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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장 오타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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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장 오타맨...

작업장 풍경

  • 등록일
    2004/10/15 19:56
  • 수정일
    2004/10/15 19:56

공장엔 두가지 音이 있다.

기계소리와 작업종료를 알리는 벨소리이다.

작업종료를 알리는 벨소리가 울리면 현장 사람들은 일제히 어리론가 사라진다.

어김없는 풍경.... 흡연실 또는 자판기가 위치한 공간... 공장에서 쉬는 시간동안 제일많이 분비는 장소이다.

 

100분간의 작업에 10분의 짧은 휴식... 시계를 보면서 작업의 1/4가 흐르고, 2/4가 흐르고, 3/4가 흐르면 어김없이 흡연실과 자판기는 만원을 이루며, 작업시간동안 이야기하지 못한 말들을 서로가 번잡하게 한다. 참 보기 좋은 광경이다.

 

고된 노동시간에 꿀맛같은 짧은 휴식.... 공장 기계와 작업에 지친 육체의 휴식시간... 참 정겹고 기대되는 시간이다.

 

공장을 떠나온지 언 4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작업장 풍경은 그리 변한게 없다.

작업종료 소리도 예전 공장의 소리와 똑같은 소리이다. 참 정겹고 즐거운 소리이다.

 

요즘 용인 남사에 위치한 종이완충제(삼성과 엘지 전자 납품 박스공장) 공장에 용역사무실에서 파견나가 몇일간 일을 하였다.

 

종이포장이 이리도 힘든 일인지 처음알았다.

포장하는 것도 장난 아니지만 숙련공들의 손놀림이 장단 맞추지 못해서 고전하고 있습니다. 박스포장 기계에서 나오는 박스들을 가지런히 쌓아올려야 하는데 숙련공의 손놀림이 얼마나 빠른지... 계속해 쌓여가는 박스를 보면서 푸념만 휴~~~~ 하면서 일을 한답니다.

 

오늘도 그러나 어김없이 시간이 가서... 전 용역회사에서 나온 사람이라 인건비가 비싸 잔업하라는 소리를 안하더군요. 그래서 오늘 일당을 받고 내가 귀거하는 공간으로 왔답니다.

 

이전 공치는 날이 많았는데... 박스공장이 내 삶을 이어주고 있습니다. 하하하~~~ 돈 많이 벌어야 할텐데.... 이번달 대출금이 걱정이다.

 

그래도 죽기야 하곘냐.... 카드 돌려막기 명수의 진면목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씁씁함과 치밀구나...  그래도 좋은 날이 오겠지.....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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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곳을 향하여....

  • 등록일
    2004/10/13 12:59
  • 수정일
    2004/10/13 12:59

이번주 일거리가 없어 용역회사에서 일을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저번주는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나가게 되어 무엇보다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들 겨울나기 위해 사람들이 분주히 용역사무실로 나오지만 바램과는 다르게 일거리가 그리 많지 않군요. 오늘은 2시간 일거리가 있어 2시간 동안 일을 하고 왔습니다. 몇일간의 담배값과 차비를 벌었습니다. 그나마 짧은 시간이라도 일을 나갈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함을 느낍니다.

 

오늘 아침 용역사무실에서 일거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 아저씨가 이런 말을 하군요.

일이 아니되면 안되느데로 기다릴 줄 알아야 하며, 나보다 낮은 사람들을 보면서 살아가라고, 욕심을 버리면 이 생활도 적응이 된다고 한마디를 하더군요. 맞는 말입니다.

 

늘 나보다 높은 곳 더 높은 곳을 바라며 분에 넘치는 욕심과 허영심이 가득한 이 세상에 대해 그분은 고정된 시선으로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 참 보기 좋더군요. 이 생활을 하면서 내가 너무 분에 넘친 생활을 하였음을 하루하루 깨닫고 있습니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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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노동, 소외, 여가

  • 등록일
    2004/10/12 10:06
  • 수정일
    2004/10/12 10:06

인간은 자연적 존재이다. 이것은 인간이 현실적이고 감각적인 대상들을 자신의 본질, 곧 자신의 생활표현의 대상으로 삼거나 인간이 오직 현실적이고 감각적인 대상들에 직면해서만 자신의 생활을 표현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인간은 다른 동식물들과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또한 인간적 자연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적 자연 존재로서의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만 자신이 자연적 존재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이러한 노동은 대상화라는 형태를 취한다. 대상화로서의 노동은  대상으로부터  자연적  형태를  제거하여 그것을 인간적 욕구의 대상으로 만든다. 인간적  형태를  각인받음으로써  대상은 자립적이고 매개되지  않은  것에서  인간세계로의  통합을  통해 산출된 것으로 전화한다.



