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만화영화책 - 2006/10/04 16:23

잭 런던의 장편 소설이되 잭 런던만의 장편소설이라하기엔 좀. 쓰다 만걸 후대의 로버트 피쉬가 완성시켜놓았다.

하지만 상관없다. 뒷 부분은 스릴러일 뿐이다. 사실 이 소설이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은 앞부분에 촘촘히 다 짜여져있다.

그가 -비록 완성하지 못했으나- 썼던 이 소설은 꽤 의미심장하다.

 

 

 

내용은 간단하다.

 

옛 맑스주의자들이 만든 암살단.

주로 들어오는 의뢰는

뭔가 꾸미려하지만 항상 어설퍼서 실패하고마는 아나키스트들 대신 사회의 악을 처단하고,

'아나키가 한 일'이라고 떠들 수 있도록 해주는 일이 많다.

이들은 처단할 대상에 대해 실제로 '사회의 악인가?'라는 점을 냉정한 평가를 통해 판단한다.

평가 후 처단이 결정되면 1년 안에 처리하는데, 혹시 못하게 되면 의뢰인에게 대가를 다시 반환한다.

 




어느날 그들의 존재와 방식은 그릇되었다고 생각한 한 젊은이가 암살단의 지도자를 만나 지도자의 목숨을 의뢰한다.

젊은이는 그들의 존재 자체의 모순과 암살이 주는 사회의 위기에 대해 수준높고 열띤 구라구라를 통해 풀어나가고, 지도자는 결국 그의 논리에 굴복하고 만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

젊은이는 '이제 암살단이 해체되겠지'라고 생각했으나 지도자는 스스로를 처단의 대상으로 지목하고 온 조직망을 동원하여 자신의 처단을 명한다.

 

갑작스레 지도자의 대리가 된 젊은이.

그가 만나게 되는 조직원들은 하나같이 학문에 능통하고 고상하고 순수하고 논리적인 이성을 지닌 지식인들이다.

그들의 이치에 맞는 한 무슨일이든 충실하게 따르는 조직원들과

마찬가지로 조직의 이치에 너무 충실하여 조직원들과 서로 죽고 죽이는 사이가 된 지도자.

 

보기엔 그냥 '미친놈들!'일 뿐이다.

그러나 이 고지식함의 사슬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동네에서 '빨간약을 먹었다'며 좌절하는 네오의 후예들을 몇명 보긴 했어도

솔직히 운동의 역사도, 계보도, 계파도 하나도 모르니

'네가 뭘 안다고?'라고 한마디 들을 수 있겠으나,)

 

마치 원리원칙에 갇혀 끝내 자멸해버리는 일군의 좌파를 보는 것 같으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의 진정성이라면

충분히 그들과 공명할 수 밖에 없는 측은지심이 발동할 것 같은 기분이다.

 

물론 그게 누구인지,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말이다.

여자 캐릭터는 남자들 이어주는 물건에 지나지 않아 살짝 기분 나쁘지만

어떻든 소설로써의 박진감 자체도 만만치 않은 글.

 

* 그림출처 : 알라딘(http://www.aladd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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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04 16:23 2006/10/04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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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풍경관람기 - 2006/10/03 20:41

이 길 지날때면 꼭 한번 찍어보고 싶었는데, 버스 안에서 찰칵!

개인적으로, 쟤가 저 가운데 서 있는 건 왠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분명 멋져보이는 데, 분명 별일 아닐터인데, 상당 애쓴다는 생각에 알 수 없는 애처로운 감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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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03 20:41 2006/10/03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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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6/10/01 21:44

개럭키스님의 [믿거나말거나]

물들래님의 [일민미술관, 믿거나 말거나 박물관] 에 관련된 글.

 

"현대미술은 나의 취미"

이런 생각을 가진 작가는 미술관에 박물관을, 백화점을, 시끌벅적 시장을, 온갖 물품 공장을 옮겨왔다.  일명 [믿거나 말거나 박물관].

 

보통 전시장에 가면 정신을 집중하여 느낌을 받으려 노력하지만 이번 전시는 다르다.

그냥 재미있는 물건들이 쌓여있는 근처 골목들을 뱅뱅 돌고 있는 기분이다.

