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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4/09/02
    노동해방영화의 이론과 조직적 발전을 위하여
    간장 오타맨...
  2. 2004/09/02
    [새로읽는 고전] 마르크스는 누구인가
    간장 오타맨...
  3. 2004/09/01
    [평론/도정일]「젊은 시인들을 위하여」
    간장 오타맨...
  4. 2004/09/01
    [시/김지하] 중심의 괴로움
    간장 오타맨...
  5. 2004/08/31
    [나무야나무야/신영복]철산리의 강과 바다
    간장 오타맨...

[시/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 등록일
    2004/09/02 11:30
  • 수정일
    2004/09/02 11:30

알엠님의 글을 보고 기형도 시인의 시가 생각나 트랙백(누구는 니그들이 게맛을 알어 주장하며 크랙백이라 우기지만 기술적인 용어를 모르는 저는 진보네가 부르는 트랙백을 고수할랍니다.)걸었습니다.

 

알엠님의 글을 트랙백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옹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니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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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해방영화의 이론과 조직적 발전을 위하여

  • 등록일
    2004/09/02 01:49
  • 수정일
    2004/09/02 01:49
오래전 갈무리한 글이라 출처는 모르겠고..
   
  <<< 노동해방영화의 이론과 조직적 발전을 위하여 >>>
   
              순     서
   
     I.   글 머리에
     II.  노동해방영화의 이념
     III. 노동해방영화의 미학적 원칙
     IV.  노동해방영화의 조직적 전망
     V.   민중민주주의 영화선전정책
     VI   결론을 대신하여
   
   
      I. 글 머리에
   
      1. 노동자의 생각과 의미를 함께하는 영화가  탄생되었다. 흔히 노동자영화 1호라고 불리우는 것이 그것이다. 미약하나마 최초라는 이름을 달고 그에 책임을 지니고 있는 <파업전야>는 이제까지 자본가계급과 미제국주의의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 선전의 무기였던 영화가 독점자본의 착취에 고통받는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전 민중의 해방을 위한 위협적인 무기가 될 수 있음을 각성케 해주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우수한 무기를 갈고 닦기 위해서 해야할 일은 너무 많다. 누군가가  영화를 1초에 24발의 탈알을 발사하는 무기라고 지칭했던것  처럼 영화의 문화적인 파급효과와 흡인력을 노동자계급, 아니 민중의 편으로 만들기에는 보다 많은 고민들을 필요로한다. 단지 이제 노동자계급의 영화는 최초의 한 발을 내디뎠을 뿐이다.


      2. 이글은 노동자계급의 강력한 무기로서의 노동해방영화가 앞 길에 놓인 무수한 난관을 뚫고 단지 내용의  우위뿐만이 아닌 가장 예술적인 무기로서 진정한  변혁의 길로 한발  한발 다가가기 위한 이론적인 시론서 기능하기를 기대하며 쓰여진다. 길은 무수히 많다 하지만 노동해방사상이 현실적인 모습에서  찾아나갈 변혁운동의 가장 강력한 형태임을 필자는 확신한다.
   
      3. 90년대 남한의 변혁운동은 노동자계급운동의 독자성과 단결의 사상을 필연적으로 요구하고 있으며87~89년을  거치며 급속히 성장한 자생적 노동운동은 우리사회변혁의 최전방에서 그 의미를 더해갔다. 이는 이러한 변혁운동의 최대의 과제가 노동운동과 과학적 노동해방사상의 결합이자 이의 통일을 매개하는 노동자계급의 전위적 정치세력화임을 입증하고 있다. 이러한 정세속에서 영화운동 또한, 현제까지의 자생성과 이에 따른 안일한 만족주의와 민중주의의 낮은 수준을 극복하고 노동자 계급의  과학적 사고관에 의해 지도되어야 할 필연성을  부여받고 있다. 이것이 영화운동에 있어서의 진정한 노동자계급의 당파성이다.
   
      4. 현제의 노동자계급  영화운동의 정세는 총체적 변혁운동의 정세에 의해 규정받고 있으며 이는 곧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의 기본 모순과 그 주요 발현형태인  내외독점자본과 전체 민중간의 대립에 의해 조건지워지고 있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제국주의와 신식민파시즘에 의한 반인간적,반동적  퇴폐영화산업(제국주의-파시즘 영화산업)이 독점자봉의 논리에 따라 제도적으로 육성 보호되며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의 선전,선동체계의 확립을 강화 하고 있으며 이는 자신들의 지배체제의 유지와 전체 민중의 계급의식을 마비시키는데 이용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민중들의 진보적 정치의식과 이해를 대변하는 진보적 영화운동진영(민중민주주의 영화전선)이 이와같은 지배이데올로기의 해악과 탄압에 맞서 계속 투쟁하고 있다.
   
      5. 현제의 진보적 영화운동진영은 진보적 소자산계급의 영화(민족영화),자생적인 노동자계급의 영화(현장영화), 그리고 아직은 구 체적 실천 결과물로서는 나타나지 못한 혁명적  노동자계급의 영화(노동해방영화)로 분화되어 가고 있다. 이것은 물질운동의 발전의 합법칙적인 계급분화과정의 영화적 반영일 따름이며 통일전선 내에서의 각계급의 존재형태일뿐이다.
   
      6. 필자는 노동자계급이 시급히  자신의 영화를 변혁운동에 결합시키고 거기에 새롭게 과학적 전망을 부여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오직 노동자계급이 영화의 영역에서 과학적 노동해방영화 이념을 정립하고 이것의 형식으로서의 전환인 노동해방영화 단일전선과 진보적인 민중진영과의 계급적 동맹인 민중민주주의 영화전선 정책을 실천할 수 있을때만이 비로서 그 강력한 파괴력을 실천할 수 있으며 그렇게 되는것에대한 가능성에 대해서도  굳게 믿고있다.
   
   
      II. 노동해방영화의 이념
   
      1. 영화는 사회적 의식의 한 형태로서 항상 제계급의 이해관계를 반영하고 제계급의 투쟁에 있어 사상적인  무기로써 복무하여 왔기 때문에 계급사회의 모든영화는 계급적이며 필연적으로 당파적 입장을 취하게 된다.

    자본주의사회에서의 노동자계급의 영화운동에 있어서 기본이념은 노동자 계급의 객관적 토대인 과학적 노동해방사상,노동자계급의 당파성을 그 이념적 계기로 가지고 있다.
   
      2. 노동자계급의 객관적 토대란 노동자계급 영화운동이 노동자 계급의 계급적 이익실현을 위한 투쟁 및 그  투쟁의 경험과 결합되어야 함을 말한다. 그러나 이를 근로민중과 노동자계급의 '정서'와 '비위'에맞는 영화로 파악해서는 않된다.  흔히 주체영화이론에서 말하여 지는 민중적 내용에 민족적 형식은 진정한 유물론적  관점에 서서 비판되어져야 한다.

    노동자계급의 객관적 토대의 의미는 현 자본주의의 착취체제하에서의 노동자계급의 변혁을 향한  투쟁과 그 경험이  주요한 것이지, '민중의 입맛'에 맞기만 하면 되는  대중추구주의로 이해되서는 않된다. 노동해방영화는  노동대중의 삶 그 자체에 국한되는 편협함을 극복하고 바로 노동자계급 변혁운동의 객관적 요구이자 그 미적, 이데올로기적 무기로써 변혁운동관 결합되어야 한다.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진출은 그 자생성을 과감히 목적의식성으로 전환하려 하고 있으며 진정한 노동해방영화는 이에  부응하고 복무해야 한다. 이것이 노동자계급 영화운동의 객관적 토대이다. 
        
      3.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세계관은 영화창작에 있어서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세계관이 사상적 토대이자 선전선동의 궁극적  촛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민족영화론자들이 주장하는 '사상예술성'이란 '관념적, 사대적, 교조적 이론을 벗어던진 주체적, 과학적  사상성, 영화예술성'을 말한다. 이는 언뜻 보기에는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세계관과 차이가 없어보이지만, 계급의식과 노동자계급의 영화운동을 바라보는 입장에서 엄격한 차이를 지닌다.


    이는 노동자계급의 자생적 계급의식을 쫒아가는 것이 아닌, 대중의 정서와 수준에 영화의 사상성, 예술성을 0쩠杉  것이 아닌, 진 정한 노동자계급의 계급의식,  즉 노동해방사상을  영화를  통해  대중에게 선전, 선동하고 자생적  노동운동이 혁명적 계급의식으로 무장하게 하는 것, 그리고  인류의 우수하고 진보적인 예술유산을 노동자계급의 영화창작에 흡수하는 것 -혹자는 이것을 사대적, 서구취향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영화의 형식에서 민족적 인것, 예술에서의 주체적인 것이 과연 존재하는지  묻고 싶다. 그리고 오랜 예술적 전통속에서 만들어지고 자라온   노동자계급의 진보적 유산들이 '서구적'이라는 이유로 사대주의라는 딱지를 붙여야한다는 것은 70년대의 마당굿주의자들의 편협한 뿌띠 부르조아적 민족주의를 연상시킨다.- 을 뜻하며  이는 주체주의자의 관념론적 인민의 자주성과 경제주의자의 노동자계급의 자생성에 머무르지 않는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세계관만이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정확히 반영하고 현실을  과학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노동자계급의 유일한 세계관이며 노동해방영화는 이를 자신의 이념으로 삼아야함을 뜻한다.
   
