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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4/26
    내가 느낀 운동(2)
    간장 오타맨...
  2. 2005/04/25
    한겨레신문을 구독하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간장 오타맨...
  3. 2005/04/25
    현대차 비정규직노조 '일백일간의 기록'
    간장 오타맨...
  4. 2005/04/25
    우리를 '불법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들
    간장 오타맨...
  5. 2005/04/25
    빈곤화의 이주여성을 읽고...(4)
    간장 오타맨...

내가 느낀 운동

  • 등록일
    2005/04/26 01:53
  • 수정일
    2005/04/26 01:53
내가 속한 공간에 들어가 철학의 유의미성에 대한 이야기를 화두로 던진 글을 읽었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 의미에 있어서 나를 되돌아 보건만 그 의미들은 똑같은 맥락이라 보여진다. 학습을 하자 투쟁을 조직하자 그리고 올바른 판단을 위한 내공을 쌓자 정도의 맥락으로 밖에 비쳐지지 않는다.(사회구성체 논쟁에 대한 재조직들의 논의의 장의 해체는 운동에 있어서 다양성을 봉쇄하고 양에서 질로 전화하는 운동의 발전을 저해하게 하였다. 이 복원이야 말로 맑스-레닌철학의 복원보다 중요한 지점이라 생각을 가져본다. 그렇고 지금 무덤속에 뭍혀진 혁명철학이 무덤에서 나오기엔 우리 현실에 대한 진단 또한 필요한 것 같다. 맑스인가 맑스-레닌인가에 대한 지난한 논쟁 또한 필요하다. 난 후자이지만...) 언제부터이가 나에게 있어 이론은 이론이라는 범위를 넘어 차별 그리고 선을 긋기 위한 수단으로 밖에 작용하지 않음을 발견하였다. 내 깐에는 활동이라 말했지만 경험이라는 피상 그리고 많은 선배들이 이야기한 무용담에 지나지 않는 낮은 인식수준을 갖고 살아가는 이로서 부끄러움이라 할 수 있지만 이론이라는 잣대 그리고 멀게만 느껴지고 일목요연하게 쓰여진 문구를 정형이라 제시하는 사람들..... 그러나 난 그들이 갖고 있는 것에 대한 탐독과 욕망이라 느껴진다. 현상을 찾기위한 방법으로서의 읽기... 실천적 투쟁을 조직하기 위한 쓰기라는 것에 대한 난 조금 다른 느낌을 갖고 있다. 아니 부정아닌 부정을 갖고 있다. 토론이 사라진 지금 읽기와 쓰기의 형태는 어떠해야 하는가? 다름이 아니라 방향을 설정하기 위한 지난한 사투임에도 불구하고, 냉철한 철학적 이해를 요구한다. 그런데 철학이라는 범위가 무엇인가? 종교라는 틀에서 있어서 시작한 루터의 사회개악론이라는 중세서양철학의 재구성으로서 출발점 그리고 확장된 데카르트의 범위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존재론 출발 그리고 칼빈을 비롯한 무수한 종교철학자들에 의해 쓰여진 종교철학론 등 이 철학의 태생을 떠나 사회적 함의라는 부분에 대한 많은 것들에 대한 관찰과 시선의 합일점에 대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철학이라는 범위는 시대를 관철하는 냉철한 이성이라는 잣대로 규정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철학은 종교철학의 바탕을 둔 철학을 외피한 자본의 이데올로기임을 잘 알것이다. 실천철학을 넘어 혁명철학을 탐독하는 이에게 있어서는 이 이해도는 다른 범주로 넘어가겠지만... 막연한 철학적 탐독을 강요하기 보단 한국사회는 사회학적 맥락에 더 큰 착목지점을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전과 다르게 한국사회에 대한 규정성을 두지 못하는 현실... 규정성이라 함은 자본에 대한 단계적 상황에 대한 일차적 정치경제학적 접근을 통한 변증법적 해석의 시도인데... 이 해석보다는 현 상황에 대한 대립점이 주요한 착목지점으로 설정되고 논의되는 것이 못내 안타깝게 느껴진다. 글을 쓴다는 것은 제갈량이 유비에게 출사표에서 던진 실천의 의지에 대한 반영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수식어를 비롯한 이해를 위한 객관이라는 명제가 필요하다. 간결 명료하지도 않다. 나에게 있어서 만큼은 원효가 중국 유학을 떠났을때 공동묘지에서 맛나게 먹었던 해골에 고인 물의 맛을 탐독하여 느낀 나무아비타불이라는 해탈의 절대경지의 필요성을 느낀다. 민중에서 부타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였던 한 종교철학자 원효의 모습... 그 당시 선종이 지배하던 시기 원효는 아마 유학파도 아니었지만 배타적 종교체제에서 그나마 민중사관 속에 실천종교학을 갈구하였다 판단된다. 우리가 왜 변증법을 중요시 하는가? 알튀세르의 경우 변증법의 종말을 마르크스를 위하여를 통하여 선언했지만... 물질의 상호작용을 그렇게 쉽게 제단하기엔... 철학이라는 범위의 그릇은 적다고 본다. 변증법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법칙의 개요는 열열학으로 필역하자면 다름이 아닌 엔탈피... 열손실을 얼마나 줄이고 열효율성 극대화를 위한 방법론의 제시... 열손실을 없애기 위한 다양한 접근적 방법으로서의 엔트로피라 하겠다. 변증법의 정반합... 물질의 상호작용에 의한 양질의 전화법칙 등 다양한 논재... 물질에 대한 객관적 실제에 대한 규명들.... 늘 끊임없는 상호작용에 대한 연속성들을 이야기 하지만 그 난해한 기호학이라는 개념은 쉽고도 어려운 변증법을 노동자 철학에서 멀리 떨어지게 하는 무수한 기호의 수학으로서 대치하게 된다. 단순명료하다 말하기는 어렵지만 학자 풍에 의한 학문으로서의 변증법은 출발하지 않았다 본다. 맑스가 최소한 청년헤겔 주의자에서 벗어난 동기는 인간해방이라는 실천태의 발견이며, 그 발견에 있어서는 산업자본주의라는 영국의 시대상의 반영이라 하겠다. 초기 산업자본주의에 대한 모순점에 대한 발견 그리고 이를 극복하고자 하였던 맑스의 노력이었다. 누구를 지칭하면서 시작하는 시대적 배경... 이 시대적 배경에 등장하는 프루동, 블랑키, 프랑크푸르트학파, 포에르바하, 리카아도 등 다양한 사람들이 내재한다. 그러나 책들은 일목요연하게 그들에 대한 찬송 또는 반정립으로부터 시작하거나 맑스의 개념적 유츌에 대한 자해석으로 이루어진다. 80년대 학습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그 학습에 있어 객관화를 위해 우리는 한국사회를 보기 위한 사회구성체에 대한 지난한 논쟁을 출발시키면 양에서의 질로의 전환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성숙의 단계에 접어들기 전 우리는 어려움이라는 한계에 봉착하고 만다. 우리가 풀어내야 할 고리에 대한 이론의 위기의 등재가 아닌가 생각이 된다. 지금도 무수한 이야기들이 오고간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한 것은 철학의 폐기를 바탕에 둔 이론의 위기를 접하였다. 무엇보다 노동계급에 대한 주체성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의심을 품고 있는 시기를 지금 맞이하고 있음이 그 반증이 아니겠는가? 이런 시기... 토론과 사상에 대하여 풍요로울 현장은 얼마나 있는가? 사상이 유희로 흐르고 토론이 다름으로 이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우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글 잘쓰고 못쓰는 것이 활동의 잣대로 이어지는 현실에서 출본한 자료량이 많은 것이 활동으로 등치되는 시기에서 무엇을 우리는 갈구할 것인가? 