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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3/29
    뜨거운 청춘이여. 꿈꾸어라?_<몽상가들>(10)
    미갱
  2. 2005/03/26
    그녀는... <여자, 정혜>(9)
    미갱
  3. 2005/02/17
    그 때 그 남자들_정희진/펌글(8)
    미갱
  4. 2005/02/14
    <클로저>_낯선 이들의 사랑(7)
    미갱
  5. 2005/02/03
    추억의 애니를 보다_<은하철도 9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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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5/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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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5/01/13
    인간관계내 권력 들여다보기_<룩앳미>(12)
    미갱
  8. 2005/01/06
    델마와 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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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4/12/15
    <계속된다>를 보다(8)
    미갱
  10. 2004/12/10
    <영원과 하루>_영원한 하루, 내일(7)
    미갱

뜨거운 청춘이여. 꿈꾸어라?_<몽상가들>

모택동의 혁명이 한편의 서사시였다고 평가하는 꿈꾸는 젊은 청춘들..

씨네21에서 퍼온 이미지들.

 

원제 Sex, Politics, Cinema

 

 

노장감독의 청춘영화라.
나이먹음은 곧 현실과의 타협이 꿈꾸기 보다 조금 더 쉽고, 가슴으로 들끓기 보다는 지혜로 무장한 이성으로 세상을 통찰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베룰로루치감독은 아직도 꿈꾸기와 현실인식에서 저울질하고, 대마초에 혼미할 수 있으며, 아름다운 육체를 지닌 자유로운 청춘을 그리워하는 듯했다.


1968년의 프랑스 남매와 미국청년.
세상의 부조리와 부당한 폭력에 대해 비판하지만 행동으로 옮기기보다는 부모님의 안전한 가옥과 돈으로 금기의 영역을 모호하게 줄다리기 하는 이란성 쌍둥이 매튜와 이사벨.
대학생이라는 특수신분덕분에 베트남전을 운좋게 피할 수 있었던 미국인 테오.
세명의 현실도피적 특수동거상황은 몇일간 이어진다. 영화와 현실에 대한 경계가 그들에게는 무의미해보인다. 그들에게 현실은 게임이고 영화의 재현이다.
하지만 그들의 유토피아는 부모님의 용돈과 함께 바닥난다. 해결방안은 부모에게 전화한통이면 이상무. 풋! 그걸 보면서 중얼거린다. “쳇! 꿈은 돈으로 유지되는 거였군”

순간, 그들이 아버지의 권력을 비판하고 행동하지 않는 양심을 들추려면 부모의 혜택으로부터 자신을 먼저 해방시키라고 소리쳐주고 싶었다.


재니스 조플린의 목소리는 영화에서 훌륭한 영화음악으로 쓰인다. 젊음의 자유정신과 비판의식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신나는 음악이었다. 재니스라니! 베루톨루치 아저씨 멋쩌요~

 

잼난 장면.
프랑스에서 첨으로 사귄 친구의 식사초대. 어색한 프랑스 가족과 마주한 식탁에서 가장인 아버지는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고 있다. 약간의 지루함을 잊기위해 지포라이터를 만지작거리며 딴짓하다. 친구아버지에게 딱걸린 미국청년. 유명한 시인인 아버지는 화내기보다는 왜 그랬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를 유도한다. 여기서부터 지포라이터 철학이 탄생한다. 사소한 행동은 사고의 연상으로 인해 지포라이터 철학으로 전이되어 설명되고 아버지와 그의 가족들. 모두 할말을 읽고 감탄을 내뿜는다. 잼나는건 그들의 반응인데..부모앞에서 10대의 자식들이 식탁에서 담배를 꼬나물고 있는것도 신기할 일인데 ‘지포라이터’ 하나로 ‘사물의 동일성’을 끄집어내는 미국청년의 잼난 생각을 듣고도 미친놈 취급하지 않고 그의 특별하고 남다른 시선에 대해 감탄할 수 있는 프랑스가족의 문화적 감수성에 감동. 저건 난데...만약 내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저런 얘길하면..엉뚱하다고 머리를 절래절래했을터인데..쩝..

 


거울 속에 비친 청춘의 자화상들. 셋은 하나처럼...그러나 각자 다른 사랑을..

 

 

쇼킹한 장면,
영화관에서 남녀의 성기가 적나라하게 노출된걸 보게되다니 내눈을 몹시 의심했었음.
어! 안개가 떠야할 상황인데 너무 또렷하니까 오히려 이상하다는 생각. 그 동안 안개상황에 넘 익숙해했던 내가 오히려 민망한..

 


'폭력으로 해결되는 건 없다'라는 테오는 시위에서 행동을 멈추고..

 

 

마지막 장면.

나체로 뒹굴며 자유롭던 그들. 부모세대에게 대한 예의인지, 사회적금기에 대한 윤리적 회개인지 모를 모호한 자살을 택했다 엉뚱하게 뛰어든 시위대의 돌에 잠을 깬 셋은 갑자기 프랑스학생시위대에 합류하는걸로 끝맺음하는데 베루톨루치는 세상을 바꾸려면 꿈꾸지만 말고 현실로 돌아와 화염병을 들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익숙하게 봐오던 시위장면을 영화속 추억의 장면처럼 구경하다니...잼난 현실이었다.

 

두 가지 주제.
첫째, 프랑스

60,70년대 프랑스는 현실의 프랑스 도심의 뒷골목일 터인데 어둠으로 정체된 오래되고 낡은 무덤같은 느낌. 그랬다. 왜 그랬는진 좀더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다.

둘째, 쌍둥이

한몸에서 분리된 두개의 육체와 하나의 영혼이라는 설정. 영화속 쌍둥이는 절대 타인을 사랑할 수 없을 것같다. 그들에겐 서로가 있을테니까...
다른 성격이나 다르지 않은 묘한 일체감을 주는 육체와 영혼.

가끔 궁금하다. 
 

 

 

>>사족

매튜를 연기하는 마이클 피트가 지미 핸드릭스의 "Hey Joe"를 직접 노래를 부른  뮤직비디오를 한번 감상해 보시라. 현재 이 친구는 구스 반 산트감독의 영화<라스트 데이즈 Last Days>에서 커트 코베인 역을 맡았다고 하는데...보컬의 수준도 예사롭지 않을 뿐더러 살아온 이력 또한 특이하다.

구스 반 산트의 <파인딩 포레스트>에서는 금발의 연약한 범생역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그저그런 헐리웃의 꽃미남 배우로 보였었는데..뮤직비디오에서의 광기를 내뿜는 재능에서는 약간 오버해서 리버 피닉스를 연상케할 정도로 기대해 볼만한 배우가 아닐까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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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여자, 정혜>

이 글은 해미님의 <여자, 정혜> 극복 또는 치유되는 상처? 에 관련된 글입니다.


 

<여자, 정혜> 포스터_씨네21에서 이미지퍼옴

 

이번주에 보지 못하면 못볼 것같다는 불안감때문에(극장에서 간판을 내리는..)냅따 예맬했다. 결과는 흐믓함과 미소먹음으로 끝맺었다. 행복했다. 잘 만든 영화를 보는 감상자의 행복감을 영화감독이 줄 수 있다는 건 직업의 장점같다.

(선댄스영화제에서 감독과 관객과의 대화 막바지 한 관객이 이런 환호를 던졌다고 하는군.

“You did a great job!”)
꾸물거리다 늦어져 헐레벅떡 뛰어든 영화관안 스크린에는 벌써 그림들이 흐르고 있다.