우리는 밟고 있는 세상을 무한생산되는 공산품 속에 쓰레기로 만들고 있지만,

하찮은 쓰레기도 의미를 부여하면 사람이 즐기는 아름다운 기예, 즉 예술이 되는 법.

 

사람이 만들어낸 것들이다. 역시 아름답다.

그러나 쓸쓸함을 넘어 씁쓸함이 느껴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도곡동 유여사가 보낸 화환..ㅋㅋ



 


 

 

 


 

 


 


 

 


 

 


 

 

 


 

 

 


 

 

복수할거야...질 수 없어...누군가 날 보고 있어

 

돈 좀 있어?...지켜볼께...잊지 않아

 


 

 


 

 


 

 


 

 

 

 

제목 '마씨' ㅋㅋ

 

 


 

 

꽤나 수준 높은 수집가의 방 한켠같은 느낌.

 

역시 나무는 사진으로 봐도 머리가 상쾌해진다.

 

 

* 사진출처 : 직접 찍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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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01 21:44 2006/10/01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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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6/09/08 15:55

프랑스와의 수교 120주년 맞이 각종 행사가 열리고 있는데, 대림미술관의 [프랑스 현대패션 사진전]도 그 일환.

패션 사진전이다보니 '옷 구경이나 실컷 하는 것?'이란 생각으로 갔는데, 그래도 역시 방점은 '사진전'에 있었다.

유명해보이는 잡지 사진이나 패션모음집 등에 사용된 것들이라지만 꽤 볼만. 왠지 우리네 패션잡지보던 때의 마음가짐과 전혀 다르다고나할까?

그냥 남의 나라 거라니 신비해보여서냐?(ㅋㅋ)

아님 우리나라에선 맛보기 힘든 문화 자유, 문화 풍성, 문화 해방감의 차이인가?

 

사라 문의 ['보그'걸을 위한 수영장 작업](1983)은 왼쪽 개를 통해 내뿜어지는 動적 이미지와 오른쪽 소녀를 통해 발현되는 靜적 이미지가 개끈이라는 끊어질 듯 위태로운 한가닥 선으로 연결되어져있다. 훤히 보이는 개의 얼굴과 그늘에 가려진 소녀의 얼굴 대비도 인상적이다.




 

 

['보그'영국판을 위한 소니아리켈](1976)에서는 정장입은 애꾸눈 고양이에게 차를 권하는 여인들의 모습이 연출되는데, 코믹한 설정과는 달리 과묵한 표정들이 마치 피카소의 삐에로를 보는 애처로움을 자아낸다.


 

사라 문이 찍은 작품 중 가장 독특했던건 [웨딩드레스 '보그')(1984)였다.

인터넷에서 사진을 못 구하다니 안타까움.

무엇으로 통할 지 모르는 벽의 거대한 구멍(좌)과 반드시 삐그덕거릴 것 같은 계단(우)사이에 웨딩드레스가 걸려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촬영하고 있는 모니터와 카메라의 모습이 사진 안에 그대로 담겨져있다.

벽의 못에, 옷걸이에 걸린 웨딩드레스는 마치 결혼의 무게라도 되는 양 축 늘어져있는데, 실제 사람이 진짜로 걸려있는 듯 한 모습이다. 거기에 계단 쪽의 문이 만들어내는 그림자가 웨딩드레스를 가리려는 듯 도사리는 모습이 암울함을 더하는 듯 하다.

 

['노바'를 위한 인간 - 거울작업](1971) 역시 매우 흥미로웠는데, 거울 앞뒤 몸통에 건 두 남자와 한 여자가 삼각형의 꼭지점을 이루듯 서있는데, 서로의 거울을 통해 서로를 비추는 형상이 마치 그들의 거울이 서로를 마음 속에 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물론 거울이 없는 여인 앞에서 '서로의 마음에 서로 품기'는 끝이 나버리지만...

 

[이세이 미야케를 위한 테레사 스튜워트](1995)는 적흑의 강렬한 대비가 인상적인데, 옷이 마치 거대한 꽃과 같다. 벽과 나란히 서있는 그녀를 비스듬히 찍은 것이 역동성을 더하는 듯 하다. 이런 풍의 사진이 몇개 있는데, 모두 포르말린 냄새가 날 듯 과도하게 인공적이다.

