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간장과 함께 오타보기

30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4/08/25
    [시/천상병] 나의 가난은
    간장 오타맨...
  2. 2004/08/25
    [김수영] 詩여, 침을 뱉어라... 힘으로서의 詩의 存在
    간장 오타맨...
  3. 2004/08/25
    사람이....
    간장 오타맨...
  4. 2004/08/23
    [단편/윤동주] 별똥 떨어진 데
    간장 오타맨...
  5. 2004/08/23
    [산문/조은재] 우리들의 어머니
    간장 오타맨...

[시/천상병] 광화문 근처의 행복 * 새

  • 등록일
    2004/08/26 14:21
  • 수정일
    2004/08/26 14:21

광화문 근처의 행복                                                 새

                                                                

광화문에,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옛 이승만독재와                                             내 영혼의 빈터에 

과감하게 투쟁했던 신문사,                               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그 신문사의 논설위원인                                   내가 죽는 날,

소설가 오성원은 나의 다정한 친구.                    그 다음날, 

 

어쩌다 만나고픈 생각에                                   산다는 것과 

전화 걸면                                                      아름다운 것과

기어코 나와 단골인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아리랑> 다방에 찾아온 그                              한창인 때에

모월 모일, 또 그랬더니                                    나느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와서는 내 찻값을 내고                                     한 마리 새,

그리고 천원 짜리 두 개 주는데.....

나는 끄때                                                      정감에 가득찬 계절 



"오늘만은 나도 이렇게 있다"고                         슬픔과 기븜의 週日

포켓에서 이천 원 끄집어내어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명백히 보였는데도                                          새여 너는

"귀찮아! 귀찮아!" 하면서                                  낡은 목청을 뽑아라

자기 단골 맥주집으로의 길을 가던 사나이!         

                                                                   살아서

그 단골집은                                                   좋은 일도 있었다고

얼마 안 떨어진 곳인데                                     나쁜 일도 있었다고

자유당 때 휴간당하기도 했던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신문사의 부장 지낸 양반이

경영하는 집으로

셋이서

그리고 내 마누라까지 참석케 해서

자유와 행복의 봄을.....

꽃동산을.......

이룬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저와 같은 버러지에게

어찌 그런 시간이 있게 했습니까?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중에서.............

 

간장 오타맨이....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시/천상병] 나의 가난은

  • 등록일
    2004/08/25 22:41
  • 수정일
    2004/08/25 22:41

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는 것은

한잔 커피의 갑 속의 두둑한 담배,

해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

 

오늘 아침을 다소 서럽다고 생각는 것은

잔돈 몇 푼에 조금도 부족이 없어도

내일 아침 일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은 내 직업이지만

비쳐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

이 햇빛에도 예금통장은 없을 테니까.....

 

나의 과거와 미래

사랑하는 내 아들딸들아.

내 무덤가 무성한 풀잎으로 때론 와서

괴로왔음 그런대도 산 인생 여기 잠들다 라고,

쌩쌩 바람 불어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중에서.....

 

간장 오타맨이....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김수영] 詩여, 침을 뱉어라... 힘으로서의 詩의 存在

