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분류 전체보기

<엘 워드 L word>시즌2

네이버 블로그에서 가져옴

 

 

L-word의 L의 의미는 LA’를 비롯해 ‘Love’, ‘Lesbian’, ‘Lust’의 중의적 뜻을

내포한다고 한다.

 

멋진 직업을 지닌 멋진 스타일의 멋진 언니들의 이야기.
단지 특별함이 있다면 그들의 성정체성이 동성이라는 사실뿐.

 

시즌2를 즐겨보고 있다.

시즌1때만해도 생소함때문이었을까 가끔 채널에 맞춰지면

그냥 한번 보는 정도. 것도 오래보지 못했던듯...

 

시즌2를 보면서 시즌1을 진중히 보지 못한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보니

딱하나였다.

"생소함".

<퀴어애즈포크>라는 게이드라마가 있었는데 그 드라마를 보면서 느꼈던 묘한
특이함이 있었다.

이건 별나라 얘기였던 것이다. 그냥 생소했다.

특별할 것없는 공간이지만 특별하게 보였고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었지만 달라보였다.

그들만의 생활과 그들만의 세계.

지상에서 여자들만 존재하고 게다가 다들 멋지고 쿨하기까지하다.

관계의 맵을 분석하다 보면 그녀들의 쿨함은 절정에 이른다.

 

주변친구들의 연인관계를 맵의 형식으로 만들어둔 관계의 맵(?이건 그냥  임의로 지칭)에서

보여주듯이 그녀들의 사랑은 돌고돈다. 한사람에게 정착하는 이들은 드물다.
가장 중심엔 셰인이 보인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겉으로 보기엔 왠지 모호한 캐릭터.
톰보이라는 명칭만으론 많이 부족해보인다.
겉모습만 보면 깡마르고, 짧지만 스타일리쉬한 헤어, 약간 건들거리는 걸음걸이,
허스키하면서도 약간 반항적인 목소리, 짙은 스모키 눈화장.

아름다운 여성이지만 남성의 반항함 게다가 한사람에게 엮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
이 모든 조합이 오밀조밀 섞여 묘한 매력을 풍기는 캐릭터. 그게 셰인이었다.
모든 여성들이 셰인을 원했지만 그녀를 잡을 수는 없었다.
잡을수 없는 신기루처럼 신비의 캐릭터 셰인은 정말 달랐다.
"무엇때문에 그녀에게 이끌리는 것일까?"
이 질문은 시즌2의 유일한 남성 마크가 던져준다.
똑같은 질문을 시즌1을 보면서 나또한 항상 했던 것같다.
풀리지 않는 답안지를 들고 전전긍긍하는 수험생처럼 말이다.
왜지?
시즌2에서 해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것 같다.
물론 그녀를 이해하는 근거가 보이는 정도이지만...


시즌1(매회를 섭렵한건 아니지만..)이 화려하고 내밀한 그녀들의 스타일에
중점을 두고 그려냈다면
시즌2는 한단계 더 나아가 캐릭터의 입체성을 부여하며 내러티브의 깊이를
첨가한 것 같다.
말못할 어두운 과거가 드러나는 가하면 자라온 환경, 가족관계를 통한
개인사를 보여줌으로서 각각의 캐릭터가 지닌 배경을 이해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시즌1이 개인의 스타일과 관계의 복잡함을 통해 게이의 삶을 단면적으로
보여주었다면 시즌2는 과거의 해체를 통해 그녀들의 현재를 설명하면서
레즈비언의 삶이 특이할 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며 내러티브를 보편화한
듯하다.
그녀들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는게 가능해지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재미와 흥미를 더 끌어당기는 요소가 된 것이다.

 

 

여성스러운 긴머리를 자르며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표면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제니는 글쓰기에 몰입하면서 과거의 진실이 보인다. 몽환적이며 어둡고
불안정한 내면을 지닌 그녀는 과거 남성집단으로부터 강간을 당한 경험이
드러나며 그녀의 성격을 이해하는 하나의 단초를 마련해주고
간혹 그녀는 남성들에게 공격적이거나 방어적 행위를 취하는데 그에 대한
심리적 근거를 제공하는 듯하다.
또한 벳은 연인 티나와 법정공방까지 직면하며 어려운 시간을 보낸다.
재단의 후원을 받아오던 갤러리는 돈줄이 끊어지는가 하더니 후원자로부터
티나를 뺏기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게다가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안 후 서먹하게 지내던 아버지와의 조우는 곧
아버지와의 이별로 이어진다.

아버지가 쓰러진 후 벳과 언니인 키트는
자신들의 일이 소홀해지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지극정성으로 아버지를 간호한다.
하지만 그녀들의 아버지는 딸들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 난 너희들이 날 간호하기 위해 일을 그만두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어떠한 상황이 오더라도 일을 그만 둬서는 안된다."
멋진 아빠다. 암투병으로 정신이 혼미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나약함을
보이지 않으려는 강한 아버지의 모습이 가끔은 지나치다 싶지만
자식들에게 피해주지 않고 세상으로부터 강하게 살아가길 원하고
강하게 살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지혜로운 아버지였다.
그에게 임종이 다가왔을때 침대 양쪽으로 아버지의 손을 잡고
침대에 머리를 파묻으며 눈물흘리는 두딸의 모습은 그래서 더 가슴아프게
와닿았던 듯싶다. 나또한 내아버지를 생각하며 딸의 심정으로 침대에
머리를 파묻었던 것 같다.

가장 감동적인 측면은 그녀들의 우정에 있다.

그녀들의 네트워크.
친분과 애정의 끈으로 연결된 그들의 네트워크는 견고해보인다.
벳, 티나, 셰인, 제니 그리고 시즌2편에 연결된 앨리스와 데나.
그들은 친구에서 시작하여 연인으로 발전하고 다시 연인에서 친구로
바뀌어 만들어진 네트워크이지만 우정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견고한 관계를 유지한다.
파티에 같이 참석하는 것은 기본이고 서로가 힘들때 그들은 서로 항상 옆에 있다.
때론 집단으로 때론 개인이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힘이되는 친구로 기능한다.


시즌2에 등장하는 유일한 남자 주인공은 마크이다.
셰인과 제니가 집세를 위해 찾은 동거인으로 마크를 받아들였으나
마크가 그녀들의 집에 들어온 이유는 몰래 카메라를 설치해서
레즈비언의 섹스비디오로 돈을 벌려는 나쁜목적이었다.
하지만 마크는 그녀들의 삶을 관찰하며 그녀들의 삶을 이해하게 된다.
호기심과 돈벌이를 위한 방편으로만 시작한 레즈비언의 욕망보고서에서
그녀들을 이해하는 다큐멘터리로 촬영목표가 바뀌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마크의 심리적 변화는 돈도 친구도 잃게 만들지만 레즈비언 친구들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 하나.
이성애자인 마크가 셰인을 바라보는 마음이다.
셰인이 동성애자인지 알고 있지만 마크는 몰래카메라를 통해 그녀의
숨겨진 내면을 이해하게 되고 그녀에게 빠져드는 듯하다.
아직 이성의 감정으로 발전한 것인지는 확실하게 보여주지 않지만
앞으로 마크와 셰인의 관계가 궁금증을 유발한다.
셰인이 바이섹슈얼로 상징된바는 없다. 그러므로 발전가능성은 많지 않다.
둘의 관계가 궁금한 이유는 아마도
내가 이성애자로서의 관점에서 드라마에 심취한 때문일꺼다. 홍홍..

 

 


여하튼
그녀들의 우정이 부럽다.

 

 

p.s

미국내에서도 동성애자 배우들의 커밍아웃은 쉽지 않은 현상이다.

동성애자로서의 차별은 헐리웃에서도 여전하기 때문이겠지. 

벳역의 제니퍼 빌즈는 일찍이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한 배우이다.

 

배우들이 실재 레즈비언일까라는 질문은 어리석은 것이었다.

 

특히나 시즌1에서 키트에게 애정공세를 펴던 켈리린치라는 배우는

마초적 분위기를 풍기는 레즈비언(부치butch 레즈비언커플 중 남자의 역할)으로

등장했었는데 모델로도 활동했던 기억을 지니고 있었던 지라 

그녀의 연기변신이 놀랍게 다가온적이 있다.

 

 

 

 

셰인역의 케이트 모이닉은 기네스 펠트로의 사촌이라고 한다.

그녀는 현재 헐리웃에서 동성애자로 의심받고 있다나 어쩐대나...헐...

넘 멋지다!

 

 

 

 

시즌별 음악은 모두 좋다.

시즌2 음반 (naver 음악서비스)

유료서비스라 곡의 전체를 듣지는 못한다ㅠ_ㅠ;;

기회되면 CD를 구매하고 싶다~

 

현재 미국내에서는 시즌4가 끝나고 시즌5를 준비중이라 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스틸 라이프 still life> 지아장커 감독

씨네21에서 이미지 가져옴

 

 

외줄을 타는 인생.

