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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을 잃어버린 좌파와 막가는 우파사이에 있는 이탈리아

이탈리아는 강력한 노동운동과 공산당으로 기억되는 나라다. 또 집권정당의 집권연수가 평균 1년이 되지 못한다고 해서 정치가 불안정한 나라로도 소개됐다(물론 5년 장기집권한 베를루스코니도 있다). 반면 15개 이상의 정당이 의회에 진출해 있어왔기 때문에 공산당, 기민당 등의 대표정당이 있어왔지만 다양한 정치세력들이 존재하고 있어 정치적 다원주의가 보장되는 나라이기도 했다. 그러나 2008년 4월 총선을 계기로 이탈리아 정치체제는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2006년 베를루스코니의 5년 장기집권을 무너뜨린 중도좌파(프로디총리 정권 등장)의 집권은 사회복지 삭감, 계속되는 재정적자, 8%를 넘는 실업률 등 우파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국민적 비판의 결과였다. 그러나 집권한 프로디 정부는 2008년 1월, 불과 2년을 채우지 못하고 실각했다. 여기에는 연금지출 삭감, 아프카니스탄 파병연장, 법무부장관의 부패스캔들 등 중도좌파정부임에도 불구하고 기존 정치에 대한 차별성을 갖지 못한 이유가 존재한다.
2008년 조기총선에서는 중도좌파정부에 대한 실망과 더불어 본격화된 경제위기에 대한 불안감이 겹치면서 경기회복에 대한 요구가 베를루스코니가 이끄는 우파연합의 승리로 귀결됐다. 무지개좌파(재건공산당, 이탈리아의공산당, 녹색당, 민주좌파 등 4개 연합)를 비롯해 좌파세력들은 단 한 명도 의회에 진출하지 못하는 등 좌파가 몰락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물론 이 결과를 두고 개악된 선거제도로 인해 군소정파들의 의회진출을 막았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그러나 좌파세력들의 계속되는 신자유주의 정책 수용과 집권만을 위한 합종연횡 등에서 연유한다는 것이 공통된 분석이다. 미국식 양당체제를 꿈꾸며 민주당을 출범시키는 일부좌파들의 전향, 이에 반대하며 독자적인 좌파 정치를 제기했지만 새로운 정치적 전망과 정책을 제출하지 못한 채 선거연합으로만 전락해버린 무지개 좌파 등의 행보는 좌파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이탈리아 민중들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대한 분노와 저항을 새로운 정치적 전망으로 이끌어내지 못한 것이다. 
2008년 총선에서 압승한 베를루스코니가 다시 전민중적 저항에 직면한 지금, 이에 대한 책임을 우파만이 아니라 좌파에게도 있다는 것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교훈이다.
 

김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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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MB) VS 베를루스코니(SB)

- 시대를 거스르는 닮은꼴 정치인

 


민주주의 공공의 적


탄젠토폴리(tangentopoli), 즉 부패공화국이라 불리는 이탈리아 제1공화국 총리를 일곱 번이나 지낸 줄리오 안드레오티(Giulio Andreotti)와의 대담에서 “총리는 둘 중에 하나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영리한 범죄자거나(한 번도 잡히지 않았으니까), 아니면 역사상 가장 박해받는 사람이다.”라는 말이 오고갔다. 이것은 이탈리아의 권력과 부패를 적나라하게 파헤쳐 예술로 승화해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받은 2008년 영화 <일 디보(IL Divo)>에서 백미로 꼽히는 장면이다. 제1공화국이 몰락하고 이탈리아 정치의 지각변동이 있은 후 어쩌면 이탈리아 총리는 “가장 박해받는 사람”이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가장 영리한 범죄자”였으니까.

이탈리아 현 총리 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 SB)는 1990년대 초중반 이탈리아 정풍운동의 결과로 제1공화국이 몰락하는 지각변동을 거친 후 우파로서는 처음 집권한 총리이다. 그러나 제2공화국 이탈리아는 베를루스코니를 통해 다시 과거로 회귀하고 있다. 이제 그는 “가장 영리한 범죄자”를 넘어 ‘가장 뻔뻔한 범죄자’이자 ‘이탈리아 민주주의의 공공의 적’이라는 별명까지 얻고 있다.
이것은 비단 이탈리아만의 사정이 아니다. 1980년대 말 어렵사리 시작된 한국 민주주의도 10여 년간의 더딘 과정을 거쳐 자리를 잡아갔지만, 민주화 이후 처음 등장한 우파 대통령에 의해 다시 과거로 회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MB와 SB는 최대유사인물의 커플이다. 때문에 SB가 MB의 자서전을 이탈리아어판으로 출간하겠다고 제의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의혹, 인맥동원, 인터넷에서 불어오는 저항
MB와 SB의 부정과 비리는 공공연한 비밀로 알려져 있다. MB의 삼성비자금과 부동산 및 BBK 의혹, SB의 건설사업 부정 운영과 핀인베스트(Fininvest) 탈세 및 언론사 인수합병 의혹 등은 경제사범만으로도 특정범죄가중처벌형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권력이 있어 의혹은 의혹으로 멈춰 있다.
MB와 SB는 권력을 부리는 데 있어서도 대단히 닮은꼴이다. 2B는 공통적으로 사사로운 정치스타일인 개인형 리더십을 활용한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공론을 참지 못하며 도구성 참모와 소모성 부하들을 좋아한다. MB는 연이어 방송 3사를 장악하려고 시도했으며, SB는 자신의 섹스 스캔들을 보도한 ‘라 레푸블리카(La Repubblica)’와 ‘루니타(L’Unit?)’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다.

2B는 또한 정책을 두고 다른 정치인들과 소통하고 이들의 합리적 토론을 조성하기보다 학벌이나 재계 혹은 친인척 인맥을 동원해 자신의 정책을 집행하는 인형의 집을 만들고 있다. MB는 제왕적 대통령제를 만끽하고 있으며, SB는 총리에 만족하지 않고 권력구조를 강력한 대통령제로 바꾸어 군림하려는 시도를 해왔다. 이것이 그가 MB의 자서전을 번역하려는 배경이다.

