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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새벽을 접하는 나의 잡생각...

  • 등록일
    2004/12/09 21:04
  • 수정일
    2004/12/09 21:04
* 이 글은 간장 오타맨...님의 [‘노동의 새벽’ 20주년 기념 콘서트에 부쳐] 에 관련된 글입니다.

아래 덧글에 행인님이 80년대 노동자 민중의 처절한 삶을 노래한 박노해라는 사람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결코 땔 수 없는 관계이기에 박노해란 사람은 죽고 박기평이 살아있다는 이야기를 덧글로 달았던 기억이 납니다. 노동의 새벽 출간 20년을 기념하여 행사가 개최된다고 하지만 전 하나도 기쁘지 않습니다.


그 당시 처절하게 살았던 사람들 지금 어떠한 대우를 받고 있나요.(대우 받기위해 싸운 것은 아닙니다. 노동자가 역사의 주체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살아갔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왜 패배의식에 젖어 지금 살아가고 있습니다. 공지영의 후일담 문학은 그들의 패배를 외면합니다. 80년대 활동가들은 아름다웠지만 성급했고 미숙했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를 따랐던 수많은 노동자들은 지금 어떠한 처지 어떠한 생각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가슴 한켠 싸늘하게 다가옵니다. 그들 현장에서 ㅤㅉㅗㅈ겨난 것은 감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족으로부터 외면 받거나 버림 받은 것도 감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주체라 믿어왔고 그렇게 실천한 그들은 지금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요. 현장에 복귀하지 못하고 노점상 또는 주변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아가면서 자신이 가졌던 그 역사적 주체의식에 대한 생각에 조금은 회의썩인 생각을 갖거나 아니면 운동에 반편양을 나타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선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따르고 믿었던 사람이 그렇게 무너진다는 것은 같이 동고동락했던 많은 사람들 또한 무너진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조직은 망해도 사람은 남습니다. 그러나 철저한 조직적 관계를 맺어온 사람들은 조직이 망해도 사람이 남기는 그리 쉽지 않더라구요.... 참 모질기도 합니다. 다는 아니지만 아직도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벅참이 한순간 모닥불로 꺼질때 그 처절함이란 겪어보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습니다. 저도 말로 지껄이거나 안다고 자부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고통을 단지 짐작만 할 뿐입니다. 그들의 절망은 어떠할까... 그래서 그 노동의 새벽이라는 말만 들어도 전 개인적으로 알레르기 반응이 나타납니다. 저에게 있어서 만큼은 요.... 자랑스러움이 부끄러움으로 변할때 심정이라고 할까요.) 공장을 떠난 공지영은 소설로서 80년대 후일담 문학을 한다고 하고 있으며, 박기평은 감옥에서 나와 사람만이 희망이다. 그리고 여타 시를 통해 그 당시 성급했다는 말을 하고 강단을 돌아다니고 있고, 이정로라는 가명을 쓰던 백태웅은 캐나다 인가에서 변호가 겸, 국제학 관련 대학강단에 서있다. 난 그들의 선택에 대해서 뭐 할말은 없다. 다만, 그들이 지껄인 만들에 대해 책임을 지지 못하고 있음에 분개하고 있다. 나 또한 그들과 연관성이 없지는 않다. 그들과 같은 혁명론을 갖고 89년 전민학련(전국민주주의학생연맹 일명 DSL)깃발 아래 학생운동을 하였던 터라... 그리고 그들을 보며 행당동 사람들이라고 말하며 그들 실천에 대해 무한 신뢰를 갖고 운동이라는 것을 경험했고 내 인생으로 받아 들었다.(운동을 접하고 한 정파를 선택할때 다 마찬가지 이겠지만 내가 알고 선택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속해있던 곳이 이곳이라 난 이를 타랐고 실천하며 선택하였다.) 내가 접한 그들.. 그리고 늘 소수였고, 신념을 지키기 위해 버거웠지만 실천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돌아서는 모습을 보았을때.. 가슴이 무거지는 심정이었다. 남들은 89년 동구사회주의권 붕괴가 운동의 진로에 있어 희망이 사라졌다고 하였지만 나에게 있어서 만큼은 89년 충격(그 당시 일학년이 뭐 알겠나.)보다 더했다. 그리고 선배들은 88년 CA 소수파와 다수파 논쟁에서 분리되는 과정보다 89년 동구사회주의권 붕괴보다 그들의 돌아선 모습 아니 94년 그들의 손에 의해 재건될거라 확신되던 사회주의노동자동맹(이하 사노맹)이 합법화 후 자신 해산되는 과정을 지켜본 사람들이라면 나와 같으리라... 충격은 그야 말로 대단하였다. 남한 사회구성체논쟁의 맨 선두에서 이름을 날린 조직의 대표선수라 하는 박기평(필명 박노해)과 백태웅(필명 이정로)는 언제나 든든한 선배요 든든한 이론적 바탕이였다. 그래서 무모한 싸움도 마다하지 않았고, 희망도 보았다. 노동자 민중이 왜 중요한 지도 이 사회에 있어서 왜 사회주의가 필요한 것인지도 그리고 한국사회가 왜 신식민지인가?(95년 들어서면서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가 해체 되고 초국적자본이 대두되었다라는 여러가지 글을 있다. 