      4. 노동자계급의 당파성이란 위의 노동자계급의 객관적 토대와 노동해방사상, 이 두가지 요0弩 결합을 매개하는 원리이다.  노동자계급의 모든 사업의 원칙으로서의 당파성은 영화운동에서도 어김없이 관철된다. 변혁기에 있어서  예술사업은 예술을 매개삼아 변혁의 필연성과 방도, 새로운 사회로의 전망을 선전, 선동해야하며 이와함께 이제까지의  예술유산보다도 훨씬 질적으로  뛰어난 예술을 건설해야한다는 두가지 과제를 가지고 있다.

 
    레닌의 "가장 우수한 예술작품만이 가장 우수한 선전, 선동의 수단이 될수 있다."라는 말은 우리가 어떠한 형태의 영화예술을 추구해야할 지를 명쾌하게 말해준다.

 
    그렇다면 영화에 있어서의  당파성이란 과연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다양한 형식과 양식에있어서의  영화예술적 유산을 어떠한 방식으로 노동자계급의 영화로 흡수시킬것인가라는 문제를 포함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노동해방영화는 무한히 열려있는 문화적양식 -단순한 민족적 양식 뿐만이 아닌- 총체성과 주체적 역량을 요구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다음 문제는 그 실제적인  발전방향에 있다. 즉 이러한 당파성을 현실화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85년 대두되었던 소위  현장영화론은 당시 선언적  민중지향성을 극복하고 민중에 대해 영화를 통한  선전, 선동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노동현장에 영화활동가들이 투신하여 노동운동 속에서 영화를 통한 과학적 세계관의 선전, 선동  활동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88년도의 노동자뉴스단의 이름으로 부활하여 시각매체 선전소조로서의 역활을 수행하고 있다.

 
    이러한 현장영화론은 영화운동에 노동계급의  당파성을 결합시킴으로써 정확한 정치적 목적의식성을 영화에 부여한  최초의 영화 이념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긍정적인 의의에도 불구하고  현장영화는 노동자뉴스단을 비롯한 영상매체 수미일관 주장하고 있는 노동자계급의 당파성은  목적의식적인 계급의식, 노 동해방사상의 결합이 아닌 현장의 자생적 노동상황을 보도하는 데 그칠뿐, 노동해방적 관점에서  재해석하여 근본적 변혁운동으로 이르게 하는 노동자계급의 진정한 해방의 영화로는 뚜렷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5. 노동해방영화는 노동자계급 변혁운동의 경험을 과학적 사상에 입각하여 미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노동자계급과 전  민중을 노동해방사상과 혁명적 정서로 무장시켜 그들을 변혁운동으로 이끌어 내는데 복무한다.


    지금까지의 축적되어 온 진보적  영화운동의 성과를, 새로운것을 창조한다는, 혹은 주체적이지 못하다는 명분하에서 폐기처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변혁의 무기로써 노동해방영화를  제공하고자하는 것이며 이러한 노동자계급과 전 근로민중을 변혁운동으로 불러들이는 능력, 그것에  의해 노동해방영화의 진리성은 전 민중과 역사속에서 검증받을 것이다.
   
   
    III. 노동해방영화의 미학적 원칙
     
      1. 노동자계급 영화운동은 인류문화의 고전적 유산들의 진정한 계승자인 '당파적 현실주의'를 주요 영화창작방법으로 한다. 여기서의 '창작방법'이란 단순한 서술기법이나 현실주의적  예술현상이 아닌, 노동해방사상, 노동자계급의 당파성, 현실주의적 예술방향, 이 셋의 통일이다.


    프라하트는 이를 '응용된  세계관'이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이는 예술방법이 세계관으로도 또는 대상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세계관 -예술방법- 대상의 유기적 결합이란 의미에서 총괄하고 귀납된 결과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당파적 현실주의에 대한 부르조아 예술가들의 악선전이 난무하는 것은 실재로 존재하는 당파적  현실주의 에 대한  갖가지 편향적 이해와 실천에 근거한 것이다. 예를 들어,  방법을 세계관으로 환원하여 미적 고유성을 무시하고 예술을  과학적 인식, 정치적 견해의 도해로 이해하는 주체영화 이론이 있다.


    이는 노동자계급의 예술적 당파성을  노동자계급의 이데올로기와 그 정책에 영화활동 전체를 확고히 결합시키는  원리로써 이해하지 않고 '이론적, 방법론에 있어서의 포괄적인  원칙'인 당파성을 '도덕적, 윤리적 신념의 문제'로 전환시켜 버린 결과이다.

 
    이는 민족영화연구소를 중심으로 한  민족해방론자들의 영화예술에서의 당파성 또한  자주, 민주, 통일을  열망하는 노동자계급의 자주성, 혁명성을 억지로 꿰맞춘 것이 되고 있다. 이에 의하면 당파적 현실주의의 이념은 노동해방적 당파성과 예술창작의 현실주의적 정향간의 유기적 연관의 이념이며, 여기서는 당파성이란 계급주관주의를 포함하지 않은 예술적  인식의 원리이며, 미적범주로서 소재와 주제의 선택, 구성,  내용과 현실의 통일, 기능과 구조에서 갈등의 형상화에 이르기까지 전부분에 걸친  예술의 방법론으로써 관철된다. 영화예술 또한 각  포멧 고유의 특수한 합법칙성을 매개로하여 미학에 있어서의  당파성, 당파적 현실주의를 관철시켜야만 한다.
   
      2. 다음은 당파적 현실주의가 '예술방법'을 바라보는 원칙을 과학적 방법에 대한 차별성,  방법과 양식의 연관속에서  살펴보자.


    이는 노동해방영화의 미학적 원칙을 규정하는 제 일보가 될 것이다.

 
    예술방법은 과학적 방법과 달리 인식과 가치평가의  통일로써 세계를 전유한다. 예술은 과학과는 달리  주관과 분리된 대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예술주체와의  관계를 그리는 것이기 때문에 가치평가(미적, 윤리적)가 또다른 결정적 의의를 지닌다.

 
    이것이 예술방법의 특수성이다.

    예술방법 내에서의 정확한 개념적 규정도 당파적  현실주의를 이해하는데 필요하다.


    예술의 방법과 양식의 변증법적 구조를 살펴보면  방법이란 현실의 예술적 전유를 규정하는 '원리들의 체계'인 반면, 양식은 창작의 결과가 고정되는 일정한 '현실들의 체계'이다.

 
    즉 방법은 그 어떤 협소한 형식, 규범의 틀속에 묶이거나, 현실주의라는 예술양식의 예술적 일반화의 특정형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포괄적인' 인식방법, 가치평가  방법 그 원리들의 체계이다. 이때 방법들은 그 하위 범주로서 양식, 기법과 같은 형식 체계들을 과감히 선택할 수 있다.  예컨데 현대 부르조아 영화양식들-포스트 모더니즘, 표현주의, 자연주의  증에 사용되는 기법, 형식들- 은 당파적 현실주의 내로 편입될수 있다.

 
    이 방법과 양식의 변증법에 대한 몰이해는 주체영화이론의 '사회주의적 내용의  민족적 형식'이라는  민족형식론에서 대표적으로 드러난다. 이는 예술방법을 형식들의 체계, 양식으로 협소하게 이해한 결과이며, 민족형식 또한 방법을 '민족적  특수성'이라는 협소한 틀 속에  옥죄하여, 풍부한 기법,  수단, 처리방식을 사전에 봉쇄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민족적  고유성이 현실주의 예술의 내용에 일정정도 반영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구체적인 기반을 벗어난 '세계시민적' 진공상태에서 예술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민족적인 것의 핵심은 민중적, 민족주의에 있는 것이지 소부르조아적 민족주의적 민족주의에 있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형식에  있어서의 민족적 고유성이 관철되는 것은 예술장르별 특수성에 의존한다. 영화에 있어서 민족고유의 형식이라니!
   
      3. 이러한 예술방법에 대한 이해에서의 오류와 편향은 또 다른 방식으로도 존재한다. 방법을 세계관으로 환원하는 '예술  도구주의'는 속류사회학주의적 미학에서 유래하는데, 예술을 계급 이데올로기의 표출로 규정하고 미적 고유성을 무시한 사상성의 일방적, 무매개적 관철을 주장한다.  이는 예술을 과학적 인식방법과 분리하지 않은채 정치적 견해의 도해로 이해하는 좌편향이다.


    이와는 반대로 방법을 세계관과 분리하여 대상으로  환원하는 우편향적 오류도 있다. 이는 가까이는 현장영화론에서 나타나는 바, 자생적 체험을 절대시하여 '현장성, 운동성'이 있는  대상에 대한 굴종에 머무르고 만다. 대상은 그 자체로서 영화예술의 원천이며, 예술방법은 대상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세계관으로 부터 자유로울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장영화론은 노동자계급의 계급적 이해에서 출발하지만 '체험의 직접성이 지니는 유물론적 의미'라는 경제주의적  예술관에 빠지고 만다.

 
    당파적 현실주의는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세계관에 의해  세계를 인식하고 진정한 노동해방사회의 이상에 비추어 가치평가해 내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적, 미적 질을 지닌다는 전에서 이전의 것과는 질적으로 구분되는 예술방법이다.

 
    노동자계급의 당파성이 과학에 있어서 최고의 과학성과 객관성을 담보하듯이 당파적 현실주의는 무한히 열려진 예술성  속에서 세계를 미적으로 전유한다.
   