 

 

 



 

여자의 외로운 일상


신혼여행 하룻만에 특별한 이유없이 결혼을 깨버린 그녀를 고모는 이해못한다. 오히려 어릴때부터 그녀가 어리버리하고 이상한 아이였다고 단정해 버린다. 나또한 그녀의 행위와 말투가 갑갑하다. 세상과 담쌓고 사는 그녀가 답답했다. 하물며 가장 가까이 속내를 터놓고 자신을 드러내어도 좋을 동료에게도 벽을 쳐버린다. 자신에게 다가서는 주변인들을 자꾸만 밀쳐내고 있는 그녀가 이해불가 했다.
그래서 한여름 파아란 하늘을 배경으로 운동장 벤치에 앉아 떠난 동료를 잡지않은체 홀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역광으로 시커먼 그녀의 뒷모습이 그렇게 슬퍼보였나 보다. 갑갑해 보였나 보다.  저건 아닌데...속으로 난 이런 대사를 툭 던지고 있었다.

 


 

홈쇼핑으로 시간을 떼우고 밤마다 혼자서 현관문을 잠그고 이방저방 불을 끄는 그녀의 표정은 무표정이다. 주말마다 간단하게 맥주한잔 하는 닭집에서의 동료들과의 자리도 별 대화가 없다.
어찌나 외로워 보이는지..누구나의 일상이지만 누구나 매일매일 그렇게 따분한 일상만 존재하진 않는다. 왜냐. 외로움을 이기기위해 갖은 노력들을 하니까 말이다. 친구를 만나 맛난 음식과 알콜로 수다떨고, 이성(동성)친구를 만나 유명하다는 영화한편 떄리고, 하물며 사이버상의 친구들을 만드는 블질도 있지 않은가? ^^

그런데 그녀는 세상과 담을 쌓고 그 담을 허물려하지 않고 더 굳건하게 닫아버린다. 왜일까?

 

그녀의 유일한 통로는 엄마였다. 신혼여행에서 아무런 이유없이? 그냥 짐싸고 집으로 돌아온 딸을 엄마는 다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다그치는 고모에게 “자기도 무슨 이유가 있겠지요”라고 따뜻하게 대변한다. 그런 유일한 정신의 해방구인 엄마의 부재는 그녀를 더 외롭게 하는 이유로 보인다. 하지만 그런 엄마에게도 말못한 과거가 있다니..그녀는 왜 그랬을까?

 


 

 

상처는 치유가능할까?


아무일없었다는 듯이 결혼식을 올리긴 했으나 신혼여행 첫날 밤 남편에 의해 그녀가 원하지 않은 섹스를 강요당한다. 결혼식까지 올린 신혼여행지에서의 합법적인 남편과의 섹스는 또다른 강간으로 보인다. 그녀에게 한마디도 동의를 구하지 않고 물리적 강압으로 밀어붙이는 남자의 행위는 그래도 합법적인 거겠지? 남자는 질문한다. 첫경험은 어땠냐고? 자연스러운 질문같아 보이고 그녀 또한 아무내색없이 답한다. "그냥 아팠어" 오히려 내숭떠는 순진녀의 대답같아 보이기도 했다.(하지만 그녀의 상처를 함축적으로 드러내는 의미있는 대사이다) 그래서 새벽같이 호텔을 뒤로 한체 혼자떠나는 그녀의 행위는 언뜻 논리적이지도 이해가능하지도 않다.
그러나 왠지 그녀의 뒷모습은 당당해보인다. 왜일까?

 


 

해미님이 벌써 밝혔듯이 마지막 남자작가에 의해 “정혜”라고 불리우는 그녀는, 그와 함께 새로운 인생의 막이 약간은 무표정한 얼굴뒤로 길고 밝게 펼쳐지면서 긍정적인 상징으로 끝맺음을 한다.
해피해 보이는 결말이 불온해 보이는건 감독의 막연한 이상주의적 사고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어눌하지만 순진하고 착실해보이는 남자작가가 그녀에게 평범함의 행복을, 아픈과거의 상처를 치유해 줄 것이라게 남성감독의 결론이니말이다. 쳇!


안정된 직장에 혼자사는 그녀는 독립적인 여성으로 보여지기 보다는 외롭고 슬픈 여성으로 보여지고 여성으로서의 “평범한 삶”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한가족을 이루어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는 역설로 보이기 때문이다. 작가남자를 저녁에 초대한 다음 장을 보고 상을 차리는 그녀는 더없이 활기차다. 남자를 위해 뭔가를 해야만 여자로서의 행복감을 느끼며 그렇지 않으면 상처가 덧날수도 있다는 그런 논리. 게다가 점심시간에까지 집으로 달려가는 그녀의 행위는 모성본능을 적극적으로 표출할 대상인 고양이 때문이다. 여성이 애완동물을 키우는데는 주체하지 못하는 모성본능때문이라는 것. 그런가 과연? 흐흠...

 


 

용서와 처벌.
해미님의 진단처럼 가해자를 벌했어야 정치적으로 올바를 것이었다는데 동의.

인간적 용서와 가해자 남성에 대한 사회적 처벌은 다르다는 측면에서 어찌보면 남성감독의 이상적 결론이었다는 생각이다. 남성에 의해 받은 상처는 남성에 의해 치유가능하다?

 

제목에 왜 "여자"라는 단어가 삽입되어 있는 걸까?

 

"속삭여본다. 이젠 행복해질꺼라고.."

또 다시 던져보는 질문.

강간당한 여자의 상처로 얼룩진 삶은 과연 이성의 사랑으로 치유 가능할까?

 

 

탁월한 심리묘사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는 교차편집은 그녀의 불안하고 섬세한 심리묘사를 드러내는데 효과적인 방식이었다. 아주 기발한 방식이었다.


과거와 현재, 꿈과 현실은 가끔 혼란스럽다. 구분조차 어려울 때도 존재한다.
현실과 과거에 대한 영상이 동일하여 갑자기 끼어드는 과거의 회상이 현재 일어나는 일인지 그녀의 회상인지 모호하다. 시간을 드러내는 모호한 방식은 그녀의 섬세한 심리, 그녀의 현재의 심경들로 그녀를 이해하는 근거들이 된다. 혼자 드러누운 소파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모녀의 일상적 대화, 우체국상사 때문에 들른 병원이 갑자기 들리는 저쪽 고모의 울음으로 어머니의 죽음을 알리는 장소로 변하는...동일한 공간과 다른 시간이 그녀를 이해하는 절묘한 단서로 쓰여지고 현실에 갑자기 끼어든 강간장면은 그래서 느닷없고, 그래서 그녀가 지닌 심리묘사로서 적절한 방식인 것이다.

 

유난히 그녀의 뒷모습, 화면한쪽을 꽉채우고 뒷부분은 여백의 공간으로 처리해버리는 화면처리 방식은 여운과 아쉬움을 표현하는데 적절했다. 감독의 미적감각이 엿보이는 상징적 화면들이었고 초기 핸드핼드촬영기법은 다큐멘터리같은 현실성을 드러내주는 촬영기법으로 흔들리는 시선으로 보여진다.


 

 

김지수라는 배우


김지수라는 배우는 청순가련한 분위기여서 그냥 싫었다. 옆구리를 살짝만 찔러도 슬픈 눈망울을 하며 울어버릴 것 같은 바람만 살짝 불어도 가녀린 몸은 바로 넘어가버릴 것 같은. 그래서 남성들의 보호본능을 자극하여 여성은 무조건 강한 남성의 그늘아래 머물러야만 할 것 같은 그녀의 만들어진 이미지는 정치적으로 싫다.(해미님의 말투를 약간 차용해봄~)


김지수의 갸날픈 표정과 몸매, 깍듯한 목소리와 행동에서 우러나는 여성스러움이 일상적인 캐릭터인 우체국직원 정혜로는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면서 순간 김지수가 아닌 이은주가 연기했다면 어땠을까.. 이런 잡스런 생각이 초중반을 지배했다.
하지만 그녀가 주는 외유내강의 여성캐릭터는 성공적이었다는 생각.

남성감독의 의도를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상처를 지닌체 무감각하게 하루를 살아가는 야리야리한 몸매는 건조한 일상을 드러내는데 김지수의 캐릭터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중반을 넘어가면서 자연스럽게 내려진 결론이다.