이들이 추구하는 정치는 국민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자본을 위한 정치다. MB의 종부세 인하와 SB의 부자 세금 감면 조치가 대표적이다. SB는 2001년과 2003년에 이어 금년에 세 번째로 부자들의 세금을 감면한다는 조치를 내놓은 것이다. 명분은 해외 은행 계좌에 은닉된 부자들의 돈을 본국으로 끌어오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파이낸셜 타임즈가 지적한 것처럼 그것은 부자 탈세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2B는 이제 인터넷을 통해 퍼지고 있는 국민탄핵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국제적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인터넷 블로거 모임의 자발적 제안으로 지난 12월 5일 로마에서는 10만여 명이 모여 SB의 사퇴를 요구하는 거리시위를 벌였고, 우리나라에서도 연일 MB를 단죄하는 시위가 한창이며 MB 탄핵 사이트가 운영되고 있다. 국제적으로는 비록 불발에 그쳤지만 지난 10월 유럽의회가 SB의 언론탄압을 성토하는 결의안을 제출한 바 있으며, 9월에는 노엄 촘스키 등 20개국 저명인사 173명이 MB의 반민주적 탄압 중단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머피의 법칙
물론 누구나 육안으로 판별하듯이 인물이 확연히 다르고 정치스타일도 다른 만큼 차이점도 존재한다. 우선, 유럽 내 4대 강국으로서 이탈리아는 미국에 대해 우리나라보다 자존심이 더 강하다. 따라서 SB는 오바마의 피부색 언급으로 국제적 비난을 받는 등 노선이 다른 미국 대통령에 대해서는 딴지를 걸기도 한다. 그러나 MB는 대통령과 그 정책이 무엇이든 미국이라면 먼저 접고 들어간다. SB가 동일한 부류가 아닌 한 누구에게도 뻣뻣한 안하무인(眼下無人)형이라면, MB는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억약부강(抑弱扶强)형이다. 12월 11일 이탈리아에서 SB의 교육 및 공공 정책에 반대해 교육자와 공무원들이 전국 대규모 시위를 벌인 데 대한 정부의 유연한 대응과, 우리나라에서 전교조 시국선언교사에 대한 징계 및 이 징계를 거부한 교육감에 대한 징계가 그 전형적인 사례이다.

2B의 정치경제적 배경의 차이도 간과할 수 없다. SB가 전통적 기업의 사각지대에서 범죄조직과 부패정치의 음지에서 성장한 신흥재벌로서 자신의 사단을 이끌고 정권을 장악했다면, MB는 전통 재벌을 숙주로 성장한 기업인으로서 정치적 보수를 인계한 신개발독재를 추구하며 정통 개발독재 세력과 위태롭게 공존하고 있다. 따라서 SB는 피아트와 같은 전통적 기업들과 경쟁하면서도 사적인 권력 집단을 이끌고 유아독존의 권력정치를 구사하는 반면, MB는 당내 헤게모니 투쟁을 아직 끝내지 못한 상태에서 민주 세력 탄압을 통해 그 기선을 장악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SB는 이탈리아 제1공화국을 붕괴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던 사법부와 대립하는 데 반해, MB는 사법부의 비호를 받고 있다. SB는 이미 1998년에 탈세와 공무원 매수 등으로 2년 6개월의 징역을 선고 받았고 여전히 계류 중인 재판을 앞두고 면책특권법의 위헌 판결을 받았다. 이와 달리 한국의 사법부는 BBK 재판과 촛불 시위 참가자들에 대한 재판에서 보듯이 여전히 권력을 비호하는 구습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더욱 중요한 차이점 가운데 하나는 이탈리아의 경우 공산당을 비롯한 진보정당들이 제도권 안팎으로 폭넓게 포진하고 있는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진보정당운동의 정치력이 아직 충분히 성장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른바 견제의 역량이라는 조건에서 SB와 MB는 중요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MB와 SB의 부박하고 괴망한 정치를 청산하지 않는 한, 한국 정치와 이탈리아 정치는 머피의 법칙을 따를 공산이 크다. 그러나 견제 역량이라는 조건의 차이에서 볼 때, 한국 정치의 위험성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무엇을 할 것인가?
 

 

 

정병기(영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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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과의 대화야 훈시야



지난 11월 27일 이명박 대통령은 <국민과의 대화>라는 TV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최근의 세종시 수정안, 4대강 사업, 민생현안 등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다음날 정운찬 총리는 이날 방송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을 치켜세우며 “진솔하고 설득력이 있었다”면서 “자신감이 넘치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씀하셔서 많은 국민이 공감한 것 같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정 총리의 평가와는 달리 이날 이 대통령은 말바꾸기와 일방통행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세종시 원안추진 공약 왜 했나?
세종시 수정논란에 대해 MB는 대통령 당선을 위해 거짓을 얘기했음을 시인했다. “사실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도 표를 얻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 선거일이 점점 가까워지니 말이 바뀌더라구요” “당당하게 제가 말 못한 게 있죠”
이제 와서 고해성사하는 것도 아니고 너무나 구차하다. 수정을 넘어 이젠 행정기관 이전은 아예 백지상태로 되돌릴 태세다. 이게 원래 내 생각인데, 당당하게 말 못해 미안하다는 건가. 허위공약을 유포하고, 국가가 지역주민과 국민을 상대로 자신의 삶의 터전까지 떠나게 만든 사기를 친 셈이 됐는데,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부자감세?
여론조사에서 가장 잘못한 일이 부자감세라는 질문에 MB는 뭔가 오해가 있다는 표정으로 “기업하는 분은 이런 질문 안했을 것이다. 잘 아니까”라고 말문을 열었다. 말은 맞는 말이다. 돈 많고 기업하는 사람이 부자감세에 대해 무슨 질문을 하고, 비판을 하겠는가.
교묘하게 MB는 부자들 세금깎아 준 이야기는 빼놓고, 친서민 흉내내기 미소금융, 보금자리주택, 학자금 상환 변경에 대한 이야기만 늘어놓으며 이해해달라는 이야기만 장황하게 되풀이했다. “아무튼 나는 기업이 잘되게 하는 것”을 이해해달라는 것인가. 이미 우리는 MB의 부자감세, 친기업 정책의 문제점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다.
 
