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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4/12/18
    어제 미꾸라지 잡으러 갔다오다.(6)
    간장 오타맨...
  2. 2004/12/16
    그 많던 고졸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4)
    간장 오타맨...
  3. 2004/12/16
    참 좋은 곳에서 살군요.(3)
    간장 오타맨...
  4. 2004/12/16
    자전거가 타고 싶다.(2)
    간장 오타맨...
  5. 2004/12/16
    밤의 적막함을 간만에 느낀다.
    간장 오타맨...

어제 미꾸라지 잡으러 갔다오다.

  • 등록일
    2004/12/18 11:28
  • 수정일
    2004/12/18 11:28
일 없으니 놀러 다니거나 술에 취해 하루를 보내고 있다. 아저씨 왈... 올해 일 없다. 이제 구들장 믿에서 이불덮고 잠이나 연실 자야한다고 말한다. 그래 잠이나 실컷 자자... 일도 없는데... 놀러나 다니구... 뭐 일없으면 없는데로 살아야지 없는 일이 뭐 하늘에서 툭 떨어지는 것도 아니니... 실컷 놀고 먹고해야지.... 어제 먹은 술이 깨지 않아 속도 불편하다. 날씨는 또 왜 이렇게 춥냐... 벌어놓은 돈 까먹고 있다. 아 어제 카드대금 내고 나니 이제 빈털털이다. 대출금은 또 카드로 매꿔야 겠다.(마이너스 통장으로 연명하고 있다.그래도 헉 한도가 올라가 1000만원까지는 버틸수 있다.카드보다 이자율이 낮다. 카드도 하두 많이 사용한지라 플레티늄 회원이다. 이자율도 낮아 현금서비스 19%대 이다. 얼마나 카드를 많이 사용했던지 국민, 외환, 삼성카드는 플래티늄 회원카드에 이자율도 낮게 책정해 준다. 한도도 높고, 뭐 5년 동안 연체한번 없이 사용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공장다닐때 만들어 놓은 마이너스 통장도 긴요하게 사용하고 있다. 그래도 빚은 4000만원을 갚아야 한다. 고놈의 대출....언제가 갚을 날 오겠지... 다행히 카드 빚이 하나도 없어 살만하다. 지금 조금씩 카드 현금서비스 빚지고 있지만... 마이너스 통장이나 사용해 봐야 겠다. 한도 1000만원까지는 버티겠지...) 이래저래 살아가기 힘들다. 12월 나가던 일도 이제 끊겼다. 일거리가 이제는 없다. 내년 2월까지는 이렇다고 한다. 간만에 논두렁에서 미꾸라지 잡아 구수한 추어탕을 해먹었다. 어제 하두 열심히 삽질을 했는지 허리가 뻑쩍 지근하다. 어제 미꾸라지를 잡는데 아저씨 왈... 경제가 불황이니 미꾸라지도 불황탓에 안잡힌다. 미꾸라지도 불황이라 어디로 도망쳤는지 논두렁 하나를 삽으로 뒤져야 1-2마리 정도 밖에 나오지 않는다.