 

 

앞부분의 15분정도는 늦게 도착한 이유로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극적전개가 거의 없는 시종일관 평이한 네러티브때문에

앞부분을 놓쳐도 전체이야기를 따라가는데는 아마도 어렵지 않았던듯하다.

 

 

영화제목은 낯설었지만 지아장커 감독의 영화라는데 무조건 선택해버렸다.

어두운 극장을 들어서면서

많은이들이 "이게 무슨 재미야?"라고 평가받을 가능성이 높은 영화로

화려한 볼거리(스파이더맨3), 아름답고 전문적인 배우(조니뎁이 나오는 캐러비언의 해적3)

없이 2시간을 만들어내는 이런 류의 영화를 선택하는 이들은 많지 않을 꺼라 생각했다.

나의 예상은 크게 빗나가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화문 제2극장의 좌석은 얼추

들어차있는 듯했다.

 

 

중국의 현실과 현재의 한국.

장이모감독 왈 " 현재 중국을 가장 아름답지 않게 보여줄줄 아는 감독"이라는 평이

적당하다는 생각.

상하이나 베이징은 전세계의 자본이 넘쳐나는 투자로 선진국 도시를 빰칠만큼

멋드러지게 포장해두었지만 도시만 살짝 벗어나면 60년대 한국을 연상할만치

발전의 격차가 뚜렸한 중국.

가장 역동적이고 가장 빠른시일내에 발전하는 중국의 이면에는

누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를 보여주는 가장 현실적인 영화.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아름답게 살아가는 인간들, 성실하고 충직한 국민들이

주는 감동..이 영화를 보면서 이런 평가는 사치다.

 

소수의 특권층은 대낮에도 한가롭고 여유롭게 춤을 추고

밤에는 멋드러진 교각의 야경을 즐기는 아름다운 삶이 존재하지만

대다수의 인민들은 살아온 터전을 버리고 쓰러져가는

허름한 교각의 귀퉁이 또는 움막같은 텐트에서 임시거처를 마련하며

교각을 세우고 만드는 노동의 댓가로 받은 저임금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몇백년을 거슬러 흐르던 아름다운 강과 산은 댐을 세운다는 명목하에

흉물스런 빌딩들과 함께 물속으로 가라앉을 처지에 있고

그안에는 빌딩을 허물어 일당을 받으며 하루를 살아가는 이들이 존재하고

가족이 함께 살아가기에 임금은 충분하지 못하며

살아갈 터전을 잃은 이들은 끊임없는 줄을 이루며 여기저기 뿔뿔이 흩어진다.

 

 

영화속 대다수 중국인민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온전해보이는 가족은 없다.

가족은 해체되고 하루하루는 그냥 먹고만 살기에 급급하다.

10대의 소녀는 교육받는 혜택을 누리는 대신 하녀라는 직업을 택하거나

또는 성장하여 몸을 팔거나한다. 남성들 또한 노동을 팔거나 갱단의 똘마니가

되어 하루살이 목숨으로 연명하는 상황이 현재 중국인민의 삶의 일부다.

부부간에도 돈벌이를 위해서라면 이혼이라는 극한을 선택해야만 하고

인간을 사고 파는 행위 또한 서슴지않고 행할만큼 인간성의 황폐함이 횡행한다.

자본가는 돈벌이만 생각하고 노동자의 손이 잘려가건 상관없다.

번쩍번쩍 빛나는 대리석 빌딩에 폼나는 자가용을 몰고 다니는 라이프스타일이라면

아내랑 이혼이 대수이겠는가....부부가 돌아서 헤어지는데 서로 한번도 돌아보지

않는다는 설정은 내게 씁쓸함과 동시에 안타까움이었다. 

도시의 발전과 경제의 성장만큼이나 인민들의 삶또한 빠르게 빈민층으로

흡수되는 듯하다.

여느 자본주의 국가 못지 않은 일들이 시장경제를 받아들인 사회주의 국가 중국내에서

매일매일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 현재 중국의 현실이라고 지아장커는 얘기한다.

 

 

담배, 술, 차, 사탕

4개의 챕터로 나누어 보여주는데 "4가지만 있으면 살아간다"는 중국인민들의 소박한 삶은

결코 그것만으로 현재 중국인민이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을 역설하는 것같다.

인간의 행복을 국가가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한다.

 

오래된 노동끝에 동지들끼리 모여 마시는 술한잔으로 하루의 시름을

달래는 그들에게 내일의 아름다운 미래가 보이기는 하는걸까?

오늘날 한국. 점점 양극화는 심해지고 돈없으면 교육조차 평등하게 받기 어려우며

비정규직이 넘쳐나고 불안정한 노동환경..

2만불 소득의 한국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우리의 행복지수가 과연 얼마나 될까?^^;

 

 

잼나는 장면1

누구나 가지고 있는 핸드폰

먹고 살아가는 수준은 남루하지만 21세기 커뮤니케이션의 첨단 "핸드폰"은

누구나 하나씩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시종 늘어진 런닝패션으로 일관하는 주인공이 바타입의 노키아폰을 쓰는 상황은

왠지 엉뚱하게 느껴졌지만

핸드폰이 가진자의 전유물이 아닌 중국인민의 필수품이라는 사실은 현대화된

삶을 표면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감독의 의도인 듯하다.

확실한건 핸드폰 기업의 대단한 마케팅능력을 확인했다고나 할까...흐흠...

커뮤니케이션 도구를 다수가 사용하더래도 가족은 여전히 연락이 닿지않거나

연락하지 않거나 이지만 말이다.

현대인의 고립을 핸드폰이 도와주거나 방해하거나...아니.. 인간의 고독은

제3의 대상이 아닌 인간들 자체의 문제인가보다.

 

 

잼나는 장면2

SF적 표현방법

일상적인 배경뒤로 갑자기 하늘에 UFO가 등장하는가 하면

조각상이 갑자기 불을 내뿜으며 하늘로 떠오르는 장면은

황당 퐌타지였다.

현대적 중국의 생활방식을 드러내는 후현대화(postmodernization)라고

감독은 얘기했지만 장르의 파괴는 엉뚱하면서도 소킹한 방식이었다.

저렴한 제작비땜에 어쩔수 없이 유치찬란한 컴퓨터그래픽을 사용한

<녹차의 맛>이라는 일본영화에서 느꼈던 단순한 형식이 주는

새로운 감흥이라고나 할까. 오히려 형식적 완성도는 높으나

깊이라고는 없는 내러티브를 지닌 헐리웃 영화들 보다는 훨씬

휼륭한 영화 제작방법이라고 생각되어졌다. 

 

 

 

평론가 정성일씨는 마지막 장면이 자신이 본 영화들중 최고라는 극찬을 했다.

그가 느꼈던 벅찬 감흥을 나또한 같이 느끼지 못했음에 살짝 좌절했지만

중국을 냉정한 시선과 현실적인 방식으로 보여줄줄 아는 지아장커 감독의

재능을 보았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해야 할 것 같다.

 

위의 두가지 재미땜에 추천 한방 날려본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빛을 향하다_<밀양 Secret sunshine>|

미갱님의 [밀양 Secret sunshine] 에 관련된 글.

스포일러성 짙으요^^

 

밀양, 비밀의 빛.

 

찬란하게 빛나는 하늘은 눈이 부실만큼 아름답다.
그 빛을 향해 달리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감독은 첨부터 밀양의 의미를 던져준다.
하지만 송강호가 연기하는 종찬의 답변이 더 걸작이다.

"우리가 무슨 뜻보고 삽니까? 그냥 사는거지예"

 

인생은 그렇다.
희노애락이 모두 인생안에 있다. 무엇이든간에 그냥 살아가야만 하는거다. 멈출수 없으므로...

 

 

 

 

 

 

신애는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권력의 생리를 잘아는 인간형이었다.
그러면서도 대놓고 속물처럼 구는 종찬에게는 쓴소리를 내뱉는다.
하지만 그녀또한 속물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을 우습게 보지않게 하기위해서 거짓으로 돈많은 부자인양 행세했던 것을보면말이다.

 

큰 고통을 겪은 그녀지만 그녀는 자신의 고통이 드러나지 않고 새롭게 살아가길 원한다.
그녀의 바램은 너무나 큰 희망이었던 걸까?

자신을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와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지만 공동체적 성격이
강한 소도시에서 프라이버시는 별로 허용되지 않는다.
자신의 과거에 대해 어느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지만 역설적이게도
밀양의 주변인들은 새로 이사온 외지인인 그녀를 안쓰러워하며 동정의 손길을 뻗친다.
동정이 아닌 인간적 관심이기도 했겠지만 그녀는 그걸 원치 않는다.