자연적 대상이 인간적 욕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그것이 인간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생산된 것이 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 대상이 또한 인간의 목표, 상상, 의지를 구현한 것이 된다는 의미도 갖고 있다.


다시 말해 현실적인 대상화는 그에 선행하는 의식상의 관념적 대상화를 전제한다. 이러한 관념적 대상화 속에서 인간은 이미 자연적 대상들을 그것들의 객관적 척도에 대한  지식이라는  형태로  전유하고  있다.  한편  대상화로서의 노동은 동시에 인간적 욕구, 즉  인간화된  자연적  욕구와  고유하게 인간적인 욕구가 산출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식욕이라는 자연적 욕구는 자연 속에 주어져 있는 형태 그대로의 음식이 아닌, 조리된 음식에 대한 식욕이 되며 미적 욕구 등 생활의 직접적인 요구를 넘어서는 수준의 문화적 욕구가 탄생한다.

 

노동은 욕구와 그것을 충족시키는 대상 사이의 거리를 확립함으로써 욕구를 인간화한다. 오로지 자연적 존재이기만 한 동물은 즉각적인 육체적 욕구의 지배하에서만 생산하지만  인간은  노동을  통해  육체적 욕구로부터 자유롤 때만 생산하며 오직 그때만 자유롭게 생산한다. 다시 말해 노동은 그 자체로 이미 순수하게 자연적인 욕구로부터의 해방을 전제하고 있으며 이러한 욕구의 도야는 생산력의 발전으로 표현되는 노동의 발전을 통해 가속화된다. 대상적으로 전개된 인간의 본질의 풍부성을 통해 비로소 풍부한 주관적인 인간적 감성, 음악적인 귀, 형식미를 보는 눈이 생성된다. 왜냐하면 오감뿐만 아니라 이른바 정신적인 감각들, 실천적인 감각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인간적 감각들 곧 감각들의 인간성은 그 대상의 현존재 곧 인간화된 자연을통하여 비로소 생성되기 때문이다.

이른바 세계사 전체는 인간의 노동에 의한 인간의 산출 곧 인간을 위한 자연의 생성에 다름 아니다.

결국 인간은 대상화로서의 노동을 통해 동물과는 구별되는 자신의 고유한 인간성을 확립하고 확증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의 질에 관한 문제는 언제나 궁극적으로 노동의 질의 문제로 귀착된다. 인간이 노동 속에서 자신의 삶을  긍정하지 못할 때 그 삶은 비인간적인 것이 된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노동으로부터 인간적 본질의 대상화라는 형태를 박탈함으로써 임노동자를 자신의 인간적 본질로부터 소외시킨다. 임노동자는 우선 자신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된다.

그의 생산물은 그가 아닌 타인, 즉 자본가의 소유가 되고 그 생산물의 축적은 자본의 축적으로 실현되어 그에게 점점 더 큰 적대적 힘으로 맞서 온다.
생산물로부터의 소외는 필연적으로 노동과정 자체로부터의 소외와 상응한다.
노동과정의 조직과 관련된 일체의 계획과  결정, 즉 관념적 대상화의 계기는 자신이 그 사용권을 구매 한 노동력이 인간의 몸에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자본가의 몫이 된다. 그 결과 임노동자는 기계의 명령에 순응하여 그 전체적 맥락을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적 동작만을 되플이하는 동물적 존재로 전락한다.

