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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1/08
    내년은 UN 선정, 세계 마이크로 크레디트의 해
    간장 오타맨...
  2. 2005/01/07
    '안이한' 노동운동이라면, 두들겨 깨워라
    간장 오타맨...
  3. 2005/01/07
    지난 3개월을 돌아보며...(2)
    간장 오타맨...
  4. 2005/01/06
    한원CC에 가보았다.(2)
    간장 오타맨...
  5. 2005/01/06
    하루를 날렸다.(2)
    간장 오타맨...

내년은 UN 선정, 세계 마이크로 크레디트의 해

  • 등록일
    2005/01/08 08:20
  • 수정일
    2005/01/08 08:20
자본으로 자본주의를 넘는 실험 이정환 기자 blue@digitalmal.com 구두닦이에게 물었다. "돈을 벌면 어디에 쓰죠?" "절반은 쌀을 사고 절반은 주인한테 줘야합니다." "주인이 누군데요?" "당연히 구두 닦는 솔과 구두 통을 빌려준 사람이죠." 구두 닦는 솔과 구두 통은 기껏해야 5만원 정도 밖에 안한다. 겨우 5만원이 없어서 이 사람은 구두 닦는 솔과 구두 통을 빌려준 사람의 노예가 된다. 그나마 일을 하는 사람들은 낫다. 거리 곳곳에서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당신에게 손을 내민다. 이들에게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이건 방글라데시의 이야기지만 결코 남의 나라 이야기만은 아니다. 방글라데시의 고리대금업자들은 이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일주일에 10%씩 이자를 받는다. 이들은 살아남으려고 어쩔 수 없이 빚을 내지만 빚은 계속 늘어나고 결코 빚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끝은 파국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라민은행의 실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라민'은 벵골어로 '마을'이라는 뜻이다. 그라민은행은 이 구두닦이에게 5만원을 빌려준다. 아무런 담보도 서류도 없이 그냥 빌려준다. 이자는 한해 20%. 그리고 일주일마다 1200원씩 갚게 한다. 놀랍게도 이 5만원은 구두닦이의 삶을 크게 바꾸어 놓는다. 그날 그날 먹고 살기 바빴던 구두닦이는 이제 어엿한 사장이 된다. 그는 이 5만원으로 새로운 희망을 찾는다. 20%면 결코 싼 이자가 아니지만 99%에 이르는 사람들이 돈을 착실히 갚는다. 이 5만원이 그들이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의 어떤 은행도 이만큼 대출해준 돈을 제대로 돌려받지 못한다. 일주일마다 갚아야 하는 1200원은 이들에게 더이상 빚이 아니다. 1200원을 갚아나갈 때마다 이들은 가난을 벗어나는 꿈에 한발자국 다가간다. 그라민은행은 가난한 마을을 찾아가 사람들을 모아놓고 돈을 빌려가라고 말한다. 돈을 빌려가서 현실과 맞서 싸우고 가난을 넘어서라고 말한다. 그라민은행은 이를테면 자본주의의 한계를 자본의 힘으로 넘는 하나의 실험이라고 볼 수 있다. 간장 오타맨이.... 내년은 유엔 경제사회이사회가 정한 '세계 마이크로 크레디트의 해'다. 마이크로 크레디트란 그라민은행의 실험과 같은 무담보 소액 신용대출을 말한다. 기본 개념은 노동 능력과 의지가 있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라민은행은 마이크로 크레디트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다. 1976년에 설립된 그라민은행은 자산 규모가 3조3600억원에 이르는 대형 은행으로 성장했다. 방글라데시 전역에 1175개의 지점을 두고 있다. 방글라데시 뿐만 아니라 미국과 영국, 남미와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에서 그라민은행의 성공사례를 배워갔다. 