청년실업, 눈높이를 낮춰라?
방청하던 여대생이 청년실업에 대해 눈높이를 낮추라고 하지 말고 근본 해결책이 필요하지 않은가라는 질문을 했다. MB는 이에 “낮추지 말고 맞추라는 것입니다.”라며 “실패를 두려워해 아무것도 안하면 경험을 못쌓습니다”고 훈계를 아끼지 않았다. 청와대에서 연습을 많이 했는지, 말솜씨가 많이 늘었다.
그러나 눈가리고 아웅식의 답변에 불과하다. 스스로 밝혀왔듯이 MB 본인은 안해본 것이 없고, 온갖 범죄를 저지르며 지금의 자리까지 오르는 게 가능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청년실업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낳은 문제다. 눈높이를 낮추던 맞추던 해서 풀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또한 정부가 이윤을 위해 인력구조조정에 앞장서는 마당에, 청년들의 일자리는 더욱 불안정해질 수 밖에 없지 않은가.
 
4대강 살리기?
MB의 거짓말은 4대강 사업에서 정점에 달했다. 방송이후 운하반대 교수모임은 “물을 가둔 시화호도 지금은 수질이 개선됐다”는 발언에 대해 “시화호는 물막이 공사 2년후 물고기 수십만마리가 떼죽음하고 수질이 계속 악화돼 해수유통을 전면적으로 해 수질을 회복했다”며 대표적 예산낭비 사례라고 질책했다. “잠실과 신곡수중보로 가두어진 한강의 수질이 깨끗하다” MB의 주장에 대해서도 수질이 오히려 나빠졌다고 반박했다.
“우리나라의 강 복원 기술(수질개선 기술)은 세계 최고이며 보건설로 수질이 악화되지 않는다”는 발언도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하천수질 개선을 위해 과거에 설치된 댐과 보를 철거하는 중이라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퇴적물로 강바닥이 높아져 해마다 홍수피해로 4~5조원이 들어간다”는 발언도 4대강 본류의 대부분은 지자체의 재정수입사업으로 준설을 한 관계로 오히려 하상이 낮아져 있고, 홍수가 난 곳도 4대강 본류가 아닌 지방중소하천이라는 점에서 거짓말이다.
이번 <국민과의 대화>는 한마디로 국민을 무지몽매한 대상으로 여긴 이명박 대통령의 일방적 훈시였다. 용비어천가도 아니고 그것도 거짓말까지 하면서, 두 시간 씩이나 그것도 생방송으로 지상파 3사를 포함 전국 35개 채널을 통해 전파를 낭비했다. 또 혹시나 하고 그 방송을 지켜본 국민들에게 짜증과 분노를 일으킨 피해는 수치로 측정할 수 없다. 제발 이런 방식으로 소통할 거면 차라리 하지마라.
 

한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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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 행정비효율 설득력 없다

연일 세종시 문제로 정치권과 언론, 지역의 여론이 뜨겁게 달궈지고 있는 가운데 청와대를 중심으로 한 정부는 세종시 원안 반대논리로 행정의 비효율성을 제시하고 있다. 청와대와 입법, 사법부는 서울에 남아 있으면서 행정부 일부부처만 이전하는 것은 시간과 비용 측면에서 비효율이라는 것이 정부의 반대논리다.
현재도 광화문, 과천, 대전 등으로 쪼개져 있는데 세종시까지 생기면 정부기관이 4군데로 분산되어 수시로 열리는 부처 간 회의, 국가비상사태 대응, 장관들의 국무회의 참석, 행정부 공무원들의 잦은 국회 출장 등 업무추진에 비용과 시간이 낭비되어 행정의 효율성이 크게 떨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전에 계획할 때는 그런 우려는 없었는가. 그럼에도 왜 행정중심복합도시‘세종시’건설을 추진했는가. 세종시 건설은 단순히 충청권의 표심을 겨냥한 정치적 쇼가 아니라 많은 문제점을 야기하고 있는 수도권 과밀화를 해소하고 국가균형발전을 목표로 추진되어 왔다는 것이다.

행정의 효율성?
회의나 국회 출석 등 공무원들의 출장을 용이하게 하는 것만이 행정의 효율성을 증대시키는 것은 아니다. 국가행정의 효율성은 단순히 업무의 효율이 아니라 장기적인 국가발전을 전제한 국가운영 시스템 전반에 대한 효율성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부에서 주장하는 행정의 비효율성은 업무의 효율성에만 초점을 맞춘 더 이상 단순할 수 없는 억지에 가까운 논리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그 업무의 효율성조차도 IT강국을 자임하고 있는 정부 당국자의 논리로는 설득력이 없다. 각종회의는 화상회의 시스템을 활용하면 굳이 출장을 가지 않더라도 가능하며 국회출석 등 출장이 불가피한 경우는 이미 설치되어 있는 고속철도 노선을 변경활용하면 오히려 교통난이 극심한 서울시내에서의 이동보다 시간을 절약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업무의 효율성조차도 비용의 측면을 제외하면 설득력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4대강 사업부터 중단해야
비용의 측면조차도 출장비 등 비용의 증가와 수도권의 과밀화를 해소하고 국가균형발전의 토대를 구축함으로써 얻어지는 국가적 이익을 상정해보면 그 기대효과는 크다. 또한 국민들의 동의를 얻어 추진된 장기적인 국가정책이 정치적 논리에 따라 정권이 바뀔 때마다 수정됨으로써 발생하는 국가정책에 대한 국민적 불신과 정책변경에 따른 행정의 낭비를 감안한다면 비효율성은 오히려 세종시 건설계획의 변경에 있다
지금 정부가 해야 할 것은 설득력 없는 행정의 효율성을 내세워 세종시 건설 계획을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 세종시 보다 훨씬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4대강 사업의 무리한 추진을 중단하는 것이다.   
 