이러한 현실이 고착되기 전 우리는 새로움이라는 비장함 보다는 이전 운동에 대한 승계 그리고 발전을 위한 투쟁의 단계를 이제 새롭게 구성하여야 한다. 무용담으로서의 남총련의 투쟁에 대한 회상보다 시청진격투쟁이라는 벅참보다... 이제 본질을 꾀뚤어봐야 한다. 본질은 철학의 힘이요 철학의 생명의 원천이다. 그러나 이러한 원천의 힘이 투쟁의 대오속에서 상쇄되고 있다 개인적 판단을 가져본다. 책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말할 수 있는 광장을 우리는 이제 열어주어야 한다. 광장이라는 정치가 현장으로 깊이 각인될 공간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노동의 소외, 자본의 단계, 실처활동이라는 점이 흐릇한 지금... 투쟁을 전개한다는 것 자체가 모험이지 않고서는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내가 느낀 과거... 과거를 향유하는 문제는 있지만 최소한 선명하였다라 판단된다.(그 판단을 모든 계급에게 환원시킬 것인가? 그 몫이 실천활동가라는 이론가의 몫은 아닌지...)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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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을 구독하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 등록일
    2005/04/25 15:58
  • 수정일
    2005/04/25 15:58
한겨레신문을 구독하지 않는 나로서는 오늘 기사를 보고 그래 구독하지 않기를 잘했어... 한겨레 또한 386과 함께 그 진보성도 함께 사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가슴한켠 한겨레의 기사를 보면서 아쉬움도 있지만 자본주의 속성상 언론 또한 자본의 수단일 수 밖에 없지 않는가? 경쟁이라는 미명하에.... 진보담론을 지속적으로 갖기를 부여하는 자체가 어찌보면 욕심이 아니던가? 90년대 초반 한겨레의 진보성은 그 실험은 이제 중단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아직도 구독하고 읽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난 한겨레보다 다양한 인터넷 언론을 통해 내 소통을 위한 내용만을 갈무리하여 본다. 일인 미디어 시대가 아닌가? 소통을 위한 다양한 공간이 그나마 존재한다는 것 자체에서 가능한 일이지만... 이주노동자라 왜 불리우게 되었는지 그 인터뷰를 하고 알 수 있을 터인데... 외국인이라는 차별적 구호로 기사를 카피한 것을 보고서 참 한숨이 슈~~~ 나왔다. 언론이라는 것이 기자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일정정도 운동사회내 사회성을 담아왔던 한겨레 기사... 그리고 그 카피란에 이주노동자라는 것을 보고 궂이 왜 카피를 외국인 노동자 노조로 쓴 것인지 의심스러울 따름이다. 외국인 노동자가 아니라 서울경기인천이주노동자노동조합이 출범하였다하면 어떨까? 그리고 규약을 보면 약칭으로 이주노동자노조라고 써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던가? 뭐 내 생각이지만... 한겨레 신문을 보는 것보다 먼미래 어찌될지 모르지만 사회성을 담아가며 연대를 호소하는 운동체요, 언론인 참세상에 1만원 회비를 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해본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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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 비정규직노조 '일백일간의 기록'

  • 등록일
    2005/04/25 15:48
  • 수정일
    2005/04/25 15:48
현대차 비정규직노조 '일백일간의 기록' 89명 해고, 116명 고소, 멈추지 않는 백화점식 노동탄압 최백순 기자 redsqure@dreamwiz.com (양준석 울산노동자신문 대표) 전 세계의 내로라하는 기업들을 제치고 세계 6위 자동차 생산업체로 발돋움한 현대자동차. 머나먼 꿈처럼 여겨지던 GT-5(Global Top 5) 달성이 어느덧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현대자동차 안엔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요구하며 절규하는 노동자들이 있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불법파견 판정에 따른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지금 투쟁중이다. 거대한 공장의 규모에 비해, 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의 수는 아직 많지 않다. 그러나 이들의 투쟁은 마치 군사정권의 온갖 탄압을 견뎌 내면서 마침내 87년 대투쟁의 물길을 터냈던 1970~80년대의 선도적인 노동자 투쟁들을 연상시키고 있다. 불법파견 판정받은 현대자동차의 비정규직 노동자들 지난해 말 노동부는 울산·아산·전주 등 현대자동차의 국내 생산공장 세 곳에 있는 127개 사내하청 업체에 대해 ‘도급을 위장한 불법파견’으로 판정했다. 제조업 직접생산 공정엔 파견 노동자를 사용할 수 없도록 되어 있음에도, 현대자동차가 이들 사내하청 업체들을 통해 대규모의 불법파견을 저질러 왔다는 것이다. 해당 업체에 소속된 노동자 수는 무려 1만 여명이었다. 사실상 원청업체인 현대차로부터 업무지시를 받으며, 정규직과 섞여 일하는 불법파견 노동자들. 이들은 마땅히 정규직으로 고용되었어야 하지만 현대자동차의 불법적 인력운영으로 인해 비정규직이 된 사람들이다. 현재까지 불법파견 판정을 받은 비정규직은 직접생산 공정에서 일하는 전체 비정규직의 80% 정도에 해당한다. 사내하청 가운데 이른바 1차 하청이 전원 불법파견 판정을 받은 상태고, 사외 협력업체의 하도급이라는 계약형식을 가진 이른바 2·3차 하청 노동자 2천여 명도 불법파견 추가 진정을 추진하고 있다. 그럼 현대자동차의 비정규직 비율과 규모는 얼마나 될까? 현대자동차의 정규직 종업원 5만여 명 가운데 직접생산 공정에서 일하는 ‘생산직’은 2만 4천~5천명 수준이다. 결국 현대자동차를 직접 생산하는 노동자 가운데 대략 30% 정도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인 셈이다. 직접생산 공정 외 식당·경비 등 간접지원 업무에 종사하는 인원까지 포함하면, 현대자동차의 사내 비정규직 규모는 1만 5천여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은 평균임금 기준으로 동일근속 정규직의 60% 수준이다. 정규직의 생산직 평균과 비교하면 45% 정도밖에 안 된다. 기본 시급은 법정 최저임금을 약간 웃도는 정도다. 이조차도 비정규직노조가 설립된 2003년 이후 2년간 다소나마 개선된 결과다. 그 이전에는 법정 최저임금에 턱걸이하거나 심지어 그조차 못 받는 경우도 있었다. 정규직이 쫓겨난 자리에 비정규직 투입 IMF 이전에도 현대자동차에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았고, 또한 정규직과 차별이 심하지도 않았다. 