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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안양권준비모임 강좌 2009

금융에 대한 사회적 통제가 필요

 

11월 25일과 12월 2일 안양권준비모임에서 지역강좌를 열었다. 1강은 ‘2010년 경제정세를 예측해본다. -경제공황 1년 세계(한국)경제는 회복되고 있는가? 추락하고 있는가?’를 주제로 이한진(전국사무금융노동조합 진보금융네트워크 연구실장)동지가, 2강은 ‘민주주의를 혁명하라!-민주주의를 상상하라, 그리고 혁명하라!!’는 주제로 김영수(경상대 정치학 연구교수)동지가 수고해 주셨다.
이번 강좌는 두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경제정세와 민주주의에 대한 토론 자리를 마련하여 2010년 활동방향을 모색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번 강좌를 통하여 안양권준비모임을 지역에 알리는 계기로 삼는 것이다. 그 중 1강의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2008년 10월 미국 발 금융위기를 시작으로 공황이 시작되었고, 세계 경제가 급격히 하락하였다. 그런데, 2009년 6월 접어들면서 경기가 회복되고 있다는 이야기와 수출호조, 경제관련 지표들이 제출되면서, 경기가 회복되는 것인가 의문이 제기되었다.
과연 세계 경제위기가 회복되고 있는가? 아니면, 추락하고 있는가? 회복되고 있다면 어떤 회복인가? 아니면, 이중침체(더블딥)에 빠져들 것인가? 더블딥으로 빠져든다면, 또다시 위기극복이 가능할 것인가? 다시 위기극복이 불가능하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해 이한진 동지는 최근의 경기회복 추세는 팽창적 재정통화 정책-정책금리 0.25%로 사실상 제로금리 유지, 중앙은행의 양적완화정책-에 기반하고 있으며, 광범위하고 다양한 경기부양책과 금융시장안정대책의 병용에 있다고 하였다. 또한 최근 경기침체를 겪는 국가의 수가 IT버블 붕괴기에 비해 훨씬 많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고 했다. 21개 선진국 가운데 2008년 4/4분기 현재 경기침체기에 있는 국가의 비중이 65%로 IT버블 당시(24%)보다 훨씬 높다고 설명했다.
한편, 세계는 지금 더블딥 논쟁 중이며, ‘경기부양책을 계속 유지하면 스태그플레이션, 출구전략에 나서면 스태그디플레이션으로, 즉, 세계경제는 더블딥 위험이 증가하고 있다(루비니) 최근 경기회복은 경기부양책의 효과로 이 효과가 사라지면, 다시 경기가 침체국면으로 전환될 수 있다(아이켄그린). 경기부양책 멈추면 더블딥 온다(채권왕 빌 그로스). 근본적 개혁 없으면, 멀지 않은 장래에 위기 재발 우려(크루그먼), 미국 경제 더블딥 가능성 있다.(대신경제연구소). 더블딥 발생 시 한국 부동산 거품은 붕괴할 것이다(산은경제연구소)’등의 분석들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한국금융시장 및 경제는? 국내 시중은행들의 과도한 신용팽창으로 심각한 위기상황이 더 커지고 있다. 은행대출의 대부분은 부동산 대출이며, 부동산 버블이 심각함을 지적했다. 최근 한 보고서에 따르면 2007년 기준 가계자산(부동산, 금융자산)의 불평등을 나타내는 지니계수가 소득 지니계수의 두 배에 달한다고 하여, 부동산 버블 붕괴 시 이 추세는 더욱 강화될 전망이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이한진 동지는 금융은 사회적 공공재이며 따라서 사회적 통제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임단협 투쟁을 넘어서 사회적 정치적 투쟁에 개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2월 2일에 진행될 2강에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해보는 기대를 해본다.

박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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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또 하나의 먹튀자본 발레오공조

덩치 값도 못하는 거대한 발레오 자본, 양아치만도 못한 밑바닥을 드러냈다!! 
자동차부품 공급 세계 2위, 전 세계 27개 나라에 119개 공장과 6만여 명을 거느린 다국적 자본 발레오! 문화예술과 혁명이 숨쉬는 나라 프랑스의 자본 발레오! 충남 천안의 발레오 공조코리아(구 대한공조) 공장 문을 닫았다. 10월 26일 청산계획 발표, 10월 30일 모든 노동자의 해고통보! 이미 자본은 기 생산된 재고물량을 물류창고에 쌓아 2010년을 준비한 직후 벌어진 일이다.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쫓겨났다.

흔들림없이 맞서 싸우는 노동자!!
대한공조에서 젝셀발레오공조코리아로, 다시 발레오공조코리아로 오는 동안 발레오공조지회의 노동자들은 한 치의 물러섬이 없었다. 조합원들은 늘 하나로 뭉쳤고, 그래서 늘 승리했다. 2008년까지 흑자를 보던 회사가 올 들어 계속적인 엄살을 부리기 시작했다. 인원정리가 불가피하다는 협박을 해대며, 남은 사람들의 임금도 50%이상 삭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록 일부는 희망퇴직을 했지만, 지회 집행부는 조합원을 조직해나갔다. 현재 100여명의 조합원들은 전국을 누비고 해외를 오가며 흔들림 없이 싸우고 있다.

먹고 튀는 자본들의 천국, 대한민국
이택호 지회장은 “발레오 자본이 들어와서 한 거라고는 저 지붕의 패인트 도색과 기계의 색깔을 칠하고, 입간판을 세운 것뿐이다. 아무런 투자도 하지 않았고, 아무런 전망도 찾지 않았다”라고 했다. 위니아만도 CVC자본이 딤채공장을 인수한 이후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돈 빼돌릴 궁리만 한 것과 너무도 닮았다. 97년, 98년 외환위기로 해외자본들이 국내 많은 공장을 집어 삼켰다. 외환위기를 극복하겠다며 외국자본을 무조건적으로 끌어들인 결과가 그들의 천국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외롭지 않게, 그리고 강하게!
발레오공조 노동자들은 내일도 부산에 간다.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모든 투쟁을 하고 있다.  똘똘뭉쳐 있고, 집행부의 의지도 높고, 빛나는 눈빛으로 즐겁게 투쟁하려 애쓰고 있다. 주변에 우리들은 어떻게 다시 위니아만도 정리해고자들, 테센크루프트 동양엘리베이터의 정리해고자들과 발레오공조의 노동자들, 그리고 앞으로 정리해고자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한 데 모여 저항할 수 있는 투쟁을 할까 고민한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77일 옥쇄점거파업투쟁은 정리해고가 우리들 가슴에서 더 이상 분노로 느껴지지 않았던 것을 반성케 했다. 또한 정리해고에 저항하는 투쟁이 자본주의의 모순을 어떻게 철저하게 밝혀내는지도 두 눈으로 확인했다.
쌀 몇 자루, 돈 몇 푼 보태주는 게 해고자들에게 정말 고마운 일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사회주의정당 건설을 하겠다는 우리가 단순한 연대와 결합을 넘어서 ‘자본이 책임지게 하기’ 위한 구체적 내용과 실천계획을 가졌으면 한다. ‘차라리 자본을 망하게 하자’, ‘차라리 공장 문을 닫게 하자’라는 주장이 그냥 홧김에 해보는 말이 아니라 ‘그래도 되는’ 현실을 정말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우리의 걸음이 진정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발레오공조 노동자들의 투쟁이 반드시 승리했으면 좋겠다.
 

