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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3/30
    머리가 멈춘 것 같다.
    간장 오타맨...
  2. 2005/03/30
    노동운동이 되살려야 하는 것
    간장 오타맨...
  3. 2005/03/30
    아침
    간장 오타맨...
  4. 2005/03/29
    그 길을 지켜보며....
    간장 오타맨...
  5. 2005/03/29
    잡스러운 과거(2)
    간장 오타맨...

머리가 멈춘 것 같다.

  • 등록일
    2005/03/30 23:12
  • 수정일
    2005/03/30 23:12
머리가 모두 새하얀 지우개로 지워진 듯한 아무 생각도 느낌이 들지 않는다. 멍하고 아무 생각도 안난다. 결전의 날이 건만... 아자 담배 한대 피우고 차한잔 하고 힘내자... 주문을 걸어본다. 아자!아자!가자! 드디어 끝났다. 이제는 되도 그만이고, 안되도 그만이다. 1년 사업 방향성을 잡았다. 내 머리가 알고 있는 만큼 써내려 갔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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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이 되살려야 하는 것

  • 등록일
    2005/03/30 19:11
  • 수정일
    2005/03/30 19:11
** 이 글을 진보넷 블로거 중 한분이 올렸던 글인데... 디지털 말에 올라와 있어 그냥 또 올려본다. 내가 읽기 위하여.... 데스크 칼럼 이종태 기자 jtlee@digitalmal.com “저 공장도, 토지도, 건물도, 문화도, 무기도 우리의 것이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까지 나왔던 월간 『노동해방문학』의 뒷 표지에 새겨져 있었던 문구이다. 물론 여기서 ‘우리’는 노동자 계급을 의미한다. 이 잡지는 ‘노동해방’(사회주의)이란 ‘노예의 언어’를 사용하긴 했으되, ‘노동운동의 목표를 사회주의 혁명’으로 뚜렷이 못박는 선명성을 과시하면서 엄청난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그랬다. ‘80년대’ 대다수 노동운동가들의 꿈은 사회주의였다. 20세기 초 러시아 지식인들이 공동체 건설을 위해 농촌으로 들어갔다면, ‘80년대’ 남한에서는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로 규정한 운동가들이 공장으로 들어가 ‘변혁의 주체’인 노동자들을 만났다. 그들에게 사회주의 혁명으로 가는 길은 레닌 등이 교시한 대로 너무나 선명했다. 임금인상 등 노동자들의 처우개선을 위한 ‘경제투쟁’은 필수적인 것이었지만 거기서 멈춰서는 안 되었다. 노동자들은 이 경제투쟁을 통해 계급의식을 획득하고 궁극적으로는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정치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운동가들은 생각했다. “파업(경제투쟁)은 혁명(정치투쟁)의 학교”인 것이다. 그래서 노동운동은 80년대 내내 임금인상 등 처우개선을 위해 헌신적으로 싸웠다. 그 경제투쟁은 단지(!) 해당 기업 노동자들의 임금인상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주인 되는 참세상’을 앞당기기 위한 ‘예비적 투쟁’으로 설정되었다. 그래서 투쟁의 성과가 설사 해당 기업 노동자만의 처우개선에 그친다고 해도 그것은 ‘전체 노동자를 위한 싸움’이라는 ‘윤리적 확신’으로 이어졌다. 이런 자부심 덕분에 당시의 노동운동은 ‘자본의 앞잡이’들이 식칼로 옆구리를 찌르고, 감옥에 가두고, 때로 조직 내부에 프락치를 투입해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윤리적 확신과 자부심이 강한 만큼 투쟁은 치열했다. 이렇게 ‘80년대’는 해방 이후 줄곧 수세였던 남한의 노동운동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연대가 되었다. 이 시기 노동운동이 거둔 성과는 놀라울 정도이다. 