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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3/17
    십일월의 여자, 아니 십이월의 여자(8)
    간장 오타맨...
  2. 2005/03/17
    나를 위한 한 시간(2)
    간장 오타맨...
  3. 2005/03/16
    민주노총은 밑바닥 노동자들의 희망이었다. 그러나 지금도 그럴까?
    간장 오타맨...
  4. 2005/03/15
    술한잔을 하다.
    간장 오타맨...
  5. 2005/03/14
    정세전망을 보면서 드는 현상들...
    간장 오타맨...

십일월의 여자, 아니 십이월의 여자

  • 등록일
    2005/03/17 10:52
  • 수정일
    2005/03/17 10:52
* 이 글은 <엄마...>게시판 가기님의 [여성이 되다(뉴스앤조이 기사)] 에 관련된 글입니다.

** 도종환 선생님의 사이트에서 본 글이 알엠님 글과 매치가 되어 옮겨봅니다. 전 되려 사역자이신 분의 글이 이 글과 대치되어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되려 부럽게 다가옵니다. 자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그러나 그렇지 못한 무수한 여성들.... 가부장이라는 사회 제도라는 틀에서 억매여 있습니다. 제가 느끼지 못하는 것을 말할 수 없음이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여성으로서 지금도 삶을 콘트롤 할 수 없는 사람들..... 누군가 삶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렵고도 쉽습니다. 그러나 현재 그 삶이 자신의 삶이 아니면 이해는 그만큼 반전된다고 봅니다. 삶은 현재진행형이기에... 자주가는 도종환 선생님의 이전 글에서 쇠망치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는데... 알엠님 글과 매치가 될 것 같아서 훔쳐 놓아 봅니다.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온 산의 모든 나무가 잎이란 잎 다 떨구고 가진 것 다 잃어 황량해진 십일월 하순 같은 여자. 산뽕나무 잎이랑 두충나무 잎 군데군데 푸른 잎들도 있었는데 그것들마저 어느 날 한 순간에 다 지고 산천은 갑자기 잿빛의 겨울 풍경으로 몸을 바꾸고 말았는데 인생이 그런 잿빛 풍경 같은 여자. 하루가 다르게 기온이 뚝뚝 떨어지고 문바람 스며 들어와 방안도 썰렁하고 자면서도 어깨가 시려 뒤척이는데 그런 냉기 속에서 일생을 산 여자. 십일월의 여자. 아니 십일월에서 십이월로 옮겨가듯 그렇게 살아온 여자. 그 여자는 "육지 것하고 붙어먹은 년"의 딸이었습니다. 새 아버지는 엄마와 딸을 그렇게 욕하면서 모질게 대했습니다. 일곱 살 된 딸이 있는 여자라는 걸 알고 같이 살자고 해 놓고서도 툭하면 그렇게 몰아부쳤습니다. 낳아주신 아버지는 전쟁 중에 군인들을 훈련시키러 온 군인이었습니다. 엄마를 데리고 한동안 살다가 육지로 가버렸습니다. 가서는 영영 소식이 없었습니다. 생부의 얼굴을 모르는 딸은 씨다른 동생을 업어 키웠습니다. 소 부리듯 일을 시켰지만 보리죽 한 그릇도 배불리 먹여주지 않았습니다. 광목치마 한 겹으로 엄동설한을 낫고 내복 한 벌 못 입어보고 나일론 양말 한 번 못 신어본 채 동상으로 손발이 얼어터지곤 했습니다. 새 아버지의 구박을 견디기 어려울 때면 어머니는 딸을 데리고 고아원으로 갔습니다. 그러다가 고아원 문 앞에서 붙안고 울다가 되돌아오곤 했습니다. 친구들은 교복 입고 학교 갈 때 호미 들고 밭으로 갔다가 밤이면 야학당을 다녔습니다. 고단한 몸으로 한밤중까지 숙제하다 깜빡 잠이 들었는데 쥐라는 놈이 문틈으로 튀어 들어오다가 등잔불을 떨어뜨렸고 겁이 난 그녀는 어머니의 매질이 무서워 싸락눈이 내리는 새벽 집을 떠나왔습니다. 그리곤 남의 집 식모살이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중풍으로 휠체어에 의지해서 지내야하는 그 집 주인 사장님 병수발을 하고 다른 식구들은 못 알아듣는 사장님의 말을 그녀는 알아듣고 전달해주곤 하였습니다. 병수발 임무를 맡으면서 바깥에서 오시는 손님들에겐 딸 역할을 했고 그 몇 년은 그래도 행복하였습니다. 사람을 대하는 예절과 법도도 배웠고 옷도 좋은 옷으로 입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 아들이 가까이 다가오고 마침내 사랑고백을 해오고 그런 상황을 견딜 수 없어서 집을 나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미친 듯 아버지를 찾아 헤매었습니다. 아버지를 꼭 만나야 할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를 찾아야 자기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고향이 경기도라는 것과 최아무개 중사라는 이름만 가지고 병무청을 찾아가서 거머리처럼 매달렸고 온갖 데를 다 찾아 다녔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병이 들었습니다. 죽을 병이 들었고 삶을 포기했습니다. 죽기 전에 꼭 한 번만 어머니를 보고 싶어서 있는 돈 다 털어 제주로 내려가 어머니 집 문 앞까지 갔습니다. 딸을 버린 어머니였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어머니여서 죽어가는 딸을 버리진 않았습니다. 식모살이 하면서 부쳐준 돈으로 어머니는 땅을 사놓으셨습니다. 그 땅 얘기가 나오자 의부는 그녀가 마시려는 약 그릇을 발로 걷어찼습니다. 문짝을 부수고 어머니를 두들겨 팼습니다. 그녀는 또 떠나와야 했습니다. 그래도 딸이라고 양은솥에다 굼벵이를 달여 먹여가며 살려보려고 애쓴 어머니 힘인지, 병상에서 눈물로 기도해준 이름도 모르는 수녀님 덕인지 겨우 목숨을 다시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고아 아닌 고아로 자라 근본도 없는 게 어디를 넘보려 하느냐고 첫사랑은 실패로 끝이 났고 아이 둘이 있는 홀아비한테 시집을 갔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 시골집에 갔다 오는 길에 옛 애인 집에 들러 취하도록 마시고 오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덧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결혼한 지 채 일 년도 못 되었는데 말입니다. 낳은 지 50일밖에 안 된 딸을 안고 그녀는 통곡했습니다. 자기가 낳은 아이든 아니든 제 자식처럼 키우려고 노점 행상을 하며 손발이 터지도록 일했습니다. 그런데 교통사고 당한 후 아이들 앞으로 나오게 만든 보험료가 있는 걸 알고 시아버지는 그걸 당장 현금으로 내놓으라고 난리를 쳤습니다. "서방 잡아먹고 전실 새끼 피까지 빨아먹는 년"이라고 욕을 퍼부었습니다. 살기 등등해져 온갖 욕을 하며 짐승처럼 괴롭히는 상황을 견딜 수 없어 보험을 시아버지 앞으로 다 인계해주고 딸 하나 데리고 나왔습니다. 일곱 평밖에 안 되는 작은 꽃가게 한쪽에 주방 겸 잠자리를 만들어 거기서 살았습니다. 시아버지는 쌀 두말과 그 여자 앞으로 들어왔던 조의금 빈 봉투 50여 장을 주고 갔습니다. 우는 아이와 함께 며칠을 그냥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이의 울음소리마저 들리지 않아 정신을 가다듬고 마른 젖을 물렸습니다. 젖은 말라버려 나오지 않았고 둘러보아도 먹을 것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기운차리라고 돈 얼마를 놓고 가기도 했습니다. 가게는 점점 기울고 월세는 밀려 거리로 장사를 나왔는데 시아버지가 찾아왔습니다. 