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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 말

최근에 내가 했던 말 중에서 지금 불쑥 기억난 내용들;

 

"노동자, 민중의 삶을 벼랑 끝으로 몰아가는 이 천박한 자본주의 나라에서

 노동조합은 저에게 큰 스승이었고 조합원 동지들은 언제나 희망이었습니다."

(지난 토요일, 선거용 1분 동영상 촬영할 때 내가 읊조렸던 첫 대사)

 

"내가 노동조합을 통하여 세상을 바꾸지는 못했을지라도,

 노동조합이 내 삶을 바꾼 것은 분명해요.  

 노동조합은 내 삶을, 그것이 없는 것보다  훨씬 건강하게 만들어 주었으니까요.

 만약에 노동조합이 아니었으면 내 인생은 크게 망가졌을 것 같아요.

 구태여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을 이럴 때 빌어온다면,

 노동조합이 내 삶을 바꾼 이상 저 편에 있는 세상의 모습도

 아주 쬐금 바꾸지 않았을까 싶기도 해요.

 하지만, 당대에 조바심을 낼 이유는 없지요, 뭐.

 길게 보면서 대체로 난 낙관해요."

(진보네트워크 6주년 행사에 갔다가 돌아오는데, 배모 동지가 물었다.

 노동운동을 하면서 세상을 얼마나 바꾼 것 같으냐고, 힘들지 않냐고?

 마침 고모 동지도 함께 있어서 우리 둘에게 동시에 던진 질문이었고,

 거기에 대한 내 답의 요지가 이랬음)

 

내가 했던 말을

나는 잊고 다른 사람이 기억해낼 때처럼

당황스럽고 미안하고 부끄러운 일이 또 있을까.

이따금 내가 한 얘기들을 되새겨보곤 하는 까닭이다.

글 또한 그렇겠지.

 

**

오늘 잠깐이나마 만난 분들;

진보넷 식구들, 블로거들, 여러 단체의 활동가들, 노동조합 간부와 조합원들,

모두 반가웠습니다. 행복하고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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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고 실없는 얘기 한 편

<네트워커>에 보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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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골치 아픈 투정 좀 해야겠다. 이른바 이공계 기피라는 것이 현실로 드러나기 전에도 과학기술계 정부출연기관 종사자들은 ‘어려서 과학자 꿈 커서 보니 처량하다’는 따위의 구호를 들이밀며 처우에 불만을 토로하곤 했다. 노후보장에 관한 불만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는데, 그럴 때면 단골로 등장하는 것이 연금타령이다. 가방 끈이 길어도 한참 길고 평생 국가발전을 위해 헌신하는데 과학기술연금같은 것이 왜 없느냐 하는 말이렷다.

 

원성이 되풀이되자 10년 전쯤 과학기술처가 연금제도 도입을 검토했지만 문제가 만만치 않아 포기했던 일도 있다. 그 후에도 과학기술자들의 노후보장 문제가 빈번하게 등장하고 이공계 기피현상이 사회적 관심을 모으자, 2002년에 드디어 ‘과학기술인공제회법’이라는 것이 만들어졌고, 이어 과학기술인공제회가 출범하기에 이르렀다. 과학기술인공제회는 국민연금에 묶인 출연기관 종사자들의 노후소득을 사학연금 가입자와 비슷한 수준으로 만들기 위해 개인이 부담하는 퇴직금(연급여의 1/12, 약 8.3%)과 사용자가 부담하는 연급여의 5%, 그리고 정부가 추가로 부담하는 연급여의 2.7%의 보험료를 재원으로 하여 연금(퇴직공제)사업을 설계했다.

 

정부가 공제회 사업을 자랑삼아 떠들어대자 사람들은 막연한 기대에 들뜨기도 했는데, 내용을 들여다보니 그야말로 빛 좋은 개살구였다. 다른 공제회에 정부예산을 지원한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2.7%의 정부 부담분은 일찌감치 날아갔다. 국민연금, 의료보험 등 갖가지 법정부담금에 시달려온 사용자들에게 5%의 추가 부담분은 자칫 임금인상분에서 빼내야 할 판이니, 노후를 대비한답시고 오히려 실질임금이 깎이게 생겼다. 게다가, 운용실적에 따라 퇴직급여가 연동되는 확정갹출형이라, 이래저래 남는 게 없는 장사가 될게 뻔했다.

 

이렇듯 돈도 부족하고, 제도 자체도 부실하니 그냥 없던 일로 하면 될 것 같지만, 그게 또 간단치 않다. IMF 환란을 빌미로 퇴직금누진제까지 폐지한 이후 더욱 불안해진 노후보장의 측면에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데 자기 퇴직금 8.3%에 사용자가 5%의 덤(?)을 얹어준다니 좋아라 하는 입장, 일단 시작하면 정부가 어떻게든 추가로 지원하지 않겠느냐는 기대, 무릇 모든 제도라는 것이 시행착오를 거쳐야 제대로 자리잡게 된다고 하는 언설까지 뒤섞이면서, 퇴직공제사업에 대한 반대를 피력해온 과기노조의 최근 입장도 “재원부족, 제도부실, 공제사업의 ‘졸속추진’을 반대한다”고 재정적 지원 확충과 제도적 보완에 다소 무게가 실려 발표되었다. 