임복균 (공무원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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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 지역주의 대안이 아닌 새판을 짜야

 


세종시의 기능을 둘러싼 정치권의 공방이 치열하다. 노무현 정부에서 추진한 세종시 원안은 9부2처2청의 정부부처를 중심으로 한 행정복합도시의 건설이었다. 대선 과정에서 세종시 원안에 찬성했던 건 (충청권 표를 얻기 위한) ‘대국민 사기극’이었음이 드러나면서 이명박은 스스로 치졸한 거짓말쟁이임을 시인했다.

(수도권 보수층 결집을 위한) 이명박 정권의 세종시 수정안에 대해 한나라당 박근혜는 세종시 수정 추진 반대 입장을 재확인했다. 이 과정에서 원칙 없이 말 바꾸는 이명박에 비해 원칙과 약속을 지키는 정치인으로 어처구니없게도 박근혜가 부상하고 있다. 하지만 박근혜의 소신은 노동자 ? 서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충정 표를 중심으로 한 지방보수층을 겨냥한 것이다.
현재 세종시를 둘러싼 정치권의 핵심은 원안이 수정되면서 한정돼 있는 지방 예산을 놓고 지자체끼리 싸우는 형국이다. 세종시의 예산 배분을 두고 정치권의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 지역균형 발전이 필요한 건 모두가 동의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정부부처의 이관으론 한계가 있다. 기업의 이전도 물론 한계가 있다.
그 한계란 첫째로 기업이 스스로 지역으로 옮겨갈 것인가란 문제이다. 노무현 정권 때 기업도시로 선정된 전남 무안과 충북 충주, 강원 원주, 전북 무주, 충남 태안, 전남 영암·해남뿐만 아니라 전북 새만금과 평택 고덕신도시, 천안 아산, 대구·경북 첨단복합단지, 부산·진해 경제자유구역 등 20여 곳이 기업 유치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태다. 둘째로 최근의 산업 동향은 기업의 이전이 지역 내 일자리 확보에 큰 도움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미 이명박 정권은 세종시에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각종 특혜와 혜택을 준비하고 있다. 정운찬 총리는 “기업들이 땅값이 좀 비싸다고 한다”며 기업 유치를 위해 땅값 인하가 필요함을 거듭 강조했다. 조선일보는 “정부가 세종시를 ‘명품 자족도시’로 만들겠다면” “산업용지 공급가격을 3.3㎡당 35만-40만원 수준으로 낮추고, 세종시의 자족 용지 비중을 전체 면적의 20% 이상으로 높이는 방안을 검토”하고 “여기에 더해 취득세와 등록세, 법인세 감면 같은 세제혜택과 함께 토지이용과 관련한 각종 규제도 대폭 완화할 필요”성을 노골적으로 주문했다.
이밖에도 투자유치 방안으로 국가유공자와 장애인 의무 고용 배제와 근로기준법상 주1회의 유급휴가 배제, 외국인학교 및 영리의료법인 설립, 본국과 외환거래(과실송금) 허용 등을 검토 중이다. 이는 강부자 정권의 “친기업 행보”를 노골적으로 세종시에서 적용하려는 것이다. 
기존의 반MB전선이 민주당(과 창조한국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의 연합이였다면 세종시 문제로 자유선진당과 친박연대까지도 합세했다. 이명박 정권의 세종시 수정안에 대해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부르주아적 민주주의자들은 지방 균형발전의 대의명분을 내세우면서 세종시 원안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대해 손호철 교수는 “노무현 정부가 진정으로 지방 균형발전을 추구하고 싶었다면 행정수도를 충청지역이 아니라 강원도(예를 들어 양구)로 옮기겠다고 나섰어야 한다”며 민주당의 세종시 건설을 비판했다. 친박연대와 자유선진당은 내년 지방 선거 등을 겨냥한 지역주의를 기반으로 한 보수층 결집을 위해 세종시 수정안을 반대하고 있다.
진보신당의 노회찬은 “현 상황에서 세종시가 원안대로 추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더욱 중요한 것은 실질적으로 지방분권이 실현되고, 수도권의 자원이 분산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라고 세종시 원안을 기본으로 한 수정안을 제시했다. 충청권을 중심으로 한 진보신당 당원들은 “미래지향적 친환경 복지공동체”라는 새로운 세종시 해법을 제시했다. 이는 ‘사회복지 국가책임제’의 관점에서 세종시를 무상교육-무상의료-안정적 주택 및 주거 제공과 같은 제대로 된 복지가 갖춰진 도시를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진보신당의 주장은 이명박 정권이 추진하고 있는 친기업적 도시의 반대물인 친서민적 도시이다.
민주노동당 역시 세종시 원안에 긍정하는 듯하다. 민주노동당은 “충청주민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국회 통과된 원안을 백지화하는 것은 독재적 행태”라는 점에서 이명박 정권을 비판했다. 양 진보정당들은 세종시 건설이 기정사실화된 것이기 때문에 세종시 건설 그 자체를 반대하지 않는 듯하다.
진보진영은 노무현-이명박 정권이 만들어놓은 지역주의에서 대안론을 제시할 것이 아니라 새 판을 제시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진보신당의 세종시 대안은 기존 정치판의 지역주의론을 수용한 점에서 아쉽다. 이는 세종시 건설을 둘러싼 시궁창 싸움에 진보진영들이 오물을 묻히는 격이다. 또한 이는 오물의 양적 정도와 무관하게 대중들에게 진보정당이나 기존 보수정당들을 똑같이 취급하는 단서를 제공해 줄 것이다.
진보진영은 세종시 문제에서 민주당 및 친박연대, 자유선진당과 선을 그을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해야 된다. 그것은 바로 지방정부의 공적 서비스 기능-교육, 의료, 복지, 환경 등-을 강화해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다.
“질문 자체가 부인됨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는 경우”는 바로 세종시 문제이다. 세종시 플루와 변종 세종시 플루에 현혹되지 말고 이들이 활동할 수 있는 환경 그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한다. 진보진영들은 세종시를 통한 지역 균형발전론이 아니라 친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하고 불평등을 개선할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을 고려한 지역 예산으로 공공서비스의 확대를 기반으로 한 지역균형발전 전략의 진보적 대안을 제시하고 요구해야 한다.
 
