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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솜환경 공장 이전 식구들과 함께한 개소식
    간장 오타맨...

다시 유월

  • 등록일
    2008/11/16 01:48
  • 수정일
    2008/11/16 01:48

유월입니다. 

과거를 반추해 봅니다.

오늘 길거리로 나가서 촛불을 들고 다시금 길거리에 걸어봅니다.

그 당시 학생으로서 갔었으나 이제는 민주시민의 구성원 한 사람으로 참가해 보고자 합니다.

노찾사 유월의 노래를 틀고 글을 써봅니다. 

아마 늦은 저녁에 시청앞 광장에 갈 예정입니다.     

 

4. 3 제주항쟁, 4. 19 민주혁명, 5,.18 민중항쟁, 6. 10 민주항쟁으로 이어지는 한국근현대사의 단면에서 늘 어눌해야 했던 대학시절을 떠올려봅니다.

 

대학선배들이 늘 부르던 노랫말에서는 노찾사의 4월의 노래, 오월의 노래, 유월의 노래를 부르며 푸르디푸르던 잔뒤밭과 허름한 목노주점에서 막걸리잔과 소주잔을 부어가며 말하던 그 근현대사가 떠오릅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모르던 대학초년생이던 나를 그렇게 선배들과 주고 받는 술잔과 이야기속에서 나의 무지와 역사의식이라는 새로운 단면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대학에 들어와서 배우게된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역사적 주체의식과 이념이라 할 수 있는 사상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제가 대학다닐때 한두권쯤은 읽던 책들이 일명 사회과학서적이었습니다. 

사회과학서점도 많았지만 출판사 또한 많았습니다, 깨 알 같은 글씨의 글귀 이해가 될듯 안될 듯한 글귀를 읽고 아니 그 당시 유명한 철학자의 말을 외우기에 급했던지 세미나를 하면 늘 선배들에게 타박을 받으며, 책이 요구하는 전체적 방향과 맥락을 이해라고 꾸짖었던 것이 어느새 18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누구나 한번쯤 나와보았을 집회.... 체루탄 분말가루가 난사되며 밀고 당기는 가두투쟁이 학기초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늘 교문투쟁이라고도 하고 교문박치기라고 표현되는 일명 교박투쟁이 4월 총학생회 출범식(해오름제)이면 어김없이 하였던 터입니다.

 

새롭게 입학한 신입생들은 그간 배웠던 현대사와 역사가 거짓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며 그렇게 대학시절을 적응하고 몇몇 후배들은 일명 운동권이 되어 수업보다 길거리 현실정치에 나가 학기의 중요한 시기를 수강실이 아닌 길거리를 헤매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민주화니 사회발전이니 진보니 이야기하기전 그전에는 민주라는 단어조차 금기시되었던 시기에 살았던 선배들은 안치환의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노래를 부르며 민주주의여 만세를 목놓아 이야기하였고, 다른 동아리 선배는 일면 볼세비키즘에 물들어 공산당선언과 무엇을할 것인가? 그리고 프랑스혁명사와 러시아 혁명사에 나오는 선동문구들을 동아리방에서 강연하듯 이야기하였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사회주의니 공산주의니 민주주의가 보통명사가 되어 아무도 눈치와 불안해 하며 이야기하지 않지만 그 당시는 백지에 써보내려가며 소리를 낼 수 없었던 금지된 단어였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맑스와 레닌의 저작이 사회과학 도서라는 명칭으로 서점에 비치되었지만 찾는이가 없어서 도서가 폐간되서나 사회과학 서점이 문을 닫거나 사회과학 책을 만드는 출판사가 문을 닫아 절판된 책들이 많은 상황을 보며 조금은 개탄스럽기도 합니다. 

 

저의 과거 그 당시 책들은 선배들에 의해 물려받거나 헌책방 또는 사회과학서점에 주문을 하여 기다려야 했던 시기입니다.

그래서 돈이 없던 사람들은 늘 과학생회실 또는 동아리연합회 사무실에 찾아가 책들은 복사해 프린트된 책들로 세미나를 하던 기억이 납니다.

