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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4/22
    다시 떠나는 날
    간장 오타맨...
  2. 2005/04/22
    [노래/도종환 작사] 별에쓰는 편지
    간장 오타맨...
  3. 2005/04/21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겠다.(2)
    간장 오타맨...
  4. 2005/04/21
    오늘 새벽 떠난다.
    간장 오타맨...
  5. 2005/04/19
    “독재 감싸던 신문사 불타 통쾌했다”
    간장 오타맨...

다시 떠나는 날

  • 등록일
    2005/04/22 10:44
  • 수정일
    2005/04/22 10:44

* 이 글은 썩은 돼지님의 [친한 친구와 선배] 에 관련된 글입니다.

깊은 물을 만나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유유히 물결을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처럼

한번 길을 떠나면 드높은 산맥 앞에서라도

힘찬 날개짓 멈추지 않고 제 길을 가는 새들처럼

그대 절망케 한 것들을 두려워하지 만은 말자

꼼짝 않는 저 절벽에 강한 웃음 하나 던져두고

자! 우리 다시 한번 떠자 보자

처음 그 아름다운 마음으로 자리를 가리지 않고 피어나는 꽃처럼

자! 우리 다시 한번 떠나보자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며

그 어떤 시련 속에서도 끝내 멈추지 않을 사랑이여....

 

*** 도종환 시인의 시 다시 떠나는 날을 노래로 만든 곡이 더군요. 이 곳을 클릭하면 신형원씨가 부른 노래를 들을 수 있습니다.



바람이 오면
오는 대로 두었다가
가게 하세요

 

그리움이 오면
오는 대로 두었다가
가게 하세요

 

아픔도 오겠지요
머물러 살겠지요
살다간 가겠지요

 

세월도 그렇게
왔다간 갈 거예요
가도록 그냥 두세요

 

*** 트랙백 걸었던 글과 노래가 어울리는 것 같아 걸어 봅니다. 이 곳을 클릭하면 노래를 들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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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도종환 작사] 별에쓰는 편지

  • 등록일
    2005/04/22 00:47
  • 수정일
    2005/04/22 00:47

별에 쓰는 편지

부칠 곳이 없는 편지 별에다 씁니다

들어줄 이 없어도 혼잣말로 써가고

보아줄 이 없어도 손으로 씁니다

맨 처음 썼던 말은 뒤따라오며 지워지고

보고 싶다는 한마디만 끝인사로 남습니다

밤마다 쇠창살을 손으로 부여잡고

부칠 곳 없는 편지 별에다 씁니다.

 

** 이 노래를 들으려면... 이 곳을 클릭 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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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겠다.