 

소외된 노동이 임노동자으로부터만 인간적 본질을 박탈하는 것은 아니다. 소외된 노동을 낳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임노동자와  자본가를  포함한  모든 이들을 사적인 이익과 무의식적인 자연적 필요성에 의해서만 타인에게  의존하는
독립적 인간들로 구성하며 따라서 인간이 인간의 기본목적이 되는 것, 다시 말해 공동체적 향유를 저지한다. 이러한 관계 하에서 각 개인의 활동은 그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의 만족을 추구하기 위해서 다른 이들에게서 새로운 욕구를 창출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게 된다. 주로 상품의 양적 증가로 표현되는 욕구의 이러한 양적 증가는 개개의 인간에게 소원하고 적대적인 힘인 자본주의적 생산의 팽창에 봉사하는 수단인 한 결코 진정한 욕구의 풍부함이라고 할 수 없다.
더구나 그러한  욕구의  풍부함마져도  하나의  전체로서의  자본주의  사회에만 해당될 뿐 각 개인들은 자신의 계급 및 분업상의 지위에 따라 오로지 그 욕구들을 부분적으로만 자기화한다.

 

결국 자본주의 사회는 진정한 자기표현으로서의 노동과 개인들 사이의 진정한 상호인정으로서의 공동체를 부정함으로써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을 불행한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행복한 삶이라 할 만한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삶을 견뎌내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하여 삶의 핵심에서 소외된 그들은 여가라는 그 가장자리에서 행복의 가상을 찾는다.  현대 소비 자본주의는  그  행복의 가상을  제공하는데 적극적이다.  한편으로  그들은 악무한적인 상품 소비와 그에  상응하는  온갖 쾌락에의 탐닉에서  그 행복을 발견한다. 그 숭고한 크기로 완성된 상품의 천국 속에서 넋을 빼앗긴채 잠시도 쉬지 않고 '나는 소비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를  실천한다. 그들의 유일하게 진정한  자기표현은  소비활동이며  그들이  유일하게 그  성원으로  인정받는 공동체는 상품공동체이다. 다른 한편 그들은  삶의  모순으로부터의 도피나 그 모순의 가상적 해결에 탐닉한다. 소비 자 본주의에 들어서 그 수단은 지배적으로 문화상품, 즉 대중문화가 된다. 아주 가끔 이 도피나 가상적 해결은 오히려 바로 그 도피나 가상적 해결을 요구하는 현실적 삶 자체의 모순으로 의식의 초점을 이동시킬 수 있는 계기를 지니고 있지만 지루하고 단조로운 노동에 의해 초래된 활력의 지나친 소모는 좀처럼 그들에게 그 초점을 유지할 만한 집중력을 허락하지 않는다. 여가 시간의 질은 결코 노동 시간의 질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우리 사회의 자본주의는 전지구적 자본주의라는,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출현한, 보다 나은 사회에 대한 우리의 추구에 비우호적인 환경 속으로 능동적으로, 그리고 깊숙히 편입해 들어가고  있으며  그  전진운동은  조직화된 노동의 행보를 훨씬 앞지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머지 않은 장래에 우리 사회의 자본주의가 현실적 삶의 불행을 완전히 봉합한 것으로 보이는 선진국형의 소비 자본주의의 대열에 합류하게 될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한다.  그 소비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우리는 저  대상화로서의  노동과는  완전히  단절된 뿔뿔히 흩어진 상품소비자들이 된 자신들에, 상품이 될 수 있는  무수한  것들의 그 상품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실현해 주는 도구들에 불과한 자신들에 만족하게 될 것이다. 임노동자와 자본가의 차이는 그들이 소비할 수 있는 상품의 질과 양에 있어서의 차이로 환원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더 이상 자본주의의 지양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어떤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시킬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하는 것이어야 할지도 모른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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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벗들과 함께하는 공간

  • 등록일
    2004/10/11 17:02
  • 수정일
    2004/10/11 17:02

* 이 글은 손을 내밀어 우리님의 [술]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이성우위원장님 힘내라는 차원에서 어눌하지만 개인 글을 쓰기위해 트랙백 걸었습니다.

 

저는 술자리를 매우 좋아합니다.

힘들때나 즐거울때나 괴로울때 저는 술자리를 갖습니다.

그 자리에서 저는 속에 있는 내말을 다 찌껄입니다. 그러면 속이 확 후련해지죠.

그리고 고민이 있거나 마음이 아프면 전 벗들을 불러냅니다.

그 자리에서 저는 벗들에게 내 말만 지껄입니다. 그러면 내 가슴속 뭍어둔 아픔은 다는 아니지만 서서히 사라집니다.



나를 믿어주는 벗들과의 자리가 있기에 저는 술을 좋아합니다.