어느지역인지 모르지만 장지리라는 곳에 가서 논두렁 한 20곳을 훌터서 잡은 미꾸라지가 40마리 를 3시간 동안 논두렁을 뒤져서 찾아냈다. 아니 논두렁에서 미꾸라지 찾기를 했다고 말해야 겠다. 한 논두렁에서 보통은 10-20마리가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다. 하여간 40마리 정도의 미꾸라지를 잡아와 라면에 수제비 넣고 해먹었다. 오산을 조금 벗어나면 시원한 공기에 시원한 바람이 부는 촌들이 작은 부락단위로 운집해 있는 동네들이 많다. 서울을 이렇게 조금만 벗어나도 산좋고 물좋은(물좋은 것은 모르겠지만 분명 산은 좋다.) 곳이 많다니.... 아직도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있다. 오산이야 워낙 작은 도시라서 걸어서 하루 반나절이면 오산 전역을 둘러 볼쑤 있다. 도보로는 어렵지만 자전거만 있어도 반나절이면 오산 전체를 둘러보고도 시간이 남을 것이다. 이만큼 작은 도시이다. 그리고 오산 비행장은 이름만 오산비행장이지 정확히 말해 송탄에 있다. 오산비행장 명칭도 송탄비행장으로 바뀌어야 한다. 왜 오산에 없는 것이 타칭을 하고 오산을 군사도시화 시키는지... 이야기가 딴데로 세구 있군. 참 경치 좋은 곳이 많다. 오산은 용인, 평택, 안성, 화성과 인접하고 있어 조금만 나가도 시골운치 냄세를 맡을 수 있다. 참 좋다. 미꾸리자 잡이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냐... 서울에서 살때는 인간들에 치어 살아왔는데 지금 오산에서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아 좋다. 한적하고 사람들에 치어살지 않으니 좋다. 이제 놀날만 남았다. 어떻게 보낼까 노는 날들을....어제 먹은 술이 덜깨서 속이 쓰리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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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고졸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 등록일
    2004/12/16 10:35
  • 수정일
    2004/12/16 10:35
학벌주의와 신자유주의, 두 괴물에 눌린 우리 자화상 '청년실업'이란 단어는 다소 식상한 메뉴다. 최근엔 '구조적 청년실업'이란 말도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더 이상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란 얘기다. 누구나 동의하는 바, 참으로 심각한 사회문제다. 그런데 신문이나 TV에 잡히는 '청년'들의 면면을 보면 어찌된 셈인지 죄다 대학생들 일색이다. 아무리 한국의 대학진학률이 높다지만, 이건 좀 기이하다. 그 많던 '고졸'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올 하반기 통계를 한번 보자.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전체 실업자 수는 78만 7천명이다. 그중 고졸 이하는 55만 8천 명. 무려 70%에 달한다. 청년실업자 수를 30만 명이라고 할 때, 그 중 60% 이상이 고졸 이하 학력이다. 구직포기 등으로 인한 유휴인력의 규모로 봐도 압도적이다. 대졸 유휴인력이 22만명인데 반해 고졸 유휴인력은 89만명에 달한다. 이런 현실은 고졸청년층의 실업과 고용문제가 청년실업 문제의 핵심이라는 것을 웅변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수의 '비대졸자'들이, 대한민국에서는 투명인간이다. 많은 사람들이 서울대의 기득권을 문제삼고, 명문대와 지방대의 차별을 성토하면서도 정작 '고졸'과 '대졸' 사이에 놓인 거대한 취업장벽에 대해서는 좀체 입을 열지 않는다. 설마 청와대에 계신 분이 '고졸'이어서?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선 숨죽이고 있던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일 것이다. "차라리 전쟁이나 터져라"