      4. 영화의 내용과 형식은 유기적 통일을 이룬다. 그러나 당파적  현실주의는 형식에 대한 내용의 우위를 주장한다.


    노동자계급의 영화장작은 노동자계급 변혁운동의 발전 속에서 미래의 필연성을 담보할 새로운 내용을 포착하는데  우선적인 관심이 두어져야 한다.

 
    이러한 내용의 형식으로의 전화가 형식의 문제이며, 이러한 원칙에 입각하는 한 새로운 형식,  진보적 영화형식의 창조적 탐구와 적용은 장려되어야 한다.
   
      5. 당파적 현실주의를 영화에 적용하는데 있어 유의해야 할 점은 영화의 각 포멧의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의 각 포멧(드라마, 다큐멘터리, 에니메이션 등으로 나뉘어지는 영화형태)은 영화가 반영해야할  대상이 세분화되고 다양화됨에 따라 역사적으로 분화되고 성립해온 것이다.

 
    그들 각각은 영화의 일반화, 개성화의 가능성을 달리하며, 그러므로 어느 한 포멧에 타당한 기준을 다른  모든 포멧에 무매개적으로 적용해선 안된다.

 
    각 포멧별 창작자는 당파적 현실주의라는 보편적 원칙을 포맷 고유의 영화언어를 통해 특수화하는 노력에 최대한 주력해야 한다.


    이러한 각 포맷별 창작은 개인창작이든 집단창작이든 '조직창작'을 원칙으로 한다.

 
    당파적 지도가 관철되는 조직 -다음장에 서술될 노동자계급 영화 단일전선은 이것의 한 형태이다.- 은 창작자의 소중한 재능을 보호하고 현실에 대한 총체적  인식을 획득할 수  있도록 지도하며 이는 창작의 질과 생산력을 높이기 위한 필수적인 형식이다.
   
   
    IV. 노동해방영화의 조직적 전망
   
      1. 계급사회에서 노동자 계급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새로운 영화를 건설할 가능성을 거의 가지고  있지 못하다. 새로운 노동해방영화는 역사상 인류가 축적해온 모든진보적 영화유산의 전유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고 앞에서 언급하였다.

 
    노동자계급의 목적의식적인 계급의식이 자생적  노동운동의 외부에서,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의 외부에서만 주입되듯이, 노동자계급은 자신의 변혁투쟁을 통해, 진보적 영화예술 인텔리에게 정신적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자신의 영화를 건설할 수 있는 조건을 획득하게 된다.


    그리하여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영화를 본격적이고 체계적으로 획득하는 계기는 오직 현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영화창작과 노동자계급의 과학적인 사상으로 무장한 전업적인 영화 활동가에 의한  전문적 영화창작의 결합에 의해 주어질 수 있다.

 
    이는 영화활동의 두가지 방향을  사상적,조직적으로 결합시킬 새로운 노동자계급 영화운동의 물질적 결집체인  '노동자계급 영화 단일전선'(이하 '단일전선')에 의해 가능하다.
   
      2. 현재와 같이 노동해방영화의 독자적 전통이  단절되어 있고, 노동자계급의 전위당에 의한 예술적 지도가 부재한  상황에서 단일전선에 의한 조직적  독자성은 노동자계급 영화운동의  이념적 독자성을 보장해줄 형식으로뿐만 아니라 그 이념의  실현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현재까지 노동자계급의 영화운동의 조직은 진정한 계급의식을 담보하지 못함으로 인해 써클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신식민지파시즘 영화정책의 횡포에 의해 재생산의 기회조차 일정정도 박탈당해 있는 실정이다.


    전노협 원년영화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노동자계급으로부터 받은 '파업전야'를 제작한 영화제작소 '장산곶매'만하더라도  상영저지 및 제작자 수배 등 여러가지 수단을 통해 파시즘 진영은  노동자 영화의 물질적, 정신적 재생산을 저지하려하고 있다.

 
    우리 노동자계급영화운동이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할 일은  -민족 영화측에서 주장하는 정파와 이념을  초월한 대동단결, 즉각적인 조직통일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세계관에 입각한  사상투쟁, 그리고 이를 통한 노동해방영화이념에 대한 수준높은 사상통일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내부에 최대의 적이 있다.
    우리영화운동을 가장 고통받게 하는것, 그것은  써클주의이다. 써클주의는 조직이 외연으로 확대되어 규모가 커진다고 불식되어지는 것은 전혀아니다.

 
    써클주의의 본질은 운동의 조직적, 물질적 수준이 써클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영화활동가의 소소유자의식, 그리고  그로 인한 전망의 협소함이다. 그래서 써클주의는  전사회적 차원의 변혁운동에 무관심하고, 자기 써클과 정파의 개별적 이익을 최우선적인 목표로 삼는 경향을 지칭한다.


    노동자계급 영화운동이 써클주의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은 노동자 계급을 비롯한 근로민중의  현실을 진정으로 변혁시키기  위해서 전영화운동적차원의 제작과 보급의 프로그램을 갖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3. 단일전선은 영화예술발전의 합법칙성에 입각한 고유한 예술적 임무를 갖는다. 이러한 단일전선은 인류의 진보적 영화예술을 자양분으로 흡수하고, 동시에 이를 토대로 노동자 대중의 자발적 영화창작을 한층 높은 수준으로  확대, 발전시킴으로써 노동해방 영화의 질적, 양적 발전을 이루어야  하는 과제를 목표로 해야한다.

 
    이는 노동자계급 영화예술의 고전을 이루어야 한다는 임무이기도 하다. 소련은 혁명이후  영화예술의 전통을  세우기 위해 주력한 바 있다. 그리하여 에이젠시타인의 '전함 포템킨'등과  같은 노동자계급 영화의 고전을  세워 노동자계급의 영화가  자본주의하의 부르조아영화보다 내용, 형식에  있어 월등할  수 있다는 선례를 보여주었다.

 
    지금 남한과 같이 국가독점자본이 지배하는 나라에서의 노동자계급의 예술적 영량은 이전 시기의 것과 비교해  훨씬 뛰어남이 분명하다.

 
    우리는 우리의 역량을 제대로 모르고 있을  뿐이다. '파업전야'가 가진 예술적 역량은 그것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타국의 노동자계급 영화예술의 경험과 인류의 우수한  진보적 예술역량을 우리의 것으로  전유한다는 영화예술의 당파성이 있기 때문이다.


    "적군의 무기고를 아군의 무기고로!"
   
      4. 다른 한편 노동자계급의 영화운동의 단일전선은 변혁운동의 일반적 요구에 입각한 고유한 정치적 임무를 가진다.


    단일전선은 그 활동의  주요대상인 전노동자 대중속에서  그들의 자생적 계급본능을 진정한 계급의식의 수준으로까지 고양시키고, 소시민, 농민, 지식인, 도시빈민  등 여타의 노동자계급의 동맹자들 속에서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한 연대의 필요성을  선전하게 될것이다.


    이는 모든 변혁기의 노동자계급 문예운동이 가지는  공통의 정치적 임무이며, 대중 선전선동력이 가장 우수한 예술장르이자 매체린 영화에 있어서는 더욱요구되는 것이다.


    우리의 영화지상주의자들은 왜 영화가 정치선전 선동을 해야하는지를 모르고 있다. 계급사회의  모든 의식과 문예는  자생적이든, 목적의식적이든 간에 각 계급의 이해와 결합되어 있다.


    이러한 유물론적 예술관을 획득할때,  노동자계급의 당파성은 역사발전과 전인류의 평화와 발전과  일치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할때, 우리의 영화운동의 정치적  과제는 영화활동가에게 자기의식화된 총체성으로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5. 단일전선은 위의 두가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영화창작을 중심으로한  이론, 조직, 기획  등의 전문적 역활분담체계이자, 영화를 통한 대중적 선전선동의 체계이다.


    단일전선은 이러한 체계를  통해 노동자계급의 영화활동과  계획적, 조직적으로 결합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을 과학적 노동해방사상으로 무장시키는데 기여할 것이다.
   
      6. 단일전선은 어떠한 경로를 통해 건설되는 것일까? 조직이란 '내부 사상통일의 수준에 적합한 자기형식으로의 외화'에 다름아니다.


    필자는 앞에서 추상적으로  나마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세계관에 의한 사상투쟁, 그를 통한 사상통일이라는  경로에 대해 밝힌 바 있다. 이것은 우리가 단일전선을 형성하는 원칙이자 원리이다.

 
    그것의 구체적 경로는 현재 영화운동의 정세의 역관계와 같은 조건에 의해 다양하게 시도될 것이다.


    최근의 예를 들어 보면 , 노동자영화 '파업전야'가 파스즘 국가권력에 의해 탄압에 직면해 있을때 노동자영화  사수투쟁의 지도부로써 장산곶매를 중심으로, 각 노동자 영화써클이 조직한  '파업전야 탄압저지를 위한 공동투쟁 위원회'(이하 공투위)는 왜 단일전선이 필요하며, 그것이 초보적이나마 어떻게  건설 될 수 있는가에 대한인식의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적극적인 접촉속에서 자연스럽게 사상투쟁의 단초가 만들어 질 수 있으며, 각집단에  존재하는 써클주의를 공개적으로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급변하는 정세속에서 공동제작단의  필요성이 공투위안에서 제기되고, 메이데이 공동촬영이 임시적으로나마 꾸려지는 후속작업이 뒤따랐다.


