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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4/08/31
    우리들의 도시락
    간장 오타맨...
  2. 2004/08/31
    [시/푸른내음] 이렇게 한번 해보자(4)
    간장 오타맨...
  3. 2004/08/31
    [펌/진보넷]백기완 선생님이 새내기들에게 주는 글
    간장 오타맨...
  4. 2004/08/31
    [시/백무산] 존재는 기억에 의존하지 않는다.
    간장 오타맨...
  5. 2004/08/31
    [시/한용운] 나룻배와 행인
    간장 오타맨...

[나무야나무야/신영복]철산리의 강과 바다

  • 등록일
    2004/08/31 17:39
  • 수정일
    2004/08/31 17:39

당신은 바다보다는 강을 더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강물은 지향하는 목표가 있는 반면 바다는 지향점을 잃은 물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오늘 한강 하구(河口)에 서서 당신의 강물을 생각합니다.그렇습니다.강물은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물임에 틀림없습니다.골짜기와 들판을 지나 바다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숱한 역사를 쌓아가는 살아 있는 물입니다.절벽을 만나면 폭포가 돼 뛰어 내리고 댐에 갇히면 뒷물을 기다려 다시 쏟아져 내리는 치열한 물입니다.이처럼 치열한 강물과는 달리 바다는 더이상 어디로 나아가지 않는 물입니다.바다로 나와버린 물은 아마 모든 의지가 사라져버린 물의 끝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당신에게 보내는 마지막 엽서를 들고 먼저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통일 전망대를 찾아 왔습니다.태백산에서 시작해 굽이굽이 천리길을 이어온 한강과 마식령산맥에서부터 5백리 길을 흘러온 임진강이 서슴없이 서로 몸을 섞으며 바다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다시 물길을 따라 강화도의 월곶리에 있는 연미정(燕尾亭)으로 왔습니다.마침 밀물때 만난 서해의 바닷물이 강화해협을 거슬러 이 두물을 마중나오고 있었습니다.드넓은 강심에는 인적없는 유도(流島)가 적막한 DMZ속에서 잠들어 있고 기다림에 지친 정자가 녹음 속에 늙어가고 있었습니다.

다시 강안(江岸)을 따라 강화의 북쪽끝인 철산리(鐵山里)언덕에 올랐습니다.이곳은 멀리 개성의 송악산이 바라보이고 예성강물이 다시 합수하는 곳입니다.생각하면 이곳은 남쪽땅을 흘러온 한강과 휴전선 철조망 사이를 흘러온 임진강,그리고 분단조국의 북녘땅을 흘러온 예성강이 만나는 곳입니다.파란만장한 강물의 역사를 끝마치고 바야흐로 바다가 되는 곳입니다.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일깨우는 곳입니다.멀리 유서깊은 벽란도(碧瀾渡)의 푸른 솔이 세 강물을 배웅하고 있 습니다.


나는 오늘 이곳 철산리에서 바다의 이야기를 당신에게 띄웁니다.
당신이 내게 강물을 생각하라고 하듯이 나는 당신에게 바다의 이야기를 담아 엽서를 띄웁니다.바다로 나온 물은 이제 한강도,임진강도,예성강도 아닌 바다일 뿐입니다.드넓은 하늘과 그 하늘의 푸름을 안고 있는 평화로운 세계일 뿐입니다.

나는 당신이 강물을 사랑하는 까닭을 모르지 않습니다.그러나 생각하면 강물은 고난의 시절입니다.강물은 목표를 향해 달리는 물이되 엎어지고 갇히고 찢어지는 고난의 세월을 살아갑니다.우리의 역사에서도 한강과 임진강·예성강 유역은 삼국이 서로 창검을 겨누고 수없이 싸웠던 전장(戰場)입니다.지금도 임진강은 휴전선철조망에 옆구리를 할퀴인 몸으로 이곳에 당도하고 있습니다.