저는 술맛을 모릅니다. 술 먹은 후 쓰린 배나 아픈 머리를 부여잡는 고통을 감내하여야 합니다. 그래도 전 벗들과 함께하는 자리 나를 보여줄 수있는 자리 고민과 아픔을 지껄일 수 있는 자리인 술자리를 갖거나 즐깁니다.

 

나를 보여줄 수 있고 벗을 알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는 모습이 다 똑같은 사람들... 고민꺼리 또한 거의 동일하지는 하지요. 사고나 고민의 자락은 마디마디 맥을 닿고 있습니다.

 

해결점은 제시해주지 않습니다.

저를 지켜보고 같이 마음 아파해줄 친구 그들이 있기에 저는 나만의 허영심인 고민과 사고에 빠질때 저를 추스리곤 합니다. 그 벗들은 나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은 내 아픔을 나눠갖기 못함에 괴로워 합니다. 그리고 저를 지켜보며 한마디 합니다. 그래도 너를 믿는다고....

 

한마디 말이 인생에 큰 희망을 갖게 합니다.

부족하기에 해결점 없이 문제들을 산더미 처럼 차곡차곡 올려 놓는 나에게.... 한마디의 위로는 희망을 줍니다.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갈팡질팡 문제 때문에 사방을 헤매이지만 그때마다 저를 믿고 옆에서 묵묵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낄때 제 자신이 행복함을 느낍니다.

 

숙제 평생 지고 가야할 문제가 아닐까요.

내가 고민하는 문제 그리고 해결하여 할 과제들.... 아마 인생의 긴 여정에서 그 해결책을 제시한다면 큰 성과겠으나 현실은 그렇질 못하다는 것을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다만 감성에 젖거나 타성에 찌들어 자신의 책무를 망각하지 않는다면 말이죠.

저는 긴 인생 여정에서 내가 추구하는 삶을 올곧게 가지는 못하겠지만 그 지향만 분명히 날을 세운다면 참 뜻한 일에 최선을 다했다 생각합니다.

 

문제는 혼자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나눔과 어울림이 낳는 조화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위기니 문제가 있다니 뭐 이렇다니 저렇다니 하는 말에서 자신의 입장과 각을 세우지 못하는 것은 크나큰 문제입니다. 입장과 각을 세우지 못함은 휩쓸린 우려가 크기 때문입니다.

선택을 요구할때나 결정을 할때 많은 고민을 하겠지만 초심을 잃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성과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살아오면서 원칙이니 입장이니 하는 말들을 무수히 입을 통해 저는 지껄였습니다. 그러나 말에 대한 실천을 해왔냐 물어보면 삶에서 그렇지 못해 스스로 부끄러움을 많이 느낍니다. 그렇지만 저는 제가 늘 운동을 입문하였을때 초심을 잃지 않기위해 바둥바둥하면서 지금까지 길을 걸어왔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내가 지금까지 걸어올 수 있었던 것은 주변 벗하는 사람들의 큰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하였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그런 벗들에게 의지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렇지만 단 하나 내 원칙과 입장에 대해서 만큼은 벗하는 이들의 도움없이 스스로 올바르다면 고집이라면 고집 아집이라면 아집을 지켜가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문제 쌓아놓지만 말구 풀어놓으세요. 조금 있으면 연말입니다. 친구들에게 선물로 고민과 근심을 뜸뿍 퍼담아 주세요. 단 벗에게 버려도 좋다는 전제조건에서요.

만약 바겐세일하면 저도 작은 근심상자 하나 사가겠습니다.

 

저는 문제가 안풀리고 마음이 흘들리면 술을 실컷 먹고 펑펑 울어본답니다. 그러면 마음속 쌓싸함이 없어져요.(남자는 태어나서 3번운다고 누가 말하더라구요. 저는 눈물 흘린 감성이 없는 사람이 더 삭막한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이성과 감성을 선택하라면 전 감성쪽을 택할 것입니다. 갈팡질팡 마음이 가는데로 흘러가지만 감성에서 내 나약함 모습을 발견하면서 다는 아니지만 조금씩 조금씩 고쳐나가면 되거든요, 전 불완전한 존재이기때문에....)