마이크로 크레디트는 가난한 사람들을 원조하는게 아니라 자립과 자활의 기회를 준다는데 의미가 있다. 유엔 자본개발기금에 따르면 2001년까지 세계적으로 2680만명의 가난한 사람들이 마이크로 크레디트을 지원받았다. 마이크로 크레디트을 신청한 사람들의 6%에 지나지 않는 규모다. 성과는 충분히 검증됐지만 자본금이 부족한 탓에 아직은 지원 범위가 좁다. 유엔은 총회 차원에서 정부와 비정부 기구, 시민사회 단체, 언론 등을 초청해 마이크로 크레디트을 널리 홍보하고 재정을 확충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유엔은 마이크로 크레디트를 밀레니엄 개발 목표(MDGs) 세계 전략의 일환으로 발전시켜 나갈 계획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라민은행의 한국 지부로 '신나는 조합'이 설립돼 있다. 2000년 시티은행이 지원한 10만달러의 자본금으로 설립됐고 현재까지 100여명의 조합원들이 100만~500만원씩을 대출받았다. 신나는 조합은 아직 마이크로 크레디트의 시범사업 단계에 머물러 있고 우리나라의 실정에 비춰볼 때 대출 규모 등에서 현실성이 떨어지는 부분이 있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한 좀더 현실적인 대안을 모색해야할 때다. 이를테면 한국형 그라민은행 또는 한국형 마이크로 크레디트의 가능성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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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이한' 노동운동이라면, 두들겨 깨워라

  • 등록일
    2005/01/07 19:40
  • 수정일
    2005/01/07 19:40
[특별기고] 전국비정규연대회의 그 1년의 투쟁기록 편집부 editor@digitalmal.com 오민규 전국비정규연대회의 사무국장 올 여름 정부가 도입하려 한 비정규법안이 수면 위로 부상하자, 2004년 노동운동은 순식간에 격랑 속으로 빨려들어갔습니다. 민주노총은 '총파업'을 선언하였습니다. 비정규직 관련법안을 두고 정규직이 총파업을 결의한 것은 그야말로 '세계최초'의 일입니다. 그러나 그 배경에는 숱한 비정규 노동자들의 죽음과 희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국의 비정규노조 대표자들이 모여 열린우리당사를 점거하는 등 적극적으로 싸움에 뛰어들지 않았다면, 아마 민주노총의 총파업은 불가능했을지 모릅니다. 한편 '총파업' 정국 속에서 정규직 노조의 '허약성'이 유감없이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전국비정규연대회의 오민규 국장의 글은 그 치열했던 1년의 가장 생생한 증언일 것입니다.(편집자) 두 죽음과 함께 탄생한 비정규연대회의


전국비정규연대회의 탄생시점을 가장 멀리 잡자면, 아마도 2003년 9월27일일 것이다. 민주노총 대전지역본부에서 16개 비정규노조들이 모여 연대체 구성을 논의한 시점인데, 당일 회의에서 가장 핵심은 "비정규노조들의 독립적인 연대체가 과연 필요한가" (즉, "비정규노조들이 연맹과 지역본부에 다 속해있으니 기존 정규직 노조 속에서 녹여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는가") 라는 것이었다. 논의 끝에 "전국비정규직노조대표자연대회의(준)"이라는 이름을 확정하고, 10월26일로 예정된 전국비정규직노동자대회에 모이기로 결정했다. 10월 26일 양대노총 비정규노조들이 중심이 되어 치러진 이 대회에서, 총파업을 앞둔 근로복지공단비정규노조 이용석 광주전남본부장이 "비정규직 철폐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바로 우리들 눈앞에서 분신자결, 산화해 가셨다. 이용석 열사의 죽음은 이미 전사회적 문제인 비정규직 사안에 대해, "우리 비정규직 노동자들 스스로는 얼마나 책임있게 이 문제를 다뤄왔던가"라는 커다란 문제의식을 던졌다. 전국비정규연대회의 탄생시점을 가장 가깝게 잡자면, 2004년 1월30일~31일 유성 동학산장에서 진행된 전국비정규노조 간부수련회일 것이다. 