노동운동의 치열성은 당시 3저호황과 맞물리면서 1987년을 전후한 3년여 동안 전체 노동자계급의 실질 임금을 100% 정도 올려 놓았다. 아이러니한 것은 사회주의자들이 이끈 ‘80년대’의 노동운동이 오히려 한국자본주의를 더욱 튼실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1980년대 중후반 한국경제를 주도한 것은 자동차, 아파트 등 내구소비재 산업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기업들이 쏟아내는 고가의 내구재 상품들이 팔릴 수 있었던 것은 노동자계급의 실질임금이 급속히 상승했기 때문이었다. 한국경제의 생산능력 확대와 임금상승이 맞물려 경제 전체적으로는 선순환을 이루었던 셈이었다. 심지어 1980년대 말 한국경제의 위기를 극복한 원동력은 내수의 급증이었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이다. 그러나 이런 ‘공로’와 별도로 남한 노동운동은 임금인상 이후 사회주의쪽으로는 한치도 나가지 못했다. ‘사회주의 혁명 노선’을 계속 유지해야 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단지 사회주의의 합리적 핵심인 ‘공공성과 사회적 연대’의 문제의식만큼은 놓쳐서는 안 되었다는 이야기다. 1980년대 이후 남한 노동운동이 잃은 것은 사회주의적 문제의식이었고, 간직한 것은 레닌주의적 노동운동의 과격성이었다. 이는 자기 기업 내부에서는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윤리적 확신'에 근거한 '치열한 계급투쟁’을 벌이지만 기업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무심하다는 비난은 이제 모함으로만 들리지는 않는다. 최근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기아노조의 채용비리나 민노총 대의원대회 폭력사태 등은 이런 관행의 연장선상에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개혁이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2005년의 대한민국에서, 밑천이라곤 몸뚱이 하나밖에 없는 노동자들은 모두 잠재적 피해자의 입장일 수밖에 없다. 오늘의 정규직은 내일의 비정규직이다. 그리고 유럽 복지국가들의 사례에서 보듯이 지금 뿔뿔히 분열된 남한 노동자들이 우선 ‘계급’으로 단결할 때 국가-자본과의 사회적 협약과 국민경제의 발전도 가능하다. 이를 위해서는 비교적 여유 있는 노동자들이 상대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놓인 노동자들에게 먼저 연대의 손을 내밀어야 할 것이다. 노동운동은 여전히 진보운동의 주요 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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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 등록일
    2005/03/30 11:18
  • 수정일
    2005/03/30 11:18
부시시한 얼굴로 일어난다. 내일까지는 아마도 그럴꺼다. 아침 새 지저귐을 듣고 일어난다. 참 청명한 소리이다. 창가로 비춰지는 햇볕은 따사롭게 사무실을 감싼다. 여전히 아침 아이들이 시끌벅쩍하게 달려온다. 라비(방글라데시, 울보), 짜니(필리핀, 개구쟁이), 해찬(어린이집 마스코트), 애지(새침때기 소녀) 오늘은 4명의 아이가 왔다... 장난감을 갖고 신경전... 어린이 집 선생님이 늦게 오셨다. 아이들 장난감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서로 울고불고 한다. 그리고 사무실 문을 열고 아저씨 하며 서러움을 드러낸다. 그러면 난 우는 아이를 달래기는 커녕 오산천(아이들의 공포의 대상인 내천.... 오산천에 데려가서 물에 빠트린다고 하며 장난을 친다. 아이들에게 수건을 쒸어서 슈퍼맨을 만들고 물에 빠지면 헹궈준다고 으름장을 놓고 아이들에게 말을 종종한다.)으로 데러가는 시늉을 한다. 아이들 일제히 기겁하고 도망친다. 그러면 사태는 평정.... 어제 써놓은 프로젝트 문서 오타가 없나 수정한다. 이제 5개를 마쳤다. 