김민정 (비정규직 시간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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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정당 강령 건설을 본격화하다

사노준 4차 총회, <강령초안> 제출 심의

강령건설에 대한 문제의식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 준비모임(사노준)은 그동안 강령에 대해 궁극적인 목표로서 “실현 가능”하고, 노동자의 권력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하며, 또 노동자 스스로 그런 정치의 “주체”, 실천의 “주체”로 서게 하는 강령 건설을 목표로 토론하고 있다.
한국의 좌파, 진보 정치조직들은 지난 10년간 강령적 수준의 입장은 물론 강령도 제출해왔다. 그러나 여전히 강령이 ‘호주머니 속 강령’, ‘증명사진’, ‘카핑 트로츠키’ 혹은 ‘카핑 사민주의’에 머물러 있는 현실이다. 이는 한편에서는 각 조직이 내놓고 있는 입장의 차이와 강령논쟁을 본격화할 만한 이론적 완성도의 부족 때문이고, 더욱이 어느 정치조직이든 ‘강령적 실천’을 담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노준은 이에 대해 강령과 정치적 실천이 분리되지 않고 변증법적 긴장과 동력을 확보하면서 발전시켜나가야 한다는 문제의식으로 강령건설과정을 밟아나가겠다는 입장이다. 강령의 체계와 구성에 있어서는 ‘기본강령-정책강령’으로 할 것인가?, ‘최대강령-최소강령’으로 할 것인가? 등의 쟁점에 대해 기계적 구분에 얽매이지 않는 강령건설을 말해왔다. 즉, 하나의 강령으로서 현실 계급투쟁의 진전, 우리의 인식과 실천과 논의의 진전 정도에 따라 바꿔 나갈 수 있는 체계와 구성이 되도록 한다는 것이다.

세 가지 안이 제출되다
사노준은 출범(2008년 10월 11일)이후 ‘강령작성을 위한 특별위원회’(강령특위)를 구성하고 조직 안팎으로 강령토론을 진행해 왔다. 2차 총회(2009년 2월 21일)에서는 <강령(초안) 토론용 자료>가 채택되었다.
이후 강령(초안) 작성을 위한 의제별 회원토론을 통해 내용정리들을 해나갔다. 국제주의, 민주주의, 문화, 노동운동, 페미니즘 등 강령에 담겨질 주요한 의제들에 대한 회원토론회를 진행했다. 이와 함께 지역별 강령토론도 진행했다. 이를 바탕으로 3차 총회(2009년 6월 27~28일)에 <강령 초초안>이 제출되었다.
하지만 제출된 <강령 초초안>에 대해 강령특위에서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특히 분량, 서술체계, 문체 등에 대한 입장 차이가 컸다. 이견을 제출한 특위위원들은 “강령은 준비모임 내 사상적 지향에서 최소한의 합의수준을 반영하면 된다” “사노준의 지향과 요구, 현재 좌파의 정체성을 간결하게 드러내는 형식을 취해야 한다” “단지 양이 길기 때문이 아니라 끝없는 나열식 묘사 때문에 틀린 말은 거의 없겠지만 심의가 어렵다” 등의 의견을 냈다.
그 결과 두 가지의 새로운 안이 제출되면서, <강령 초안>수립을 위한 토론은 세 가지의 개별안을 갖고 토론이 진행되는 상황을 낳았다.

진통 끝에 단일안으로
사노준의 각 지역모임에서는 10월 초부터 3개의 안을 놓고 회원토론을 진행했다. 강령특위에서 분량, 서술체계, 문체 등에 대한 이견이 있었던 것처럼 이 문제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긍정적인 의견과 비판적인 의견 모두가 있었다.
그러나 지역 별 토론의 과정에서 강령안이 단일안이 아니라 3개의 안으로 제출된 것에 대한 회원들의 문제제기가 많았다. 내용에 대한 쟁점이나 서술체계 형식의 이견이 있더라도 단일안으로 제출되어야 한다는 의견들이 많았다. 그동안의 강령특위가 논의를 모아 강령을 공동으로 작성하는 역할을 못한 것에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진통 끝에 현재 강령특위는 회원들의 이러한 문제제기를 받아 단일안으로 수정보완하는 과정을 진행하고 있다. 4차 총회(11월 28~29일)에는 단일화된 <강령 초안>이 제출되어 토론될 예정이다.