동정받지 않고 더 강하게 보이기 위해 아니 공동체안에서의 자신의 자리를
확립하기 위해 그녀는 거짓말을 선택한다.
그녀의 거짓말은 그녀를 향해 부메랑이 되어 꽂힌다.
자신의 아들을 죽인 학원장과 경찰서에서 대면하는 순간 움찔하는건
그녀의 양심이었을 것이다.
찢어죽여도 시원치않을 살인범에게 욕을 퍼부었어야 하는데
그녀는 양심때문에 망설였던 자신을 꾸짓는다.
아들의 장례식장에서 그녀는 울지도 못한다.
그녀의 고통은 울지 않는다고 보이지 않는가.
넋나간 신애의 모습을 보면 통곡하며 우시는 할머니보다 더 처절해보인다.
그런 마음을 종찬은 잘알고 이해해주었다.

 

 

 


극중 종찬의 역할은 정말 눈물날정도로 아름답다.
이런 사랑이 또 어디있을까싶다.
이창동감독이 송강호라는 배우를 쓴데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는 듯하다.
외모나 표현방식에는 신애라는 여자가 거들떠보지도 않을만큼 볼품없지만
그의 진심은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인내한다.
사랑에도 이기심과 현실적 계산이 요구되는 현대사회에서 종찬이라는
남성은 그 모든걸 극복하고 자신의 사랑을 지키는 것으로 보인다.
눈물겹도록 사랑스러운 캐릭터는 아니더라도 눈물나게 찡한 사랑임에는
틀림없다.

 

 

 

 


신의 존재에 대한 무거운 주제가 도사리고 있는 영화이지만
영화는 그렇다고 종교에 맹신한다거나 신의 존재를 긍정도 부정도
하지않을만큼의 거리를 두고 접근한다.


신애는 고통에 못이겨 어쩔수 없는 심정으로 교회를 찾아 장례식에서 울지못한
울음을 터트린다. 그런데 그녀스스로도 생각지 못한 신의 평안함을 그곳에서
느끼게 된다. 이후부터 그녀는 사람들에게 신의 경험을 얘기하며
마음의 행복을 찾았다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정말 그녀는 고통을 버리고 행복을 맞보았을까?
혼자서서 게걸스럽게 점심을 해치우는 모습이나 아들의 환영을 보는 듯한
그녀의 모습은 제정신이 아닌듯해보인다.
살인자에 대한 용서로 인해 신애는 구원을 얻고자 한다.

얼마전 히말라야를 등반하는 소설가와 교수일행에 대한 다큐를 보았다.
소설가 박범신은 히말라야를 찾는 이유가 자기안의 신을 찾기위해서라고 했다.
신은 자신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신애는 알지만 그것이 살인자의
마음에도 존재할 것이라는 것을 미쳐 인지하지 못한것이다.
 
신은 불공평했다?

피해자인 자신은 아직도 불행하고 괴로운데 가해자인
원장은 신에게 먼저 용서를 받고 더없이 행복해보이는 표정으로 자신을
맞이하는 것. 그녀는 그런 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보다 악인을 먼저 용서한 신을, 자신이 용서하기도 전에
악인에게 먼저 용서해버린 신이 원망스러웠던 것이다.
그녀에겐 원망의 대상이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살인자에게서
그를 용서해버린 신에게로 전이되었던 것이다.

신애는 신을 향해 "네가 틀렸다"라는 것을 증명해보이고 싶어한다.

 

 

하/지/만
전두환같은 인물이 아직도 멀쩡히 잘먹고 잘살며 멀쩡하게 후세를 거느리고 있는
작금의 현실을 볼때 세상은 항상 정의의 편에 있는 것이 아니듯이....

그녀에게 신은 불공평한 존재였다.

 

가해자에 대한 용서는 살아가는 것만큼 어렵다.
고통을 견디지못해 자신을 자해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삶을 붙잡는다.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자들에게 돌팔매를 던지기도 하고
신의 구원을 끊임없이 부정하기도 하지만
결국 그녀는 자신의 고통을 허물없이 드러내고야 만다.
"살려주세요. 제발..."

 

 

 


타인(가해자)에 의해 어긋난 머리카락을 신애 스스로 자르며 길이를 맞출수 있도록
올곧게 거울을 잡아주는 종찬의 모습을 뒤로한체 카메라는
빛의 한조각을 비추며 끝을 맺는다.

빛을 향했던 그녀는 구원받을 수 있을까?

종찬이라는 인물이 있어 그녀는 미래의 희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종찬은 그녀가 자신을 잃지 않고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두발짝 뒤에서 항상
그녀를 떠받치고 있을 것같다. 고장난 차를 고치듯 신애의 마음도 새롭게 해줄수 있을까?
그녀는 사랑으로부터 빛을 찾을까?

카메라의 처음시작은 하늘에서, 마지막은 땅에서 시선을 멈춘다.
진실은 변함없으나
인간이 바라보는 곳에 따라 천국이 될수도 지옥이 될수도 있다는 의미일까?

 


그냥 잡생각?
이창동감독에게 음악은 멜로디로 이해되기보다는 가사로 이해하는 듯하다.
목사의 강연을 배경으로 흐르는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라는 노래가사나
종찬의 맘을 비웃듯이 읊조리는 신애의 노래가사들을 통한 의미전달을
하는 것을 보면말이다^^
"그져~바라만 보고있지~ 그져~눈치만 보고 있지~"

잼나는건 노래방장면이 자주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한국인의 놀이문화중 대중이 가장 쉽고 잼나게 접근가능한 것이 노래방문화라는
것일까? 일상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중 마이크잡고 꽥꽥 소리치며 신나게
몸을 흔들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로의 공간이 노래방이라고 이창동감독은
얘기하는 것같다. 아니 오히려 그곳이 구원의 방인가? ^^;;



 



비밀의 빛. 즉 "삶의 희망"과 "용서의 공간"으로의 의미

바람피는 남편이었지만 그가 태어난 곳이며 살아생전 내려와 터전을 잡고싶어했던 남편의

고향. 밀양. 남편의 바램을 스스로 지켜주기위해 선택한 공간이었고 또한 아무도 자신을

알지못하는 새로운 희망으로서의 공간이 바로 밀양이었던 것이다.

밀양에 내려와 살아간다는 것은 남편의 잘못을 "용서"해주는 그녀의 자그마한 배려가

아닐까? 

"Secet Sunshine" 영문제목에서도 알수 있듯이 밀양이라는 공간적 배경보다는 제목이 주는
의미때문이 더큰 것같다.
밀양이라는 공간이 주는 특별한 의미는 없는듯하다.

소도시가 지니는 특징을 살리는 공간이라면 굳이 밀양이 아니어도 되었을 것같으니 말이다.

"밀양이 우짜다 이렇게 되었노"

라는 대사가 의미하듯이 한국전반에 퍼져있는 팍팍하고 잔인한 사회현상들.

그건 한국사회 어디에서나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전방위적인 현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건 좀 다른 얘긴데...이창동감독 자체가 화면의 유려함보다는 치장을 뺀 단백함을
보여주는 미장센을 즐겨하는 감독이라 그런것도 있겠지만

한국의 소도시의 외양은 어딜가나 비슷하게 밋밋하고 맛이 없는 것같다.

네모나고 건조한 시멘트건물이나 다닥다닥 붙어 무자비하게 화려하고 크기만 한 간판이랄지,

아름드리 나무하나없이 삭막하기만 한 강변의 주변풍광들...밀양이 아니라
한국의 소도시 풍경은 대부분 엇비슷해인다.
도시구조를 계획적으로 만들었다기보다는 그냥 개발하는데만 급급한 모습이

고스란히 보인다고나 할까.

이것도 모두 먹고살기 바쁜 개발위주의 정책을 펼치신 박정희 시대의 산물이라고
해야하지 않을런지..요즘엔 어딜가나 아파트뿐이다. 고향인 안동에도 내려가보면 아파트밖에
보이지 않는다.
몇해전 후배가 외국인 남친과 지방으로 내려가던 길에 남친이 산에 버젓이 들어선 아파트를
보고 이해할 수 없다는 얘길 들었었다.
산을 깎아 삐죽삐죽 네모나게 볼품없이 올라선 아파트를 보면서 이상하다고 느끼는건
외국인뿐이 아니길 빈다.

소도시에도 환경친화적이면서 아름다운 도시를 만드는 노력을 보고싶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밀양 Secret sunshine>

씨네21에서 이미지 가져옴

 

 

칸느에서의 상과 작품에 대한 반응은 영화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무조건 예매하고 봤다.

 

 

"불편한 고통"

 

보는내내 가슴이 미어 터지는 줄 알았다.

이걸로는 미어지는 가슴에 대한 표현력이 떨어지겠지만 영화는 2시간20분내내

고통스럽고 불편했다.

고통받은 인간이 살아간다는건 어떤것일까.

아니 인간의 삶 자체가 고통의 연속인데 인간은 하루하루의 일상을 어찌 살아가는가.

나만의 일상도 버거운데 누군가의 고통을 들여다 본다는건 불편하기만 한건가.

환타지만을 위해 영화를 보는건 아닌데 말이다.

왜 그렇게 불편했는지 생각을 좀더 정리해봐얄듯...쩝..

 

"우리가 무슨 뜻보고 삽니까~ 그냥 사는거지예"

너무나 간단한 답변인데 왜이리도 명쾌한 것일까?