아들이 결혼자금으로 얻은 농협 빚 갚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거기다 그녀가 처녀 때부터 운영하던 꽃가게가 당신 아들 것이라며 월 20만원씩의 생활비까지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식 둘 있는 아들 장가보내면서 방 하나 얻어주지 않고 결혼 자금으로 얻어 쓴 빚까지 과부가 된 며느리한테 갚으라는 시아버지였습니다. 요구대로 하지 않으면 술을 마시고 와 쌍욕을 해대고 장사를 망쳐놓곤 했습니다. 나중에 시가 친척 한 분이 그녀를 붙잡고 우시며 하는 말을 듣고 알았습니다. 땅 부자인 그 집에서 맏며느리인 그녀를 제쳐놓고 재산을 분할하는 것에 대한 꺼림칙함 때문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시댁의 재산권을 포기한다면 여자도 단독으로 호적을 가질 수 있었고 그렇게 해서 일가를 창립하여 나왔습니다. 남자 복이 없어도 어쩌면 이렇게 없을 수 있는지 혼자 사는 그 이후의 삶도 순탄치 않았습니다. 스토커처럼 따라다니던 남자가 있었는데 뱀보다 더 싫은 그 남자를 피하는 길은 재혼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여 자기를 돕겠다는 남자가 있어 서둘러 그 남자의 청혼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남자 사기꾼이었습니다. 남편의 교통사고로 인한 보상금이 두둑한 것으로 착각했다가 뺑소니 사고였다는 것을 알고는 머리채를 잡아끌고 법원으로 갔습니다. 두세 달만에 끝나고만 결혼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청혼을 받아주지 않으면 자결하겠다는 목사를 만났지만 그 결혼도 실패로 끝나고 말았고 그녀는 다시 혼자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도시 생활을 접고 딸아이를 데리고 피반령을 넘어 산골로 내려왔습니다. 거기서 채소밭 일구고 꽃 심어 가꾸고 장애로 누워 있는 이들이나 의탁할 데 없는 사람들 돌보며 살고 있습니다. 골짝골짝 다니며 면사무소에서 수당 받고 하는 수급자 실태조사나 인구조사를 하거나 컴퓨터를 가르치기도 하고 찌개를 끓여들고 독거노인을 찾아다닙니다. 그녀가 이사 와 사는 회북면만 해도 스물 한 개 동네에 영세민이 100명이나 됩니다. 자기보다 더 힘든 인생들이 많아서 그들 때문에 바쁩니다. 모녀가 비둘기 같이 지내다가 딸 정이가 올해 고등학교를 청주시내로 가는 바람에 요즘은 혼자 지냅니다. 외롭지 않느냐고 물으면 외로울 시간이 없다고 말합니다. 고독은 자기를 성찰하게 했고 고독은 글을 쓰게 했다고 합니다. 고독은 아버지 대신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게 했고 고독은 버려진 아이들, 늙고 병든 노인들을 친구가 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고독은 더 이상 자기가 싸워야 할 적이 아니고 생활이 되었다고 합니다. 고독으로 잿빛이 된 십일월의 야산 같은 이 여자가 원고뭉치를 들고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녀가 있는 동네는 내가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습니다. 초등학교를 겨우 마친 터라 맞춤법에 맞지 않는 곳이 많은 그 여자의 글을 읽다가 나는 그 원고를 자주 밀쳐 놓곤 했습니다. 읽고 싶지 않은 날이 많았습니다. 읽다보면 너무 속이 상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팔자가 기구할까 어쩌면 운명은 이 여자에게 이렇게 혹독한 것일까, 그런 생각에 먹은 것이 잘 안 내려가는 날도 있었습니다. 이 여자의 인생 어느 부분을 떼어다 글로 옮겨도 절절하지 않은 구석이 없습니다. 대목 대목이 슬프고 가슴 저립니다. 혼자 딸을 키우며 눈물 흘리는 이야기는 너무 가슴이 아파 원고를 멀찌감치 집어 던져 놓았습니다. 이 여자가 만난 대부분의 남자는 이 여자에게 크나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제 욕심만 채우기에 급급한 남자들이었습니다. 무책임한 남자들이었습니다. 한 여자의 운명을 무자비하게 짓밟아 놓고 떠나버린 남자들이었습니다. 무책임한 아버지가 그랬고, 난폭한 새 아버지가 그랬으며, 황망하게 세상을 떠난 남편이 그랬고, 돈에 눈이 어두운 포악한 시아버지가 그랬습니다. 새로 만난 남자들도 모두 그를 이용하려 들었고 탐욕스럽기만 했습니다. 남자들 참 나쁩니다. 남자들 정말 못됐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걱정 되는 게 하나 있었습니다. 이 여자의 딸 정이가 엄마처럼 외할머니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남자들에게 당하고만 살아도 안 되고 모든 남자들을 적대시하며 살게 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좋은 남자를 만나 행복하고 따뜻하게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 여자는 남자들을 미워하고 욕해도 되지만 그게 딸에게 그대로 전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과 세상을 바르게 보고 인격적인 눈으로 대하며 인간적인 배려를 아는 사람을 만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 살 때 아빠를 만나러 간다고 들떠서 따라나섰다가 무덤 속에 아빠가 계신다고 하자 󰡒엄마 빨리 삼촌들 오라고 해, 아빠 꺼내서 빨리 병원에 가.󰡓그러면서 눈물 범벅이 되어 몸부림치던 아이, 사람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는 거라고 말해 주었더니 공원에서 놀다가 흙을 한 움큼 쥐고 들어와 󰡒엄마 이것도 아빠야?󰡓 하고 묻던 딸아이는 지금 시인이 되고 싶어합니다. 그 아이의 별빛 같은 감수성을 잘 키워주어야 합니다. 그런 시적 감수성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보고 사람을 따뜻하게 만날 수 있게 해 주어야 합니다. 엄마는 비록 십일월, 십이월 같아도 딸은 삼월 같이 살도록 해야 합니다. 삭막한 풍경의 끝에서 대나무들은 아직도 푸르게 출렁입니다. 사람도 황량한 사막 같은 인생을 살았어도 그 가슴 한가운데 푸르게 출렁이는 댓잎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여자도 인생의 십이월이 다 가기 전에 꼭 한 사람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길 바랍니다. 남은 생애동안 남자들로부터 받은 상처를 어루만져주며 정말 인간적인 따듯한 정을 나누어 줄 수 있는 마지막 한 사람을 만나게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하얗게 쌓인 눈 위를 다정하게 팔짱 끼고 걸어갈 수 있는 사람, 먼저 일어나 마당의 눈을 다 치우고 신발에 쌓인 눈도 탁탁 털며 조금 더 자라고 속삭여주는 사람, 부족한 부분도 허물이 될만한 습관도 말없이 덮어주며 따뜻하게 안아주는 사람, 아내의 딸을 제 딸 이상으로 사랑하며 키워주는 사람, 어깨가 넓고 등이 따뜻한 사람, 나누고 베풀 줄 아는 믿음직한 사람을 만나 두 사람의 사랑을 이웃에 나누어 주며 살아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꼭 만나게 되길 바랍니다. 지난 오십 년, 운명의 신은 이 여자에게 너무 가혹했습니다. 이 정도면 갚아야 할 전생의 어떤 업보도 갚았다 할 수 있습니다. 제발 이 삶의 모진 고개를 넘어 모녀가 봄이 되어 활짝 꽃피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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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한 한 시간

  • 등록일
    2005/03/17 10:27
  • 수정일
    2005/03/17 10:27
* 이 글은 갈막님의 [새벽에 걸려온 전화..] 에 관련된 글입니다.