현대자동차에 지금처럼 비정규직(사내하청) 노동자가 대규모로 투입된 것은 2000년 6월 정규직 노사간에 ‘완전고용합의서’라는 이름 아래 사내하청 투입을 합의하면서부터다. IMF를 맞아 일시적인 내수판매 부진으로 적자를 내게 되자, 현대자동차는 1997~98년에 걸쳐 1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을 길거리로 내쫓는다. 당시 4천여 명으로 추산되던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소리 소문 없이 먼저 쫓겨났고, 정리해고의 실제 적용을 둘러싼 총노동과 총자본의 대리전이었던 1998년의 고용조정 사태를 겪으면서 8천여 명이 희망(?)퇴직과 정리해고로 쫓겨났다. 2000년에 접어들어 내수판매가 급격히 호전되자 현대자동차는 생산직 노동자들을 다시 충원하기로 했다. 단 값싸고 언제든 내쫓을 수 있는 비정규직(사내하청)을 원한 회사는 노조를 교묘하게 유혹한다. “(정규직) 조합원의 고용을 보장할 테니, 부족한 인원을 사내하청으로 투입하는 데 합의해 달라. 사내하청이 들어오면 정규직 고용보장의 방패막이 될 것이다.” 1998년의 대접전에서 결국 정리해고를 수용함으로써 패배의 상처를 깊게 안은 노조는 회사의 달콤한 유혹을 거부하지 못한다. 노동자 계급의 대의를 저버린 ‘합의서’를 움켜쥔 회사는 무차별적으로 사내하청을 현장 곳곳에 투입했다. 그리고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현재 규모의 비정규직(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생산 현장 곳곳에 자리 잡게 되었다. 정규직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임금, 작업복·안전화 같은 것들에마저 적용되는 온갖 차별, 산재는 엄두도 못 내고 월차 한번 마음 놓고 쓰지 못하는 억압, 심지어 수시로 욕설과 반말이 횡행하는 비인간적 대우. 게다가 정규직 노동자들과 완전히 섞여 일하면서도 상대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공정을 떠맡느라 겪어야 하는 노동강도에서의 차별···. 정규직이 쫓겨난 자리에 투입된 현대자동차 비정규직의 처지는, 왜 총자본이 1990년대 후반에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를 법제화하기 위해 그렇게 총공세를 펼치고 ‘난리 블루스’를 떨었는지 설명해 주는 또 하나의 훌륭한 교범이었다. 노조 설립에서 불법파견 판정까지 - 당당하게 살아남은 비정규직 노조 2003년 3월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의 비정규직(사내하청) 노동자 송성훈씨가 소속 업체 관리자로부터 아킬레스건을 절단당하는 ‘식칼 테러’를 당한다. 업체 규정대로 5일 전 월차사용 신청을 했으나 거부당하자 항의를 했다가 관리자에게 심하게 얻어맞고 병원에 입원했는데, 이를 ‘비정규직 주제에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반항’이라고 느낀 관리자가 깡패 두 사람을 데리고 병실을 찾아와 식칼로 아킬레스건을 세 번이나 그어버린 것이다. ‘식칼테러’의 충격은, 최소한의 인간적 대우조차 받지 못한 채 3년여의 세월 동안 그저 숨죽이고 살아가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마침내 떨쳐 일어서게 만들었다. 아산공장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곧바로 파업에 들어갔고, 당황한 현대자동차는 해당 업체 계약해지 및 소속 노동자 전원의 신규업체 고용승계를 약속했다. 일주일 후 아산공장 노동자들은 ‘금속노조 현자아산사내하청지회’라는 이름으로 노조를 설립했다. 아산공장의 사건들은 현대자동차의 주력 생산거점인 울산공장에도 바로 영향을 미쳤다. 한 달 후 울산공장에서도 ‘비정규직투쟁위원회’(비투위)가 공개적으로 설립되고, 다시 두 달 후인 7월초 ‘현대자동차비정규직노동조합’이라는 이름으로 노조가 설립되었다. 전주공장에서도 지난해 2004년 5월 ‘하청노동자연대투쟁위원회’를 설립한데 이어 지난 2월엔 ‘금속노조 현자전주사내하청지회’라는 이름으로 노조를 설립했다. 이로써 울산·아산·전주 등 현대자동차의 국내 생산공장 세 곳 모두에서 비정규직 노조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비정규직 노조의 운명은 너무나 고달팠다. 기본적으로 현대자동차가 비정규직 노조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가운데, 해고와 구속을 비롯한 무수한 탄압을 십자포화로 쏟아 부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수동성과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함에 따라 그 결집력이 아직 미약했다. 정규직 노조의 지원과·연대가 없지는 않았으나 한계 또한 분명했다. 비정규직 노조의 하루하루는 그야말로 생존을 둘러싼 투쟁의 연속이었다. 그 러나 비정규직 노조는 쉽사리 무너지지 않았다. 온갖 탄압과 악조건들을 과감하고 끈질긴 투쟁들로 돌파하면서 당당하게 살아남았다. 그렇게 1년을 넘어서면서 이젠 의미 있는 성과와 승리들을 하나씩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지난해 7월에는 정규직 노조의 임금투쟁이 종결된 이후 비정규직 노조가 독자파업과 철탑농성 끝에 이른바 2·3차 하청 노동자들에 대한 ‘사내하청 처우개선’ 동일 적용을 쟁취해 냈다. 정규직 노조가 “회사의 완강한 반대로 불가능하다”며 포기했던 목표를 독자 투쟁으로 달성해 낸 것이다. 곧 이어 5공장에서 비정규직 노조 무력화를 노린 정리해고가 단행되자 안기호 위원장의 “정말로 목숨을 걸었던” 38일 단식을 비롯한 두 달여의 투쟁을 통해 복직을 쟁취해 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1년여에 걸친 치밀한 준비와 대응 끝에 “현대자동차 사내하청은 불법파견”이라는 노동부의 판정을 끌어냄으로써 비정규직 대중의 움츠린 가슴에 자신감과 확신을 불어넣으며 바야흐로 비정규직 투쟁을 본격적인 대중적 투쟁으로 발전시켜 나갈 유력한 발판을 마련해 냈다. 현대차 앞에서 무력한 노동부 지난해 9월부터 12월 16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127개 업체 1만여 명에 대한 불법파견 판정을 받아낸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1월 중하순에 총력투쟁을 펼치기로 계획한다. 어렵사리 불법파견 판정을 얻어냈지만, 자칫하면 제대로 쟁점화도 되지 않은 채 묻혀버릴 조짐이 농후해졌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불법파견 판정을 내린 노동부가 현대자동차에게 불법파견 시정 지시를 내리면서 정규직화 및 직접고용을 명시하지 않음으로써 도망갈 출구를 열어주었다. 노동부는 그동안 금호타이어 등에 대해 불법파견 판정을 내릴 때 ‘원청이 직접고용하도록’ 명시적인 시정지시를 해 왔다. 또한 ‘2년 이상 파견노동자로 일하면 원청에 직접 고용된 것으로 자동간주’하는 파견법상 조항이 불법파견에도 적용된다는 게 노동부의 공식적인 유권해석이다. 