 

적절히 속세의 때와 따뜻함보다는 느끼함을 던지는 얼굴이어서

현실에서 만나면 20~30미터는 떨어져 도망치고싶은 남성인 

송강호역의 종찬은 "사랑의 힘"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인물로

기대하지않았던 뜻밖의 구원자였다.

전도연이 한 인터뷰에서 극안에서 송강호선배가 자꾸만 부드럽게

만들어주었다라고 했다. 정확한 표현같다.

 

 

가장 압권인 장면.

카메라는 기도하는 목사와 신도들을 비추지만 누군가 절규하는 소리가 조금씩조금씩

들린다. 첨엔 그냥 지나쳤지만 소리는 점점 커진다.

다음화면으로 절규하는 전도연이 보인다.

그녀의 절규는 정말 처절했다. 나도 죽는줄 알았다. 그녀의 고통이 내게로 온전히

전이되었기때문이었다.

 

전도연의 연기는 경기를 일으킬만큼 몸서리쳐지게 연기한다.

영화보는내내 전도연의 연기에 도취돼 감정이입 200%였던지...

그녀의 뼈져리는 고통이 내게도 전이되어 손수건을 흠뻑 적셔버렸다.

손수건 들고 갔었길 망정이지 안그랬음 눈 퉁퉁부어 환한 영화관을

빠져나오며 대빵 쑥쓰러웠을꺼이다.ㅋㅋ

 

밀양 密陽, Secret sunshine

'비밀의 빛'

빛을 향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 <밀양>

 

오늘은 이정도 맛보기로...

영화에 대한 감상은 좀더 생각을 정리한다음 올려야겠다.

 

 

 

이창동감독에게는 살짝 미안하지만

전도연과 송강호의 연기를 위해서라도 영화는 꼭 함 봐줘야 할 것같다.

꼭 보러들 가3^^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좋아해 好きだ、>_감독 이사카와 히로시

맑고 푸르른 하늘처럼 첫사랑은 밝고 행복할까?

 

 

첫사랑의 느낌은 아련하지만 오래된다.

 

 

사람들은 일이 잘 풀리지 않을때 어떻게 할까?

유는 웃는다했다.
눈을감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자신을 생각한다는 낯선 여성의
말을 들으며 자신이 가장좋아했던 때가 언제였던가를
생각해보는 34살 요스케.
그에게 삶은 푸석하다.
매마르고 건조하다.
술자리에서 유흥업계 여성를 화제삼아 얘기하며 경험삼아 자신도

데리고 가달라고 부탁하는 적당히 속물스런 30대이지만

길거리에서 술취해 쓰러져 있는 여성을 데려다

자신의 집에서 잠시 쉬게 해주는 양심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새로 이사올 아파트는 몇달채 짐도 옮기지 않고 썰렁하게 비워두고 있다.
짐을 채우기전에는 항상 새로움이 느껴져서라는 요스케에게서
고루한 일상을 하루하루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치는 현대인의 고독이 절절히 묻어난다.


우연하게 첫사랑 유를 만난다.

영화는 2시간 내내 느리게 전개되지만 마지막 몇분은 정말 초조함의 절정이다.
성인이 된 둘의 두번째 만남은 곧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자리이다.
두번째 기회는 놓치지않으려 기타를 들고 열심히 달려가지만
이유없는 사고를 당하고 마는 요스케.
"왜.....?"
그는 쓰러져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는 가장 행복했던 순간.
17년전. 혼자 외로이 연주하던 그순간 유가 조용히 다가와 옆에 앉는다.
그둘의 첫만남이 시작되었던 그 순간이 그에게는 가장 행복했던 시절일까?

 

 

첫만남의 장면을 뒤로 병실과 유의 슬픈얼굴이 보인다.
그도 언니처럼 쓰러져 영원히 일어나지 않으면 어쩌나.
자신과의 약속땜에 그에게 사고가 나지는 않았을까를 걱정하는
듯한 그녀의 슬픈얼굴...
그녀는 그가 눈을 뜨자말자...17년전에 해야했던 대사를 내뱉는다.


"好きだ、"


일부러인지 정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요스케는 다시 얘기해주길 바란다.
여전한 버릇처럼 소리없이 입모양으로만 얘기하는 유.
잠시 침묵....

"나도...좋아해"
요스케의 답이다.



34살 성인이 된 요스케와 유~

 

 

그들의 행복은 이제 시작이다.

 



好きだ、

제목의 쉼표는 왠지 17년을 대변해서 보여주는 꼬리말같다.

 

그들이 정말 서로 좋아했는지 영화마지막에서야 밝혀지지만
2시간 내내 서로의 감정에 대해 구구절절 부연설명이 없는 영화는
첫사랑의 떨림과 순수함, 변하지 않는 사랑에 대해
조용하고 느리게 보여준다.
 
때로는 침묵과 느림이 오해를, 지루함을, 답답함을 주지만 난 이런 영화가 참 좋다.
여러가지 해석을 가능하게 하고 굳이 설명하지않아도 가슴으로 통할 수 있는
것들이 세상엔 넘쳐남을 느끼게 해주는 영화여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잠깐이지만 스튜디오에서 자신이 만든 곡을 듣고는
오래된 첫사랑 유를 발견하며 밝게 활~짝 웃던
요스케 역의 니시지마 히데도시의 미소였다.
그의 미소가 정말 좋았다.
아주아주 짧은 시간 살짝 보여주는 장면이라 그 매력을 놓치는 이가 더 많겠지만
삶에 희망도 즐거움도 찾지 못해 내내 무심한 표정에 무기력해보이는
30대 미혼남성 요스케에게
잠깐이나마 비췄던 삶의 생기가 아주 잘 드러났던 미소였기에
더 진하고 깊게 와닿았던 것같다.

 

그의 미소가 오래지속될 수 있을것같은 희망에 내 얼굴에도
미소가 살짝 떠올라있었다. 풋!...

 

 

17살 요스케. 측면얼굴이 훨씬 멋진 배우인 것같다~

 

 

사물을 보여주는 방식이 특이하다.

가령 유의 얼굴은 다양한 표정으로 심리를 드러내는 반면

요스케는 주로 측면얼굴만 보여주고 정면을 보여주는데 꺼린다.

요스케가 자신의 심리를 드러내는데 미숙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려는

감독의 의도처럼 보인다. 

 

하늘의 상태에 따라 유와 요스케의 관계를 표현하기도 한다.

맑음, 뭉게구름, 흘러가는 구름, 구름한점없는 파란하늘, 구름낀 밤, 새벽녘 하늘..

도시의 회색빛 하늘, 마지막 눈부신 태양이 빛나는 맑은 하늘...

대화하는 씬과 하늘씬을 번갈아서 보여주는 장면은 언뜻 지루하게 보이지만

이유를 알고 나면 잼나다.

 

또한 카메라가 사물을 가깝게 보여주는 클로즈업이 많다.

요스케의 눈과 물이 뚝뚝 흘러내리는 플라스틱 병, 도시의 네온사인,

잠든듯 눈을 감고 누워있는 유의 언니얼굴...등등..

상황을 부분설명하는 도구로 보여지는 듯한데

눈여겨 보면 아주 흥미로운 방식이다.

 

 

 

미야자키 아오이는 실제 17살에 <좋아해>영화에 캐스팅 되었다고 한다.

섬세한 소녀의 심리연기가 참좋다.

 

 

"기타를 처음치면 손가락이 아프지만

자꾸치면 딱딱해져서 아프지 않아."

 

상처에 대한 감독의 견해일까?

 

"기타 칠줄 아는구나"

17세 처음만남에서는 유가 요스케에게, 34살 첫만남에서는 요스케가 유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둘의 공통점은 기타이다.

 

첫사랑은 누구나 미숙하다...

 

첫키스 후 울고 있는 유.
그녀는 왜 울었을까?

 

'요스케는 조금 웃는 언니를 걱정했다'

요스케는 유와의 대화내용중 유의 언니에 관한 질문을 자주한다.
항상 요스케는 묻는다 "누나는 어때?"

"너희 언니는 고등학교때 무슨 교복을 입었어? 블라우스? 세라복?"
유는 요스케의 곡을 흥얼 거리는 언니를 보며 
요스케가 잠시나마 언니를 행복하게 해줄수 있겠다라고 생각한다.
그 둘의 만남도 연결해준다.
만남의 시간도 장소도 정해준다.

하지만 17살 요스케는 무엇인가를 물어보려고 유를 불러냈지만 아무말도 하지못한다.

요스케는 유의 언니얘기로 화제를 돌린다.
우물쭈물 행동하는 그에게 유가 첫키스를 한다.
잠시 멈추어있던 요스케는 화면에 잘려 표정이 보이지 않아
이유를 알수 없지만 도망치듯 그자리를 떠나버린다.
그리곤 유가 하염없이 운다.
자신이 왜 울었는지 유는 모른다.
가끔은 자신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때가 있다. 아니 많다.
언니에 대한 질투때문이었는지 요스케에 대한 원망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왜 울었는지는 감독만이 알거나 감독도 그냥 툭! 던져 놓고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듯이 보인다.