 

아쉬움이라면 가장 극적인 장면이어야 할 화장실 울음은 뭔가 2% 부족하다는 거. 악다구니 같은 처절함이 보이지 않는데..원래 속으로 쌓고 쌓는 내면연기가 더 어려운데 그건 아니고..억누르고 쌓인 감정의 저 밑바닥 크트머리를 울음으로서 카타르시스를 느껴야 하는 장면인데..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녀의 슬픔은 아쉬움이 보였다. 억눌리고 덧난 자신의 상처를 날카로운 금속의 칼에 스스로 베임으로 인해 폭발하는 아픔을 드러내는데 굵게 떨어지는 눈물로만 표현되어진것은 뭔가 부족하다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진 못함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아주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오랜만에 좋은 한국영화 한 편을 본 난 오늘 마무리가 깔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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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그 남자들_정희진/펌글

여성학자 정희진씨의 임상수감독 영화<그때 그 사람들>읽기~

 

잼나는 글이라서 그냥 한번 긁어와 보았다.

<살인의 추억>의 봉준호 감독 (참 나... 놀구들 자빠졌네) 은 직업에 맞는 실랄한

감성적 글쓰기였다면 이 글은 여성학자로서의 시각이 잘 보여진다.

법원의 영화삭제명령에 대해 정희진씨만큼 명쾌하게 평가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찬찬히 다시 한번 읽어보련다.

 

아직 영화를 보지 못했는데...조만간에 보긴 해야겠지?


씨네21에서 이미지퍼옴

 

<그때 그 남자들>

정희진/서강대 강사
 


<그 때 그 사람들>을 보고 나서, 왜 박지만씨 진영이 이 영화에 분노하며 재판까지 벌였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박정희 역의 배우 송재호는 독재자 이미지와 거리가 멀다. 영화에서 박정희는 유머스럽고, 낭만적일 뿐 아니라 심지어 인자하기까지 하다. 아무리 봐도 “명예를 훼손한” 흔적이 없다. 이 영화가 보수 세력의 화를 부른 실제 이유는, “역사 왜곡”이나 “정치적 의도”가 아니라 ‘여자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박정희의 ‘치적’이라는 경제 발전 주장은, “유신이 아니라 노동자, 농민이 이룬 것”이라고 쉽게 반박할 수 있다. 그래서 섹스 문제는 그를 평가하는 키워드가 된다. 사람들은 대통령의 섹스를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정당성과 도덕성의 징표로 이해한다. 물론, ‘영웅은 호색이지만’, 그것은 들키지 않았을 때 얘기다. 남녀 간의 일대일 섹스를 원칙으로 하는 가족주의 규범이 강력한 한국사회에서, 최소 100여명의 여성이 대통령을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는 역사는 사람들에게 역겨움을 주기에 충분하다.


‘악당을 죽인’ 김재규는 의인이나 영웅이 되지 못하고 다시 부하에게 잡혀 신문을 받는다. 자기가 죽인 상관과 똑같은 신세가 되는 것이다. 임상수 감독은 이 영화를 보수와 진보, 독재와 저항, 여야 대립 등 기존 남성 정치학을 뛰어 넘어, 남성 문화를 비판하는 영화로 만들었다. 이 영화에서 남성은 말하는 주체가 아니라 평가받는(조롱받는) 인식의 대상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박지만씨의 소송과 이에 동의하는 법원의 일부 장면 삭제 판결은, 보수 세력의 무지와 단견이 영화 예술의 가능성을 어떻게 제한하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로 남을 것 같다. 영화가 비판하는 것은, 박정희 체제만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포괄적인 남성 문화이기 때문이다.

 

‘그 때 그 사람들’은 한국사회를 거울 앞에 세우는 매우 성찰적이고 성숙한 영화다. 이 영화를 10·26 사태를 재현한 ‘정치 영화’로만 보면 ‘그 때 그 사람들’은 과거로 사라졌지만, 남성성을 문제시하는 ‘젠더(성별) 영화’로 지평을 확대한다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당대의 텍스트다. 영화의 인물들은 ‘박정희 편’, ‘김재규 편’ 할 것 없이, 모두 쓸데없이 거칠고 요란스런 전투적 태도를 반복한다. 감독도 말했듯이, 이들은 “남자로서 한 몫 보려는 자들”로 “남자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친다. 영화에서 남자들은 ‘완벽한’ 의사소통을 한다. 여기서의 소통은 명령을 하고, 명령을 따르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원래 이런 종류의 소통은 군대에서나 가능한 일이지만, 유신 파시즘은 사회 전체를 그렇게 만들었다. 영화 속 남자들은 죽음을 담보로 하는 상사의 허무맹랑한 명령을 저항 없이 따른다. 이러한 의사소통 체계에서, 사유하는 인간은 총살감이다. 박정희 정권이 실제로 그렇게 하지 않았던가.

 

한국 현대사에서 차지철이나 장세동 같은 인물은 일상적 파시즘과 구조적 파시즘의 연결 고리다. ‘대통령보다 힘센 경호실장’은 과거 청와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사장보다 무서운 수위’, ‘시어머니보다 더한 시누이’ 때문에 고통받고 분노한다. 말할 것도 없이, 차지철의 권력은 박정희로부터 나온다. 그렇다면, 박정희의 권력은? 그것은 신(God)으로 부터 나온다. 유신은 국민이 아니라 신을 대리했다. 그들은 “나는 하나님이 직접 만드셨고, 국민은 내 갈비뼈로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현재 우리 사회 일각의 ‘박정희 향수’는, “제발, 갈비뼈에 불과한 우리를 화끈하게 지배해 주세요”라는 유아기로의 퇴행에 다름 아니다.

 

여성은 권력을 가진 남성의 동산(動産)에 불과하다는 믿음, 명령과 복종에 의한 ‘완벽한 의사소통’에의 갈망, 자신을 ‘신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기득권층... 이거, 유신 시절만의 이야기일까. 이 영화에 대한 보수 세력의 불편한 심기는 자화상을 마주한 우리를 대변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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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저>_낯선 이들의 사랑

씨네21에서 이미지들 퍼옴.

 

Closer

감독 마이클 니콜스
주연 쥴리아 로버츠, 쥬드로, 나탈리 포트만, 클라이브 오웬

 

 

기운이 쏙 빠져서 영화관을 나왔다.
왜 그랬을까?

사랑에 대한 환상보다는 솔직한 사랑을 줄곧 세뇌시키듯 얘기하는 감독 마이클 니콜스때문인가? 남자들은 육체에 탐닉하고 정신적 사랑와 육체적 사랑중 육체적 관계를 좀더 우선시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정신적 사랑이 무시되는 건 또 아니고...여성은 자신보다 젊은 여성에게 남편을 빼앗기지만 성숙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알리스보다는 키크고 유명한 사진작가인 안나에게 댄과 래리는 빠져들고..


안나의 사진전에 전시된 알리스의 사진. 전시장의 분위기가 예술이다.

높은 천장의 커다란 공간, 절묘하게 사용된 조명, 시멘트의 차갑고 낯선 느낌을 주는 바닥 인테리어..등..


Stranger.

낯선사람과의 사랑이야기들.

 

사랑은 정말 낯설어보인다.

사랑의 유효기간은 의학적으로 3년이다.

호르몬 작용이라는 거다.

 

하지만 (진실한) 사랑은 정말 어렵고도 오묘하다. 
 

 

 

 



 

나이들어 점점더 배우로서의 안정감과 성숙한 여인으로의 매력을 발산하는 쥴리아~

 

오프라윈프리 쇼에 홍보차 불룩한 배를 안고 나온 쥴리아 로버츠는 이 영화가 사랑의 시작과 끝을 보여주는 사랑의 과정은 보여주지 않는 영화랬다.
원래 영화보기전 사전 지식없이 봐야 영화의 선입견과 신선함을 즐길수있는 지라 최대한 노력했지만 어쩌다 본 오프라쇼 때문에 영화보는 내내 쥴리아의 얘기가 머리속을 채우며 스토리를 짜맞추고 있었다. 이래서 사전정보는 해악인거이다. 헷!

