히 하고 있다면 말은 달라진다. 또한 시간은 80년대 90년대 2000년대 토막으로 기억될 수 없다. 우리내 노동자 처한 조건이 과연 80년대와 지금 뭐 달라졌는가? 고작 임금 몇푼 오르고 노동귀족이라고 소리 듣는것.... 그러나 보라 고작 70만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조직된 노동자들 뿐이다. 80년대말 90년대 초중반 에 그나마 악법을 어겨서 깨트리던 그 저력과 노동자 헤게모니는 잃어버린지 이미 오래이다. 그리고 386세대라 80년대 민주화운동을 다 자신들이 잘나서 하였다고들 한다. 그리고 공지영 류의 후일담 문학과 같은 정서에 배겨든 많은 386세대는 동질감으로 똘똘 뭉쳐 노사모라는 것을 만들어 위안을 삼고 있다. 그러나 민주화도 현재진행형이지 과거진행형이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 않는가? 그렇듯 난 80년대의 철저한 박노해가 있었고 지금은 박기평이 있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난 80년대와 2000년대 박기평을 동일한 인물로 본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라는 어려운 책에서는 현존재라는 말을 써가면서 시간이라는 개념을 철학적으로 난해하게 해석하지만 주요한 것은 과거 현재 미래는 동일 할 수 밖에 없다는 맥락이다. 이 말이 내포하는 것은 존재하는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 단락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사람의 마음은 늘 한결 같다. 나하나 변하는 것은 별 문제 없다고 하나 그 변함이 때론 큰 파장을 지니고 있을때가 있다. 특히 노동해방동맹으로 부터 시작된 박기평은 많은 활동가들에게 자랑이였으며 또한 부끄러운 자화상을 던져주었다. 유독 왜 박기평에게 그러냐는 말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얼마나 철저한 카리스마를 갖고 동료나 후배들에게 혁명을 위해 얼마나 치열해야 함을 역설적으로 강조한 것을 생각하면 나의 이러한 푸념은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 난 그가 변해서도 아니요 그가 치열하게 살지 못해서도 아니다. 그가 아직도 박노해라는 필명을 갖고 그렇지 않은 삶을 살아가며 80년대 나도 한때 치열했다는 푸념을 하는 것에 벨이 꼬여서 그렇다. 간장 오타맨이... P.S 지금 많은 조직에서 반자본주의 전선투쟁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보라 우리의 투쟁의 대상이 반자본주의 투쟁인가를 투쟁의 상은 초국적 자본이 대두된 이상 총노동대 총자본으로 구도로 확정되어져 있다. 반자본주의 전선이 아니라 부문운동 또한 총자본에 대한 총노동을 엄호하는 투쟁으로 확정되어야 한다. 추상적 반자본주의 전선은 일세계에서 쳐놓은 전선에 불과하다. 반자본주의전선투쟁은 제3세계 일국적 운동을 통한 전지구적 연대에 있어서는 참 힘든 전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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