특히 창작과 비평에서 나온 92년 봄호(93년 봄호 인가)는 일본인 교수겸 활동가인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사람이 신자유주의 대두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고 초국적 자본의 대두,,, 진보와 보수의 구도를 넘어 총노동대 총자본의 대두 서막이 막이 오르던 시기.... 이 시기 진보정당 건설이라는 화두가 남한 운동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다. 합비합동시건설론 대두 그러나 민중당과 민중의독자적정치세력화(이하 민독정) 실패... 대선에서 백기완선생님의 출마 그러나 30만표에 못미치는 결과....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그리고 좌파는 통일전선 활동은 역사에 사라지고 각자 길을 걷게 된다. 다만, 사추위(사회당추진위원회)와 민중회의가 조직통합을 하여 만들어낸 민정련(민중정치연합)... 몇년 횟수를 더해가며 민정련은 나뉘어진다. 이 사건이 있기전 사노맹은 전격적으로 1994년 합법화를 내걸고 자신이 갖고 있던 기존노선을 포기한채 대중정치조직(이하 대정조)로 변모를 꿈꾼다. 그동안 비합활동을 하였던 많은 활동가들은 자수를 하고 대중공간으로 나선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진보정당운동에 뛰어든다. 국민승리21에 대거 결합한 세력이 있고, 갈무리 출판사를 운영하며 부문운동과 네그리 적 바탕은 네트워크를 한축으로 한 소통과 연대를 추진하기 위한 왑이라는 공간이 있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그럴것이다. 그들은 쉽게 젊어서 너무 성급하였다. 말을 하며 그때 오류를 지적할 수 있지만 따르는 사람의 입장은 다르다. 이렇듯 내가 정치노선과 조직노선을 갖고 활동하던 정파는 90년대 중반 한국 운동사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80년대 그 수많았던 사람들 또한 함께 사라졌다는게 더 큰 아픔이다. 백무산 시인은 강령이라는 시에서 우리의 강령은 틀림없다고 하지만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우리 강령은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과연 많이 있을까? 지금.... 박노해를 기억하기 이전 박기평의 현재 모습을 우리는 기억하고 그를 봐라봐야 한다고 난 생각한다. 그가 선량한 사람으로서 대중운동을 위해 열심히 하고 있다면 말은 달라진다. 또한 시간은 80년대 90년대 2000년대 토막으로 기억될 수 없다. 우리내 노동자 처한 조건이 과연 80년대와 지금 뭐 달라졌는가? 고작 임금 몇푼 오르고 노동귀족이라고 소리 듣는것.... 그러나 보라 고작 70만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조직된 노동자들 뿐이다. 80년대말 90년대 초중반 에 그나마 악법을 어겨서 깨트리던 그 저력과 노동자 헤게모니는 잃어버린지 이미 오래이다. 그리고 386세대라 80년대 민주화운동을 다 자신들이 잘나서 하였다고들 한다. 그리고 공지영 류의 후일담 문학과 같은 정서에 배겨든 많은 386세대는 동질감으로 똘똘 뭉쳐 노사모라는 것을 만들어 위안을 삼고 있다. 그러나 민주화도 현재진행형이지 과거진행형이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 않는가? 그렇듯 난 80년대의 철저한 박노해가 있었고 지금은 박기평이 있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난 80년대와 2000년대 박기평을 동일한 인물로 본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라는 어려운 책에서는 현존재라는 말을 써가면서 시간이라는 개념을 철학적으로 난해하게 해석하지만 주요한 것은 과거 현재 미래는 동일 할 수 밖에 없다는 맥락이다. 이 말이 내포하는 것은 존재하는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 단락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사람의 마음은 늘 한결 같다. 나하나 변하는 것은 별 문제 없다고 하나 그 변함이 때론 큰 파장을 지니고 있을때가 있다. 특히 노동해방동맹으로 부터 시작된 박기평은 많은 활동가들에게 자랑이였으며 또한 부끄러운 자화상을 던져주었다. 유독 왜 박기평에게 그러냐는 말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얼마나 철저한 카리스마를 갖고 동료나 후배들에게 혁명을 위해 얼마나 치열해야 함을 역설적으로 강조한 것을 생각하면 나의 이러한 푸념은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 난 그가 변해서도 아니요 그가 치열하게 살지 못해서도 아니다. 그가 아직도 박노해라는 필명을 갖고 그렇지 않은 삶을 살아가며 80년대 나도 한때 치열했다는 푸념을 하는 것에 벨이 꼬여서 그렇다. 간장 오타맨이... P.S 지금 많은 조직에서 반자본주의 전선투쟁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보라 우리의 투쟁의 대상이 반자본주의 투쟁인가를 투쟁의 상은 초국적 자본이 대두된 이상 총노동대 총자본으로 구도로 확정되어져 있다. 반자본주의 전선이 아니라 부문운동 또한 총자본에 대한 총노동을 엄호하는 투쟁으로 확정되어야 한다. 추상적 반자본주의 전선은 일세계에서 쳐놓은 전선에 불과하다. 반자본주의전선투쟁은 제3세계 일국적 운동을 통한 전지구적 연대에 있어서는 참 힘든 전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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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새벽’ 20주년 기념 콘서트에 부쳐