전후 사정을 놓고 볼 때, 노동부가 현대자동차의 경우에만 정규직화 및 직접고용을 명시하지 않은 것은 고의적인 누락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불법해소를 위한 개선계획서를 제출하라”는 노동부의 두루뭉실한 지시를 받은 현대자동차는 공정재배치를 통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작업 혼재’를 해소함으로써 불법을 해소하겠다는, 이른바 ‘진성도급 전환’을 핵심으로 하는 개선계획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무려 1만 명의 사내하청 노동자들, 마땅히 정규직이 되어야 했으나 현대자동차의 불법행위로 비정규직이 되어버린, 그러나 노동부라는 국가기관의 불법파견 판정으로 사실상 정규직으로서의 법적 지위를 획득한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정규직화 내지 직접고용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현대자동차가 제출한 개선계획서는 실현가능성이 전혀 없는 방안이었다. 이 계획서에 따르면 정규직 또한 대대적인 공정 재배치를 감수해야 하는데, 이는 정규직 노조와 조합원들의 동의 없이는 전혀 이루어질 수 없거니와 결코 동의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진성도급 전환이 ‘실현가능성 제로’라는 사실을 현대자동차도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애초에 노동부의 불법파견 판정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대법원의 확정 판결이 나야 받아들이겠다는 게 현대자동차의 공공연한 입장이다. 이른바 ‘개선계획서’는 노동부의 시정 지시에 대응하는 요식절차로 아무렇게나 끄적거린, 어떤 진정성도 없이 국가기관을 기망하는 문서일 뿐인 것이다. 그러나 엉터리 개선계획서를 받아든 노동부는 현대자동차를 불법파견 혐의로 동부경찰서에 고발하는 것으로 자신의 할 일을 마무리 지어 버렸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그조차도 형식적인 고발장만 제출했다가 두 달이 지나서야 겨우 관련 자료를 경찰에 제출한 것이 ‘노동기본권실현 국회의원연구모임’ 소속 단병호·조승수·김영주 의원 등이 3월 14일 발표한 진상조사 결과에서 밝혀졌다.) 도대체 고발 이외에 노동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왜 없다는 것인가? 간단한 방법으로, 불법 판정을 무시한 채 불법행위를 지속하고 있는 현대자동차의 경영진을 구속 수사해 달라고 검찰에 품신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게 아니라 간단하게 가능한 일도 일부러 안하고 있는 것이다. 비정규직들이 현대자동차 생산라인을 멈추다 이처럼 ‘알맹이 빠진 시정 지시 → 엉터리 개선계획서 제출 → 형식적 고발로 사태 종결’의 짜고 치는 듯한 수순이 전개되는 가운데, 1월 12일 현대자동차가 제출한 세 번째 마지막 개선계획서마저 이전과 마찬가지로 ‘말도 안되는’ 내용으로 일관하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정규직 노조가 준비부족을 이유로 당장은 공동투쟁에 나설 수 없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더 이상 정규직 노조의 준비완료를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다. 결국 울산의 비정규직 노조는 1월 20일부터 잔업거부를 포함한 생산타격 투쟁에 돌입하기로 했다. 비정규직 스스로의 강력한 투쟁으로 불법파견 문제를 최대한 쟁점화 시켜야만, 불법파견 판정 이후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는 답답한 현실에 그나마 숨통이 트일 것이라는 절박함이었다. 1월 20일로 예정된 비정규직 노조의 잔업거부 투쟁이 다가오자 현대자동차와 사내하청 업체들은 미리부터 대체인력 투입을 준비했다. 특히 5공장 도장부의 경우 비정규직 노조가 상당한 조직력을 확보하여 라인을 완전 정지시킬 게 분명해 보이자, 원하청 사측은 14일부터 예비 대체인력을 생산라인에 투입하기 시작했다. 15일 대체인력 철수를 요구하는 1시간 작업거부 투쟁으로 예비 대체인력을 철수시키고 나자, 사측은 이를 주도한 정영미 비정규직 노조 대의원을 17일자로 해고했다. 20일이 미처 오기도 전에 비정규직 노조와 현대자동차 사이의 긴장이 가파르게 치솟아 오른 것이다. 18일 오전 8시 주간조 출근과 동시에 비정규직 노조는 “불법파견 정규직화! 불법대체인력 철수! 비정규직 노조 인정!” 등을 요구하며 5공장에서 전격적으로 파업투쟁에 돌입했다. 도장부 및 의장부 비정규직 120여명의 탈의실 점거농성으로 시작된 파업은 곧바로 5공장 전체를 정지시켰다. 투싼과 테라칸을 생산하는 5공장 라인이 주간조 내내 완전히 정지하자, 오후 3시 정규직 노동자들이 조기 퇴근했다. 5공장의 전격 파업 돌입에 발맞추어 비정규직 노조는 20일부터 시작하려던 잔업거부 투쟁을 18일 전격 단행했다. 1·2·3공장에서 600여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잔업거부에 동참했다. 사측은 비정규직의 생산타격 투쟁을 봉쇄하려고 대체인력 투입을 준비하였으나, 오히려 그로 인해 예정보다 이틀이나 빨리 확실하게 라인이 서 버린 것이다. 대체인력 투입 방관한 정규직 노조 5공장의 탈의실 점거 옥쇄파업이 지속되는 가운데, 1·2·3공장의 잔업거부 투쟁은 1월 20일과 21일에도 이어졌다. 그러나 사측의 총체적인 반격으로 잔업거부 참가자가 눈에 띄게 줄어들면서 더 이상 잔업거부를 지속해 나가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에 내몰렸다. 정규직 노조 집행부는 대체인력 투입을 저지하라는 형식적인 지침을 내렸지만, 실제로는 대체인력의 대다수인 1개월짜리 한시계약자를 대체인력 유형에서 제외함으로써 사실상 대체인력 투입을 방관한다. 집행부의 방관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정규직 활동가들이 육탄돌격을 불사하며 대체인력 투입 저지 투쟁에 나섰지만, 집행부의 방관과 사측의 해고 위협이라는 악조건 속에서 그 기세를 지속해 내지 못했다. 다른 사업부의 잔업거부 투쟁이 동력 소진으로 사실상 종결되면서, 1월 21일에 이르러 5공장 파업대오는 급격히 고립에 빠져들었다. 자신감을 회복한 사측은 21일 비정규직 노조의 본관 앞 집회 때 경비대를 동원하여 군홧발로 머리를 짓이기는 잔인한 폭력을 행사한다. 경비대의 폭력을 앞세운 현대자동차의 힘에 눌려 비정규직 노조의 투쟁이 압살당할 위기에 처해 있던 22일, 최남선 조합원이 현자노조 사무실 내에서 분신을 시도한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단결”과 “원하청 노조의 공동투쟁”을 호소하면서. 다행히 목숨은 건지게 되었지만, 비정규직 조합원의 분신 시도는 사측을 움찔하게 만들었고 사측의 공세는 잠시 주춤한다. 그러나 분신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투쟁전선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자 1월말에 이르러 사측의 공세가 다시 시작되었다. 2월 8일부터 시작되는 설 연휴를 앞두고 노조 간부 및 5공장 농성자 전원에 대한 해고 절차 진행, 116명 고소고발, 퇴거단행 가처분 신청, 손해배상 소송 제기 등 전방위적인 공세에 나선 것이다. 이 같은 최악의 고립 상황 속에서도 5공장 비정규직 농성단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패기와 자신감을 높여갔다. 파업농성이 2주를 넘어가며 대오가 다소 줄어들긴 했지만 농성단의 기세는 결코 꺾일 줄을 몰랐다. 사측이 다가오는 설 연휴를 결정적 계기로 보고 총공세를 펼쳤지만, 농성단은 ‘설 연휴 기간 농성장 사수’라는 쉽지 않은 결의를 흔쾌히 끌어냄으로써 사측을 허탈하게 만드는 식이었다. 결국 설 연휴 기간에도 농성투쟁이 지속되는 상황이 되자, 현대자동차는 연휴가 시작되는 8일부터 ‘단전단수’라는 극악한 방법까지 동원한다. 