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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10/22
    J.D.의 말.
    레이-1
  2. 2005/10/20
    '저는 이건희 회장을 존경하는데요?'(7)
    레이-1
  3. 2005/10/18
    동감합니다.(3)
    레이-1
  4. 2005/10/04
    ‘착하다’ = ‘예쁘다’?!(10)
    레이-1
  5. 2005/09/29
    '제대로' 보고/듣고/느낄 자유는?
    레이-1
  6. 2005/09/18
    명절의 의미?(2)
    레이-1
  7. 2005/09/17
    예술의 의미. (2005/09/27 수정)(2)
    레이-1
  8. 2005/07/06
    월간 [사람]의 창간.(2)
    레이-1
  9. 2005/07/05
    조금 더 생각해보면.(10)
    레이-1
  10. 2005/06/09
    조건과 경계, 톱니바퀴로 퍼즐 맞추기.(5)
    레이-1

J.D.의 말.

"사람이 진정으로 위대해지는 것은 한 가지 경우뿐이다.

만일 사람이 삶과 죽음 사이의 간극을 넘을 수 있다면,

죽은 뒤에도 살 수 있다면

그 사람을 위대한 사람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어쨌거나 빠른 속도로 살아야 한다."

 

요즘 내 메일 시그.

 

"영원히 살 것 처럼 꿈을 꾸고,

내일 죽을 것 처럼 오늘을 살아라."

 

James Dean. (1931.2.8 ~ 1955.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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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건희 회장을 존경하는데요?'

떳다! 진보네님의 [트랙-팩 18 : KlN삼성 - "삼성, 됐거덩"]와 관련된 글입니다. 예전에 봤던 손을 내밀어 우리님의 [삼성, 무서운...]글이 생각나서 이 글도 함께 엮습니다.

'가족'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무한한 착취의 가능성은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본 후의 소감("월간 [사람]의 창간" 포스트)을 통해 한번 얘기 한 적이 있다. 뭐, '가족처럼 대우해드리겠습니다'라는 말 속에 숨겨진 진실은 핏줄을 앞세워 착취를 고스란히 참아내라는 의미와 다름 아니라는 그런 얘기. 근데 요즘 삼성의 카피가 바로 그거라서 더 끔찍하다. '또 하나의 가족'. 젠장. 정말 그 카피가 주는 인상이 강하긴 한가보다. 나는 입에 풀칠하기 위해 논술학원에서 노는(?)중인데, 대학 입학 면접 시험 기출문제 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 "도덕적이지만 가난한 삶과, 비도덕적이지만 풍족한 삶 중에 택하라면 어느것을 택할 것이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너무 도덕교과서 같은 질문이기 때문에 흔히 아이들은 '가난보다는 도덕이 중요하다!'라고 쉽게 답해버리는 경우가 생긴다. 그날 내가 만난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어찌나 윤리의식이 투철한지, '나쁜짓 하면 당연히 벌 받아야죠~ 잘 사는 꼴을 어떻게 봐요?'라는 단순명쾌한 답변이 되돌아왔다. "네가 생각하기에, 도덕적이지만 가난한 사람은 누가 있는데?"


"그게 누군데?" "이건희요!" 솔직히, 저 대답을 듣자마자 내 본분도 있고 그녀석 머리를 확 쥐어박을 뻔했다. -_-a (속마음 : 이 자식아~! 너네집 분위기를 알만하다. -ㅅ-;; -> 알긴 뭘 알아.) 근데, 그 다음의 그 친구 답변이 더 가관이었다. 아니, 가관이랄 것도 없었다. 그냥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읊어대는 얘기를 그대로 따라하고 있을 뿐이었으니. 최고 연봉을 자랑하는 회사에 노사문제도 없고, 우리나라 경제에 큰 버팀목이 되어 주는 기업이자 국위선양을 하고 있다는 등의....심지어 존경까지 한다면서 이렇게 말을 맺는 것이다. '저는 도덕적이지만 가난한 삶이 아니라 도덕적이면서도 부유하게 살고 있는 이건희 회장님을 존경하고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면접 시험용 말투)' 오 마이 갓. 결국 삼성의 노조탄압에 대한 얘기(분홍마녀님의 '그 해고자' 포스트)를 해주면서 '아니, 그럼 나쁜 놈이잖아요? 저 이제 싫어할래요!'라는 대답을 듣고야 말았지만 =_=;;; 참 많이 섬뜩했다. 정말 이렇게 얘기하지 않는 이상 사람들은 삼성을 '또 하나의 가족'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살고 있는게 아닐까 싶어서 무서웠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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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감합니다.

marishin님의 [민주노총 사태 무엇이 문제인가] 에 관련된 글.