  • 등록일
    2004/08/25 16:26
  • 수정일
    2004/08/25 16:26

                                                       詩여, 침을 뱉어라
                                                    -힘으로서의 詩의 存在

                                                                                                                김수영 

나의 시에 대한 思惟는 아직도 그것을 공개할만한 명확한 것이 못된다. 그리고 그것을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나의 모호성은 詩作을 위한 나의 정신구조의 上部 중에서도 가장 첨단의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고, 이것 없이는 무한대의 혼돈에의 접근을 위한  유일한 도구를 상실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가령  교회당의 뾰죽탑을 생각해볼  때, 시의 探針은 그 끝에 달린 십자가의 십자의 상반부의 창끝이고, 십자가의 하반부에서부터 까마아득한 주춧돌  밑까지의 진축의 실체의 부분이 우리들의 의식에서 아무리  정연하게 정비되어있다 하더라도, 詩作上으로 그러한 明晳의  개진은 아무런 보탬이 못되고,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이다.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지 시를 논하는 사람이 아니며, 막상 시를  논하게 되는 때에도 그는 시를 쓰듯이 논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시를 논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나 이에  대한 답변을 하기 전에 이 물음이 포괄하고 있는 원주가  바로 우리들의 오늘의 세미나의 논제인, 시에 있어서의 형식과 내용의 문제와 동심원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쉽사리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를 쓴다는 것--즉 노래--이 시의 형식으로서의 예술성과 동의어가 되고, 시를 논한다는 것이 시의  내용으로서의 현실성과 동의어가 된다는 것도 쉽사리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은 나는 20여년의 시작 생활을 경험하고 나서도 아직도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이 되지만,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다음시를 못 쓰게 된다. 다음시를  쓰기 위해서는 여직까지의 시에 대한 思辨을 모조리 파산을 시켜야  한다. 혹은 파산을 시켰다고 생각해야 한다. 말을  바꾸어 하자면,  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온몸으로 동시에  무엇을 밀고 나가는가. 그러나--나의 모호성을 용서해준다면--'무엇을'의  대답은 '동시에'의 안에 이미 포함되어있다고 생각된다. 즉 온몸으로 동시에 온몸을 밀고나 가는 것이  되고, 이 말은 곧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나가는 것이 된다. 그런데 시의 사변에서 볼 때, 이러한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바로 시의 형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 이번에는 시를  논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자. 나는 이미  '시를 쓴다'는 것이  시의 형식을 대표한다고 시사한 것만큼, '詩를  논한다'는 것이 시의  내용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전제를 한 폭이   된다. 내가 시를 논하게 된 것은--속칭 '詩評' 이나 '詩論'을 쓰게  된 것은--극히 최근에 속하는 일이고, 이런 의미의 '시를 논한다'는 것이,시의 내용으로서 '시를  논한다'는 본질적인 의미에 속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구태여 그것을  第一義的인 본질적인 의미  속에 포함시켜 생각해보려고 하는 것은 논지의 진행상의 편의 이상의 어떤 의미가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구태여 말하자면  그것은 산문의 의미이고, 모험의 의미이다.


詩에 있어서의  모험이란 말은 세계의  開陣, 하이데거가 말한 '大地의 은폐'의 반대되는 말이다. 엘리오트의 문맥 속에서는 그것은 의미 對  음악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엘리오트도 그의 온건하고 주밀한 논문  <詩의 音樂>의 끝머리에서 '詩는 언제나 끊임없는 모험 앞에 서있다'라는  말로 '意味'의 토를 달고 있다. 나의 시론이나 시평이  전부가 모험이라는 말은 아니지만, 나는 그것들을 통해서  상당한 부분에서 모험의  의미를 연습해 보았다.


이러한 탐구의 결과로, 나는 시단의 일부의 사람들로부터 참여시의 옹호자라는 달갑지않은, 분에 넘치는 호칭을 받고 있다.


산문이란, 세게의  개진이다. 이 말은  사랑의 留保로서의 '노래'의 매력만큼 매력적인  말이다. 시에 있어서의 산문의 확대작업은 '노래'의 유보성에  대해서는 侵攻적이고 의식적이다. 우리들은 시에 있어서의 내용과 형식의 관계를 생각할 때, 내용과 형식의 동일성을 공간적으로 상상해서, 내용이 반 형식이 반이라는 식으로 도식화해서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노래'의 유보성, 즉  예술성이 무의식적이고 隱性的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반이 아니다. 예술성의 편에서는  하나의 시작품은 자기의 전부이고, 산문의 편,  즉 현실성의 편에서도  하나의 작품은 자기의 전부이다.