  • 등록일
    2004/12/08 20:19
  • 수정일
    2004/12/08 20:19
오는 10일 ‘명사’들 초청 대형행사…민주노총 등 노동계 ‘무관심’ 속 치러져 ‘노동의 새벽 출간 20주년 기념 콘서트’가 오는 10일 열린다. 1984 년, 노동문학의 신기원을 개척하며 ‘박노해 현상’까지 일으킨 기폭제가 됐던 서적 ‘노동의 새벽’. 그리고 한때는 노동자 계급의 의한 체제 변혁을 꿈꾸었던 사회주의 혁명가였다가 이제는 ‘나눔과 사랑의 전도사’로 돌아온 노동의 새벽의 저자, 박노해. 그 자체로 상징이고, 역사인 ‘노동의 새벽’을 기념하는 ‘뜻 깊은’ 행사가 세밑을 앞둔 즈음에 열리는 것이다. 이번 행사에선 신해철이 기념음반 프로듀싱을 맡았고, 윤도현, 싸이, 장사익, 황병기 등 ‘국민적 스타’들이 대거 출연해 기념무대를 장식하게 된다. 강헌, 백태웅, 임종석, 조희연 등 정치·문화·학술 계통을 두루 관통하는 ‘명사’들이 추진위원으로 참여한 점도 눈길을 끈다.