"약간의 희망만 있어도 대중은 들고 일어날 것이다."라는 문구를 제외하고는 marishin님의 글에 대부분 동의한다. 저 문구를 굳이 제외한 이유는 '들고 일어날 주체'로서의 대중에 대한 나의 생각이 아직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전략)...민주노총은 시작부터 개량주의적이었다고 하자. (나는 자세한 사정을 모른다.) 하지만 1996년, 97년 노동법 개악에 맞선 대투쟁이 개량주의적 투쟁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있는가? 이 투쟁의 끝은 지도부의 개량주의 때문에 흐지부지 됐지만, 그것과 투쟁은 구별되어야 한다. (중략) 민주노총 깃발 아래 벌어진 많은 투쟁들은 결코 개량주의적이지 않았다. 문제는 지도부의 개량주의다. 이 둘을 구별하지 않는 것은, 현장 노동자들에 대한 모독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어느 쪽도 운동의 진정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쉽게 나오는 것도, 정파를 이끄는 일부 운동가들만 눈에 보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중략) 대중에 대한 무시 또는 무지, 관념성은 대안에서도 드러난다. “자본가와 질적으로 다른 새 인간으로의 노동자의 자기변혁”이라니... 최저 임금보다 10원 더 받는다는 기륭전자 여성 노동자들은 모르긴 몰라도 매일 매일 자신들이 '자본자와 질적으로 다른 인간'임을 절감할 것이다. 어디 그들 뿐이랴. (중략) 과연 어떻게 자기변혁을 이룰 것인가? 아니 그 이전에 이 자기변혁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말해보라. 최저 임금보다 10원 더 받는 사람들, 아니 최저 임금도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지금 여기에서 그리고 일상적 삶과 활동에서부터” 무엇을 해야 이 자기변혁이 관철되는가? 진짜 문제는 “잘난 노동운동가들”이 바로 이런 구체적인 대안과 전망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중략) 그래서 문제는 운동가들이 현실과 동떨어진 구호 속에 매몰되어 다툼이나 벌이는 데 있지, 민주노총이 애초 한계가 분명했다는 데 있지 않다. 제대로 된 운동가들이 있었다면 민주노총의 태생적 한계는 벌써 극복되었을 것이다. 약간의 희망만 있어도 대중은 들고 일어날 것이다. 지금 이대로는 도저히 더 버틸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그들이 더 잘 알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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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다’ = ‘예쁘다’?!

** 월간 인권잡지 [사람] 4호 '이것도 인권이에요'에 실린 글.
 
 
* 당신의 외모차별 지수는? (각 항목에 체크해보세요. *출처 : 여성민우회)

△ 친구들이나 주위 사람의 외모에 대한 인사나 평가를 하는 것은 관심과 애정의표현이다. (  )
△ 살 찐 사람은 솔직히 둔하고 게으르다고 생각한다. (  )
△ 예쁜 사람이 공부도 잘하고 일도 잘한다. (  )
△ 소개팅에서 상대방의 외모가 맘에 안 들면 외모에 대해 말하는 편이다. (  )
△ 미니스커트 등 몸매가 드러나는 옷은 날씬한 여성만 입어야 한다. (  )
△ 내가 부르는 친구의 별명 중 외모와 관련된 것이 있다. (  )
△ 여학생은 교복치마를 입어야 단정해 보인다. (  )
△ 입사지원서에 키, 몸무게 등의 외모 관련내용을 기재하는 것은 당연하다. (  )
△ 채용공고에 '용모 단정한 자'라고 명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
△ 기업에서 같은 조건이면 외모가 뛰어난 사람을 뽑는 게 당연하다. (  )
△ 뉴스의 여성 앵커는 젊고 예뻐야 한다. (  )
△ 여성정치인의 옷차림이나 외모 관련 기사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  )
△ 외모가 뛰어난 사람이 물건을 팔면 더 관심이 간다. (  )
△ TV 연예 오락 프로그램에서 연예인의 외모를 평가하거나 농담을 하는 것은 재미있다. (  )
△ TV나 영화에서 못 생긴 사람이 주연을 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 (  )
△ 성형 부작용이나 무리한 다이어트의 책임은 사회적 영향보다는 개인의 욕심에 있다. (  )
 