 

그가 나를 좋아했을까 그녀가 나를 좋아했을까?
그녀는 왜 울었을까? 그는 왜 도망갔을까? 

 

유의 언니를 걱정하고 궁금해하는 요스케를 보며

난 영화보는내내 유가 언니와 요스케의 관계를 오해하고 있었다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무말도 하지않았고 그래서 유는 그의 맘을 알수가 없었다.

하지만 유의 언니는 공통의 상처이고,
요스케와 유를 연결해주는 매개체 역할이다.

17살 유에게는 오해의 꼬투리로, 34살에는 "좋아해"라는 단어를 끌어내는

용기의 매개체였다.

또한 요스케의 17살에게는 대화를 이끌어내는 공통주제였던 듯하고

34살에는 순수한 첫사랑을 일깨우는 매개체였던 것 같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유의 언니가 사고로 쓰러져 스스로 눈을 감고 있는 것과 반대로 

요스케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스스로 눈을 뜨는 것으로 보여진다.

 

감정은 느껴지지만 오해였을수도, 진실이었을수도 있는거다.
감정을 말로 표현하지않으면 진실은 알수 없는걸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요스케의 단순하지만 아름다운 기타선율을 나도모르게 흥얼거리고 있다.

음악은 <카우보이 비밥> <메모리스> <허니와 클로버>의 음악감독 칸노 요코이다.

예고편~

 

요즘들어

일본영화가 부쩍 좋아졌다^^

 

 

뽀너스~~

좋아해 (好きだ, su-ki-da) MV  2005년

-->구글에서 검색해 찾은 뮤직비디오.

      영화는 영어자막이긴 하지만 11개 동영상으로 나눠 

      모두 올라와 있으니 함 구경하셈~

      첫키스장면의 동영상 댓글을 읽어보니 대부분 지루하다, 미숙해서 불쌍하다..한숨도 쉬고..

      반응이 넘 잼났다...서양애들 정서엔 아무래도 무리데쓰요...? 흐흠...

      그리고 마지막 "好きだ"라는 대사를 "I love you"로 번역한 걸보니 우리말의 "좋아해"와

      살짝 감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들장미 소녀 캔디>

 

 

타이틀 화면~ (네이버 블로그에서 가져옴)

 

 

 

울지않는 캔디

 

"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울어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울어
웃으면서 달려보자 푸른들을
푸른하늘 바라보면 노래하자
내이름은 내이름은 내이름은 캔디
나혼자있을땐 어쩐지 쓸쓸해지지만
그럴땐 얘기를 나누자 거울속의 나하고
웃어라 웃어라 들장미 소녀야
울면 바보다 캔디캔디야~~"

 


흐미...
이거 뭐... 울고싶음 울어야지...애답게 말야..

 

어릴때는 아무생각없이 신나게 따라불렀던 노래인데
성인이 된 지금 가사를 곰곰히 따져보니 어린이 만화인데
왜이리 음울하고 처량맞은건지. 에휴..
강인한 어린이로 밝고 맑게 자라나라는 큰뜻이 담긴 듯 하겠지만
이건 시대상에 맞게 이해해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캔디에겐 특별한게 있다.

커다란 눈망울엔 눈물가득 머금으면서 "난 울지않아 울지않아"를 외치는
외로운아이 캔디. 태어날때부터 부모님을 여의고 고아원에서 자라지만
명랑하고 강한 아이로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웃고 발랄하며
어려운일이 생기면 항상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강인한 소녀이다.

한마디로 마인드콘트롤이 대단한거다.

안티도 엄연히 존재하긴 하지만
어딜 가나 사랑받고 어딜가나 인기초절정이다.

말도 안되게 쉽게 문제가 풀리는 듯하지만(어린이 만환데 몰바래?) 

그 아이에게는 그러한 것들이 당연한 보상으로 보이는 이유,

세상을 물리칠 강인함과 독립심, 오바된듯한 긍정적인 삶의 태도라는

특별한 매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캔디에겐 응원군이 넘쳐난다.
고아원 친구 애니, 안소니 스테아, 아치 형제들, 반항아 테리에서부터
강력한 후원자 큰아버지.(알버트 아저씨?),
심지어 캔디를 납치한 나쁜아저씨도 캔디의 순수한 마음에 감동받아
그녀를 도와주고 참회한다는 스토리까지 보면 인기절정임을 실감할 수 있다.ㅋ

 


세상의 불의와 맞장뜨고 정의를 수호하는 언제나 밝고 명랑한 마음의
긍정적인 소녀. 캔디.
외롭고 슬퍼도 울지않는 캔디.

 

 

그런데...

울고있지만 울지않아를 외치고 거울을 향해 외로움을 달래는 소녀

캔디를 보고있자니   
어린아이가  왜 그리 울지않아를 외쳐야할만큼 강해져야 하는거냐고?
외로울 일은 왜그리 많고 또 슬퍼야할 일은 왜 그리 많은거야?
어린이들이 울일도 외로울 일도 그렇게 많았던 살기 힘든 세대였던 떄문인걸까?

요즘만화중에 이렇게 대놓고 슬픈 어린이만화 있나?

 

세상이 달라진걸까?

 

 

 

오마낫! 아직도 이장면이 머리속에서 아련히 남아있다^^

많은 영화나 코미디에서 여러번 패러디해 울고먹은 유명한 그 장면이지~

 

 

 

왜곡된 남성상을 키워주다.ㅋ


초등생 시절, 일요일 아침 9시마다 거진 매회를 빼먹지않고 보려고
졸린 눈비비고 일어나 동생 언니와
옹기종기 TV앞에 모여 참이나 잼나게 보았던 기억을 지니고 있는 만화.
<들장미 소녀 캔디>.

 

그 시절 즐겨보았던 만화들
<미래소년 코난> <우주소년 아톰> <은하철도 999> 대부분이
당연히 우리가 만든 made in korea인줄 알았다가 성인이 된 이후
멀고도 가까운 이웃나라의 재패니메이션
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은근 충격을 받았던...
지금 생각해보면 일본만화건 한국만화건 크게 개의치않지만
유일한 놀이문화의 안식처였던 TV만화의 영향력은
내어린시절의 감성을 만들고 키우는데 절대적?
영향을 미쳤던 듯하다. 

 

 

그 가운데 <들장미 소녀 캔디>는 많은 내 세대 소녀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남성상을 만들어 내는데 커다란 공헌을 했던 듯하다.

캔디만화안에는 몇가지 유형의 남성 캐릭터가 존재한다.

 

 

반항아, 뿌리치기 힘든 매력가이, 못된 남자의 전형 테리우스

(게다가 왠지 신비로운 계급 귀족이랜다)


순수하고 착한 우리들의 왕자님, 장미를 손수키우고 가꿀줄아는

부드러움의 대명사 안소니

(사실..현대적으로 해석해보면 게이에 가까운 캐릭터가 아닐까 싶다..ㅋㅋㅋ)


똑똑하고 배려심많고 풍부한 상상력과 창의력이 넘치는 발명품을

만들어내는 엉뚱발랄 귀여운 스테아,


세련된 감각의 깔끔남 아치, 살짝 냉정해보이지만 유독 캔디에겐 다정다감한 것같다. 


힘들땐 날 찾아라 문제해결사, 캔디에겐 키다리아저씨버전 알버트

 

이건...뭐...

이상적인 남성상 종합선물세트같다. 하나같이 매력이 철철 넘치고 캔디에게 잘한다.

지극정성이다. 애정이 넘친다. 힘들면 언제든지 달려온다.

게다가 다들 좋은 가문에 부자에다 잘생기기까지 했다. 헉... 

 

 

요즘보니 스테아가 젤루 좋더라

그의 발명품은 엉뚱하며 창의력 짱에다 귀엽기까지 하다. 홍홍~

 

 

왜 하나같이 주근깨투성이의 고아, 말광량이 캔디를 사랑해주는거야?

ㅋㅋㅋ

 


<들장미 소녀 캔디>는 소녀들에게 현실에는 존재할수도 존재하지도 않는
왜곡된 남성상을 꿈꾸게 해버렸다 흑...

2000년대 소녀들도 이걸보며 왜곡된 남성상을 꿈꾸게 될까 살짝 걱정도 된다.

 

 

하지만 그래도 이 만화가 잼나는건 왜일까?^^

 

 

<들장미 소녀 캔디>는 어린이채널을 통해 재방영 되고 있다.

여러분도 기회되면 함 만나보셈~ 



어릴적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성인이 된 지금 보면서

새로운 해석과 재미를 즐길수 있다.

스테아에 대한 참신한 매력과

캔디의 분신과 같은 존재인 너구리 "크린"의 아기자기한 표정도

재미있는 요소중에 하나이다.

특히

캔디의 심리상태를 "크린"의 다양한 표정으로도 읽을 수 있는데 이건 굉장히 흥미롭다.