 

이성우 위원장님 힘내라는 차원에서 트랙백 하였습니다. 제가 글을 잘 쓰지 못해 도움은 되지 못하나 마음만이라도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꼭 힘내세요, 저도 힘내고 있잖아요.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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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자유로운 노동

  • 등록일
    2004/10/11 11:18
  • 수정일
    2004/10/11 11:18

지난주 금요일 같은 용역회사에 속한 황혼을 넘긴 목수님과 같이 노동일을 하였습니다.

그분은 힘든 막노동 일을 60평생을 해왔지만 일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남다른 분들입니다.

다른 이들은 막노동하는 사람들의 삶을 인생의 믿바닥으로 그리며 인생에서 가장 낮은 사람들이라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러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라 생각하며 정당하게 내 육체로 벌어 자식 둘을 대학까지 마쳤으며, 어엿한 사회인으로 성장시켰노라 저에게 당당히 말합니다. 또 그분은 자신의 일 막노동을 자신의 천직으로 여기면서 불평불만 없이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프로입니다.

 

프로라 하면 전문직과 고속득자를 연상시키지만. 이 막노동 판에도 프로는 존재합니다.

이 프로들은 인생의 경로에서 득도한 분들입니다.



 

노동도 요령이라고 하지요.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몸을 통해 터득한 기술은 기나긴 시간을 수련하지 않고는 결코 획득할 수 없는 그분의 인생이며, 삶이라 생각해 보았습니다. 누구나 어떠한 일이든 최선을 다하겠지만 막노동 판에서 최선을 다한 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특히 용역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하루살이 인생이여서, 하루하루를 자신의 노동을 판매하는 판매자이며, 가장 낮은 임노동에서 육체를 판매하여 얻은 수익으로 하루하루 아니 1년.,... 길면 인생의 여정을 그 길에서 종사합니다.

 

그분들은 요근래 들어 건설일용직노동자라는 이름을 획득하였지만, 조직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말이야 노동자이지 그분들이 용역회사를 통해 삶을 지탱하고 있기에 대기업 건설현장에 직영으로 들어가지 않는 이상 건설일용직노동자라는 이름을 획득하기란 하늘에 별따기입니다. 그래도 그분들은 자신의 노동에 대해 부끄러움 없이 하루를 당당히 살아갑니다.

 

간혹 술에 찌들어 삶의 전반을 알코올에 의지한 이들이 더러있지만 이들은 극히 소수입니다. 저도 간혹 술을 먹지만 막노동 판에서 술은 힘든 육체를 달래주는 한약과도 같습니다. 건설현장에 즐비한 장비와 공구를 익숙히 다루는 이들도 힘에 부쳐 쉬엄쉬엄 일을 해가는 막노동 일 그러나 이 힘든 현장에도 희망은 존재합니다.

 

늙은 목수의 말... 저와 같이 호화 납골묘 공사현장에서 점심시간 산밤을 따면서 하신 명언입니다. 봄에는 산 나물 캐서 먹고, 여름엔 그늘진 곳에서 시원한 수박 먹고, 가을이면 콩이나 밤을 따다 밥해먹거나 구워먹고, 겨울엔 소주에 삼겹살을 구워먹을 수 있는 현장이 막노동이라고 남들은 힘들다 더럽다 하지만 이 더러운 것을 우리가 해주니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 아니냐.... 힘들지만 이 곳은 일상에 꽉 짜여진 틀에 박혀서 사는게 아니라 자신의 기술과 힘이 조화롭게 교차하는 곳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막노동을 하면서도 해맑은 모습을 읽지 않은 그분의 여유로움과 따스함을 느꼈습니다.

 

낮은 곳에서 살지만 높은 곳을 바라보지 않고 낮은 곳에 살지만 같이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의 어려움을 보듬어 주는 이 아름다움이야 말로 막노동하는 이들의 여유와 더불어 삶의 미덕이라 개인적으로 생각해 봅니다.

 

짧은 생을 살아온 저로서는 이분들의 삶의 지혜에 때론 놀라움을 때론 존경심이 듭니다.

막노동 일을 하는 분들 인생의 낙오자 삶의 최저 밑바닥 인생이 아닌 세상을 지탱해 나가는 버팀몫이요. 삶을 이어주는 분들입니다. 이 분들이 하는 일이 없다면 아마도 인간이 누려야할 덕목중 주(宙)가 빠져 삶을 이어나가는게 큰 애로사항이 있을 것입니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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