이날 수련회에서는 운영위원회와 대표자회의 등 조직체계를 확정됐다. 그런데 공식체계를 출범시킨 지 2주일만인 2월14일, 울산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인 박일수 동지가 "하청노동자도 인간이다 사람답게 살고싶다"는 유서를 남기고 분신자결하고 말았다. 연대회의는 곧바로 상황실을 설치하고 스스로 열사투쟁의 한 주체임을 선언했다. 연대회의는 울산에서 전국비정규노동자대회를 열기도 하고 서울 계동사옥과 대한축구협회 앞에서 항의투쟁을 전개하기도 하였으나, 여전히 미진한 조직력으로 인해 투쟁에 많은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가진 만큼 솔직하게 연대했고 부족한 만큼 반성하고 되새김질하려 했다. 확실한 것은, 전국비정규연대회의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조직의 내면에 바로 이용석 열사의 정신과 박일수 열사의 정신이 흐르고 있다는 점이다. 그 정신은 바로 "비정규직 노동자 모두가 하나라는 마음으로 전국적인 공동투쟁을 일궈내야 한다"는 것이었고, 그것은 머지 않아 파견법 개악을 비롯한 노동법 개악 반대투쟁에서 실현되게 된다. 민주노총의 안이한 정세인식 정부가 최근에 내놓은 이른바 '비정규직보호법안'은 사실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추진되어온 것이다. 2001년 7월에 노사정위원회에 비정규직특위를 신설하여 법안 마련을 준비해왔으며, 노무현 정부 들어선 직후인 2003년 5월에는 공익위원 안을 중심으로 입법안의 틀이 일부 공개되기도 했다. 2004년에 들어서자 정부는 연내 비정규직 보호입법을 추진하겠다고 누누이 밝혀왔다. 이미 상반기에 부처간 협의를 거의 마쳤으며, 지난 4년간 논의해온 비정규직 관련 법안을 어떠한 형태로든 법제화하겠다는 뜻을 강력하게 내비쳐왔다. 정부가 준비하고 있던 비정규직 보호입법은 파견업종 확대, 특수고용노동자 기본권 제한, 기간제 기간 확대 등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개악안이며 일부 차별해소 방안은 매우 미흡하고 실효성이 없는 법안이라는 점은 확실했다. 파견법 개악으로 간접고용 중간착취를 양성화, 제도화하고 기간제 법안 제정으로 기간제 노동자들을 양산하고 차별을 영구화할 뿐 아니라, 지난 4년간 노사정위에서 논의되어왔던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권리보장에 대한 부분은 완전히 누락된 채 또다시 노사정위로 넘겨지는 등, 이번 정부의 입법예고안은 노무현 정부의 반노동자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정부 재계의 움직임이 이토록 발빠르게 진행되고 있었고 그들이 준비하는 개악안 내용이 엄청난 것이었음에도, 민주노조운동진영의 정세인식은 한마디로 '안이함' 그 자체였다. 특히 2004년 1월, 새롭게 민주노총의 지도부로 들어선 이수호 집행부는 "문제가 많은" 기존 노사정위원회와 다른 새로운 사회적 교섭구조를 만들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하고 있었다. 민주노총이 정책 제도개선 요구를 관철시켜 나가기 위해선 사회적 교섭구조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민주노총 지도부가 의지를 표명하자, 노사정위원회 개편 내지 '새로운 노사정 대화의 틀'을 만들기 위한 노사정 간의 논의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논의의 주역은 5월 31일 청와대가 주재한 노사정 토론회를 계기로 만들어진 '노사정 대표자 회의'인데, 그 회의는 이수호 민주노총 위원장,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 이수영 경총 회장, 박용성 대한상의 회장, 김대환 노동부 장관, 김금수 노사정위원회 위원장 등 6인으로 구성되었다. 