** 체크 항목이 0-3개면 '아주 훌륭한 당신', 4-6개는 '아쉽지만 그래도 훌륭한 당신', 7-10개는 '외모차별에 물든 당신', 11-16개는 '외모로 모든 것을 보는 당신'입니다.
 

나는 현재 인권운동단체의 상임활동가이며 여성이다. 당연히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인권침해임을 알고 있다. 내가 위의 외모차별 지수를 체크하면 당연히 ‘아주 훌륭한 당신’의 점수를 얻을 자신이 있다. 적어도 그것이 차별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도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나의 실제 모습은 ‘아주 훌륭’하기는커녕 ‘외모차별에 물든 당신’의 자리에 있다.
 
얼마 전 버스 정류장에 붙어있는 큰 광고판에 세계 굴지의 스포츠용품 회사 나*키의 여성 브랜드 광고가 걸렸다. 발을 힘차게 구르고, 한쪽 팔은 한껏 위로 뻗으면서 운동을 하고 있는 그녀들. 예쁜 보라색 스포츠웨어를 입고 힘차고 밝은 표정으로 ‘따라해보세요’하고 유혹한다. 같이 그 광고를 보고 있던 선배언니의 한마디.
“참 내. ‘예뻐져라’, ‘날씬해져라’도 모자라서 이젠 ‘강해지라’고 까지 하네? 그만 좀 시켜라. 어디 여자들 힘들어서 살겠냐.”
피식 웃어버렸지만 맘 한구석에서는 날씬하고 당당해 보이는 모델들의 모습에 압도되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버렸다.

15년 가까이, 딱 두 번 정도를 제외하고 나는 늘 짧은 커트머리를 고수하고 있다. 긴 머리인 채로 관리하기에는 귀찮은 곱슬머리이기 때문에, 라고 변명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내가 여성적인 외모를 타고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표준보다 큰 키, 건장한 체격, 그리고 잘 봐주어도 ‘예쁘다’는 평가보다는 ‘잘 생겼다’는 평가를 받는 강한 인상, 55(여성 옷 사이즈, 여성 의류 S 사이즈 정도? 여성 의류는 S와 M 이상의 사이즈를 찾기 쉽지 않다.)사이즈의 옷이라고는 한 번도 입어본 기억이 없고, 66사이즈의 옷을 찾으면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오는 상황이다. 맞는 옷을 찾으면 위안이 된다. 아직 나는 ‘표준’이구나 하는 그런 위안.
특히 건강한 외양 덕택에 남성으로 종종 오인되는 경우까지는 참아줄 수 있지만, 뒤따르는 평가들은 나를 아주 맥빠지게 만든다.
‘머리를 길러보지 그러냐’
‘옷 입는 스타일을 바꿔봐라’
마치 ‘여성적 외양을 가지지 않은 내가 사회에서 차별당하는 것이 아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처럼.
이런 상황이니 당연히 나는 타인에게 외적 기준을 적용하여 판단하지는 않으려 노력한다. 나보다 몸무게가 많이 나가거나 더 남성적인 외모를 지닌 여성이라고 해서 사회적 가치가 떨어진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사실, 이제 내 주변 사람들을 외모로 평가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졌다. 현실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외모를 기준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나’일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회에서 불편하게 살고 싶지 않기 때문에 나도 한국여성 표준(대부분 과소체중)의 몸무게를 가지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고, 다이어트 관련 기사에 정신없이 빠져든다. 혼자서 거울을 보고 있을 때는 성형수술 비용이 얼마나 들어가게 될지를 고민한다. 차마 입 밖으로 드러내지 못했지만, 복권에 당첨된다면 눈/코/입/턱/가슴/지방흡입 등의 전신 성형을 하는 것이 절실한 소원이고, 성형 전/후를 보여주는 광고나 성형수술에 성공한 사례를 보여주는 TV 프로그램을 보면 눈을 떼지 못하며 성형수술 당사자들을 품평한다. 집에 아무도 없을 때, 나는 몰래 **씨의 요가 비디오동작을 따라하면서 ‘완벽한 몸매’를 꿈꾸고 있다.
외모로 인한 차별이 인권침해라는 사실은 이젠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외모를 기준으로 취업시 불이익을 주는 것은 평등권 침해에 위반된다는 국가인권위의 권고까지 있었던 것을 보면 외모차별은 확실히 인권침해가 맞다. 하지만 누구도 이 인권침해에 대해 쉽게 개선의 노력을 보이거나 혹은 무시하고 지나가는 것도 사실이다.(주변에서 흔히 오고가는 농담 중에 외모를 소재로 삼는 것은 얼마나 많은가!). 요즘 ‘착하다’는 표현은 심성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외모를 평가하는 말로 쓰이고 있을 만큼 우리 사회에서의 외모차별주의는 그 뿌리가 깊다. 특히 남성들보다 높은 사회 진입장벽 앞에 허우적대는 여성들에게 ‘날씬한 몸매’와 ‘호감가는 외모’는 ‘능력’으로서 이 시대 꼭 갖추어야 할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차별받지 않을 인간의 권리’를 주장하면서도 뒤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외모를 품평하고 스스로를 평가하는 나 자신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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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보고/듣고/느낄 자유는?