"차라리 전쟁이나 확 터지면 좋겠네." 전상규(가명) 씨가 씹어뱉듯 던진 말이다. 전쟁이 터지면 좋겠다고? 미 대선 이후 가뜩이나 심란한 요즘, 이 무슨 망언인가. 어이없어하는 기자에게 눈을 맞추지도 않은 채, 그는 씩 웃으며 한 마디 덧붙였다. "전쟁 나면 예비군들 소집할 거 아니에요. 고졸이건 대졸이건 똑같이 끌려가는 거지 뭐." 낯은 웃는데, 말 속에 뼈가 있다. 전상규 씨는 지금 '백수'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해 '프리터'다(프리터(freeter)는 '프리 아르바이터'의 준말로 아르바이트나 시간제로 돈을 버는 청년층을 뜻한다). 그는 현재 PC방 '알바'를 하고 있다. 전 씨는 작년까지 컴퓨터 조립업체의 '사장님'이었다. 사장님이라곤 하지만 직원은 동갑내기 친구와 그, 단 두 명이었다. 그러나 '고졸' 학력의 두 청년이 살아남기엔 서울은 너무 잔인한 곳이었다. 불황 속에서 악전고투하던 전 씨는 카드 다섯 개를 '돌려막기'하다 신용불량자가 되었고, 친구는 고향으로 내려가 버렸다. 그에게 공장 같은 데 취업을 해 볼 생각은 없느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안간다"라는 대답이 곧바로 튀어나온다. "제대하고 바로 취직했었거든요. 관심있던 IT업체 여러 곳에 원서를 넣어봤지만 대부분 아예 고졸을 뽑질 않아요. 하는 수 없이 안산에 있는 공장에 취업했죠. 한 3년 일했나? 오래 했죠. 이젠 알바를 하면 했지 공장에는 다신 안갑니다. 거기 다닌다고 제대로 된 기술을 배울 수도 없고, 계속 몸만 망가지더라구요. 일을 하더라도 뭔가 앞으로 잘 될거라는 거, 그런 게 있어야 하는데…." 전상규 씨에게는 아직도 빚이 많이 남아있다. 그는 한 2년 '빡세게' 알바해서 남은 빚을 다 갚고 나면 다시 사업을 시작할 거라고 말했다. 한국에서 고졸들의 살길은 장사라는 게 전 씨가 짧은 인생을 통해 터득한 '지혜'다. 물론 전상규 씨도 아무나 장사를 하는 게 아니란 것쯤은 겪어봐서 안다. 하지만 이 희망만이 그를 버티게 하는 유일한 힘이다. "민노당원들도 만나면 학번부터 물어본다" "민주노동당원들 중에 고학력자들이 많습니다. 저를 만나면 학번부터 물어봅니다. 그럼 전 87학번이라 대답하죠. 1987년도에 고등학교에 입학했거든요." 씁쓸하게 웃는 김성호 씨(가명). 그와 만난 건 토요일 새벽 6시 무렵이었다. 호텔에서 야간에 접시를 닦는 그를 만나려면 퇴근한 뒤인 그 시각이 적당하다. 민주노동당원이라는 그는 지금은 당 활동이 조금 뜸하지만, 2002년 대선 당시 정말 열심히 뛰어다녔다고 한다. 김씨는 힘들었지만 인생에서 가장 보람있었던 때였다며 추억에 잠겼다. "얼마 전까지도 당 상근자가 되려고 지구당들에 원서를 많이 냈어요. 번번이 미끄러졌습니다. 면접 때마다 '왜 대학을 안갔냐'고 물어보는데 참 대답하기가 막막하더군요. 대학 안간 것을 후회했던 순간이었죠. 아직도 운동에 미련이 많나봐요." 김성호 씨는 이른바 '고운세대'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운동을 했다. 그리고 남들이 한창 대학에 다닐 20대 내내 그는 지방을 떠돌아다니며 일했다. 그의 첫 직장은 현대 중공업이었다.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석유시추선에서 일했다. 물론 정규직이 아니라 하청노동자였다. 김 씨는 뾰족한 기술도 경험도 없었던 자신이 그곳에 오래 있기는 무리였다고 털어놨다. 그 다음 직장도 역시 석유관련업체인 유공이었다. "10년 전에 월급 150만원을 받았으니 꽤 대우가 좋았죠. 그런데 문제는 울산에서 혼자 지내야했다는 겁니다. 전 고향이 전라도 쪽인데 음식도 입에 안맞고 무엇보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운동을 했던 터라 지방에 홀로 떨어져서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는 고립감이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결국 그는 유공도 그만두고 김포공항에 취직한다. 대한항공 하청노동자였다. 항공기 예비부품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월급은 50만원에 불과했고 정규직이 될 희망도 좀체 보이지 않았다. 답답하고 고통스런 나날이었다. 그러다 결국 그곳마저 그만두고 주유소 등을 전전하며 아르바이트를 했다. 2002년 친구와 학원을 차렸다 빚만 잔뜩 진 채 망해버렸던 경험도 있다. 영등포의 한 영세업체에서 고압호스를 만드는 일을 하기도 했지만, 빚쟁이들이 직장까지 쫓아오는 바람에 그마저도 그만두어야 했다. "그래도 아직 꿈은 있어요. 노무사가 되는 겁니다. 노동법 공부를 하는데 파견근로를 마음대로 하는 회사에 대해서 제대로 된 규제가 없다는 걸 알고 참 놀랐습니다. 왜 저희같은 비정규직들이 양산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솔직히 자신이 없어요. 