시의 본질은 이러한  개진과 은폐의, 세계와 대지의 양극의 긴장 위에 서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詩의 예술성이 무의식적이라는 것이다. 시인은 자기가 시인이라는 것을 모른다. 자기가 시의 기교에 정통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詩의 기교라는 것이 그것을 의식할  때는 진정한 기교가 못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시인이  자기의 시인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거울이 아닌 자기의 육안으로  사람이 자기의 전신을 바라볼 수 없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그가 보는 것은 남들이고, 소재이고, 현실이고, 신문이다. 그것이 그의 의식이다. 현대시에 있어서는 이 의식이 더욱더 精銳化--때에 따라서는 신경질적으로까지--되어있다. 이러한 의식이  없거나 혹은 지극히 우발적이거나 수면 중에  있는 시인이 우리들의  주변에는 허다하게 있지만 이런 사람들을 나는 현대적인 시인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현대에 있어서는 시뿐만이  아니라 소설까지도, 모험의 발견으로 자기형성의 차원에서  그의 '새로움'을 제시하는 것이 문학자의 의무로 되어있다. 지극히 오해를 받을 우려가 있는 말이지만, 나는 소설을 쓰는 마음으로 시를 쓰고 있다. 그만큼 많은 산문을 도입하고 있고 내용의  면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유가 없다. 너무나  많은 자유가 있고,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게 되지만, 내용의 면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말은 사실은 '내용'이 하는 말이 아니라, '형식'이 하는 혼잣말이다. 이 말은 밖에 대고  해서는 아니될  말이다. '내용'은  언제나 밖에다 대고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는 말을 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너무나 많은 자유가 있다'는  '형식'을 정복할 수 있고, 그때에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간신히 성립된다. '내용'은 언제나 밖에 대고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는 말을 계속해서 지껄여야 한다. 이것을 계속해서  지껄이는 것이 이를테면  38선을 뚫는 길인 것이다. 낙수물로 바위를 뚫을  수 있듯이, 이런 시인의 헛소리가 헛소리가 아닐 때가 온다. 헛소리다! 헛소리다! 헛소리다! 하고 외우다 보니 헛소리가 참말이 될 때의 경이, 그것이, 나무아미타불의 기적이고 시의 기적이다.  이런 기적이 한 편의 시를 이루고, 그러한 시의 축적이 진정한 민족의 역사의 기점이 된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는 참여시의 효용성을 신용하는 사람의 한 사람이다. 

나는 아까 서두에서 시에  대한 나의 사유가 아직도 명확한 것이 못되고, 그러한  모호성은 무한대의 혼돈에의 접근을 위한 도구로서 유용한 것이기 때문에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이러한 모호성의 탐색이 급기야는 참여시의 효용성의 주장에까지 다다르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아직까지도 '여직까지 없었던 세계가 펼쳐지는  충격'을 못 주고 있다. 이 시론은 아직도 시로서의 충격을 못 주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여직까지의 자유의 서술이  자유의 서술로 그치고, 자유의 이행을 하지 못한 데에 있다. 모험은,  자유의 서술도 자유의 주장도 아닌 자유의 이행이다.  자유의 이행에는  전후좌우의 설명이 필요없다.


그것은 援軍이다. 원군은 비겁하다. 자유는 고독한 것이다. 그 처럼, 시는 고독하고 장엄한  것이다. 내가 지금--바로 지금 이 순간에--해야 할 일은 이 지루한 횡설수설을 그치고, 당신의, 당신 의, 당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일이다. 당신이, 당신이, 당신이  내 얼굴에 침을  뱉기 전에...... 자아 보아라, 당신도, 당신도,  당신도, 나도 새로운  문학에의 용기가 없다. 이러고서도 정치적 금기에만 다치지 않는한,  얼마든지 '새로운' 문학을 할 수 있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정치적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개인의 자유도  인정하지 않는다. '내용'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형식'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문학의 성립의 사회조건의 중요성을  로버트 그레이브스는  다음과 같은 평범한 말로 강조하고  있다--"사회생활이 지나치게  주밀하게 조직되어서, 詩人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게 되는 날이 오게 되면, 그때는 이미 중대한 일이 모두  다 종식되는 때다. 개미나 벌이나, 혹은  흰개미들이라도 지구의 지배권을  물려받는 편이 낫다. 국민들이  그들의 '過激派'를 처형하거나 추방하는 것은 나쁜 일이고, 또한 국민들이 그들의 '保守派'를 처형하거나 추방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나쁜 일이다. 하지만,  사람이 고립된 단독의 자신이 되는 자유에 도달할  수 있는 間隙이나  구멍을 사회기구 속에 남겨놓지 않는다는 것은 더욱 나쁜 일이다. 설사 그 사람이 다만 奇人이나 집시나 범죄자나 바보얼간이에 지나지않는다하더라도."--이 인용문에 나오는 기인이나, 집시나, 바보멍텅구리는 '내용'과 '형식'을 논한 나의 문맥 속에서는 물론 후자 즉'형식'에 속한다. 그리고 나의 판단으로는  아무리 너그럽게 보아도 우리의 주변에서는 기인이나 바보얼간이들이,  자유당때하고만 비교해보더라도 완전히 소탕되어 있다. 부산은 어떤지 모르지만, 서울의 내가 다니는 주점은 문인들이 많이  모이기로 이름난 집인데도 벌써 주정꾼다운 주정꾼  구경을 못한 지가  까마득하게 오래된다. 주정은 커녕 막걸리를 먹으러 나오는  글쓰는 친구들의 얼굴이 메콩강변의 진주를 발견하기보다도  더 힘이 든다.  이러한 '근대화'의 해독은 문학주점에만 한한 일이 아니다.