 

 

사라 문의 작품 중에 [해부적 구조](1997)는 인체의 척추를 따라 내려오는 옷 모양새가 마치 인체의 내부를 투시하고 있다. 옷을 입었지만 X-ray를 찍어놓은 느낌.

 

작품들 중에는 사진끼리 이미지 연결이 되어 있는 것들도 있다.

[샤넬](1990)은 단정히 서있는 모델의 나부끼는 치마폭이 인상적이고, [오스텐드](1990)는 거대하게 몰아치는 파도와 한갈래 길 같은 둑방이 있는데 이 두 작품은 파도와 치마폭의 실루엣에서 서로 느낌으로 연결되어 있다.

 

아래 사진은 데보라의 [무제_'Parco'를 위한 풍경](1981) 9개의 사진 중 한 작품이다.

그중에서도 이 세여인이 등장하는 시리즈는  총 3장인데,

첫번째 사진은 세 여인이 모두 무표정한 표정으로 창밖을 보는 거였다.

아래 사진은 두번째 사진인데 오른쪽 끝의 여인 표정이 어느새 매우 강렬. 가운데 여인이 곁눈질로 의식하고, 왼쪽 여인이 이미 상황을 알지만 피곤한 듯 무시하는 표정이 뭔가 긴박감을 더해준다.

 

이 사진 다음의 세번째 사진은 사진 각도가 오른쪽 여인에게로 넘어왔는데,

왼쪽 두여인과 오른쪽 여인 사이의 창틀이 어느새 문으로 차단되어 있었다.

마치 감정의 골이 더이상 회복할 수 없는 차단의 상태로 치닿고 있음을 나타내는 듯 하다.

 

프랭크 페랭의 [데필레 028](2004)는 엄청나게 큰 원형 무대에 K2나 미국 권투무대를 연상시키는 천장의 조명들 아래 워킹 중인 세 모델을 나타내는 데, 정말 인간이 자잘해보인다. 마치 SF의 한 장면같아보이기도 하고...

 

 제라르의 [꿈의 파브릭_아브라함폴햄 1999 봄/여름 오트 쿠튀르](1999)는 처음엔 두 남자가 잡고 있는 손이 옷을 벗길 듯 말듯 해서 불안정해보였지만, 살짝 보인 모델의 웃는 입술이 상황을 마치 정지상태로 만든 것 같다.



 

장 라리비에르의 [신기루-"씨티즌 K를 위한 패션" 시리즈](2001~2)는 마치 환타지 소설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듯 하다. 아래 사진은 가위를 들고 날고 있는 여성들이 마치 마녀인 양 보이지만 왠지 공포스럽지는 않다.

신기루시리즈는 희한하게도 무서운 또는 무표정과 과장된 원근법, 위험해보이는 물건(가위) 때문에 위협적으로 보일 것 같지만, 사용된 요소와는 전혀 다르게 굉장히 코믹스럽고 유쾌해보인다.

 

 

아래 사진도 신기루 시리즈 중 하나인데, 눈감은 살아있는 줄인형, 다가오는 가위, 망망대해인지 호수인지가 폭풍 전야의 기분을 느끼게 한다. 죽음 또는 종말을 앞둔 줄인형 모델의 표정이 아이러니하게 참 고요하다.


 

프랑소와즈 위기에의 작품들도 흥미로웠는데, 구도가 정면이 아니라 항상 비뚤어져있고 모델이나 옷이나 기타 찍고 싶은 것들의 일부가 반드시 잘려있다. 위기에는 르포기자 출신이라서 극적이고 일시적 화면을 담고자했다고 한다.

 

 

패션 사진은 '대중문화의 가장 예민한 센서'라고 한다는데,

굳이 말하자면 보이는 세상 반쪽 문화의 센서같다.

이 세계는 더러움이란 없다는 듯 정돈, 깔끔, 인공, 가식, 조작된 아름다움, 조작된 행복, 관리된 풍요의 세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세계는 그로 인해 생길 수 있는 행, 불행이라던가, 만족, 불만족이라던가, 흥분, 냉정이라던가의 일관된 감성 정의가 힘들다.

그 세계로 인해 나는 역시 풍부한 감정을 겪게 된다.

 

그들의 세계는 다들 아는 知의 세계같지만 생각 외로 未知의 세계다.

마치 영화 [콘스탄틴]에서 현실과 지옥은 동떨어진 게 아니라 바로 같은 세계를 다르게 본 것 뿐이었던 것처럼...