    일시적인 사안에 의해서는 낮은 수준의 단일전선의  단초는 마련되었다. 그러나 단일전선은 높은 수준의 사상통일에 의해, 영화운동의 최대의 장애인  써클주의을 무력화,  혹은 최소의 장애로의 전화를 통해 가능한 것이다.
   
   
        V. 민중민주주의 영화전선정책
   
      1. 본고의 서문에서 노동자계급 영화운동의 현  정세는, 제국주의 -파시즘 영화산업과 진보적인 영화운동진영인  민중민주주의 영화전선의 대립에 의해 조건지어진다고 분석한바 있다.


    진보적인 영화운동은 80년대초의 서울영화집단과  몇몇 대학영화집단을 중심으로 대항영화, 작은영화, 제3세계 민중영화  등의 영화이념을 내걸고 시작되었다. 이들이  제작한 "아리랑 판놀이", "수릿세", "파랑새" 등의 8mm소형영화들은 한국사회 내부의 모순이 심화됨에따라 자연발생적인 대안으로 탄생되었으며, 제 3세계 민중영화운동을 전범으로 삼아  '민중지향'적이고 탈상업적인 영화운동을 표방하였다.


    그러나 제작비, 활동인원, 대중의 신뢰도와 같은  물적 기반의 취약과 영화제작의 수공업성, 그리고 제작 만능주의와 같은 영화예술에 대한 편협한 이해는 이들 영화집단에게 끊임없는 고통을 가져다 주었으며, 변혁운동의 양적, 질적 성장속에서 보조를 맞추지 못하고 그들의 추상적 민중지향성과 선언적 영화운동론은 자기파멸의 길로 귀결되었다.


    그후, 진보적인 영화운동은 얄라셩과  보임기획등을 중심으로 한 현장운동을 거쳐 87년이후, 민족영화론의 성립을 가져다 주었다.


    '영화예술운동의 역사적 전통과 한국사회변혁운동의 구체적 현실과의 접목'속에서 영화운동의 과학화를 선언한 '대학영화연합'(이하 대영연)의  민족영화운동론은 영화운동을  변혁운동과 동일한 선상에서 파악한 최초의 시도였다는 면에서 의의가  있지만 실제적인 제작역량의 제약등으로 인해 구체적인 성과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 이후 노동자뉴스단과 같은 현장영화가 다시 대두되고, 대학영화연합이 제기한 민족영화론을 계승발전시킨 '민족영화연구소'는 민족영화론을 구체화, 현실화시킴으로써 영화운동의 새로운 건설을 과시하였다.


    88년이후는 민족영화연구소(후에 한겨레영화제작소가 역활분담에 의해 분리됨)를 중심으로 하여, 대영연의 OB팀들이 만든 '영상기획 들풀', 그리고  '노동자뉴스제작단',  '영화제작소  장산곶매' 등이 민족영화, 민족민중영화, 노동자영화, 진보적 영화이념을 각각 내세우며 등장하여 진보적영화운동의 양적증대를 가져왔다.


    이는 변혁운동의 성장과  더불어 진행된  문예운동의 양적, 질적 발전의 필연적인 산물이며 변혁운동 내에서 계속되어온 제계급간의 사상투쟁의 영화적 반영에 의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이중에는 87년 7,8월 이후의 자생적인 노동운동의 폭발적인 성장에 힘입어 '노동자영화운동'을  영화이념으로 내세운 영화집단들도 나타났으며, 아직은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세계관에 의한 높은 수준을 가지지 못했지만 활동대상을 노동자대중 및 근로민중으로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2. 이상과 같은 진보적  영화운동의 발전과정은 남한 자본주의 발전이 가속화되면서, 영화운동진영 내의  계급분화의 과정을 겪게 된다.


    또한 동시에 우리사회는 국내외 독점자본과 이로  인한 신식민지파시즘 국가의 정치적 반동이  지배하는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로서, 독점자본가와 국가권력은 최소한의 민주주의적  요구마져 철저히 탄압하는 정치적 반동을 강화하고, 이에 대항하여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한 피착취 근로민중들은 공통적 이해를 가지고 반제반독점민중민주주의 전선을 이루게 된다.


    영화운동진영 또한 민중민주주의  영화전선을 통해, 제국주의-파시즘 영화산업의 파시즘 영화악법 발효와 제국주의 영화독점자본의 국내직접배급에 맞서, 공동투쟁을 수행하고 있다.  이는  계급 모순의 격화에 따라  민주주의적 영화와 노동자계급영화  사이의 민중성-독점자본과 파시즘에 대항하는-을 토대로 한 일정한 동맹관계를 말해주는 것이다.
   
      3. 영화에 있어서 민중성이란  영화에 반영된 피착취 근로민중들이 지닌 민주주의적, 휴머니즘적 진보성을 의미한다.


    민중성의 구체적 내용은 각 사회발전의 전단계마다  민중들이 해결해야할 구체적인 역사적 과제에 의해 규정되며 -예를 들면, 봉건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기에는 자본가계급의  계급성은 민중성과 결합하여 봉건제에 고통받는 전 대중의 진보성을 대변하였다. 이시기의 문예또한 마찬가지였다.- 오늘날  남한사회에서 그것은 제국주의와 독점자본에 대항하는 민중들의 민주주의적 진보성을 그 본질적 내용으로 한다.


    그러나 계급사회속에서 모든 영화는 항상 계급성을  띄게 마련이며, 민중성역시 '추상적인 민중성 일반'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계급의 구체적인 계급성'에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계급분석을  한다면 진보적  소시민계급에는 조감독협의회, 독립영화집단들, 민예총산하  민족영화위원회, 민족해방영화계열(독립영화협회를 중심으로한), 대학영화연합 등이 있으며, 노동자뉴스제작단, 최근에 노동자영화를 표방한  장산곶매와 같은 노동자계급의 영화가 아직은 자생적이나마  대두되고 있다. 그렇기에 영화에 반영되는 민중성의 내용은 각 계급영화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오늘날 자신의 계급성과 민중성이 가장 철저하게  일치하는 계급은 오직 미래사회의 필연성을 담보하는 노동자계급 뿐이다. 노동자계급을 제외한 여타 계급은 자본주의적 착취의 폐절에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갖는 계급이 아니므로,  가장 철저하게 변혁을 수행하는 노동자계급에 의해 지도될때에만 진보적이다.


    여기에 노동자계급 영화단일전선의 민중민주주의 영화전선정책의 올바른 원칙이 들어있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진정한  영화(이념적으로는 노동해방영화, 조직적으로는 단일전선)의 당파성은 영화의 민중성의 최고 표현이며, 민중민주주의 영화전선(이하  영화전선) 내에서 지도원리로서의 위치를 요청받게 되는 것이다.
   
      4. 노동자계급은 독자적인  노동해방영화에 입각한 단일영화전선의 건설뿐만이 아니라,  반제.반독점 민중민주주의  영화전선을 지도하여야 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영화전선의 형성원리는 민중성, 진보성에 입각하나, 영화전선전선의 지도원리는 노동자계급의 당파성에 입각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현재 존재하는 민중민주주의 영화는 올바른 노동해방사상과 노동해방영화의 이념의 관점을 가지고 있지  못하며 노동자 계급의 전선적인 성격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노동자계급  영화와 여타 계급의 영화의 공통분모'로 이해하는 혼란은 결과적으로 노동자계급의 당파성을 부정하는 소시민적 민중주의에 불과하다.


    다시말해 '민중민주주의 전선영화 일반'이란 존재하지 않다 오직 공동의 전선적 과제를 중심으로 동맹하는 각계급의 계급영화들만 이 현실속에 존재할 뿐이다.
   
      5. 영화전선 내에서  노동자계급 헤게모니는  과학적 세계관과 미래에 대한 전망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이론적으로 말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계급을 제외한 모든 계층, 계급은 몰락할 수 밖에 없다.  오직 노동자계급만이 자본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날로 성장한다. 그러므로 노동자계급 영화이외의 제계급의 영화는 독자적,역사적 전망을 가질수 없다.


    전망이 결여된 이들 민주주의적, 휴머니즘적 진보성은 종종 실제적 실현의 방도를 찾지 못한  채, 민중일반을 추상화하는 민중주의, 혹은 계급성이  불투명한 순수한(?)민주주의,  이념과 계급을 초월한 무원칙적 민족주의 등으로 나타난다.


    노동자계급의 당파성에 의해 지도되지  않는한, 이들의 민중성에 과학적 전망을 심어주지 않는한, 이들의 민주주의적 성향은 민중민주주의가 아닌 소시민  계층의 민주주의  한계를 넘지 못하며, 휴머니즘 또한 노동자계급의  진정한 휴머니즘이 아닌  실존주의 등과 같은 추상적 휴머니즘으로 전락하게 된다.
   
      6. 영화전선 내에서 노동자계급 영화는 여타계급에게 노동자계급의 사상과 정책을 선전함으로써 그들의 동요를 막고 그들이 전선적 과제에 충실할 수 있도록 견인해야 한다.


    이때 민중성, 즉 전선적 과제에  대한 충실성은 노동자계급 영화 전선정책의 기준이 된다. 나아가, 노동자계급은  영화전선 내에서 노동해방사상과 노동해방영화의 우월성과 예술성, 필연성을 보여줌으로써 전선내의 진보적 영화 인텔리들을 부단히 노동자계급화 해야 한다.


    이 두가지가 노동해방영화가 영화전선 내에서 수행해야  할 정책의 핵심이다.
   