엄청난 노동법 개악안이 준비되던 시점에 민주노조운동진영은 '새로운 노사정 대화 틀'이라는 사회적 교섭구조를 둘러싼 논의에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비정규직 내부에서는 광주 금호타이어 불법파견 정규직화투쟁과 타워크레인기사노조의 투쟁 등 스스로 비정규문제를 사회 쟁점화시키고 전선화하려는 노력이 진행되었지만 여전히 전체운동 차원에서 보자면 '비정규문제'는 "중요하긴 하지만 내 고민과 노력이 선뜻 가지는 않는 문제"로 인식될 뿐이었다. 열린우리당 점거농성, 총파업에 불을 당기다 9월 초, 정부와 여당이 '파견법 전업종으로 확대' '기간제 사용기간 3년으로 확대' 등 최악의 노동법 개악을 당정협의를 통해 진행하려는 정황이 포착되자, 그제서야 양대노총 위원장이 이부영 의장을 항의면담하는 등 민주노조운동진영에 '비상'이 걸리기 시작한다. 양대노총 위원장의 항의방문을 받은 이부영 의장은 '노 사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한 공청회를 추진하겠다'고 약속하였고, 그에 따라 9월 16일 열린우리당 대회의실에서 공청회가 열리게 되었다. 양대노총과 시민사회단체가 주관한 차별철폐 대행진을 오후 1시에 마치고 행진에 참석했던 비정규노조 간부와 조합원들 다수가 공청회에 참관을 하게 되어있었다. 그런데 노동부 측의 기조발제 직후, 비정규직노조 대표자 15명을 비롯해 40여명의 비정규노조 간부와 조합원들이 2층의 당 의장실로 들어갔다. 기습 점거농성에 돌입한 것이다. "노동법 개악안 즉각 철회!"" 비정규직 권리보장 입법쟁취!" "노동3권 보장 등 노무현 대통령 비정규직 대선공약 즉시 이행!" "이 모든 요구사안을 해결하기 위해 당 의장 및 대통령과의 직접면담!" 비정규노조 대표자들이 벌인 점거농성이라는 고강도투쟁은, 그동안 노동법 개악에 맞선 민주노조운동진영 내부에 엄청난 호소력을 발휘했고, 하반기 노동법 개악안을 저지하기 위한 투쟁을 가장 핵심적으로 벌여야 한다는 인식의 확산을 가져왔다. 농성 4일차인 19일, 농성장을 찾은 민주노총 이수호 위원장은 점거농성투쟁을 두고 "정부의 개악안에 맞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가장 적절한 투쟁이었다"고 평가했다. 그 자리에서 민주노총 지도부는 농성단의 요구를 최대한 받아안고 총파업 조직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처음으로 밝혔다. 또한 이수호 위원장은 사회적 교섭 혹은 사회적 대화에 대해서도 "쓰레기같은 개악안이 나온 상황에서 사회적 대화 노력은 의미없다"는 선언을 하기도 했다. 농성 6일차인 21일에는, 전국의 지역일반노조를 비롯한 비정규노조 및 지역본부 간부들의 열린우리당 시도지부 동시다발 점거농성이 진행되었으며, 같은 날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에서 민주노총 대의원들은 "파견법 개악안 국회 상임위 상정시 총파업"을 만장일치로 의결하기에 이르렀다. 농성 7일차인 22일, 농성단은 열린우리당 이부영 당의장을 면담하고 "노동부의 입법안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노사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여 입법안을 만들겠다"는 등의 답변을 끌어내고 농성자에 대한 사법처리 문제에 대해서도 "하지 않겠다"는 답변을 명확하게 받아낸 후에 일주일간의 점거농성을 해제했다. 비정규노조 대표자들이 벌인 일주일간의 점거농성은, 단순히 비정규직 노동자만의 이해가 아니라 개악안이 핵심적으로 노리고 있는 '정규직의 비정규직화'에 문제제기를 하는 등 1,400만 전체 노동자의 이해와 요구를 내걸고 비정규직노조의 대표자들이 구속과 희생을 각오한 선도투쟁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무엇보다 중요한 성과는, 노동법 개악안의 심각성에 비해 긴장감이 걸리지 않고 안이한 정세인식 속에 빠져있던 민주노조운동진영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이며, 답답했던 노동법개악 정세에서 민주노총의 총파업투쟁 결의를 이끌어내는 등 후련한 파열구를 낸 투쟁으로 기록될 것이다. 