장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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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김○○ 성폭력사건 발생 1년




성폭력사건 발생 부터 진상조사특별위 활동까지
2008년 12월 5일 이석행 민주노총 전 위원장이 피해자의 집에서 체포됐고, 바로 다음날인 12월 6일 이석행 전 위원장의 은닉 관련 1차 대책회의에서 피해자에게 허위진술을 강요한 그 날 밤에 민주노총 김○○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다. 1월 6일 민주노총에 고소장이 제출되고 1차 진상조사가 있었다. 그러나 민주노총 진상 조사 결과 공개범위에 대한 협의로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2월 5일 언론에 의해 사건이 알려졌고 그날 오후에 피해자 대리인은 긴급하게 기자회견을 열었다. 2월 9일 민주노총 지도부 총사퇴 및 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됐고, 2월 18일 외부인사가 대거 참여한 진상규명특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3월 13일 진상규명특별위는 기자회견을 통해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1차 진상조사위원회 위원장 경고, 민주노총 2인, 전교조 3인에 대해 징계 권고, 피해자에게 민주노총 및 전교조 공식 사과, 정신적 물질적 피해에 대한 보상 조치, 조직에 대해서는 성평등한 조직문화를 위한 방안 마련 등을 권고했다.

민주노총 내 처리 및 결정
성폭력 사건 가해자였던 김○○은 2월 13일 금속노조에서 제명됐다. 따라서 가해자 김○○에 대한 조치는 법적 처리가 중심이 되어 왔고 얼마전 2심 재판에서 3년 실형 유지라는 판결을 받았다. 진상규명특위는 조직보위론과 조직적 은폐 조장 행위라는 명목으로 민주노총 사무총국 2인, 전교조 3인에 대한 징계를 권고했다. 조직보위론과 조직적 은폐 조장행위로 인한 징계 권고자 5인 가운데 민주노총 사무총국 1인 감봉1개월, 나머지 1인은 아직 징계조차 안됐으며, 전교조 3인은 전교조 1차 징계위에서 제명 결정이 났으나, 피해자의 1심 징계 유지라는 요구가 있었음에도 징계재심위에서 경고처리 됐다. 현재 징계마저 완료되지 않았으며, 피해자에 대한 사과 및 가해자 교육 프로그램 이수 또한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다.

민주노총, 전교조의 공식적 논의 과정 
민주노총 4월 1일 임시대의원대회에서는 진상규명특위보고서의 내용을 승인·채택했고, 특위보고서의 권고사항 이행계획(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그러나 권고사항이 이행되지 못하고 지연되면서 피해자의 요구가 담긴 ‘민주노총 성폭력사건 피해자 지지모임’의 요구안이 민주노총 중집, 중앙위, 대의원대회에 지속적으로 제출되었다. 급기야 9월 11일 대의원대회에는 권고사항 집행에 대한 문서보고 및 이후 계획조차도 제출되지 않아 대의원들의 문제제기가 있었다. 또한 피해자 지지모임 측 대의원들이 조직한 성폭력사건의 올바른 해결을 위한 안건발의는 대의원대회 유예로 인해 9월 28일 대의원대회로 넘어갔으나 또다시 유예되어 토론요구에도 불구하고 논의조차 되지 못했다. 전교조 대의원대회에도 피해자의 요구안이 피해자 지지모임을 통해 안건으로 발의되었으나 엄청난 논란 끝에 대다수 부결됐다. 현재까지 권고사항 이행에 대한 이후 경과 및 계획은 피해자 및 전체 조합원에게 알려진바 없으며, 민주노총 및 전교조 내 처리과정에서 피해자에게 알권리 및 의견을 개진할 권리조차 공식적으로 주어진바 없다.   

몇가지 문제점
 첫째, 피해자중심주의에 입각한 조직적 처리 관점은 규약과 규정상으로만 존재하고, 실질적으로 관철되지 못했으며, 피해자 치유와 운동복귀라는 관점을 갖지 못했다. 해결 과정속에서 ‘조직 내부 상황’, ‘투쟁으로 인한 조직의 어려움’, ‘징계 책임 떠넘기기’, ‘징계감경사유로 조직에 대한 헌신과 공적 참작’ 등 피해자 중심주의를 압도하는 조직논리가 여전히 작동되었다. 또한 피해생존자의 요구안이 피해자 지지모임을 통해 전교조와 민주노총에 여러 경로로 전달되었지만 조직 내에서 토론되지 못했고, 조직 내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리한 요구로 치부되었다. 결국 피해자의 치유와 운동적 복귀를 바란다는 전교조와 민주노총 위원장의 발언은 립서비스가 되었으며, 물질적 보상을 하겠다던 제안 외 피해자에 대한 그 어떤 조치나 권리 조차 존중되지 못했다.
둘째, 피해생존자에 대한 지지·공감보다 여전히 조직 중심, 조직보위 이데올로기가 드러났다. 이는 민주노총의 대의원대회에서는 정권과 자본의 탄압에 맞선 투쟁이나 직선제 등의 안건에 밀려 논의되지 못하는 상황으로 드러났고, 징계 과정에서는 징계 감경 사유로 ‘정권의 총체적 탄압과 관련한 조직의 상황’, ‘조합 활동의 헌신성·공적’ 등을 참작하는 상황으로도 드러났다. 민주노총과 전교조의 이러한 관점은 투쟁사안이 우선되어야 하며, 성폭력 사건이 조직의 상황, 보위에 해를 끼치는 사안이고, 성폭력 사건의 잘못보다 그간의 활동 공적이 더 중요하다는 인식을 단적으로 드러냈다.
셋째, 민주노총 조직 내 공론화를 위한 노력이 부재했다. 성폭력 사건 처리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피해자의 입장을 존중하고, 피해자의 치유 및 지지·공감에 조직적으로 나서는 것이며 이를 위해 조직은 이를 안내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피해자의 지지와 공감을 위한 그 어떤 조치나 계획이 제출된바 없으며, 민주노총 내 논의수준을 반영한 조직 내 공론화와 토론은 실종됐다. 이 과정에서 성폭력사건의 처리와 해결에 있어 조합원들을 대상화 시켰으며, 성폭력사건이라는 엄청난 기회비용을 통한 조합원들의 성폭력 및 성평등에 대한 관심을 조직문화 쇄신을 위한 실천으로 이어갈 수 있는 기회를 놓쳤으며, 일상적인 반성폭력적 실천은 외면하게 만드는 구조를 재생산했다.

마치며
성폭력사건이 조직적으로 처리됐다고 해서 ‘해결’된 것은 아니다. 조직적인 처리는 피해생존자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공동체가 해야 할 최소한의 노력을 의미한다. 따라서 ‘처리’는 형식적 처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적으로 피해생존자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조직은 반성폭력운동 관점에서 사건을 인식하고 자신을 운동의 주체로 세워야 한다. 또한 사건의 올바른 처리는 피해자의 ‘치유’를 위한 출발이다. 따라서 처리과정에서 피해생존자의 ‘치유’의 맥락을 놓치지 않고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 지지모임의 올바른 사건 해결 촉구 및 피해자에 대한 지지·연대 확산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폭력 사건은 잊고 싶거나 잊혀지고 있다. 하지만 잊지 말고 기억하고 지난 1년간의 과정을 되돌아봐야 한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진보진영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사건 발생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진단하고 성평등한 조직문화 건설이 필요하다고 선언한바 있다. 이러한 선언은 민주노총 및 진보진영 전체가 반성폭력 운동의 주체로 서고 나아가 여성억압에 맞선 투쟁의 주체로 서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과연 이번 사건 해결 과정에서 민주노총을 비롯한 진보진영은 초기의 자성만큼 반성폭력운동을 넘어서는 성평등한 조직 혁신으로 나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필요하다. 그리고 반성적 성찰을 통한 실천은 우리 모두의 몫이어야 한다.
 