** 도종환 선생 사이트(도선생도 훔쳐온 글임.)에서 글중에 훔쳐와 트랙백 걸어봅니다. 글 읽다 갈님의 게시판 글과 매치가 되어 트랙백 걸어봅니다.(자중해야 하는데 목련이 필때까지는...) 바위 위에 고요히 눈을 감고 앉아 있습니다. 고요 속에서 나도 없고 생각도 없이 있습니다. 내가 멈추자 시간도 멈추어 있는 것 같습니다. 나도 그냥 바위의 일부가 되어 앉아 있습니다. 바람이 골짜기를 따라 내려와 남쪽 언덕을 넘어 갑니다. 바람이 지나가는 길을 따라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나도 머리칼을 바람에 맡기고 앉아 있습니다. 바람이 아무런 막힘이나 걸림 없이 나를 지나갑니다. 내가 있다는 걸 어디에서도 느끼지 못하고 그냥 나를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나는 빈 밭처럼 있습니다. 갈지도 않고 일구지도 않고 씨를 뿌리거나 농사를 짓지도 않습니다. 몇 해에 한 번씩은 그냥 밭을 밭으로 놓아두어야 할 때가 있는 것처럼 나도 나를 그냥 빈 밭처럼 놓아두고 있습니다. 이 흙의 몸속에서 계속 무언가를 수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에서도 밭을 풀어주고, 잠시도 멈추지 말고 거두어들이고, 거둔 것을 나누어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무감에서도 나를 놓아줍니다. 화엄의 숲에서 나와 해인의 초막으로 갑니다. 나무가 되어 다른 나무들과 함께 숲을 이루고 그 숲 안에 대동세상을 만들어 가고자 지난 몇 십 년 가슴 벅차고 힘들고 기뻤으나, 심신에 병이 들어 쫓기듯 해인을 찾아 갑니다. 해인. 바닷물에 과거의 나, 현재의 나, 미래의 나까지 다 비쳐 해인이려며 풍랑이 가라앉아야 합니다. 번뇌의 물결, 지나친 욕심의 파도, 끝없는 밀려오는 소유에 대한 집착, 헛된 명예와 허영에 매달리는 어리석음의 밀물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고요하고 고요해진 바다에 맑은 내 얼굴이 초승달처럼 비칠 때 그 해인의 삼매에서 다시 화엄의 세상을 향해 몸을 돌려야 합니다. 본래 화엄의 큰 눈을 뜨기 직전 가장 깊은 순간이 해인입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 해인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화엄의 문을 열고 나와 해인을 향해 길을 나섰으나 해인에는 이르지 못하고 이렇게 산중턱에 앉아 있습니다. 나뭇잎을 쓸고 가는 바람소리가 물결소리 같습니다. 바람소리가 철썩이며 숲 위를 지나갑니다. 나무들도 버려야 할 것이 있는 걸까요. 그래서 저렇게 철썩이고 있는 걸까요. 나무들도 탐욕스러운 데가 있을까요. 나무들도 살기 위해 분노하고 다른 나무들을 해치고 그럴까요. 저만 살려하다 제가 먼저 쓰러지는 어리석은 짓을 할까요. 그렇다면 나무들도 업의 윤회에서 자유롭지 못할 겁니다. 칡넝쿨을 치렁치렁 매달고 있던 나무, 다래넝쿨에 감겨서 자유롭지 못하던 나무, 으름덩굴을 제 열매처럼 달고 잠시 허영의 계절을 살아가던 나무들은 겨울에 폭설이 내리면 바로 그 넝쿨을 버리지 못한 것 때문에 넝쿨그물 위에 눈덩이를 짊어지고 있다가 그 무게에 눌려 가지가 부러지거나 꺾이는 걸 보았습니다. 그런 걸 보면 나무도 다 저마다 두터운 제 업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에 비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나무가 욕심을 지니고 있다하더라도 사람처럼 탐욕스럽지는 않을 겁니다. 아무리 나무들이 어리석다 할지라도 사람들처럼 어리석지는 않을 겁니다. 제가 잘 되기 위해서라면 어떤 모함도 술수도 모략도 폭력도 다 동원하는 사람들처럼 모질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 사람들도 고요히 돌아와 앉아 자신과 만나는 시간을 하루에 한 시간씩만 갖는다면 부끄러움도 알고 뉘우칠 줄도 알 겁니다.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깨끗하고 아름다워지게 하기 위해 하루에 한 시간씩만 투자할 수 있다면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정신적으로 풍요로워지고 넉넉해진 사람이 되어 하루를 살 수 있을 겁니다. 지금보다 내적으로 충만하고 값진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나는 그 길을 택하고자 합니다. 몸을 위해 그렇게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하루 한 시간 내적인 풍요로움을 위해 나는 이렇게 나를 고요 속에 맡겨 둡니다. 그러면 바람이 나를 맑게 씻어주고 부드럽게 매만져 줍니다. 햇빛이 내려와 내 안을 가득 채우고 따듯하게 합니다. 바람 속에 햇빛 속에 나는 지금 고요히 멈추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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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은 밑바닥 노동자들의 희망이었다. 그러나 지금도 그럴까?

