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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4/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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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장 오타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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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아오지 못한 兵士
    간장 오타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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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4/08/14
    [시/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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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等(평등)의 無等山(무등산)

  • 등록일
    2004/08/19 23:43
  • 수정일
    2004/08/19 23:43

처음으로 무등산을 찾아 간 날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겨울이었습니다. 빙설로 덮힌 산행을 포기하고 다만 바라보기만 하려고 했지만 무등산은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두번째 무등산을 찾은 것은 오월의 새벽이었습니다. 칠흑의 어둠 속에 무등산은 잠겨 있었습니다. 어두운 산길을 부지런히 오르다 망월동묘역의 참배일정에 쫓기어 입석대 아래에서 내려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쉬워하는 나에게 당신은 망월묘역에 참배하는 것이 곧 무등산에 오르는 것이라고 달랬습니다. 무등산을 무덤산이라고 불렀다고 했습니다.

 




다시 무등산을 찾은 것은 이번 장마속의 아침입니다. 다행히 비는 피하였지만 이번에는 짙은 안개가 무등산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어쨌건 무등산은 거기 있을 것이었습니다. 출입금지구역을 가로질러서 무등의 모습이 가장 잘보이는 곳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지척에 무등을 묻어 두고 기다렸습니다. 이윽고 해가 뜨고 안개가 걷히면서 무등산이 드러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적어도 내게는 빙설과 칠흑의 저편에서 그리고 안개속에서 걸어나오는 참으로 어려운 산이었습니다. 해발 1천 2백미터에 가까운 높은 산임에도 불구하고 그 높이를 조금도 드러내지 않는 산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인상적인 것은 능선(稜線)이었습니다. 무등의 능선은 아무 욕심없이 하늘에 그은 한가닥 선이었습니다. 완만하면서도 무덤덤한 능선은 무언(無言)의 메시지였습니다. 당신의 말처럼 무등산은 최고의 산이 아니라 무등(無等)의 산,‘평등(平等)의 산’이었습니다.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이 평등하고 산과 들판이 평등하고 나무와 바위가 평등하다는 자연의 이치를 무등산은 이야기 하고 있었습니다.

 

무등산은 하늘을 향하는 산이 아니라 땅을 거두는 산이었습니다. 자신을 하늘에 높이 솟구쳐 올리는 산이 아니라 기쁨도 아픔도 모두 안으로 간직하는 산이었습니다. 스스로 대지(大地)가 됨으로써 아픈 역사를 그윽히 안고 있는 산이었습니다.

백두대간과 호남정맥을 타고 걸어오다 잠시 멈추어 너른 벌판을 만들어놓고 조용히 바다를 바라보는 산이 무등산입니다. 삼한(三韓)에서부터 백제, 후백제 그리고 고려,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는 그 긴 세월의 우여곡절속에서 모든 좌절한 사람들의 한(恨)을 갈무리하고 있는 역사의 덩어리였습니다. 과연 무등산 자락에는 곳곳에 사림(士林)의 고고한 뜻이 묻혀 있고 우국지사의 울분이 묻혀 있는가하면 유랑의 시인이 한많은 그의 생을 이곳에서 거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한(恨)’이 한으로 응어리져 있지 않고 어느것이나 빛나는 예술로 승화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술적 정화(精華)는 역사의 격동기에 인내천의 평등사상으로, 식민지의 해방사상으로 그리고 군사독재의 총검에 맞서는 민주의 실체가 되어 역사무대의 한복판으로 걸어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무등산의 너른 품이고 무등산의 무게입니다.

 

당신은 무등산에 묻힌 역사를 읽을 것이 아니라 우리시대의 무등산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한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다시 짙은 안개속으로 사라져버린 무등산을 마주하고 앉아서 생각했습니다.

무등산은 이미 그 이름으로 우리에게 그것을 이야기해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평등의 산’. 이것이 우리가 이끌어내야 하는 무등산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평등은 단지‘차별의 철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평등이야말로‘자유의 최고치(最高値)’이기 때문입니다.

 

궁핍으로부터의 자유, 무지와 질병으로부터의 자유를 위하여 우리는 얼마나 오랜 역사를 살아왔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을 추구하는 방법과 방향에 있어서 우리는 실패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더 많은 자유는 언제나 더 큰 구속과 불평등을 동반함으로써 자유의 의미를 회의하게 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소비하고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소유해야 이러한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예술과 문화소비마저 사회적 차별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고 있을뿐 아니라 욕구 그 자체를 끊임없이 생산해내는 자본운동속에서 우리의 자유는 언제나 더 큰 욕구앞에서 목마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회발전의 원리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자유와 행복의 원리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 요구되고 있는 현실이 그것이라고 믿습니다.