비정규직 최초의 정치파업과 국회 타워크레인 농성 민주노총의 총파업 돌입 이전인 11월24일, 전국의 비정규직노조가 일제히 간부파업에 돌입하고 국회 앞으로 상경투쟁을 전개했으며, 비정규노조 대표자 20여명의 집단삭발과 1천여 명에 달하는 비정규노조 간부들의 구속 해고 결단식을 가졌다. '결전의 날'이었던 11월 26일, 민주노총 총파업투쟁에서 건설운송(레미콘)노조와 타워크레인기사노조를 필두로 레미콘차량을 동원한 상경시위 등 위력적인 파업전술을 구사하며 건설현장을 마비시키는 총파업투쟁을 전개했다. 사내하청노조들은 정규직노조와 함께 원하청 공동총파업에 돌입했다. 전국비정규연대회의가 전개한 24일 간부파업과 26일 총파업투쟁은, 민주노조운동 역사상 비정규노조들이 전체 노동자의 이해를 걸고 벌인 최초의 정치총파업으로 기록될 것이다. 또한 민주노총 총파업 돌입과 동시에 시작된 비정규노조 대표자 4명의 국회안 타워크레인 고공농성은 자칫 정부 개악안 유보로 전선이 흔들릴 수 있었던 정세 속에서, 민주노총의 총파업투쟁전선을 "개악안의 유보가 아닌 완전 철회"와 "비정규권리입법 쟁취"라는 성격으로 명확히 하는 계기였다. 아울러 비정규'보호'입법이라는 미명 하에 마치 비정규직을 위한 법안인양 호도하고 있는 노무현 정부의 사기행각을 폭로하고, "비정규직 당사자들이 정부 입법안에 가장 처절하게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온몸을 던져 선언하는 등 충분한 성과를 거두었다. 일주일간 지속된 타워크레인 농성단이 사수하고자 했던 것은 "개악안 완전 철회"와 "비정규권리입법 쟁취"라는 전국 노동자들의 투쟁전선이었고, 그들이 들고 올라간 현수막에 담긴 문구들은 열린우리당 점거농성단이 채택했던 것의 연장으로서 전체 노동자의 절실한 요구를 담고 있었다. 크레인 농성단의 요구에는 열린우리당 농성단의 요구에 한 가지를 더했는데, 그것은 "이주노동자 노동허가제 쟁취"라는 요구로서 가장 낮은 곳의 노동자 요구까지를 포함하려는 비정규노동자들의 투쟁정신을 보여준 사례라 할 것이다. 그러나 비정규노동자들 스스로의 노력과 기대와는 달리, 민주노총의 총파업투쟁전선은 정부 여당의 '유보'설 하나에도 휘청휘청댔던 것이 사실이다. 크레인 고공농성단이 희생을 각오하고 지키려했던 전선이 바로 '개악안 완전 철회와 권리입법 쟁취'였음에도 말이다. 민주노총, 개악안 유보 설에 금새 '휘청' 11월19일, 총파업 실행을 위해 긴급하게 소집된 민주노총 중집 중앙위원 합동수련회에서는 '무기한 총파업 전술'을 놓고 장시간 토론이 전개되었으나, 일단 26일과 29일 총파업 전술까지를 결정하고 나머지 구체적인 전술은 24일 투쟁본부 대표자회의에 위임되었다. 어느 사업장, 어느 연맹 하나 자신있게 "총파업을 밀어가자. 개악안 통과되면 다 죽는다"는 입장을 제출하지 못했으며, 서로가 "다른 사업장이나 다른 연맹 분위기는 어떠한가"를 묻는 불필요한 눈치보기와 책임 떠넘기기가 진행되었다. 11월22일, 양대노총 위원장이 열린우리당 이부영 의장을 면담하게 되고 면담 자리에서 당 의장으로부터 "일정에 쫓겨 비정규법안 무리하게 진행하지 않겠다"는 답변을 듣게 되자, 언론들 뿐 아니라 운동진영 내부에서조차 "총파업수위가 낮아질 것"이라는 전망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부영 의장의 발언은 법안이 잘못되었으니 폐기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유보' 발언에 불과한 것이었는데도 말이다. 11월24일 총파업투쟁전술을 결정하기 위해 소집된 투본대표자회의에서는, 26일 총파업 전술을 놓고 투본대표자들 사이에서 격론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19일 중집 중앙위 합동수련회에서 결정된 29일 총파업 전술은 거의 논의대상조차 아니었다. 투본 대표자들은 열린우리당 이부영 의장의 발언 한마디로 "개악안이 29일 처리유보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는 인식을 공유했고, 그래서 29일 국회논의를 지켜본 뒤에 투본 대표자회의를 열어 추후 투쟁전술을 결정하자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특히 금속연맹 측은 "하루 총파업을 진행하면 조합원들 출근률이 저조해질 수 있으니 6시간 파업을 통해 2시간 일한 후 전체 조합원을 파업대오로 모아 힘있는 파업집회를 진행하자"고 제안하였다. 