  • 등록일
    2005/04/21 23:44
  • 수정일
    2005/04/21 23:44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게 하는 일 없이 정신과 몸만 바삐움직인다. 아침에 일어나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그나마 여유롭다. 그러나 사무실에 앉아서 있는 몇시간 그리고 점심시간이 되어서는 다들 여유보다는 밥을 먹고 본격적으로 하는 일들이 보이지 않게 손이 많이 가는 것 같다. 공부방도 그렇고, 이주노동자센터도 노동자문화센터 그리고 여러 일도... 다 사람이 하는 일이지만... 사람이 부족함을 느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일들이 힘들지만 일을 즐길려고 노력하는 모습들... 그리고 다들 일에 대한 배려를 하면서 서로가 부족한 점을 채워나가고자 하는 모습이 좋다. 초보인 내가 하는 것 없이 몸만 바쁘지만 시간이 지나다 보면 안착화되겠지... 이전 사무실에 있을때와는 다른 풍경이다. 내가 필요한 기사를 보고 내가 필요한 회의를 체크하고 사무실에서 맡은 일을 하면 하루가 금새가고 일과 후 시간은 여가를 누릴 수 있었는데... 지금은 도통 그런 여가라는 시간을 내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엄밀히 말하면 요즘 내가 하는 일들은 여가가 많다. 주로 센터 이실장님이 궂은 일을 도맡아 하시기에 그럭저럭 난 편하게 있다. 늘 미안하지만 고마움을 표현하지 못하는 습성으로 인해... 늘 살갑게 대하지 못함이 미안하다. 센터에서 모든 힘든 일은 다한다. 다솜 신나는 공부장 변선생님 아이들에게 저당잡힌 삶이 너무나 애처롭지만 일을 즐길 줄 안다. 지금은 누적된 일로 피로도가 누적이 되어 업무분담을 한다고 내가 올라가지만 뭐 시원스럽게 도와주는 것 하나없이 마음만 분주하다. 그래도 아랑곳 하지 않고 묵묵히 일을 하신다. 문제는 회계장부와 지금 한학기에 이수하여야 하는 사회복지2급 자격 공부가 관건이다.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만은 틀림없다. 집안일 공부방 일을 도맡아 하는 모습이 신기로울 따름이다. 다솜공동체 대표이신 오목사님 오산노동자문화센터와 이주노동자센터 소장이신 장목사님... 보이지 않게 일을 많이 하신다. 장목사님이야 중앙과 지역에서 여러 사안을 맡아 일을 추진하고 있어 요즘 센터보다는 외근이 많지만 늦은 저녁에도 하루 일과와 메일 체크를 하면서 메일링리스트를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신기할 따름이다. 정신력의 승리라는 말이 맡겠다. 오목사님의 경우는 뭐 다양한 일들을 주무하신다. 보이지 않는 마이더스 손.... 이야기도 누나 또는 선생님 처럼 달갑게 하시어 늘 말 속에서 배움을 몸으로 받고 있다. 그래서 요즘 지역 사안과 안의 일 하나도 챙기지 못하고 몸만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과정이다. 그래도 지지고 볶고 사는 것이 마냥 즐겁기만 하다. 지역 수청동 상황으로 인해 다들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얼마전까지 오산민주단체 연석회의 운영을 위해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지만 지역의 연대단위를 묶어내는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은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그렇다고 첫 술에 배부를 수 있다는 욕심을 갖고 시작한 일이 아니다. 지역에 있어 다수를 점하고 있는 지역 주체인 노동자 중심의 사업들을 배치해 나가는 일이 어찌 몇가지 사업으로서 획득할 수 있는 일인가? 시간과 노력의 결과물이어야 하는 것이 정답이지 않겠는가? 이에 집중과 분산을 시의성 있게 할 필요성을 느낀다. 이제 일보전진 이보후퇴가 될지 이보전진 일보후퇴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하다보면 지역에 있어 연대를 위한 광장은 마련될 것이라 생각을 감히 가져본다. 이제 주어진 일들에 매진하는 시기인 만큼 내가 허락된 시간 범위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자 한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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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새벽 떠난다.

  • 등록일
    2005/04/21 01:03
  • 수정일
    2005/04/21 01:03
한국에서의 생활을 접고 이제는 네팔로 돌아갈 수원지역모임의 네팔동지들... 오늘 새벽이면 화성출입국보호소에서 한국의 생활을 접고 고국으로 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번 면회를 간다하면서도 그렇게하지 못한게 못내 아쉽다. 전화통화는 몇번하였고, 이들의 짐을 준비해준 여러동지들의 분주한 모습만 그냥 지켜보았다. 미안타... 악수만하고 가보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이 담에 돈이 여유가 되고, 이주노동자노동조합이 사업이 잘되면(뭐 안되도 한번 찾아가리라...) 꼭 그들을 보러 가리라... 마음의 다짐만 한다. 내일이면 이 땅에서 살아온 삶의 조각들을 간직하고, 떠난다.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5년이라는 기간동안은 올 수가 없다고 한다. 참으로 긴 세월이리라... 그 기간동안 그들이 다시금 이땅에 밟을 수 있는 길은 없을까? 떠나간 동지의 마음도 그렇겠지만 남겨진 동지들의 몫도 만만치 않다. 그들과 보내고 함께하고자 하였던 여러 이야기들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분들이 없는 상황의 지금은 조금 어려움이 있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분들이 끌고나가면서 하고자 하였던 길.... 더디지만 꼭 탄탄히 만들어 내리라는 다짐을 해본다. 지금 다른 일도 그렇고 지역상황으로 여러 신경을 쓰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남겨진 동지들의 도움과 함께 어깨걸고 이주노동자들의 구호를 하나둘 쟁취하는 길에 함께 걷고자 한다. 이에 4월 24일 서울경기인천이주노동자노동조합의 건설의 깃발은 그 동지들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들의 결실이라 생각한다. 함께하지 못함은 먼 미래를 위한 도약이였다. 다짐하고 그분들의 뜻을 더욱더 강고히 굳건히 세워내는 길이라 생각하며, 긴호흡 강한걸음으로 걸어나가리라... 이날 이 땅에 와서 이주노동자운동을 진행한 분들 하나하나 이름을 아로 새기며 나가는 길이 될 것이다. 비록 많은 이주노동자 동지들이 지금은 함께하고 있지 못하지만... 더 큰 도약을 위한 활시위라 생각하며, 시작이 부족함을 때우고자 한다. 앞으로 나갈 길... 산넘어 산이겠지만... 이 과정에서 강철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몸소 몸으로 활동으로 이주노동자 하나하나가 보여주리라 믿는다. 작년 명동성당 투쟁 이후 정체된 이주노동자 운동의 깃발이 다시금 단일 깃발아래에서 펄럭이는 날 이주노동자 해방은 됐어라는 미소가 머금은 날로 만들어졌으면 한다. 간장 오타맨이... p.s "잘가오 그대"라는 노래가 떠오르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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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 감싸던 신문사 불타 통쾌했다”