 

* 사진출처 : 대림미술관(http://www.daelimmuseum.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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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08 15:55 2006/09/08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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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육 | 노조 | 이야기 - 2006/09/06 19:46

최근 두 가지 경험과 1년 몇 개월전 돌봄노동에 대한 스터디 내용이 머리 속에서 짬뽕되면서
육아의 사회화를 넘어선 돌봄의 사회적 분배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지고 있다.
물론 새삼스레 다시 생각해보는 기회를 일부러 만든 건 주말에 한 단체의 페미니즘학교에 가야한다는 압박 덕분이다.-_-;;;

나는 역시 쪼여야 생각하는 게으름뱅이..ㅋㅋㅋ

 

두 가지 경험 중 한 가지는 알엠님과 함께 영상작업하면서 들은 말인데,
‘처음엔 아이를 좋은 어린이집에 맡기게 되어 너무 좋았는데 나중에 보니 타인(교사이려나?)을 착취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라는 것.

다른 한 가지는 누구랑 인터뷰하다가 내가 무심결에 내뱉은 말인데,
보육노동이라는 것이 ‘노동’이라 인정받았다는 측면에선 사회화되었다 볼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자본주의와의 잘못된 만남으로 인해 저급, 무가치 노동으로 치부되었다고... 여전히 여성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돌봄노동과 터무니없는 가치 절하 속에서 과연 사회화가 맞는지 모르겠다고...

 

결과적으로 느낀 점은
1) 일단은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는 돌봄노동의 사회화, 육아의 사회 책임을 명확히 하는 육아의 사회화를 이룰 필요가 있다는 점,
2) 그러나 사회화 과정에서 손상될 수 있는 관계 중심 사적 돌봄 영역까지 포괄하려면 육아의 사회화를 넘어선 실질적인 돌봄(보육을 포함한 모든 필요 돌봄)의 사회적 분배가 필요하다는 점
이다.

 

예전에 지나가는 말로 '군대 의무복무처럼 돌봄 의무복무제를 도입해야 되려나' 했는데, 이 제안 말고 마땅히 다른 방법을 못찾겠다. 아직까지, 진짜로...

 

완전한 육아의 사회화로 해결하면 사적 돌봄에 대한 완전한 상실이 올테고,
사적 돌봄 책임자에 대한 빵빵한 육아 지원을 중심으로 두면 여성 돌봄 편향이 해소되지 않을 터이니 남녀차별이 여전 존재할테고...

 

아무래도 인류학과 지역공동체 문화에 대해 공부해봐야 할 듯. 사람을 모르겠어, 사람을...




사회화라는 화려한 장막에 갇힌 보육 노동자와 그들의 투쟁

 

 

소위 ‘여성(이 하는) 가정 내 노동’이라는 것들의 잘못된 사회화

 

공간만 이동한 착취의 고리

 

예로부터 가정 내에서 행해져온 노동들은 노동자와 노동력 유지 재생산에 필요한 필수노동이다. 이 노동들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한 사람에게 집중될 경우 그 사람에게 커다란 해를 입히는 노동이므로, 역사적으로 계급사회는 자신을 유지하고 재생산하기 위한 노동을 착취당하는 집단-대체로 여성-에게 전가해왔다.
이렇듯 ‘가정 내’, ‘여성의 의무’, ‘가치 없는 활동’으로 표상되는 보육노동이 80년대 도시빈민과 90년대 맞벌이부부의 증가에 힘입어 ‘일자리’로 사회적 승인되었고, 어느새 ‘교사’라는 이름으로, 더 나아가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사회라는 공적 영역에서 노동을 인정받았으니 ‘사회화’되었다고 지칭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21세기를 맞이하는 현대에 이르러서도 청소를 하고, 아이를 돌보고, 노인을 돌보는 노동자는 표피적 사회화를 이루었을 뿐, 그들에게 매겨진 터무니없이 낮은 노동 가치과 노동자들의 주된 성별은 그들이 남녀차별적 사회에서 상존하는 피착취자 집단임을 드러낸다.