결론은 금속연맹의 제안대로 '6시간 파업'이었다. 또한 11월 29일 투쟁 역시 '간부 상경투쟁을 통한 국회방청투쟁' 수준으로 투쟁수위는 뚝 떨어졌었다. 게다가 민주노총과 금속연맹의 핵심주력사업장인 현자노조의 경우 21일 대의원대회에서 "26일, 29일 주야 공히 전면총파업 및 27,28일 철야특근거부"를 투쟁지침으로 결정하였으나, 투본 대표자회의 결정이 있은 직후인 25일 오전 긴급하게 쟁의대책위를 소집하여 "26일 주야 6시간 파업, 29일 간부상경투쟁"으로 전술을 바꾸었다. 그뿐 아니라 27,28일 예정되었던 '철야특근거부'까지 철회하게 된다. 현자노조의 결정은, 비록 투본 대표자회의 결정사항에 따라 민주노총 지침대로 전술을 바꾼 형식을 취하고 있기는 하나, 결정된 철야특근거부 전술까지 철회함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높지 않은 현장의 투쟁열기가 가라앉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민주노총의 총파업투쟁의 핵심주력사업장이라 할 현자노조의 결정이기에 미치는 파장 또한 만만치 않은 것이었는데도 말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투쟁 11월 29일 국회에서 '유보 선언'이 되리라는 기대는 완전히 빗나갔다. 환경노동위의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간사(배일도, 제종길) 및 법안심사소위장(이목희) 모두 빨리 법안심사소위로 개악안을 넘기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부영 의장의 발언은 '립써비스'였고, 민주노총 지도부를 비롯한 투본 대표자들은 그 발언에 헛된 기대를 품었던 것이다. 물론 개악안이 곧바로 법안심사소위로 넘어간 것은 아니었는데, 29일 환경노동위 논의 결과는 "12월6~7일 공청회를 거친 후 의견수렴을 거쳐 법안심사소위에 회부한다"는 것이었다. 간단하게 말해 정기국회에서 통과시키지 않을 뿐 개악안의 국회통과를 위한 절차를 밟겠다는 선언인 것이다. 여기서 민주노총 지도부는 지속해서 정세인식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국회방청이 끝난 후 방청보고를 하던 이수호 위원장은 "개악안 연내처리는 저지했다. 동지들, 수고하셨다. 이제 권리입법 쟁취의 길로 나아가자"는 요지의 발언을 하게 되는데, 29일 환노위 논의는 결코 그렇게 해석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단지 물리적으로 정기국회 통과가 불가능해졌을 뿐 정기국회 직후 소집될 임시국회에서도 얼마든지 처리가능한 상황인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평가하기 위해, 우리는 이번 투쟁의 목표와 전선이 무엇이었는지를 분명히 확인해야 한다. 민주노총의 공식결정사항일 뿐 아니라 크레인 고공농성단이 온몸으로 사수하고자 했던 전선, 즉 "개악안의 완전 철회" 및 "비정규권리입법 쟁취"가 이번 투쟁의 목표라는 것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이 목표와 전선이 불분명해지는 순간, 정부 여당의 '유보가능성 시사'만으로 총파업전술이 흔들리고 말았다. 목표와 전선이 뚜렷하지 않는 이상, 계속해서 정부 여당은 단순한 '립써비스' 한마디로 민주노총의 투쟁전선을 교란시킬 수 있는 것이다. 결국 개악안을 저지하기 위한 실질적인 총파업투쟁은 내년 2월을 기약하며 유실되고 말았다. 물론 비정규연대회의는 출범 당시부터 지켜왔던 원칙, "비판을 앞세우기 전에 스스로의 실천을!"이라는 자세로 전체 투쟁전선을 다시 세우기 위해 비상한 각오로 임할 것이다. 연대회의가 아껴왔던 비판과 문제의식은, 아마도 2월 총파업투쟁을 경과하고 총체적인 평가가 이뤄지는 시점이 되면, 자연스럽게 연대회의의 실천을 평가하며 등장할 것이라 믿는다.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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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개월을 돌아보며...