 

이 땅의 어떤 노동자에게도 낭떠러지를 비켜가는 쉬운 길은 없다. 노동자, 서민에게 큰 힘이 되어야 할 국민연금이 표류하고 있는 상황에서, ‘노후소득 보장’이란 명분 아래 정부가 추진 중인 ‘기업연금제(퇴직연금제)’마저 그대로 도입되면 퇴직금 제도는 사실상 해체되고 영세 사업장과 비정규 노동자는 또 여지없이 소외될 것인즉, 노동자들이 끼리끼리 나뉘어 고민하지 말고 하나로 똘똘 뭉쳐 오늘의 삶이든 먼 미래의 전망이든 단번에 바꿔보자고 하면, 뜬금없고 실없는 얘기가 되나? 총투표로 총파업 결의는 했건만, 힘이 펄펄 넘치는 총파업은 여전히 미지수인 오늘! (2004.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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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전 흔적

지금은 거의 죽어버린 게시판에서

9년전에 과기노조 상근자로 처음 나설 때의 소감을

다시 찾아서 읽어본다.

내심으로는, 그리고 아내와 약속하기로도,

딱 1년만 일하고 실험실로 돌아가겠다는 것이었지만,

글 속에서는 '얼마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하고

마치 오늘의 나를 예고하고 있었던 듯도 하다.-_-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왔지만,

되돌아볼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은 행복하다(사치일까).

2000년 10월에 4대 위원장으로서 임기를 끝냈을 때도

이 글을 찾아읽으며 내 삶을 돌아다본 적이 있는데,

다시 이러고 있는 것은

지금도 분명 내 인생의 중요한 한 고비라는 것이겠지.

암튼, 

여전히 어리고 여리고 두려움이 많은 나,

처음의 그 마음을 기억하며

매사 의지로 낙관하면서 살아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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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결국, 과기노조 본부로 가다.
작성일  1995년 09월 12일 08시 43분 45초
 
오랜 번민과 갈등 끝에
얼마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실험실을 떠나 있기로 하였습니다.
서로 열심히 살자,
12년 선배이자 팀장이기도 한
이 박사는 그렇게 착잡한 표정으로
나를 놓아 주었습니다.
하긴, 더이상 잡고자 해 봤댔자
서로에게 더욱 힘든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연구자로서의 나의 꿈, 나의 장래는
일단 저만치 멀어져 간 셈입니다.
그저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언제나 변함없이 살아가는 것이
내 삶의 뜻이었다면
참으로 큰 변화와 시련을 동시에
나는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나는
일찍 실험실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실험실에서 하는 저마다의 일들이
참된 가치를 찾을 수 있도록 만들고 난 다음에야
적어도 그런 버팀목은 세우고 난 다음에야
누구든지 제자리에 돌아감이 불편하지 않고
누구든지 그의 복귀를 기꺼워할 것이니,
내가 즐겁게 돌아갈 날은 정말 언제일까요?
그 날이 어서 오기를
함께 빌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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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 관련글이 하나 달렸는데,

당시 참세상 대표로 있던 김아무개 동지의 것이다.

그는, 84년, 학도호국단을 해체하고 학생회를 부활시킨

공대의 주역 중의 하나였고, 그 때문에 제적되었지, 아마.

 

 

 



[바람] 다시 실험실에서...
작성일  1995년 09월 12일 11시 23분 34초
 
아마도 자연/공학계열을 전공한 사람들이 가지는 아련한 꿈하나가 있죠.
하얀 가운을 입고 무언가를 골똘히 연구하는 모습.저 또한 그런 생활이 좋아 공대
에 들어갔지만 지금은 이미 멀어져도 한참 멀어진 느낌입니다.

 

누가 저에게 전공이 무어냐고 물어봅니다.
그러면 제어계측이라고 하지요.
그러면 그사람왈.
"전공대로군요.."라고 현재 하는 일과 연관시키려 합니다.

 

그럴 때 저는 주장하지요. 학창시절 전공은 사회과학이라고. 현재 하는일은
사회주특기라고.사회에 나와서 배운 풍월이라고.

 

아마도 95년 하반기는 돌아갈 수도 있는 길을 포기한 해일 것입니다. 저에게.
쉽게 말하면 졸업할 수 있는 마지막기회를 포기한 것이죠. 포기를 자의반타의반
결정했을 때 무언가 아쉬움이 남더군요. 아마도 가문비님의 느낌이 저의 느낌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경우는 다르지만......

 

듣기에 상근자가 되신 것같은데.아무쪼록 좋은 성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대안의 작은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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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출마, 그리고 상처에 대한 생각

* 이 글은 손을 내밀어 우리님의 [공공연맹 임원선거에 나간다] 에 관련된 글입니다.