일 하면서 공부한다는 게 만만치가 않더군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전태일을 떠올린 게 과연 기자만의 생각이었을까. 직업에 귀천 없다는 거짓말 고졸 여성들의 취업상황은 더욱 열악하다. 전체 취업여성의 73%가 비정규직이라는 사실에다, 학력이라는 변수가 더해져 고졸여성들은 실제로 직업선택의 자유를 거의 누리지 못하고 비슷비슷한 직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은행에서 근무하는 이은주 씨(가명)는 멀쩡히 정규직으로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된 후, 똑같은 직장에 계약직으로 다시 채용됐다. 그녀는 "계약직은 그야말로 시한부 인생, 파리목숨"이라고 자조한다. 계약기간이 6개월 심하게는 3개월 또는 1개월 단위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13년 경력의 '베테랑'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경력의 대졸 남성 노동자의 3분의 1수준의 임금을 받는다. 심지어 3년차 대졸사원보다도 월급이 적다. 최영미 씨(가명)의 경우, 첫 직장은 백화점이었다. 정규직이었고 일도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고졸여성인 그녀는 IMF 직후 인원삭감의 대상이 됐고, 이후로 정규직이 된 적은 한번도 없다. 지금은 대기업 빌딩의 안내데스크에서 일하고 있지만, "나이를 먹어가는 게 점점 부담스러워" 다시 이직을 준비중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대학에 가지 않은 것을 별로 후회하지 않았는데, 요즘은 생각이 바뀌었다. 김정아 씨(가명)는 전화상담으로 판매영업을 하는 텔레마케터 일을 하고 있다. 올해는 그녀가 고향인 경남에서 상경한 지 딱 10년 째다. 여상을 나와 서울에서 첫 직장을 얻은 후 지금까지 세 번의 이직을 경험했다. 10년간의 사회생활 중 '고졸'이어서 차별을 느낀 부분은 뭐니뭐니 해도 급여였다. 두 번째 얻은 직장은 건설회사였는데, 5년 경력의 그녀가 받는 임금은 전문대학을 졸업한 사회초년생보다 적었다. "1년 만에 그만두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죠. 업무능력과 아무 상관도 없이 졸업장만으로 임금이 결정되어버리는 구조였거든요. 납득할 수 없었어요." 그리고 차별은 내내 이어졌다. "최근에 텔레마케터 채용공고를 낸 어느 생명보험회사에 원서를 냈었죠. 그런데 면접응시 기준이 전문대졸 이상이었어요. 거 참…. 전문대졸이나 고졸이나, 하는 마음에 고졸이라도 잘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면서 기회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못마땅하다는 듯 마지못해 면접을 보러 오라더군요." 하지만 그 회사는 그녀를 불러주지 않았다. 업무능력만 있으면 인정받을 수 있다는 당연한 명제가 현실의 벽 앞에서 얼마나 철저하게 무력한지 깨달을 수 있었다. 기업들은 여전히 대졸과 전문대졸과 고졸을 줄 세우고 있는 것이다. 김씨는 여성 비정규직의 비애도 털어놓았다. 똑같은 일을 하고도 절반에 불과한 임금을 받고, 법에서 보호되는 생리휴가, 출산휴가는 꿈도 못꾸는 게 현실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공장에서는 일손이 없어서 아우성이라는데, 보수언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젊은이들이 배가 불러서""쉽게 돈을 벌고싶어서" 그런 건 아닐까. 김정아 씨의 대답은 이랬다. "되려 제가 묻고 싶습니다. 당신 같으면 그곳에서 일하고 싶겠냐고. 외국처럼 블루컬러도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임금도 충분히 받는다면 왜 일하지 않겠어요? 사람들이 왜 이민을 떠나는지 알아야 합니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구요? 천만에. 한국에는 분명 직업의 귀천이 있어요." 학력별 임금격차 세계최고 위의 사례들은 고졸청년계층이 우리 사회에서 겪어야 하는 고통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그러나 이 '고졸'청년들의 증언 속에는 한국노동시장의 구조적 모순들이 고스란히 숨어있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김유선 소장은 "대졸 청년실업 문제가 대두되고 있지만, 그 못지않게 주목해야할 게 바로 고졸 등 저학력 실업"이라 강조했다. 