「민주노총 김○○ 성폭력 사건」 이후 지난 1년 경과

2008년
12. 05    이석행 민주노총 전 위원장 피해자 집에서 체포
12. 06    이석행위원장 은닉 관련 1차 대책회의, 피해자에게 허위 진술 강요
    가해자 김○○에 의한 성폭력 사건 발생
12. 06~12     전교조 손○○, 박○○가 성폭력 사건 인지하였으나 특별한 조치 없었음
12. 23     피해자가 당시 전교조 위원장 정○○ 2차 면담, 성폭력 피해 사실을 알림
12. 26     당시 전교조 위원장 정○○는 민주노총 사무총장에게 성폭력 사건을 전하고
    가해자를 즉각 보직에서 해임할 것과 징계를 요구함

2009년
01. 06     민주노총 임원회의에 성폭력 사건 보고됨
01. 08-15     민주노총 1차 진상조사
01. 30     민주노총 상집에 민주노총 1차 진상조사위 보고서 보고함
02. 05     경향신문, 중앙일보 등의 언론에 사건 보도됨.
            언론보도 이후 피해자와 대리인기자회견
02. 09     민주노총 지도부 총사퇴 및 비상대책위원회 구성 의결.
02. 19     민주노총 김○○ 성폭력 사건 진상규명특별위원회 활동 시작
03. 13     민주노총 김○○ 성폭력 사건 진상규명특별위원회 활동 종료, 기자회견
04. 01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 진상규명특위 활동결과보고 및 권고이행계획안 통과
04. 22     전교조 성폭력징계위원회 전교조 징계권고자 3인 제명 결정
05. 08     정○○ 전 위원장 전교조 조합원 마당에 징계 결정의 부당성 담긴 글 올림
06. 20     정○○ 전 위원장 구명을 위한 서명운동 전개
06. 01~8     징계대상자 3인 재심 청구.
            대리인이 위원장에게 징계 유지 요청하는 피해자의 의견 문자로 전달
06. 30     전교조 성폭력징계재심위 청구자 3명 모두 경고 조치
07. 07     피해자 동지가 전교조 성폭력재심위원회에 제출한 자신의 의견서 전면 공개
07. 22     ‘민주노총 김○○ 성폭력 사건 피해자 지지모임’ 발족 기자회견 및
    이후 활동 전개
08. 27~     민주노총 임원, 중앙위, 중집에 피해자 지지모임 의견서 전달
08. 29     전교조 58차 대대에 피해자 요구안 담긴 의안 발의, 대다수 부결
09. 11     민노총 47차 대대에서 성폭력사건 후속사업 채택 건으로 의안 발의, 휴회됨.
09. 28     민노총 47차 대대(속개) 성폭력사건 관련 의안 발의. 유예됨
11. 13     김○○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 1심의 3년 실형 유지.



2009년 12월 6일, 민주노총 김○○성폭력 사건이 발생한지 1년이다. 1년 전 이 사건은  민주노총 지도부 총사퇴와 비대위 구성, 성폭력사건 진상규명특위를 새로 구성할 만큼 진보진영을 넘어 한국사회에 엄청난 충격과 논란을 가져왔다. 이번 사건은 성폭력사건이 발생되는 사회적 맥락과 함께 운동사회 내 성폭력사건의 대표적인 특징인 조직보위론과 조직적 은폐 조장행위가 발생했다는 점에서 가장 관심이 뜨거웠고 반성과 성찰이 요구되는 대표적 사례였다.

유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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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과의 대화야 훈시야



지난 11월 27일 이명박 대통령은 <국민과의 대화>라는 TV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최근의 세종시 수정안, 4대강 사업, 민생현안 등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다음날 정운찬 총리는 이날 방송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을 치켜세우며 “진솔하고 설득력이 있었다”면서 “자신감이 넘치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씀하셔서 많은 국민이 공감한 것 같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정 총리의 평가와는 달리 이날 이 대통령은 말바꾸기와 일방통행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세종시 원안추진 공약 왜 했나?
세종시 수정논란에 대해 MB는 대통령 당선을 위해 거짓을 얘기했음을 시인했다. “사실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도 표를 얻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 선거일이 점점 가까워지니 말이 바뀌더라구요” “당당하게 제가 말 못한 게 있죠”
이제 와서 고해성사하는 것도 아니고 너무나 구차하다. 수정을 넘어 이젠 행정기관 이전은 아예 백지상태로 되돌릴 태세다. 이게 원래 내 생각인데, 당당하게 말 못해 미안하다는 건가. 허위공약을 유포하고, 국가가 지역주민과 국민을 상대로 자신의 삶의 터전까지 떠나게 만든 사기를 친 셈이 됐는데,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부자감세?
여론조사에서 가장 잘못한 일이 부자감세라는 질문에 MB는 뭔가 오해가 있다는 표정으로 “기업하는 분은 이런 질문 안했을 것이다. 잘 아니까”라고 말문을 열었다. 말은 맞는 말이다. 돈 많고 기업하는 사람이 부자감세에 대해 무슨 질문을 하고, 비판을 하겠는가.
교묘하게 MB는 부자들 세금깎아 준 이야기는 빼놓고, 친서민 흉내내기 미소금융, 보금자리주택, 학자금 상환 변경에 대한 이야기만 늘어놓으며 이해해달라는 이야기만 장황하게 되풀이했다. “아무튼 나는 기업이 잘되게 하는 것”을 이해해달라는 것인가. 이미 우리는 MB의 부자감세, 친기업 정책의 문제점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다.
 
청년실업, 눈높이를 낮춰라?
방청하던 여대생이 청년실업에 대해 눈높이를 낮추라고 하지 말고 근본 해결책이 필요하지 않은가라는 질문을 했다. MB는 이에 “낮추지 말고 맞추라는 것입니다.”라며 “실패를 두려워해 아무것도 안하면 경험을 못쌓습니다”고 훈계를 아끼지 않았다. 청와대에서 연습을 많이 했는지, 말솜씨가 많이 늘었다.
그러나 눈가리고 아웅식의 답변에 불과하다. 스스로 밝혀왔듯이 MB 본인은 안해본 것이 없고, 온갖 범죄를 저지르며 지금의 자리까지 오르는 게 가능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청년실업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낳은 문제다. 눈높이를 낮추던 맞추던 해서 풀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또한 정부가 이윤을 위해 인력구조조정에 앞장서는 마당에, 청년들의 일자리는 더욱 불안정해질 수 밖에 없지 않은가.
 
4대강 살리기?
MB의 거짓말은 4대강 사업에서 정점에 달했다. 방송이후 운하반대 교수모임은 “물을 가둔 시화호도 지금은 수질이 개선됐다”는 발언에 대해 “시화호는 물막이 공사 2년후 물고기 수십만마리가 떼죽음하고 수질이 계속 악화돼 해수유통을 전면적으로 해 수질을 회복했다”며 대표적 예산낭비 사례라고 질책했다. “잠실과 신곡수중보로 가두어진 한강의 수질이 깨끗하다” MB의 주장에 대해서도 수질이 오히려 나빠졌다고 반박했다.
“우리나라의 강 복원 기술(수질개선 기술)은 세계 최고이며 보건설로 수질이 악화되지 않는다”는 발언도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하천수질 개선을 위해 과거에 설치된 댐과 보를 철거하는 중이라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퇴적물로 강바닥이 높아져 해마다 홍수피해로 4~5조원이 들어간다”는 발언도 4대강 본류의 대부분은 지자체의 재정수입사업으로 준설을 한 관계로 오히려 하상이 낮아져 있고, 홍수가 난 곳도 4대강 본류가 아닌 지방중소하천이라는 점에서 거짓말이다.
이번 <국민과의 대화>는 한마디로 국민을 무지몽매한 대상으로 여긴 이명박 대통령의 일방적 훈시였다. 용비어천가도 아니고 그것도 거짓말까지 하면서, 두 시간 씩이나 그것도 생방송으로 지상파 3사를 포함 전국 35개 채널을 통해 전파를 낭비했다. 또 혹시나 하고 그 방송을 지켜본 국민들에게 짜증과 분노를 일으킨 피해는 수치로 측정할 수 없다. 제발 이런 방식으로 소통할 거면 차라리 하지마라.
 