중앙위원회가 비교적 순탄하게 끝났다. 나의 선거출마에 관한 건은 찬성 18표, 반대 5표, 무효 1표로 가결되었다. 표로 나타나지 않는 동지들의 걱정어린 마음들은 앞으로 서로가 함께 감당해야 할 일이겠지. 예정에도 없이 출마한다고 하자 내가 좋아(존경)하고 나를 아끼는(아낀다고 믿는) 동지들이 저마다 진심으로 걱정어린 참견을 했다. -되더라도 동지가 받을 상처가 걱정이네요. -(런닝메이트들이) 만만치 않은 사람들인데 견딜 수 있겠어요? -동지가 갈 길이 그게 아닌데...답답합니다. -무조건 반대표 조직해서 낙선운동할 겁니다. -이건 배신이예요. 끝이라구요. -(이성우) 주변 사람들이 정말로 밉네요. -차라리 부위원장 정도 나가서 다음을 기약하는 게 어때요? -선거를 통해서 제대로 바뀌는 거 봤어요? -왜 희생양이 되려고 나섭니까? -지역에서도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도대체 왜 그래요? 그래, 아니나 다를까, 연맹의 게시판이나 우리 노조 게시판에 선거전이 시작하기도 전에 인신공격성의 글들이 등장했다. 2년 전에 한차례 겪은 일이라서 이젠 어느 정도 덤덤하다. 그러나 나를 실명으로 거론하는 글에 대해서는 언제라도 실명으로 차분하게 대응하리라고 나름대로 원칙을 세워두었다. 어느 동지가 내 게시판에다가, "얇디얇은 귓바퀴로 주워들은 풍문들을 마치 진실인 양, 자신의 판단인 양 치부하면서 그 모진 인연의 실타래를 악연의 연줄로 확대재생산한다." 고 그런 선거판 풍토를 안타까워하면서 최소한의 인간에 대한 예의를 주문했다.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같은 처지의 동지들을 위해 함께 같은 길을 걸어온 사람을 향해 어느 날 등 뒤에서 비수를 꽂을 때 우리는 망연자실 할 수밖에 없다." 그런가? 글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말과 행동으로 누군가에게 꽂았을지도 모르는 나의 가해행위는 어떻게 돌이켜 반성할 수 있을까. =상처 따위 =거뜬히 이겨넘어야 =세상 살아간다고 할 수 있겠지요 뭐... 그 동지에게 나는 이렇게 썼다. 아무도 정답을 가르쳐주지 않고 저마다의 판단과 때로는 욕심까지도 나(혹은 누군가)에게 퍼붓고 요구하는 상황에서 상처는 가해자의 치유될 수 없는 상처(의 흔적)일 뿐이지 이미 숱한 상처로 벼린 나에게 더 이상의 아픔은 아니다. (혹시 둔감할 뿐인가, 아니, 누구에게나 자신의 상처가 가장 아프다) 지난 7월에 썼던 "상처"라는 글을 다시 새겨 읽는다. =상처는 =언젠가 치유되고 잊혀지고 =이윽고 흔적도 남지 않지만 =상처 하나하나에 대하여 =100조개의 세포들이 뜻과 힘 모아 =처절하게 맞선 투쟁의 기록이 =곧 한 사람의 인생이요 =인간으로 세상을 견디는 힘의 근원이다. =무시로 되풀이되는 =이 가슴앓이. 노동조합 하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20년전 10년 전의 나를 알던 많은 동무들이 그렇게 여기는 것처럼 다시금 천진함과 동글동글함으로 단단히 무장을 하여 내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시뻘건 홍수를 받아들이는 바다와 같이 넉넉하고 의연하게 늘 활짝 웃으며 세상의 상처들을 안고 보듬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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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연맹 임원선거에 나간다

12월에 내가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갖는 선거가 무려 5개나 있다. 그 중에 어디에도 피선거권을 내세우지는 않겠다고 오래 전부터 굳게 맘먹었는데 예의 우유부단함에다가 장고 끝에 악수라는 말까지 떠올리면서 그 중에서 가장 모질고 힘든 선거에 후보로 나서게 되었다. 고민할 때야 아니야 아니야 도리질 했지만 일단 결론을 내린 바에야 모든 것은 오로지 나의 책임으로 맡겨질 일이다. 이런 나에 대해서 나 자신도 이따금 연민을 느끼는데 어쩌겠나, 80년 이후로 내 인생이 늘 그렇게 이어왔거늘. 그래 내 인생은 분명히 나의 것인데 자주 내 것이 아닌 듯 나조차 낯설다. 충고와 걱정과 비판을 아끼지 않은 동지들, 심지어 나로 인한 배신감에 입맛까지 잃었던 동지여, 부디 용서하소서. 앞으로의 나에 대해서도 더 크고 단호하게 꾸짖어 주소서. 참, 조금 있다가 낮 1시부터 우리 노조 중앙위원회가 있다. 여러가지 얘기들이 쏟아질텐데, 내 지금 심정을 급하게 글로 써 봤다.