  • 등록일
    2005/01/07 08:45
  • 수정일
    2005/01/07 08:45
참 내가 나를 돌아봐도 스스로 대견하다. 지난 3개월 건설일용직노동자로 노동현장에서 잘 일을 나갔다. 내가 건설노동자의 삶을 이해하기엔 삶이 너무 단초하다. 처음 일나간 현장에서 잡은 삽자루 손이 아렸고, 어깨에 맨 철근의 무게가 삶의 무게보다 무거워 힘이 들었고, 비오듯 쏟아지는 땅방울을 흘리면서 기뻣던 기억... 짧은 기간 동안의 경험이지만 그래도 나에게 최선을 다했다.


처음 게으름 피우지 않고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다짐을 해보았지만 아침 밀려드는 잠과 싸워야 했고, 일이 힘들어 때론 마냥 쉬고 싶어 주저 앉기도 했던 기간... 삶을 이어나가기엔 내가 너무 편안게 생활을 해왔음을 직시하였다. 노동은 신성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내가 직접 겪어본 노동(공장생활과 다르게) 결코 녹녹하지 않다. 오야지의 보챔이 ㅤㄸㅒㅤ론 짜증으로 들리고, 일머리를 몰라 이리저리 바쁘지만 정작 일은 진척이 되지 않았던 기억.... 하나둘 알아나가고 몸이 일에 적응한 요즘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는 것이 아쉽게 느껴진다. 현장을 이야기하였지만 난 현장에 갈 준비가 덜되었던 것 같다. 오산을 중심으로 여러 곳을 둘러볼 수 있었다. 일도 다양하게 하였다. 목수/쓰미(조적)/미장/철근 대모도도 해보았고, 도로 표지판을 붙이는 일도 해보았고, 공장 철거하는 일도 해보았고, 공장에 나가 박스 무게를 밴딩하는 작업을 하며 서 있는 것 자체가 힘들다는 것을 느껴보았다. 힘으로 하는 일을 뭐든지 닥치는데로 하면 잘 할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노동도 경험에서 나오는 숙련의 반복임을 깨닫고 가냘픈 몸으로 일을 하는 그 분들이 경이롭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기간 일을 나가 마신 술도 박스로 대략 4상자는 될 것 같다. 평상시 먹었던 술보다 많은 술을 먹고 술에 취해 어찌어찌 다솜교회로 오는 날도 있었다. 그러나 이전 술 먹었을 때 기억과는 다르게 기분좋게 왔던 것 같다. 이전 술을 먹었을때 힘들어 기대고 싶었던 날들이 많아 술을 먹고 우두커니 내 집에 오는 그 길 왜 이리도 씁쓸하거나 쓸쓸했는지.... 가로등 골목에 켜 있는 불빛에 안식을 취하고 싶었던 기억들이 조각조각 나있던 그 때와 다르게 어찌어찌 왔지만 늘 기뻤고 격려를 받고 위로를 받았던 것 같다. 용역 아저씨들로 부터 받은 위로로 내 상처 조각들이 봉합이 되었다. 처음 힘들어 용역나가 무슨 일을 할까 두려움이 밀려드는 시간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저씨들과 어떤 일을 나갈까의 기대로 돌아서면서 참 행복하게 용역 사무실에서 우두커니 일을 기다리기도 하였다. 내 생애 30대 가장행복했던 기억들이다. 위로도 받고 격려도 받았다. 진심 어린 조언들도 많이 들었다. 살아갈 힘을 얻었다. 그 아저씨들과 엊그제 마지막 술자리를 하였다. 그런데 가슴한켠 뭉클하다. 아저씨들과 이후 만남은 이어지겠지만 난 비겁하게 아저씨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돌아섰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저씨들에게 진솔하게 대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아저씨들 참 고마웠고 죄송해요. 내가 뭐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렇게 되었네요. 제가 첫 상근비 받으면 아저씨들과 우리 중앙시장에서 한잔해요. 모리스 아저씨도 함께요. 늘 진심어린 말들 삶의 충고로 들으며 살아갈께요. 높은 곳보다 낮은 곳을 보면서 위안을 받기보다 주는 사람으로 살아가겠습니다. 아저씨들이 있었기에 제 짧은 기간 노동... 아름다울 수 있었습니다. 남들은 노동을 아름답다 말하지만 전 아름답지는 않다고 봅니다. 연실 마셔야 하는 시멘트 먼지... 용역이라 당해야 하는 그 서러움이 있지만 세상 아침이 있으면 저녁이 오듯 그렇게 시간이 지나 간다는 아저씨들의 말 교훈 삼아 살아가렵니다. 처음 잡은 삽자루가 손이 아렸던 아픈들 처럼 이렇게 아저씨들과 함께 웃고 떠들며 일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못내 가슴을 아리게 합니다. 그래도 중앙시장에 나가 아저씨들 찾아 갈께요. 아저씨들 술 조금 드셔요. 고마웠습니다. 정말로.... 아저씨들이 제 글을 볼 수는 없지만 내 마음입니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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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원CC에 가보았다.