 

극도로 악화된 노동조건은 시장화에서 기인하기 마련이다. 실제 국내에선 시설의 95%가 영리를 추구하는 민간어린이집으로 구축되면서 시장화가 상당히 진전된 상태이다. 이러한 현장 속에서 보육노동자는 하루 11시간 노동, 월 100만원도 안되는 임금, 만성적 고용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정부의 지원 정책 또한 국공립어린이집 구축과 운영보다는 ‘기본보조금’이라는 이름의 아동별 지원만으로 일원화할 방침이다. 복지에 있어서 수요자에게 수당을 주는 방식은 실제 해당 복지가 어떻게 충족되었는지 내용에 대해서는 정부가 관심 갖지 않겠다는 뜻이다. 따라서 현 정권의 보육정책은 정부의 신자유주의 작풍에 따라 보육 시장화를 더욱 부추기고 있는 셈이다. 영국에서도 대기업이 보육시장에 개입하면서 여성 돌봄노동자들의 임금과 노동조건을 하락시킨 바 있다.(Daly,2000)

 

결국 자본주의 내에서 부실한 공적 부조와 돌봄노동자의 저급 노동시장 편입방식의 사회화가 진행되면서 진정한 의미의 ‘가정 내 노동의 사회화’는 실현되었다고 보기 힘든 상태이다.
‘보육을 사회가 함께’라는 목표에 충실했어야 할 공적 영역 구축이 오히려 ‘적당한 피착취자(주로 여성)에게 돌봄 미루기’, ‘여성 중심 육아 책임’을 고착시키는 데 일정 몫하고 있는 건 아닌지 우울한 판단마저 든다.

 

 

돌봄노동을 바라보는 비사회화된 시선들

 

돌봄노동자들을 바라보는 여전히 비사회화된 시선은 같은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얼마 전 들은 한 강의에서 강사가 각종 노동조합의 강의 시 육아도우미 제도를 운영해야 여성조합원의 참여가 평등하게 보장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맞는 말이다. 현실적으로 보육의 책임이 여성에게 집중된 상태에서 교육받을 동등한 기회를 보장하려면 육아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그러나 보육노동자 입장에서 그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가장 먼저 고민되는 건 ‘육아도우미’의 노동조건이다. 아무런 보장 없이 이벤트 따라 고용된 육아도우미는 어쩔 수 없는 비정규노동자이다. 더 심하면 특수고용직일지도 모른다. ‘연맹 단위정도에서 정규직으로 채용하면 안 되나?’하는 온갖 잔머리를 굴리며 강의 듣기를 뒷전으로 하고 말았다.

 

올해 안에 어느 당의 안이든 통과될 것 같은 장기요양법안에서도 역시 요양서비스 제공자인 돌봄노동자의 지위 인정에 대한 고민은 찾아보기 어렵다. 장기요양에 대한 어떠한 기관에도 간병노동자는 채용에 대한 언급이 없는 걸 보면 간병노동자는 이미 지정된 비정규, 저임금, 장시간 노동자이다. 또 하나 놀라운 점은 요양받는 자를 향한 간병노동자의 폭행이나 성폭력 등에 대한 처벌 조항은 존재하는 반면 그 반대의 상황에 대한 명시는 없다는 점이다. 실제 요양받는 자로부터 받는 폭언과 폭행은 간병노동자들의 입을 통해 종종 흘러나온다. 노동권을 너머 인권마저도 무시될 소지가 농후한 상황이다.

 

심지어 노동계 안에서도 돌봄서비스는 ‘제공받아 마땅할 서비스’라는 생각에서 진일보하지 못한다. 그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노동자, 즉 돌봄노동자에 대한 고민까지 가는 길은 꽤 머나먼 여정이 될 것 같다.

 

육아의 사회화를 포함한 돌봄의 사회적 분배에 대하여

 

‘육아의 사회화’.
일종의 사회주의적 표현으로 취급된 꽤 과격해 보이는 표현.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보육노동자 입장에선 생존에 관련된 노동권 인정의 문제와 연결되기도 한다. 80년대부터 보육운동가들 사이에서 꾸준히 회자되어온 이 표현은 육아에 대한 정부와 사회의 명확한 책임을 나타내는 적합한 표현으로 인식되어왔다.
육아의 사회화 요구 시작은 방치되는 저소득층 아동의 발견에서부터였다. 농촌에서 상경한 도시 빈민층의 자녀는 부모가 맞벌이 나간 사이 잠궈 놓은 방문 안에서 연탄불에 질식사해갔다. 도시빈민 자녀의 유기에 가까운 상황이 지속되면서 탁아에 대한 사회적 책임론은 물 위로 올라올 수밖에 없었다.