한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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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 행정비효율 설득력 없다

연일 세종시 문제로 정치권과 언론, 지역의 여론이 뜨겁게 달궈지고 있는 가운데 청와대를 중심으로 한 정부는 세종시 원안 반대논리로 행정의 비효율성을 제시하고 있다. 청와대와 입법, 사법부는 서울에 남아 있으면서 행정부 일부부처만 이전하는 것은 시간과 비용 측면에서 비효율이라는 것이 정부의 반대논리다.
현재도 광화문, 과천, 대전 등으로 쪼개져 있는데 세종시까지 생기면 정부기관이 4군데로 분산되어 수시로 열리는 부처 간 회의, 국가비상사태 대응, 장관들의 국무회의 참석, 행정부 공무원들의 잦은 국회 출장 등 업무추진에 비용과 시간이 낭비되어 행정의 효율성이 크게 떨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전에 계획할 때는 그런 우려는 없었는가. 그럼에도 왜 행정중심복합도시‘세종시’건설을 추진했는가. 세종시 건설은 단순히 충청권의 표심을 겨냥한 정치적 쇼가 아니라 많은 문제점을 야기하고 있는 수도권 과밀화를 해소하고 국가균형발전을 목표로 추진되어 왔다는 것이다.

행정의 효율성?
회의나 국회 출석 등 공무원들의 출장을 용이하게 하는 것만이 행정의 효율성을 증대시키는 것은 아니다. 국가행정의 효율성은 단순히 업무의 효율이 아니라 장기적인 국가발전을 전제한 국가운영 시스템 전반에 대한 효율성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부에서 주장하는 행정의 비효율성은 업무의 효율성에만 초점을 맞춘 더 이상 단순할 수 없는 억지에 가까운 논리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그 업무의 효율성조차도 IT강국을 자임하고 있는 정부 당국자의 논리로는 설득력이 없다. 각종회의는 화상회의 시스템을 활용하면 굳이 출장을 가지 않더라도 가능하며 국회출석 등 출장이 불가피한 경우는 이미 설치되어 있는 고속철도 노선을 변경활용하면 오히려 교통난이 극심한 서울시내에서의 이동보다 시간을 절약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업무의 효율성조차도 비용의 측면을 제외하면 설득력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4대강 사업부터 중단해야
비용의 측면조차도 출장비 등 비용의 증가와 수도권의 과밀화를 해소하고 국가균형발전의 토대를 구축함으로써 얻어지는 국가적 이익을 상정해보면 그 기대효과는 크다. 또한 국민들의 동의를 얻어 추진된 장기적인 국가정책이 정치적 논리에 따라 정권이 바뀔 때마다 수정됨으로써 발생하는 국가정책에 대한 국민적 불신과 정책변경에 따른 행정의 낭비를 감안한다면 비효율성은 오히려 세종시 건설계획의 변경에 있다
지금 정부가 해야 할 것은 설득력 없는 행정의 효율성을 내세워 세종시 건설 계획을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 세종시 보다 훨씬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4대강 사업의 무리한 추진을 중단하는 것이다.   
 

임복균 (공무원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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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 지역주의 대안이 아닌 새판을 짜야

 


세종시의 기능을 둘러싼 정치권의 공방이 치열하다. 노무현 정부에서 추진한 세종시 원안은 9부2처2청의 정부부처를 중심으로 한 행정복합도시의 건설이었다. 대선 과정에서 세종시 원안에 찬성했던 건 (충청권 표를 얻기 위한) ‘대국민 사기극’이었음이 드러나면서 이명박은 스스로 치졸한 거짓말쟁이임을 시인했다.

(수도권 보수층 결집을 위한) 이명박 정권의 세종시 수정안에 대해 한나라당 박근혜는 세종시 수정 추진 반대 입장을 재확인했다. 이 과정에서 원칙 없이 말 바꾸는 이명박에 비해 원칙과 약속을 지키는 정치인으로 어처구니없게도 박근혜가 부상하고 있다. 하지만 박근혜의 소신은 노동자 ? 서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충정 표를 중심으로 한 지방보수층을 겨냥한 것이다.
현재 세종시를 둘러싼 정치권의 핵심은 원안이 수정되면서 한정돼 있는 지방 예산을 놓고 지자체끼리 싸우는 형국이다. 세종시의 예산 배분을 두고 정치권의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 지역균형 발전이 필요한 건 모두가 동의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정부부처의 이관으론 한계가 있다. 기업의 이전도 물론 한계가 있다.
그 한계란 첫째로 기업이 스스로 지역으로 옮겨갈 것인가란 문제이다. 노무현 정권 때 기업도시로 선정된 전남 무안과 충북 충주, 강원 원주, 전북 무주, 충남 태안, 전남 영암·해남뿐만 아니라 전북 새만금과 평택 고덕신도시, 천안 아산, 대구·경북 첨단복합단지, 부산·진해 경제자유구역 등 20여 곳이 기업 유치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태다. 둘째로 최근의 산업 동향은 기업의 이전이 지역 내 일자리 확보에 큰 도움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미 이명박 정권은 세종시에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각종 특혜와 혜택을 준비하고 있다. 정운찬 총리는 “기업들이 땅값이 좀 비싸다고 한다”며 기업 유치를 위해 땅값 인하가 필요함을 거듭 강조했다. 조선일보는 “정부가 세종시를 ‘명품 자족도시’로 만들겠다면” “산업용지 공급가격을 3.3㎡당 35만-40만원 수준으로 낮추고, 세종시의 자족 용지 비중을 전체 면적의 20% 이상으로 높이는 방안을 검토”하고 “여기에 더해 취득세와 등록세, 법인세 감면 같은 세제혜택과 함께 토지이용과 관련한 각종 규제도 대폭 완화할 필요”성을 노골적으로 주문했다.
이밖에도 투자유치 방안으로 국가유공자와 장애인 의무 고용 배제와 근로기준법상 주1회의 유급휴가 배제, 외국인학교 및 영리의료법인 설립, 본국과 외환거래(과실송금) 허용 등을 검토 중이다. 이는 강부자 정권의 “친기업 행보”를 노골적으로 세종시에서 적용하려는 것이다. 
기존의 반MB전선이 민주당(과 창조한국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의 연합이였다면 세종시 문제로 자유선진당과 친박연대까지도 합세했다. 이명박 정권의 세종시 수정안에 대해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부르주아적 민주주의자들은 지방 균형발전의 대의명분을 내세우면서 세종시 원안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대해 손호철 교수는 “노무현 정부가 진정으로 지방 균형발전을 추구하고 싶었다면 행정수도를 충청지역이 아니라 강원도(예를 들어 양구)로 옮기겠다고 나섰어야 한다”며 민주당의 세종시 건설을 비판했다. 친박연대와 자유선진당은 내년 지방 선거 등을 겨냥한 지역주의를 기반으로 한 보수층 결집을 위해 세종시 수정안을 반대하고 있다.
진보신당의 노회찬은 “현 상황에서 세종시가 원안대로 추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더욱 중요한 것은 실질적으로 지방분권이 실현되고, 수도권의 자원이 분산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라고 세종시 원안을 기본으로 한 수정안을 제시했다. 충청권을 중심으로 한 진보신당 당원들은 “미래지향적 친환경 복지공동체”라는 새로운 세종시 해법을 제시했다. 이는 ‘사회복지 국가책임제’의 관점에서 세종시를 무상교육-무상의료-안정적 주택 및 주거 제공과 같은 제대로 된 복지가 갖춰진 도시를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진보신당의 주장은 이명박 정권이 추진하고 있는 친기업적 도시의 반대물인 친서민적 도시이다.
민주노동당 역시 세종시 원안에 긍정하는 듯하다. 민주노동당은 “충청주민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국회 통과된 원안을 백지화하는 것은 독재적 행태”라는 점에서 이명박 정권을 비판했다. 양 진보정당들은 세종시 건설이 기정사실화된 것이기 때문에 세종시 건설 그 자체를 반대하지 않는 듯하다.
진보진영은 노무현-이명박 정권이 만들어놓은 지역주의에서 대안론을 제시할 것이 아니라 새 판을 제시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진보신당의 세종시 대안은 기존 정치판의 지역주의론을 수용한 점에서 아쉽다. 이는 세종시 건설을 둘러싼 시궁창 싸움에 진보진영들이 오물을 묻히는 격이다. 또한 이는 오물의 양적 정도와 무관하게 대중들에게 진보정당이나 기존 보수정당들을 똑같이 취급하는 단서를 제공해 줄 것이다.
진보진영은 세종시 문제에서 민주당 및 친박연대, 자유선진당과 선을 그을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해야 된다. 그것은 바로 지방정부의 공적 서비스 기능-교육, 의료, 복지, 환경 등-을 강화해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다.
“질문 자체가 부인됨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는 경우”는 바로 세종시 문제이다. 세종시 플루와 변종 세종시 플루에 현혹되지 말고 이들이 활동할 수 있는 환경 그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한다. 진보진영들은 세종시를 통한 지역 균형발전론이 아니라 친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하고 불평등을 개선할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을 고려한 지역 예산으로 공공서비스의 확대를 기반으로 한 지역균형발전 전략의 진보적 대안을 제시하고 요구해야 한다.
 