   
    VI. 결론을 대신하여
   
      1. 아직까지 영화운동에서 조차 생소한  '노동해방영화'의 이념을 처음으로 정리해 보았다. 우리의 변혁운동이  그 자생성, 경제주의에 의해 고통받고 있는 현실 속에서 노동자계급 영화운동 또한 소시민적 민중주의, 민족주의 그리고  자생성에 의해 그 발전의 전망이 가로막혀있다.

 
    우리의 영화운동의 최대 과제가 무엇일까? 현재 영화운동에게 고통을 주는 최대의 적은 무엇일까라는 점에서  필자는 문제제기를 시작하였다. 곧바로 결론이 나왔다. 노동자영화를  표방하는 영화 집단들이 가지는 '써클주의!"가 그것이었다.

    본문에서 간단하게나마 언급한 대로 써클주의는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세계관, 미래의  점망을 필연성과  총체성으로 전유할 때만 분쇄될 수 있다. 민족영화계열의 무원칙한 대동단결-'독립영화협의회'는 이것의 소산이며, 또다른 써클주의로  나아가고 있다.-의 조직통일 우선주의는 관념론적 조직관에  불과하다. 이는 노동자 계급의 헤게모니없는 당파성(?),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세계관을 부정하는 노동해방(?)을 공허하게 외칠 뿐이다.
   
      2.우리는 성급히 노동자계급 영화단일전선 아래 모일것을 외치는 대신, 내부의 적, 써클주의와 싸우기  위해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세계관에 입각한 사상투쟁을 조직화함과 동시에 교묘히 침투해오는 소부르조아  이데올로기-주체사상, 민족해방영화론은 대표적인 것이다.-에 맞서 싸워야한다.

    사상투쟁은 영화이론지, 공개적인  토론, 과학적  노동해방사상의 학습, 선전선동과 같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달성되는 내부의 사상통일의 수준은 형식으로  외화하여, 단일전선(이 용어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 예를 들어 단일전선은 노동자영화위원회, 노동자영화운동 연합 등과같은 용어로 사용될 수 있다.)이라는 노동자계급 영화의 진정한 조직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때만이 노동자계급 영화는  진정한 당파적 현실주의에  입각한 최고수준의 노동해방영화의 고전을 만들수 있을 것이며, 이를 통한 최고의 선전 선동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3. 변혁운동의 질적, 양적 성장에 발맞추어  영화운동에서의 새로운 질적 도약을 이루기 위한 노력은 영화창작을 통해서 실천적으로 담보되지만, 영화이론에 대한 연구와 논쟁을 조직화하는 것은 또하나의 필요충분조건이다.

    하나의 시론에 머무른 본고의 미숙함을 채찍질하는 노동해방영화 이론가들의 작업이 활발히 이루어지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 참 고 문 헌 >
   
    ㅇ [영화운동론], 서울영화집단, 1985
    ㅇ [새로운 영화를 위하여], 서울영화집단, 1983
    ㅇ [새로운 한국영화를 위하여], 전양준,이효인,이정하, 1988
    ㅇ [사회주의 문화운동], 이삭, 1985
    ㅇ [문화 운동론2], 최승운외, 1986
    ㅇ [민족영화의 당면과제와 임무], 이효인, 1989
    ㅇ [민족영화의 조직실천적 임무와 과제], 이정하, 1989
    ㅇ [제 3영화를  위하여], 페르난도  솔라니스, 옥타비오  게티노, 1985
    ㅇ [노동해방영화의 이론과  조직관 확립을  위한 시론], 윤동호,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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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읽는 고전] 마르크스는 누구인가

  • 등록일
    2004/09/02 00:49
  • 수정일
    2004/09/02 00:49

<이진우 계명대 철학과 교수>

 

 인간의 `자기실현'이라는 말만큼 자주 그리고 긍정적으로 현대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개념은 아마 없을 것이다.자기실현은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삶의 목표인 것처럼 보인다.자기실현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것이 항상 `소외'의 문제와 짝이 되어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그러나 현대인들의 마음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상어로 정착한 이 두 개념이 카를 마르크스라는 사상가와 철학자에게서 유래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우리가 `자기실현'과 `인간소외'라는 말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용하면서도 마르크스라는 이름을 꺼리는 까닭은 아마 그가  혁명의 사상가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그렇지만 올해로 출간 1백50주년을 맞고 있는 그의 `공산당선언'은 혁명적인 영향력을 상실하고  현대의 고전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는 실정이다.마르크스가 마치 악령인  것처럼 매도하였던 자본주의 는 오늘날 전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유일한 사회체제의  논리로 군림하고 있다.그러나 현존 사회주의의 몰락이 자본주의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은 아니다.자동화와 정보화로 말미암은 대량실업및 빈부격차 발생,생태계 위기 등과 같은 만성적 현상들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적나라 하게 보여주고 있다.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마르크스라는 이름이 다시 거론되는 것을 보면 그가 철저하게 사유했던  현대의 문제,즉 인간소외의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음에 틀림없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1844년에 집필한 `경제학-철학 수고'는 인간소외를 철학적 문제로 처음 부각시킨 역작이며,전후 실존철학에도 상당한 영향을 준 현대의 고전이다.마르크스는 인간소외의 발생과정을 거꾸로 추적하면  인간소외를 극복하고 자기를 실현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인간은 사회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존재란 인식은 그의 출발점을 이룬다.


이러한 인식에 근거,그는 인간이 스스로를 생산해가는 과정을  노동이라고 명명하면서,우리는 모두 스스로를 우리 자신의 고유한 노동의 결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그는 다른 동물들도 물론 노동을  하지만 인간만이 자신의 고유한 삶을 완성하는데 필요한 생활수단을 생산한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완성해가는 예술가라는 점에서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예술가가 스스로 만든 작품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면,우리는 예술가가 자기실현을 하였다고 말한다.그러나 우리가 모두  예술가처럼 살 수는 없다.현대인들은 그들이 생산한 상품을 통해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인간소외의  원인을 바로 상품을 통해 매개된 사회관계 속에서 발견하며 동시에  자기실현의 가능성도 이러한 사회관계 속에서 찾는다.사회관계가 왜곡되면 인간소외가 발생하고,사회관계가 정의로우면 인간은 자기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소외과정을 네 단계로  분석한다.첫째 소외는 생산물로부터의 노동자의 소외다.자동차 공장의 노동자들이 모두 자신이  생산한 고급 승용차를 탈 수 없는 것과 같이 현대인들은 자신들이  생산한  물품이 자기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안다.이처럼 노동자가 생산한 상품이 노동자와 대립하게 되는 것 역시 소외현상인 것이다.둘째 소외는 노동으로 부터 노동자의 소외다.우리가 생산하는 물품이 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우리의 노동은 단순한 생계를 위한 강제노동의 성격을 띠게 된다.만약 우리가 노동을 할 때에는 자신을 잊어버리고 노동을 하지 않을 때에만 자기 자신을 느낀다면,그것은 자신과 자신이 행하는 노동이 괴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소외인 것이다.셋째 소외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소외다.노동의 생산물이 노동자에게 속하지 않고 그에게 낯선 대상으로서  대립되어 있다면 그 것은 생산물이 노동자 이외의 다른 사람들 소유가 되었기 때문이다.우리가 생산물과 노동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은 결국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왜곡된데에서 기인하는 것이다.넷째 소외는 인간의  본질로부터 인간의 소외다.

 
우리가 노동을 통해 자기 자신을 실현하려 하는 것처럼,인류의 역사는 `인간적인 것' 또는 `인간의 본성'을 실현하고자 하는 인류  노동의 결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개개의 노동은 본래 인간의 본성을 실현하는 노동이다.


만약 개개인이 오직 자신의 생존만을 위해 노동하고  인간의 본성을 망각한 다면 그것은 본질과 실존 또는 목적과 수단의  관계가 뒤바뀌었음을 의미한다.

 

자본주의가 전세계적으로 보편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것은 분명 인간소외의 문제다.어떤 삶이 진정 인간적인 것인가.우리가 인간소외를 극복하고 자기실현의 길을 꿈꾸는 한 마르크스의  이 책은 불투명하기 짝이 없는 현대사회를 헤쳐갈 수 있는 길잡이가 될 것이다.

 

-마르크스의 생애

카를 마르크스(1818~1883)는 1818년 5월5일 당시 프로이센에  속해  있던 트리어에서 프로테스탄티즘으로 개종한 유태인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그는 본대학에서 두 학기 동안 법학 문학 역사를 공부한 다음 베를린 대학으로 옮긴 뒤 전공을 철학으로 바꿔 1841년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의 철학사상은 1848년 출간된 `공산당선언'을 중심으로 전기 사상과 후기 사상으로 구별된다.전기에 그는 사상가로서 뿐만 아니라 실천적 혁명가로서 활동했지만 1849년 독일의 혁명이 실패로 끝나  런던으로 망명하게 됨으로써 그는 자본주의의 논리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데 몰두하게 된다.대표적  저서로는 `독일이데올로기'`공산당선언'`정치경제학비판'`자본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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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도정일]「젊은 시인들을 위하여」

  • 등록일
    2004/09/01 12:03
  • 수정일
    2004/09/01 12:03
     ■평론■
     
                                          문학의 숲, 시의 길 
                                    - 젊은 시인들을 위하여 -
     
     
                                                                                                         도 정 일 
                                                                 1 
      
인문교육의 위기가 문학의 생산과 수용에 필요한 훈련된 문화인구를 길러내는 데 극히 적대적인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한  이즈음에도, 해마다 일간지 <신춘문예>에 많은 문학도들이 작품을 보내고 그 가운데  일정수의 신인들이 작가, 시인, 평론가로 <등단>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신인들은 도대체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문학 수업을 받은 것일까?   
      