나는 그런 점에서 평등이 자유의 최고치라는 당신의 말을 믿습니다. 생각하면 이것은‘타인의 행복’을 자신의‘행복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평범한 양식(良識)에 다름아닌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평등은 자유의 실체이며 내용입니다. 자유는 양적 접근으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신기루일뿐입니다.

 

당신은 무등산의 완만한 능선이 불평등에 대한 역설이고 풍자라고 하였습니다.‘미운 놈에게 떡 한개 더 주라’는 속담을 당신은 기만이라고 했습니다. 떡 한 개를 더 주는 것이 결코 + 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누적되어온 마이너스의 해소에도 못미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등산을 작게 읽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무등산이 안고 있는 것이 좌절의 한이 아님은 물론이고 무등산이 들려주는 무언의 메시지 역시 떡 한 개의 작은 사랑이 아닙니다. 불평등구조 그 자체를 해소하지 않는 한 그 곳이 어디이건 마이너스는 계속 누적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무등산이 결코 하늘에 치솟지 않고 그 덤덤하고 완만한 능선을 그어보이는 이유를 생각하여야 하리라고 믿습니다. 그야말로 빛고을의 무등입니다. 대명무사조(大明無私照). 햇빛은 결코 사사롭게 비추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결국 짙은 안개속에 무등산을 묻어두고 내려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무등산을 뒤돌아보았을 때였습니다. 무등산은 안개속에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무등산은 어느새 자욱한 안개속에서 빠져나와 백마능선을 일으켜 흰 갈기 바람에 날리며 지리산을 지나 백두대간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신영복 나무야 나무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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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윤동주] 看板 없는 거리

  • 등록일
    2004/08/19 09:41
  • 수정일
    2004/08/19 09:41

정거장 플랫폼에

내렸을 때 아무도 없어,

 

다들 손님들뿐

손님 같은 사람들 뿐,



집집마다 看板이 없어

집 찾을 근심이 없어

 

빨갛게

파랗게

불붙는 문자도 없이

 

모퉁이마다

자애로운 현 와사등에

불을 혀놓고,

 

손목을 잡으면

다들, 어진 사람들

다들, 어진 사람들

 

봄, 여름, 가을, 겨울,

순서로 돌아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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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지 못한 兵士

  • 등록일
    2004/08/19 01:11
  • 수정일
    2004/08/19 01:11

이라크 파병한 자이툰 부대의 소식은 정부의l 언론통제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려지고 있지 않은 상황이다.

추가 전투병 파병을 앞두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신영복 선생님이 그린 그림을 여기에 퍼날라봅니다. 내 블로그 얼굴이기도 하구요....

 

돌아오지 못한 兵士들은 저마다 희디흰 白鶴(백학)이 되어 푸른 들녘위로 날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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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걷고 싶다.

  • 등록일
    2004/08/18 02:29
  • 수정일
    2004/08/18 02:29

자유를 박탈 당하고, 폐쇄된 공간에서 더 이상 어디로 나아갈 수 없는 꽉 막힌공간에 갖혀보지 않고서는 걷는다는 자유의 기쁨... 그리고 자유롭다는 대상에 대한 고마움을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어디로 떠날수도 어디로 향할 수도 누구와 이야기 할 수도 없는 그 막힌 공간에서 과연 걷는다는 의미는 무엇이며, 자유는 어떠한 의미를 지닐까요... 이 글에 대한 답을 해줄 좋은 글 하나 이 공간에 퍼날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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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박기평] 손무덤

  • 등록일
    2004/08/15 19:04
  • 수정일
    2004/08/15 19:04

** 시인의 이름이 박노해라고 되어 있어 본명 박기평으로 정정한다. 그는 사노맹 조건사건으로 투옥된 후 전향서를 쓰고 나왔다. 전향서를 쓴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이전 자신의 가명인 노해라는 이름 즉, 노동해방이라는 단어를 쓸 자격은 없다고 개인적으로 판단한다. 그는 더이상 박노해가 아니기에.... 쓸 자격은 그 스스로 박탈시켰다. 이에 내가 옮기고자 한 책에 박노해라고 되어있는 이름을 내 임의로 수정하여 그의 본명 박기평으로 쓰고자 한다.

 

올 어린이날만은

안사람과 아들놈 손목 잡고

어린이 대공원이라도 가야겠다며

은하수를 빨며 웃던 정형의

손목이 날아갔다.

 

 



작업복을 입었다고

사장님 그라나다 승용차도

공장장 로얄살롱도

부장님 스텔라도 태워주지 않아

한참 피를 흘린 후에

타이탄 짐칸에 앉아 병원을 갔다.