오늘 3개... 1개는 다른 사업때 신청하여야 겠다. 다음 국가인권위 프로젝트 개요가 있을 것이라서 그때로 미룬다. 문광부 2개, 행자부 2개를 마감하고, 오늘 문광부 1개, 행자부 1개 최종마무리 하면 된다. 이 고단함도 조금 나아지겠지... 어떤 사업이 컨텍될지 모르지만 그래도 돌머리 굴려가며 안되는 수학셈하며 하였으니... 최선을 다한 것으로 만족한다. 욕심부리지 않았고, 이주노동자들에게 무엇을 위한 것인가? 내 깐에 짧은 경험으로 최대한 그들에게 돌아갈 사업을 고민하였다. 다른 곳은 외형을 부풀리기에 여념이 없지만, 난 그들이 이 사업의 수혜자가 아니라 이후 당해자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 기틀을 지금 내가 대신하고 있을 뿐이다. 이후 수도권이주노동조합이 건설되면 이러한 사업에 대한 지원들을 위해 센터들이 나서주어야 한다. 그들이 운동의 주체로.... 그리고 지금 이주라는 딱지가 정착됐지만... 그 이주자를 빼는 운동을 이제 노동조합에게 주문해본다. 이주노동자가 아니라 이제 노동자라는 온전한 이름을 찾아주는 일을 우리가 나서서 해주어야 한다. 우리 그들로 인해 기울어져가는 민주노조운동의 정신을 찾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지원에 대한 총연맹의 무관심 또는 지원이 절실히 필요하지만, 이는 투쟁으로 일구어내어야 할 산물이기에... 투쟁을 통해 그들의 정당성을 안으로는 민주노총내에서 밖으로는 사회전반에 알려나갈 것이다. 이주노동자들의 들어온지 꼭 23년이 된다고 한다. 어느자료를 확인해본 결과.... 83년도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나 아마도.... 지금 외국인에서 이주로 바뀐것 빼고는 아무것도 없다. 정부는 각 국가별 MOU를 체결하여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관리감독을 한다. 그러나 이제 이 노동자들에게 자유롭게 노동할 권리 노동비자를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노동을 합법화 시켜야 한다. 이 길 또한 10년이라는 세월이 되어야 하나... 그러나 그 합법화 보다는 더욱 중요한 것... 그들이 이 땅에서 보고 느낀 것들에 대한 공유와 소통 그리고 이땅의 주인임을 우리 스스로 법테두리를 벗어나 인정해주어야 한다. 내 깐에는 최선을 다했다고 하지만.... 듬성듬성 부족한 부분이 많이 보인다. 내 인식이 닿지 못함을 탓해본다. 조금 나아지겠지... 올해 사업이 컨텍되지 않더라도 진행될 사업들이다. 올해 사업정리를 하였다 생각하고 지지고 볶고 함께 어울렁 더울렁 살아가보고자 한다. 아침 8시 햇살에 비친 햇볕이 참 따사롭게 감도는 날이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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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을 지켜보며....

  • 등록일
    2005/03/29 23:08
  • 수정일
    2005/03/29 23:08
* 이 글은 새민중언론님의 [미디어참세상의 전사(前史)를 기록하며 -뉴스메이커 22호] 에 관련된 글입니다.

시를 읽고 미디어참세상의 역사가 눈에 들어왔다. 참세상방송국, 참세상뉴스가 구분되어 진행되었을때 참세상방송국/참세상뉴스을 조금은 바온 터라... 카메라 깨먹고 그 카메라 보전하기 위해 일일주점을 하였을때 티켓을 팔아주고, 함께 약간 투쟁현장을 함께 나갔던 기억이 아른거린다. 노동넷에 있을때 참세상방송국과 참세상 뉴스가 서로 다른 단위로 움직일때.... 편집기를 대여해주고, 데크도 대여해줬던 기억.... 지금 지나고 나니 참 열악한 상황.... 일인 엔터테이너먼트와 활약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순간들.... 그늘진 이들의 벗임을 자처하던 참세상뉴스의 2명의 상근활동가의 노고와 자원활동 기자의 노고가 없었다면 지금의 미디어 참세상을 뛰어넘는 민중언론의 비전은 제시되지 못하고 말았을 것이다. 늘 밤샘작업은 다반사였고, 투쟁하는 현장이 발생하면 어김없이 달려가던 참세상 뉴스 기자의 노고 조금 지켜온 터라.... 그 활동이 잘되기를 바램해 본다. 