문학은 이미 그 자체로 세계적 인문문화의 한 강대한 전통이자 제도이기 때문에 문학의 길에 들어서는 사람이 반드시 정규 교육을 받아야만 유능한 창작자로 성장하는 것도 아니다. 세계문학의 오랜 전통에서 보면 자고로 문학만큼 정규 교육의 테두리 바깥에 설 수 있었던 문화적 실천도 드물다.  정규 교육에 부과되는 규칙성의 지배를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아니 오히려 그런 규칙성의 권역 바깥에 서고자 함으로써, 문학은 문학일 수 있었다고 말해도 된다. 문학은 문학을 생산하고 문학 창작자를 길러낸다.  문학이 이미 그 자체로 <제도>인 것은 이처럼 문학이 정규 교육제도의 바깥에서도 제 스스로 문학 생산자/수용자를 재생산하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진 문학도들은 어쩌면 정규 교육의 문 밖에서 문학 자체의 전통에 기대어,  혹은 공교육제도의 기능주의 테두리 안에서도 문학이라는 별개 전통에  끊임없이 안내되고 그 유혹에 이끌려,  제 각각 외로운 문학수업을 진행해온 사람들인지 모른다. 


고등학교와 대학에서의 인문교육이 부실성의 극점에 도달하고 인문문학적 가치가 위기의 절정을 맞고 있는 지금  문학이라는 형태의 창조성에 헌신 코자 하는 사람들이 해마다 줄지어 등장한다는 것은 반가우면서도 놀라운 일이다. 시인 황지우의 시에 나오는 한 화자는 어째서 이 시원찮은 세계에서도 그럴듯한 여자들은 계속 나타나는 것일까라며  신기해 한 적이 있다. 이 시원찮은 세계에서도 시인들은 어째서 작년의 각설이마냥 죽지 않고 계속 나타나는가. 
      
시인들을 계속 나타나게 하는 이상한 숲,비너스의 계곡처럼 검고 깊은 그 숲을 우리는 <문학의 숲>이라 부를 수 있다.하이데거의 말대로 철학의 길이 <철학의 숲> 속에 있다면, 문학의 길은 문학의 숲 안에 있다. 그 숲의 다른 이름은 <전통>이며,  이 전통은 그 내부에 어떤 언술 형식을 특별히 <문학적 언술>이라 불릴 수 있게 하는 일련의 어법, 규약, 관습들을 갖고 있다.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문학을 문학이게 하는 조건은 무엇인가"라든가,  문학적 언술을 특별히 "문학적"이게 하는 담론의 성질은 무엇인가 등등의 문제는 아직도 뜨거운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문학을 문학이게 하는 어떤  특수한 성질이 있다면 거기 <문학성>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는 쉬운 일이지만  문학 담론 또는  문학적 언술이 그런 "고유의" 성질을 갖고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인가("꺼내 놔봐라")라는 문제가 이론의 층위에서 쟁점화할 때에는 어떤 손쉬운 논의도 허용되지 않는다. 이런 이론적 쟁점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문학성>이라는 용어를 쓸 때 충분히 조심하고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점을 환기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문학의 숲을 말하고 문학적 언술을 특별히 문학적이게 하는 어법,규약,관습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어법, 규약, 관습이 불변의 고유자질이 아니라 오랜 기간을 두고 형성되어온  <역사적 구성물>이기 때문이다.  역사적 구성물은 본질론적 실체도 형이상학적 불변성의 자질도 아니다. 그것은 가변적 규약이고 관습이며 특정의 언어 사용법에 붙여지는 분류학적 명칭으로서의 <어법>이다. 이것들이 문학의 숲, 문학의 전통을 이룬다.  시인 엘리엇은 이 전통에 대한 의식을 가리켜 시인의 <역사의식>이라 부르고  "25세가 넘어서도 계속 시를 쓰려는 사람은 그 역사의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 일이 있다. 물론 엘리엇의 <역사의식>은 특별히  유럽 문학의 전통에 대한 숙지를 의미한 것이지만 이 제한을 풀 경우 "전통의 숙지"는 세계 문학의 숲을 이루어 온 역사적 어법, 규약, 관습에 대한 지식을 의미할 수 있다. 
      
이 지식은 흔히  "문학적 능력"이라 불리는데,  까닭은 그 능력이 문학의 생산과 수용에 필요한 능력을 상당 부분 결정하기 때문이다. 문학의 길이 문학의 숲에 있고 시인이 그 숲에서 길러진다는 것은 그곳이 문학적 능력의 함양 공간이라는 의미이다.  시인, 작가만이 거기서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독자도 거기서 길러진다.  예건대 문학적 능력이 모자라거나 문학의 숲에 들어가본 일이 없는 사람은  시를 잘 읽지 못하고 읽어도 어떤 시가  좋은 시인가를 잘 판별하지 못한다. 
      
해마다  <신춘문예> 제도를 통해 등장한 우리의 젊은 시인들 가운데 25세 이후까지도 시를 계속 쓰는 사람은 도대체 몇 퍼센트나 되는가,  시 쓰기를 그만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 이런 질문들에 답해줄 <문학사회학>은 이땅에 존재하지 않는다. 시인은 젊은 날의 어느 한 순간 어떤 관문을 통과했다고 해서 평생 시인인 것은 아니다.  죽는 날까지 시를 쓰는 사람만이 시인이다.  실증적 연구가 없어 함부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시인으로서의 공식 등단과 함께 소멸하는 시인들이 많고,  이 좌절의 원인을 추측하게 하는 사회적 요인들도 많다. 그러나 시인으로 출발했다가 이내 시정인으로 돌아서는 많은 사람들,  시인으로 행세는 하면서도  시다운 시 한줄 써내지 못하는 사람들의 경우  그 좌절과 시적 빈곤의 원인이  반드시 사회적 요인들에만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시인에게 천국을 주었던 시대는 역사상 존재하지 않는다.  시인이 사는 땅과 시대가 천국이라면  시를 쓸 이유도 없지 않은가. 
      
내가 보기로는,  젊은 날 시인으로 나타났다가 조만간 사라져버리는 사람 들의 그 "실종"은  외적 요인들 못지않게  내적인 요인에 기인하는 것 같다. 내적 요인이란 말할 것도 없이 문학수업의 빈곤이다.   물론 이 빈곤 역시 외적 요인에 연결되어 있다.  지금 이 땅의 공교육 환경은 문학수업에 완벽하게 적대적이다.  특히 문학적 감성의 계발에 결정적 영향을 줄 수 있는 중고등학교에서의 <문학교육>은 사실상 실종상태이고 교육까지는 안 가더라도 문학의 숲을 들락거릴 수 있도록 숨통을 열어두는 일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문학지망자들이 공교육의 장 밖으로 아주 뛰어 나오지 않는 한  그들이 문학의 숲에 빠져 있을 수 있는 시간은  거의 없 다.   
      
그러나 이런 환경으로부터 초래되는 문학수업의 빈곤에 대한 궁극적 책임은 문학지망자 그 자신에게 있다. 적대적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가 문학을 하기로 한 이상  그 환경을 극복하는 것은  그의 일이고 책임이기 때문이다. "당신 시가 왜 이래?"라는 질문 앞에서는  "환경이 나빴다"가 변명이 되지 않는다. 문학수업의 빈곤이 내적 요인이 되고 책임사항이 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문학을 하는 데는 감성이 큰 몫을 차지하지만 문학은 감성만으로 되지 않는다.  엘리엇이 역사 의식을 강조한 것이나 문학수업의 중요성이 자고로 강조되어온 까닭도 거기에 있다.  랭보처럼 일찌감치 어린 나이에 시를 쓰고  젊어서 떠돌다 죽어버리는 사람도 없지 않지만, 적어도 나이 25세 이후까지 시를 쓰려는 사람들은 자기 문학의 <장수 프로그램>을 스스로 짜고 문학의 숲에서 긴 호흡을 위한 자기 연마와 <수업시 대>를 계속하지 않으면 안된다. 문학의 숲,그 전통의 힘은 그래서 중요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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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을 강조한다는 것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전통주의자, 문화 보수론자, 반동으로 몰리기 꼭 좋은 노선을 선택하는 일 같아 보인다. 그러나 오늘날 젊은 문학지망자들이 다시 전통의 힘에 눈 돌려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첫째, 전통이 지금처럼 홀대되고 무시 당한 때가 없었기 때문이고 둘째, 전통적인 것으로부터의 부단한 이탈과 기존의 규약/관습에 대한 끊임없는 위반이 바로 문학의 전통이기 때문이다.  전통의 홀대가 시류라면 시인은 이 시류를 따를 이유가 없다. 시인은 언제나 자기 시대의 거역자이고 대중화한 이데올로기로부터의 이탈자이며  지배적 에피스테메(인식틀) 속에서도 그 인식틀을 비판적으로 객관화하는 국외자이다.   이것이  문학의 힘이고 기능이며 그 전통이자 방법론이다. 역설적으로, 시인은 전통적인 것으로부터 이반하는 그 순간에 이미 문학의 전통 속에 있다.  옛 것의 신성화를 기도할 때 보수적 전통론자가 탄생한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말했듯 문학의 전통은 불변의 것도 불가수정의 것도 아닌 역사적 구성 물이며, 이 구성물은 언제나  새로운 이탈과 위반에 의해 수정, 보강, 확대된다. 이 의미의 전통은 옛것만을 지키기위한 전통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가능하게 하려는 전통이다. 
      