김민정 (비정규직 시간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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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연대전략, 노동계급에게 약인가 독인가?

[계급운동과 사회복지투쟁]

 

자본의 신자유주의 전략으로 노동계급은 다층화되는 동시에 양극화되었고,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은 상당히 축소되어 자본의 이해 증진을 위해 국가가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많은 나라들처럼 한국에서도 자본과 노동의 권력균형은 심각하게 불균등해졌다. 즉, 노동 권력의 축소로 국가는 형식적 수준의 민주주의조차 무시할 만큼 부르주아적 성격이 강화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전체 노동자계급을 위축시켰다. 더욱이 빈민, 실업자, 비정규직, 여성 및 이주노동자와 같은 계층들은 사회적 위험에 더 심각하게 노출될 수밖에 없다. 이들에 대한 보호와 연대는 신자유주의에 대항하고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노동자계급운동의 핵심과제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러한 과제가 지극히 계급적인 과제임에도, 비계급적 관점으로 접근할 때 더 현실 가능한 대안인 양 이해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사회정책에 대한 계급적 관점의 결여는 자본이 사회복지를 시행하는 목적으로 귀결될 수 있다. ‘사회연대’가 사회정책의 몰계급적 관점만으로 대변된다면 사회적 위험에 대한 계급 내 부조가 정당화되는 것이고, 또한 노동계급에 의해 자본주의 체제가 더욱 완고하게 지탱시켜주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노동운동의 전략으로 노동자계급 내 부조와 협조가 과연 합의될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 의문이 제기된다. 이 글의 목적은 ‘사회연대전략’의 비계급적 관점이 노동운동에 미칠 위험 요소를 제기하고 사회복지에 대한 계급적 관점의 중요성을 밝히는 데 있다.
 


 


 

사회연대전략의 내용과 비계급성
지난 2006년 말부터 민노당 부설연구소의‘소득-임금 측면에서 노동계급 연대전략 보고서’가 제출되면서 ‘사회연대전략’논쟁이 촉발되었다. 사회연대전략의 주요 지지층으로는 (전)민노당 정책자문위원이었던 오건호(사회공공연구소 연구실장), 금속노조 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인 이상호, 진보신당, 그리고 민주노총이다. 
사회연대전략을 둘러싼 미묘한 입장의 차이가 있지만 공통점은 노동을 통해 확보되는 시장임금(market wage)과 사회복지급여(cash transfer, social benefit)로 확보되는 사회임금(social wage) 중 사회임금을 확대해가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임금이란 국가가 전체국민에게 제공하는 현금급여(연금, 실업급여, 공공부조의 생계급여 등)와 현물복지급여(노인, 아동, 장애인 등에 대한 사회서비스, 의료서비스 등)를 통칭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임금의 재원은 조세, 사회보험료, 기업복지기금 등으로 충당된다. 그러므로 직접세의(소득세, 법인세, 상속세, 증여세) 비중을 높여 누진세율을 적용하고, 사회보험료의 자본 및 국가의 책임부분을 강화할 때, 사회임금을 통한 수직적 재분배 기능을 높일 수 있다. 그러나 사회연대전략에서는 사회안전망의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우선적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의 기여(갹출)를 요구하고 있다.
복지국가 번창시기(2차 대전 이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이전)의 사회임금은 노동자계급이 생산관계에서 가졌던 근본적인 모순이 지속적으로 반영된 것으로 이미 분석됐다. 사회임금이 자본의 이윤으로부터 임금소득으로 재분배이거나 상류 및 중상류계층으로부터 저소득계층에게로의 재분배였다기보다는 임금과 소득을 얻는 광의의 노동계급 내부의 재분배였기 때문이다. 즉 생산관계에서 자본이 전유하고 있는 잉여가치를 사회임금으로 가져올 수 없다면, 사회임금은 노동자계급 내부의 상호부조 수준에 머무르게 된다. 더욱이 자본은 그들의 잉여가치를 축소하여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사회‘임금’이란 용어로 인해 임금이외 추가적으로 노동력에 대한 보상을 제공하는 것처럼 비춰지기까지 한다. 노동력 재생산과 사회 안정화를 위해 자본의 잉여가치총량에 별다른 타격을 주지 않으면서 복지가 유지되었다. 자본은 오히려 이러한 임금외비용 확대를 빌미로 시장임금을 축소시키려는 계급적 이해까지 표출하기도 했다.
신자유주의 체제 구축과 함께 자본은 생산입지 경쟁논리를 내세워 시장임금과 사회임금 모두를 축소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해왔다. 그 결과 사회임금을 형성했던 재원구조에서 각각의 시민과 노동자 개인의 책임은 강화된 반면 국가의 ‘자본유치 경쟁’에 힘입어 자본의 책임은 더욱더 약화되었다. 결국 사회임금의 증가가 피지배계급의 복지 및 소득의 실질적인 향상으로 이해되기는 어렵다. 다만 사회임금의 증가는 사회적 위험에 대해 시장적 메커니즘에서 각각의 개인이 대응하는 대신 계급 내 자원을 통해 위험에 대한 탈상품화 정도를 높일 수 있는 장점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역시도 신자유주의로 전환이후 연금 및 의료부분을 중심으로 민영화가 심화되면서 서서히 약화되었다.
이처럼 서구에서 경험했던 한계가 한국에서 독이 아닌 약이 되기 위해서는 결국 총자본의 잉여가치를 사회임금으로 가져와야 하는 투쟁이 중요하게 요구된다. 그러나 사회연대전략에서 우선적으로 고려했던 것은‘정규직’노동자의 연대에 대한 호소였다. 이러한 연대가 총자본의 잉여가치를 투쟁으로 가져오는 것보다 훨씬 실현가능해 보이는 것처럼 논의되기도 하였다. 임금생활자의 시장임금에서 매달 일정 부분을 사각지대의 사회적 안전망 구축 및 확대를 위한 재원으로 징수하는 것이 연대를 위한 양보로 전제되었다.

