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무등산을 찾아 간 날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겨울이었습니다. 빙설로 덮힌 산행을 포기하고 다만 바라보기만 하려고 했지만 무등산은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두번째 무등산을 찾은 것은 오월의 새벽이었습니다. 칠흑의 어둠 속에 무등산은 잠겨 있었습니다. 어두운 산길을 부지런히 오르다 망월동묘역의 참배일정에 쫓기어 입석대 아래에서 내려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쉬워하는 나에게 당신은 망월묘역에 참배하는 것이 곧 무등산에 오르는 것이라고 달랬습니다. 무등산을 무덤산이라고 불렀다고 했습니다.
다시 무등산을 찾은 것은 이번 장마속의 아침입니다. 다행히 비는 피하였지만 이번에는 짙은 안개가 무등산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어쨌건 무등산은 거기 있을 것이었습니다. 출입금지구역을 가로질러서 무등의 모습이 가장 잘보이는 곳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지척에 무등을 묻어 두고 기다렸습니다. 이윽고 해가 뜨고 안개가 걷히면서 무등산이 드러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적어도 내게는 빙설과 칠흑의 저편에서 그리고 안개속에서 걸어나오는 참으로 어려운 산이었습니다. 해발 1천 2백미터에 가까운 높은 산임에도 불구하고 그 높이를 조금도 드러내지 않는 산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인상적인 것은 능선(稜線)이었습니다. 무등의 능선은 아무 욕심없이 하늘에 그은 한가닥 선이었습니다. 완만하면서도 무덤덤한 능선은 무언(無言)의 메시지였습니다. 당신의 말처럼 무등산은 최고의 산이 아니라 무등(無等)의 산,‘평등(平等)의 산’이었습니다.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이 평등하고 산과 들판이 평등하고 나무와 바위가 평등하다는 자연의 이치를 무등산은 이야기 하고 있었습니다.
무등산은 하늘을 향하는 산이 아니라 땅을 거두는 산이었습니다. 자신을 하늘에 높이 솟구쳐 올리는 산이 아니라 기쁨도 아픔도 모두 안으로 간직하는 산이었습니다. 스스로 대지(大地)가 됨으로써 아픈 역사를 그윽히 안고 있는 산이었습니다.
백두대간과 호남정맥을 타고 걸어오다 잠시 멈추어 너른 벌판을 만들어놓고 조용히 바다를 바라보는 산이 무등산입니다. 삼한(三韓)에서부터 백제, 후백제 그리고 고려,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는 그 긴 세월의 우여곡절속에서 모든 좌절한 사람들의 한(恨)을 갈무리하고 있는 역사의 덩어리였습니다. 과연 무등산 자락에는 곳곳에 사림(士林)의 고고한 뜻이 묻혀 있고 우국지사의 울분이 묻혀 있는가하면 유랑의 시인이 한많은 그의 생을 이곳에서 거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한(恨)’이 한으로 응어리져 있지 않고 어느것이나 빛나는 예술로 승화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술적 정화(精華)는 역사의 격동기에 인내천의 평등사상으로, 식민지의 해방사상으로 그리고 군사독재의 총검에 맞서는 민주의 실체가 되어 역사무대의 한복판으로 걸어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무등산의 너른 품이고 무등산의 무게입니다.
당신은 무등산에 묻힌 역사를 읽을 것이 아니라 우리시대의 무등산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한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다시 짙은 안개속으로 사라져버린 무등산을 마주하고 앉아서 생각했습니다.
무등산은 이미 그 이름으로 우리에게 그것을 이야기해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평등의 산’. 이것이 우리가 이끌어내야 하는 무등산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평등은 단지‘차별의 철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평등이야말로‘자유의 최고치(最高値)’이기 때문입니다.
궁핍으로부터의 자유, 무지와 질병으로부터의 자유를 위하여 우리는 얼마나 오랜 역사를 살아왔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을 추구하는 방법과 방향에 있어서 우리는 실패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더 많은 자유는 언제나 더 큰 구속과 불평등을 동반함으로써 자유의 의미를 회의하게 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소비하고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소유해야 이러한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예술과 문화소비마저 사회적 차별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고 있을뿐 아니라 욕구 그 자체를 끊임없이 생산해내는 자본운동속에서 우리의 자유는 언제나 더 큰 욕구앞에서 목마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회발전의 원리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자유와 행복의 원리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 요구되고 있는 현실이 그것이라고 믿습니다.
나는 그런 점에서 평등이 자유의 최고치라는 당신의 말을 믿습니다. 생각하면 이것은‘타인의 행복’을 자신의‘행복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평범한 양식(良識)에 다름아닌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평등은 자유의 실체이며 내용입니다. 자유는 양적 접근으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신기루일뿐입니다.
당신은 무등산의 완만한 능선이 불평등에 대한 역설이고 풍자라고 하였습니다.‘미운 놈에게 떡 한개 더 주라’는 속담을 당신은 기만이라고 했습니다. 떡 한 개를 더 주는 것이 결코 + 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누적되어온 마이너스의 해소에도 못미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등산을 작게 읽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무등산이 안고 있는 것이 좌절의 한이 아님은 물론이고 무등산이 들려주는 무언의 메시지 역시 떡 한 개의 작은 사랑이 아닙니다. 불평등구조 그 자체를 해소하지 않는 한 그 곳이 어디이건 마이너스는 계속 누적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무등산이 결코 하늘에 치솟지 않고 그 덤덤하고 완만한 능선을 그어보이는 이유를 생각하여야 하리라고 믿습니다. 그야말로 빛고을의 무등입니다. 대명무사조(大明無私照). 햇빛은 결코 사사롭게 비추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결국 짙은 안개속에 무등산을 묻어두고 내려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무등산을 뒤돌아보았을 때였습니다. 무등산은 안개속에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무등산은 어느새 자욱한 안개속에서 빠져나와 백마능선을 일으켜 흰 갈기 바람에 날리며 지리산을 지나 백두대간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신영복 나무야 나무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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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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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는 아직 감옥 안에 있습니다. 형체도 없이, 그림자도 없이... 손무덤은 '박노해'의 시입니다. 박기평의 시가 아닙니다. 인세는 박기평에게로 갈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시는 '박노해'가 지은 것입니다. 아직 감옥에서 나오지 못한 '박노해'가 쓴 것입니다.부가 정보
kanjang_gongj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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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동일 인물로 묘사했습니다. 아직 감옥에 있는 박노해가 있다면 해방춤이라도 추고 싶습니다.... 고견 잘 받아 담겠습니다.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