 

이성(동성)의 사랑은 성적호기심으로만 충족되지 못하는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던져주는 듯하다. 하지만 사랑은 타이밍인 것이다(100%동의). 4년간의 애정은 남자의 불신과 집착으로 순간에 날라갈수도 있는 것이고, 동시에 여러명을 사랑할 수도 있는 것이 사랑이며, 육체적 호기심은 정신적 사랑으로도 발전 가능하며, 사랑은 노력이며, 사랑의 유무는 눈(또는 오감)으로 감지될 수 있는 것이며...

 


 

재밌는 캐릭터는 피부과 의사인 중산층 래리이다.
겉으로는 다정하며 품위있는 인상의, 번듯하며 권위적인 중산층 의사의 직업을 지니고 있지만 남들이 보지 않는 어두운 공간에서는 인터넷으로 변태적 성욕?을 과감히 드러내기도 한다. 맘이 떠나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 안나에게 바람핀 남자와의 성적관계를 집요하고도 집요하게 캐묻는 이중적인 성격의 그는 상대방의 심리를 절묘하게 역이용하여 결국 아내를 꽃미남 쥬드로로부터 다시 빼앗아버리고 쥬드로의 연인 알리스과의 관계도 청산시켜? 버리며 쥬드로에게 실연의 아픔을 멋지게 되돌려주며 복수한다.

 


 

알리스의 본명은 제인이다. 그러나 그녀는 4년을 동거하며 사랑한 댄에게 진실을 밝히지 않고 떠난다. 알리스와 댄은 진실이 말로 드러나면서 관계가 끝난다. 그녀의 과거가 무엇이었건간에 때론 추악한 진실보다 애정어린 거짓이 사랑에 유효할때가? 있다는 역설을 보여주는 중요한 설정이었다. 예를들면 기혼자의 바람은 상대방이 모르면 한때의 바람으로 지나가나

상대방이 바람을 피운 진실을 알게되면 그때부터 복잡해지는거...몰겠다..진짜 어렵자나..


세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섹스장면은 하나도 없는데 대사와 분위기만(배우의 표정과 옷, 행위, 공간, 텍스트 등)으로도 영화가 더 에로틱할 수 있다는 거. 이건 감독의 천재적 능력이다라고 생각.


둘째, 칭얼거리며 우는 남자는 정말 아니다라는거.
감성적인 남성의 눈물은 아름다울수 있지만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 패배의 억울함으로 표현되는 울음은 정말 보기 어려웠다. 쥬드로가 래리에게 찾아가 안나를 놓아달라며 칭얼대는 눈물은 아무리 꽃미남 쥬드로이지만 아닌거다. ㅎㅎ


셋째,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가 참 좋았다는거.
남친의 애정이 자신이 아닌 낯선 여자 안나에게 향하고 있다는 진실을 알게 된 순간 그녀는 눈물을 흘린다. 그 순간을 눈치챈 사진작가 안나는 카메라를 들이대고 아름다운 예술로 변질?시켜 버린다. 안나의 사진전에서 래리가 알리스에게 질문한다. 진실을 얘기해보라고...
“누군가의 슬픔을 가져다 아름다운 예술로 만드는건 사기다. 이 전시는 사기로 가득찼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사기를 좋아한다.” (대사는 정확하게 옮기지 못하겠지만 이런 류의 대사들이었다)

예술은 순간의 아름다움을 포착하여 보는이에 따라, 상황에 따라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하지만 진실은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마이클 니콜스의 예술관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인거다.
그런데 사랑도 그렇다고 얘기한다.

 

머리가 어지러운건 도무지 사랑은 머리로 해석되지 않는거다라는거..에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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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애니를 보다_<은하철도 999>

 

 

까~~악~~

 

<은하철도999>가 투니버스에서 매주 화요일 새벽1시에 상영되고 있다.

까먹지 않으면 놓치지 않고 보려하는데 잼나는건 투니버스 공식사이트에서 이 만화의

주연령층을 10대이하로 정해놓고 있다는 거.

그런데 나두 초등학교때 즐겨보았던 유일한? 오락꺼리 아니었던가? ㅋㅋ

새벽1시라는 시간 배치는 성인층 올드팬을 위한 서비스인 듯하다.

 

무조건 넘 좋다^^

 

지금보면 어린이들이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많아 보인다.

존재에 대한 철학적 접근이나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적인 상징과 스토리...

어릴땐 왜 그리 좋았을까를 생각해보면 별게 없다.

익숙하고 친근한 그림의 철이캐릭터와 많이 봐오던 기차가 우주를 날라다니는게 넘 신기했

고 메텔이 닮고 싶을만큼 넘 우아한 여성이었다는거..

 

향수를 자극하고 예술적 측면에서 새롭게 요리조리 분석하며 보는 맛.

이건 정말 기쁘기 그지 없는 일이다^^

 

참! 엔딩곡 (근데 링크만으로도 저작권위법에 걸리나?)으로는 패닉출신의 김진표(교육부

장관 아닌건 다 아시죠^^;;)가 요즘세대가 좋아할만한 랩으로 featuring한게

아주 인상적이다. (시원한 보컬은 BMK~)

 

 

 

 <은하철도 999>의 공식 홈피는 요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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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지>_나이트 샤말란 감독

 

감독 : 나이트 샤말란

주연 : 와킨 피닉스, 윌리엄 허트,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

 

 

친구의 평

"나이트 샤밀란은 공포에 대한 일관된 관심을 드러내는데 <식스센스>에서는 전형적인 공포에, <언브레이커블>은 미국인의 영웅 또는 초인적 인간에 대한 대중정서를, <싸인>은 초자연적인 또는 외계인에 대한 관념을, <빌리지>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다루면서 미국인의 공포를 다양한 주제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라고...

 

샤말란식의 영화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이유는 일반적인 "공포"에 대한 인식때문이었다.

영화장르중 호러물, 공포물, 전쟁영화는 즐겨 보지 않는다. 심지어는 싫어하기도 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무서워서...여러가지 방식의 감정이입을 좋아하는 감성의 소유자?로서 전쟁과 호러적 공포물은 거부반응부터 이는 편이다.

 

하지만

<빌리지>는 "사랑"에 관한 영화이다.

순수한 사랑.

 

인간의 순수함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사말란은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외부세계와 단절되어 공동체마을을 이루며 '숲의 괴물'에 대한 공포로 외부와의 차단효과를 노리며 끊임없는 세뇌교육을 통해 공동체의 고리를 이어가는 그들.

괴물은 공동체마을의 어른(지도자)들이 만들어낸 "의도된 공포"일 뿐이다. 하지만 어릴때부터 선생님으로부터 부모로부터 존경하는 어른들의 교육에 의해 숲에는 괴물이 살며, 괴물과의 평화로운 관계는 공동의 약속을 통해 유지되어져야 된다고 배운다.

공동의 약속이란 숲에의 접근자체를 차단하는 만들어진 지어진 스토리(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철저히 교육되어진 공포란 본능적인 공포 이상의 힘을 발휘한다.

 

우리는 어떻게 교육되어진 걸까? 교육, 언론, 부모 등등의 것들로 우린 무엇을 배웠던가?

 

붉은색은 "불길한 색"이다.

마당에 핀 잡초인 붉은 꽃을 보자말자 꺾어 땅에 묻어버리는 장면은 정말인상적이다.

이데올로기는 일상을 지배하는 강한 힘을 지닌 것이다.

우리의 레드컴플렉스를 연상하게 하는 불길한 색깔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집단적 공포는 이데올로기를 드러내는 상징적 코드이다.

 

마을의 어른들이 공동체를 이룬 것은 "순수함"을 지키기 위함이라고 한다.

샤말란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의식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자본주의는 소비되어지는 것에 착취되어지는 것에 익숙해지면서 인간성을 자연스럽게 잃어간다. 인간에 대한 순수한 마음은 다른 이데올로기, 다른 세계안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빌리지>는 보여주고 있다. 물론 공동체 마을의 전체주의성과 획일성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고 세뇌되어진 교육에 의해 유지되는 세계에 대한 비판으로 보이기도 하다.