 

책장에 꽃힌 책들이 버리기도 아깝지만 저의 현대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어 책들은 지금까지 갖고 있습니다. 남들은 미련하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 책들은 보면 제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느꼈던 신세계를 접하게 되었던 것에 소중함이 간직되어 미련스럽게 이사를 다닐때 마다 제일먼저 챙깁니다.

 

그래서 간혹 책장을 펴보면 그때의 생각들을 훔쳐보며 혼자 키득키득 메모를 보면서 웃음을 지어봅니다. 그 메모는 그 당시 사람들을 떠올리게 하고 한폭의 드라마를 보는 추억의 보물상자이기에.....

 

저는 4월, 5월, 6월 일그러진 역사에 부끄러워 술잔을 많이 부끄러웠고 학교 방송국에서 나오는 노래 여전히 기억되는 예울림의 "우리투쟁이 사랑되어"라는 노래를 들으며 가슴에 울분을 가두어 놓았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런 시기를 지났습니다. 그리고 곁에 있던 많은 벗들도 떠났고, 잘난 선배들은 하나둘 가족, 결혼, 아이 핑계를 대며 돌아서는 모습도 지켜보았습니다. 저 또한 뭐 잘난 것이 없어 남아 있지만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그래도 끝까지 남고 싶다는 소박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 유월입니다. 다시 길거리에 나서봐야 겠습니다.

6.10 촛불은 87년 6.10과 다르게 전 국민이 나섰습니다.

그래서 중요하고, 의미 깊은 날입니다. 오늘 단단히 옷을 챙겨 나가보고자 합니다.

길거리에 하나의 점속의 군중이 되어 유월을 다시금 느끼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도종환 시인의 시 하나 남겨봅니다.

 

뒷자리
  - 노선생님의 말


맨 앞에 서진 못하였지만
맨 나중까지 남을 수는 있어요

남보다 뛰어난 논리를 갖추지도 못했고
몇마디 말로 대중을 휘어잡는 능력 또한 없지만
한번 먹은 마음만은 버리지 않아요

함께 가는 길 뒷자리에 소리없이 섞여 있지만
옳다고 선택한 길이면 끝까지 가려 해요

꽃 지던 그 봄에 이 길에 발디뎌
그 꽃 다시 살려내고 데려가던 바람이
어느새 앞머리 하얗게 표백해버렸는데

앞에 서서 그렇게 자신만만하던 이들이
참을성 없이 말을 갈아타고
옷 바꿔 입는 것 여러번 보았지요

따라갈 수 없는 가장 가파른 목소리
내는 사람들 이젠 믿지 않아요

아직도 맨 앞에 설 수 있는 사람 못된다는 걸
잘 알지만 이 세월 속에
드릴 수 있는 말씀은 한가지예요
맨 나중까지 남을 수 있다는


* 시집 <부드러운 직선>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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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결혼이주민의 삶

  • 등록일
    2008/11/16 01:48
  • 수정일
    2008/11/16 01:48

캄보디아, 태국 여성결혼이주민이 센터에 찾아왔습니다.

캄보디아 여성은 이제 고국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으며, 태국 여성은 돈을 벌고 고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합니다.

 

한국드라마와 브로커들에 속아 한국에 코리아 드림을 꿈꾸고 온 어린 여성결혼이주민들.....

한국의 드라마의 환상 그리고 이를 악용한 한국브로커들의 결혼주선으로 많은 여성결혼이민자들이 골든 러쉬하듯 한국에 부푼 꿈을 가지고 옵니다.

 

그러나 실상 한국에 들어오면 거짓된 정보에 속아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

20살 여성과 40살 아저씨... 재혼을 한 것도 아니지만 이렇게 속아서 옵니다. 그렇지만 다들 이러한 조건에서도 살아보고자 노력을 합니다.

 

문화적 간극과 여성에 대한 차별의식이 새롭게 한국으로 들어오는 여성결혼이주민들을 어렵게 합니다.

 

경제적 궁핍과 문화적 차이 그리고 나이는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폭력은 싫다는 여성결혼이민자들.... 상담을 하다보면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이주노동자들 상담을 하면 사업주들이 저에게 묻습니다. 당신 한국사람 맞아.... 노동법을 어긴 것과 한국사람이 무슨 상관관계를 갖고 있는지 궁금하게 하지만 자신이 필요할때와 필요하지 않을때와 180도 달리 태도를 취하는 우리내 잘못된 인식이 문제이지.... 돈을 주지 않고도 당당한 사업주들의 태도에 화가 치밀어 올라.... 큰소리를 치고 싶지만 그래도 참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필요할때와 필요없을때 인식의 차이는 전혀 다릅니다.