  • 등록일
    2005/03/16 11:27
  • 수정일
    2005/03/16 11:27
* 이 글은 손을 내밀어 우리님의 [민주노총은 물리력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에 관련된 글입니다.

노동운동이 귀족화되었다. 자본은 늘 떠들었다. 그러나 그 면면을 살펴보면 2조 2교대(일명 주야맞교대)의 잔업과 특근을 빼고 고임금 노동자로 선동하였다. 대공장과 중소사업장의 차이는 상여금과 일급에 차이일뿐이다. 다 같은 노동자들이다. 그래 상여금과 일급이 차이가 나다 보니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는 우리가 만들어놓은 노사정 합의의 덫이 아니던가? 어제 대대를 보면서 왜 이리도 부끄러운지... 투쟁하는 동지들의 모습이 한편 힘차게 느껴졌지만 무엇하나 제대로 만들어놓지 못하고 과거 동맹파업의 시기를 되뇌이며 왜 이렇게 노동운동이 맥아리 없어졌는지 한탄만 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지금도 현장을 돌면서 투쟁을 조직하자 외치는 수많은 동지들이 있음을 잘 알면서도 일부러 외면하였다.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 그래 왜 정규직이 나서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만들어 놓은 덫에 스스로가 나서기 어려웠던 것은 아닐까? 고용안정이라는 말에 누구나 자유로울 수 없는 현실... 정규직이거나 비정규직이거나 다 같은 노동자들이다. 엄밀히 말해 정규직 비정규직이라는 말은 자본에 의해 조장된 말이다. 그 자본에게 타격이 가할 것이 언론의 왜곡과 날조로 노-노 갈등이라고 부추기고 있다. 사회적 교섭안은 밑바닥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관심거리가 되고 있을까? 아니다. 그들은 늘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어떻게든 현장에서 살아 남기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렇다고 투쟁을 해보았자 신명이 나지 않는 판에... 술한잔의 취기에 돌아 개같은 세상이라고만 연거푸 말한다. 조합활동을 열심히 하였고, 세상의 주인이라 믿었던 과거 선배들은 그렇게 뒤로 돌아셨다. 그 뒤 돌아선 분들 그래 현 활동가들이 볼때는 낙오자라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난 다르다. 그분들은 운동을 하고 있지 않지만 부채의식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한때 투쟁을 희망으로 읽구며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을 송두리채 빼앗긴 사람이기도 하다. 현장에 들어갈 수 조차 없어 노점상을 하거나 상업을 해서 목에 풀칠을 겨우하며 살아가는 이들... 그러나 지금 사태를 보면 그 분들이 되려 부럽다. 욕심이 없었기에 순수했기에... 밑바닥 노동자들의 정서를 읽고 함께하였다. 최소한 인생을 걸고 투쟁한 분들이다. 책임이라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고 결단이라는 것을 함부로 지껄이지 않았다. 함께하였을 뿐이다. 그 결과로 그들은 건설용역, 노점상, 상인 등으로 삶을 이어나가고 있다. 노동자로서 삶을 이어나갈 기회를 박탈 당한 사람들이 많다. 입바름을 지껄이며 현장의 버거움을 조직화하지 못하고 희망이 없다고 돌아선 학출과는 다르게 그 현장 노조 깃발이 꺽일때까지 끝까지 지키던 분들.... 무기력하게 당했지만 그래도 그 때의 순간의 삶의 좌우명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정치를 하는 이들에 대한 불신으로 얼룩진 분들.... 그들이 밑바닥이고 민주노총의 골간이지만 지금 형태 그 정신을 잃고 썩어 문들어져 가고 있다.(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라 말한다. 그러나 난 그 맥락에 노동자 와 민중이 있는가? 반문하고 싶다. 있다손 치더라도 몇명 있는가? 민주노동당 면면을 보자 반 이상이 노동자 민중인가? 왜 노동자 민중정치세력화에서 밑바닥 노동자들은 당원이나 조직원 이상으로 치닫지 않은지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난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노동자들의 손에 의해 일구어져야 한다고 본다. 그들의 눈으로 그들의 손으로 그들의 투쟁으로 그들의 실천으로...) 답답하지 않다.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민주노총 지도부는 사이비(난 사이비라 지칭하고 싶다. 더이상 어떠한 말로 그들을 동지라 부르기 어렵다. 오늘 신문을 보는데... 가슴이 막혀온다.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참 갑갑하다.)이기 때문이다.(이 말을 하지만 난 정말 믿고 싶지 않다. 그러나 대우자동차 사태때 한노사연에서 사회적 합의주의를 외치면서 강성노조가 노동운동을 마치 망치고 있다는 자본의 이야기를 합리화 시켜주는 논의를 보면서 과연 노동자가 강성일 수 없는 조건이 빠져있고, 투쟁의 조건이 서유럽과 다른게 기계적으로 동일화시키고자 하는 모습에서 노동운동의 제도권 진입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살펴보면 노동조합운동은 강성이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이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다채로운 사업이 없고, 늘 벌어지는 현상을 쫓아올 결과이기 때문에 벌어진 현실이 아닐까? 그리고 전노협에서 그 모범으로 자리잡았던 조합원 대상의 교육이 사라짐이 아쉽다. 그 당시도 선진활동가 대회였지만 참여에 있어서는 조합원의 참여도 가능하였다. 이제 보다 조합원들을 위한 실질적 교육과 투쟁이 병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강성은 문제가 아니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투쟁하면서 그 힘을 발휘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소소한 투쟁이 큰 파도가 되지 않았던가? 이제 밑바닥 노동자의 삶을 봐야 한다. 함께가자 우리 이길이라는 것을...) 난 그래도 혹시나 혹시나 하였지만 그들의 의도를 추측하면 안되지만 난 그들이 민주노총이라는 것을 발판으로 정치권에 투신하고자 하는 사이비 노동자로 비춰진다. 그렇지 않고는 사회적 교섭안에 목숨을 걸지 않을 것이다. 비정규노동자들의 절규를 이처럼 쉽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사이비 노동자라 함은 노동자 정신을 잃었다면 그건 더이상 노동자가 아니다. 