* 아르님의 [If you were me 시리즈 - 상영 및 배급 방식의 문제] 글과 관련된 글.

 

인권하루소식 2893호의 [인권, 영화를 말하다] <별별 이야기>를 보고 드는 별의별 생각을 보고 이 부분이 제일 와 닿아서 갑자기 포스트.

 

"한 영화 언론에 따르면 지난 4월 전주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인 자리에서 제작을 총지휘한 이현승 감독은 "몇 편은 인권영화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인권'을 단순히 교과서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감독들이 느끼는 지점으로 설명하는 영화"라고 말하며 "인권도 중요하지만 영화적인 것에 강점"을 두었다는 말을 관객과의 대화에서 서슴지 않았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인권'영화인지 아닌지는 차후에 논하기로 하자. 그러나 제작 총지휘자가 대중 앞에서 털어 놓은 제작의도의 한 단면은 인권위가 기획하고 있는 '국민의 인권감수성 함양'이라는 거대 프로젝트의 목적이 실종되는 순간이다. '인권'을 말하는 영화의 완성도가 인권의식과 겉돌 수 없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관객들에게 인권의 감수성을 불어 넣어주는 완성도 있는 인권영화는

영화적으로도 결코 손색 없음을 감히 장담한다."

- 이현승 감독의 얘기는 '재능'이라는 이름으로 문화 창작의 권리를 '권력'으로서

휘두르고자 하는 영화 창작자들의 폭력에 다름 아니다.

 

 

문화에 대한 권리는 일차적으로는 '문화를 향유할 권리'로 이해할 수 있다. 단순하게 생각해봐도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문화'라는 것이 결국 '자본'과는 뗄레야 뗄수 없는 관계에서 창작가능한 것을 생각해 볼때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권리는 결국 '있는 자'들에게만 열려있는 셈이다. 가장 보편적인 문화예술작품인 영화를 즐기는 것도 두시간에 7000원이라는 돈을 투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니던가. 음악 역시도 10000원을 훌쩍 뛰어넘는 음반 가격을 능히 감당할 수 있어야만 '내 것'으로 소유할 수 있는 상황이고.

(약간 삼천포 - 독립영화나 인디음악의 경우 '있는 자'들만이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즐기기 위해서는 그것을 찾아다니기 위한 노력이 든다. 생존의 권리 조차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독립영화나 인디음악은 아직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다. 이건 좀 다른차원의 문제이긴 하겠지만, 과연 '문화'라는게 재능있는 사람들로 부터만 창작되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문. 그냥 '즐길수 있는'문화가 될 수 있는 환경이 되기 위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는 아직도 많다.)

 

사실 인권하루소식의 기사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지만, 그래도 덧붙이자면,

 

문화는 '향유할 권리'이외에 '창작할 수 있는 권리'로도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아직 내 취향이 천박하야 충분히 즐기고 있지는 못하지만, 나는 스스로 즐기고 창작하며 공감하기 위해 곡을 만들고 부르는 재야가수 조약골이야 말로 '문화권'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재능이라는 것은 결국 타인에게 인정받을 때라야만 빛을 발하는 것이겠지만, 과연 그 '인정'이라는 것의 기준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조약골의 재능에 대해 논하는 것은 어이없는 짓이다. 가수가 잘생기고 멋지고 목소리가 좋아야만 하는 거라면, '문화 소비자'들은 평생 '문화권'의 적극적 주체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개인의 '문화 감수성'을 '능력'이라는 이름으로 짓밟는 것이, '돈 버는 능력의 유무'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 영화 [형사;Duelist]를 본 이후로, 계속 이런 생각중. 무척 충격이었나보다. -_-a

* 정운영 선생님 별세 소식에 참 가슴이 먹먹하다. 시간의 흐름이 너무 빠르고, 그 빠른 흐름 속에서 나는 무엇을 하고 있나..하는 생각이 든다. 선생님도 너무 빨리 가셨지만,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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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의 의미?