캔디와 함께 잡히는 장면엔 꼭 너구리"크린"이 함께 등장한다.

많은 표정을 이미지화해서 그린것같지는 않은데도

미묘한 캔디의 심리를 조그마한 너구리가 짓고 있으니 볼때마다 신기하다.

캔디가 슬프면 같이 슬프고 캔디가 의아하면 그린도 같이 의아해하고

기쁘면 같이 활짝 웃고 있다. 너구리가 말이다~ 하하~~

 

또하나 동양인 감독의 서양인 캐릭터~

주인공 이름도 "캔디" 유치하지만 영어이름에다 배경도 미국과 영국이다.

일본만화인데 의상과 캐릭터는 서양의 문화와 외모를 그리고 있다.

재패니메이션의 특이한 경향인데 현대에도 그대로 적용해 그리고

있는 감독이 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미야자키 하야오,

<스팀보이>의 오토모 가츠히로등 저패니메이션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경향이다. 이유는 까먹었다.

정보를 좀더 들춰보고 써야지...헹헹~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하나와 앨리스>이와이 순지 식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

CF감독과 스태프들을 감동시킨 앨리스의 발레장면.

움직임이 순수함 그 자체로 표현되는 듯하다 (씨네21에서 이미지 가져옴^^)

 

 

왜 소녀일까?

 

이와이 순지 영활 보면서 남성감독이 지닌 소녀적 감수성에
의아하고 놀랐지만 <하나와 앨리스>를 두번째 보면서 잠시 느낀건
그가 감수성이 풍부하고 예민한 감성의 소유자가 아니라
혹시 "로리타 컴플렉스" 환자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켁!


내가 넘 속세에 물들었나부다 했는데 최근 씨네21에 올라온 기사중
<일본영화의 유행이 된 소녀배우들의 힘>을 읽고나니 나의 상상이
그닥 앞서간건 아니었구나 잠시 위안하기도 했다.

 




소녀적 순수함과 아오이 유우만의 엉뚱발랄함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표정이다.

 

앨리스를 연기한 아오이 유우라는 배우는 자연스럽게 소녀다운 아름다움을

영화 곳곳에서 폴폴 풍긴다.

그녀는 비오는 날 햇빛 가리개 썬캡을 쓰고 빗속에서

쿵후인지 춤인지 헷갈리는 사이코 행동을 하며 스트레스를 푸는

앨리스의 엉뚱함도,

우아하고 귀품있는 발레로도

자신을 표현해낼줄 아는 보폭넓은 다양한 캐릭터를 지닌 배우이다.
엄청 까다로울 듯한 CF감독도 발레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그녀의 진정한 아름다움에 반해
단숨에 잡지모델로 섭외해버리는 장면에서 잘 드러나듯이
소녀다운 순수함과 꾸미지 않은 자연스런 아름다움을 표현하는데
앨리스라는 캐릭터의 힘도 컸겠지만 아오이 유우라는 소녀배우의 외모와 성격이
더 큰 힘을 발휘하는것 같다.

앨리스라는 특이한 캐릭터의 생명을 아오이 유우가 잘 불어넣은 것이다

 

 

먹는모습이 이렇게 이뻐도 되는거니?^^

 

 

요즘 뜨는 단어가 "존재감"일 것이다.
최근 씨네21에서 "아오이 유우의 은밀한 매력" 이라는 기사로 그녀를
분석했다.
기자는 그녀가 남다른 존재감을 지닌 배우임을 눈치채었고

더 일찍 발견한 이는 이와이 순지 감독이다.

 

이와이 순지는 그녀(들)를 통해 자신이 표현하고자하는

아름다움의 가치를 드러낸다.

앨리스의 미소는 순수함의 자체발광이다.
아오이 유우는 세련되게 꾸며서 아름답거나, 완벽한 이목구비의 미인형은 아니나
상대방을 바라볼때 이유없이 쌩긋웃는 그녀의 미소는 천만불 가치 그 이상이다.
의도하지 않은 그녀의 웃음을 보면서 화를 낸다거나 미워할 수 없음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또하나의 매력은 자연스러움이다.

선배와의 첫데이트중에도 케익을 맛나게 먹어치우는 앨리스의 모습은

나도 스크린에 뛰어들어 케익을 뺏어먹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정말 맛있고 귀엽고 예쁘게 먹는다.

먹는 모습을 이렇게 다양하고 잼나며 자연스럽게 아름다움으로

끌어내는 배우는 드물 것 같다.

 

아오이 유우,

배우로서도 한명의 인격체로서도 이 매력들, 오래오래 간직하기 희망한다~

 

 

 

소녀들의 우정과 10대 성장기를 그린 영화이다.

하지만 이와이 순지 식 순수함이 영화의 생명이다. 

 

<하나와 앨리스>안에는

10대시절 친구와의 따뜻한 우정, 속세의 때가 미치기전의 순수한 인간성,

전통적인 가족의 의미, 남녀간의 아기자기하고 이타적인 사랑 등

다양한 형태의 인간관계가 보인다. 

쌩뚱맞지만 참 잼나는 장면이 하나있었다.

영화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듯한 '아톰'의 등장이었다.

학교문화제중 하늘에 둥둥 떠다니는 아톰 풍선인형은

이와이 순지가 보여주고자 하는 바가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로봇. 아톰.

로봇과 인간 세계사이에서 인간처럼 고뇌하는 마음을 지닌

인간적인 로봇, 아톰을 스리슬쩍 보여줌으로 인해

그는 간접적으로나마

'인간성에의 회복'을 주장하는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인간관계의 가장 근원적인 토대, 휴머니즘을

순수하고 자연스러움으로 표현해내고 싶었던 듯하다.

 


하나와 앨리스를 보면서 "에고~~이뽀이뽀"를 연발한다~
내가 늙긴 늙었나보다.
선생님들이 학창시절 "니들은 젊어서 이쁜거야"라고 하는 말이

가슴에 사뭇치도록 실감나니...

10대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므로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걸까?

 

이와이 순지도 그걸 못내 그리워하며 

잔인하고 이기적이며 약아빠진 세상에게 호소하는 듯하다.

 

그 시절을 잊으셨나요?

 

 

 

정교하고 세심한 구조

 

앨리스가 40대 중년의 남성과 어색하게 데이트하는 장면이 있다.

원조교제가 사회현상의 하나인 일본에서 중년의 남성과 10대 여학생의 만남은
둘관계가 정상적이지 않음을 먼저 의심하게 했다.
앨리스가 아빠라는 호칭을 마지막 헤어질때 하지않았더라면
왠지 둘은 원조교제 분위기였다. 사회적편견과 풍조를
이와이순지는 교묘하게 비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여간 둘은 자식과 부모관계임에도 왠지 어색하다.
둘의 만남은 정기적인듯하나 아주 오랜만에 만난 듯 어색하다.
자연스럽게 던진 한자교육에 대한 대사가 자식에 대한 부모의 애정이
묻어나는 매개체가 되고 친구의 부탁으로 만나게 된 남자친구와의
연결고리로 이어지기도 한다.
어릴적 행복했던 시절의 상징인 하트스페이스는
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자연스럽게 남자친구에게로
연결시켜주는 매개가 된다.

 

다소 엉뚱한 상황설정으로 부모의 애정과 남녀의 사랑을 연결하는
내러티브가 아주 기발하며 섬세하고 잘짜여진 씨줄날줄같았다.

 

 

셋은 남자친구(선배)의 기억을 떠올리려 바다여행을 택한다.

앨리스는 행복했던 어린시절을 떠올리게 되고, 선배는 자신의 기억상실증이

하나와 앨리스가 꾸민 사건임을 눈치챈다. 선배를 두고 하나와 앨리스의

애정싸움이 살짝 드러나는데 삼각관계도 애들답게 귀엽다.

문제해결방법이 억척스럽고 무섭고 강하면 이와이 순지 표일 수 없다.

 

 

감성적 시선

 

가장 뭉클한 시점은 첫번째 보았을때도 두번째도 같았다.

 

붐비는 지하철에서 앨리스가 아버지와 헤어지며 묻는다.
아까 아버지가 가르쳐주었던 "워아니"의 뜻이 무엇이냐고..

"사랑해요"라는 아버지의 답이 끝나자말자 

아버지를 향해 "워아니"라고 담담하고 부끄러운듯 소녀답게 얘기한다.
아버지는 여느 잔소리쟁이 부모들처럼 웃으며 답한다.
"그럴땐 짜이찌앤(다시만나요)이라고 하는거야~"
라고 가르친다.

이건 동양의 부모들이 자식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사랑한다를 외치는 적극적 표현방식에 익숙하지않은
수줍고 무뚝뚝한 듯한 동양부모의 애정표현방식..
하지만 그안에는 무한한 사랑이 묻어나는
부모의 따뜻함..그러한 사랑.
사랑하는 아버지와 일상을 함께 하지 못하는 앨리스의
외로움과 슬픔.

