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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4/10
    고호와 고갱(10)
    미갱
  2. 2005/04/05
    나이주의에 대한 짧은 생각(4)
    미갱

고호와 고갱


Self-Portrait/반고호 Vincent w. Van Gogh(1853~1891)

 

 

"외롭게 살다간 고호란 사나이도 있지 않은가"
뜬금없이 무슨 소리일까?
조용필 오빠의 <킬리만자로의 표범>가사중의 일부이다.

 


외로운 영혼의 대표 아이콘 빈센트 반 고호.

고호만큼 자화상을 많이 남긴 화가도 드물다. 비슷한 부류인 쉴레도 있지만..
고호는 모델을 구할 돈이 없어 어쩔 수 없는 현실적 선택이 자신이었던 것.

자신의 눈을 들여다 보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Self-Portrait with Bandaged Ear/1889

: 고갱과의 빈번한 성격적 충돌에 의하여 결정적인 우정의 파탄을 가져오고, 그 격분에 못이겨

  자기 자신의 귀를 면도칼로 잘라 버린 귀의 비극이 1888년 크리스마스 때 일어났고, 바로

  병원에 입원하였다. 1889년 1월 7일 퇴원을 한 고호는 그 무렵 2점의 자화상을 그렸는 데,

  모두 귀에 붕대를 감은 모습이다. 또 한 점의 자화상은 입에 파이프를 물고 있고, 빨간 바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들라크로아나 바그너나 베를리오즈의 마음속에도 광기는 존재하지

  않았을까'라고 고호 자신은 말하고 있다. 그 비극에 대하여 많은 의학자나 평론가, 학자들이

  연구하였으나, 과로에 의한 신경 과민, 환청,피해 망상 등 여러 가지 정신 병리학적 진단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차츰 진정을 회복하여 명석한 자기 마음의 지향을 나타내어 갔다.

  (http://www.youth.co.kr/rs/rs030021.htm에서 퍼온 글)

 

 

귀를 자른 후 그린 자화상.
귀가 잘린 사연은 고호의 인간적 성향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누군가 라디오에서 이 그림에 대한 전후사정을 들은 이가 한말이다.

" 고호, 한 성격했네요..흐흠.."


고호의 친구 고갱.

후기인상파의 기수 고갱은 남태평양의 아름다운 섬 타이티에서 선녀 같은 원주민여성들과

생활하며 그림에 전념하였던 근현대 예술가중 피카소를 제외하고는 드물게 팔자좋았던? 화가인 것 같다. 그가 타이티섬에 기거하기전 고호와의 짧은 동거생활은 고호의 작품세계와 정신건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계기였다.

어느 날, 고호의 자화상을 본 고갱의 한마디.
“양쪽의 귀모양이 다르군”
이 한마디의 직설적 평가는 불안정했던 고호의 멀쩡한 귀를 단박에 잘라버리게 하는 원인이었다. 고호의 정신병적 발작은 고갱과의 관계로 인해 좀더 심해졌다하니..뭐..

 


戱畵的(희화적) 自畵像(자화상)

: 사과와 뱀, 머리 위의 노랑빛 관 등을 추측하면 고갱이 여기에서 자기를 구세주(救世主)로

  견주어 나타내고 있는 것이 분명 하다.

  배경의 강한 빨강과 앞쪽의 강한 노랑으로 화면을 이등분하여 상태티즘(synthetisme)의

  지도자상으로 부각하여 평면적으로 밀어버렸다. 그러나 밝고 빛나는 색채에도 불구하고

  그림이 주는 인상은 어둡고 시니크한 괴로움이 감돌고 있는 것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동료들 속에서 이 야만인의 고독을 방영하고 있는 것이리라. 바로 직후에 타히티의

  원시림(原始林)에 자기를 던져, 그 야성을 불태울 거친 이지(理智)의 힘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http://www.youth.co.kr/rs/rs030021.htm에서 퍼온 글)

 

 


왠지 고갱이 밉다.

이성적 설명이 약간 불가한 감성적 접근이다. 그러니 이유는 묻지 마시라~


그림속에는 작가의 세계가 여실히 드러난다.
고호의 그림은 애처로움이 베어들어 인간적 동정심을 유발한다.

그의 외골수적이며 비사회적 성격은 그만의 세계안에서 존재함이고,

불안한 심연은 그림에서 뿜어나오는 강한 에너지의 원천이었으리라.
그러나 고갱의 그림은 긍정적 세계의 화려함과 단순함이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타이티의 원시적 색감과 평면적인 인물표현은 자신감에 넘쳐 보이고 인생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평안한 생활방식이 느껴진다.

 

고갱이 아름다운 타이티여성들과 원시적이며 황홀한 노년을 보낼 당시

고호는 외로운 정신병원에서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죽음을 맞이 하였을 것이다.

 

 

 

난 고갱보다 고호의 그림이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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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주의에 대한 짧은 생각

이 글은 쭌모님의 [거부할 수 없는 나이주의?] 에 관련된 글입니다.


 

“나이주의”가 의미하는 바가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사회는 나이에 대한 규정된 관념이 지배한다. 유교에 근간을 둔 나이든 자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긍정적 형식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사적인 만남내에서 관계규정을 수직화해 버리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처음 만남에서 우리는 여러가지 호구조사를 실시하는 것이 만남의 기본처럼 형식화되어 있다.