텅 빈 공장, 영하의 날씨. 난방시설도 전기를 이용하도록 되어 있기에, 전기와 물이 끊긴 한겨울의 농성장은 그야말로 정상적으로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그런 곳이었다. 한낮에도 촛불을 켜야 조명이 되는 농성장을 비정규직 농성자들은 ‘박쥐동굴’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박쥐동굴’에서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오기는커녕, 비정규직 농성자들은 더욱 강인한 투사로 단련되고 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얘기꽃 속에 서로의 살아온 삶들을 나누고, 비정규직으로서의 설움과 희망을 주고받으면서, 그들은 더없이 끈끈한 ‘동지’로 거듭났다. ‘단전단수’라는 최악의 탄압이 오히려 최근 수 년 동안 한국 노동운동에서 볼 수 없었던 최강의 투쟁대오를 만들어 내고 있었던 것이다. ‘박쥐 동굴’ 속에서 태어난 최강의 투쟁대오 설 연휴가 끝나가던 2월 12일 저녁, 비정규직 노조 운영위는 ‘기필코 1만 명 비정규직 대중파업을 성사시켜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을 승리로 이끈다’는 요지로 향후 투쟁방향을 정리한다. 그 정도 탄압을 몰아쳤으니 이제 곧 백기항복을 할 것이라 잔뜩 기대했던 사측은 비정규직 노조와 농성단의 기세를 확인하며 기겁을 한다. 바로 다음날인 13일 비정규직 노조 안기호 위원장은 낮 12시경 농성장에서 식사를 하러 싼타모 식당을 향해 계단을 내려서다가 100여명의 경비대들에게 붙잡혀 건물밖에 대기 중이던 스타렉스 차량에 납치, 5공장 정문에서 동부경찰서 형사들에게 인계된 후 바로 구속되었다. 안기호 위원장은 납치 과정에서 무차별 폭행을 당해 전치 3주의 부상을 입었고, 동행하던 조합원 세 명도 상당한 폭행을 당했다. 그러나 비정규직 노조의 구심인 안기호 위원장을 제거하면 대다수가 초심자인 농성단이 결정적으로 흔들릴 것이라던 사측의 계산마저 빗나가고 말았다. 사실 안기호 위원장은 노조 설립 이후 헌신적인 실천투쟁을 바탕으로 농성단에게는 절대적인 존재였기에, 그의 부재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믿고 의지했던 위원장을 참혹하게 빼앗긴 농성단의 위기의식은 오히려 그들을 더욱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존재로 변화시켜 버렸다. 안기호 위원장을 빼앗기고 며칠이 지나자 농성단은 이전보다 훨씬 더 강력한 투쟁체가 되어 있었다. 2월 18일 물리력을 동원한 강제퇴거를 단행하겠다는 공문이 날라오고, 20일엔 실제로 물리적 침탈이 시도되자, 21일 마침내 30~40대 여성 농성자들이 단식투쟁을 하겠다고 나섰다. 그동안 농성장 안에서도 보호만 받으며 살아왔는데, 아들 같은 20대 남성 농성자들이 당하는 고통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면서. 당황한 사측은 200여명의 관리자·경비대를 동원하여 여성 농성자들의 단식투쟁을 방해하러 나섰다. 속옷과 생리대가 들어있는 가방을 열어 던지고, 여성 농성자들을 지키려던 20대 남성 농성자들을 밀치고 때리며 온갖 폭력을 가했다. 한 남성 농성자의 머리를 벽 모서리에 쥐어박아 피투성이로 만들기도 했다. 웃옷을 벗어던진 여성 농성자의 절규와 실신. 결사적인 투쟁 끝에야 농성자들은 단식투쟁의 공간을 지켜낼 수 있었다. 5공장 비정규직 농성단의 ‘피 흘리는 결사투쟁’은 마침내 상황의 반전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22일 정규직 노조의 윤성근 전 위원장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최소한 평화적인 농성이라도 마음 놓고 할 수 있게 될 때까지 함께 하겠다”며 농성장에 합류한 것을 시작으로, 현장조직과 각 사업부 대의원회·소위원회 등에서 농성장 지지방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2월 25일 마침내 단전단수가 해제되었다. 1 월 21일 다른 사업부들의 잔업거부 투쟁이 동력 소진으로 종결된 이후 한 달이 넘게 지속되었던 최악의 고립 상태를, 5공장 비정규직 농성단은 마침내 돌파해 낸 것이다. 89명 해고, 116명 고소고발, 집회시위금지 가처분, 출입금지 가처분, 퇴거단행 가처분 신청, 손해배상 신청, 위원장 납치 폭행, 단전단수…. 거대한 현대자동차가 백화점식 노동탄압으로 십자포화를 쏟아 부었지만, 5공장 농성단을 비롯한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그것을 뚫고 오히려 강철투사로 거듭난 것이다. 파견법 개악 저지와 불법파견 철폐 투쟁 올해 한국 사회의 최대 이슈가 ‘사회적 양극화’라고들 한다. 그 핵심에 비정규직 문제가 있고, 특히 제조업 전반에 만연해 있는 불법파견 문제가 있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불법파견 철폐 투쟁은 한국의 산업구조 및 노동운동에서 현대자동차가 갖는 상징성으로 인해 이미 전국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여기에 4월 처리가 확실시되는 파견법 개악안 저지 투쟁이 결합되면서, 비정규직 문제의 향방을 가르는 큰 갈림길이 될 것으로 보인다. 현대자동차 전체의 원하청 공동투쟁이 큰 그림으로 추진되고 있는 가운데, 고립을 벗어난 5공장 비정규직 농성단은 여전히 활력 있게 투쟁을 이어나가고 있다. 서서히 동력을 회복한 타 사업부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다시 새로운 분출을 준비하고 있다. 4월 불법파견 철폐 투쟁과 파견법 개악 저지 투쟁이 만나는 정점에서, 5공장 농성단을 비롯한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또 어떤 감동스러운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줄 것인가? 그들은 아직 소수다. 그리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끝내 소수의 벽을 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그들은 소수의 벽을 넘지 못한 채 패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무나 평범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저토록 강인한 투사로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운동 주체의 목적의식적인 노력만으로 이룰 수 있는 일도 결코 아니다. 저 작은 흐름 속에는 거대한 미래가 숨 쉬고 있다. 멀지 않아 지금 그들을 통해 예고되고 있는 새로운 시대는 활짝 열리고야 말 것이다. 5공장 비정규직 농성단의 절반 이상이 20대 청년 노동자다. 개인주의적이기만 한 줄 알았던 지금의 20대, 노조와 파업은 결코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지금의 20대. 그러나 이번 투쟁을 통해 그들은 단결력과 투쟁력에서 과거 어느 세대보다 강력한 잠재력을 갖고 있음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강한 자율성에 기초하기에 그들의 집단성은 훨씬 생동감이 있다. 인터넷과 멀티미디어를 자유자재로 다루고 풍부한 문화적 감수성과 표현 능력을 갖고 있기에 그들의 투쟁력은 훨씬 다양한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20대 노동운동의 새로운 가능성 20대 청년들의 잠재적인 가능성이 마그마처럼 꿈틀대는 비정규직의 분노와 결합하면서 한국 노동운동은 조만간 전혀 새로운 거대한 분출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지금 5공장 농성단을 비롯한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불법파견 철폐 투쟁은 그 날이 멀지 않았음을 예고하고 있다. 2005년 04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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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불법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들