하지만 기자는 지난 10월 29일, 레이버투데이에 이번 콘서트를 비판하는 기사를 쓴 바 있다. 꽃다지 전 대표 이은진씨와 노동가요 작곡가 김호철씨 등의 입을 빌어 이 콘서트를 바라보는 어떤 이들의 ‘유감’을 지적한 것이다. 비 판의 요지는 이랬다. 먼저 이 콘서트가 행사 주체나 참여뮤지션들의 면면으로 봤을 때 80년대 노동의 새벽의 정신을 올곧이 이어받고 있는지 의심이 든다는 것. 그리고 비정규직 문제와 정부의 탄압으로 노동계가 그 어느 때보다 더 처절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7만 7천 원’ 씩이나 하는 티켓을 사서 공연을 관람할 노동자가 있을 리 만무하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수익금 전액을 이주노동자를 위해 쓴다고 했으나 그 돈을 사망한 이주노동자의 ‘유해 송환 비용’이나, ‘자녀들 공부방 지원 비용’ 등으로 쓰겠다는 발상은 ‘맥락을 잘못 짚은 것’이라는 점이 기사의 주요내용이었다. 기사가 나간 뒤 반응은 뜨거웠다. 언론으로선 최초보도였다는 점에서도, 노동의 새벽과 박노해가 지닌 ‘현재적 민감함’ 때문에도 반응은 뜨거울 수밖에 없었다. 이 번 콘서트를 “‘노동계급의 눈물과 피’를 팔아먹는 수혜적 인도주의”라며 혹독한 비판을 가한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의 시를 다양한 음악적 분석과 방식으로 표현하고 창작하여 우리가 함께 시대의 보석으로 간직하는 것이 뭐가 문제가 되느냐”고 반박하는 이들도 있었다. 어떤 이는 “노동자 계급의 정서와 사상을 가장해 얼치기 혁명투사의 흉내만 냈을 뿐, 실제 노동자계급과는 거리가 멀었던 박노해와 노동의 새벽이 이제야 제 자리를 찾은 것이다”라고까지 평가했다. 주 최측 관계자의 ‘항의’도 있었다. 왜 아직 공식적인 언론브리핑을 거치지 않은 단계에서 미리 비판적 기사를 쓰느냐는 것이었다. 출연진도 아직 100%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너무 악의적인 시각으로 이번 콘서트를 재단했다는 지적이었다. 기자는 그 관계자에게 반론을 제기하면 실어주겠다고 제안했고, 이와 함께 콘서트의 내용이 달라지게 되면 새롭게 반영된 기사를 쓰겠노라고도 약속했다. 그 로부터 보름 뒤인 11월 중순경 노동의 새벽 콘서트 기사가 일제히 모든 언론에 실렸다. 다행히도(?) 이들 언론엔 레이버투데이의 기사처럼 ‘비뚤어진’ 시각으로 이번 콘서트에 초를 친 기사는 없었다. 그러나 콘서트의 기조와 내용이 달라진 건 없었다. 그 리고 본 공연을 앞둔 지금, 실제로 ‘변화’된 것들이 있다. 우선 공연요금이 ‘3만 원 균일’로 바뀌었다. 공연을 불과 14일 앞둔 11월 26일, 주최측은 최고 7만 7천 원까지 하던 차등 요금제를 폐기하고 3만 원으로 통일했다고 밝혔다. 주최측은 “축제같은 공연을 함께 즐기고, 나아가 이 사업의 취지를 더 많은 분들에게 전하기 위함”이라고 요금 인하의 이유를 밝혔다. 뒤늦은 결정이지만, 박수를 보낼 만한 일이다. 콘 서트 제목을 ‘스무살 공순이의 노래’라 이름 붙인 것도 달라진 점이다. 공연포스터에선 영화배우 배두나가 ‘공순이’를 자처하고 나섰다. 영화배우 조재현이 공연 사회를 맡고, 전태일 열사의 누이 전순옥 참여여성복지센터 대표도 무대에 선다. 결 국 이제 우리는 ‘스무살 공순이의 노래’란 이름을 단 ‘3만 원짜리’ 노동의 새벽 20주년 기념공연을 관람할 수 있게 됐다. 기자 입장에서 낯뜨겁게 자위하자면, 레이버투데이의 기사가 여기에 눈꼽만큼의 ‘자극’을 주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그 럼에도 이번 콘서트에 대한 아쉬움은 여전히 남아 있다. 