고졸 이하 청년층의 실업과 취업형태가 한국에서 양질의 일자리가 급속히 줄어들고 있다는 중대한 하나의 '신호(sign)'라는 것이다. 김 소장은 학력별 임금격차가 우려할 만한 수준으로 벌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표, 고졸대비대졸자 급여수준) "임금소득 불평등도가 OECD 국가 중 1위입니다. 악명높은 미국조차 1998년 앞질러 버렸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가장 큰 피해를 받는 집단이 누구겠습니까? 바로 비정규·저학력 노동자들이지요." 실제로 고졸학력자에 대한 고용의 질적 수준도 낮아지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구인구직 전문 사이트인 인크루트가 자사에 이력서를 등록한 구직자를 학력별로 분류해 본 결과에 따르면 고졸자 채용 공고에서 파견직이나 계약직이 크게 늘어난 것이다. 고졸자를 원하는 계약직 채용공고는 2001년 1020건에서 2003년 4073건으로 299.3%나 증가했고, 파견직 채용공고도 2001년 1120건에서 2003년 1만 3580건으로 무려 1112.5%나 증가했다. 2000년부터 2003년까지 고졸자의 구직자 수 증가율은 대졸자 증가율에 비해 훨씬 높은 것으로 집계됐다. 그 기간동안 고졸자 구직자 수는 208.3%나 증가했는데, 같은 기간 4년제 대졸 구직자 증가율은 148.2%에 그쳤고, 전체 구직자 증가율 175.6%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상대적으로 청년세대가 많이 참여하는 '청년집약산업'에 고졸인력이 얼마나 흡수되는지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왜냐하면 유럽 등 선진국에서 1980년대 청년실업이 큰 사회문제가 되었을 때, 이런 청년집약산업에서 먼저 고용이 감소했고 그것이 곧바로 극단적인 청년실업률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 정보통신, 문화, 오락, 교육, 금융 등의 이른바 '신산업' 분야에서 젊은 세대의 취업률이 높은데, 이 부문에서 청년층 고용증가율은 해마다 크게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선진국과 한국의 청년실업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청년집약산업'의 고속성장에도 불구, 고졸 이하의 계층은 소외되고 있다는 점이다. 고졸의 경우 전체 취업자 증가율이 1993년∼2000년 8.1%인데 반해, 청년집약산업에서는 5.6%에 머물고 있다. 반면 전문대졸 이상의 경우, 같은 기간 57%의 취업증가율을 보였다. 무려 10배 이상 차이가 난다. 학력별로 청년층 노동시장 분절이 극대화되고 있음이 증명된 것이다. 지식기반경제니까 어쩔 수 없다? 입시경쟁에서 탈락했다는 이유로, 혹은 집안형편상 학업을 포기한 청년들은 만성적인 실업에 시달리거나 묵묵히 저임금을 감내하며 살아가야 하는 걸까. 너도나도 '지식기반경제'를 외쳐대는 한국에서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로 치부해야 할까. 전문가들은 그러나 이런 주장에 대해 미심쩍은 시선을 보낸다. 우리나라의 직업구조가 이렇게 많은 대졸자들을 포괄할 정도로 첨단산업이 많은지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인 것이다. 이들은 학력인플레와 사회구조적 요인에 의한 하향취업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전북대 사회학과 남춘호 교수는 "과연 지금 대졸자 중 하층을 이루는 계층이 과거 우수한 실업계 고등학교 졸업자들보다 능력이 뛰어난지는 의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1995년까지는 고졸자와 대졸자가 취업시장에서 능력을 경쟁하는 체제가 있었지만, 지금은 경쟁 자체가 안된다"고 말한다. 그는 또 "독일의 경우 68혁명 세대가 사회의 중추를 담당하면서 블루컬러가 자긍심가지고 일할 수 있는 사회구조를 만들어냈다"고 지적했다. 예컨대 현대나 포항제철에서 블루컬러로 10년 일하면 중산층이 누릴 수 있는 것들, 즉 차 한 대와 집 한 채가 마련됐다는 것이다. 그게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직업성취모델이 됐다. 실제로 1995년까지는 지속적으로 학력별 임금격차가 줄어들기도 했다. 