노동자의 투쟁이 언제 교섭으로 사회적 쟁점화를 시켰는가? 투쟁하기 어렵다. 왜 어려운지 한번 가슴 손에 얹고 생각해 보았는가? 조합원들을 대상화 시켰기에 벌어진 상황 아니던가? 임단협과 집회에 조합원 동원하는 것 이외엔 조합활동이 난무한 시기이지 않던가? 민주노총의 정신 그 투쟁의 역사는 대의원대회 결정으로 세워내지 않았다. 현장의 밑바닥 노동자들의 땀과 피 그리고 열사들의 투쟁으로 하나둘씩 세워져 나갔다. 그러나 민주노총 출범 10년을 갓 넘긴 지금 우리는 아주 오래된 과거로 그 눈물 흘려고 가슴의 아픔이 가시지 않는 상황들을 잊어버리고 만 것 같다. 지금 민주노조 사수의 시기를 넘어서 민주노조라는 깃발을 부여잡았다. 민주노조 깃발을 넘어서 밑바닥 노동자들의 정서를 위한 투쟁에 나서기 위한 조건이 성숙되었지만 선진노동자운동에 매몰된 나머지 선진노동자들에 의한 활동으로만 비춰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합원들이 신명나게 조합활동을 할 수 있는 바닥의 문화가 사라졌다. 개인의 취미로 모든것이 환원되어 활동이 이루어진다. 우리내 남아 있는 운동문화라면 뒷풀이 정도밖에 없지 않은가? 그 당시 어린 내가 현장에 가보았을때 신명나게 풍물을 치거나 신명나게 육자배기 가락을 읖조리는 조합원들이 있었다. 다들 잔업의 혹독함에도 노동조합활동을 위해 학습하고 함께 어울리던 그 당시 풍경... 선배들이 마냥 경이롭게 느껴졌다. 나도 그 대열에 꼭 참여하고 싶을 정도로 좋아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이러한 조건이 되어도 선동의 문구하나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조건으로 치닫는 현실이 부끄러웠다. 토론 그리고 선전 찌라시하나 속시원하게 다가오는 것이 없음이 안타깝고 우리내 조합원들이 할 수 있는 조건이 없음이 안타깝다. 아직도 선진노동자라는 깃발을 부여잡고 지도를 획득하여야 하는 시기인가? 아니다. 이제는 밑바닥의 정서가 무엇이고, 우리에게 놓인 화두는 무엇인가 곰곰히 생각해보자. 다양한 영역으로 노동운동이 분화되었다. 그러나 보자 그 영역이 분화되었지만 영역 하나하나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밑바닥 노동자들의 상태에서 이탈하고 있지 않은가? 난 노동운동의 위기의 시대라고 본다. 노동운동의 골간이 그 자리를 보전하기 힘든 상태이다. 조합원과 지도부의 소통의 문제일 수 있으나 일상화된 내용에서 지도부와 조합원과의 유일한 소통 창구가 임단협 이외엔 없다는 것이 답답하다. 소통과 연대를 말하지만 소통과 연대 또한 만만치 않은 일이다. 난 실패하더라도 총파업 한번 불질러 보고 그 조직을 다시금 추스리기 위해 몇년의 시련의 시기를 복구의 시간으로 갖는다 해도 의미있는 투쟁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큰 파업 이외엔 소소한 투쟁으로 일관하여 연대투쟁에 인색한 현실... 중소영세사업장 투쟁의 깃발이 꺽이면서 민주노총 조합원 수가 줄어들어도 아랑곳 하지 않는 현실.... 전체 노동자들의 문제이지만 한 개별사업장의 문제로 치부된다. 그렇다고 절망만은 있지 않다. 희망도 있다. 그러나 그 희망이 오래된다는 보장은 없다. 노동운동의 위기를 조장하는 구체적 내용을 파악하고 있지 못한 현실에서 왜 소통과 연대... 그리고 노동운동의 변화... 전체조합원들의 총의를 모으는 총투표 그리고 노동조합이 정치와 경제투쟁의 중심으로 나가는 길 등에 대한 모색이 무엇인지.... 고민해도 현찮을 판에 우리는 탁상공론으로 비춰지는 사회적 교섭안에 대해 왜 중요성을 부여잡고 있는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교섭이라는 것이 차선의 선택이지 최선의 선택인가? 그런데 뒤빠껴서 차선을 최선으로 주장하는 모습은 어떤 의미일까? 정부와 빅딜이라고 할 것인가? 정리해고의 칼날이 사업장을 가리지 않고 판을 치는데... 무엇으로 자본과 정권에게 요구할 것인가? 노동부가 과연 노동자들을 위한 편이었던가? 오산이라는 지역에서는 연일 이주노동자들이 강제추방 당하고 있고, 한원 CC 노동자들은 봄이 왔지만 본사앞 총력집중 투쟁을 전개하고 있고, 여타 많은 사업장들이 정리해고라는 내용으로 차츰차츰 현장에서 밀려나고 있다. 정규직의 삶은 이제 장미빛 미래이다. 자리보전 보다는 언제 현장에서 내몰릴지 모르는 불안정 노동자들이다. 이렇듯 우리내 노동자의 삶... 밑바닥 노동자의 삶은 고임금이다 살기 좋아졌다 이야기 하지만 쫓겨날 생각을 하면서 현장에서 불안한 하루하루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삶은 동일하다. 그러나 다른 것은 비정규직에 비해 상여금과 일급이 높다는 것이 그나마 정규직 노동자가 누리는 혜택이다. 이 혜택을 두고 노동귀족이라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모든게 꼬이기 시작한다. 밑바닥 노동자의 정서와 민주노총 지도부의 정서는 하나로 통하여야 하는데 하나로 통하지 않고 있음이 안타깝다. 대의원대회를 1주일 후에 다시금 개최하겠다. 이 소리는 감정에 대한 대응이다. 왜 날로 증폭되는 민주노총 조합원간의 대립을 지도부는 방기하는지 모르겠다. 지도부는 수습을 하여야 한다. 더이상 세력대 세력으로서의 대립이 그쳐져야 한다. 지도부는 당면 4월 투쟁의 계획을 세우고 이에 대한 활동을 전개하여야 한다. 사회적 교섭안은 즉각 폐기되어야 한다. 벌어지는 투쟁에 대해서는 방관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4월 투쟁에 있어 계획이 4월 1일이 부분파업 이외에는 결정 된 것이 없다. 4월 금방 다가온다. 이에 대한 조합원들의 힘을 결집이 필요하다. 지도부는 어제 조합원의 생각을 다시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민주노총이 만들어진 것이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는가? 다시한번 생각해보아야 할 때이다. 밑바닥 노동자들과 어떻게 함께하고 미조직 사업장들에 대한 방안이 더욱더 절실히 필요하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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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한잔을 하다.

  • 등록일
    2005/03/15 21:56
  • 수정일
    2005/03/15 21:56
언제 술 이야기를 끝낼지 나도 모르겠다. 그러나 오늘 좋은 술자리 였던 것 만은 틀림없다. 술 약속을 하였지만 늘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술을 피하던 터라.. 술약속을 더이상 미룰 수 없었다. 나보다 인생을 먼저 산 대선배 아니 아저씨와 술을 마셨다. 지금 59세의 나이를 먹은 분... 그러나 늘 웃음을 잃지 않은 한솔이 아빠, 제일이 아빠라 부르는 우리 다솜공동체와 함께하는 아저씨 한분과 간만에 교회에서 걸어서 10분이면 당도할 남촌 순대집에서 술을 먹었다.