그레이브스는 오늘날의  '서방측의 자유세계'에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없는  것을 개탄하면서,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서방측의 자유세계의)  시민들의 대부분은 群居하고, 인습에 사로잡혀있고, 순종하고, 그  때문에 자기의 장래에 대해 책임을 질 것을 싫어하고, 만약에 노예제도가 아직도 성행한다면 기꺼이 노예가 되는 것도 싫어하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종교적 정치적, 혹은 知的一致를 시민들에게 강요하지 않는 의미에서, 이 세계가 自由를  보유하는한   거기에  따르는   혼란은  허용되어야  한다......" 이 인용문에서 우리들이 명심해야 할 점은 '혼란은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자유당때의 무기력과 무능을 누구보다도 저주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지만, 요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당시에도 자유는 없었지만, '혼란'은 지금처럼 이렇게 철저하게 압제를 받지 않는 것이 신통한 것 같다. 그러고 보면 '혼란'이 없는 시멘트회사나 발전소의 건설은, 시멘트회사나 발전소가 없는 혼란보다 조금도 나을게 없는 것같은 생각이 든다. 이러 한 자유와 사랑의  동의어로서의 '혼란'의 향수가 문화의 세계에서 싹트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미미한 징조에 불과한 것이라 하더라도 지극히  중대한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의 본 질적 근원을  발효시키는 누룩의 역할을  하는 것이 진정한 시의  임무인 것이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의  형식은 내용에  의지하지 않고 그  내용은 형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 바로  그처럼 형식은 내용이  되고, 내용이 형식이 된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나가는 것이다.


이 시론도  이제 온몸으로  밀고나갈 수  있는 순간에 와있다. '막상 詩를 논하게 되는 때에도' 시인은 '詩를 쓰듯이 논해야 할  것'이라는 나의 명제의 이행이 여기 있다. 시도 시인도 시작하는 것이다. 나도 여러분도 시작하는 것이다. 자유의 과잉을, 혼돈을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시작하는 것이다.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그것을--. 

                                                                                                            <1968.4> 

*1968년 4월 釜山에서 펜클럽 주최로 행한 문학 세미나에서의 발표 원고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사람이....

  • 등록일
    2004/08/25 08:46
  • 수정일
    2004/08/25 08:46
사람이....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단편/윤동주] 별똥 떨어진 데

  • 등록일
    2004/08/23 21:33
  • 수정일
    2004/08/23 21:33

밤이다.

 

하늘은 푸르다 못해 농회색으로 캄캄하나 별들만은 또렷 또렷 빛난다. 침침한 어둠뿐만 아니라 오삭오삭 춥다. 이 육중한 기류 가운데 자조하는 한 젊은이가 있다. 그를 나라고 불러두자.

 

나는 이 어둠에서 배태되고 이 어둠에서 생장하여서 아직도 이 어둠 속에 그대로 생존하나보다. 이제 내가 갈 곳이 어딘지 몰라 허우적거리는 것이다. 하기는 나는 세기의 초점인 듯 초췌하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내 바닥을 반듯이 만들어주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내 머리를 갑박이 내려누르는 아무것도 없는 듯하다마는 내막은 그렇지도 않다. 나는 도무지 자유스럽지 못하다. 다만 나는 없는 듯 있는 하루살이처럼 처공에 부유하는 한 점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하루살이처럼 경쾌하다면 마침 다행할 것인데 그렇지를 못하구나!