남 교수는 "한국 역시 점차 그런 사회로 변화해가는 중이었지만, 신자유주의 개혁으로 이런 경향은 급격히 꺽여버렸다"고 말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주목해야할 점은 한국에서 소위 '구산업'인 제조업의 생산성과 수익성이 매년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유선 소장은 고졸청년실업이 이른바 서비스업을 중심으로 한 지식기반경제로 산업구조가 재편되는데 따른 결과로만 보기엔 무리가 있다고 말한다. "IMF 이후 은행과 공공기업들 구조조정 했지만 그때 잘라낸 인력들을 얼마 후 다시 고용했습니다. 여전히 필요한 인력들이었기 때문이죠. 물론 다시 쓸 때는 비정규직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조업체에서는 대량생산과 단순반복작업들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반면 아웃소싱 붐과 함께 영세하청 제조업체들이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양질의 일자리가 줄어들어 고졸자들이 경쟁에서 밀려난 건 그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학벌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두 괴물 불과 10년 사이, 한국의 노동시장은 고졸청년들에겐 '지옥'으로 변해버렸다. 정규직 비율을 보면 대졸자의 경우는 60.3%, 전문대졸 50.15 고졸 실업계 35.5%, 고졸 일반계 29.2%, 고교중퇴 10.1%로 드러난다.(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2001년) 학력에 따라 철저하게 정규직 비율이 결정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취업경쟁에서 가장 탈락할 확률이 높은 계층은 일반계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계층이었다(전병유·이상일, 「고졸미진학청년층의 고용·실업현황과 정책과제」). 고졸청년들의 고용·실업대책에 정답은 없다. 참고할만한 것은 대부분 앞서 청년실업을 경했던 서구의 정책들이다. 특히 프랑스에서 고졸 이하 청년층만을 대상으로 한 TRACE(Access Route to Employment) 프로그램이나 영국의 뉴딜프로그램(New Deal for Young People) 등은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정부의 청년실업정책을 보면 대부분 전문대졸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거나 고졸자를 대상으로 한 인턴제의 경우에도 홍보가 턱없이 부족하고 실효성에도 의문부호가 찍히고 있다. 더욱 큰 문제는 서구와 한국의 상황이 너무나 다르다는 점이다. 즉, 극단적인 학벌문화가 만연해있고, 가족 외에 누구에게도 기댈 곳 없는 한국의 고졸청년들과 사회안전망이 발달한 서구의 고졸청년들은 선 자리가 다른 것이다. 학벌주의와 신자유주의라는 두 괴물에 짓눌린 우리의 자화상을 이젠 직시할 필요가 있다. 박권일 기자 kipark@digitalm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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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은 곳에서 살군요.

  • 등록일
    2004/12/16 09:07
  • 수정일
    2004/12/16 09:07
* 이 글은 알엠님의 [제가 사는 곳] 에 관련된 글입니다.

참 좋은 곳에서 살군요. 사람들과 나누며 살아가는 나눔의 집이라는 곳에서 말입니다. 참 많은 식구둘과 함께 살아나가니 마음이 흐뭇하고 넉넉함이 절로 나오겠습니다. 봉천동이라 내가 서울에 처음 올라와 살았던 동네이다.