공공연맹 임원선거에 출마하면서 중앙위원 동지들께 드리는 글 -변함없는 관심과 성원, 그리고 비판을 고맙고 달게 받겠습니다, 도와 주십시오!- 1993년 12월 출근길에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신 유전공학연구소노동조합 고 박성오 위원장 동지의 뒤를 이어 위원장 직무대행을 맡으면서 저의 인생역정도 크게 바뀌었습니다. 1994년 과기노조가 출범했을 때, 저는 비전임이었지만 본부의 정책위원장과 유전공학연구소지부장을 겸했고, 1995년 1월 과기노조 합법화 이후 최초의 쟁의를 승리로 마감하면서 연구활동과 노동조합 활동을 병행하겠다는 당초의 소신을 꺾고 노동조합 전임자로서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1995년 여름 지부장 임기를 끝내고 다시 실험실로 돌아가려 했을 때, PBS는 일단 막고 봐야겠다고, 1년만 본부 전임을 하겠다고, 지부장 출신으로서는 최초의 본부 상근국장으로서 본부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벌써 9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세월 동안에 유전공학연구소지부장, 과기노조 초대 정책위원장, 과기노조 2대 조직쟁의국장, 과기노조 3-4대 위원장, 공익노련 부위원장, 공공연맹 대전충남지역본부장, 민주노동당 유성구지구당 위원장, 민주노동당 대전광역시지부장, 민주노동당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후보(유성구), 그리고 현재 과기노조 6대 위원장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저로서는 벅찬 직책과 역할을 맡아서 달려 왔습니다. 저에게 그러한 역할을 맡겼던 조합원들과 간부 동지들의 여망에 충분히 부응했느냐 하고 누가 물으신다면 여전히 부끄럽고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그러나 동지들의 뜻을 거슬러 일을 도모하고자 한 적은 없었으며, 한편으로는 조합원들의 뜻에 따라 개인적으로는 꿈도 꾸지 않았던 총선 출마까지 하기도 했습니다. 2000년 총선 출마는 제 삶의 전망과 진로에 크게 영향을 끼친 사건 중의 하나입니다. 조합원들과 지역 유권자들 앞에서 저는 이 땅의 진보와 노동자·서민이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싸우겠다고 큰소리쳤습니다. 지난 4월의 제17대 총선을 앞두고 출마 여부를 놓고 고심하면서 많은 동지들의 다양하고 진지한 의견들을 들으면서 제가 크게 고민했던 것은 2000년의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과기노조 내부 조직을 추스르는 것을 우선적인 임무로 생각하고 당 활동은 좀 더 장기적인 숙제로 남겨야 하겠다고 판단하고, 결국 제17대 총선 출마는 포기했습니다만, 과학기술운동과 지역운동, 노동운동의 현장에서 헌신과 열정으로 작은 성과들을 이루어내고 그 토대 위에서 지역에 기반하는 진보정치의 모범을 만들겠다는 저의 계획은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그런데 돌연 공공연맹 임원선거에 출마한다니요? 격려의 말씀을 보내시는 한편에서 저에 대한 애정을 아끼지 않는 여러 동지들의 항의와 비판이 이어졌습니다. 저에 대한 걱정에서 비롯된 것이든 과기노조와 공공연맹에 대한 우려에서 출발한 것이든, 안팎에서 저에게로 몰려든 사려깊은 의견과 질타에 대해서 참으로 고마운 마음으로 경청했습니다. 그 마음 너무도 잘 아는 저로서는, 지난 2월에 있었던 총선 출마와 관련한 고민보다도 더 큰 갈등과 번민으로 괴로웠습니다. 저에게 쏟아지는 갖가지 기대와 요구들을 한꺼번에 충족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결국에는 제가 계획하고 꿈꾸던 일과 저에 대한 동지들의 기대와 요구와 비판에 부응하는 일, 그리고 저의 공공연맹 임원선거 출마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로 만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당장에 과기노조 위원장직을 끝내고 나서 하고자 했던 저의 계획은 다소 차질이 생기겠지만, 진보정당으로서 민주노동당이 노동자중심성을 견지하고 연맹과 총연맹이 한국사회의 천박한 자본주의를 뛰어넘어 노동자계급의 전망을 새롭게 하는 단결된 힘을 갖추는데 누구든지 뛰어들어야 한다면, 제가 개인적인 어려움을 들어 피해갈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노동자로서의 지난 세월을 저는 그런 마음으로 살아왔습니다. 중앙위원 동지들, 그 동안 동지들의 활발한 의견들을 들으면서 무척 고마웠고 한편으로는 심란하고 고통스러웠습니다. 당선이 된다면 가야할 길은 더욱 힘들고 고통스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떨치고 더욱 새로운 마음을 가다듬어 지금보다 더 험한 길일망정 마다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혀 보겠습니다. 도와 주십시오. 지지하고 격려해 주십시오. 신명을 바치고 열정을 다해서 온몸으로 뛰겠습니다. 그러나 예기치 않게 동지들을 실망시키는 일이 있다면 언제라도 가차없이 비판해 주시고 혹여 저의 처신이 과기노조와 4천여 조합원들을 욕되게 했을 때는 즉각 소환해 주십시오. 지난 10년처럼 앞으로도 저는 과기노조 조합원임을 감사하며 한결같이 노동자로서의 삶을 살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2004년 11월 23일 이 성 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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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모습

자정이 지나서

지역의 동지들이 전화를 했다.