 


씨네21에서 퍼옴

 

인상적인 장면. 두번이나 보면서 감동한 장면이 있는데..

말없이 과묵한 루시에게 아이비의 언니가 청혼하지만 그는 아무말이 없다.

아이비의 언니는 언제 사랑을 했었냐는 듯이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

아이비는 언니를 위해 숨겨두었던 감정을 루시에게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이 과묵남 루시는 어떠한 반응도 없다. 그러나 어느날 새벽.

아이비는 곤히 자다 일어나 마당으로 나간다.

거기에는 루시가 앉아있다. 차가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우리집 마당에 있는거냐라는 질문에 루시는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아이비는 춤을 춘다면 너와 추고 싶다라며 자신의 자연스런 감정을 드러내지만 루시가 반응이 없자 이렇게 얘기한다. "왜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나요?"

루시는 잠시...

"좋아한다는 말을 하면 달라지는 것이 무어냐? 내가 가장 무서운 건 너의 안전이다. 너의 안전이 궁금해 여기 앉아 있는 것이다"라고...

오마이갓!

루시는 마을의 어떤 청년보다도 용감하다.

숲의 괴물을 두려워하지 않고 외부세계에 대한 호기심에 사로잡혀 있다.

마을의 청년중 숲의 가장 중심에 다가간 최고의 기록도 가지고 있다.

그에게 공포는 다른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안전"인 것이다.

 

어떠한 수사적 화려한 미사여구보다 아이비의 손을 잡고 이끄는 루시의 손은 순수한 사랑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하고 아름다운 행위였다는 거.

 

 

순수한 사랑.

 

그것은 어떤 공포에도 우선한다는 것이 샤말란의 생각인가보다.

 

 

사족1

여러가지 분석과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너무 길어지므로...오늘은 이만~

마지막 결론은 싱겁게 끝나버리지만...

친구와의 결론 " 샤말란은 뒷심이 부족해~"

작년 미국의 뉴스위크에서 worst영화로 <빌리지>가 1위의 영예를 안았다고 하나 오해의 평가라고 생각.

최근 본 영화중 가장 인상적인 알레고리적 상징으로 만든 잼난 영화라는 갠적 평가~

 

 

사족2

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는 론 하워드의 딸인데 그녀의 시각장애인 연기가 아주 인상적이다.

그리고 루시역의 와킨 피닉스는 그닥 닮지 않았지만 my lover 리버 피닉스의 친동생이다~

<피아니스트>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에드리안 브로디가 연기같지 않은 뇌성마비연기로 또한번의 배우로서의 능력을 과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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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내 권력 들여다보기_<룩앳미>

이 글은 자일리톨님의 [룩앳미 - 아네스 자우이(2004)] 에 관련된 글입니다.

 


Look at me

감독 : 아네스 자우이 

(이미지는 모두 맥스무비에서 퍼옴)

 

롤리타
실비아
애티엔느
피에르
카린
세바스티앙

 



인간관계로 권력의 속성을 드러내다


관계맺기에서 권력이 작용한다는 건 나이들어 자연스럽게 터득된 거 같다.
사회생활을 통해 순수한 관계맺기가 가능할까?

 

부전녀전이라 했던가.
딸인 자신과의 점심식사동안 20번이나 전화통화를 했다고 투덜대는 롤리타는 남친과의 스킨십중에도 전화가 오면 꼭 확인하고야 마는 어쩔수없는 아빠딸이다.
하지만 그녀가 아버지(에티엔느)와는 다른 방식의 관계맺기가 가능해질까?

 

에티엔느는 롤리타를 사랑하는 걸까?
나의 꽃돼지라며 항상 뚱뚱한 롤리타를 아버지의 애정으로 부르지만 딸이 들어보라고 권한 롤리타의 노래테이프는 6개월이 지나도록 책장에 쑤셔놓았다. 딸과의 식사에서는 다정하게 눈을 바라보며 딸의 근황을 물어보질않고 재차 따르릉 거르는 전화와 씨름이다. 신경써서 차려입은 드레스를 입고 나오는 딸에게 지나가는 말로도 “우리딸 이뿌다. 최고!”라는 애정어린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오랜만에 발견한 딸의 재능이 맨처음 발휘되는 음악회에서 그는 딸이 노래를 부르자말자 자신의 문학적영감을 놓치고 싶지 않아 자리를 떠버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변인들에게 항상 그녀의 걱정을 늘어놓는다.

관심을 드러낸다.
사랑은 표현해야만 전달가능한가? 그렇다.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진실도 있지만 말하지 않고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다는 건 그닥 쉬운일이 아니다. 사랑을 전달하는게 어찌나 서툰지 에티엔느의 이기적이고 독단적인 성격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부인의 돌봄이 없다면 그는 한낮 칭얼대는 미성숙하고 괴팍한 인간일 뿐이다. 롤리타 또한 세바스티앙의 순수하고 인내심있는 사랑이 없다면 주변의 인간들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의심하기만 했겠지.

 

Tip> 나란히 앉은 좌석

레스토랑에서의 장면은 롤리타와 에티엔트가 관계맺기 방식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에티엔과 롤리타의 점심식사중 둘만의 식사인데도 에티엔은 롤리타의 맞은편에 앉지 않고 옆에 앉는다. 또한 롤리타 또한 세바스티앙과의 첫만남에서 둘은 나란히 앉아 있다. 모두 마주 앉아 차를 마시는데 말다. 재밌는 상징이다. 마주보지 못하고 일방통행만 하는 인간관계. 쯧..


 

 

권력의 맛이란 얼마나 달콤한가.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으로만 식탁을 채울 수도 있고, 합리적이지 못한 논리에도 반박은커녕 칭찬해주는 아부쟁이가 즐비하고, 스트레스 쌓여 짜증나면 받아줄 친구가 항상 대기조로 받쳐주고, 자신의 외모에는 쳐다보지도 못할 예쁜 여자(남자?)의 아찔한 유혹이 있어 좋고, 파티에선 누가 되었든지 자신이 움직이지 않아도 알아서 직접 인사와 주고..

<룩앤미>는 권력에 기생하는 자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권력의 찌꺼기에 기댄 친구를 향해 내뱉는 에티엔느의 대사는 의미심장하다.
“비겁하다는 걸 알면서도 참는거지” (대사가 정확하진 않을 듯..기억가물가물)


같이 본 친구의 얘기는 더 의미심장했다.
“에티엔느는 친구의 비겁함을 알면서도 모른척하는 더 비겁한 사람이 아닐까?”

 

여성감독의 섬세한 시선이 느껴지는 시퀀스들


비교되는 두 부부의 주방 씬.


실비아와 그의 남편 피에르. 자연스럽게 둘이서 같이 주방에서의 가사노동이 행해진다. 다년간의 분담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가능하지 않을 풍경. 상대적으로 비교되는 에트엔느의 부부. 돈은 남편이 벌고 탁아나 가사노동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 부인의 몫이다. 하루종일 아이에 시달리는 카린은 풍성한 식탁을 위해 장보고 무거운 짐 때문에 식당에서도 핀잔을 들어야 하며, 음식을 만들어 놓고도 음미할 기회도 없이 아이와 실갱이에 남편의 일방적이고 억압적인 대사에 어떤 대꾸도 하지 못한다. 둘에게 일상적 대화가 가능할까? 남편은 끊임없이 전화와 대화하고 부인은 아이들의 꽁무니 쫓아다니기에 바쁜데말다.