  • 등록일
    2005/01/06 23:59
  • 수정일
    2005/01/06 23:59
한원CC에 법원에서 가처분 신청이 내려져 가보았다. 기간 농성하던 천막을 철거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왜 철거를 하여야 하는지 몰랐는데... 이유인 즉슨 철거를 하지 않으면 매일 200만원의 벌금이 부과된다는 소리를 들었다. 돈 앞에 무기력하지 않는 사람 어디있겠는가? 조합원의 한숨썩인 말이 귓가를 때린다. 혼자 죽지 못해 살고 있다. 저 놈들에게 이렇게 당하는 것이 서럽다는 말.... 한원CC 경기보조원 노동자의 자조섞인 말이 천막 철거하는 동안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노동자가 정당한 파업을 해도 법이라는 앞에 무기력하게 당해야 하는 사회. 상식이 통하는 사회라는 말이 나오지만 상식은 자본가들에게나 통하는 사회인가 보다. 법 또한 자본가들을 배불리 먹여주는 도구에 지나지 않음을 잘 알지만 장기농성투쟁을 하거나 파업을 벌이는 현장에서 당해야 하는 노동자의 입장은 어떠할까? 조합원의 말데로 죽지 못해 살아갈 수도 있다는 심정일 거라는 생각을 하니 소름이 돗는다. 한원CC 노동자들에게 처해진 현실이 이 땅 모든 노동자들의 현실이라는 것을 느끼지만 불평등하다는 생각이 든다. 작은 조합이기에 당해야 할 설움 또한 장기투쟁사업장에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노조원들의 단결된 모습에 위로를 받는다. 웃음을 잃지 않고 서로 격려하고 이 투쟁 반드시 승리해 사측에 당한 설움 다 갚아준다는 다짐의 소리가 위안이 되지만 그래도 가슴 한켠 후련하지만은 않다. 나야 지역현안이라 별 도움없이 천막철거와 나무가지에 있던 천 조각들을 걷어내는 작업을 도와주었고, 덤으로 밥과 술(막걸리 2잔)을 얻어먹었다. 그러나 이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노조원들 언제 해결될지 모르는 불안한 생활 속에서도 웃음 잃지 않는 여유로움.... 아마도 속이 다탄 후 얻은 해탈이 아닐까? 끝질긴 놈이 승리한단느 것을 보여주는 사업장이 되었으면 좋겠다. 언제 시간되면 한원CC 포장마차에 가서 조합원들의 겨울나기 도와주고 싶다. 내가 해줄 수 있는건 술을 팔아주는게 최선의 임무 같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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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날렸다.

  • 등록일
    2005/01/06 09:08
  • 수정일
    2005/01/06 09:08
어제 술을 먹었는데.... 하루를 날렸다. 낮부터 중앙시장 술집을 몇개 돌았고, 어찌어찌 다솜공부방에 와서 잠이 들었는데... 지금에서야 일어났다. 몸이 피곤하였던 모양이다. 잠 푹 잤다. 지금 몸이 여기저기 뻐근하다. 아무 생각없이 술에 취해 편하게 쉬었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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