** MI-RING Blog "추석이 돌아왔다"와 관련된 글. ** 사실 이 글을 쓰고 나서 MI-RING Blog를 보고는 트랙백 걸었음. 오다가다 라디오를 듣고 있는데 공익광고 같은 내용이 흘러나왔다. (MBC 라디오를 듣다 보면 '잠깐만~'하는 언니들의 노래와 함께 유명인들이 한마디씩 좋은 얘기하는 그것과 비슷한 것..) 내용은 대략, '명절은 좋은 것이여~' 그런데, 그 좋은 의미라고 설명한 내용이 왠지 씁쓸하다. 명절은 개개인의 과거의 삶과 현재와 미래가 함께하는 순간이라고 설명하는데, 그 순간 괜히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대체 '누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이지? 나는 현재 비혼이고 이후로도 별로 결혼할 생각이 없다. 우리 가족은 (나를 제외하고) 모두 기독교이기 때문에 차례도 지내지 않는다. 집안에서 노닥대며 놀기에는 우리 가족이 그렇게 따뜻한 분위기도 아니고 해서 누군가 같이 놀 사람을 찾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기혼여성인 선배들에게는 전화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친정에 있다면 뭐 '잘 놀다 와요~'라고 말했겠지만 만약 시댁이었다면? 대놓고 '고생좀 하겠네?'라고 말하는 것은 별로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을 읽게 될 내 선배들 시댁이 그렇다고 무서운 곳은 아닐것이다. 뭐 시댁 때문에 고생한다는 얘기는 사실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그래도 시댁은 시댁이니.. 당연히 명절때는 찾아뵙겠지..) 명절은 늘어가는 식구들과 새로운 식구들을 만나고 또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는 시작으로서의 기쁨을 가져다 준다 - 라고 생각하는 쪽은 아마 대부분 아들 가진 부모들(특히 아버지들)아닐까? 요즘 분위기가 아무리 좋아졌다 해도 아직도 며느리를 사위 모시듯 하는 경우는 그리 흔한 것은 아니다. '사위는 백년 손님'이라는 분위기는 아직 남아 있어도 말이다. 늘어가는 식구(손주)들과 새로운 식구(며느리)를 만나서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주체는 시부모쪽이지 결혼한 며느리 당사자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결혼한 여성 스스로가 그 명절을 통해 자신의 과거/현재/미래를 확인하기는 아마 요원한 일일 것이다. ** 그냥, 지나가다 들은 한 마디 얘기가 무척 서글프게 느껴졌다. 다음 달에 결혼하는 내 친구가 시댁과의 관계가 좋기를 바랄 뿐이다. 그 친구는 시댁과의 어렵지 않을 조건들을 갖추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명절때 자신의 과거/현재/미래의 삶을 예측할 수 있을 상황이 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정말 잘된 일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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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의미. (2005/09/27 수정)

* 동동이님의 [창작] 포스트에 글을 엮으며 9/27에 글을 덧붙였음. 수정내용은 아래 '계속 보기'에. :)

 

참 내. 제가 이런 포스트를 할 줄 정말 상상도 못했네요.

음악시간 음치라 완전 가성으로 간신히 평균아래-_ㅜ 점수를 건지고, 미술시간 원근감을 이해 못해 완전 수학시간 도형그림 마냥 평면도를 그렸던 바로 이 사람이(게다가 색에 대한 감각도 없어서 스스로 내 그림을 보고 있으면 파레트에 색색깔로 섞어놨던 물감들에게 미안할 지경;;;)!!!!

 

근데 확실히, 고민하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진리인 듯.

 

[형사 Duelist]에 대한 나름의 감상을 적고난 후, 운동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것은 사실입니다. 디자인을 하는 친구 하나는, 인권하루소식에서의 픽토그램에 대한 다른 시각을 보고 상업적이지 않은 디자인의 대안 가능성을 발견하게 됐다하더군요.