 

사실 나의 주변에도 두부부와 비슷한 케이스가 있다.
A부부, 연상부인의 연하남편. 자그마한 벤처회사에 다녀 연봉은 그닥 많지 않지만 주말이면 특별식도 만들어주고 다정하게 손붙잡고 영화에 쇼핑까지 같이하는 남편을 둔 부인.
결혼10년차가 넘어가나 2세 계획은 없고 여전히 둘사이엔 시댁문제가 살짝 걸쳐져있지만 둘사이의 관계에 해가 될만큼 큰 문제로 여겨지지 않고 대체적으로 평탄하다.
B부부, 일본도쿄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같이 따고 한국으로 돌아와 남편은 벤처회사 일본지사장, 부인은 지방대학 시간강사. 일본지사장이라 남편얼굴은 월2번도 보지 못한다. 50평이상의 큰아파트에서 혼자 매일매일 상 차려 우아하게 밥을 먹는다. 조만간에 분당의 주상복합아파트로 이사한다하고 스카우트 1순위인 남편, 연봉은 억이 넘는다. 인센티브까지 합치면 몇억이 되겠지.
돈이냐 남편이냐의 선택을 강요하진 못하겠지만...만약 선택해야 한다면?(초등생들은 이때 '선택한다'라고 답할까?ㅋㅋ)

여성들의 삶이 보인다.

당당한 실비아.
실비아의 남편은 권력의 맛을 알아가고 그녀는 롤리타의 엄마처럼 남편곁을 떠난다. 어려울 때 함께한 인간적 유대감이라는 건 권력이 주는 달콤한 욕망들로부터 항상 지켜지기 힘든 것들인가? 사회적 성공과 더불어 부를 꾀찬 남성들이 조강지처 버리는 또는 내쳐지는 상황들은 자연스런 절차처럼 보여진다. 내쳐지기 전에 실비아처럼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위해 떠나는 여성들. 멋있지.


 

하지만 권력자의 집을 박차고 떠나는 실비아 또한 속물적 인간이다.
Only악인, only천사일 수 없는, 상황에 맞게 다양한 인간의 모습이 드러날 수도 있다는 다면성에 감독은 주목하는 듯하다.
재능이 보이지 않는 제자 롤리타에게 냉담하고 무심하게만 대하던 실비아는 롤리타의 속물적 친구들처럼 그녀의 아버지가 자신이 좋아하는 유명한 극작가라는 말에 드러날 정도로 표정이 환해진다. 그리고서 그녀에게 노래할 기회를 부여하고 인간적 관계맺음도 한단계씩 진행이 가능해지는거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항. 실비아 또한 음악선생으로서의 권력을 사적으로 살짝 이용하는데 너무나 자연스러워 인식하기 힘들다. 이건 사회생활이나 인간관계에서 일상적으로 드러나는 방식처럼 느껴져서 오히려 섬뜻하다. 왜냐하면 재능이란 것도 가진자에게 기회부여가 더 많다는 것. 이런 논리는 부가 세습되는 철저히 자본주의적 시스템안에서만이 가능한 방식이기 때문.

 

 

사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여성 카린.
에티엔의 두번째 부인 카린. 그녀는 젊은데다 아름답고 너그러움에 인내심까지 겸비했다.
뚱뚱한데다가 성격까지 삐뚫어져서 누구나에게 끊임없이 투덜대고 짜증내는 롤리타를 데려다 끈질긴 설득과 회유로 예쁜 옷을 사게 하고 애정을 주려노력하는 그녀는 가사노동이라고는 손꼽만큼도 도움이 없고 게다가 친구들앞에서 자신을 면박주는 권위적인 남편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권위적이며 독선적인 남편을 이해하고 인내심을 발휘하는 그녀지만 또다른 모습의 속물적 여성일지도 모른다. 에티엔느의 권력과 부가 아니었다면 젊고 아름다운 그녀가 성질더럽고? 2세까지 책임져야 하는 상황을 견뎌낼 수 있었을까? 하지만 이러한 방식의 남녀의 결합은 몇세기동안 공고해진 법칙처럼 보인다.
남편감으로의 남성은 사회적 권력과 경제적 부에, 부인으로서의 여성은 미모와 2세를 낳고 교육할 수 있는 젊음과 약간의 두뇌.
그녀의 순수한 마음을 의심하는 나의 시선에 속세의 때가 묻은 때문인건지도 모르지.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냉정한 걸.


재밌는 장면.


사랑하는 이의 칭찬은 지나쳐도 항상 좋다.
소설가로서의 사회적 성공이 미지수인 남편을 북돋우기 위한 칭찬. 남편에겐 누구의 칭찬보다 사랑하는 이의 입바른 칭찬이 에너지의 근원처럼 보인다.

 

취향에 대한 감독의 여전한 시선.


자신이 주최한 친구들과의 파티에서 힙합보다는 재즈에 더 편향적인 그녀의 음악취향이 여실히 드러난다. 롤리타를 파티에 데려다 준 실비아. 그에게 자꾸 추파를 던지는 멋진? 젊은청년을 마다하지 못하고 음악에 맞춰 같이 춤의 향연에 심취했었으나 힙합이 흘러나오자 그 자리를 떠버린다. 전작 <타인의 취향>에서도 드러나지만 남녀간의 취향이라는 문제는 관계맺음과 관계유지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함을 얘기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다른 측면에서는 미국의 가장 대중적인 최신 힙합에 대한, 문화에 대한 유럽인의 자존심과 함께 문화제국 미국에 대한 감독의 혐오증을 스리슬쩍 드러내는 부분처럼 보이기도 한다.

 

권력에 대한 풍자


유명 소설가로 뜨기전 피에르가 신랄하게 비판했던 TV프로에 얼떨결에 출연해버린 그가 TV안에서 희화화되어 바보되는 장면. 권력은 그렇게 우아하지도 멋지기만 한게 아니란걸 상징하는 상황연출. 미디어의 꼭두각시가 되어버리는 과정은 유명소설가가 되기 위한 까다로운 행보를 예고하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소비되어져야만 문학도 사회적 성공이 가능하다 모 이런걸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해보인다.

 

 

롤리타 진정한 인간관계를 보다


멋진 남친은 데이트에서도 죽죽빵빵의 여자를 데리고 나타난다. 파티에서도 둘은 신나게 춤을 함께 추지만 키스는 다른 여자와 엉켜있다. 그녀는 그걸 바라볼 뿐이다.
롤리타는 왜 자신을 이용하는 멋진 남자를 뻥 차버리지 못하는 걸까? 자신을 이용하더래도 옆에 있어주기를 바라는 외로움의 발현? 그녀의 사랑에 대한 갈구는 엄청 구차하다. 정신차리라고 한대 때려주고 싶을만큼..옆을 돌아봐! 멋진 세바스티앙이 있자나!
세바스티앙는 항상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데 왜 그녀는 그맘을 못 알아보는 걸까.
돈을 빌려주고 일자리를 알아봐주는 그녀는 사심없이 도움을 주는것으로 보인다. 그도 과연 그럴까를 의심하는 건 어찌보면 끊임없이 외모로 인해 거부당하고 아버지의 권력을 미끼로 이용만 당한 상처입은 그녀로선 당연한 거리두기식 관계맺음이다.
세바스티앙이 세속적 미끼?들을 다 버리고 그녀곁을 떠나고서야 그녀는 그의 진정성을 깨닫는다. 세바스티앙은 추운날씨에 떨고있는 그의 어깨에 쟈켓을 걸치는 그녀의 모성애?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세바스티앙은 아직 순수함을 가진 영혼임에는 틀림없으나 세상이 그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같다. 아님..내 머릿속을 갈아엎거나..쩝...

 


넘 잼나다.
곳곳에는 섬세한 유머가 빠지지않고 등장한다.
결코 가볍지 않게 일상적 상황들로 무거운 주제를 자연스럽게 끌어내는 감독의 연출력은 여성감독이기에 가능하지 않았을는지.
딱 내 스탈의 영화. 강추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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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마와 루이스


 

델마와 루이스.