함께 하였던 투쟁의 현장의 짧은 기억들... 노대를 함께 갔던 기억.... 재미났던 기억들이다. 그리고 철도노조 건국대에서 1박 2일 짧은 투쟁... 건국대 동아리방에서 잠자던 기억... 그리고 취재를 위해 왔던 참세상 뉴스 기자... 총파업 선언이후 한 5시간만에 역사적 총파업이 극적 타협이라는 이름으로 멈춰선 전국철도노조의 좌절된 꿈고 함께 보았던 기억... 굶주림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이러한 맥아리 없는 투쟁의 판을 보며 부푼 가슴 쓰러내리던 기자의 심정이지 않았을까? 건대를 빠져나와... 굶주린 배를 풀기위해 들어갔던 닭갈비집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카드 난발을 잘한 나의 장기이지만..... 뭐 그때는 사무를 관장하여 돈 관리를 하던 때라 돈이 없어도 활동비를 줄여서라도 먹을 것을 잘먹어야 한다며 먹었던 기억.... 그때 내 체구 때문에 철도노조 조합원에 잡혀서 린치를 당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그때가 벌써 시간이 지나 몇년 흘렀다. 아마 2002년도 였을 것이다. 이 사건 이후 발전노조 산개파업 38일이라는 기억이 난다. 난 민중언론이 되던 미디어 참세상으로 되던... 98년 출범하고 참세상이 만들고자 하였던 뜻.... 민중언론보다는 현장에서 뭍히거나 관심을 가지 않는 시선에 대한 사회화라 생각되어진다. 늘 누구나 가는 곳엔 기자들이 우굴대지만 참세상 만큼은 기자가 안가는 사업장을 골라 가면서 이 땅의 노동자 민중 계급들에게 이 사회의 불완전성과 자본의 위기 총체성을 알리는 언론으로서 아니 모든 노동자 민중 계급을 아우르는 언론으로서 다가가기 바란다. 입장보다는 그들의 정확한 뜻을 전달하고, 운동사회에 대한 잘못된 지점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직시하는 눈으로서 매김하기를 바램해 본다. 민중언론이라는 것은 어찌보면 기간 참세상방송국과 참세상 뉴스에 복무하였더 많은 활동가들의 노고 였을 것이다. 참세상뉴스와 방송국 활동하던 이들은 활동가이며, 액티비스트 였지만 투쟁하는 현장에서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무수한 고민과 번민으로 쓰린 속을 다스리거나 술로 위로하던 활동가들이었다. 활동비가 거의 교통비로 소진되는 활동을 진행하였던 그들.... 돈보다 활동이 좋아 모였던 분들... 이땅에 미디어 운동 그리고 방송국이라는 작지만 큰 의미를 실천하기 위해 먼저 나섰던 길이 있었기에 지금 스트리밍 서비스와 텍스트 기반인 멀티미디어 환경에 대한 시선을 다수에게 알려나갈 수 있었다. 획득한 것이 아니라 서서히 쟁취한 참세상의 저력이라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98년도 부터 시작한 많은 활동가들이 함께 이길에 서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내가 알고 있던 많은 분들..... 칼럼보다는 사회적 시선과 함께하는 노동자 민중의 목소리가 더 많이 자리를 차지하였으면 한다. 98년과 2002년도 비록 적은 인원으로 활동을 하였지만 현장의 목소리가 그래도 생생히 전달되는 언론이 었다. 텍스트와 미디어가 일정정도 상호보조적으로 매칭되었던 그 당시의 상황... 함께 술자리도 함께 하였던 기억... 그 당시 그래도 옆 사무실을 함께 사용하여 재미났었다. 이땅의 노동자 농민들이 공권력에 무참히 깨질때도 고정된 시선으로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쓰린 가슴과 복받쳐 오르는 분노를 가라 앉히고 활동가들의 마음을 읽어내거나... 자신의 입장을 말하며 참세상 뉴스에 대한 애착을 보였던 활동가들이 아직도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참세상방송국분들과는 자주 자리를 함께하지 못하였지만 그래도 참세상 뉴스 사람들과는 조금 어울리고 함께 술자리를 하며 어울렸던 기억이 난다. 진보넷 갈월동 숙대역 출구 앞에 생긴 훼밀리 마트에서 새벽 5시까지 마셨던 기억... 참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늦은 귀가 심야 좌석버스를 타고 가거나 술한잔 생각나면 함께 회의실에서 소주잔을 주고 받았던 기억들도 새록새록 난다. 