 

'예술'이라는 딱지가 붙는 순간, 저는 제 소질에 대해 고민하며 그것에 대한 어떤 평가도 내릴 수 없는 '수동적 수용자'의 자세를 갖게 됩니다. 그 순간 작동하는 기준은 오로지 100% 개인의 '취향'이 되지요. 하지만 개인의 취향이라는 것이 과연 온전히 '개인의' 취향이 될 수 있을까요? 워낙 문화영역에 대해서는 취미가 없으셨던 부모님 밑에서 자랐고, 과학과 수학의 '논리 정연(!)'한 매력에 빠져들어 이과생의 길을 선택했으며, 활동 과정 속에서도 '논리'를 앞세워 '대중적 설득력'을 확보하기 위해 머리 싸맸던(이라고 하기에는 스스로 너무 게을렀지만;;;)것을 생각해본다면... 명시적인 의미가 아닌 상징적 의미를 해독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예술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저와는 좀 덜 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만.

 

그러나 이런(저 같은)사람도 있고, 이렇지 않은 사람도 있게 마련. 상징에 대한 독해력이 뛰어나고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에게 예술이라는 것은 또 다른 방편의 소통의 통로가 될 수 있겠지요.(영화 Cyclo에서 시인(양조위)이 그랬었죠. 보통사람들과 다른 감성언어를 가지고 있었기에 결국 적응하지 못했던;) 그래서 예술에 대해서 좀 더 적극적인 이해에 대한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결국, 소통에 대한 '방식'의 차이로 예술을 이해한다면, 운동의 가치도 같은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민중예술 - 민중가요, 민중시 등등'의 방식으로 말이지요. 그 민중예술이 얼마나 질적인 수준을 확보해서 그 나름의 효과를 얻게 될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이겠지만요.

 

제가 현재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 뿐입니다. 스스로 예술을 해석하는데 있어 인권/반차별/폭력적이지 않은/비착취의 관점으로 대상을 봐야 한다는 것. 어떤 작품을 보면서 불편하다고 느낄때 그것이 단순히 편견인지 아니면 활동가로서의 관점에서 불편한 것인지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해야 하겠다는 것이죠.

 

** 이미지가 주는 효과 때문에 선정적 사진을 선전물에 활용하는 것이 과연 윤리적인가 하는 고민이 이 포스트에서의 저의 고민과 맞닿을 수 있는 것일지도.

** [형사 Duelist]와 관련한 포스트에 달린 siwa님의 덧글에 대한 답변이 될 수도 있겠네요. ^^

** 갑자기 어색한 존대말은 그냥 글 분위기에 따른 것입니다. ^^a

 



(여기서부터는 반말로. ^^a)
 
천재적인 예술가가 하나 있다. 그런데 그는 정말 '천재적 재능'을 타고난 걸까? 우리가 '재능'을 인식하게 되는 기준은 어떻게 형성되는 걸까?
 
한 개인이 자라는 사회적 환경의 영향을 통해 어떤 사물/상황에 대한 판단 기준을 형성해나간다고 본다면, '창조적 탁월함/재능'이라는 것은 그 재능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은, 보편적인 감수성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능력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예술에 대한 내 생각은(현재로서는) '창조적 탁월함'에 대한 인정을 극대화하기 보다는, '다양한 방식'으로서의 인정에 더 무게를 둘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돈이나 물질로서 그들의 재능을 인정하는 형태보다는 명예와 지지로 '천재'의 재능을 인정해 주는 사회가 올때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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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사람]의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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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인권재단에서 발행하는 인권잡지, 월간 [사람]은 내게 꽤 큰 사건이었다.

 

매체에 대해 아는 것은 눈꼽만치도 없는 녀석이 창간호 작업에 참여하게 된 것만으로도 영광일 뿐. 이번 아니면 언제 '창간호'에 이름이라도 실어 볼 수 있을까.

 

사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어서 무척 맘이 찔린다. (앞으로는 열심히 해볼랍니다. 불끈!)

어렵게 시작한 것이고 어려운 길을 가려고 노력하는 분들과 함께 하는 것인 만큼, 정말 좋은 잡지가 될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만들 것이다.

 

 



 

‘가족처럼 대우해 드리겠습니다’ 속에 숨겨진 진실

-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


감독: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 힐러리 스웽크  2005년작품


흔히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고 하지만 그 순도를 따지자면 물이 더 진하다. 피는 90%이상의 물에 여러 불순물이 섞여져 있는 것일 뿐이다. 유전자나 적혈구 따위의 생물학적 요소들이 100%의 순수함을 자랑하는 물의 가치를 마구 깎아내릴 만큼 대단한 요소들이었나? 하기야 피를 돈 주고 사려면 물보다는 훨씬 비싼 것이 사실이지만.