형과 누나가 이 곳에서 가까운 대학에 다녀서 나도 덩달아 이 산고개를 헐떡거리고 올라가는 높다란 마을에 살았다. 달동네(ebs 주중 오후 11시에 하는 대담에서 백기완 선생님이 달동네라는 말 내가 만들어낸 말이야 하며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더라... 그리고는 정보원에서 불려가 달동네가 뭐야 하며 연실 뭇매를 맞았다는 소리를 들었다. 마저 달동네 달과 가까이 맞다아 있는 동네.. 별도 초롱초롱 빛나고 길거리 가로등 빛 검푸른 골목을 감싸는 공간, 눈이라도 내리면 연탄으로 길내던 인심이 뭍어나던 동네.... 참살떡 메밀묵 아저씨의 구수한 목소리에 눈침이 돌던 그 동네.... 골목길이 아기자기하던 그 동네.... 하늘과 맞닿아 있어 높지만 참 정이 넘치는 동네이다.) 늘 정이넘치던 동네였다. 이 동네 주인아주머니 인심또한 넉넉한 분이였다. 집에서 돈이 안올라와 방세를 내지 못하는 달이면 아주머니 월세 달라고 타박하지 않고 우리를 안심시키곤 하였다.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뭐 돈이있냐며...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말씀해주셨다. 누나는 못내 미안해 아주머니에게 연거푸 미안하다는 말을 하였다. 그리고 집에 전화를 걸면 잠시만 기다리려 보라구... 그런 때가 있었구나 봉천동 월세방에서 형, 누나, 나 이렇게 살았던 때.... 참 외로웠지만 재미있었던 시절... 학교를 가는 길은 좋았지만, 오는 길이 힘겨웠던 길... 꼭대기 올라갈려면 어찌나 언덕이 가파른지... 그래도 쉬엄쉬엄 걸어갔다. 형이 군대가기전까지 살았던 공간.... 그리고 미아리 달동네로 이사가기 전까지 살았던 집... 참 정겨운 공간이었다. 여름 장판 깔고 나가서 놀고 동네 어른들이 들려주는 귀신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웠던 그 시절... 아 20년이 훌쩍 지난 시간이구나... 참 정이 넘쳤는데.... 먹을 것 나눠먹고 담도 높다랗지 않았지... 담이라기 보다 벽들이 집들이 따닥따닥 동네 소리가 다 들리던 집.... 개발이라는 미명하게 들어선 아파트 흉물로 인해 그 달동네의 넉넉함도 도시의 포근함도 다 포크레인 삽날에 날라가 버렸다. 돈암동이 그랬구 옥수동과 금호동이 그랬구 미아리가 그랬구 홍제동이 그랬구 서을 달동네란 곳은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하나둘 우리곁을 떠나갔다. 인심 또한 개발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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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가 타고 싶다.

  • 등록일
    2004/12/16 03:12
  • 수정일
    2004/12/16 03:12
자전거를 타고 한강변을 달리고 싶다. 이전 난 자전거를 타고 한강변을 자주 달리곤 하였다. 출근도 자전거로 하구....


그러나 오산에 내려와 자전거를 타고 다니지 못하다보니 오늘따라 이 저녁 자전거를 타고 밤에 홀로 한강변을 달리고 싶은 충동이 든다. 내년엔 꼭 이사 오기전까지 당산역까지 자전거타고 오산에 내려와야 겠다. 겨울철세들이 앙화대교 주변에서 활공을 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참 멋졌는데... 바람이 쌩쌩불때마다 높이 나는 철세들의 활공은 정말 감탄사를 절로 나오게 한다. 그리고 겨울이라 연인들도 별루 없어 참 자전거 타는 재미 녹녹한데... 여름엔 웬 사람들이 이리도 많은지 한강변에... 인라인도 없으니 자전거 최고 스피드로 달리는 그때를 기약하며... 우리집 자전거야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내년도에 꼭 널 찾으러 가마.... 그ㅤㄸㅒㅤ까지 녹슬지 말고 태준씨 집에서 잘 머물고 있어라... 오늘 일나가야 하는데 잠이 안온다. 낮잠을 너무 잤나.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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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적막함을 간만에 느낀다.

  • 등록일
    2004/12/16 03:02
  • 수정일
    2004/12/16 03:02
이전 난 이 시간대에 라디오를 듣거나 음악을 들으며 나만의 시간을 가졌었다. 올해 8월 말까지 나의 삶은 저녁 아니 새벽에 혼자 라디오를 들으며 잡생각을 하며 살아왔다. 그러다 오산에 내려와 내가 접해보지 못했던 삶을 접하고 일을 다니고 있다. 이 일도 이번달이면 끝이 난다. 그리고 내가 담았던 기억들을 정리라는 이름으로 차곡차곡 끄집어 내어 정리하겠지... 그러나 이 정리하는 작업은 잘 하지 못할 것 같다. 왜 난 정확히 말해 그들이 아니기에... 난 그 치열함이나 처절함에 대해 느끼지만 잘 알지 못하기에... 남의 삶을 이해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이해할 수도 없을 뿐더러... 다만 난 그들이 처한 현실에 대해 이야기만 할뿐이다.