노동운동에 대해 이해는 못하지만, 우리 다솜교회 담임목사님이신 오목사님과 총회 파견목사이신 장목사님이 하시는 일이라면 모든지 오른 일이라 생각하시는 분이다. 때론 입장이 달라 의견충돌을 할때가 간혹 있지만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금방 이해가 간다고 오늘 오목사님도 아니 장목사님도 아닌 나에게 고백성사를 한다. 음 술기운에 이런 이야기를 듣는 나로서는 당혹함이 들지만.... 그래도 좋은 아저씨를 얻는 느낌이다. 과거 국민학교때 읽었던 큰나무의 보은 같은 것과 맞물리고 키다리아저씨가 생각난다. 한 소녀를 위해 묵묵히 늘 지켜보면서 그 성장과정을 지키면서 커간 아저씨... 지금 생각해 보면 아이에게 사랑은 준 것만이 아니다. 키다리 아저씨도 세상을 맑게 살 수 있는 보은을 받은 대상이다. 아이에게 무한정 사랑을 주었다기보다는 아이들의 맑음과 창의력에 아저씨 또한 유년과 세상의 혼탁함에서 벗어나지 않았을까? 오늘 그런 만남이었다. 투박한 대화.... 내 시선은 이것이 인생이다라는 텔레비젼 화면에 고정되었지만 귀 만큼은 텔레비젼에게 내주기 싫었다. 그래서 귀는 쫑긋하고, 아저씨 이야기를 들었다. 살아가면서 느낀 이야기가 레코드 가사처럼 쉼없이 나온다. 난 무엇하나 기억할 것 없다. 한 인간의 역사를 듣기에 난 부족한게 많은 인간이다. 장목사님과 오목사님이 들을 이야기이다. 난 이런 이야기를 들을만한 인식도 마음도 가슴도 없는 그냥 사람에 불과하다. 그런데 넘쳐나는 이야기.... 기분은 좋았다. 나를 그렇게 믿어준다는 것이,,,, 이런저런 이야기가 계속된다. 아 참 나도 이런 따스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따스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 늘 나만을 위해 내가 추구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 달려온 삶... 그러나 그 삶은 나를 되려 옥죄여 온다. 인과응보이지... 뭐 다른 말이 필요있겠어.... 흐흐 이야기를 듣는 순간 무언가 가슴이 뭉클 함이 든다. 맞아 민중의 삶이 이런거지... 거대담론도 거대 욕망도 거대 포부도 없어... 단지 삶이 버거워 허우적일뿐이야... 그렇지만 무언가 좋은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죄의식에 사로잡혀 사는 이들... 조금 배부르면 나부터 찾는 그런 류의 사람과는 좀 다른 느낌... 그게 내가 같이 얼굴을 보고 인사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맞아 그런 사람들이 있었지... 난 왜 그동안 보지 못한거야... 그건 내가 마음이 번데기보다 못한 가슴을 가졌기 때문이야라고 내 가슴한편에서는 대답을 한다. 맞어 너 늘 새 가슴이었잖아 맞아 맞아 그래도 새 가슴에게 이런 좋은 사람이 생겼잖아 좋은 아저씨도 생겼잖아... 나 그래서 기분좋다 난 대답을 하였다. 모처럼 좋은 이야기를 들었다. 프라이버시라 들은 내용은 귀에 들어오자 마자 삭제... 기억해도 쓰지 않으련다. 그분이 고마우신 목사님에게 직접 해야 할 말을 산더미 처럼 풀어놓았기에... 난 그냥 방관자가 될련다. 혼나도 뭐 프라이버시로 일관해여지... 폐속 깊이부터 시작되는 막걸리 트름 참 기분좋게 느껴진다. 간만에 느끼는 청량음료 같은 트름... 배는 더부룩하지만 기분많은 만땅이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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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전망을 보면서 드는 현상들...

  • 등록일
    2005/03/14 13:59
  • 수정일
    2005/03/14 13:59
* 이 글은 해미님의 [05년 노동보건운동의 전망과 과제] 에 관련된 글입니다.

글을 보고 생각나는데로 글을 써본다. 1. 정세전망을 보면서 드는 느낌 조직노선과 정치노선이 명확하게 제시되는 시기가 지나서 그런지(아마 조직이라는 의미의 퇴색과 이론의 다양성이 인식에 있어서 어느 정도 장애요소로 다가오는 것 같다는 생각을 갖게한다.) . 정세 전망이라는 것 자체가 얼핏보면 다양한 내용들을 담고 있지만 속내를 들여다 보면 현상에 지나지 않은 글이라는 것을 느낄때가 종종 읽히는 것 같다. 뭐 그렇다고 내가 뭐 내용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소소한 투쟁에 대해 알고 있는 바도 없다. 다만 내가 바라는 것은 현상에 대한 구체적 접근은 지구화의 방식을 벗어나 일국의 상황과 일국을 둘러싼 자본의 지형변화 그리고 전국적 노동운동의 현장조건이 명확한 글들에서 활동의 구체성을 발현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가져본다.