괜찮고 실력 있는 선수를 키우기에는 의심도 많고 나이도 많은 클린트 이스트우드(프랭키 던)와, 서른이 되어서야 데뷔하겠다고 무작정 체육관을 찾아온 힐러리 스웽크(매기 피츠제럴드)에게는 엄청난 공통점이 있다. 둘 다 가족에게 왕따 당하고 있다는 점. 왜 인지는 모르지만 부인과 딸에게 버림받은 듯 보이는 트레이너와 천박한(?) 권투선수라는 직업 때문에 무시당하는 여성 권투선수. 하지만 또 다른 공통점은 그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가족’의 품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 조금만 눈을 돌려보시죠, 가족 말고도 그 따뜻한 사랑과 애정을 퍼부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데 왜 ‘혈연’에 그렇게 연연하며 구질구질하게 감정을 낭비하십니까?

영화 막바지에 그들은 서로의 끈끈한 애정을 확인하고 새로운 가족-부녀관계-구성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나마 마지막에라도 제대로 확인한 것이 나은 것일까. 하지만 ‘재능 있는 선수’와 ‘실력 있는 트레이너’라는 자본주의적 가치를 제대로 확인하기 전까지 그들은 그냥 데면데면한 관계였다. 아하!. 결국 끈끈한 애정을 얻기 위해서는 ‘능력’이라는 가치가 필요한 것이었군. 씁쓸하다. 무시하고 싶은 직업을 가진 딸-언니이지만 엄청난 대전료 앞에서 여주인공의 가족들은 ‘오~달링’을 부르짖으며 상큼?발랄한 모습으로 그녀 앞에 등장한다. 눈물이 날 정도로 감격(!)스럽지만 그녀는 대전료가 없으면 또 다시 버려질 운명. 쯧쯧, 결국 관계의 무게는 ‘돈-능력’으로 결정되는 것이라는 것을 재확인하게 되는 꼴이다.

‘피는 속일 수 없다’는 말로 운운하며 ‘가족’의 울타리를 공고히 하는 것은 사실 당신에 대한 부드러운 배신이다. 이익에 대해 첨예하게 부딪히며 싸우는 정글 같은 사회에서 가족은 당신에게 ‘혈연’을 빌미로 따뜻함을 제공하는 척 하다가 결국 뒤에서 도끼를 내려친다. ‘그래도 밥값(아니 핏줄 값!)은 해야지’하며 말이다. 그 따뜻함에 홀린 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그 배신을 내치지 못하고 가정폭력에도, 끝도 없이 계속되는 감정/노동의 착취에 맥없이 무너져 내린다. ‘가족처럼 대우해 드리겠습니다’라는 한줄 구인 광고가 무서운 것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과 착취에 굴복하라는 뜻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핏줄이 아니다. 새로운 관계의 형성이다. ‘가족처럼’이라는 말 앞에 숨어있는 것은 ‘자본주의적’이라는 단어이다. 정말 끈끈한 정이 그립다면 순도가 떨어지는 ‘피’에 기대지 마라. 그보다는 나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주고 소통할 수 있는 관계를 구성하는 것이 훨씬 더 큰 보답으로 돌아올 것이다. ‘피’는 ‘자석’이 아니다.

(2005. 7. 월간 '사람' 창간호 기고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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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생각해보면.

** 이 글은 부깽님의 [남성 페미니스트] 포스트에 트랙백 되어 있습니다.
** 그리고 [아직 정의내리지 못한 것] 포스트와 연결된 이야기입니다.

* 웹링의 문제를 너무 확장해서 바라봤다는 느낌이 없지않지만, 이런 생각들이 나의 여성주의에 대한 고민들을 넓힐 수 있다는 생각에 쓰게 됐다.

여전히도 여물지 못한 고민이지만, 부깽님의 글을 보고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는 과연 '여성주의자'로서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가?" 여기서의 '입장'이 부깽님의 글에서 표현된 것처럼 "단순히 하나의 시각을 갖는 정지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주변을 중심으로 탈바꿈시키는(사유하는) 동적인 상태를 말한다."는 것이라면 나는 100% 그렇다고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복잡하면서도 간단하다. 성과주의적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나는 '여성으로 살아남는 것'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바꾸어내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고, 말 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주변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고민을 '생각'의 차원을 넘어 '행동'으로 발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싶어한다는 측면에서 일 것이다.)