사회연대전략은 계급적 접근보다 우수한가?
연대는 피지배계급 간의 공동의 이해를 달성하기 위해 어느 한쪽의 희생을 통해 다른 한쪽의 고통을 축소하여 사회공동체의 가치를 높이는 데에 있다. 그러나 비정규직을 포함한 사각지대의 문제는 노동계급 내부의 양보와 원조로 해결하기 어려운 자본의 노동유연화로 빚어진 하나의 결과다. 이 문제를 연대적 가치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당장의 계급 내부적 원조보다는 근본적인 노동관계에 대한 해법이 우선되어야 한다. 사회적 연대는 계급연대를 기반에 두지 않을 때 그 위력을 발휘하기 힘들다. 노동의 계급적 투쟁이 전제되지 않았을 때 자본과 국가는 그 어떤 것도 쉬 내줄 이유도 필요도 없다. 20세기 사민주의가 자본과 대항하는 투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신자유주의 동조세력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명확히 환기되어져야만 한다.
진보정당들은 정규직 노동자들을 귀족노동자로 적대시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이를 가져다가 서민들에게 나눠주자는 전략을 통해 중산층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다. 일면 진보적이면서 일면 현실정치의 장악력까지 겸비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서민들과 사각지대의 노동자들에게 돌려줘야 하는 것은 애초 그들이 시장임금으로 보존 받지 못한 정당한 그들의 몫의 환수여야 한다. 많은 노동빈곤층과 서민들의 삶이 팍팍해진 원인은 정규직 노동자의 고임금 때문이 아니라, 노동시장유연화를 통해 이윤율 저하를 최소화하려고 했던 자본과 이에 협조한 국가로부터 기인한다.
대중정치 노선은 언젠가부터 신자유주의에 대항하거나 반자본투쟁을 지지하기보다는 신자유주의적 외적강제를 우선 수용하고 그 수준에서 현재 적용 가능한 대안들을 모색하였다. 이에 계급적 관점은 불편한 대상이 되었고 노사정 모두에게 고통분담이라는 규범화를 제시하면서 실제로 노동의 양보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얼핏 보기에 누구나 찬성하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회연대전략이란 의제는 실제로 노동계급으로부터 동의를 끌어내기 힘들다. 왜냐하면 정규직의 경제적 양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양보를 설득하기 힘든 논리구조 때문이다. 또한 정규직 노동자 중에도 시장임금을 통해 보장되는 소득보장의 수준이 낮은 노동자들, 즉 고용형태만 정규직이지 여전히 불안정한 소득의 노동자들이 상당하다. 그런데 자본이 의도적으로 유발시켰던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노노갈등 요소가 연대전략의 중요한 두 축으로 수용되면서 매우 위험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그대로 작동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노동계층이 불안정한 노동계층을 위해 재원을 형성하자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본과 국가의 책임에 대해 근본적인 대립 전선을 세우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오히려 대자본 투쟁에 대한 노동운동 내부의 동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최근 파업 사업장을 중심으로 국가와 자본이 형성하고 있는 ‘정규직 이기주의’이데올로기는 임노동자의 계급투쟁에 대한 입지를 더욱 좁히고 있다. 이러한 국면에서 사회연대전략이 가지는 이데올로기적 한계는 노동자계급 연대가 아니라 자본과 국가의 연대에 더 많은 공헌을 할 공산이 너무나 크다.

제갈현숙(사회공공연구소 연구위원, 한신대 사회복지학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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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연대전략으로써 사회복지

복지에 대한 사회권은 노동자들을 시민으로서 사회에 통합시키고 노동자들이 국가공동체에 소속되어 있음을 상징한다. 복지국가는 이러한 노동자들을 사회적으로 통합하고, 이를 통해 연대감을 증진시켜온 여러 방법 중 하나다. 이러한 연대감은 노동계급운동에는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풀란차스(Poulantzas)의 분석처럼 기본적으로 사회복지는 지배세력의 경제적 양보를 요한다는 점에서 경제에 대한 국가의 자율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지만, 자본의 정치권력에 위협을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복지국가 역시도 장기적으로 자본에 유리하거나 자본의 확대재생산과 양립하는 전략으로 가능성과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노동자들의 투쟁의 성과로 제도화된 복지투쟁의 사회성과 역사성 역시도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독일의 사회학자 하이만(Heimann)은 사회정책에 대해 자본소유와 상품질서에 반하는 원칙으로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사회적 이상의 실재로 설명하였다. 피지배계급의 자본주의 메커니즘에 반대하는 사회적 이상은 사회운동을 통해 현실에서 구체화되고 사회운동의 정도에 따라 사회정책의 성격이 시장질서에 반하는 정도가 결정된다. 사회정책의 이러한 혁명적 성격은 체제를 유지, 통합하려는 자본 및 보수주의자들과 항상 갈등하고 대립하게 된다. 이러한 혁명성과 보수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 사회정책이고 이로 인해 사회정책은 야누스의 얼굴과 같은 양면성을 띤다. 그러므로 사회정책은 매우 유기적이며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의 사회적 이상과 투쟁의 정도에 따라 이 양면성의 색채는 결정된다. 노동운동의 사회복지 투쟁은 반자본주의에 대한 지향성을 가져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사회복지 투쟁이라 할지라도 자본의 심장부를 공격할 수 있어야 한다.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은 시급하다. 이들은 가처분소득인 낮기 때문에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해서도 예비할 수 있는 자원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소득이자 노후소득의 기능을 하는 연금제도에서 배제되고 있다. 사회보험은 사회적 위험이 더 높은 계층에게 더욱더 예방적인 기능을 제공해야 한다. 하지만 오히려 사회적 위험이 더 큰 집단일수록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사각지대 해소를 위해 사회연대전략에서처럼 시장임금 소득이 상대적으로 높은 노동자들로부터 갹출 받은 기금을 바탕으로 시급하게 지원할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계와 같은 공동체간의 상호부조관습 등은 이미 존재해왔다. 또한 실업과 비정규직의 문제에 대해 자본과 국가가 현재처럼 그 어떤 개선의 조짐을 보이지 않는다면, 노동계급의 경제적 양보가 자본의 양보보다 수월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 노동운동의 새로운 출구 전략으로 유용하지 못하다. ‘경제적 양보’로 표현되는 연대는 노동계급 내부의 정치적 동의를 끌어내기 힘들고, 경제적 양보가 가져올 효과가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사회연대를 통해 계급연대가 형성될 것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예상일뿐이다. 사회임금으로 보다 나은 소득보전을 받은 노동자들은 여전히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많은 시간 일을 할 수밖에 없다. 물론 보다 향상된 사회임금으로 그들의 가계소득은 다소 향상될 수 있으나 삶의 질을 변화시킬 수준만큼은 되지 못한다. 이들을 정치적으로 세력화하거나 노동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회임금으로 얻게 되는 결과와는 전혀 다른 메커니즘을 가지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것이 미래소득인 연금제도라면 현재를 변화시킬 정치세력화로 연결되기 힘들다. 또한 사회임금이 향상되었다고 계급 간 연대가 향상되었다는 증거는 서구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것은 사민주의자들의 주장이었지 실제 현실에서 사회임금 확대를 통한 노동계급의 정치가 비례적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노동자의 시장임금 재분배를 통한 사회임금 증액은 결국 총노동비용에 대한 계급 내적 재분배라는 한계와 이렇게 향상된 사회임금이 역으로 시장임금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도 고려되어야 한다.
신자유주의이후 사회복지 개혁은 시민과 노동자의 책임강화로 수렴되어져 왔다. 이에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좌파세력들은 오랫동안 개인의 책임강화로 전환되는 사회정책에 대해 반대해 왔다. 그런데 사회연대전략은 다른 이름의 노동책임 강화론이 될 수 있다.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태생의 비밀이자 계급연대로 가기 힘든 요소가 된다.
노동자들의 투쟁을 통해 자본과 국가에게 임금 및 사회적 비용의 책임을 부과하는 것이 왜 실현하기 어려운 것이라고만 여겨지는 것일까? 예를 들면 현재 노동과 자본이 5:5로 분담하고 있는 사회보험요율을 5:6과 같은 방식으로, 자본의 비율만 총액 대비 10%만 증가시켜 이 재원을 사각지대의 사회보험료로 활용하는 방안은 비현실적인가?
이것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이제까지 노동운동이 이와 같은 혁명적 성격을 담지한 사회정책 투쟁에 적극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좌파진영 역시 이와 같은 투쟁을 중심의 과제로 수용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역으로 노조가 임금투쟁이나 고용안정을 위해 파업하지만 연금보장성 강화를 위해서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비판이 가능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비판 오히려 임금, 고용, 그리고 복지의 문제를 분리시키는데 일조하였고 각각의 투쟁 과제를 선후의 문제나 선택의 문제로 개별화시켰다. 임금 및 고용투쟁의 중요성은 신자유주의 전환이후 더욱 부각되었다. 그러나 임금이나 고용을 위한 투쟁은 매우 이기적인 해당 사업장의 노동자만을 위한 투쟁으로 폄하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노동자 스스로 그리고 노동자들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분리된 임금, 고용, 복지의 연관성을 노동자계급 스스로가 찾아갈 수 있는 전략이 요청된다.
노동현장과 직결되어 있는 노동조건 및 임금의 문제는 명료하게 계급문제로 인식하지만 작업장을 벗어난 문제와 당장의 경제적 이해관계와 벗어나는 문제에 대해서 계급적으로 이해하는 시각이 필요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산별운동이 진행되어 왔으나 아직은 넘어야할 산이 더 많아 보인다. 그 넘어야 할 산마다 계급적 연대를 강화할 수 있는 관점에서 사회정책이 제출되어져야 한다.
사회연대가 정치적 힘을 발휘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계급연대로부터 출발한다. 노동운동이 발전하지 않은 곳에서 사회권은 발전되기 어렵거나 매우 형식적인 수준에서 머문다. 노동이 자본과 국가에 대항하지 않고 먼저 타협한 사회복지제도로는 보편적인 인민의 삶의 질 향상은 기대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노동자의 사회복지투쟁은 계급연대를 도모하는 동시에 자본주의 메커니즘을 반대하는 전략이 되어야 한다.
 