 

그녀들의 일상탈출, 그녀들만의 여행은 죽음의 여행이 되어버린다.
평범한 그녀들이 절박하게 죽음의 벼랑끝에 서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폭력적이고 가부장적인 남편.
여성을 인간이 아닌 섹스도구로만 생각하는 강간남들.
착한여자 등쳐먹는 섹시한 사기범(브래드 피트 나옴).
여성을 성노리개로만 여기는 트럭운전사.
그녀들을 궁지로 내모는 FBI.
모두가 공범이다.

 

약자로서의 여성이 자기방어를 위한 최소한의 행위는 범죄자가 되는 것이고,

그녀들을 옥죄는 사회에 대항하여 선택가능한 마지막 출구는 죽음뿐이다.


두손 맞잡고 자신이 선택한 행위와 결과를 후회하지 않으며 활짝 웃을 수 있는

동지애를 확인하는 그녀들은 저 높은 곳을 향해 달려간다.

 

영화 속 장면 중 가장 인상적인 부분.

어슴프레 어둠이 깔린 저녁,

스카프를 휘날릴 만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그랜드캐년을 오픈카로 달리는 장면.

라디오음악의 볼륨을 높이고

목청껏 소리치며 따라 부르는데...순간 저 밑바닥의 찌꺼기까지 갈가리 해소되며

가슴 뻥 뚫리는 기분.

자연과 하나가 되는 기분이 그런게 아닐까?

 

달리고프다~

 

 

감독 리들리 스컷

주연 수잔 서랜든, 지나데이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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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된다>를 보다

시위현장에서 수갑이 채워진 채 끌려가는 붓다.

그는 외친다. "나에겐 말할 권리가 있다!"

 

<계속된다>

감독 주현숙

 

외로움으로부터 시작하다

감독의 아버지로부터 들은 사우디에서의 이주경험 “외롭다”는 하나의 감정에서부터 이주노동자에게 다가가는 <계속된다>는 프로파간다로서의 영화를 만들었다는 감독의 말이 자칫 즉각적으로 와 닿지 않는다. 이유는 일반적으로 봐온 빠른 속도감의 전투적이고 쎈 듯한 노동영화와는 다른, 사람의 감정에 다가가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광의의 프로파간다는 선전의 목적이 있지만 형식상의 다양함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감정을 움직이는데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미치면 이건 그야말로 감독의 의도가 제대로 담긴 다큐가 되는데 이른다.

 

두 개의 인상적인 장면

가장 인상적인 화면은 두개였다.
첫째, 방글라데시에서의 인터뷰.
저멀리 밝게 고층의 건물이 보이는데 상대적으로 더 어둡게 느껴지는 오른편의 실내에서는 뭔가 희뜻희뜻한 움직임만이 보인다. 소리가 없다면 자칫 잘못 찍은 촬영장면이었을 터이다. 하지만 이 대조적인 시각효과는 인터뷰대상자의 감정을 드러내기에 아주 적절한 표현기법이라는 생각에 미치게 되고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좋은 화면구성이라는 평가를 내릴 수 있게 된다.
주변친구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자신의 나라에 있기보다는 한국에 더 가길 희망한다는 인터뷰어.

그는 일자리가 없이 놀고만 있게 되는 지금의 상황이 싫은 거고, 어딜 가든 일만 할 수 있다면 그곳이 좋다는 거다. 일하고 싶지만 일할 수 없는 상황.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일해야 하는 그에게 조국의 의미보다는 생존이 우선할 수밖에 없는거다.

 

둘째, 마지막 구출버스 장면.
시위현장에서 어이없이 끌려가는 이주노동자들을 한명한명 보호하는 차원에서 버스를 대절해 그들을 구출하듯이 어렵게 데려가는 장면이었는데 보면서 시의 적절한 촬영에 감동하며 여성의 힘으로 밀리고 밀리는 상황에서 제대로 잘 찍었구나 모 그런 생각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촬영은 이주노동자의 작품이었던 것이다.(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굽다"가 버스에서 보이지 않는다)

그 장면을 마지막으로 채택한 감독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감독과의 대화중 이런 질문이 있었다. “그래서? 그래서 뭘 어떻게 하자는 건지요?”
모..아주 공격적인 질문일 수 있는데 주현숙 감독 아주 재치있고 훌륭한 답변으로 이어졌다. 그러면서 감독은 마지막 장면에서 설명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하고 혼자말하듯 얘기한다.
내 생각은 “그걸로 족하다!"이다.


<계속된다>의 선전방식은 구호를 외치고 구체적인 대안을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한국인들이 바라보는 이주노동자에 대한 시선을 바꾸고 그들이 이주노동운동의 주체가 되는 것을 인식하는 것, 그리고 그들이 지금 그걸 현실화시켜 만들고 있다는 처절한 과정을 담담하게 보여주는 것. 그러면서 같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우리도 생각하고 그들도 찾아나가야 한다는 것. 구체적인 방법은 이제 우리가 찾아야 한다는 것을 가슴으로 느끼게 만드는 다큐.

그러니 설명은 괜찮아! 라는 것...

버스앞의 길을 겹겹으로 보호하고 이주노동자에게는 그 길을 튼뒤 어렵게 어렵게 그들을 버스안으로 거칠게 잡아당기는 행위는 왠지 전세계적으로는 찾아보기 힘든 한국에서만 존재하는 인권의 개념은 보이지않는 반인간적 이주 노동자정책, 이주노동자시스템(고용허가제 EPS)으로 고통받는 그들을 심정적으로 이해하고 싶다는 그래서 그들에겐 투쟁에 대한 감정을, 우리에겐 이해의 감정을 끌어내고 싶다는 의미가 상징적으로 보여지는 장면이었다. 특히 느린 속도감의 편집과 단백한 음악은 감정적으로 치우침이 없이 담담하게 그들의 현실을 보는 것같아 감동적이었고 그래서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소리에 귀기울이게 되다

샤말의 말처럼 이주노동자들은 컴퓨터, 자동차안의 부품을 만드는 우리산업의 근간인 3D업종에서 노동을 한다. 실업자 100만이지만 우리가 기피하는 일들, 더럽다고, 월급적다고, 폼 나지 않아서 라고 하지 않는 일들을 그들이 하고 있다. 그들은 노동자일 뿐이다.
그들에겐 말할 권리가 있고 부당함에 대한 표현의 자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입막임 당하고 비인간적인 처우를 당하며 강제 출국당한다. 왜?
처음 와서 배워야만하는 단어가 “개새끼”라니?
왜 그들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고 때리고 임금체불에, 심지어 강제로 그들의 국가로 떠미는가?

명동성당내 농성장의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어디선가 이주노동조합을 만들고 정당한 권리쟁취를 소리높여 외칠 것이다.


그들의 소리에 귀기울이게 만드는 영화.<계속된다>

그들의 권리찾기는 계속될 것이다.

그들의 생존투쟁은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관심도 계속될 것이다.

 

그래서 바뀌어야 한다.

 

개인적인 생각, 미술
다큐가 주는 거칠거나 미완성된 느낌의 테크닉보다는 밤촬영을 의도적으로 썼는지 모르겠지만 화면이 회화적이면서 느린속도감의 편집방식은 감독이 말하는 “분노”라는 감정을 절제하게 만들며 차분하고 냉정하게 현실을 받아들이게 하는 힘이 느껴진다.
또한 몇 개의 카테고리로 내용을 나누면서 영상을 이어가다 정지하며 그 위에 텍스트를 얹는 방식. 익숙한 방식이긴 하나 신선하게 와닿는 이유는 적절한 그림의 화면캡쳐, 그 위에 어울리게 올라간 폰트들...

그런면에서 <계속된다> 다큐는 한국 독립다큐의 기술적 한계(자막의 미숙함, 6mm 필름이 주는 화면분위기의 가벼움)를 살짝 한단계 끌어올리고 있다는 평가를 주고 싶다.