2. 늘 동일하였던 초국적 자본의 대두와 한국 자본의 움직임. 맑스 시대의 산업자본주의 태동과 발전 국가독점자본주의 대두 그리고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의 소멸을 통한 초국적자본주의의 태동이라는 현상... 어느때 부터인가 초국적자본주의라는 등식은 WTO(다자간무역협상기구)의 출범으로 귀결된다. 다양한 영역에 있어서 WTO는 자본의 첨병으로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으며, 초국적자본의 맹아로서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대두 이전 아마도(1992년 초국적 자본의 대두시기 일본 한 진보적 학자가 창작과 비평에 쓴글이 내가 처음 초국적 자본이라는 용어를 접하였던 것 같다.) 우루과이 ROUNd 체제와 GATT의 붕괴로 인한 그 자리를 WTO를 통한 자본의 위기 심화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제시가 WTO를 필연적으로 출범시키고 이는 포디즘의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한국 또한 자본내에게 있어서 신경영전략이라는 용어를 통해 김영삼 정권이 그렇게 자랑하며 말하던 무한경제와 세계화(지구화)의 강조... 국경이 사라지고 자본에 있어 블록화 경제를 통해 동북아에 있어서 어떻게 허브국가로서 자본의 재편에서 우위를 점할 것인가가 화두였다. 이는 한국 천민자본에 의해 전문경영이라는 외형적 체제를 낳았으나 이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외형만 변한다고 하여 기업의 지배구조가 바뀌지 않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시기라 하겠다. 자본은 산업자본주의(신믹지 지배전략)과 국가독점자본주의(독점자본주의 구축시기), 신식국가독점자본주의(종속심화를 난 개인적을 지향하고 있음. 약화론에 있어서는 약간 다른 견해를 갖고 있음. 심화냐 약화냐의 주요한 투쟁... 그러나 인도네시아, 필리핀, 한국 등 동아시아 국가에서 나타난 신식국독자는 종속 심화의 태제의 외형을 보여주지 않았나 개인적 판단을 하게함. 그렇듯 자본의 종속성에 의해 동아시아 제3세계는 분명히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를 증대시켜 나가지 않았나 판단을 가져봄,)는 동아시아 지배구조를 미국 중심의 경제편제 중심으로 이끌어 왔음. 이는 기형적으로 군사독재를 낳게 하였으며, 미국의 동아시아 지배전략과도 무관하지 않음. 미국의 군산복합체 형태는 무기를 동아시아 제3세계에 팔아먹는 대신 제조업에 대한 소비시장을 미국에서 일정정도 해소하는 방안으로서 상호 협조적으로 제3세계 각국 자본의 발전을 용인하고 이를 견인하는 역활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IMF 당시 미국은 냉전해체이후 군비의 증가정책이 완화됨에 따라 일정정도 군산복합체 정책이 그 맥을 다하였고, 달러의 가치하락을 통한 지속적인 경제의 하락으로 인한 재정적자의 증가로 인해 경제가 어려움에 봉착함. 이를 극복하기 위해 미국은 동아시아 경제에 대한 시장의 위기를 금융자본이 조장하여 IMF 경제위기(금융위기)를 조장하여 태국, 인도네시아, 한국 등 동아시아 경제의 핵심축에 대한 일정정도 제재를 가하였다. 달러 방어에 있어 달러의 가치하락에 대한 방어를 하였던 한국은행은 달러 시장에 대한 인식의 미비와 부채탕감을 통한 동북아 허브국가를 지향하던 김영삼정부에 있어서는 크나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는 곧 노동운동에 있어서도 크나큰 타격을 가져다준 사건이 된다. 동북아 허브국가로서 블록화 경제의 중간적 매개로 하고자 하였던 김영삼 정권의 꿈은 IMF금융위기로 한계에 부딪치고 김대중 정권으로 이양된다. 김대중 정부는 금융위기 극복을 위한 방안으로 민주적 시장주의(자유 경제원칙)을 내세워 주식시장에 대한 외국인 지분한도를 상향하고, 공기업 민영화를 전격적으로 단행하고, 정리해고를 통한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단행한다. 이는 구조조정이라는 본래 의미를 상실하고 구조조정=노동자 해고라는 등식을 성립시킨다. 민주적 시장주의 경제를 위해서는 해고 요건을 완화하고 기업에 있어서 기업하기 좋은 나라의 풍토 조성과 외국인들의 주식시장의 진입으로 고갈된 달러를 채우기 위한 김대중의 자구책이다. 그리고 그가 누누히 이야기해온 민주적 시장경제의 원리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대우자동차, 제일은행, 그리고 정부가 갖고 있던 은행 주식비율을 해외에 팔거나 은행 민영화에 정부가 적극 나서게 되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렇듯 김영삼정권의 무한경쟁 시대를 대비한 신경영전략의 실패는 곧 포디즘의 실패라는 교훈을 갖고 왔으며, 김대중정부는 민주적 시장경제는 공기업 사유화 정책을 위반하고 공민영화 일방적 논리로서 시장을 선외하였다. 노무현 또한 민영화 논리에 있어서 김대중과 맥을 함께하고 있다고 본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신자유주의 노동유연화 정책은 별반 영국의 대처리즘(신보수주의)와 미국의 레이건 노믹스와 별 차이가 없다. 다만 다르다면 이전 미국을 달러화를 통한 통화정책을 통한 전지구 경제정책이 금융시장에 의해 조장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말은 이전 달러화의 통화전략과 미국의 자국보호정책 등 관세 덤핑 등이 세계 경제질서를 일정정도 유지할 수 있었으나(GATT체계와 ROUND체계에서는 가능), WTO 출범을 통해 시장개입력을 증대시키려는 선진자본(G8) 정상들은 블록화를 통해 분활 시장 지배전략으로 선회하였다. 동아시아의 경우 아태지역 지배권 강화를 그리고 유럽의 경우 EU출범을 통한 자체 블록경제를 통한 자본의 시장위기를 극복하고 있다. 그리고 공공재라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돈벌이로 만들어 놓았다. 대표적인 것인 문화산업의 증대와 IT라는 산업의 대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IT 산업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IT산업에 있어 컨텐츠를 고유자산으로 볼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가 화두이지만 이에 대한 미래산업으로서 가능성은 난 불투명하다고 본다. 이 또한 시장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대안일 뿐 포디즘 처럼 그 역사적 맥락은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 본다. 3. 노동시장의 변화 이주노동운동이 대두되어지고 있다. 한국산업의 단계가 중화학공업 중심을 벗어나 첨단산업으로 그 외형이 변하고 있다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난 그렇지 않다고 본다. 한국산업에 있어서 아직도 중화학공업의 중심성이 변화되지 않았고, 중화학공업을 통해 발전을 이루고 있다. 그룹의 지배 또한 중화학공업... 그리고 건설산업으로 인한 막대한 부를 창출하는 사회가 한국이라 본다. 아파트가 처음 좁은 땅 떵어리에서 국민들에게 집을 공급하기 위한 고육책으로 나온 정책이 강남의 아파트 투기열풍으로 기형적 현상을 가져왔다. 외국의 경우 증권을 통해 부자가 되는 사례가 많지만 한국의 경우 증권 즉 금융시장은 안정적 수입원을 창출할 수 있는 기재가 아니다. 무엇보다 동산과 부동산이 돈 벌이로 최고로 대우받고 있고, 아직도 신도시 건설을 하면 떳다방이 각광받는 사회이다.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산업의 차지율은 중화학공업에 비해 극히 미비한 수준을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한국 산업의 성장동력이라고 발표하는 산업자원부의 발표 그리고 정보통신부의 발표를 보면 하나같이 장미 빛 미래를 말하지만 여전히 한국을 움직이는 것은 중화학공업이다. IMF경제위기(금융위기)는 노동운동에 있어서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현대자동차노조의 노동조합 Open Shop으로의 전환은 큰 의미가 있다. 