그때 준비가 지금 민중언론으로 발전한다는 것은 발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발전이라 생각하는 길도 돌다리 두드리듯 한걸음 한걸음 걸어갔으면 한다. 그냥 참세상방송국과 뉴스가 나에게 있어서만큼은 최소한 낮선 공간이 아니다. 민중언론이라는 것이 새로운 발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난 외형과 새롭게 추진한다는 것보다 그 역사성을 이어나가는 길.... 사회성보다 사회 낮은 곳 사람들의 소소하지만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 그 곳에 민중언론이 다가갔으면 한다. 참세상의 정신은 낮은 곳에 투쟁하는 노동자 민중과 함께하는 방송이기에.... 참세상만 갈 수 있는 곳이기에.... 그래서 민중언론이 명명가들 몇몇 글보다 그 소소한 투쟁하는 이들의 글로 치장되기를 바램해 본다. 그러다 보면 명칭적 민중언론보다는 내용적 민중언론이 될 것이라 확신해 본다. 참세상방송국과 참세상뉴스 활동가들의 소금땀 내음과 어려운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지켜왔던 결과가 부디 잘되기를 소망해 본다. 아직도 힘들게 하는 미디어참세상 활동가들의 노고가 눈에 아른거린다. 아니 내가 봐왔던 참세상뉴스 지금 미디어국장의 소금땀의 결실이지 않을까? 생각을 가져본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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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러운 과거

  • 등록일
    2005/03/29 11:22
  • 수정일
    2005/03/29 11:22
도종환 시인을 시집과 산문집을 사서 읽거나 산문을 홈페이지에서 글을 읽는다. 사람이 살아나가는 방법을 제시해 준다. 가슴과 마음의 그릇이 큰 사람... 마음이 부자인 사람.... 도시생활이 어떠했는지 그냥 뒤로 하고 시골 한 공가에 집을 짖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이... 이 시인을 알게되었던 것은... 나와 동년내 시대를 살았던 이들이면 한번쯤 대해 보았을 시... 접시꽃 당신... 영화로 나왔다. 중학교, 고등학교때 사춘기라 멋부리고 그럴때 시가 눈에 들어오더니 나가지 않았다. 같은 짝을 이루던 짝궁이 읽었던 홀로서기, 접시꽃 당신, 그리고 김수영, 신동엽 등 시들 그때는 뭔 소린지 모르고 그냥 가슴이 아름답게 장식되었다. 따스한 봄길 시한수 읽고 길을 걷는데 혼자 취해 햇볕이 마냥 밝게만 보이고 온통 사람들이 환하게 보였던 그 시절.... 나도 그 당시가 존재하였음을 시라는 매개를 통해 각인한다. 살면서 때로는 힘들때 뒤를 돌아보며 회상을 한다. 간혹 그렇지 않고 현실에 머물고 정체되어 머리가 복잡할때도 많지만 그러나 되도록이면 뒤를 돌아보고자 한다. 그때 그래도 나에게 힘이 되는 것은 무슨 뜻인지 모르는 글자 뜻이 있으되 생각의 깊이에 따라 달리 다가오는 시와 산문... 수필들이 삶의 지표가 되는 것 같다. 그래서 고리타분한 책을 읽기전에 꼭 시집 한개를 읽고나서 읽으면 그나마 글 읽기가 수월해 진다. 지식을 담기보다는 지식을 인식하는 과정이기에 책을 마음으로 받는 자세가 중요함을 잠시나마 사고하게 된다. 시 읽기와 산문을 보면서 글을 쓴 이의 의도 또한 발견하다. 어찌보면 모든 책은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한 광장과도 같다. 그 광장을 갖고 마음을 나눌 수 있다면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래서 글은 누구의 말이 아니 삶의 총체라 생각을 해본다. 오늘 도종환 글에서 오는 봄 그러나 그 봄을 이루는 소소한 생명의 귀함...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함께 살다 지는 존재임을 일깨워 본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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