 

여성결혼이민자들에 대한 태도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먼 타국에서 결혼으로 입국하여 외로움과 불안감으로 한국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그녀들.... 그러나 현재 여성결혼이민자센터와 한글교실을 통해 만나는 여성결혼이민자들은 극히 드뭅니다.

 

대부분의 여성결혼이민자센터들은 다문화가족에 대한 지원을 위한 서포터즈 기관이지만 그렇지 않은 여성단체와 이주노동자지원센터들은 위기/보호가 필요한 결혼이민자들과 이주여성들이 찾아오는 곳입니다.

 

지원이 필요한 부분은 그/녀들의 한국생활지원보다 문화적, 그리고 가족내 폭력의 문제를 극복하여야 하지만 지금은 정주를 위한 지원을 하는 절름발이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실상을 살펴보면 더욱더 어렵습니다.

 

초기에 입국한 통일교로 들어온 여성 그러나 대부분 그래도 잘 정주하지만 그렇지 못한 분들 또한 많습니다. 그리고 현재 들어오고 있는 캄보디아, 필리핀, 베트남, 중국(한족), 중국교포,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몽골 여성결혼이민자들의 간극은 사뭇 다릅니다.

 

결혼을 위해 들어와 행복한 가정을 꿈꾸는 이도 많지만 도시에 비해 지역으로 갈 수록 그리고 도시가 아닌 농촌지역으로 갈 수록 비록 적은 수 이지만 과거 관습으로 인해 시부모와의 갈등의 골은 깊습니다.

 

장애우와 결혼한 여성결혼이주민은 한국어를 배우기고 나서 처음 시부모님이 하시는 말씀이 재산에 손 델 생각은 하지도 마라.... 그리고 이어지는 시댁식구들의 질타에 못이겨 집을 나와.... 혼인파탄사유서를 쓰고 체류비를 벌고 중국으로 들어간 이주여성.... 그리고 결혼이 아이들 장난이 아닌 것인데.... 무슨 여성이 상품인양.... 얼굴이 이쁘지 않다고 다른 여성과 결혼하여야 겠다며 폭력을 행사하여 쫓아내는 행태.... 술만 먹으면 짐승의 탈을 쓰고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 농촌에 일을 부려 먹기 위해 데려 왔다고 일을 하지 않는다고 구박하는 시부모.... 씨받이를 위해 데려와 아이를 낳으면 소박을 하는 사람들.... 이게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그러나 정부는 다문화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한국정주를 위한 지원에만 손을 뻗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생겨나고 있는 여성결혼이주민센터들 또한 농촌지역이 아닌 대도시의 경우 지원과 프로그램을 통한 화목한 가정 꾸리기 찾아가는 서비스 등등 단편적 실적위주의 사업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렇지만 그녀들과 마음을 트고 이야기를 하면 그녀들이 한국에 왔을때의 공포감과 고립감 그리고 외로움을 통해 한국의 일그러진 단면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그러나 이러한 단면을 들어내고 보듬기 보다는 스스로들이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사회에서 결혼은 일륜지대사라고 한 말이 지금에 와서는 사뭇 변질되어가나 봅니다.

아이들 장난도 아닌데... 재혼할 대상자는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하여.... 여성결혼이주민들에 대한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 거짓 정보(남편이 유수대기업에 다닌다는 허위 정보)를 가지고 접근하여 여성결혼이주민을 현혹하는 몰지각한 국제결혼정보회사가 많습니다.

 

우리가 접하는 여성결혼이민자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작 위기/보호가 필요한 많은 여성결혼이민자들이 있으며, 출국을 당해야 할 처지에 센터에 찾아와 이혼파탄사유서를 작성하여 몇개월간 혹은 1년의 체류기간을 부여받아 고국으로 떠나야 하는 그녀들의 뒷모습을 보는 것도 눈물 겹습니다.

