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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1/11
    모니터를 얻다(10)
    자일리톨
  2. 2005/01/11
    영웅 알베르 - 자끄 오디아르(1996)(2)
    자일리톨
  3. 2005/01/11
    룩앳미 - 아네스 자우이(2004)(8)
    자일리톨

모니터를 얻다

형이 모니터를 얻는다고 나가서는 아직 돌아오지 않는다. 이번에 형의 친구회사의 컴퓨터 모니터를 CRT에서 LCD로 교체하는데 회사사장이 기존CRT모니터를 가져갈 직원들은 가져가라고 했단다.

 

현재 우리집 컴퓨터는 공유기를 써서 2대를 돌리고 있다. 한대는 3년전, 또 한대는 5년전쯤에 마련한 것인데, 내가 5년전 컴퓨터본체를 쓰는대신 비교적 좋은 모니터를 쓰고, 형은 3년전 컴본체를 쓰는 대신 나쁜 모니터를 쓰고 있었다. 그런데 형의 컴모니터가 맛탱이가 가는 바람에 모니터의 글씨가 자꾸만 번져보여서 하마터면 시력이 나빠지게 생길 찰나였는데 타이밍이 절묘했다.

 

역시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

근데 이 인간이 왜 아직 안들어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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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알베르 - 자끄 오디아르(1996)

지난주 EBS세계의 명화에서 봤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어머니로부터 "너의 아버지는 1차대전의 영웅이었어"라는 말을 듣고 자라난 알베르는 그 자신도 영웅이 되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의 아버지는 술로 세월을 탕진하다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을 뿐이다. 가난한 어머니는 아버지를 영웅으로 만들어 정부로부터 연금을 타낼 속셈으로 알베르를 속였던 것이다.

그러다 2차대전이 발발하고 알베르의 마을에 독일군이 진주했다가 다시 연합군에 밀려 후퇴한다. 소심한 직물영업사원으로 전쟁에서 몇발자국 비껴나있던 알베르는 자신의 장인과 아내가 레지스탕스, 즉 영웅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고, 이에 굴욕감을 느낀 알베르는 무단가출(?)을 하여 파리로 향한다.

독일군의 지배로부터 갓 해방된 당시의 파리는 온갖 영웅담이 난무하고 있었다. 레지스탕스의 일원으로서 무언가(?)를 했던 사람들은 누구나 영웅이 되었으며, 출신별로 분파를 만들어 서로 대립한다. 애국심과 국가주의를 통해 부풀려진 이들의 영웅담은 런던에서 '자유프랑스의 소리'를 방송하며 소일했던 망명건달이든, 한적한 시골농가에서 영국공군 조종사를 몇일간 숨겨주었던 농부이든 할 것 없이, 악의제국 독일에 대항한 투사로서 추앙받는다.

이때 파리에서 구걸을 하며 살아가던 알베르는 여러곳에서 주워들은 무용담을 가공하여 그 자신도 영웅의 대열에 합류한다.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황임에도 파리는 레지스탕스 조직별로 모임이 성황을 이루며 나름의 정치조직으로 변모해가고 있었고, 그들 사이의 권력투쟁이 본격화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레지스탕스조직에 가입해본 적이 없어 특정조직과 연관이 없던 알베르는,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이유 때문에 프랑스 육군 중령으로 임관을 하게 되고 그는 '공식적인' 전쟁영웅이 된다.

이에 자신의 권력을 만끽하던 알베르는 독일로 끌려간 프랑스인 SS병사들을 체포하게 되고, "프랑스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총살명령을 내리게 된다. 이 일로 충격을 받은 알베르는 자신의 거짓을 털어놓고 당국에 자수하지만, "프랑스의 명예"가 실추될 것을 우려한 프랑스 정부는 이 일을 쉬쉬하며 덮어버리고 만다.