우선 사실상 출연진이 달라진 것이 없다. 애초부터 추진위원으로 참여했던 전순옥씨 정도를 빼면 무대에 서는 이들 중 지금 ‘노동’과 직접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는 이들은 없다. 이주노동자들이 결성한 밴드가 마치 ‘양념처럼’ 출연진 라인업에 속해 있을 뿐, 오늘날 노동의 문제를 직시할 만한 이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도 이번 콘서트는 ‘노동의 어제’를 추억하는 행사일 뿐, 힘겨운 ‘노동의 오늘’을 나누는 행사는 아니다. ‘노동의 오늘’이 ‘소외’되고 있는 건 단순히 출연진의 문제만이 아니다. 주최측은 이번 행사를 홍보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각종 포털사이트에 이번 행사를 소개하는 배너광고를 게재하는 등 전방위적인 홍보작업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정작 노동의 새벽의 진짜 주체인 노동자들에게 이번 행사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다못해 민주노총 자유게시판에조차 이번 행사와 관련한 글은 올라오지 않았다. 민주노총, 전태일기념사업회 등 노동단체의 반응도 냉랭하다. 이준용 민주노총 문화미디어국장은 “이번 행사와 관련, 주최측으로부터 어떠한 협조요청이나 제안을 받은 것이 없다”며 “과거는 물론, 지금도 끊임없이 노동과 문화를 이야기하고 있는 이들에겐 정작 이번 콘서트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저들만의 잔치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래서일까. 공교롭게도 오늘자(12월 7일) 조선일보에 실린 박노해의 ‘고백’은 의미심장하다. 이 고백을 듣고 기자는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박 노해 시인은 주위에 “나는 변함없이 진보를 지향한다. 다만 진보의 내용이 바뀌었다. 과거에는 모스크바가 진보의 표상이었다면 지금은 뉴욕”이라고 말하고 있다. 박시인은 “내게 뉴욕은 강자와 약자의 구별이 없고 다수와 소수도 자유롭게 소통하는 용광로와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조선일보 12월 8일자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386’ 기사 중) 포 털 사이트에 걸린 노동의새벽 콘서트 ‘배너광고’의 문구는 ‘노동자에서 인간으로’이다. 대체 이들이 말하는 노동자는 누구이고, 인간은 또 누구일까. 이들은 이제 ‘모스크바를 사랑했던 노동자’가 아니라 ‘뉴욕을 사랑하는 인간’이 되고 싶은 것일까. 그렇다면 처음부터 기자의 비판은 번짓수를 잘못 찾은 셈이다. 기자는 최소한 그가 뉴욕을 사랑하는 ‘노동자’의 정서와 이념만은 지니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앞서 이야기한 어떤 이의 말처럼 이제야 그와 노동의 새벽이 ‘제 자리’를 찾은 것인가. 이오성 기자 dodash@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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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술잔