 

오늘 캄보디아 여성의 오빠가 와서 집에 가야한다고 그리고 내 동생의 인생을 위해 부모님이 있는 곳에서 위로를 받고 새로운 인생을 살았으면 한다는 미등록이주노동자 오빠의 이야기에서 여성결혼이주민의 그늘진 모습을 다시금 발견하였습니다.

 

쉼터에 머물고 있는 태국여성.... 얼마간의 돈을 벌어 태국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겠다는 그녀... 일자리를 찾고 있지만 한국에 대한 기억은 별로 좋지 않다고 합니다. 한국에 들어와 두려움과 고립감 그리고 폭력에 시달려야 했던 그녀들.... 이제는 이런 일이 잃어나지 않았으면 한다고 이구동성 이야기 합니다.

 

그녀들이 새롭게 그리고 기간 두려움에 대해 떨쳐버리고 새롭게 삶을 설계하기만을 바램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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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의 삶

  • 등록일
    2008/11/16 01:47
  • 수정일
    2008/11/16 01:47

저와 같이 살아가고 있는 이주노동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이주노동자 그/녀들.... 도움이 필요해서 오거나 친해져서 오는 친구들입니다.

친숙해지면 형과 아우가 되어 이야기하지만 통칭하여 친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저와 같이 지내는 친구들은 상담을 통해 인연을 맺거나 공동체에 소속이 되어 같이 더불어 살아갑니다.

 

함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이제서야 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센터의 일상은 만남과 헤어짐이라는 순환의 연속입니다. 그나마 오래된 공동체 회원들과 계속 만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가장 기쁠 때는 언제인줄 아세요?

친구들이 한국에서의 생활을 접고 고국으로 떠나는 준비를 하고 함께 조촐하지만 송별회를 하고 서로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이별에 대한 아쉬움을 함께 나누는 자리랍니다. 함께하여 기뻣고 그리고 서로가 추억이라는 소중한 보물상자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행복도 있고, 이별로 인한 아쉬움은 있지만 친구들 환한미소와 조촐히 준비한 다과와 음료수를 마시며 서로가 그리움과 이후 만남을 기약할 수 있는 그런 송별회를 해줄때가 가장 기쁩니다.

송별회를 하고 터미널에서 환송회를 해줄 수 있는 것 자체가 저희의 즐거움이며, 고생한 이주노동자 그/녀들에 대한 한국사람으로서 작은 보답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여전히 많은 수의 이주노동자 그/녀들이 한국사회의 어려운 곳에서 불을 밝히며 불철주야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주노동자들 또한 그런 사람들입니다.

 

피부색이 다르고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서로가 느낄 수 있는 오감을 가지고 있고, 고마움에 대해, 슬픔에 대하여, 이별에 대하여 나눌 수 있는 것 자체가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부터 경제적 측정치에 의해 사람의 높낮이를 측정하고 사람의 높이를 가릅니다. 그릇된 시선이지만 우리사회가 않고 있는 문제라 저는 생각합니다.

 

친구들은 부지런한 사람들입니다.

집에서 부모님이 해주던 밥을 먹고 가족의 보살핌을 받던 이주노동자 그/녀들.... 한국에 와서 어머님 고충을 알았다는 이주노동자 그/녀들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손수 시장을 봐야하며 손수 먹을 것을 만들어 먹어야 합니다.

 

회사에서 주는 밥은 여전히 맛이 없습니다. 고국 음식을 주말 먹고 나면 힘이 난다는 이주노동자 말에서 향수의 깊이와 문화적 차이에 대해 배웁니다.

 

스리랑카 카레, 네팔 카레, 태국음식, 필리핀 시네강, 인도네시아 양고기 구이 등등 다양한 음식을 맛봅니다.  음식도 문화 한축이라 음식때문에 고생한다는 이주노동자들 말에 동감을 합니다. 

 

새롭게 들어온 이주노동자 한국사람은 돼지고기를 많이 먹어요. 저는 무슬림이에요. 돼지고기를 먹어본 적도 없고 율법에 따라 돼지고기를 먹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장님은 그렇게 먹을 것에 대해 알아보지도 않고 돼지고기만을 줍니다. 배가 고파서 일을 할 수가 없어요.