당시 사회적 책임의 외현화는 탁아소 설립운동에 있었다. 실제 사회라는 공적인 영역 안에 정부가 지원하는 시설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물론 정부의 공공 지원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민간주도의 시설 설립이 줄을 이었다.


이후 90년대 중산층 맞벌이 부부의 확산은 보육시설의 보편화를 추동해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조차 사회화는 여전히 유효했다. 이미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소용되는 비용은 한 가정의 경제규모를 훨씬 넘어섰기 때문이다. 2004년 여성가족부의 적정보육비용 연구 보고에 의하면 만1세아 1인을 키우는데 어린이집에서만 소요되는 최소비용이 월 70만원을 넘는다.
따라서 육아의 사회화, 보육의 공공성이라는 구호는 현실적으로도 매우 타당한 요구인 셈이다. 이를 위한 무상보육 실현, 보육관련 기관의 정부 직영, 보육노동자의 정부 직접 고용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과제이다.

 

한편 육아의 사회화에 천착하다보면 관계성 중심의 사적 영역에서의 돌봄을 간과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 어린이집에 있다 보면 아이를 맡기러 오는 사람의 성은 대체로 여성이고 집에서 부모이외의 대리 보육자 역시 대부분 할머니들이다. 결국 21세기 현재에도 아동을 둘러싼 돌봄의 테두리는 여전히 여성들 밖으로 단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예를 들어 스웨덴의 남성 육아휴직 사용 의무화 같은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보육 공공성 확보는 미완인 채 여전히 여성의 착취에 기반한 거대한 사적 영역의 방기가 유지될 것이다.

 

따라서 보육은 공적 영역화된 보육서비스의 공공성 확보 뿐 아니라 사적 영역을 포함한 전 사회적 책임 분산 모델 구축이 폭넓게 사고되어질 필요가 있다. 실제 한 미국의 학자는 돌봄이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집중되는 것은 착취의 재생산만 초래한다고 보고, 시민적 의무로 승화시켜 사회 구성원 모두 일정 기간 ‘돌봄 봉사’에 참여하도록 하는 사회 모델을 제안한 바 있다.(Bubeck,1995)

 

 

이후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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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06 19:46 2006/09/06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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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생각_펌 - 2006/09/06 15:07

S 어린이집 소식지에서 펌.

아이들은 역시 딴 세계 사람들이라니까... ㅋㅋ


* 심장이 누굴 사랑해?

 

녹차물을 마시고 있던 K이모(선생님)를 본 아동 Y.

 

아동 Y : 이모 그거 뭐예요?
이모 K : 이거 녹차물이야. 아이들한텐 별로 안 좋아.
아동 Y : 왜요?
이모 K : 녹차엔 카페인이라는 성분이 있어서 아이들은 이걸 마시면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도 한대.
아동 Y : 두근두근? 심장이 누굴 사랑해?


 



* 똥이 자꾸 거짓말해.

 

K 이모와 아이들이 동네 산책을 나가는데,


아동 J : 이모, 똥 쌀래요.
이모 K : 그래, 싸

 

J, 그냥 나오더니,

 

아동 J : 안 나왔어.
이모 K : 그래?

얼마 지난 뒤, 다시 화장실로 간 J, 찝찝한 표정을 하고 나오며

아동 J : 이모, 똥이 자꾸 거짓말 해. 나올라 그러다가 안 나와.

 

* 이모, 시계 아파?
 
저녁 7시가 넘어 H 이모가 화장실에서 걸레를 빨던 중, 아동 C가 슬그머니 오더니,

 

아동 C : 이모, 뭐해?
이모 H : 어, 이모 빨래해.

 

손목시계를 차고 걸레를 빨고 있던 H 이모,

 

이모 H : 이모 시계 좀 가지고 있을래?

 

손목시계를 풀어서 주었지요. H 이모의 손목시계는 투명이라 속이 다 보이는 것이었어요.

아동 C, 시계 뒤쪽의 동그란 부분을 가리키며

 

아동 C : 이모! 이거 뭐야?
이모 H : 어, 그거 시계약이야.