이 점의 대칭위치에 또 하나 다른 밝음(明)의 초점이 도사리고 있는 듯 생각한다. 덥석 움키었으면 잡힐 듯도 하다.

 

마는 그것을 휘갑기에는 나 자신이 둔질이라는 것보다 오히려 내 마음에 아무런 준비도 배포치 못한 것이 아니냐, 그리고 보니 행복이란 별스런 손님을 불러들이기에도 또 다른 한 가닥 구실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될까보다.

 

이 밤이 나에게 있어 어린 적처럼 한낱 공포의 장막인 것은 벌써 흘러간 전설이오. 따라서 이 밤이 향락의 도가니라는 이야기도 나의 염원에선 아직 소화시키지 못할 돌덩이다. 오로지 밤은 나의 도전의 호적이면 그만이다.

 

이것이 생생한 관념세계에만 머무른다면 애석한 일이다, 어둠 속에 깜빡깜빡 조을며 다닥다닥 나란히 한 초가들이 아름다운 시의 華詞가 될 수 있다는 것으 벌써 지나간 제너레이션의 이야기요. 오늘에 있어서는 다만 말 못하는 비극의 배경이다.

 

이제 닭이 해를 치면서 맵짠 울음을 뽑아 밤을 쫓고 어둠을 짓내몰아 동켠으로 휘언히 새벽이란 새로운 손님을 불러온다 하자. 하나 경망스럽게 그리 반가워할 것은 없다, 보아라, 가령 새벽이 왔다 하더라도 이 마음은 그대로 암담하고 나도 그대로 암담하고 하여서 너나 나나 이 가랑지길에서 주저주저 아니치 못할 존재들이 아니냐.

 

나무가 있다.

 

그는 나의 오랜 이웃이요 벗이다. 그렇다고 그와 내가 성격이나 환경이나 생활이 공통한 데 있어서가 아니다. 말하자면 극단과 극단 사이에도 애정이 관통할 수 있다는 기적적인 교분의 표본에 지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처음 그를 퍽 불행한 존재로 가소롭게 여겼다. 그의 앞에 설 때 슬퍼지고 측은한 마음이 있을 거라곤 하였다. 마는 돌이켜 생각컨대 나무처럼 행복한 생물은 다시 없을 듯하다. 굳음에는 이루 비길 데 없는 바위에도 그리 탐탁치는 못할망정 자양분이 있다 하거늘 어디로 간들 생의 뿌리를 벅지 못하여 어디로 간들 생활의 불평이 있을소냐, 칙칙하면 솔솔 솔바람이 불어오고, 심심하면 세가 와서 노래를 부르다 가고, 촐촐하면 한 줄기 비가 오고, 밤이면 수많은 별들과 오손도손 이야기할 ㅅ ㅜ있고 - 보다 나무는 행동의 방향이란 거추장스런 과제에 봉착하지 않고 인위적으로든 우연으로서든 탄생시켜준 자리를 지켜 무진무궁한 영양소를 흡취하고 영롱한 햇빛을 받아들여 손쉽게 생활을 영위하고 오로지 하늘만 바라고 뻗어질 수 있는 것이 무엇보다 행복스럽지 않으냐.

 

이 밤도 과제를 풀지 못하여 안타까운 나의 마음에 나무의 마음이 점점 옮아오는 듯하고, 행동할 숭 있는 자랑을 자랑치 못함에 뻐저리듯하나 나의 젊은 선배의 웅변에 왈 선배도 믿지 못할 것이라니 그러면 영리한 나무에게 나의 방향을 물어야 할 것인가.

 

어디로 가야 하느냐 등의 어디냐 서가 어디냐 남이 어디냐 아차! 저 별이 번쩍 흐른다. 별똥 떨어진 제가 내가 갈 곳인가보다. 하면 별똥아! 꼭 멀어져야 할 곳에 멀어져야 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