 

생각하면 강물의 시절은 이념과 사상과 이데올로기의 도도한 물결에 표류해온 우리의 불행한 현대사를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인간의 존엄이 망각되고 겨레의 삶이 동강난 채 증오와 불신을 키우며 우리의 소중한 역량을 헛되이 소모해온 우리의 자화상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곳 철산리 앞바다에 이르러서는 암울한 강물의 시절도 그 고난의 장을 마감합니다.당신의 말처럼 이제 더 이상 목표를 향해 달리는 물이 아닙니다.한마디로 바다가 됩니다.목표가 없다기보다 달려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이곳은 부질 없었던 강물의 시절을 뉘우치는 각성의 자리이면서 이제는 드넓은 바다를 향해 시야를 열어나가는 조망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돌이켜보면 강물의 치열함도 사실은 강물의 본성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험준한 계곡과 가파른 땅으로 인해 그렇게 달려왔을 뿐입니다.강물의 본성은 오히려 보다 낮은 곳을 지향하는 겸손과 평화인지도 모릅니다.강물은 바다에 이르러 비로소 그 본성을 찾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바다가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이며 가장 평화로운 물이기 때문입니다.

바다는 가장 낮은 물이고 평화로운 물이지만 이제부터는 하늘로 오르는 도약의 출발점입니다.자신의 의지와 자신의 목표를 회복하고 청천하늘의 흰구름으로 승화하는 평화의 세계입니다.방법으로서의 평화가 아니라 최후의 목표로서의 평화입니다.
평화는 평등과 조화이며 평등과 조화는 갇혀있는 우리의 이성과 역량을 해방해 겨레의 자존(自尊)을 지키고 진정한 삶의 가치를 깨닫게 함으로써 자기(自己)의 이유(理由)로 걸어갈 수 있게 하는 자유(自由) 그 자체입니다.

당신에게 띄우는 마지막 엽서를 앞에 놓고 오랫동안 망설이다 엽서 대신 파란 색종이 한장을 띄우기로 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언젠가 이곳에 서서 강물의 끝과 바다의 시작을 바라보기 바랍니다.그리고 당신이 받은 색종이에 담긴 바다의 이야기를 읽어주기 바랍니다.그동안 우리 국토와 역사의 뒤안길을 걸어왔던 나의 작은 발길도 생각하면 바다로 향하는 강물의 여정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마지막 엽서를 당신이 내게 띄울 몫으로 이곳에 남겨두고 떠납니다.강물이 바다에게 띄우는 이야기를 듣고 싶기 때문입니다.

 

                                                                             신영복 나무야 나무야 중에서....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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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도시락

  • 등록일
    2004/08/31 16:41
  • 수정일
    2004/08/31 16:41

즐거운 점심 시간, 반찬 사냥을 나서는 아이들의 젓가락이 바쁘게 움직입니다.

어제 큰형이 생일이었다는 영철이 도시락 반찬이 집중적으로 공격을 받습니다.

그래도 영철이는 싫은 표정이 아닙니다.

창가에 앉아 있는 철수는 아무도 모르게 일어나 교실 밖으로 나갑니다.

도시락을 싸 오지 못한 것을 아이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철수는 운동장 쪽의 수돗가로 가서 허기진 배를 물로 채웁니다.

아이들이 반찬 투정을 하며 도시락을 먹을 때,

철수는 수돗가 옆 소나무 아래 홀로 앉아 뜨거운 눈물을 삼켰습니다.

철수에게 점심 시간은 너무 길고 슬픈 시간입니다.



오늘도 도시락 반찬은 김치와 마늘장아찌뿐입니다.

영수는 엄마의 도시락에는 무슨 반찬이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엄마가 일을 나가기 전에 몰래 엄마의 도시락을 열어보았습니다.

엄마의 도시락에는 밥과 반찬 대신

일을 할때 쓰는 헌장갑이 들어 있었습니다.