아동 C,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아동 C : 시계 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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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06 15:07 2006/09/06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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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6/09/02 14:21

pannella님의 [롭스 & 뭉크 전시회]

사뿐사뿐.Idolog님의 [뭉크&롭스전] 에 관련된 글.

 

이 전시의 부제는 [남자와 여자]이다.

그러나 제목에 [악마/돼지와 여자]라고 적은 건 남자는 안보이고 그 자리에 악마와 돼지만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물론 악마주의를 세상 종말의 징후로 보고 이를 이끄는 존재를 여자라고 생각했던 화가들의 작품을 대하는 21C 여성인 나에겐 

관람 내내 그게(남자) 그걸(악마와 돼지)로 보이는 야릇한 체험 상태였지만...ㅋㅋ

확실히 부제 [남자와 여자]는 표현 상 어폐가 있을만큼 '남자'가 안보인다.

오히려 남자와 여자는 마치 '관찰하는 자와 관찰당하는 자'의 경계라도 되는 것 같다.

 

창부정치가(1896)

 



남성이 되어 즐겨볼까하다가

괜히 좁은 속에 '지들이 세상 망쳐놓은 주제에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는 외침이 머리속을 메아리치고 있는 지라,

그냥 편하게 여자인 내맘대로 해석하고 즐기기로 했다.

제일 간단한 방법으로

작가들이 관찰의 대상인 여성(뭔가 남자와 달라 인간이 아닐 것 같은)을 그린 동안,

나는 그들의 그림에 표상된 여성이 되어 악마와 돼지들의 세계를 보고 있었다.

 

 

롭스는 책 속 삽화 그림을 많이 그렸던 것 같은데 이 작품 [주술] 역시 옥타브 위잔의 [여전하] 中 '마법의 거울'편에 수록된 삽화이다. 별 설명없어도 무슨 분위기인지 척보면 알만한 상황. 여성에 대한 화가의 전형적인 시각을 볼 수 있다.


 

 

[사탄-골고다]는 롭스의 사탄 연작 시리즈 중 하나인데, 예수의 모습을 한 악마와 그 아래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목졸리고 있는 여성이 보인다. 

사탄 연작은 악마주의의 도발을 새로운 위기로 받아들이고 육체에 대한 두려움을 표시했다는 데, 시리즈중 [사탄-제물]이 참 인상적이었다.

사탄의 몸통이 사탄을 나타내는 데 주로 쓰이는 소 두개골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주변부에 날아다니던 천사를 패러디한 해골모양의 아기악마들, 오~ 압권.

 

 

롭스는 어릴 때부터 인물을 캐리컬쳐화하는 걸 좋아하고 썩 잘했다고 한다.

이 작품 [발론지방의 장례식] 역시 인물을 희화한 것이 인상적이다.

특히 장례 진행중인 신부가 너무 가까이 얼굴에 갔다댄 성경을 보면서,

언젠가 보좌관이 써준 글을 있는 그대로 교과서 읽듯이 읽던 국회의원이 떠올랐다.

 

 

[악녀- 범죄의 기쁨]도 '악녀들'이라는 시리즈 중 하나인데 역시 소설 삽화로 쓰였다고 한다.

남성을 꼬신 여성이 메두사상에서 키스하는 동안 남성에게 버림받은 여성은 상 아래서 캬라멜 녹듯 녹고 있다. 롭스는 '이미 악마는 지배하고 있고 여성을 매개체로 사용한다'고 했다던데, 그림 상으로만 보면 어찌 그 결과의 가혹함 또한 다시금 여성의 몫이 되는지...

 

사실 악녀들 시리즈 중에는 [악녀들-돈후안의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 매우 인상적이었는데, 나신의 여성이 뭉크의 [사춘기]에서 본 소녀의 자세와 비슷하게 살짝 겁 먹은 듯, 울먹이는 듯한 표정으로 앉아있다.

그리고 돈후안이라고 추정되는 남자는 온 몸을 망토로 가린 채 흐릿하게 뒷편에 보인다. 마치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는 남자의 모습, 베일을 선호하는 모습, 악마같은 대체물로만 발현되는 모습을 상징하는 느낌이다.

 

 

롭스의 그림이 상대적으로 화려한 반면 뭉크의 그림은 상대적으로 칙칙하기 이를 때 없다.