함께 나눌 고민거리가 있으니

아파트 앞으로 나오라고.

"벤처의 꿈"에 가 있으라고 했다.

(두어 시간 전에

 노회찬 의원이 충남대 강연을 마치고 뒷풀이를 했던 곳인데,

 이미 당원 동지들은 모두 떠났다는 얘기를 뒤늦게 듣기는 했다)

 

가서 여러 동지들의 고민을 듣고

어느 정도 해결도 되었는데,

또다른 곳에서 전화가 왔다.

우리 노동조합의 비교적 젊은 활동가 동지들이다.

신성동에 있으니 오란다.

어은동에서 아직 얘기가 끝나지 않았으니 오라고 했다.

 

새벽 1시가 훨씬 지나서

신성동에 있던 동지들이 왔다.

술 제법 마신 지역 동지들은 이윽고 가고

새로 합류한 동지들과 술을 마시면서

내 거취 문제에 대한 깊고 강한 비판과 걱정들을 듣는다.

 

그 마음 내 모르랴.

하나도 반박할 얘기가 없다.

자세한 것은 또다른 기회가 주어지면 쓰기로 하고,

새벽 3시가 지난 밤 거리에

취한 동지들이 어깨를 걸고 앞서서 간다.

 

차를 몰고 조심스레 뒤따라 가는데

차창과 안개에 가려서

동지들의 모습이 흐릿하기는 하지만

나로 하여 여러날 쌓인 체증과 불만과 비판들로

휘청거리며 걷는 모습이

아프고

고맙고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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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 불감증의 시대를 뛰어넘어라

* 이 글은 산오리님의 [무디어져 가는 인간성 - 자극에 대한 면역] 에 관련된 글입니다.


노동조합이 대자보 하나만 붙여도 통하던 때가 있었다.
야간농성만 들어가도 사용자가 벌벌 떨던 시절이 있었
다. 이제는 아득한 옛날 얘기처럼 느껴진다. 90년대
초반만 해도 참 낯설게만 느껴졌던 삭발, 단식, 천막
투쟁, 거기다가 점거투쟁까지가 우리 투쟁사업의 일상
적 메뉴들이 되어버렸다. 자극이 되풀이되면 그것에
반응하여 어떤 행동을 이끌어내는 역치도 비례하여 상
승하는 법,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하고 있는 노동자에
게 배고프지 않느냐는 상식이하의 언행을 하는 사용자
까지 생겨났고, 급기야 사용자도 아닌 학생들이 노동
자들의 투쟁천막을 철거하는 엽기(?)적인 사건까지 생
겼다. 바야흐로 불감증의 시대, 더욱 새로운 충격요
법과 더 큰 자극제들이 아니고서는 어떠한 성취도 용
인하지 않겠다는 것이 천민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온갖 부패와 타락상을 짬뽕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모습
이다. 이러한 때에 우리 노동자·민중은 어떻게 살 것
인가. 세태에 덩달아서, 동지들의 고통 따위야 내 것
이 아닌 것으로 치고, 일상적 연대는 원론적수준의 술
안줏감으로 내던질 것인가, 아니면 엄동의 추위에도
견디며 이 세상을 따스하게 덮을 수 있는 크고 두꺼운
투쟁의 이불 하나 함께 만들겠는가. 올해 들어 가장
춥다는 날에, 정부의 강압적 구조조정과 시설 부문 사
유화·정리해고 기도에 맞서, 석 달 가까이 천막투쟁,
삭발단식투쟁, 파업투쟁을 벌이고 있는, 한국과학기술
원(KAIST) 조합원 동지들을 생각하며, 가슴이 실로 아
리다. (2000.12.26)

 

-어제 아침, 그 KAIST 파업으로 인한 업무방해 혐의로

 금고형(집행유예)이 확정되어 해고(당연면직)되었던

 우리 노조 장순식 전위원장에 대한 해고무효확인

 민사소송 1심 선고공판에서 이겼다. 그 소식을 들은

 직후 머리를 깎으면서, 옛 투쟁의 기억들이 주마등

 처럼 스쳐갔다.

 

-지금 대구로 간다. 쓰고 싶은 말을, 쓸 시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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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진도 올려 볼까?

* 이 글은 손을 내밀어 우리님의 [축사 또는 길눈이 말씀]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임원회의 끝나고 다들 사무실에 모여 있는데

창원이고 서울이고 먼길 가셔야 할 동지들이

느긋하게 정담을 나누거나 바둑을 두고 있다.

 

잠깐 틈을 내서,

날세동에게서 오늘 받은 사진 중에 두 장을 가려뽑는다.