95년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젊은 문학도들을 향해 우리는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어야 하는가? 금년 여러 신문이 당선작으로 뽑은 시들에게서 거의 하나같이 발견되는 것은 문학수업의 빈곤을 절감케 하는 영양실조와 기술 결핍, 위반다운 위반의 부재이기 때문이다.  영양실조란  시가 내적 비전, 힘, 절실성을 갖지 못해 추수 끝 빈들의 낡은 허수아비처럼 간신히 흔들거리며 서 있는,  더구나 서 있을 이유조차 모르면서  그냥 <시>라는 이름 하나로 버티어보는 창백한 타성을 말한다. 신진 시인들의 시가 낡고 빈 허수아비의 몰골로 간신히 흔들거리며  타성의 힘으로 버티고 있는 모양은 신인다운 패기의 시를 만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탄생의 순간에 이미 기진맥진한 조산아를 보듯 사람을 안쓰럽게 한다. 
      
< 배고픔은 그리움이거나 슬픔이다 >(중앙일보), < 이런 세상 어떠세요 > (동아일보)등의 시는 시 자체의 영양부실을 통해 <배고픔>과 <빈곤>을 절감케 한다. 스스로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시는 배고픔의 세상에 대한 시적 표현이 되는가? 아니다. 이 종류의 무매개성은 사회학적 징후일 수는 있어도  "배고픔" 또는 "이런 세상"에 대한 시적 변환으로  대접하기 어렵다. 배고픔을 노래할 때에도 그 스스로는 내적 비전의 절실성과 풍요로운 상상력을 지녀야 하는 것이 시의 운명이다.  < 자전거에 대하여 >(세계일보)도 시의 이같은 운명에 대한 사색이 모자라고  왜 시를 써야 하는가에 대한 절실성의 체험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역시 빈곤을 면치 못한다. 
      
기술결핍이란  언어의 시적 사용법에 대한  수업과  연마의 부족을  말한다. <문학만의 언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언어의 "문학적 사용법"은 존재하고 이 사용법에 통상적으로 붙여지는 이름이 문학적 언어  또는 시적 언어라는 것이며 언어의 시적 사용법, 그 수사적 능력을 가리켜 <기술>이라 한다. 시는 기술만으로 되지 않지만 기술 없이는 시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앞서  <어법>이라 칭한 것은 주로 이  수사적 기술을  의미한다. 수사적 기술은 놀랍고 새로운 이미지의 언어적 제시, 낡고 친근한 세계를 깨부수는 이상한 형상화,  신선한 비유언어에 의한 간접화의 기술이다. 수사적 기술이 극히 중요한 까닭은 시가 무엇보다도 <언어에 의한 세계의 변환>이고 이 변환을 어법의 차원에서 수행하는 것이 수사적 기술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배가 고파 식탁에 앉아 노트북 파워를 넣는다.  냉장고를 열고
       우유 식빵을 꺼낸다. 우유와 땅콩 버터를 꺼낸다. 키보드를 두
       드려 본다.  영균영호영수영식영철영민영석영광지수민수현수정
       수진수영종...깜빡이는 커서,  깜빡이는 그리움...우유 식빵에
       땅콩 버터를 바른다.
       
        (중략)
       
       녹아버린 땅콩 버터 때문에 배가 고프다.
       내가 배고픈지 땅콩 버터가 배가 고픈지 분간할 수 없는데,
       식구들이 잠든 여름 밤, 녹아버린 땅콩 버터를 바라보며 느끼

       는 허기는 슬픔이거나 그리움이다.
                 
                        - < 배고픔은 그리움이거나 슬픔이다 > 부분 
        
라는 대목은 (이 부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체가 그러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도 이미지의 시적 제시나 간접적 형상화가 아니며  따라서 그것이 성취하는 것은 놀라움이 아니라 산문적 진부성이다. 이 시인은 이를테면 "배가 고파 식탁에 앉아 노트북 파워를 넣는다"거나 "우유 식빵에 땅콩 버터를 바른다" 혹은  "녹아버린 땅콩 버터 때문에 배가 고프다" 등의 진술이 어째서 시적 진술로서의 자격을 상실하는지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이런 류의 진술을 다른 형태의 진술로 <바꾸고자> 할 때 시가 탄생한다. 춤이 보행(步行)을 모태로 하듯 시도 산문을 모태로 삼지만 시는 언제나 산문적 진술(혹은 산문적 세계)의 변환이기 때문에 시이고  이 변환된 진술로서의 시적 언술은 산문적 언술과 다르다. 춤이 보행에서 나오면서도 이미 보행이 아니듯이. "내가 배고픈지 땅콩 버터가 배가 고픈지 분간할 수 없는데" 같은 대목도  신진 시인이라면 결코 흉내낼 필요 없는 진부한 표현이다. 이번 신춘시에서 비교적 나은 편에 속하는 < 漁盛田의 봄 >(경향 신문)에서도
     
         강이 얼 때부터 녹기 시작할 때까지 마을은 고요하다
         나는 고요하다
         고요가 고혹적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같은 대목은  시적 언술형식에 대한 인식과  어법 연마의 부족을  드러낸다. 시는 그 자체로 표현이지 "표현하고 싶다"고 진술하는 것이 아니다. "고기들이 많이 사는 강,사람들은 이 마을을 漁盛田이라 한다 / 바다는 바다 사람들의 밭이라면 강은 고기들의 밭이다"라는 구절도 얼마든지 많은, 그리고 더 나을 수 있는, 시적 표현의 가능성들을 희생시키고 있다. <목재소에서>(조선일보)의 시인도 자기 시가 더 치밀한 형상화의 수준에 이르러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특히 이 시인은 "짙은" "하얗게" "말갛게" 등의  낡은 형용사 사용이 시의 어법 수준에 못 미치는 것일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가령
     
         고향을 그리는 생목들의 짙은 향내
         마당 가득 흩어지면
         가슴 속 겹겹이 쌓인 그리움의 나이테
         사방으로 나동그라진다 
      
같은 대목에서  " 고향을 그리는 생목들의 짙은 향내 / 마당 가득 흩어지면 "이라는 설명조 묘사는  이 신진 시인만이 아니라 기성 시인들도 좀체 벗어나지 못하는,  그래서 한국시의 고질적 미숙성이 되어 있는 표현방식이다. "고향을 그리는 생목들의"는 세번째 행에 나오는  "그리움"의 신선도를 미리 반감시킬 뿐 아니라 "향내"를 수식하기 위해  이처럼 단조로운 산문적 어구를 쓴다는 것 자체가 문제이다.   또 시가 "향내"를 표현하기 위해 "짙은 향내"라고 쓸 경우도 있을 수 있지만 "짙은"이라는 산문적 형용사가 쓰이는 순간  이미 그 향내는 죽어버려  짙지 않은 것이 될 수 있다. 형용사나 긴 수식어구로 표현될 것들을 형용사로 나타내지 않고 이미 지화하는 것, 그것이 시의 어법이고 기술이다.  에즈라 파운드는 젊은 시인들에게 "형용사를 쓰지 말라"고 충고한 적이 있다. 시적 형상화는 이미 그 자체로 형용이며, 형용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이미지이다.  물론 파운드의 충고를 형용사의 전면 제거 요구로 받아들일 것까지는 없다.   다만 우리 젊은 시인들이 알아야 할 것은 형용사의 적절한 절제가 시의 긴요한 요청이라는 점이다. 
      
시가 산문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런 현상은  <산문체 시>의 만연 현상과 함께 적절한 비평적 개입을 요구한다.  산문체 시는 이번 신춘시편들에서도 부쩍 눈에 뜨이고 젊은 시인들 사이에 번지고 있는 한 경향이다. 시가 산문체로 씌어지지 말라는 법은 물론 없다. 그러나 산문체를 사용하는 시인은 그 형식의 선택을 정당화할 이유를 보여주어야 한다. 불행히도 근자에 나타나고 있는 산문체 시들은 어떤 정당한 이유보다는 "편해서"  산문체를 쓰고 있다는 판단을 내리게 한다.  신진 시인들이 알아야 할 사항은 그들이 시적 생애의 어느 순간에 산문형식을 취택하거나 실험해보는 때를 갖는다 하더라도 초장부터 산문형식을 시도할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이 형식의 시 쓰기는 아직 문학의 초기에 있는 시인들을 가장 확실하게 타락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시 쓰기란 <편한 길>에 대한 치열한 거부이며,언어의 절제, 감정 통제,표현의 정밀성과 압축, 여백과 내적 운율을 생명으로 하는 시적 언술형식은 그 형식의 차원에서 이미 편한 길에 대한 거부를 선언한다.  형식이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산문과는 달리, 절제된 시 형식은 그 자체로 나태의 거부를 보여주고 정신의 치열성을 증언한다.  이번 신춘시들에서 보이는 긴장감 없는 산문체 형식의 잦은 사용과 진술문장 자체의 산문화 현상은 <산문성으로부터의 세계의 구출>을 주요 기능으로 하는 시의 규약( 이 규약 때문에 시는 언어적 춤이고 음악이다 )에 어긋난다는 점에서  그 문제점이 지적될 필요가 있다. < 좋은 사람들 >과 < 그날엔 >(한국일보) 같은 작품은 안이하고 느슨한 산문체를 쓰고 있는 데다가  강한 통제요소를 결하고 있어 이미지들이 끈 떨어진 여러 개의 연처럼 맥없이 표류한다. 우리의 경우 이런 산문화 현상이 문제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시적 언술형식,  또는 시적 장르 규약으로부터의 새롭고 과감한 이탈이나 위반이 어서가 아니라  이미 있는 기성 시인들의 작품에 대한 추종이고 모방이기 때문이다. 
      