이런것들이 드러나서였을까.
두번다 눈물을 찍!

 

 

이와이 순지영화가 참 좋은건 순수하고 아름다운 따스함을
현실적인 성인이 된 지금도 아련하고 부드럽고 유머러스하게 느끼게 해주어서인것 같다.

 

등교길 만남. 하나와 앨리스의  귀여움과 개성이 잘 드러난 행동이다.

 

 

 

 

피에수:

최근에  이누도 잇신 감독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라는

영화를 우연하게 보게 되었다. 

한때 작은극장에서 영화팬들의 열화와 같은 사랑으로

재개봉의 영애까지 안았었다고 하는 이 영화를 난 이제서야 접했다.

늦어도 너무 늦었지만..쩝..

최근 잠자고 있던 세상에 찌들고 여리디여려 사라져버릴뻔한 나의 감수성을

스물스물 깨어나게 한 상콤한 영화였다. 이누도 잇신 감독의 영화를

찾아찾아 더 보고싶은 열망마져 생기게 만들만큼 영화의 신선도와

묘한 매력이 나를 사로잡았다.

조만간 이 영화 포스팅을 끊어버리라는 작은 희망을 품으며....접는다.

 

조제를 세상밖으로 보내준 사랑스런 츠네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도쿄타워>_한곳을 바라보다

씨네21에서 이미지 가져옴.

 

 

사랑은 한곳을 바라보는 것.

서로 다른 공간에 서 있더래도 한곳을 바라보면 언젠가는 만난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 그것도 연상유부녀와 연하남의 열정적인 사랑얘기.
왠지 진부할 듯한 상황인지라 그닥 흥미를 느끼지 못하였지만 친구와의 대화도중 나온
<도쿄타워>는 한번정도 봐주어야 할 목록으로 바뀌어버렸다. 연상연하커플이라는 유행의 흐름을 미디어가 확대재생산하는 상황에서 어쩐지 연상녀의 나이로 접어든? 본인으로서는 얘기꺼리를 위해서라도 봐야만 할 듯했다^^

 

 “사랑은 하는 것이 아니라 빠지는 것이다”
토오루는 어린나이에 비해 진지하다. 가지지 못하는 사랑이라는 절박함때문일까? 아니면 진심을 다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아름답고 성숙한 여인이어서일까? 토오루는 유부녀인 그녀에게 아주 헌신적으로 사랑한다.


유명한 CF감독인 시후미의 남편. 부인의 불륜사실을 알고도 모른척한 그는 세상에 부인의 불륜사실이 알려졌을 때 그때서야 상대방 남성인 토오루와 대적한다. 수영장 풀 저 높은 다이빙대에서 둘은 마주한다.
시후미에게 토오루는 고급스런 장난감에 지나지 않는다며 그녀가 아직은 자신에게 필요하다라고 외친다. 그런다음 수영장안으로 코오지를 밀어버린 후 크게 소리친다.
“사랑은 빠지기만 해선 안되는 거야”

 

그녀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라...

자신만이 그녀가 원하는 고급스런 라이프스타일을 줄수 있고 그녀또한 자신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다는 역설적 대사였을까? 아니면 사랑에 대한 불안한 자신감때문이었을까?

결혼은 사랑으로 유지되기 어려운 것일까?


사랑의 결실인 아이를 낳고 키우며 책임을 다하는 동안 사랑은 남녀만의 사랑이 아닌 인간적 유대와 견고함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을까?
남녀가 만나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아기르는 시스템을 남녀관계의 좀더 진화된 매카니즘이라고 미국의 한 사회학자는 설명한다.
의학적으로 사랑은 3년이라고 했다. 일반적으로 1년정도가 가장 열정적인 시기라고 했다.
사랑은 가슴이 아니라 뇌의 호르몬 작용일뿐인데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시후미는 남편과 헤어진 후 토오루를 찾아 프랑스로 향한다. 

토오루가 머무르는 하숙집의 중년부인. 그녀를 집안으로 초대한 후 자신의 과거를 충고하듯이 얘기한다.
자신또한 과거에 젊은 남성과 사랑에 빠졌지만 사랑은 변하는 거더라고...
하지만 후회하진 않는다고 한다.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주었기에 행복하다라고...
지금은 늙은 여인네가 되어 과거의 아름다움을 회상하며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 젊은 남성과의 짧지만 열정적인 사랑의 대가이다라고 감독은 얘기하고픈걸까?
그녀는 자신에게 충고하는 거냐라고 되묻지만 중년의 여성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자신 또한 현실에 충실할 뿐이라고 자위했을까?
중년의 부인은 그녀를 응원하며 재회하면 멋지게 키스하라고 얘기해준다.


사랑은 변하지 않는걸까?
토오루와 그녀의 미래가 중년의 부인과 동일한 전철을 밟을지 아무도 예단할 수 없지만 충분히 가늠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녀가 남편과의 사랑이 변했듯이 토오루와의 사랑 또한 변하지 않을꺼라는 상상은 힘들다.
하지만 과감하게 미래의 안락함을 버리고 불안하지만 현재의 행복한 사랑을 선택한 그녀.
그녀는 순수하고 용기있는 것일까? 단지 무모한 욕망을 주체하지 못한 무절제한 인간일 뿐일까?

 

좀더 가치있고 값진 사랑이란 존재하는 걸까?

 

“진짜 똑똑한 유부남은 바람만 피우지 절대 사랑에 빠지지는 않는다?”
사랑이 어떻게 조절가능한지를 극명하게 대변하는 논리인 것 같다.
사랑을 무엇이라 한마디로 정의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만의 경험과 이론으로는 충분히 정의가능하지 않을까?

 


당신에게 있어 사랑은 무엇인가?

만약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했다면 다시 역정적인 사랑에 빠질 상황이 오지 않기만을 바란다는 나의 바램은 너무 소심한걸까? 헤~


사랑은 아무나 하는거냐구? 켁!

 

 

<뱀발>

요즘엔 항상 코믹버전으로 끝나버리는군..쩝쩝...
지성이땜에 프리미어리그에 빠진 지금 전문적인 축구관련 포스트를 해보리라 열심히 독학중이지만 브레인이 딸리나부다. 힘들다..헉헉..

 

 

상처에 대해 말하자면
태어날땐 누구나 상처가 없자나
완벽하게 흠없이 태어난다는 거 대단하지 않아?
그런데 살면서는 상처받을일만 있어
죽을 때까지 상처는 늘어만 가
상처받는 건 피할 수 없다고
누구나 상처를 받게 되어 있는데
상처입는 것에 저항하거든
여자들이란
"코오지의 대사 중에서"

 

에쿠니 가오리의 원작을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답게 갈등전개나 스토리의 구성이 탄탄한듯하다.

 


<도쿄타워>엔 또다른 연상연하 사랑얘기도 나온다.
권위적인 남편과 깐깐한 시어머니까지 모시고 살아야 하는 일반적인 주부상인 키미코.

 

“유부녀는 귀엽다. 재미에 굶주려있기 때문이다”
요렇게 당돌하게 재미에 굶주린 순진한 유부녀를 농락해버린 젊은 날라리 청년 코오지.
그러나 그는 토오루와 방식은 다르지만 여전히 진지하게 키미코를 사랑하고 있다.

그의사랑이란 것이 문어발에다 기간이 길지 않다는게 흠이지만...흐흠...

 

 

재밌는 반전상황.
화려한 호텔에서 둘만의 오븟한 시간을 가지는 키미코와 코오지.
그만을 위해 준비했다는 섹시한 속옷을 입고 욕실에 뛰어들며 그를 에로틱하고 강렬하게 유혹하는 키미코. 그런 그녀를 보며 코오지는 중얼거린다.
‘그녀의 정체성을 모르겠다. 지금 그녀는 악마다!’
강하고 적극적으로 남성에게 접근하면 남성 대부분은 불안해한다고 하는데 자신의 공격적 리딩을 여성에게 권력이 밀린다는 판단 때문일까?
키미코의 의미심장한 대사가 기억에 또렷이 남는다.
“35살 여성의 욕망이 어떤건지 넌 알 수 없을꺼야”

 

 

조선일보 황선미 기자의 20자 영화평.
“일본 중년 여성에 대한 사회심리학적 분석이 시급하다”

 

어제 유부녀 친구와 <천국의 나무>를 첨 보았다.

10대 아이들의 격정적이면서 무모한 사랑얘기를 보며 그와 그녀가 손잡는 장면만 보아도 찌릿찌릿하다는 친구 유부녀.
그녀 또한 황선미기자가 얘기하는 일본중년여성과 오버랩되는건 왜일꺼나? ㅋ

 

 

근데 궁금한거 하나.
<도쿄타워>에 대한 영화평들이 대부분이 시시했다.
특히 남성평론가들의 평은 혹평이상이었다.