그러나 이 그림 [마돈나]만큼은 다르다. 그림 속 그녀는 사랑스러운 동시에 두려운 존재이며, 육체적이면서도 정신적인 존재이다. 그녀는 매우 매혹적이면서도 뭉크가 꿈꾼 순종적인 여성의 이미지도 동시에 내재하고 있다.

한편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아기와 정자들은 여성과 모성을 동시에 표상함으로써 그녀를 완벽한 '마돈나'로 만드는 데 성공한 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보기에 오히려 이 그림은 많은 여성들이 섹스할 때마다 겪게 되는 임신에 대한 공포를 극단적으로 표현했다는 느낌이다.


 

 

[흡혈귀II]는 뭉크의 여인에 대한 피해의식, 선입견을 그대로 표현한다. 그래서 심지어 자기 자신을 여성의 제물로 바치고 있다.

 

이 작품[골목길]은 그린 이의 의도와 나의 받아들임이 완전 반대인 대표적인 경우인데,

화가는 숨 막힐 듯한 골목길에서 여성이 마치 남성을 희롱하는 듯 상징적인 구도와 포즈로 묘사한거라고 큐레이터가 적어놨더라.

그러나 나는 아무리 봐도 권위적 남성성이 극대화된 완전 정장 차림의 수많은 남자들이 골목을 만들고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한가운데인지라, 그 여성이 희롱당하기보다 희롱하고 있다는 게 참 믿기기 어려운 상황 판단이다. (선입견 과도?ㅋㅋ)


 

 

'여성은 악마의 공범자이며 남성이 저지른 모든 살인 , 범죄 , 혐오는 여성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라고 말했다길래

그림 안의 여성들이 일정 정도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자 권력도 있는 존재인 줄 알았는데... 현실과 똑같네.

여전히 여자는 악마가 될 수 없었고 그저 악마의 시녀일 뿐이다.

그리고 그 이유만으로 어떠한 처벌과 수치와 모욕도 모두 받아 마땅한 존재이다.

 

적어도 나에게 그림의 안과 밖은 같은 세상이다. 마음 편히 숨어들거나 거만해지거나 평정심을 유지하거나 내가 '나'로 있을 만한 공간은 극히 드물다.

만국의 여성들은 한(恨)으로 승화하려나?

 

* 그림 출처 : 덕수궁 미술관 http://www.deoksug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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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02 14:21 2006/09/02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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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풍경관람기 - 2006/09/01 12:33

집회할 때 앞에 있던 건설엔지니어링 노조 동지 머리띠 묶는 걸 찍다보니 연속사진이.ㅋㅋ

 

묶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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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01 12:33 2006/09/01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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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풍경관람기 - 2006/09/01 12:20

30일부터 공공연맹 장기투쟁사업장 집중투쟁이 시작되었습죠.

거의 동참을 못하고 있지만 서리...

31일의 살인적 일정이라니...

10시부터 건엔노 도우지부, 조세연구원지부, 산재관련, KTX, 연맹 서울본부 출범, 포항건설노조 집회까지...(제가 그렇게 다녔다는 게 절대 아니고요..ㅋㅋㅋ)

그 집회들을 거쳐온 대오들이 KTX 집회에 빼곡히 앉아있대여?

 

31일 오후 2시 반 서울지방노동청 앞에서 불법파견 판정 촉구, KTX 승무원 직접고용 쟁취를 위한 집회 모습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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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01 12:20 2006/09/01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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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생각_펌 - 2006/08/31 17:38

프로야구 송진우 투수가 나이 40에 뭘 했다던데...

나이 40인 것도 선수세계에선 대단한 것 같고, 뭘한 것도(대체 뭘한겨?) 대단한 일인 듯.

상기된 음성, 진정성 묻어나는 목소리로 라디오 진행자 김미화가 "우리 회장님!"을 외친다.

 

구단의 방해공작을 뚫고,

프로야구 노조를 만들고,

선수협의회 초대회장을 맡은 송진우 선수.

 

그래서 그는 '회장님'이(었)다.

나름 한철이라는 선수생활 끝장날 걸 감수하고 자리 맡은 그에게 보내는 경의의 호칭, '회장님'.

 

그녀가 송진우 선수를 '회장님'이라 불러줘서,

그의 장수하는 선수 생활의 진정한 의미와 중요성이 새삼 높아진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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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31 17:38 2006/08/31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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