 

하나는, 11월 7일, 길눈이 말씀을 하고 있는 나-

 

다른 하나는, 14일 노동자대회 끝무렵, 종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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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 얽힌 옛이야기(1)

* 이 글은 행인님의 [취했을 때는 지하철 타지 않기]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1.
몇번이나 써먹었던 얘기인데, 난 옛날 옛적 예비고사와 본고사를 거친 마지막 세대이다. 1979년 10월 26일에 박정희가 총 맞았다고 했을 때 우리는 11월 7일로 예정된 예비고사가 혹여 늦추어지지 않을까 하는 은근한 기대를 하기까지 했다.(젠장, 시험날이 연기되는 것은 그 다음해 대학교에 와서야 처음 경험했지. 5월 17일부터 휴교를 해서는 9월 12일인엔가 13일에 1학기를 연장해서 시작했고, 9월 하순에야 1학기말 시험을 봤으니까)

 

본고사 날짜가 1월 16일쯤이었던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암튼 예비고사를 끝낸 이후 그 결전의 날을 앞둔 두달여 동안에 나는 독서실에서 주로 머물렀다. 그러다가 좀이 쑤시면 몇 친구들과 어울려 하룻저녁 술을 마시는 것으로 갇힌 수험생의 스트레스르 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본고사를 아마 1-2주일 남겼던 날이었는데, 하룻밤 친구집에서 거나하게 술마시고 다음 날 아침에 갔더니, 독서실이 텅 비어 있었다. 사람만이 아니라 책상이며 각종 시설물들이 몽땅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 황당함이라니. 곧바로 수소문을 해보았더니, 그 독서실은 전날에 이사를 했고, 우리만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그 당시 본고사 준비하면서 가장 신경을 썼던 것이 수학이었는데 아마 1천페이지를 넘어갔던 해법수학II를 포함한 몇 권의 수험용 교재들을 그 바람에 몽땅 잃어버렸다. 감히 새로 살 엄두도 내지 못하고 다른 책으로 공부했다. 고3때, 교복을 입은 학생들에게 물컵에다가 한잔씩 소주를 덜어서 팔던 대구백화점 뒤 허름한 술집들이 아련한 풍경화로 남아있다.

 

2.



2.
대학교 1학년 때, 내가 주로 움직이던 공간은 명동 카톨릭회관(동아리 모임장소)과 혜화동, 이대입구, 그리고 신림동과 봉천동 사이였고, 142번 버스와 25번, 95번 버스가 그 공간들을 서로 연결해 주었다. 대학교 와서 새로 사귄 동아리 친구들은 전공은 다 달랐지만 술에 관한 한 거리낄 것이 없었던 지라 이내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오늘의 주인공들은 지금 부산에서 대학교 선생을 하고 있는 ㅊ, 대전의 어느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ㅈ, 그리고 현장에 투신했다가 제적된 후 옥살이까지 하고서 10여년 노동운동에 열심이다가 13년만에 다시 의과대학에 들어가서 늦깍이 의사가 된 ㅇ, 이렇게 3명이다.

 

주말 수련회(MT)에서 꼬박 밤샌 다음 날은 다들 피곤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었던지 평소의 나답지 않게 오전에 바로 학교 기숙사로 들어갔는데, 다른 멤버들은 아침에 새터에서 나와서 이대입구로 몰려가 술을 마셨다. 그 날 오후, 심심해진 나는 ㅊ의 방을 여러번 찾아갔는데, 밤이 이슥하도록 녀석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타 해서 다른 친구들을 찾았더니 모두 아무 일 없이 잘들 있었다. 이윽고 자정이 임박해서야 ㅊ은 기숙사로 돌아왔다. 야, 너 대체 어떻게 된 거고?

 

ㅊ의 사연은 이렇다. 아직도 해가 벌겋게 남은 대낮, 밤새 마신 술에 오전에 또 술을 마셨으니 얼콰하게 취했어. 일행과 헤어져서 곧바로 신림동으로 오는 142번 버스를 탔거든. 출입문쪽 맨 앞자리가 비었길래 그 자리에 앉았다 아이가. 몇번이나 우당탕쿵탕 버스 바닥으로 나딩굴어서 쪽 다 팔았다. 그러다 종점에 왔다길래 내려보니 수색이데. 다시 출발하는 버스를 탔어. 다시 종점이라고 해서 내렸더니 또 수색이더라. 아이고. 밤은 늦었고, 그래서 택시타고 왔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142번 버스는 노량진에서 신대방 삼거리, 신림동을 지나 서울대 정문에서 봉천동 고개를 넘고 상도터널을 지나서 수색 종점으로 가는데, 서소문으로 나와서 광화문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8자형 노선도를 버스 천장에 붙이고 다녔다. 수색 종점에서 나와 다시 돌아가는 시간은 대략 3시간 이상이니까, ㅊ은 적어도 6시간 이상을 버스에서 보낸 것이다.