 

저는 저희나라 음식을 먹을 수 만 있으면 어떤 어려운 일이라고 힘들지 않게 할 수 있어요라고 말하는 이주노동자 친구들.... 이로 인하여 고생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사장님은 전화를 걸면 문화에 대한 이해보다 음식에 독을 타지 않는데 아무것이나 먹으면 되지라고 쉽게 치부합니다. 

 

이주노동자들은 낮선환경도 문제이지만 음식으로 인하여 많은 고통을 당한다고 합니다. 주말 어김없이 나오는 자국 상점에서 자국 다과 음료수 그리고 음식을 먹으면서 고향의 향수를 달랩니다. 저희 나라 사람 또한 해외에 나가면 된장찌개, 고추장, 김치에 대한 향수를 달래듯이 이주노동자들 또한 자국의 음식을 먹고 싶어합니다. 

 

지금은 많은 곳에 음식가게가 생겨 나아졌지만 예전에는 참 힘들었다고 회고하는 이주노동자 친구들이 많습니다.

 

이런 이주노동자들.... 삶을 보면 참 미안함이 저절로 듭니다.

 

콘테이너 방에서 그래도 누워 쉴 수 있고 잠 잘 수 있다고 이야기하며 미소를 뛰우는 이주노동자 그/녀들.... 주말 힘든 몸을 이끌고 센터에 찾아와 이런저런 잡담을 하고 가는 이주노동자 친구들.... 이런 친구들은 단속추방이라는 공포감으로 많이 무서워 합니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고향.... 부모님과 가족 생계를 짊어져야 하기에 가족들로 부터 돈을 벌어야 하는 기계로 전락한 이주노동자 그/녀들입니다.

 

그런 이주노동자 그/녀들이 자진하여 떠나는 날과 단속되어 출입국에서 고국으로 들어갈때 그동안 가졌던 고통, 외로움, 두려움들이 다 가신다고 하며, 안식을 취합니다.

 

이런 이주노동자들이 우리와 살아가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대도시가 아닌 오산을 비롯한 도시에서는 이주노동자들이 피부색이 검다고 무서워 합니다. 우리와 다르게 생긴 것에 대한 거부감을 우리는 들어냅니다.

 

이주노동자들 또한 우리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무서워해야 하나요.

다가가 보기라도 하고 이야기해보았나요. 선입견 처럼 무서운 것이 없는데.... 우리는 이주노동자들을 받아 들이기는 커녕 터부시 합니다.

 

이럴때가 가장 속상합니다. 당사자인 이주노동자들 또한 그렇구요.

 

부모님과 가족의 품에서 힘을 내고 살아가야 할 이주노동자 그/녀들.... 정부는 단속하여 쫓아내기 바쁘고, 지역에서는 낮선 시선으로 몰아부치고, 안식을 취할 공간이 없습니다.

 

군소도시에 가보세요. 이주노동자들이 모여 있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자국어로 이야기하는 친구들..... 그/녀들에게 한번 다가가 보세요. 그러면 반가운 얼굴로 눈웃음을 지으며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낮선 사람이 아닌 우리 이웃처럼요. 우리가 먼저 다가가야죠.

 

이주노동자 그/녀들은 가족을 위해 힘들지만 힘을 내고 살아가는 슈퍼맨들이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다정한 이웃이며, 동생과 형들이랍니다.

 

이주노동자 그/녀들에 대한 마음을 여는 우리의 시선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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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우병 반대 오산역 촛불문화제에 참석하고 왔습니다.

  • 등록일
    2008/11/16 01:44
  • 수정일
    2008/11/16 01:44

전국이 광우병 반대의 물결이 출렁이고 있습니다.

저희 오산도 이러한 전국적 흐름에 편승하여 광우병 반대와 우리 먹거리 주권 지키기를 위한 자발적 오산시민들의 촛불들이 매주 수요일 서명전과 함께 진행하고 있습니다.

 

10대들의 뜨거운 먹거리 주권사수를 위한 행보에 저 또한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참석하였습니다.

기성세대가 되어버린 지금.... 우리 역사를 짊어질 청소년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지는 못하더라도 부끄러운 어른이 되지 않기 위한 참석이 었던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들.... 그리고 이 물결에 동참하는 많은 시민들의 보이지 않는 격려 그리고 지지를 보면서 매우 부끄러웠습니다.