 

기계사이에 끼여 아직 팔딱거리는 손을

기름먹은 장갑 속에서 꺼내어

36년 한많은 노동자의 손을 보며 말을 잊는다

봉천동 산동네 정형 집을 찾아

서글한 눈매의 그의 아내와 초롱한 아들놈을 보며

차마 손만은 꺼내주질 못하였다

환한 대낮에 산동네 구멍가게 주저앉아 쇠주병을 비우고

정형이 부탁한 산재관계 책을 찾아

종로의 크다는 책방을 둘러봐도

엠병할, 산더미 같은 책들 중에

노동자가 읽을 책은 두누 까뒤집어도 없고

 

화창한 봄날 오후의 종로거리엔

세련된 남녀들의 화사한 봄빛으로 흘러가고

영화에서 본 미국상가처럼

외국상표 찍힌 왼갖 좋은 것들이 휘황하여

작업화를 신은 내가

마치 탈출한 죄수처럼 쫄드만

고충 사우나빌딩 앞엔 자가용이 즐비하고

고급 요정 살롱 앞에도 승용차가 가득하고 거대한 백화점이 넘쳐흐르고

 

프로야구장엔 함성이 일고

노동자들이 칼처럼 곤두세워 좆빠지게 일할 시간에

느듯하게 즐기는 년놈들이 왜 이리 많은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선진조국의 종로거리에

나는 ET가 되어

일당 4,800원짜리 노동자로 돌아와

연장노동 도장을 찍는다

 

내 품속의 정형 손은

싸늘히 식어 푸르뎅뎅하고

우리는 손을 소주에 씻어들고

양지바른 공장 담벼락 밑에 묻는다

 

노동자의 피땀 위에서

번영의 조국을 향락하는 누런 착취의 손들을

일 안하고 놀고 먹는 하얀 손들을

묻는다

프레스로 싹둑싹둑 짖짤라

원한의 눈물로 묻는다

일하는 손들이

기쁨의 손짓으로 살아날 때까지

묻고 또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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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노동 계급적 관점에서 충실한 시편이다.

주지하다시피 지난 연대인 7*80년대는 자본과 노동이 격렬하게 날 선 각으로 대립하며 서로를 적으로 규정한 시대였다. 냉대와 모멸의 대상으로 떨쳐 일어나 노동이 사회 변혁의 주체로 당당히 설 수 있었던 시대이기도 했다.

 

세계 최장 시간에 최저 임금이라는 인간 이하의 부당한 차별 대우를 일방적으로 받아왔던 노동자들이 태풍으로 만나 바다의 성난 파다와 같이 그들의 적대 세력인 자본가 계급에 대해 자신들의 전 생을 걸고 온몸으로 투쟁했던 것이다. 즉, 즉자적 대중에서 대자적 민중으로 변모한 노동자들의 투쟁은 개별 사업자 단위에서 벗어나 점차 전국적 수준으로 그 규모와 세력을 강화해 나갔고 이러한 투쟁에 힘입어 점차 열악한 노동 현실의 개선이 이전에 비해 눈에 띄게 달라지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의 근대화 정책은 철저하게 도시 중심이었다. 이에 따른 당연한 결과로서 이농민들이 양산되었다. 야반도주한 그들은 도시 주변에 기생하면서 산업예비군으로 신분의 전락을 겪게 된다. 자본가 계급은 성장의 열매를 독점하고 사회적 분배에는 등한하였다. 또 그들은 노동자 ㅇ미금 착취로 얻은 부의 증식을 기술에 투자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치부하는데 몰두하였다. 따라서 당시 노동자들의 생존을 위한 처절한 투쟁은 어찌 보면 역설적으로 자본가 계급이 그 당위성을 부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기평의 시 "손무덤"은 각성한 노동자의 분노가 격정적으로 분출한 시라 할 수 있다. 시간의 풍화 작용에도 불구하고 지금에 와서 읽어 봐도 가슴이 서늘해지고 섬뜩한 느낌이 든다. 이 시에서 우리는 고상한 미학적 장치를 찾을 필요가 없다.

척박한 노동 현실 경험과 그 극복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는 이 시는 발동기의 모터 소리처럼 박짐감 있게 읽힌다.

 

우리의 노동 현실은 점차 개선과 극복이라는 자기 발전의 길을 걷고 있지만 아직도 열악과 구태의 구습을 완전히 탈각했다고 보기 어려운 형편에 놓여 있으며 더욱이 한국에 진출한 동남아시아 노동자(이주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참혹한 노동 실태는 우리의 양식와 지성을 참담하게 만든다. 상품과 소비가 지배하는 시대, 공동체 의식은 골동품 취급을 받으며 희박해져 가고 있다. 지난 연대의 고난한 역정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볼 일이다.                                                                                             - 이재무 -

 

69인의 좋은 시를 찾아서 "긍정적인 밥"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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