 

                                                                               조은재의 행복한 도시락 중에서.....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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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푸른내음] 이렇게 한번 해보자

  • 등록일
    2004/08/31 11:47
  • 수정일
    2004/08/31 11:47
슬퍼지면 소리내어 한번 웃자. 
기분 나쁘면 곱배기로 일하자. 
두려우면 문제속으로 뛰어들자. 
열등감을 느끼면 새 옷으로 갈아입자. 
불안하면 고함을 두어번 지르자. 
무능하게 느껴지면 지난날의 성공을 감사하자. 
자신이 보잘것 없게 느껴지면 인생의 목적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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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진보넷]백기완 선생님이 새내기들에게 주는 글

  • 등록일
    2004/08/31 11:44
  • 수정일
    2004/08/31 11:44

진보넷 BBS(Telnet 서비스) 통일문제연구소(이하 통문연)에서 99년도에 펌한 글입니다.

 

<새내기들에게 주는 글> - 현대 지성의 위기

 

(올바른 현실의식)
현대 지성의 위기는 어떤 것일까?
나는 그릇된 현실의식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오늘 아침 신문에 난 이야기다.
서울은행이 영국자본에 넘어 갔다는 보도가 났기에 나는 어느 예술인 한데 이점에 관하여 어떻게 생각 하느냐 물었다.  그랬더니 경제구조 조정을 하는데는 필수적인 수순이 아니겠느냐고 도리어 반문을 한다.

나는 이 사람이 알기는 알되 전혀 잘못 알고 있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서울은행을 영국자본에 판 조건을 보면  입때껏 서울은행이 진 빚은 우리 정부가 떠맡고 그리고 주식비율은 영국자본이 7할  우리 정부가 3할을 갖되, 그 은행 사업이 궤도에 오르면 3할도 마저 팔아 넘긴다는 것이다.


참된 경제구조 조정이란 무엇일까?



잘못된 재벌구조로 하여 몰락한 자주적  토대를 회복하고 아울러 빈부  격차 그 부조리를 청산하는 것이다. 그런데 서울은행의 빚을 우리 정부가 책임진다는 것은 바로 그 빚을 우리 국민이  떠맡는다는 것이요, 또 "은행사업이 궤도에  오르면" 어쩌고 하는 것은 그 사업 판단을 영국 자본의  자의에 맡긴다는 것이니 그것도 구조 조정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외래 독점 자본의 약탈적 이윤추구를 보장하기 위하여 민족 경제의 무제한의 희생을  강요하는 경제 구조에로의 전환 즉 우리 자주성을 우리 스스로가 황폐화시키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이를 경제구조 조정의 필수적인 절차라고 한다면 이는 무엇일까? 잘못 된 현실의식이다. 그 잘못된 의식으로 하여 자기와 자기가 살고 있는 현실을 파탄시키는 것이니 우리 새내기들은 어찌 해야 할까? 무엇보다  먼저 올바른 현실 의식을 갖는 공부부터 해야 할 것이다.

 

(올바른 역사의식)
바로 얼마전 일이다. 어느 실권자가 가령  영국자본이 한국에 투자 기업을 하나 세우면 그것은 우리 나라의  것이다. 반대로 한국기업이  영국으로 진출을 하면 그것은 이미 영국의 것이지 우리의  것이 아니라고 하기에 나는  이점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어느 사업가한데  물어 보았다. 그러자  그의 대답이 매우 명쾌하게 나온다. "당연한 말이다. 역사를 바로 본 생각"이라고 하는데는 그야말 로 입을 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냐? 이는 자본주의의 본질을 왜곡해도 더 이상 왜곡할 수가 없는 주관적 오판 과오이기 때문이다. 자본이란 본디 이윤추구의 본성을 갖고 있다.  만약에 그 이윤추구 계획이나 그 본성이 차단 되었을 땐 이는 곧 자본의 파탄으로 되는 까닭에 자본은 자기 재생산이라는 본성을 저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이점을 입증하는 것으로 미국에서 다른 나라에 투자했던 자본이 그 나라의  자본이 된 실례가 있었던가, 단 한 번도 없었다. 도리어 그 나라를 철저하게 예속시키는 신식민지 장악의 바탕을 마련해 갔던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말에 동의를 하는  것일까? 잘못된 역사의식 때문이다. 따라서 잘못된 현실의식이 자기 현실을 파탄시키는 것이라면  잘못된 역사의식은 역사적 현실을 파탄시킴과 아울러 역사의 방향을 그르치는  것이니 젊은 새내기들 이여, 무엇부터 고민을 해야 할까요?  올바른 역사의식을 터득하는 공부부터 해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잘못된 가치관)
요즈음 대학의 분위기를 보면 크게 두 가지 흐름이 있는 듯하다. 밤새 도서관의 불이 켜져 있는 것이 상징하듯 고등고시  준비, 대학원 진학준비 그리고 취직시험 준비를 서두르는 젊은이들의 분위기가 그 하나다.