 

몇 학번인지요?

고향이 어디냐?

전공이?

어디 사시죠?

이름이..?

결혼하셨죠?

하시는 일은?


상대방을 이해하는 기본적인 준거들이다.


그러나 상대방을 이해하는 준거틀이 가끔은 상대방을 오해하는 관념틀로 규정되어 버리기도 한다.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이 소통방식은 서로에 대한 이해준거틀로 인식되지만 가끔은 뒷맛이 찝찔해지기도 한다. 이유는 이러하다. 관념화된 개념은 무의식중에 상대방을 규정해 버리기 때문이다. 이해의 최소단위가 때로는 관념으로 변질되어버리기도 한다는 사실. 이러한 사실은 외모로 상대방을 판단해버리는 것과 비슷한 방식이다.

 

예를 들면 몇학번이냐는 대학생이라는 기본 전제를 깔고 접근하는 질문인데 이 질문은 대학내의 문화에서 익숙한 질문이지만 다양한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만난 이들과의 질문으로는 실수가 될 수도 있는 접근방식이다. 그 안에는 여러가지가 내재해 있다. 이건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부족해서이기도 하지만 가끔은 문화의 차이에서 근거하기도 하는 문제이다. 또한 나이의 많고 적음을 통해 관계를 규정하는데 이는 나이 많은 자에 대한 예의를 갖추어야 하는 한국사회내에서는 수평적 관계보다는 수직적 서열화로 관계를 규정함을 암시하는 기준이 되는 위험한 질문이기도 한 것이다.

 

관념적이라거나 정체된 것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몸서리쳐지게 싫어하는 경향이 내게는 있다. 그건 직업의 특성에서 비롯된 것인데 틀을 만들어 자신을 가두기보다는 끊임없이 틀거리를 넓히고 깨어 버리는 사고의 열림이 새로움을 창조해내는 자로서의 자세인 것 때문이다.

 


이런 내게 끊임없이 자신을 시험에 들게 하는 주제가 하나 있다.
“나이”에 대한 사고이다.
나이에 맞는 사고나 행동, 나이에 맞는 사회적 위치, 나이에 맞는 선택 사항들..

“나이에 맞는 것”이라는 합의된(관념화 된) 틀과 “그게 뭔데”라는 것의 의심, 즉
나이먹음은 가끔 심리적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끼는 반면 두려움 또한 포함한다.
내게 두려움의 연유는 간단하다. 40살이 되면 나이에 맞는 얼굴을 갖고 싶은 욕망, 나 스스로 만들어 둔 미래의 상과 타인이 바라보는 나에 대한 평가에 대한 줄타기.

 


나이에 맞는 사회화된 관념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바뀌어야 한다.


일정나이가 되면 대학가고, 취업하고, 결혼하고, 아이낳고, 사회적성공을 이루어야 하고, 일정정도의 안정된 자산을 지니는 등등의 일반적 사회관념이 존재한다.
내가 가진 욕망과 사회화된 관념은 끊임없이 줄타기를 한다.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는 나의 욕망의 구현이기도 하지만 타인에, 사회안에서 이루어진 보여지는 욕망이기도 하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내가 행복해야 한다"에 촛첨을 맞추어 사고하려 한다.
삶의 질을 이루는 구체적 요소들은 무엇일까.
남들이 얘기하는 삶의 질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고 내가 좋아하는 행복의 조건들.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잡을 수 없는 그 무언가에 대한 욕망들로 인해 끊임없이 불안해했다. 지금도 그러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다.

불안의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핵심은 “나이주의”이다.
내가 그리는 모습의 역할모델을 해준 이가 주변인중에, 사회가 내게 보여준 적이 없다.
그건 서글픈일이다.
내가 만들어가고 새로운 것을 구축해야 함을 얘기하는 것이다.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 간다는 것은 외로움과 고독과의 지난한 싸움의 과정이다.
누군가 만들어둔 길은 적어도 안전함을 보장한다. 위험수위가 낮아짐을 얘기한다.
하지만 재미가 없다. 지루하다. 내게 맞는지 영원한 Question이다.
내게 맞는지 맞지 않는지 나만의 길을 통해 깨지고 터지는 위험과의 투쟁이 기다릴 지언정 누군가 나의 뒤에서 안전함을 느낀다면 그것만으로 행복하지 있을까? 혹시라도 혼자만의 길이 될지언정 스스로 만들어둔 길에 대한 소중함과 성취감을 느낀다면 아마도 행복할 것 같다.

 

 

나이주의에 대한 극복. 그건 내가 행복해지는 길이다.

그리고 상대방을 다양하게 이해하는 길이다.

 


나이주의를 극복하는 길은 상대방을 이해하는 방식을 다양하게 만들어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학번이 몇 이세요?”라는 질문 대신에 “좋아하는 게 뭐예요?”라는 질문부터 한번 던져봄이 어떨까? 나부터 말이다. 나 스스로 반성중이다.
내 안에도 관념을 거부하는 인자와 익숙해진 습관화된 형식이 오롯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두 팔을 벌려 높이 꼿꼿하게 기지개를 켠다.

나만의 방식으로 행복해져야 함을 다시 한번 깨우치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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