여성주의적 입장의 동일성을 통해 웹상에서의 연대를 구축한다는 차원에서 mi-ring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오프공간이 아닌 온라인 공간이라는 공간의 특수성이라는 것을 제외한다면 웹링이 진정 '특별한 연대'를 구성해 낼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제 시작인 웹링에 대해 그 의미를 사전에 평가하는 것은 분명 올바른 것은 아니지만, 나는 여성운동이 이제 최소한의 '입장'만을 공유하는 것 만으로 연대를 확장하는 것 보다는, 좀 더 논쟁적인 방식으로 '확고한 연대'를 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번 여성행진에서 일어난 해프닝(기사 참조)을 보면서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공통점과 '여성주의'라는 광범위한 입장을 공유 이외에 진정한 연대와 확장을 위해서 생산적인 논쟁들이 구성되어져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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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과 경계, 톱니바퀴로 퍼즐 맞추기.

** 이글은 "나무"님의 [MSN이 개인정보보호 1등이라는 소문에 대하여] 포스트와 관련이 있는 것 같지만 없습니다. ^^;
 
프라이버시가 뭐냐? 참 뜬금없는 질문에 답변하기도 난감하다.
 
최근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일이 하나 있었다. 내가 생계비를 충당하고 있는 학원에서 대대적인 학생관리 DB 시스템을 만든다고 나선 것이다. (오우, 어감이 참. -_-a)
 
당연히, 앞뒤 재보지도 않고 거품부터 물었다. 다른건 다 몰라도 정보인권 때문에 억울한(!)일 겪어봤으니 얘기 듣는 순간 눈부터 뒤집히고 언성이 높아졌다. "그러면서 애들한테 사회 문제에 대해 다양한 입장을 가지라고 말할 수 있냐?"(=> 뭐라고 그랬는지 사실 잘 기억 안남 -_-a) 등등.. 무조건 반대 입장을 딱 세우고 출발했다.
 

사교육 시장이라는게, 결국 '교육적 가치'보다는 '시장적 가치'에 적응할 수 있는 인간형을 양산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정말 온 힘을 다해 교육적 가치를 구현하고 아이들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가르친다 하더라도, 아이들에게 '대학 합격증'이라는 성과를 가져다 주지 못한다면 그 의미가 상실된다. 결국 학원에서는 학원 수강료 만큼의 '교육' 뿐만 아니라 경쟁력을 높여주기 위한 제반 시스템을 제공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주민등록번호를 포함하여, 이제는 개인식별이 가능한 모드 정보중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것이 없다. 아이들의 성적은 학원 마케팅의 자료로서 활용될 것이고, 아이들에 대한 평가는 적절한 '학교'를 찾아주고 그에 맞는 '맞춤형 학습'을 제공하기 위한 소스가 된다. 따라서 학생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지 않는 것은 학원에게는 치명적인 셈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보집적이 꼭 필수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필수적이다. 학원에서는 좀 더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타 학원과의 차별성을 부각시켜야 하고, '대학 합격증'의 레벨과 숫자가 학원의 생명을 결정하는 지금의 상황에서, 개별 학생들의 '자기정보결정권'은 '대학 합격 이후'로 행사할 수 있는 부차적인 권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 이야기를 풀어놓은 이유는, 결국 '판단의 기준'과 '조건'의 합의지점이 어디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중산층 이상의 고등학생들이 대학을 가지 않고도 선택할 수 있는 자아 실현의 범주란 상당히 좁은게 현실이고, 대학을 가지 않고 자신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학생이라고 하더라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으로 환산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다.
 
결국, 모든 것은 복합적인 상황에서 판단되고 결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활동에 있어서 여러 판단 기준들(원칙과 현실 사이의 수많은 요소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 판단은 오히려 내게 치명적인 칼날이 되어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고민들에 부딪힐 때 마다, 나는 늘 한걸음 뒤로 물러선다.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더 걸림돌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내릴 수 있는 모든 결정에 대해 내가 늘 책임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만큼 상황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따라서 판단의 근거도 변화한다. 나의 선택 기준은 최대한 위험성을 줄이는 방향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선택 기준 조차도 해석의 여지가 많은 것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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