제갈현숙(사회공공연구소 연구위원, 한신대 사회복지학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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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문화를 프로파일링해봐?

조직 문화의 스트레스
크리미널 마이드란 미국 드라마는 연쇄살인사건을 해결하는 FBI 행동분석팀의 이야기다. 5시즌이 방영 중이니까 상당히 인기 있는 드라마다. 행동분석팀은 연쇄살인사건에서 남겨진 모든 흔적을 통해 범인의 심리와 행동을 분석하고 범인 행동의 패턴과 소재를 예측해 다음 사건을 예방하고 범인을 잡는다. 이 과정을 한마디로 프로파일링이라 한다. 첨단 전산망과 조직력이 이들의 주요 무기지만, 기본적으로는 범인과의 심리 게임이 주된 내용이다.
도식적으로 표현하면, 대부분의 싸이코패스들은 성장과정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욕망이 억압되었다. 성장 후에 억압된 욕망을 푸는 과정에서 부자연스러운 방법 때문에 스트레스를 경험한다. 그 스트레스 요인은 폭력적 해결방법을 택하게 만들고, 그것이 첫 살인으로 연결된다. 첫 살인의 과정에서 스트레스 요인을 피하고 욕망을 해결하는 일종의 해방감을 느꼈다면, 더 큰 해방감을 위한 계획 살인으로 진화하고, 자신만의 표식을 남긴다. 싸이코패스들의 일반적인 패턴이다.
행동분석팀은 싸이코패스 뿐만 아니라 피해자들의 유형도 분석한다. 드라마가 회를 더해 가며 몇몇 특출한 싸이코패스들은 행동분석팀에게 직접 공격을 감행하는데, 그래서 팀 동료를 프로파일링할 필요가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동료에 대한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동료들 간의 프로파일링은 금지되어 사건 해결을 어렵게 만든다. 이 대목에서 어떤 시청자는 문제 해결이 막혀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다. 이런 걸 계산한 드라마는 동료들 간의 존중을 바탕으로 암묵적 프로파일링 허용을 통해 다시 스트레스를 해소시켜 준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이 드라마를 프로파일링 하는 시청자들은 이 드라마의 패턴을 알고 있기 때문에 돋은 닭살을 비벼 피부의 안정을 취한다.
서설이 길었는데, 키워드는 패턴과 존중이다. 조직 문화의 스트레스를 이야기하기 위해 너무 끔찍한 이야기로 예를 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조직과 조직의 관계, 사람과 사람의 관계, 조직과 사람의 관계들 속에서 나타나는 복잡하고 다양한 충돌들과 그 해결의 노력들에서 섬세한 프로파일링은 기본이 된다. 패턴을 찾는 것은 프로파일링의 기술이고, 존중은 프로파일링에서 상대적인 의미의 정서 같은 것이다.

패턴들
예를 들어, 쌍용차 파업에 여러 단체들이 공동투쟁을 진행하던 상황을 회상해 보자. 자신이 관련 없었다면 상상만 해도 좋다. 단체마다 사람마다 국유화를 두고 조금씩 다른 견해가 있었다. 옥쇄파업 전술을 두고도 다른 견해가 있었다. 어떤 견해가 올바른가 이전에 각 단체마다 사람마다 고유의 경험과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확히는 몰라도 ‘저쪽은 이럴 것이다’는 예상치가 있다. 먼저 주장을 펼친 쪽에게 ‘그럴 줄 알았다, 저 조직이 그렇지’라고 생각했다면, 이미 상대를 분석하고 예측했다는 말이다.
한 조직 안에서도 사람마다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고, 조직의 입장과 개인의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다. ‘조직의 입장이 이러니 조직원은 따라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이 모여 조직을 이루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입장의 차이가 적을 수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직 안에서도 ‘그럴 줄 알았다’는 말이 흔히 나온다.
특별한 상황이 아닌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관계 속에서 예측되는 ‘그럴 줄 알았다’는 패턴의 근거들은 나이, 성별, 계급, 직위, 직업, 경제력, 학력, 지혜, 성격, 외모, 취향, 기호, 출신지 등이다.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위계적인 관계, 억압적 관계, 친한 관계, 불편한 관계, 부적절한 관계 등의 패턴들이 만들어진다. 평등한 관계라는 패턴은 존재할까?