 

참 부끄러웠습니다.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살아왔던 삶에 대한 반성이 들었습니다.

내 주변에만 안주하면서 사회에 대한 부조리를 고발하는 사람이 었지 참여를 이끄는 실천가이지 못한 나를 발견하고 매우 부끄러워 참여한 교복을 입은 학생들의 얼굴을 볼 수 없는 부끄러운 나를 발견하였습니다.

 

역사의 진일보를 이야기하기전 교육의 장인 현장 실천공간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함께하지 못한 부끄러운 우리의 자화상을 발견하였습니다.

 

중등학생의 외침.... 광우병으로 죽기 싫다는 단하나의 외침.... 지켜주기는 커녕 방관만을 일삼는 어른의 그릇된 시선을 발견하였습니다.

 

서울은 연일 매스컴에서 거리에 촛불시위와 경찰의 80대식 대응을 통한 연일 연행 인원의 수가 증가하는 추세를 봅니다.

 

5월 서울의 봄과 4월 4.19를 회상해 봅니다.

 

역사를 예견하기 이전 우리는 무엇을하였던가에 대한 반성하는 하루였습니다.

 

저녁 촛불을 들고 시민의 한사람으로서 발언도 하였지만 그 발언..... 10대들에게 어떻게 들렸을까요.... 매우 부끄러워 목소리를 아주 낮춰 이야기하였답니다.

 

부끄러운 어른이 되지 않기 위해 참석한 그 단편적 나의 사고.... 우리 먹거리 안전 그리고 우리 아이들의 안전한 먹거리와 우리나라의 식량주권에 대한 생각은 한참 후에 지금에서야 들었습니다.

 

그래서 매우 부끄러웠고, 죄송하고 미안했습니다.

 

고시가 곧 발표된다고 합니다.

저도 서울  그 촛불의 파도에 하나의 시민 그리고 군중이 되어 참석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역사가 어떻게 이야기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끝내 우리의  먹거리를 지켰다라는 미래를 장식하고 싶습니다.

 

오늘 참석한 오산역 촛불문화제..... 10대들 자발적이고, 오산시민의 보이지 않는 격려와 지지가 있었기에 빛 났습니다.

그리고 비록 작은 수 였지만 오산지역 작은 희망의 불빛을 발 산하였다라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오늘 두번째 오산 촛불문화제에 참석하고 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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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솜환경 공장 이전 식구들과 함께한 개소식

  • 등록일
    2008/11/16 01:43
  • 수정일
    2008/11/16 01:43

사회적일자리창출지원사업으로 운영하고 있는 나눔과 상생을 위한 다솜녹색가게(이하 녹색가게와  다솜환경) 재활용사업단인 다솜환경이 동탄 목리시대를 끝내고 화성 덕절리 시대를 새롭게 이전 개소하여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공장을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공장을 이전하여 다솜환경 식구들과 함께 조촐하게 개소식을 진행하였습니다.

회식도 자주 못해서 회식과 공동체 놀이를 겸해서 진행한 개소식.... 센터 소장님과 운영위원장의 기도로 시작하여 준비한 시루떡과 삼겹살 그리고 농장에서 직접 유기농으로 재배하고 있는 상추와 칫거리를 갖고 지난주 금요일 진행하였습니다.

다들 바쁜 일을 거두고 오후 3시부터 준비한 음식을 먹고 난후 개인들 장기자랑 시간에 노래와 춤을 추면서 즐거운 한때를 보냈습니다.

공장이전지 주변에 개사육장이 있어 파리가 많은데에도 불구하고 매일 고생하시는 다솜환경 식구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만을 갖고 있는데.... 지난주 금요일 함께한 시간이 즐거운 놀이와 위로의 시간이 되었는지 궁금하네요.

비록 적은 돈이지만 매월 이전한 공장에서 다솜환경 식구들과 놀이를 겸한 조촐한 파티를 회식겸 해서 진행할 예정이랍니다.

함께 일하게 된 여성결혼이주민(4인참여)과  참석한 이주노동자(5분중 2명 참여)도 한국의 색다른 놀이문화를 접해서 그런지 즐거워합니다. 함께 즐거운 한때를 편하게 보내서 웃음과 즐거움이 절로 나나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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