연상연하의 불륜이기때문일까? 그냥 불륜이기 때문에 그러는 걸까? 아니면 영화가 진짜 “황”이어서일까?
영화는 격조있고 세련되게 만든거같은데...그렇다면 스토리의 문제때문이라는건데..둘중의 하나다.
나의 지배적인 생각은 이거다. 남성들 벨이 꼬이는 거지.

소녀에게 열광하는 영화는 봐주어도 꽃미남에게 빠지는 아름다운 유부녀는 안된다는 거지..그게 남성들의 본심아닐까?
 
환상을 드러내는 영화 또한 현실에 발을 내딛고 있음을...
<프라임 러브>의 여성평론가의 글은 현실을 좀더 적나라하게 반영하는 듯했다.
"마음 주고, 몸 주고, 직업까지 찾아주고도 어린 남자친구의 미래를 위해 한발 물러서야 하는 게 ‘여자 나이’니?!”

 

 

 

 

그나저나 <왕의 남자>는 언제보나?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친절한 금자씨

씨네21에서 이미지가져옴

 

 

절대악당


백선생과 금자씨
악당도 인간인 것이지만 감독은 절대악당으로 인간의 무엇을 드러내고싶은 것일까?
숨겨도 숨겨지지 않는 진실이 있듯이 죄는 덮어도 덮어지지 않는다.
끝까지 쫓아가 단죄하는 것이 복수의 시작이자 끝이다.
복수의 주체는 금자씨말고도 백선생을 증오하고 있는 유괴된 아이들의 부모들이다.
아이들은 백선생의 죄를 사하여 주었을까?
그들의 부모가 자신들을 대변하여 구원해주기를 바랬던 것일까?
마지막 화장실신에서 커버린 아이의 무표정은 모호하다. 금자씨만이 환상을 본 것이 아닌 그녀의 딸 또한 아이를 본 것이다.

 

금자씨, 본능적인 모성으로 영혼을 구원받다?

모성적 본능은 지구 끝까지 쫓아가 복수해야만 하는 신성하고 강력한 힘인가?

글쎄...


이 시대의 한국적 악당은 전두환이지.

 

 

 

 


시공간을 넘나드는 독특한 스타일의 미술
왕가위의 스타일이 연상되는 단점.
자신이 하고 싶은 스타일은 모두 실험해본 듯한 영화였다.

 

키치적 미술은 감독이 관객들을 향해 이건 영화야라고 솔직하게 내뱉는 자신감으로 보였다.

금자씨의 방은 금자의 환타지와 복수심리를 보여주는 중요한 공간으로 드러난다. 특히나 벽지의 이미지장식은 왕가위의 <화양연화>를 연상하게 하는 반복적 패턴과 자연이미지의 문양을 사용함으로 클래식한 스타일로서 금자씨의 감정상태와 환타지적 분위기를 풍기는 장치가 된다.

또한 복수극을 모두 마친 금자씨가 화장을 지우는 화장실 공간은 가장 인상적인 곳이었다.

벽면의 재질과 반복적 패턴 스타일은 미래지향적 공간임을 암시하는 듯해서 스토리와 미술이 절묘하게 접합하는 인상적 장면이었다고 생각한다.


<올드보이>에서 가장 인상적이 장면은 오대수가 학교에서 몰래 남매를 엿보게되는 회상신이었다. 핸드핼드로 오대수를 따라가는 듯하다(현실) 어느새 어린 이우진을 따라가고 있는(과거) 기법은 과거와 현실을 교묘하게 겹치게 만드는 절묘한 플래쉬백이었다.

<친절한 금자씨>에서도 흑백대비가 명확한 계단신이 등장하나 <올드보이>에 비해 스토리와의 연관성이 떨어지며 심리적 긴장감 또한 약하다는 생각.

 

뱀발.

씨네21을 보다 <친절한 금자씨>의 미술감독 이력이 역시나 예사롭지 않았다는 걸 알았고(<올드보이>에서 부터 <살인의 추억>, <피도 눈물도 없이>-->꽤나 특이나 세트라는 생각이 들었던 영화였다. 등등)  그녀의 재능이 무척이나 부러워졌다는 거다. 흑흑..부러비~

씨네21 기사 "류성희 미술감독"

 

 


극의 전개를 거스르는 카메오
임수경, 여성교도소내부의 자문이었다고는 하나 양심수였던 임수경과 유괴범으로 오인된 범죄자 금자씨와의 오버랩에는 무리가 있었다. 여성교도소를 보여주고 여성이 주인공이라 하여 여성적 의미의 영화표현이라는 것은 무리한 접근방식이라 판단됨.
류승완
송강호, 복수극시리즈와의 연결. 꼬리의 꼬리를 무는 연결고리.
신하균
유지태


박찬욱감독의 세계적 명성과 감독적 자질을 뽐이라도 내듯이 유명인들이 줄줄이 카메오 출연하는 형식은 잔혹극의 내용에는 아무래도 거슬린다.
히치콕의 영화제작방식을 차용한 듯한 유명인의 카메오출연은 블랙유머라고 피식대기에는 씁쓸한 웃음만이 입가를 번지는 기분이다.

 

김현희를 연상시키는 유괴장면 재현극, 미모의 여성이면 모두 이런 분위기를 풍기는 건 아니겠지. 풀리지 않는 과거의 청산에 대한 상적적 재현인건지...

 


잔혹극과 복수
불편하다. “한국사회가 그렇게 한가하고 평화롭지 않다”는 감독의 표현처럼 한국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드러내는 이 영화는 보는이로 하여금 보여주기 싫은 치부를 드러내는 것처럼 심기가 불편해진다. 드러내는 방식이나 형식이 부정적인 것에 대해 불편해하는 개인적 취향을 빼면 이 영화는 확실히 박찬욱감독만의 영화적 스타일이 잘 드러나는 영화인 듯하다.
한국내 만연한 과거에 대한 이루어지지 않은 수많은 청산과제들과 쉽게 잊어버리는 안일함, 가장 근본적인 측면. 인간적 본능인 모성본능으로의 회귀. 이런 쉽지 않은 상징들을 영화는 저변에 깔고 있는 듯하다.

과거의 역사를 통해 미래를 내다봐야 한다.

 

복수가 필요한 사회.
약자들의 의미있는 반란.

 

복수=청산, 치유
이런 공식이 성립가능할까?


복수가 아닌 다른 그 무엇은?
폭력이 폭력을 양산하는 악순환의 시스템을 지양하는 사회가 좀더 진보한 사회일 것이다.
중동의 역사가 대변자구실을 하고 있으며 테러리즘과 미국의 일방주의 외교가 그 대표적 예가 될 것이다.

복수가 무엇을 해결해줄 것인가?

인간의 간사함이나 폭력성만을 드러내는 이야기구조로 보여 불편하다.


판타지와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금자씨 뒤의 배경 조각은 금자씨의 복수에 대한 상징적 이미지로 보인다. 자세한 형태는 기억이 가물하나 머리체를 잡은 여성의 강인한 형상을 조각은 보여줌으로서 금자씨의 심리를 대체하고 있는 듯하다. 미술의 상징성을 잘 드러내는 장면이다.

 

 

 

강렬하고도 아름다운 비발디
눈발날리는 어두운골목의 세사람을 배경으로 음악이 흐른다.
개인적으로 강렬한 대비효과와 독특한 양식의 미술보다, 이영애의 소름돋는 발작연기보다 편곡된 클래식음악이 훨씬 좋았다.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 영상을 보완하는 음악이 주는 조화로운 힘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서 박찬욱감독은 음악을 적재적소에 영리하고 감각적으로 사용하는 감독중의 한명이라는 생각.

 

 

 

 

뱀발.
처음 15분정도를 놓치고 영화를 접한지라 맥락의 이해를 쫓아가기 조금 힘들었다. 마지막 두부모양의 케익을 얼굴에 부벼대는 이영애의 연기가 어찌나 어색한지 “저게 모냐?”며 비웃었는데 “두부”의 상징을 읽어내지 못한 것은 나의 무지함 탓이었다. 이유는 처음 교도소출옥 장면을 놓쳤던 때문이었던 게다. ㅠ_ㅠ

한번정도 더 봐 주어도 좋을 영화라고 생각되어진다. 처음은 아무런 정보없이 순수하게 접근하고 두번째는 평론가의 글들, 관객들의 평, 처음 본 나의 느낌들을 모두 모아 한번 더 봐준다면 영화의 상징들을 읽어내고 뜯어보는 재미가 한층 더할 것이니 말이다.

 

그나저나 <친절한 금자씨> 보다는 <건방진 금자씨>가 더 강렬하게 기억되는건 왜일래나요?

ㅋㅋ

 

 

붉은사랑님의 [친절한 금자씨] 에 관련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비디오&DVD 미갱소장3 _추가목록

미갱님의 [비디오&DVD 미갱소장2 _추가목록] 에 관련된 글.

 

 

 


 

DVD목록

 

20. 필라델피아

21. 이레이져 헤드

22. 아이다호

23. 메트로폴리스 2CD

24. 자이언트 로보

25. 연인(무삭제판)

 

 

 

 

최근에 또 구매한것들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