미술이 보이는 다큐라고 할까? 흐흠…


주 감독!
좋았어! 아주아주~~

 

>>사족
주 감독한테 이뿌게 보여서 다큐의 비법전수를 쟁취해내고 싶다는거... 흐흐흐...
글고 주감독에게 받은 초대권5장. 서독제 어떤 영화도 볼수 있는 행운의 티켓.
고마워~ 지아장커영화를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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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과 하루>_영원한 하루, 내일

<영원과 하루>
감독 테오 앙겔로플로스

이미지는 씨네21에서 퍼옴.

 

영원한 하루, 내일

철학적 제목에서부터 감독의 영화이력까지..어려운 영화로 생각되어 잠시 주춤하다.. 결국엔 보게 되다.
테오 앙겔로플로스 영화스타일은 영화의 내용을 이해하기가 익숙하지 않고 그래서 보기도 꺼려진다. 영화의 배경인 그리스의 역사적맥락을 이해하지 못해서인지 연극적 요소가 가미된 영화형식이 익숙하지 않은건지 잘 모르겠다. 타르코프스키와 앙겔로플로스 영화는 기피대상이었다.
최근엔 영화 취향이 많이 선회하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보려고 노력중이고 그러다보니 취향도 변하게 되나보다. 좋다. 그만큼 다양한 시각을 수용할 수 있는 정서적 여유가 가능해지고 그러다보면 세상을 포용하는 시야까지 더불어 넓어지는 기분이다. 나이드는건 이래서 좋다.
각설하고(스포일러성 짙음ㅠ_ㅠ 내용을 알아도 별 문제될만한 영화는 아닐듯하지만)...

 

 

영원한 하루는 내일이다.
하지만 그에게 내일은 없다.

고국의 시어가 그에겐 없다.
그는 외롭다.
사랑하는 이가 그리운거다.


중산층으로 평안하게 잘사는 듯한 딸, 하지만 그녀와의 대화는 마주보며 얘기하지만 서로 다른 주제를 얘기하며 어설프게 엇갈리기만 한다. 요양원에서는 자식도 알아보지 못하는 노모가 어릴적 그를 부르듯 “알렉산더~알렉산더~” 다정하기만 하시다.
그만의 상상속에서 아직도 살아숨쉬는 그의 부인. 그는 그녀가 그립다.
그녀가 원할때는 가까이에 있어주지 못하고 외국의 시어들을 찾아 떠돌기만 했었기에 더더욱 그녀가 그리운 건지도 모른다. 더 애틋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곁에 없다.


 

그러다 길거리에서 소년을 만나다.
군인들에게 모든걸 빼앗긴 알바니아 소년, 소년은 갈곳이 없고 그는 내일이면 여행을 떠나야 한다. 소년과의 여행이 시작되고 그들의 여정은 우정으로 맺어진다.
소년에겐 아이의 앳됨은 보이나 현실의 처절함과 잔혹함을 일찍 알게 된 탓인지 그의 외로움을 따뜻한 마음으로 보듬어주고 이해하는 어른스러움이 있다. 결국 그에게 고국의 시어를 찾아주는건 소년이다.

 

작은 꽃 (코르풀라무 korfulamu)
이방인 (제니티스 xenitis)
시간이 다 되었다 (아르가티니 argathini)

 

소년이 찾아준 시어다.
외국을 여행하며 시어를 찾았지만 정작 자신의 나라 언어는 찾지 못했던 노령의 시인.
그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야 살뜻이 돌보지 못한 가족의 사랑이 보이고, 조국의 시어를 찾지못한 자책감에 휩싸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가족들은 끊임없이 그를 돌봐주었고 사랑으로 조용히 지켜보았다. 청년들은 그의 시어로 한 시대를 살아갔다고 존경의 눈빛을 보낸다. 그리고 소년에게서 고국의 시어를 되찾았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버스정류장의 이름과 승객들의 행위이다.
‘고전역’에서 타는 시인(이름은 까먹었다)과의 조우, 시뻘건 깃발을 휘날리며 씩씩하게 타는 젊은 과격파 청년(그렇게 보인다..그런데 왜인지 모르지만 나중에는 잠자고 있더라), 다투는 연인, 클래식을 연주하는 악사들...
버스에서의 그들과 만남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와닿지 않았다. 현실적이지 않아서 생소했고 읽히지 않아서 어색했던….그래서 앙겔로플로스의 영화는 아직 어렵게 와닿는거..
시어를 찾는 시인에게 철학적이고 역사적 사건들을 연극적 형식으로 나열하는 것 같았지만..모 알수엄따…키노라는 잡지가 발간되었다면 그나마 도움이 되었겠지만 이런 영화를 분석하고 뜯어보기를 하는 잡지는 없는듯...쩝...

 

그에게 소년은 '작은 꽃'이 아니었을까?

작지만 커다란 사랑과 아름답게 향기를 품은 꽃이 되어준 소년때문에 그는 행복을 느끼지 않았을까? 

 

영원과 같은 하루동안의 소년과의 여정.
그는 외롭지 않았고 잃었던 고국의 시어를 찾았다.


>>사족
나의 내일은 아니지만 노년은 어떤 기분일까?

사회적 성공도 부도 인간의 외로움 앞에서는 부질없는 것.
가족보다는 가까이 숨쉬는 걸 함께 느끼는 사랑하는 이가 존재한다는 것 이상의 것은 없다모 이런건지... 어른들 말씀...효자열보다 악처하나가 낫다...모 이런건가..몰지..
결론이 이상하다 어째?



언어를 통해 세상을 보다


앙겔로풀로스 감독 자신이 자주 인용하는 말 가운데 하이데거가 했다는, 언어야말로 우리의 진짜 신분증명서라는 것이 있다. <영원과 하루>에서 그는 하이데거의 바로 그 명제를 믿는 사람, 즉 언어를 통해 집을 찾으려 하고 언어를 통해 세상으로 난 새로운 창을 열려하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 알렉산더는 19세기의 시인인 디오니소스 솔로모스가 결국 완성하지 못했던 시를 대신 완결시키려 애쓰는 인물이다. 알렉산더의 상상의 여행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곤 하는 솔로모스는 실존했던 그리스 시인으로, 그리스가 당시 발칸반도의 맹주로 군림하던 터키에 저항하던 때에 혁명시를 썼으며 그리스어의 통일에 큰 힘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솔로모스는 어려서 이탈리아에 건너가 공부했기 때문에 스물두살 때 그리스로 돌아왔을 때에는 이탈리아어로 시를 쓸 정도였으나 모국어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마을을 돌아다니면 사람들로부터 예전에 듣지 못했던 단어들을 수집했다. 영화 속에서는 솔로모스를 흉내내 알렉산더가 소년으로부터 단어를 ‘사는’ 장면이 나오지만 이렇게 단어를 산다는 것은 순전히 앙겔로풀로스가 지어낸 것이다. 소년은 알렉산더에게 세개의 단어를 가져다주는데, 이 단어들은 영화의 스토리와 주제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소년이 이야기하는 첫 번째 단어인 ‘코르풀라무’(korfulamu)는 엄마 품에서 잘들 때 아이가 갖는 감정을 표현하는 말로, 사랑이나 친밀감을 의미한다. 두 번째로 알렉산더가 소년으로부터 사는 단어는 ‘제니티스’(xenitis)인데, 영혼의 상태와 관계가 있다. 이방인, 그것도 어느 곳에서나 이방인인 사람이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이다. 마지막 단어는 알렉산더와 소년이 헤어질 때 나온다. 영화의 중요한 주제와 관련되는 ‘아르가티니’(argathini)는 원래 “매우 늦은 밤에”라는 뜻으로 ‘시간이 다 되었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 세개의 단어는 알렉산더가 영화 속에서 던지는 중요한 세개의 질문들과 관련된다고 봐도 좋다. “왜 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알지 못했을까?”, “왜 나는 망명의 삶을 살았을까?”, “내일은 얼마나 지속되는 걸까?” 앙겔로풀로스는 이런 질문들을 던지는 것이 <영원과 하루>라고 말한다.

 

홍성남/영화평론가


 

기사를 더 보려면~

http://www.cine21.co.kr/kisa/sec-003100100/2004/11/04111616012605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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