기존 노동조합 활동은 입사와 동시에 노동자의 의무로 작용하였지만, 선택적 상황으로 변화되나 보니 강성노조로서 남았던 노동조합의 활동은 일정정도 위기 단계에 이른다. 자신의 개인적 의사가 직접적으로 노조활동으로 투영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일정정도 노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간부들은 노조의 일상활동을 강화하게 된다. 이는 곧 정치의식의 하락으로 이어지며 노동운동의 정경투쟁을 교란하는 기폭제로서 활용된다. 노조전임자 문제 또한 중소영세사업장 노조에 있어서 조직률을 하락시키거나 와해 시키는 기폭제로서 악용되었다는 것은 잘 알것이다. 불안한 미래... 과연 정규직/비정규직이라는 용어가 타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는가? 생각해 보게 된다. 불안정노동자 즉 정규직/비정규직이라는 용어 그것은 노-노 갈등을 부추기고 서로의 차별을 내놓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엄밀히 말해 불안정노동자라 생각되는 것은 IMF이후 종신고용이 종결된 상황에서 직접고용이나 파견제 고용이나의 차이로 정규직/비정규직을 가르는 기준은 맞겠지만, 전체가 다 불안정 노동자라는 인식은 맥을 같이 하지 않은지 한번 생각해 봄직하다. ERP/ERM 등 전자적 장비의 등장으로 인한 노동자에 대한 작업장 감시문제... 작업장 감시는 인사고가 정책의 올바름을 위해 도입된다는 입장을 갖고 현장에 광범위하게 도입되었다. 교육현장에서는 도입은 되었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전교조에서 투쟁하여 NEIS에 대한 올바른 운영방안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도입에 있어서는 저지를 하지 못하였다 개인적으로 평가한다. 정보인권이라는 말이 네이스 투쟁을 통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만 난 개인적으로 작업장 감시(노동자 감시라는 목적을 이용하지만 이는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생산수단의 포괄적 변화는 작업장의 변화를 의미하기에 외국에서 차용하는 작업장 감시가 용어로서는 적절하다고 판단한다. 노동자 감시라는 말은 노동자들에게 위험성을 알리기에는 의미전달로서는 올바르지만 감시기재의 변화는 작업장 변화를 의미하기에 작업장에 감시라는 포괄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개인적 생각을 가져본다.)는 일상적 행위... 그리고 일상적으로 출퇴근 카드 등 다양한 영역에 있어 개인정보가 회사를 통해 수집된다. 이렇듯 통제수단의 변화는 작업장에서의 노동자들에 대한 관리의 변화를 볼 수 있다. 전반적으로 하락하게된 근로기준법 개악... 주5일제와 주 40시간제라는 의미를 놓고 싸운다면 난 한국의 상황에서는 주5일제가 맞다고 본다. 제조업의 경우 2조2교대가 기본이다. 주 40시간제의 순의미를 이후 투쟁을 통해 쟁취해 내어야 한다. 이렇듯 자본의 천민성은 총액임금(연봉)으로 책정하여 때론 노동자들을 옥죄인다. 주5일제의 시행이 주 40시간제와 그 맥이 같이 않은 것임을 인식하여야 한다. 경총은 변형시간근로제를 통해 1일 7시간 1시간 잔업을 통해 주6일제를 감행할려고 한다. 이를 시행하는 사업장의 경우에서는 주5일제의 의미가 피부로 와 닿겠지만 중소영세사업장의 경우 근로기준법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중소영세미조직사업장에 있어서는 대거 연차, 월차 휴가의 상쇄로 이어지고 있다. 이에 대한 보완이 필요하다. 최저임금의 문제 또한 그렇다. 중소영세사업장의 경우 최저임금의 책정으로 그나마 기본급여가 상당히 올라갔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지 않은 기업들이 여전히 많다는데에 있다. 근로기준법을 어기면서 부당하게 회사를 운영하는 기업들이 상당수 존재하며, 이를 관리감독할 정부또한 여력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이 일을 대신해 주는 사람을 이주노동자 산업연수행들로 연수생이라는 신분을 이용해 악용하고 있다. 이에 대한 문제에 있어 조근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생각한다. 산재의 문제... 산재교육을 하거나 산재보험에 가입한 대상사업장들이 늘어나고는 있지만 프레스나 용접 그리고 유기용제를 사용하는 업체에서는 생산수량 문제나 작업자의 인식부재(위험성에 대한 사전 고지나 위험으로 인해 추후 벌어진 산재의 위험성)로 인하여 산재사고는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특히, 유기용제를 취급하는 곳에서는 관리감독할 때 이외에는 큰 문제가 없으니 그냥 일을 하게한다. 사고가 나기전에는 이에 대한 문제 또한 이루어지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그리고 근골격계문제 또한 지속적으로 사측과 투쟁을 통해 싸워나가야 할 대상이다. 산재는 공장이 존재하는 한 끊임없이 일어날 것이다. 다만, 이를 어떻게 최소화 시키고 예방할 것인가? 산재사고가 중대한 사고로 일어나지 않게 작업장에 대한 안전조치 작업장 환경변화 등이 그 단적인 예라 하겠다. 이렇듯 이외에도 열거하면 다양한 문제가 있다. 그러나 하나로서 총체성을 담보하기 어려운 중차대한 상황들이다. 이에 대한 분명한 입장들이 나와 이 투쟁이 개별차원에서 아니면 당해 사업장만의 문제로 국한되지 않는 투쟁에 대한 고민들이 필요할 것이다. 4. 노동운동의 하향평준화 문제는 여기에 있다. 노동운동의 하향평준화... 이는 왜 벌어지는 것인가? 노동조합은 투쟁을 위한 조직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우리내 활동에 있어서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오로지 투쟁들이다. 이에 대한 교육, 선전의 내용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며, 조직화라는 말 또한 현장에서는 어려운 문제라고만 치부한다. 그 원인이 분명히 있을텐데.... 원인은 없고 결과만 존재하는 아이러니컬한 상황이 연일 벌어지고 있다. 문제는 왜 전노협때도 가능하였던 선전활동가 대회, 조직활동가 대회 등등 수많은 대회들이 어렵다는 것인가? 지구협이나 지역본부의 활성화를 통해 대중들의 자발적 참여를 증대할 프로그램들이 많이 나와야 하는데... 활동가가 적다. 재정적 어려움이 크다라는 이유만으로 쉽게쉽게 가고, 간부교육 중심의 활동으로 치환된다. 그러다 보니 조합원들은 투쟁에 동원되는 대상 이외엔 큰 의미가 없다. 아니면 활동가들이 참여하거나... 교육과 선전 그리고 조직화가 일상사업이라고 하지만 이를 수행함에 있어 일선 노동조합은 큰 어려움들을 겪고 있거나 다음 지도부를 구성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야하는 상황이 연출되기 비일비재하지는 않은지..... 이는 곧 지역운동단체의 쇠퇴와 직결된다. 서울의 경우 그마나 단체들이 많이 모여있고, 웬만한 단체들이 있어 사업에 있어서 다양함을 구축할 수 있지만 지역의 경우 노동조합이 있던 없던 그들과 사업하기 위해서는 그 노동조합이나 단체들의 연대가 일정정도 필요한데 그렇지 못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 그냥 정치노선과 조직노선이 사라진 지금 대치되는 것은 보이는 현상에 대한 투쟁들뿐이다. 다양하고 우리가 미쳐 생각하지 못하는 것들이 무수히 많다. 다만, 내 개인적 생각을 한다면 정치노선과 조직노선이라는 것이 제대로 논의되고 평가되어 총노선의 성립을 통한 장기적 투쟁계획들이 나왔으면 한다. 중요하지만 소소한 투쟁에 연대만을 위한 목적으로 운동을 지향하고 있지 않기에 그냥 생각이 들어 글을 읽고 그냥 뻘소리를 지껄여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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