이는 오늘의 현실을 사는 젊은이들의 애처로운 고뇌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곧바로 이야기하면 오늘의 현실에 비비고 들어가  엉덩이만 붙이려는 기생적 속물주의는 아닐까? 자못 서글퍼지거니와 또  하나 안타까운 학원 풍조가 있다.


튀는 개성을 앞세우면서 사실은 이기주의로 자기가 자기를 갈기갈기 찢는 작태, 허무주의를 신주처럼 모시는 허깨비 짓이다. 이점을 사회적으로 반영한 것이 모험적 기업으로 떼돈을 번 사장의 성공을 모범으로  내세우는 세상풍조에 덩달아 지금 젊은이들은 또 한번 허공 속에서  갈기갈기 분열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돈을 번 사장이 향수를 40여종을 찍어 바르는데에 대한 부러움, 고급 차를 타고 마음껏 자기를 즐기는 것에 대한  환상적 동경과 무기력 퇴폐  타락에 빠져들고 있다. 그 범죄는 어디까지 왔느냐하면 "원조교제"라는 왜풍 성도착증 속으로  젊은이들이 몰려가는 지경이다.

 
왜 이렇게 되고 있을까?
올바른 가치관의 상실에서 비롯된다. 때문에 오늘의 젊은이들은 먼저 전문적 기능인이 되기를 원하기 전에 올바른  인생의 가치는 과연 어떤  것인가를 몸부림쳐야 할 것이다.

 

(젊은 지성의 무기는?)
현대 지성의 위기란 딴 것이 아니다. 오늘의 지성이 앞장서 우리 인류의 보편적 꿈을 왜곡 파괴하는 만행에 있다고 믿어진다. 가령 경제 재건하면 어떤 것이 재건일까? 하는 그 모형을 역사의 진보에서 구하려 하질 않고 재벌의 범죄적 성공담에 두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이 때문에  지금 우리들 앞에는 야욕 야망만 부추겨 질 뿐 참된 꿈은 도리어 실패한 환상으로 조작하고 있으니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오늘의 젊은 지성 새내기들에게 목놓아 외친다.
나는 그대들에게 꿈을 가지라고 하질 않는다.  도리어 그대들 스스로가 꿈을 빚으라고 외친다. 한 개인의 꿈이 아니라 이 세상의 꿈을. 그 꿈이 바로 젊은 지성의 무기이기 때문이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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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백무산] 존재는 기억에 의존하지 않는다.

  • 등록일
    2004/08/31 10:13
  • 수정일
    2004/08/31 10:13

계절이 지난 후에

지난 계절을 떠올리면

예컨데, 겨을날에 지난여름을

그려보면, 몇 달 앞 계절이 아니라

먼 옛날 상처 깊던 여름날이 뭉클하고

지난 봄날이 아니라

열아홉 바닷가 봄날이 새롭고

첫사랑 붉은 가을이 불쑥 펼쳐진다.



 

그런데 겨울을 떠올리면

어쩐 일인가, 기억을 넘어선다

한 삼백 년을 지난 겨울이

기억의 영토 밖에서

의식의 지평 저 너머에서 솟아온다.

 

산에, 저 겨울 벗은 산에

눈 내려 하늘 닿은 능성에 나는 있다.

의식이 분화되기 전에

기억이 발생되거 전에

감각이 조직되기 한참 전에

나는 옛 거울처럼 그렇게 있어

내 그리움의 원천은 언제나 그곳에서

그 혼돈의 영토에서 한 생각 몸을 얻는다.

 

생애의 시간과 기억은

존재의 작은 티끌이나 겨우 담을 뿐이다.

 

                                                       백무산 시집 初心 중에서....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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