  • 등록일
    2005/04/25 15:46
  • 수정일
    2005/04/25 15:46
어머니 죽음에도 돈을 벌어야 했던 어느 이주노동자의 이야기 최백순 기자 redsqure@dreamwiz.com 1998년 나는 방글라데시의 다카 국제공항에서 가족들의 슬픈 배웅을 받으며 브로커와 함께 서울에 가기 위해 먼저 홍콩으로 출발했다. 비자가 없는 빈 여권을 들고 그렇게까지 멀리 가보기는 처음이었다. 내 가족은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열한 명의 형제로 이루어져 있다. 신장이 안 좋으신 어머니는 곧 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해서 가족을 부양하고 어머니를 수술시켜 드리고 싶었지만, 막상 졸업을 하고 보니 마땅한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한국 돈으로 10만 원 정도의 월급을 받을 수 있는 회사에 취직을 하자니, 그 돈으로는 수술은커녕 한 달에 30만 원이 들어가는 정기적인 치료조차 불가능했다. 한국행을 결심한 이유 이런 상황 속에서 나는 브로커를 통해 한국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비용은 약 700만 원. 브로커는 처음에 나를 홍콩으로 보냈다. 우리는 홍콩에서 일주일을 체제한 후 한국으로 들어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브로커가 사정이 여의치 않다며 나를 먼저 중국으로 보냈다. 그 후 약 3개월 동안 나는 탁구공처럼 홍콩과 중국을 10번 정도 오가게 되었다. 이러는 동안 돈은 다 떨어지고 전화도 제대로 걸지 못하며 하루에 한 끼만 먹는 날이 계속 이어졌다. 3개월 후에 돌아온 브로커는 이제 한국에 갈 수 있게 되었다며 마치 비즈니스맨처럼 나에게 양복을 사 입혔다. 그리고 우리는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하지만 서류가 가짜라는 것이 그만 들통이 나고 말았다. 몇 명의 덩치 좋은 출입국 직원들이 나를 위협하며 출국 관련 서류에 서명하라고 다그쳤다. 결국 서명을 하게 된 나는 김포공항에 있는 보호소에서 며칠을 고생하다 방글라데시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렇게 한국행은 어이없는 실패로 끝났지만 브로커에게 준 돈을 다시 돌려받지는 못했다. 한 달 후에 다시 다른 브로커를 통해 한국행을 감행했다. 이번에는 중국에서 했던 고생이 무색하리만큼 너무도 쉽게 출입국 절차를 통과할 수 있었다. 그 방글라데시 브로커와 몇몇 출입국 관리 직원들 사이에 커넥션이 있었기 때문에 쉽게 통과되었는 걸 나중에 알게 됐다. 한국에 들어온 후 내 생활은 거의 노예의 생활과 다름없었다. 하루에 12시간 야간과 주간을 바꿔가면서 일한 월급이 식비 합쳐서 65만 원. 너무나 힘들었지만 아픈 어머니를 생각하면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런데 6 개월 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어머니가 그만 돌아가셨다. 슬 픔을 견딜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당장에라도 방글라데시에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한국에 오기 위해 빌렸던 돈을 갚기 위해, 또다른 가족들의 생계를 생각해서 어쩔 수 없이 눌러앉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술만 마시면 그때의 고통과 슬픔이 밀려들어 와 내 자신을 주체하기가 힘들다. 이렇게 한국에 와서 생활한 지 5년. 그 동안 못사는 나라의 외국인으로 차별을 온 몸으로 받으면서도 “차별”이라 이름붙일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해, 더 이상 눈치 보지 말고 좀더 솔직히 그리고 좀더 과감히 이야기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 이 글을 쓴다. “저 사람은 미국인이 아니고 외국인이야” 한국은 못 사는 아시아의 나라에서 온 나에게 그리 친절하지 않았다. 얼굴이 검고 한국말을 잘 하지 못한다며 무시하고 차별하는 것은 그래도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없는 것이 나에게는 가장 힘들었다. 예를 들어, 한 달에 한번 회식을 갖게 되면 어김없이 삼겹살집을 가게 되는데, 한국인 사장과 동료들은 이슬람 문화에서 자란 나에게 돼지고기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돼지고기가 피를 맑게 해준다며 마구 강권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돼지고기를 다른 고기라고 속여서 나에게 먹였다. 돼지고기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눈물이 찔끔 나도록 한참 토한 적도 있었다. 한국말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당한 수모도 많았다. 대부분의 다른 이주노동자들도 그러하듯, 한국말을 배우는 것은 낯선 언어에 대한 동경이라기보다 살아남기 위한 일종의 몸부림이었다. 처음에 한국어를 몰라 영어로 이야기하면 한국인 사장이나 동료들로부터 엄청난 욕설들이 날아왔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유럽이나 미국, 캐나다 등지에서 온 이주노동자들(미군 혹은 영어교사들)이 영어로 말을 걸어오면 한국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얼굴을 붉히며 수줍어하거나, 영어를 좀 하는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해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 한국어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어, 한국말 잘 하시네요”하면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5년이 지난 지금은 “한국말 참 잘하시네요”하는 말이 귀찮기 이를 데 없다. 택시를 타건, 지하철을 타건, 시장에서 물건을 사건, 친구와 함께 술을 마시러 가건, 귀에 못이 박히게 듣는 말이 이 말이다. 택시 기사들도 백이면 백 내가 한국인 동료나 친구와 한국말로 대화를 하고 있으면 백미러로 날 힐끔 한번 쳐다보고는 “한국말 참 잘하시네요. 어느 나라에서 오셨어요”하고 묻기 일쑤다. 그러면 나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국인이에요. 좀 탔죠?” 하고 대답한다. 