지역토론은 어떻게 진행되었나
내용에 대해서도 지역토론에서 많은 질문과 의견들이 쏟아졌다. ‘21세기 자본주의 표현’, ‘21세기 사회주의 표현’, ‘일국혁명과 세계혁명의 문제’, ‘국제주의’, ‘계급동맹의 문제’, ‘생산수단의 사회화’, ‘원하지 않는 노동으로부터의 해방’, ‘한반도 통일과 평화’, ‘북한사회에 대한 규정’, ‘시장경제의 점진적 해소’, ‘총고용보장, 생존에 대한 국가책임 요구’, ‘국가와 당의 관계’, ‘노동자계급 중심성과 동맹전략’, ‘대체권력 형성과 과정’, ‘민주주의 실현과정과 전략’ 등이 주로 논의되었다.
각각의 내용들에 대한 질문과 토론 속에서 수정과 보완해야 할 것과 쟁점으로 토론해야할 과제 등이 정리되고 있는 중이다. 특히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표현하는 것에 대한 쟁점과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민주적계획경제의 상’, ‘노동자계급 중심성과 계급동맹’에 대한 쟁점들은 열띤 토론을 벌인 주제들이다. ‘당원의 책임과 의무’, ‘국가에 대한 입장’에 대해 보완해나갔으면 하는 의견도 있었다.

끊임없이 변화발전하는 강령
이번 사노준 4차총회에서 심의될 예정인 <강령초안>은 ‘기본강령’의 성격을 갖고 있다. ‘부문정책강령’은 이후 계속 주체들과 함께 별도로 정리하는 과정을 밟아갈 예정이다.
<강령초안>은 말 그대로 초안이다. 사회주의정당 건설을 자기 과제로 삼는 하나의 주체로서 사노준은 앞으로 내부만이 아니라, 여타의 사회주의정치조직들과 개별주체들과 함께 사회주의정당 건설을 위한 강령논의를 진행할 예정이다. 이 과정에서 <강령초안>은 사노준의 기본적 입장이 되지만, 논의와 토론을 통해 상호 수정, 보완되고, 얼마든지 새롭게 재작성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이다.
애초 강령건설에 대해 이제 본격적인 첫 걸음을 시작한 사노준은 앞으로 회원 내부 뿐 아니라 사회주의정치진영, 나아가 전체 노동자민중진영 안에서 활발하게 강령논의가 이루어지길 희망한다. 또 이것이 현실의 계급투쟁과 변혁운동의 실천들과 긴밀히 결합해가면서 변증법적으로 상호 발전하는 과정으로 이어져나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아직은 사회주의정치진영이 ‘강령적 실천’을 담보하기에는 미약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사회주의정당 건설의 열정과 희망으로 살아있는 강령을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희망해 본다.

안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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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긍지를 가질만한 강령을 건설하자

[강령건설, 이렇게 하자]
 


강령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정체성이고, 우리의 인식과 의지의 표명이며, 계급투쟁의 지침이어야 한다. 이것이 강령의 일차적 기능이고 가장 중요한 점이다. 자본주의가 왜 나쁜지, 왜 사회주의 변혁을 해야만 하는지를 설득하거나 설명하는 것은 다른 교재에서도 가능하다. 강령의 일차적 기능을 해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이런 내용이 들어가는 것은 무방하지만, 일차적 기능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강령의 독자는 대중이라는 점. 대중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대중의 언어로 써야 한다는 점에 대해 동의한다. 또한 강령은 우리들의 지금까지의 학습과 실천의 성과를 담아내야 한다는 점에서 풍부하게 서술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도 동의한다. 강령의 분량은 그 내용이 명료하다면 즉 긴 글이라도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독특한 문체와 어법은 토론의 대상으로 삼기 어렵다. 무엇을 어떻게 표현하든 토론하기에 적절하지 않다면 강령으로서는 실패한 것이다. 강령은 사회주의자들이 이 현실을 어떻게 보고 있으며, 그 해결방법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입장을 밝히는 것이다.
결국 강령은 지금까지의 성과를 담아 풍부하게, 대중의 언어로, 그리고 사회주의자의 입장에서 서술하되, 우리의 정체성과 인식과 의지를 밝히면서 계급투쟁의 지침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단계론적인 입장의 반영인 최소강령과 최대강령이 아닌, 혹은 주요모순을 상정하는 이행기 강령이 아닌, 현 시기 자본주의의 궁극적이고 포괄적인 대안으로서 하나의 강령을 상정했을 때, 그 서술은 필연적으로 가치와 과제를 중심으로 서술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강령의 체계와 구성, 내용과 쟁점, 문체 등은 개인의 작업이 아니라 집단적인 작업의 성과로서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 점에서 개인의 작업물은 특수성이 강해 한계가 명백하다. 강령토론의 목적은 전 성원이 긍지를 가질만한 강령을 건설하는데 있는 것이지, 장단점을 비교하여 조금 더 나은 것을 채택하는 데에 있지 않다. 장점도 많지만 그렇다고 단점도 많거나 명백한 문제가 존재하는 시안들을 무작정 토론해달라고 하는 것은 회원들에 대한 강요다. 총회를 앞두고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정말 멋진 시안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새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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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민중의 심장에 새길 당 강령은 무엇으로 벼릴 것인가?

[강령건설, 이렇게 하자]

 