 

다음 ㅈ과 ㅇ의 이야기. 둘이 어느 날 신촌에서 미팅을 한다고 일찌감치 학교를 나갔는데, 그 날 밤 둘 다 돌아오지 않았다. 그 때에도 세상 걱정은 혼자서 짊어졌던 나는 몇 번이나 그 친구들 방을 들락거렸다. 다음날 아침 식당에 가고 있는데 ㅈ이 저만치서 후줄그레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야, 무언 일이고?

 

그 당시만 해도 통금이라는 것이 있었다. 밤 12시 사이렌이 울리면 삼라만상이 정적에 파묻히고 그 정적을 깨뜨리는 것은 순찰을 도는 경찰들의 이따금 부는 호각소리 정도, 그 호각소리에 걸리면 즉결심판으로 넘어가서 벌금인지 과태료인지를 물어야 했다. 미팅(아, 미팅이라고 하고 보니 그냥 꼭 미팅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에서 만난 짝들과 어울려 신나라 하고 술을 마시던 이 친구들, 통금시간이 임박하자 서둘러 서울역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그리고 총알같이 달려서 전철승강장으로 갔는데, 다행히도 전철이 아직 남아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통금이 임박한 시간이라 인천행 전철은 러시아워를 방불할만큼 사람이 꽉찼는데, ㅈ만 타고 ㅇ이 타려는 순간에 그만 문이 닫혀버린 것이다. 의리의 사나이 ㅈ은 남영동에 내려서 고민했다. 이게 필시 막차인데, 저 친구를 혼자 남겨두어서는 안돼. 빨리 되돌아가서 ㅇ과 고락을 함께 해야겠다. 마침 서울역으로 가는 전철이 한대 남아 있었고, ㅈ은 급하게 서울역으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그 시간에 서울역에서는 마지막 전철이 남아있었고, ㅇ은 별다른 고민없이 노량진역에 내리면 ㅈ이 기다릴 것으로 생각하고, 그 막차를 탔다. 

 

지하 서울역에 내린 ㅈ은, ㅇ은 감쪽같이 사라졌지, 전철은 끊어졌지, 통금이 있으니 노숙자도 있을 수 없지, 택시비도 없지, 하릴없이 서울역 주변을 서성이다가 통금직전에 작심을 한다. 서울역 화장실에서 밤을 지내기로. 사람들 모두 사라지기를 기다려 남자화장실에 가서 문을 잠그고 쪼그리고 앉았다. 이윽고 불은 꺼지고 사람도 차도 다니지 못하는 새벽 4시까지 좌변기도 아닌 그 변기 옆에 앉아서 억지로 잠을 청한다. 새벽녘에 청소부들이 왔다 갔지만, 굳이 잠긴 문을 부수어 그를 발견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아침해가 뜰 때까지 그렇게 자다가 버스타고 기숙사로 들어오다가 우리를 만난 것이다. 그런데, ㅇ은 안왔냐?

 

ㅇ은 그 날 오후가 되어서야 어떤 아저씨와 함께 나타났다. 막차를 타고 혼자서 노량진역에 내린 그, ㅈ이 없다는 것을 거듭 확인하고 나서, 버스도 끊어진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는 노량진에서 상도동과 봉천동 고개를 넘어서 학교 기숙사까지 걸어가겠다고 결심한다. 쥐새끼도 얼씬하지 않는 밤길을 걷는데, 순찰차가 나타났다. 당신 누구야? 대학생인데요, 차가 끊겨서 기숙사까지 걸어서 가는 중입니다. 조심해서 가셔. 그런데 얼마 가지 못해 또다른 순찰차가 나타났다. 당신 누구야? 대학생인데요... 야, 대학생이면 다야? 빨리 타. 순찰차에 타서 영등포경찰서 유치장으로 직행했다. 거기에서 팔자 늘어지게 자고 나서 곧바로 즉결심판장으로 갔더니, 4천원,땅땅땅! 돈 한푼 없던 이 친구, 함께 즉결에 넘어간 어떤 아저씨에게 4천원을 빌어서 내고, 그 아저씨에게 돈 갚는다고 학교까지 함께 온 것이란다.

 

통금. 여기에 얽힌 사건들은 이 다음에 이어가자. 오타도 나중에 고쳐야겠다. 지금 갑자기, 너무 바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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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또 하루

늘 그렇고 그런 일정들,

심심풀이로 그냥 주절거려 본다.

 

<월요일 오전>

7시에 집을 나서려는데

요즘 귀가 성적이 시원치 않다고 아내가 타박을 한다.

무어라고 변명을 남기고 택시타러 서둘렀다.

월요일이라서 시내가 더 일찍 막히기 시작하니

7시 40분 창원행 버스를 타려던 계획을

7시 53분 밀양행 KTX로 한순간에 바꾸었다.

빠르다.

 

9시 20분쯤에 밀양역에 도착하니

창원행 시외버스가 기다리고 있길래 곧바로 탔다.

오전 10시가 조금 지났는데

창원역앞에서 버스를 내려

전기연구원지부 사무국장을 만나 기계연구원지부로 가고 있다.