그만큼 한국은 단일한 언어와 단일한 문화 속에 사로잡혀 있다. 또 한 번은 길을 걸어가는데, 엄마와 걸어가고 있던 한 아이가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엄마, 미국인이야!”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아이의 엄마는 “저 사람은 미국인이 아니라 외국인이야”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마치 한국에 사는 사람들의 종류가 한국인, 미국인, 외국인 이렇게 딱 세 가지인 듯이 말이다. ‘우리 한국인’과 ‘불쌍한 그들’ 게다가 한국의 주류 미디어는 이주노동자의 차별을 더욱 심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조·중·동은 말할 것도 없다. 심지어 이주노동자들의 존재에 대해서 호의적이라는 신문과 방송 매체들도 이주노동자를 다루는 방식은 대략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주노동자를 동정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스갯거리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전자로 대표적인 사례가 MBC의 「아시아, 아시아」나 「느낌표」같은 프로그램이다. 한번은 「아시아, 아시아」에서 가족들과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한 이주노동자에게 가족을 한국으로 초대해서 만나게 해주는 감동적인 장면이 연출된 적이 있다.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쏙 뽑아내는 이 방송은 비록 많은 이주노동자들을 울리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시청자들 스스로가 불쌍한 ‘그들’에게 ‘우리 한국인’이 무언가를 해주고 있다는 자족감과 우월감을 갖게 하면서 차별의 현실과 시스템을 은폐하고 부인하게끔 유도하는 역할을 한다. 지금은 다소 그 인기가 주춤한 ‘블랑카’ 역시, 한국이 한국 스스로를 코믹하게 비추어보는 거울의 역할로 이주노동자의 존재를 끌어들였을 뿐, 이주노동자의 현실 그 자체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또, 정부와 방송 3사는 이주노동자를 ‘외국인 근로자’로 지칭하길 계속 고집한다. 특히 미등록일 경우, 미등록이 아닌 ‘불법’으로 불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늘 주류 언론에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불법 외국인 근로자’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게 된다. 근로자란 단어는 노동자의 노동자성(노동자의 권리)을 어떻게든 탈각시키고 단순히 일하는 책임만을 강조하는 용어로 박정희 시절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고 있다. ‘외국인’이란 말도 ‘한국인이 아니’라는, 다분히 부정적이고 배타적인 용어이다. 반면 ‘이주민’이란, 말 그대로 ‘이동’에 강조를 둔 말이다. ‘이주민’은 한국 밖에서 한국으로 이주 해왔다는 좁은 의미뿐 아니라, 한국 내에서도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다는 광의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즉, 예전에 각 지방에서 서울로 돈을 벌기 위해 상경한 대다수의 서울 시민들도 사실은 이 광의의 ‘이주민’에 속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불법’이라는 용어이다. 보통 합법이니 불법이니 하는 말은 특정 행위로 법을 위반했는지 여부를 가리는 말이다. 하지만 ‘불법 외국인 근로자’라는 말에서 ‘불법’은 사람의 존재 자체를 ‘합법이냐 불법이냐’로 규정하기 때문에 ‘미등록’으로 고쳐 불러야 마땅하다. 법을 어긴 사람을 우리는 ‘불법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다. 합법적 결혼에 의하지 않고 태어난 아기를 우리는 ‘불법 아기’라고 부르지 않는다. 또 ‘불법’이라는 말의 문제는 단지 용어문제에서 끝나지 않는다. ‘불법’이란 용어는 출입국관리소가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을 범죄자처럼 단속하고 수감하고 강제출국 시킬 때, 그들의 인권을 침해하고 부정하는 구실로 작용한다. ‘불법 사람’과 인간의 존엄성 작년에 시행된 고용허가제에 따르면 이주노동자가 ‘불법 사람’이 아닌 ‘합법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는 기간은 최고 3년이다. 그것도 고용주가 1년마다 꼬박꼬박 계약을 갱신해 줘야 하는 조건하에서 그렇다. 또 작업장을 마음대로 이동할 수 있는 자유가 없기 때문에, 임금이 체불되거나, 근로조건이 나빠서 공장을 옮기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순전히 고용주의 입장만을 담고 있는 이런 고용허가제 아래에서 이주노동자가 3년을 ‘합법 사람’으로 남아 있을 확률은 매우 희박하다. 또 법적으로 5년 이상을 합법적으로 체류하게 되면 영주권이 주어지는 제도가 한국에도 있다. 그러나 고용허가제상 3년밖에 체류가 허용되지 않는 이주노동자들에게 영주권이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다. 그렇다면 한국 정부는 왜 이주노동자를 어쩔 수 없이 ‘불법 사람’으로 만드는 제도와 시스템을 계속 유지하려는 것일까. 그것은 결국 싼 값에 노동자를 쓰고 버리기 위한 전략이다. ‘불법’ 상태에서 그들의 약점을 이용해서 싼 값에 부리는 것뿐만 아니라, 주기적으로 새로운 이주노동자로 물갈이 하면서 임금을 계속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고, 이주노동자들의 단결투쟁과 공동체 형성을 저지하려는 정책의 일환일 것이다. 종종 이런 소릴 듣는다. 3년만 벌어도 고국에 가면 큰돈이 될 텐데 무슨 욕심이 남아 그렇게 차별받으면서 한국에서 일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이주노동자들은 브로커를 통해 한국에 들어왔다. 적게는 700만~800만 원, 많게는 1500만원 정도의 브로커 비용을 충당하는 데만도 2년 이상이 걸린다. 이런 현실 속에서 빚만 갚고 한국을 떠나기란 쉽지 않다. 정부에서는 불법 브로커들을 없애고 고용허가제 하에 모든 것을 투명하고 공정하게 운영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불법 브로커뿐만 아니라 각 나라의 공식적인 소개 기관조차도 거액의 돈을 받고 이주노동자들을 공급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정부의 발표는 기만술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주류 미디어는, 이주노동자들이 한국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이유로 미등록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단속 추방에 대해 침묵하거나 지지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주노동자들이 일하는 곳은 한국인들이 기피하는 3D 업종이다. 이주노동자들이 없다면 이미 공장 문을 닫았을 영세 제조업에 그동안 우리들은 묵묵히 일해 왔다. 