백화점 쇼윈도에 걸린 ‘소비혁명!’이란 광고가 전혀 낯설지 않은 자본의 세기를 살고있는 대중과 만성적 실업에 길들여져 몸값을 높여 노동력을 팔기 위해 생체실험에 가까운 자본의 교양을 쌓고있는 청년들, 그리고 생존의 벼랑에 내몰린 노동자민중에게 강령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또 강령은 진정 돈보다 강한 힘으로, 돈으로 바꿀 수 없는 현실적 실체로서 노동자계급의 삶의 무기가 될 수 있을 것인가?
1917년 10월혁명의 주역들이 인민의 가슴에 불어넣은 강령적 실천이 ‘빵과 토지’ ‘평화’로 집약되는 인민의 삶 그 자체에서 시작됐듯이 이미 강령은 당대 민중들의 계급적 요구와 해방을 향한 보편의지 속에 씨앗을 간직한 채 정치의 햇빛을 만나기 위해 싹을 틔울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최근 사노준을 포함한 사회주의 진영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강령논의의 핵심은 주로 ‘역사적 사회주의에 대한 평가와 비판’ ‘21세기 사회주의혁명의 과제와 전망’ ‘새로운 사회주의 실현을 위한 이행의 문제’ 등을 둘러싼 입장과 쟁점으로 집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념의 결핍과 계급적 실천의 공백을 강령이 대체할 수 있는가?” 그 대답은 당연하게도 현실 계급투쟁의 한가운데 서서 대중의 신뢰를 획득하는 일련의 실천 속에 강령을 유기적으로 배치하는 일관된 과정으로서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이라는 기본 호흡을 잃지 않을 때 비로소 강령은 변혁의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첫째, 강령은 사회주의 정치활동을 자신의 과제로 삼는 사회주의자와 자본주의 체제를 궁극적으로 넘어서기 위해 투쟁하는 활동가들과 잠재적 당원대중에게 읽혀질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강령은 노동해방을 열망하는 노동자계급과 피억압 민중에게 투쟁의 지침이 되고 살아있는 방향등으로서 현실 계급투쟁의 생생한 준거가 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강령에 대한 대중적 동의지평을 넓히려면 육하원칙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명료한 표현과 구성체계를 갖춰야 한다. 그래야 강령이 당의 지향과 가치, 좌표와 주소를 말해주는 사상적 토대로서 제대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예컨대, 맑스, 엥겔스의 「공산주의당 선언」이 담고 있는 빛나는 통찰과 함축적 표현처럼, 시적 은유와 날카로운 풍자와 간명한 현실인식을 담는 문장구성이 계급대중에게 큰 반향과 울림을 줄 수 있다. 그러나 형식이 내용의 폭을 제한하지 않도록 분명한 계급적 관점과 변혁의 계기를 살려내되, 계급투쟁의 당면과제를 우회적으로 기술하지는 않아야 한다.
그리고 쉽게 쓰여진다는 것의 의미를 지나치게 기능적이고 실용적인 접근으로 해석하는 것은 오히려 강령의 풍부한 서술을 제한하는 벽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의미를 해치지 않는 한 사전적 지시적 문체에 갇힐 필요는 없을 것이다. 즉, 쉽고 어려움은 용어나 개념 그 자체보다는 현실개입력, 전선규정력 등으로 해석될 수 있느냐가 그 판단준거다.
셋째, 강령의 진폭과 형성과정은 현재 운동의 발전과정을 반영하여 운동일반이 제기하는 문제의식을 최대치로 담아내고 당면과제와 요구를 명료하게 집약해내는 과정이어야 한다. 즉,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토론과정을 통해 아래로부터 힘있게 만들어가야, 강령이 먼지 앉은 활자가 아닌 창당주체들의 살아 숨쉬는 무기로서 당당히 설 것이다.
넷째, 강령은 당의 지향과 정체성을 압축적으로 담아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강령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유토피아)을 주술처럼 약속하는 선언과 당위에 머물 수 없다는 점에서 어떻게 계급투쟁을 강화하는 무기가 될 수 있을지 스스로 드러내는 설득체계를 갖추고 구체성과 만나야 할 것이다. 강령의 한구절 한구절은 그 자체로서 현실의 계급대중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갖고 변혁(혁명)의 길로 안내하는 나침반으로서 피착취 대중과 호흡해야 한다.
사노준의 강령초안이 갖는 다른 좌파 강령들과 분명한 차이는 21세기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청사진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강령은 역사적 사회주의에 대한 발본적 평가를 바탕으로 새로운 사회주의 실현을 위해 노동자계급의 조건과 상태를 가로질러 계급으로의 형성을 강화함으로써 변혁주체를 재구성하고 20세기 사회주의가 포괄하지 못했던 여성/생태/인권 등을 사회주의적 가치로 확장하는 과제, 자치와 민주주의가 살아숨쉬는 대체권력 형성의 과제 등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자본운동의 지배양식의 변화와 국가권력의 성격을 치밀하게 추적하지 못한 한계 등은 향후 반드시 해결해야 할 이론적 분석과제이자 당운동의 실천과제로 남아있다.
 
신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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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지 않는 노동으로부터의 해방?

[강령토론]

 