  • 등록일
    2004/12/08 10:26
  • 수정일
    2004/12/08 10:26
오늘 술잔 깊이와 삶이 느껴진다. 겨울 술잔에 비친 사무실을 본다. 아 이리도 사무실이 무심 할 수가 우리는 술에 의지한채 그냥 내일을 기약해 본다. 오늘보다 낳은 내일이 있겠다는 희망을 간직한채 그냥 내일을 위해 오늘 일 잊기 위해 우린 소주잔을 높이든다 내일은 오늘보다 낳은 내일이라 믿어보면서 그래도 내일은 내일이기에...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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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느끼지 못했던 겨울....

  • 등록일
    2004/12/08 10:24
  • 수정일
    2004/12/08 10:24
그래 겨울 나는 늘 항상 옆구리가 시리다는 핑계로 술을 벗삼아 살아갔던 겨울이었지.... 내가 느꼈던 겨울 참 호사하고 과욕에 넘치는 겨울이었다는 것을 이제서야 알 것 같다. 오늘도 어김없이 소주 잔에 시선을 집중하고 취하면 안되지 하고 술잔을 주고 받았다. 이것이 내가 사는 풍경이요. 내가 접하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이다. 온갖 사랑의 손길이니 사랑의 나눔이니 하는 말들로 치장된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과 따뜻한 겨울을 보내자는 켐페인은 이들에겐 무용지물이다. 이들은 팔과 다리가 튼튼하다 못해 근육미(美)가 넘치는 건장한 아저씨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아저씨들이 사랑의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아니다. 하루벌어 하루 살이하는 이 아저씨들에게 존심과 중용이 있다. 첫째, 아저씨들 남에게 아쉬운 소리 안한다. 둘째, 아저씨들 먹지못해도 존심을 궂히지 않는다. 셋째, 아저씨들 구호의 손길 내밀지 않는다. 자신들은 돈 벌어 먹고 사는데 자신보다 힘든 사람들 돈 궂이 빼앗아 먹는 기분이란다. 넷째, 아저씨들 일이 있어도 오야지가 개같으면 일 안하다. 아무리 배고파도 정당하게 대우받으면서 일하고 싶다는 심정이다. 다섯째, 아저씨들 자신이 일 나가지 못해도 용역 나오는 사람 순서대로 일을 보낸다. 다른 용역은 안그렇지만 내가 다니는 용역의 불문율이다. 처음 나온 사람이라도 기회는 동일하다. 먼저 나온 새가 먼저 먹이를 먹는다고 해야 하나...


그래 남들은 나더러 삶에 묻어난 이야기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난 삶에 묻어난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왜 아직도 난 그 삶에 묻어난 이야기를 할 수 없을 뿐더러, 알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 삶의 1/10이라도 알려면 아마 그 삶에 나의 삶으로 환원되지 않는 이상 나는 수박 겉ㅤㅎㅏㅌ기를 할 뿐이다. 난 내가 보고 느낀 것을 써내려갈 뿐이다. 그분들에 대한 나의 시각 늘 주관적이지만 난 앞으로도 내가 그분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고정될 것이다. 불쌍한 사람이 아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그러나 이 분들도 인간이지라... 희노애락 그리고 절망이라는 것이 엄습할 때가 있다... 내가 본 사실을 이야기 할 뿐이다. 그래도 난 오늘 쉬지만 내일이 있다는 것에 안도를 한다. 오늘 비록 일은 없지만 내일을 기약하고 오늘을 정리할 수 있기에.... 다가올 내일보다는 오늘에 충실하고자 하였으나 오늘 일이 없기때문에 이 겨울 막연한 내일을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다. 그래도 좋다. 내가 미처 몰랐던 내가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술잔을 주고받고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에.... 컴퓨터 모니터에 앉아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주러리 써내려 갈 필요도 없고, 내가 바라본 내 시선대로 함께 어울리고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다. 다만 내가 아직 조직가로서 구색을 갖추지 못해 그들과 함께하지 못한 다는 흠 하나만 ㅤㅃㅒㅤ놓고는.... 진짜 노동자랑 난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지만... 초심의 노동자 만날 기회 어디에 있나....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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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문재] 마음의 오지

  • 등록일
    2004/12/07 20:19
  • 수정일
    2004/12/07 20:19
* 이 글은 알엠님의 [스트레스] 에 관련된 글입니다.

알엠님의 글을 읽다. 문듯 어제 읽었던 시가 생각나 끌쩍여 봅니다. 돈을 벌기위해 노동을 한 것이 아니라 세상과 대화를 하기 위해 나섰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져봅니다. 저도 돈이 없기때문에 돈 버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내가 생각하는 대화를 나누기 위해 돈을 벌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해 밥먹고 말을 하기 위해 노동을 합니다.


죽지 않을 만큼 돈 벌어 쓸만큼 돈을 씁니다. 그러나 세상에 찌든 저는 세상의 욕심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과욕으로 넘쳐 흐르는 삶을 카드라는 놈에 의지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언젠가 과욕이 절제되는 내가 쓴 그 돈 다 갚는 날이 오겠죠. ------------------- 탱탱한 종소리 따라나가면 여린 종소리 되돌아와 종 아래 항아리로 들어간다 저 옅은 고입이 있어 다음날 종소리 눈뜨리라 종 밑에 문힌 저 독도 큰 종 종소리 그래서 그윽할 터 그림자 길어져 지구 너모로 떨어지다가 일순 어둠이 된다 초승달 아래 나 혼자 남아 내 안을 들여다보는데 마음 밖으로 나간 마음들 돌아오지 않는다 네 안에 또다른 나였던 마음들 아침은 멀리 있고 나는 내가 그립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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