그들을 조직해야 한다는 당위는 사라지고 그들로 부터 삶을 하나씩 새롭게 배워야 한다. 내가 그들의 삶에 뛰어들지 않는 이상 난 그들 삶의 표피만을 이해할 뿐이다. 삶으로서 그들이 겪을 고통이나 분노들에 대해서도 정확히 이해할 수 없다. 짧은 시간이 아쉽기만 하다. 오래 하였으면 하는 바램이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앞으로 일 나가는 날도 2주 밖에 남지 않았다. 난 다른 삶을 살ㅤㄱㅖㅆ지... 뭐 운동이라면 운동이고 아니라면 아니겠지... 아쉽다. 처음 용역일을 나갈때의 두려움은 사라졌지만 이 짧은 기간 용역아저씨들과 친해진 상태에서 이별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 참 마음에 걸린다. 떠나보내는 것도 아닌데.... 앞으로 살아가면서 다른 조건에서 만날 수 있을까? 용역 아저씨들이 내가 지금 이렇게 와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어떠한 기분일까? 잠시 아르바이트로 돈 벌러왔다고 생각할까? 아닐 것이다. 서로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으로 대했는데 난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 배신감을 느낄 것이다. 일 팔려 나가기 전 짧은 아침시간에 나에게 해주었던 진심이 가득한 충고... 용역보다 공장에 들어가 안정된 직장을 잡아라... 결혼도 하고 자식을 낳아 열심히 살아라... 일이 없더라도 용기를 내고, 오늘 일이 없으면 내일엔 일거리가 있을 거란 희망을 갖고 살아라 등등 온갖 격려와 충고를 해준 아저씨들은 허망할 뿐이다. 정확히 말해 자신들을 이해하러 왔다는 자체부터 기분이 나쁠 것이다. 아니 거짓말을 하고 일 다닌 것에 대한 분노가 치밀 것이다. 용역은 공장과 조건이 다르다. 공장이야 일하러 왔다하면서 천천히 사람들을 알아가며 하나둘씩 자신은 어떠한 사람인가?를 밝히면 되지만 용역은 그렇지 않다. 스스로 건설일용직노동자가 되어 조직되지 않는 이상 조직하기는 녹녹치 않다. 이유야 뭐 많겠지만 일단 용역 사장이 일거리를 아예 주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정도 일을 잘 하지 않는 이상 건설일용직노동자로 살아가기란 쉽지가 않다. 이에 정리하는 지금 머리가 조금 복잡하다. 정들자 이별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도 그렇고 내가 함께 어울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던 분들과 더이상 같은 공간에서 같이 숨을 쉬고 술나누어 먹고 함께 웃고 욕하는 지껄이들을 못한다고 생각하니 아쉽다. 용역 잠시나가는 동안 참 행복했다. 내가 노동을 하였다는 것... 착취와 억압을 떠나 노동의 의미를 몸으로 배웠다는 자체가 기분좋다. 늘 노동을 해야 한다 이야기 하지만 나부터 입으로만 노동을 하지 않았던가? 그러던 차에 직접 몸을 써가며 일을 해보니 처음 땀이 나고 온 몸이 쑤시고 그랬는데 이제 적응이 되어 어느정도 몸은 괜찮다. 다만 일머리를 몰라 일할때 해맬뿐이다. 열심히 일할려구 노력은 하지만 몸으로 터득되지 않는 일이 어찌 쉽게 다가오겠는가? 어떠한 말을 하고 떠날까? 고민이다. 공장에 취직했다고 해야하나... 아니면 사실데로 이야기해야 하나... 고민이다. 사실데로 말하는 것이 올바르지만 그 분들이 이후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참 나란 인간도 어쩔수 없는 속물이다.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마무리를 잘하고 나눔을 실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만... 내가 나눠줄께 너무 적다. 아니 없다. 받은 것은 너무 많은데.... 마음으로 받은 것만해도 이후 살면서 갚기 어려운 것들인데.... 내가 뭐 나눔을 실천할게 뭐 있겠는가? 함께 어울리는 것 이외엔 없다. 아저씨들 미안해요. 저 아저씨들에게 많은 것 받은 만큼 열심히 살ㅤㄱㅖㅆ습니다. 그리고 제가 제 처지 이야기 못한 것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살면서 하나씩 아저씨들에게 받은 만큼 배풀겠습니다. 물질적 풍요는 주지 못하지만 함께 어려울때 나누는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남은 날 일이 비록 없지만 그래도 아저씨들이 곁에서 여러 조언을 해주어서 저 2달간 참 행복하게 일 다녔습니다. 아저씨들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아저씨들이 말해준 것 처럼 용기 잃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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