이제까지 인류사에서 ‘노동’없이 인간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시기는 없었으며 앞으로도 상상할 수 있는 기간 내에는 없을 것 같다. 지금 시대도 노동, 일자리가 핵심 쟁점이다. 특히 신자유주의를 거치면서 대량 실업, 저임금의 나쁜 일자리, 일하는 빈곤 등은 나라와 국경을 불문하고 주요 쟁점이다.
완전 자동화를 통해 모두가 일을 안하고도 살 수 있고, 노동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주장은 생산력 향상과 함께 일자리의 상실이 지구적인 재앙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설득력이 없다. 앞으로 서비스 노동이 증대하여 제조업 노동이 사라지는 추세이므로 ‘노동의 종말’을 이야기해야한다는 주장역시 정규직, 비정규직, 노동자성도 인정받지 못하는 사회적 일자리가 나란히 3층밥 구조 속에 온존하고 있는 현실과 맞지 않다.
분배의 영역에서 기본적인 소득 보장을 통해 사회의 악을 근절할 수 있다던 복지국가 패러다임은 신자유주의 등장 이래 노동, 복지가 공격당한 지금 설득력을 상실했다. 근대적 패러다임을 넘어서 ‘탈주’하라든가, 노동 자체를 거부하라는 주장을 들을 때 우리는 질문한다. ‘노동은 누가 하지? 생산은 어떻게 하나?’ 인류사는 아직 노동 패러다임으로부터의 안녕을 이야기할 단계에 도달하지는 못한 것이 현실이다.
무엇보다도 문제는 ‘노동 자체’라기보다는 일단은 노동 ‘착취’의 문제다. 즉 타인 노동을 사적으로 전유해 가는 문제다. 물론 노동이 착취되는 방식은 사회형태에 따라 달라진다. 노예주가 채찍을 들고 일하는 노예들을 노동현장에서 감시 감독하는 노예제 사회, 신분적 구속 아래 놓여져 있는 농민이 장원의 영주에게 일주일에 며칠 하는 식으로 의무적으로 일을 하는 중세 사회, 신분적 구속에서는 해방되었으나 생산수단의 소유에서 배제되어 생존을 위해서는 임금을 받고 자본가와의 계약관계 아래 일을 해야만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 이르기까지 역사와 사회의 특수한 형태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노동이 착취당해 왔던 것이다.
생산과정에서의 이러한 모순은 사회의 다른 영역으로 확산되어 교육, 의료 등 사회적 재생산의 전 과정에 걸쳐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심지어는 모순을 해결하고자 하는 운동 내에서도 피보는 자와 빛보는 자, 투쟁하는 자와 성과를 챙겨가는 자 사이의 모순으로 나타났다. 동구 사회주의에서의 역사에서도 ‘직접 생산자’들이 소위 노멘클라투라로 불리우는 특권 계급의 아래 위치해 사회의 실질적 주체로 올곧게 서지 못하는 경우를 보았다. 생산성이 높은 노동자가 영웅 칭호를 받으면서 노동이 신성시 되었으나, 이는 동원전략의 수준에서 선포된 것일 뿐 타인 노동의 결과로 특권을 누리는 이전 사회의 모순을 지양하지는 못했다.
그런 점에서 강령안 초안에 제출된 ‘원하지 않는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문제는 노동의 착취 문제를 자본주의적 착취의 문제에서 기존 사회주의에서의 강제노동, 의무노동으로 확산하려는 의미로 읽힌다. 하지만 사회적인 수준의 문제를 다분히 심리학적인 문제로 치환함으로써 본래의 의도가 불명료해지고, 역사 사회적인 형태의 차이가 간과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본다. 한편 직접 생산자의 노동에 대한 착취가 폐지된 이후에도 전체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은 존재한다. 이 때 이러한 노동을 어떻게 전 사회적으로 조직해 나갈 것인가하는 문제는 남게 될 것이다.
사회적 필요 노동의 개념은 이러한 문제를 담으려는 시도로 보인다. 그러나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구분과 함께 노동의 질적 차이에 따른 차별이 사라지고, 생산력 발전을 통해 노동시간이 단축되면서 노동, 스포츠, 예술 활동, 취미 활동 등의 구분이 사라질 때, 요컨대 노동이 더 이상 고통이 아니라 자아를 실현하는 것으로서의 자기 활동으로 바뀔 수 있을 때 우리는 참다운 자유의 공동체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따라서 ‘원하지 않는 노동으로부터 해방’의 문제는 노동의 진정한 해방이 무엇인가라는 관점까지 내적으로 장착한 수준에서 논의 전개가 필요하다.   
 
남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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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수단의 사회화와 민주적 계획경제의 상은 더 ‘명료’해 져야 한다

[강령토론]

 

강령초안(이하 초안)이 제출하는 경제강령의 핵심내용은 ‘노동자민중의 자치권력에 근거해 생산수단을 사회화하고 민주적 계획경제를 수립한다’는 것이다. 이에 동의한다. 우리가 지향할 사회주의는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계획경제를 통해 자본주의경제의 문제점을 극복해야 하며, 동시에 20세기 국가사회주의의 오류인 관료적 계획경제를 극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돈되지 않은 표현이나 서술이 있어 문제제기를 해본다.
우선, 생산수단 사회화에 대한 설명이다. 초안은 “생산수단의 사회화. 이는 생산과 소비 전체에 대한 중앙집중적이고 계획적인 사회화를 하자는 것도 아니다. 집단이든 개인의 활동이든 자치적인 활동의 영역을 최대한 확장하기 위해 사회적 필요의 영역만을 사회화하는 것”이라고 쓰고 있다.
그런데 중앙집중적이고 계획적인 사회화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20세기 국가사회주의국가에서 나타난 농업집산화 등 폭력적인 사회화 과정을 비판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옳다. 그런데 계획적인 사회화를 하지 말자는 것은 뭘 말하고자 하는지 파악이 안된다. 이것이 “사회적 필요의 영역만을 사회화”한다는 표현과 연결될 경우, 더욱 그러하다. 도대체 생산에서 사회적 필요의 영역과 사회적 불필요 영역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게다가 이것이 자치적 활동을 확장하기 위해 사회적 필요영역만 사회화하는 것이라면, 사회화와 자치는 충돌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둘째, 계획경제의 상이다. 초안이 제출하는 계획경제의 구체상은 분명치 않다. “노동자민중권력은 전사회적 필요의 영역에 대한 거시적 조정을 담당하는데 한정하고 각 생산단위의 자율성, 창조성, 자주성을 보장한다” 각 생산단위의 자율성은 어떤 자율성이고 노동자민중권력의 거시적 조정은 어떤 내용의 무엇을 매개로 한 조정인지가 분명치 않다. 이것이 유고식의 자주관리사회주의를 의미하는지, 또다른 무엇인지? “민주적 계획경제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와 상당기간 경쟁할 수도 있다. 민주적 계획경제 중심의 경제체제 구축을 통해 시장경제 부문을 점진적으로 해소해 나간다”도 검토가 필요하다. 사회주의로의 이행 초기 다양한 소유형태가 존재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이는 노동자민중권력의 힘으로 계획을 중심으로 시장을 하위배치하면서 시장을 배제해 나가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초안은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민주적 계획경제간의 관계’, ‘계획과 민주·자치와의 관계’, ‘계획과 시장과의 관계 설정’ 등에서 애매하거나 충돌하는 서술이 몇 군데 있다. 그 결과 ‘생산수단 사회화와 민주적 계획경제’라는 핵심테제의 구체적 ‘상’을 분명하게 그려내지 못하고 있다. 
 
장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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