금년도 신춘문예 당선시들을 보며 전반적으로 갖게 되는 의문은  무엇 때문에,  왜 시를 쓰는가라는 질문이  젊은 시인들에게 자기 자신의 선택에 대한 절절하고 가차없는  내적 심문으로 던져지는 일이  적지 않은가라는 점이다. 왜 시를 쓰는가?  시인 되는 길은 출세와 별 관계 없고 돈벌이와도 대체로 먼 거리에 있다.  직업으로서의 시 쓰기는 남들이 잘 선택하지 않는 길, 아무도 좀체 가지 않으려는 길의 선택이다. 시는, 그 말의 한자 표현(詩)이 잘 보여주듯, 언어로 지어진 사원 또는 <언어의 사원>(Temple of Words)이다.  그러나 그 절간을 왜 짓는가? 왜 지어야 하는가? 돈벌이도 되지 않고 장사꾼도 잘 꾀지 않는 그 절간을 짓고,  그것도 "잘" 지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러나 모종의 의문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의 젊은 시인들에게 그 질문이 적어도  한 번 이상은 던져졌을 것이고  장차 지속적 심문이 될것이며 그 질문을 시로 대답하기 위한 긴 도정이 시작되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반드시 하나일 필요가 없고 응답의 방식이 꼭 하나여야 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우리의 얘기가 어차피 문학의 숲과 그 숲의 어법, 규약, 관습에 관한 언급으로 시작된 이상  그 부분에 대한 몇 마디 사족을 달아 시의 길을 생각해보는 것으로 이 글을 끝내고자 한다. 
      
규약과 관습이 일차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물론  보존과 계승의 필요성이 인정된 전통적 요소이다. 그러나 이부분에 대한 오해의 가능성을 막기 위해 다시 밝힌다면, 문학의 전통적 규약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은 "진부하게 말하지 않는다"라는 약속이고,  전통적 관습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위반의 관습>이다.  소설은 소설로, 시는 시로, 비평은 비평의 방식으로 이 규약과 관습을 계승하고 전통으로 보존한다. 그 규약과 관습으로 문학은 모든 굳어진 것, 고착유형으로 정형화된 것, 이분법적 스키마 속에 화석화된 것들을 풀고 되살려 낸다.  세상의 관습을 깨는 이 위반의 관습으로 문학은 세계를 늘 새롭게 하고자 한다.  손쉬운 예로,  시의 어법에서  장미는 그냥 장미가 아니라 "땅속에서 풀려난 요정"(신경림)이고 풀은 풀이 아니라 "땅의 푸른 뿔"(최승호)이다.  랭보나 보들레르의 경우 미역은 "뒷걸음질 치는 익사체"이고 창녀는 "검은 태양"이다.  구태여 이런 이름 바꾸기의 예를 들어보는 것은  우리의 신진 시인들이 문학의 숲에서 무엇부터 배워야 할 것인가를 예시하기 위해서이다. 시인 되려는 사람이 시문학 수업에서 일차적으로 시도할 것은 세상 모든 것들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보는 작업이고  바꿔 말하기,  또는 이상하게 말하기를  연습하는 일이다. 이 어법연습이 새롭게 말하기의 규약과 위반하기의 관습을 익히는 길이다. 장미를 장미라 부르는 것은  세상의 언어적 규약이지만  이 규약을 위반하는 것은 시의 규약이고 관습이다. 이 방식으로 시는 세계를 새롭게 할 뿐 아니라 풍요롭게 하고 새로운 가능성의 현실을 제시한다. 이것이 시의 길이다. 
      
그러나 문학적 위반의 전통이 위반의 어법만으로 지켜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25세를 넘어서도 시를 쓰려는 사람에게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은 위반의 역사적 시각과 비전이며 그 비전의 진리에 대한 믿음이다.  쉬운 예로, 자본주의 질서가 세계를 지배하고 그 문화적 상징체계가 세상을 정의하고 있을 때 시인은 그 질서의 밖에서 (혹은 그 질서 "안"에서도 "바깥" 을 성취하는) 위반의 시각과 비전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고? 세상에 존재했고 존재하는  모든 지배적 질서는  반드시 억압의 체계이기 때문이다. 억압의 체계가 억압하는 것은  다른 질서,  다른 삶의 양식, 다른 가치, 타자성과 타자의 존재이다.  지배질서는 그 질서 이외의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것, 상상할 수 없는 것으로 규정하여 억압한다. "억압 당하는 자의 편에 서는 것이  문학의 불가피한 운명"이라는 것은  남아공화국 작가 나딘 고디머의 말이다.  미하일 바흐찐은 "타자성에 대한 인식의 정도"가 소설의 "소설성"을 결정한다는 주장을 내고 있다. 고디머가 말한 "문학의 불가피한 운명"은 시의 운명이기도 하며,  바흐찐의 소설성 개념은  그의 동의 여부에 관계 없이 문학 일반의 경우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문학은 현상질서와 가치체계로부터 이탈하고 그것들을 위반함으로써 사람들이 당대의 에피스테메 속에서 잊어버린 이상한 진리를 이상한 방식으로 제시하는 언술양식이다. 이는 시의 양식, 시의 길이기도 하다. 
      
위반은 모든 경우에 진리에의 길인가 ? 아니다. 위반을 위한 위반은 진리에의 길도, 진리와 소통하기 위한 방법도 아니다. 시의 경우 위반의 어법이 반드시 세상에 대한 비전과 경건한 믿음에 연결되어 있어야 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위반을 위한 위반은 가장 좋게 보아서 유희이고 나쁘게 말하면 손장난이다. 특히 시에서의 과도한 일탈성,통제되지 않은 비유,이 상성만을 추구하는 언술 등은 시 자체의 존재 이유를 무화시켜 시를 박제화한다. 위반을 위한 위반이 지니는 가장 부정적인 국면은 그것이 삶으로  부터, 세계로부터, 모든 경건성의 추방을 기도한다는 데 있다.  경건성의 도살이 가져오는 것은 세계의 표피화, 경박화, 박제화이다.  스스로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쓰여지는 시도  세계의 박제화에 기여한다.   
      
지금 세계는 매우 빠른 속도로 놀이와 오락에 의한 삶의 표피화를 진행시키고 있고  문학은 이 오락화하는 카지노의 세계로부터 긴 편차를 유지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물론 이 논평들은 금년의 신춘시들과 무관한 것이 아니지만 그 논평의 배후에는 우리 신진 시인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기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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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김지하] 중심의 괴로움

  • 등록일
    2004/09/01 09:27
  • 수정일
    2004/09/01 09:27

봄에

가만 보니

꽃대가 흔들린다

 

흙밑으로 부터

밀고 올라오던 치열한

중심의 힘



꽃피어

퍼지러

사방으로 흩어지려

 

괴롭다

흔들린다

 

나도 흔들린다

 

내일

시골가

비우리라 피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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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김지하 시인은 우리에게 저항과 생명의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저 암울했던, 야만과 광기의 연대인 70, 90년대를 그는 온몸을 저항의 무기로 삼아 관통했던 시인이었다. 그는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가치적 명제가 결코 창백한 지식인을 위한 허사가 아니었음을 치열한 삶과 문학을 통해 증거했던 시인이었다. 당시 그는 직선적 세계관에 충실한 시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담시 "오적"으로 우리 문학사에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필화를 겪고 감옥에서 고행의 수인이 되어 세상과 격리되어 있을 때 우연히 감옥의 창살에 날아온 개가죽나무 씨앗의 발아과정을 지켜보면서 문득 섬광처럼 생명의 위대함을 발견하게 된다. 그 후 그는 직선적 세계관을 버리고 곡선의 미학을 신본하게 된다. 아니다. 이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그는 이미 초기작부터 생명에 대한 의경을 피력해 왔다. "황토"와 같은 시가 그 실례이다. 하지만 시대 상황이 그의 시를 편향되게 읽게 만들었던 것이다. 고정관념이란 때로 진실을 곡해하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감옥 체험에서 우주 생명에 대한 사상을 더욱 확대 심화시켜온 것만은 사실이다. 그의 철학 사상서에 의하면 우주 만물은 모두 영성을 가진 존재로서 자기 완결을 위한 진화의 과정을 겪는다고 한다. 80년대 그의 생명론은 시대에 앞선 예지로 충분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으나 의려 그것이 이유가 되어 일부에서 부당하게 배척받고 폄하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가 앞서 주장했던 생명론은 이제 우리 시대 주요한 지적 패러다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 시는 이러한 시인 개인을 비롯한 시대의 변화에 대한 저간의 사정을 함축한 명편이다. 중심에서 이탈하려는 꽃씨, 그 이탈이 없다면 생명은 더 이상 존재하지도 진화 발전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 때의 중심의 괴로움이란 씨앗들 생명 운동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즉 사방으로 퍼지고, 흩어져 나가려는 행위에서 괴로움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 이재무 -

 

                                                      69인의 좋은 시를 찾아서 긍정적인 밥 중에서.........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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