 

10시 20분경부터 기계지부 창원 상집간부들을 만나

간담회를 겸한 교육 20분 남짓,

11시 10분경부터 전기지부 상집과 대의원들을 만나

또 20분 남짓 교육.

그리고 2004년도 단체협약 조인식이 이어졌다.

 

<월요일 오후>

단체협약 조인식 끝나고

노사가 함께 중국집에서 점심을 먹는다.

아침부터 서둘러서 진행했더니

하루 종일 걸렸어야 할 일정이 한나절에 끝났다.

 

목포에 가서

고 이용석 열사의 어머님의 빈소를 찾을까 생각했는데

너무 멀고 차편도 마땅치 않다.

 

곧바로 대구로 가기로 한다.

택시를 타고 창원역으로 부리나케 달려가니

곧바로 무궁화호 열차가 달려든다.

 

점심때 고량주 몇 잔 걸쳤더니

이내 잠이 쏟아지고 

1시간 40분쯤이 그냥 흘러갔다.

 

대구역에서

공중인터넷을 발견하고 몇가지 업무를 챙기다가

마중나온 패션센터지부장의 차를 타고

대구시청 앞 어떤 소담한 음식점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창원에서 미리 연락을 한 덕에

패션사무국장, 섬유개발연구원지부의 지부장과 사무국장도 곧 합석했다.

 

5시도 안되었는데

소주 몇잔 들이키면서 서로의 상황을 나눈다.

 

섬유개발연구원지부는

원장이 노조의 요구는 들어주겠다면서도

서명은 죽어도 못하겠다고 버티고 있단다.

노동자대회 끝나자마자

원장하고는 본교섭을 잡고

이사장하고는 면담일정을 잡자고 했다.

 

조합원들의 무관심에 힘이 쭉쭉 빠지는데다가

갖가지 스트레스에 몸까지 상하고 있다는

한 동지에게,

힘내자고, 의지로 낙관하자고, 말로만 위로를 바쳤다.

 

<월요일 밤>

사무처 동지가 집들이한다고 했다.

KTX를 타면 동대구에서 대전까지는 50분도 안걸린다.

대전역에서 진잠 근처 대정동 새 아파트까지는

좌석버스와 택시를 번갈아 타고 1시간이 훨씬 더 걸렸다.

 

늦게 도착해서 또 술이다.

소주 몇 잔 마시고 있으니

한 동지가 맥주잔에 소주를 한잔씩 섞어서 권한다.

시원스럽게 마시고 가볍게 놀다가

자정이 가까워지자 모두 헤어졌다.

 

대리운전을 부르던가

술을 깨고 나서 운전을 하든가

알아서 갈 길 잘도 챙기는데,

차 없이 하루 다니고 보니 역시 느긋하고 편하더라.

 

<화요일 오전>

어제,

동대구역에서 황남빵을 사왔더니

그게 모두에게 아침식사가 되더라.

 

밥 차리는 수고를 덜고, 피씨 앞에서 시간을 죽인다.

 

12시에 서울에서 건자재지부 천막투쟁 출정식이 있으니까

오늘은 서울행이다.

방송차에 다섯명이 타고서

익숙하게 고속도로를 달려간다, 나는 맨 뒷자리에서 잘 잤다.

 

<화요일 오후>

천막은 외양만 갖춰놓고

간부들과 조합원들 이삼십명 모여

출정식을 한다.

 

노동의례, 투쟁사에 투쟁사, 구호 몇 마디,

간단해서 좋다.

 

점심을 함께 먹고

예정된 임원회의를 하렸더니

2명의 임원이 결석이다, (술)병나고 연락못받고.

몇가지 확인만 하고 간단히 회의 마쳤다.

 

서울에서 저녁 9시에 모임 약속이 있는데

시간도 어지간하고 기분도 별로인데다가

대전에서 할일이 쌓여 있어서

모임에는 못가겠다고 연락하고

건자재지부의 교섭은 교섭위원들에게 맡겨둔채

대전으로 달린다.

 

벌써 5시가 다되었다,

간단한 서울 집회 하나 챙기고 와도

하루가 이렇게 그냥 지나가 버린다.

 

지구당 운영위원회에도 오라는 연락,

생일파티가 있으니 오라는 연락,

오늘은 어느 것도 기꺼이 응하지 못하고

미뤄둔 사적인 약속 하나 간신히 챙겼다.

 

<화요일 밤>

그냥 그렇게 흘렀다.

내일 일과를 훑어 본다.

 

오전 10시, 연맹 중집위 참석은

대전 일정을 이유로 수석부위원장께 부탁했다.

(수석은 건자재지부 천막에서 이 밤을 지새고 있다)

오후 2시에 과기정보연구원지부 교육이 있고,

오후 4시에 지질자원지부의 임금조인식 있고,

오후 5시에 항공지부의 임단협 조인식이 있고,

저녁에는 원자력지부 수석부지부장 부친상에도 가야 하고,

그렇게 그렇게 수요일도 갈 것이다.

 

참, 내일은 아내의 생일이다.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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