요즈음은 공장지역 뿐만 아니라 농촌 지역에서도 농사지을 인력이 없어 이주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실정이다. 밑바닥 이주 노동자의 노동 없이 과연 한국 경제가 돌아갈 수 있을지도 정말 의문이다. 결국 이주 노동자들이 한국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는 주류 미디어들의 터무니없는 거짓말은 아까도 말했듯, 어떻게든 이주노동자를 사람들의 차별 속에 몰아넣어 그들의 권리와 목소리를 빼앗기 위한 것이다. 차별을 없애기 위한 첫걸음 이러 저러한 미디어의 내용과 표현방식은 둘째치고서라도, 이주노동자들에게는 미디어에 접근하고 참여하는 것 자체가 제한되어 있다. 이주노동자의 현실과 권리를 제대로 알리는 일이 쉽지 않다는 이야기다. 미국인 등 영어를 사용하는 외국인들에게는 AFKN, 케이블 TV, 위성방송, 영어잡지, 신문 등 다양한 미디어들이 열려 있는 반면, 한국에 있는 외국인들의 70~80 퍼센트를 차지하는 45만 이주노동자들에게는 라디오 주파수 하나, TV채널 하나 주어지지 않고 있다. 우리는 자국어로 된 철 지난 잡지를 몇 번이고 반복해 읽어야 할 만큼 매체와 정보에 목말라있다. 이런 전체 이주노동자들의 공통된 상황과 권리를 알리는 목적뿐만 아니라, 97개 나라의 다양한 문화에서 온 다양한 공동체문화를 활성화하는 데 있어서도 소출력 공동체 라디오나 인터넷 미디어 공동체 만들기 같은 이주노동자들의 미디어 참여는 매우 중요하다. 각국의 언어로 된 크고 작은 미디어 활동은 한국의 획일화된 문화에 다양성을 불어넣어줄 수 있는 계기로도 작용할 수 있다. 이주노동자가 한국에 처음 들어온 지 17년. 이제 우리들은 이 사회의 한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이제 잠깐 왔다 가는 이방인의 존재가 아닌, 이 땅에 한국인들과 살아 숨쉬는 존재로서 한국 정부와 시민들이 우리를 받아들여 주길 간절히 기원한다. 2005년 04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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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화의 이주여성을 읽고...

  • 등록일
    2005/04/25 09:42
  • 수정일
    2005/04/25 09:42
* 이 글은 schua님의 [빈곤화와 이주여성] 에 관련된 글입니다.

그냥 몇자를 끌적여 본다. 아시아에서의 노동시장의 축소...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태국을 제외한 동남아 국가의 경우 노동시장이 부재하거나 노동시장에서 몇 %노동자가 작업장에 들어가 일에 종사한다. 그/녀들(얼마전 이주노동자 찌라시에서 발견한 그/녀들... 무심코 썼던 그들이라는 지칭이 일방주의적 사고 였음을 그/녀들이라는 글을 읽고 발견하였다. 인식한다고 하지만 늘 부족한 나를 발견한다.)의 노동시장에서 활동은 어려운 실정이다. 그나마 동남아시아 노동시장에서 이주여성 빈곤화는 문제의 화두이다. 그렇지만 필리핀의 경우 여성의 빈곤화보다는 여성노동자의 종사하는 사업에 대한 문제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내가 인접하고 있는 송탄의 경우 필리핀 여성 이주노동자들이 연애비자를 갖고 많이 나와 있다. 그리고 홍콩과 싱가포르 이주하는 필리핀 여성 이주노동자의 경우 가정도우미(가정부라고 우리는 지칭하지 않았던지)로 간다. 필리핀이주노동자들에게 있어 홍콩, 싱가포르, 일본, 한국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다양한 산업에 이주노동자가 분포(건설, 제조업 등 다양한 산업에 분포)하고 있지만, 여성의 경우 단순생산직과 식당 이외엔 전적으로 유흥업소로 많은 여성노동자들이 진출하고 있다. 송탄에 있어서는 거의 필리핀 이주노동자들이 미군기지(오산비행장-송탄 위치)로 인하여 많은 분포도를 보이고 있다. 이렇듯 여성노동자들의 경우 빈곤화 또한 문제이지만 서비스 직종에서 복무하는 문제 또한 간과하여서는 안될것 같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그나마 필리핀의 경우 좌/우 활동이 존재하고, 정치사상의 자유가 존재하여 개인의 정치적 의식(민족적 사고보다는 전지구적 사고와 노동에 대해 인식이 한국에 비해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으로 인하여 이주노동자를 지원하는 필리핀내 조직이 있다. KMU가 있고 각 나라별 KASAMACO(카사마코)라는 각 나라별 이주노동자 공동체가 있어 그 나라별 상황을 코디네터하고 같이 어려운 상황을 공유한다. 그나마 여성의 빈곤화보다는 산업진출에 있어서 여성에 있어서 노동시장의 문제가 화두로 필리핀의 경우 내재하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을 가져본다. 그러나 문제는 여성의 빈곤화... 그/녀들의 빈곤화에 있어서 상당히 문제의 심각성을 낳고 있는 지역이 서남아시아이다. 얼마전 말지에서 보았던 스리랑카 노동자들의 삶... 놀라울 따름이다. 자유무역지대에 노동자들이 한달에 벌어들이는 수입이 45달러라고 하고, 그외 다른사람들의 경우 산업기반이 없어 1달러 수입을 밑돌고 있다는 이야기... 그.녀들의 고통이 고스라니 남아 있다. 산업기반이 생기면 그들은 득세하고 그녀들의 빈곤화로 이어지겠지만... 그리고 네팔의 경우 또한 마찬가지이다. 생산기반 시설이 없고, 지폰 조합원의 대다수가 농업에 종사하는 분들... 아니면 한국에 이주한 노동자들이라는 사실은 네팔의 산업시설.. 노동시장보다는 봉건제 시대로 있음을 직시할 수 있다. 자본주의가 아닌 봉건제 사회로 있음을 사회적 현상을 보면 직시할 수 있다. 아직도 카스트제도의 위용이 남아 있고, 지역분립으로 내전을 벌이고 있는 스리랑카 서남아시아의 경우 근대화보다는 전근대화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나마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쉬의 경우 인도와의 종교분쟁으로 독립을 쟁취한 국가로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고 있지만, 생산시설 대부분을 균형있게 분배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여성의 빈곤화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안착화 시기가 구축되고 있는 중국, 한국,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에서의 아젠다가 아닐까 생각을 가져본다. 그렇다고 서남아시아의 경우 그녀들의 고통이 없지는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빈곤화의 문제를 넘어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부여되고 있지 못한 사회임이 개탄스러울 따름이다. 개인적으로 여성에게 있어 사회적 역할 부여에 있어 선후가 있을 수 없지만 산업화라는 명제아래 다양한 산업에 분포하고 있지 못한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고민 또한 하여야 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가져보게 하는 글이라 판단되어 끄적여 봄. 그냥 생각을 끄적여 보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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