  • 등록일
    2005/04/19 10:54
  • 수정일
    2005/04/19 10:54
오늘이 419이구나... 김영삼 정권이 모역을 공원화하여 외관을 치장하였지만... 이전 마라톤이나 도보행사 등의 풍경은 이전만 못한 것 같다. 몇년전만 해도 4.19 행사는 대단하였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어떠할까.... 특히 고대생들 그리고 서울공대는 그날 대단했지... 당시 419 청량리를 매운 대오가 서울공대와 고대생들이 제일 많았으니까... 대학때 대단한 날이었다... 선배들 묘역을 방문하는 것이.... ---------------- 4·19 혁명 참여학생들의 지필기록 공개 1960년 4월19일 오전 11시 성균관대생 홍아무개(당시 20)씨는 동료들과 함께 ‘독재정치 물리치자’라고 쓰인 펼침막을 들고 교문을 나섰다. “3·15 부정선거 다시 하라. 살인경찰 규탄한다”는 구호가 거리를 가득 메웠다. 홍씨는 “8열 종대로 짠 스크럼으로 구보 돌파” 하며 10만여명의 학생들과 시민들로 가득 찬 거리로 나아갔다. 오후 2시20분께 홍씨는 의사당 앞에서 처음으로 사상자를 목격했다. “사람들은 분노로 몰입했다. 독재를 감싸던 신문사가 불타 올랐다. 실로 통쾌했다.” 4·19 혁명 45돌을 맞아 당시 거리를 메웠던 사람들의 외침과 땀과 피를 날것 그대로 담은 기록이 공개됐다. <한겨레>가 18일 입수한 이 기록들은 4·19 혁명 직후 만들어진 ‘연세대 4월혁명연구반’ 학생들이 민주주의의 대열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발로 뛰어 찾아 받아낸 ‘자필 진술’로 이뤄졌다. “한국 현대사에 엄청난 사건으로 기록될 거대한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그 경험과 기억들이 사라지게 놔둘 수는 없었습니다.” 당시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반 학생이었던 김달중(67) 연세대 명예교수는 4월19일 시위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온 뒤 같은 과 동기였던 안병준(69) 전 연세대 교수와 혁명연구반을 꾸렸다. 단 2명이었다. “정부에서 나온 공식 자료부터 데모 계획서, 선언문, 학생 수기까지 가능한 모든 자료를 모았습니다. 각 대학 학생 네트워크를 이용했지만 두 명이서 하기에는 벅찬 일이었습니다.” 김 교수는 서울에서 시작해 3·15 부정선거 규탄시위가 일어난 마산, 2·28 학생민주의거를 일으킨 대구로 뛰어다녔다. 데모 계획, 주동자 명단, 경찰의 문초 내용, 당시 느꼈던 감정까지 수십가지 항목에 걸친 조사가 이뤄졌다. 수백명의 자료가 쌓여 갔다. “젊은 지성들에 대한 벅찬 감격으로 대열에 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4월19일 낮 서울 아현동에서 전차를 기다리다 노래를 부르며 행진하는 연세대생 4천여명을 본 당시 24살 시민 임아무개씨) “공포와 함께 총 쏜 이에 대한 저주가 머리를 관통했다.”(이날 오전 경무대 앞에서 발포 장면을 목격한 당시 22살 장아무개씨) “의정부로 가던 중 앞차 운전자가 이마에 총을 맞고 즉사했다. 순간 나 역시 총을 맞았다는 것을 알았다. 동지들은 내가 죽은 줄 알고 국기에 내 몸을 쌌다.”(이날 밤 11시께 총을 맞은 당시 서울 경신고 2년 권아무개씨) “나는 정의라면 어떠한 강력한 제지라도 뚫고 지나간다는 것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당시 22살의 고려대생 김아무개씨) 당시 혁명연구반의 조사에 응했던 우행원(66) 전 이화여대 교수(당시 이화여대 의예과 2)는 부상자들을 위한 모금활동을 벌여 당시 돈으로 15만환을 모으기도 했다. 김 명예교수는 “4·19 혁명 뒤 정치상황에 따라 4·19를 자기 입맛에 맞춰 이용하는 일이 만연했다”며 “이 기록들은 4·19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있는 그대로의 소중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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