존중
평등은 사회주의의 매우 중요한 가치다. 사회주의 실현을 꿈꾸는 조직은 평등하지 않은 사회 장치들과 싸우기 위해 사회주의 실현 전까지 전술적으로 부분적인 평등을 포기해야 할까?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내 경험으로 볼 때, 사노준 안에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대단히 평등하다.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그러나 하루에도 수십 번씩 미묘한 위계와 억압의 패턴들을 발견한다. 나와 다른 사람의 관계에서 느끼고,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목격하고, 조직과 사람 사이에서 목격하고 있다. 특히 지난 총회 자리에서는 사람들의 표정과 말에서 복잡한 문양과 수학식이 매우 위험한 곡예 쇼를 펼쳤다.
동지애라는 말이 공식발언으로 몇 번 나오기도 했는데, 그것을 크리미널 마인드에 대입하면, 동료들 사이의 프로파일링 금지에 해당한다. 프로파일링 금지가 공식적 방침이지만 암묵적 프로파일링은 누구나 하듯이, 동지애가 강조되었다는 것은 동지애가 없었거나 발언자의 기대에 못 미쳤다는 뜻이다. 뒤에 동지애가 무시되었던 상황에 대한 사과가 따랐고, 동지애에 입각한 화해도 따랐다. 약간 닭살이 돋긴 했다. 이런 과정도 하나의 패턴이다. 패턴은 복잡한 과정의 한 단면으로 보이지만 그 과정이 경과하는 시간의 흐름이기도 하다.
사노준이 상대적으로 평등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패턴이 흘러가는 방향이 평등을 향하기 때문이다.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이 특별한 상황에서 어떤 발언을 할지 예측할 수 있지만, 그 예측은 언젠가 빗나가고 만다. 그의 패턴이 진화하거나 내 프로파일링 방식이 진화하는 것이다. 그 진화가 좋은 방향, 곧 평등의 방향으로 진행하게 만드는 동력이 존중이라 생각한다. 동지애라 표현해도 무방하지만, 조직에 너무 국한된 느낌이라 존중이란 표현이 더 좋다.


조심해야 할 것들
크리미널 마인드에서 일선 수사관들에게 행동분석팀이 범인의 프로파일을 공개할 때 몇 가지 주의 사항을 밝힌다. 발표하는 프로파일은 부족한 증거를 통해 얻은 결과라는 점과, 범인이 이 프로파일을 미리 프로파일링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점이다. 그 말은 곧 자신을 프로파일링할 줄 아는 범인이라면, 행동분석팀의 프로파일을 조작할 수 있다는 의미다. 정말 특출한 싸이코패스는 프로파일링할 단서를 하나도 안 남겨 자신의 존재를 철저히 숨기고 있을 수 있다. 수십 명을 살해한 싸이코패스 중에 경찰을 수십 년간 농락하다가 끝내 숨어버린 자들이 극소수 실존했다. 가까이서 찾으면 화성 연쇄살인사건 같은.
자신과 주위의 관계 속의 다양한 패턴을 객관화 시켜보는 시도는 평등한 문화를 향한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누구나 그런 노력을 하겠지만, 스스로를 객관화 시키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한편 자신만 잘 객관화 시키는 사람을 사회에서는 바보라 부른다. 바보가 되지 않으면서 훌륭한 프로파일을 만들더라도 상대와 세계에 대한 존중이 없으면 악마적 관계가 만들어질 것이다. 정치조직 안에서 치열한 사상투쟁은 조직이 건강하다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자칫 치열함에 압도되는 어리석음을 경계해야 한다. 상대를 동지라 호칭하면서도 존중 없이 사상투쟁을 일삼는다면, 히틀러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정치조직이 악마가 되면, 싸이코패스의 위험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재앙을 낳을 수 있다. 인류는 이미 그것을 수차례 경험했다.
몇 가지 피해야 할 길은 알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멀고 험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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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글쓰기, 그리고 말하기

성폭력사건이 발생하면 우리는 성폭력사건을 가해자개인이 저지른 파렴치한 일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많이 변했습니다) 성적권력에 의한 구조적 폭력이 성폭력이고, 그것은 개인의 문제를 떠나 성별위계적인 사회구조적 문제, 가부장제적인 조직문화에 따른 일이라 규정합니다. 그런데 가부장적이고 성별위계적인 조직문화를 어떻게 쇄신하고 혁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논의하지 않습니다. 성평등한 조직문화를 만드는 일이 단순히 반성폭력교육 또는 성평등 교육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매년 교육프로그램을 하는데 머무르구요. 그래서 조직 뒤에 숨은 ‘비주체적 개인’이 조직을 이루는 ‘주체적 개인’으로 조직문화를 혁신하기 위한 실천으로 ‘여성주의적 말하기와 글쓰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주의 글쓰기와 말하기
“여성주의 글쓰기? 그럼 남성주의 글쓰기도 있나?”라는 소리를 하시는 분이 있겠지요. 통속적인 예입니다만, 제주도에서 봤을 때 우리가 소위 말하는 남해(南海)바다는 어디일까요? 제 3세계는 어디죠? 유색인종은 누구인가요? 우리가 아는 언어는 누구의 언어이고, 지금까지 객관이라고 불리던 것은 누구의 시각일까요? 여성주의 글쓰기와 말하기는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기존의 언어와 해석틀이 (남성)지배권력의 경험을 보편화한 것과 다르지 않음을 지적하는 일입니다. 동시에 배제되어왔던 타자의 시선에서 새로운 시각과 언어, 해석틀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남성)지배권력 중심의 기존인식, 언어, 법, 제도, 규범 등의 사회적 구조를 여성중심으로 ‘대체’하자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남성)지배권력중심의 구조가 형성되어 왔는지를 끊임없이 질문하고, 배제되어왔던 타자들의 눈과 목소리로 세계를 인식하자는 것입니다.
그럼 또 다시 질문이 생깁니다. “여성주의 글쓰기와 말하기는 알겠는데, 그게 조직문화랑 뭔 상관?”

여성주의 글쓰기와 말하기를 통한 조직문화 혁신
여성주의 글쓰기와 말하기는 단지 개별 단어들의 표현뿐만이 아니라 문장구조, 사유방식의 변화까지 요구합니다. 노동형제를 쓰지 말자는 주장이 단순히 형제가 남자가족만을 부르는 단어라서가 아니라, 형제로 표현되는 운동사회내의 가부장제적인 문화를 지적하는 일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동안 알았던 하나의 목소리(남성중심)말고도 또 다른 목소리가 있음을 인정하고, 하나의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답과 모색을 가능하게 하자는 겁니다. 권위주의와 성별위계적인 조직문화에서 만들어진 논리적이고 인과관계를 따지는 말하기 방식(report-talk)에서 벗어나 타인에 대해 배려하고 관용하며 공감하는 말하기방식(rapport-talk)가 필요하다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주의 글쓰기와 말하기는 남성위계질서로 굳혀져있는 운동사회 조직문화 전반의 변화와 구조적 혁신을 요구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여성주의 글쓰기와 말하기와 조직문화 혁신은 아주, 매우 상관있는 일이구요.
마지막으로 여성주의 글쓰기와 말하기가 왜 우리가 깊이 고민해야하는 일인지 뤼스 이리가레이의 「나, 너, 우리」의 한 구절로 대신하려 합니다.

“사회 정의, 특히 성과 관련된 정의는 언어의 법칙과 사회질서를 구성하는 진실과 가치의 개념을 바꾸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문화적 수단의 변경은 엄밀한 의미에서 물질적 재산의 분배만큼이나 장기적 차원에서 중요하다. 다른 하나가 없이는 나머지도 얻을 수 없다.”    - 뤼스 이리가레이, 「나, 너, 우리」
 

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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