지역이든, 종족이든, 민족이든, 국가이든… 그것은 울타리를 어디다 칠 것인가의 문제일 뿐이다. 인간을 억압하고 파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정의라면, 그 울타리를 어디다 치느냐에 따라서 정의가 뒤바뀌고, 불의를 저지른 죄인이 영웅으로 둔갑해서는 곤란하다.

남한만큼 수많은 전쟁영웅이 존재하는 나라도 드물다. 그리고 국민들의 집단적 콤플렉스 때문인지 그들에 대한 애착도 상상을 초월한다. 김훈의 “칼의노래”나 드라마“불멸의 이순신”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전쟁영웅은 항상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같다. 영웅을 좋아하기에 앞서, 우리는 영웅을 누가 만들어냈는지, 왜 영웅을 만들어냈는지부터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아닐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이순신 동상은 다까끼 마사오가 광화문 앞에 건설했다지 아마?

 

*첨언 : 이 영화에서는 마띠유 카소비츠가 주인공 알베르역을 맡아 열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사실 전 "증오"보고 별다른 느낌이 없었는데, 왜 그렇게 충격적으로 봤다는 사람들이 많은지 난 잘 모르겠어요.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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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앳미 - 아네스 자우이(2004)

* 이 글은 해미님의 룩앳미 내 목소리로 말하기

   사슴벌레님룩앳미,

   리버미님의 룩앳미-인간관계내 권력들여다보기에 관련된 글입니다.


 

 

 

한가한 토요일, 집에 있으면 뭐하나싶어 그냥 혼자 나가서 봤다.

 

영화가 시작되고 나서 등장인물을 보니 어디서 많이 보던 사람이다. 가만히 보니 영화"타인의 취향"의 매력적인 "마니"(아네스 자우이)였다. 그 옆에 보니 같은 영화의 대머리아저씨(장 피에르 바크리)도 있네? 나중에 알고보니 실제로 둘이 부부이며 시나리오작업도 같이 했다고 한다. 암튼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아네스 자우이를 다시 보게 된 것은 행복한 일이다. 왜? 너무 매력적이니까~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해미님이 아주 정확하게 지적해 주셨다. 그 사람의 권력이 아닌 그 사람 자체를 보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또한, 조그마한 권력조각을 쥔 사람이 타인의 호의를 진심으로 바라보기란 훨씬 더 어려운 것임을 이 영화를 통해 실감했다.

 

영화의 후반부, 실비아선생과 세바스티앙은 에띠엔의 권위의 城(?)으로부터 과감히 벗어나는 길을 택한다. 멋있는 장면이다. 하지만 나라면 과연 그 길을 선택할 수 있을까? 레니가 군훈련소에 입대했을 때 차렷!이라는 구령에 자신의 몸이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보냈던 20여년의 교육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한 것이었구나"라고 자조적으로 말했듯이, 나도 20여년간 권력관계를 파악하고 그에 최대한 적응할 것을 교육받아왔다. 내게 있어서도(특히, 내 몸에 있어) 권력은 여전히 저항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순응해야 할 대상이다. 그것이 아무리 미시적인 권력일지라도.

 

그런데 애매한 것은 에띠엔느를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이다. 주인공 롤리타의 아버지인 에띠엔느는 극히 자기중심적인 인간이기에 주변 사람들을 자기가 소유한 권력으로 붙들어매어두고 상처를 입히지만, 그가 하는 많은 행동들은 때로는 예쁜 악동처럼 코믹하게 그려지기도 한다. 권력은 취향의 문제는 아닐터인데... 감독은 에띠엔느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려고 한 것일까?

 

참, 위에서 레니를 인용한 것은 영화를 보고나서 광화문쪽으로 걷다가 우연히 레니와 마주쳤기 때문이다. 예의 그 김영하스러운 웃음을 짓고서 내가 나온 극장안으로 사라진 레니... 마치 화장실칸에서 나오다가 마주친 친구처럼 어색했다. 그때가 눈이 흩날려서 그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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