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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연대전략으로써 사회복지

복지에 대한 사회권은 노동자들을 시민으로서 사회에 통합시키고 노동자들이 국가공동체에 소속되어 있음을 상징한다. 복지국가는 이러한 노동자들을 사회적으로 통합하고, 이를 통해 연대감을 증진시켜온 여러 방법 중 하나다. 이러한 연대감은 노동계급운동에는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풀란차스(Poulantzas)의 분석처럼 기본적으로 사회복지는 지배세력의 경제적 양보를 요한다는 점에서 경제에 대한 국가의 자율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지만, 자본의 정치권력에 위협을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복지국가 역시도 장기적으로 자본에 유리하거나 자본의 확대재생산과 양립하는 전략으로 가능성과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노동자들의 투쟁의 성과로 제도화된 복지투쟁의 사회성과 역사성 역시도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독일의 사회학자 하이만(Heimann)은 사회정책에 대해 자본소유와 상품질서에 반하는 원칙으로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사회적 이상의 실재로 설명하였다. 피지배계급의 자본주의 메커니즘에 반대하는 사회적 이상은 사회운동을 통해 현실에서 구체화되고 사회운동의 정도에 따라 사회정책의 성격이 시장질서에 반하는 정도가 결정된다. 사회정책의 이러한 혁명적 성격은 체제를 유지, 통합하려는 자본 및 보수주의자들과 항상 갈등하고 대립하게 된다. 이러한 혁명성과 보수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 사회정책이고 이로 인해 사회정책은 야누스의 얼굴과 같은 양면성을 띤다. 그러므로 사회정책은 매우 유기적이며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의 사회적 이상과 투쟁의 정도에 따라 이 양면성의 색채는 결정된다. 노동운동의 사회복지 투쟁은 반자본주의에 대한 지향성을 가져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사회복지 투쟁이라 할지라도 자본의 심장부를 공격할 수 있어야 한다.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은 시급하다. 이들은 가처분소득인 낮기 때문에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해서도 예비할 수 있는 자원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소득이자 노후소득의 기능을 하는 연금제도에서 배제되고 있다. 사회보험은 사회적 위험이 더 높은 계층에게 더욱더 예방적인 기능을 제공해야 한다. 하지만 오히려 사회적 위험이 더 큰 집단일수록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사각지대 해소를 위해 사회연대전략에서처럼 시장임금 소득이 상대적으로 높은 노동자들로부터 갹출 받은 기금을 바탕으로 시급하게 지원할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계와 같은 공동체간의 상호부조관습 등은 이미 존재해왔다. 또한 실업과 비정규직의 문제에 대해 자본과 국가가 현재처럼 그 어떤 개선의 조짐을 보이지 않는다면, 노동계급의 경제적 양보가 자본의 양보보다 수월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 노동운동의 새로운 출구 전략으로 유용하지 못하다. ‘경제적 양보’로 표현되는 연대는 노동계급 내부의 정치적 동의를 끌어내기 힘들고, 경제적 양보가 가져올 효과가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사회연대를 통해 계급연대가 형성될 것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예상일뿐이다. 사회임금으로 보다 나은 소득보전을 받은 노동자들은 여전히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많은 시간 일을 할 수밖에 없다. 물론 보다 향상된 사회임금으로 그들의 가계소득은 다소 향상될 수 있으나 삶의 질을 변화시킬 수준만큼은 되지 못한다. 이들을 정치적으로 세력화하거나 노동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회임금으로 얻게 되는 결과와는 전혀 다른 메커니즘을 가지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것이 미래소득인 연금제도라면 현재를 변화시킬 정치세력화로 연결되기 힘들다. 또한 사회임금이 향상되었다고 계급 간 연대가 향상되었다는 증거는 서구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것은 사민주의자들의 주장이었지 실제 현실에서 사회임금 확대를 통한 노동계급의 정치가 비례적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노동자의 시장임금 재분배를 통한 사회임금 증액은 결국 총노동비용에 대한 계급 내적 재분배라는 한계와 이렇게 향상된 사회임금이 역으로 시장임금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도 고려되어야 한다.
신자유주의이후 사회복지 개혁은 시민과 노동자의 책임강화로 수렴되어져 왔다. 이에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좌파세력들은 오랫동안 개인의 책임강화로 전환되는 사회정책에 대해 반대해 왔다. 그런데 사회연대전략은 다른 이름의 노동책임 강화론이 될 수 있다.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태생의 비밀이자 계급연대로 가기 힘든 요소가 된다.
노동자들의 투쟁을 통해 자본과 국가에게 임금 및 사회적 비용의 책임을 부과하는 것이 왜 실현하기 어려운 것이라고만 여겨지는 것일까? 예를 들면 현재 노동과 자본이 5:5로 분담하고 있는 사회보험요율을 5:6과 같은 방식으로, 자본의 비율만 총액 대비 10%만 증가시켜 이 재원을 사각지대의 사회보험료로 활용하는 방안은 비현실적인가?
이것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이제까지 노동운동이 이와 같은 혁명적 성격을 담지한 사회정책 투쟁에 적극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좌파진영 역시 이와 같은 투쟁을 중심의 과제로 수용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역으로 노조가 임금투쟁이나 고용안정을 위해 파업하지만 연금보장성 강화를 위해서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비판이 가능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비판 오히려 임금, 고용, 그리고 복지의 문제를 분리시키는데 일조하였고 각각의 투쟁 과제를 선후의 문제나 선택의 문제로 개별화시켰다. 임금 및 고용투쟁의 중요성은 신자유주의 전환이후 더욱 부각되었다. 그러나 임금이나 고용을 위한 투쟁은 매우 이기적인 해당 사업장의 노동자만을 위한 투쟁으로 폄하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노동자 스스로 그리고 노동자들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분리된 임금, 고용, 복지의 연관성을 노동자계급 스스로가 찾아갈 수 있는 전략이 요청된다.
노동현장과 직결되어 있는 노동조건 및 임금의 문제는 명료하게 계급문제로 인식하지만 작업장을 벗어난 문제와 당장의 경제적 이해관계와 벗어나는 문제에 대해서 계급적으로 이해하는 시각이 필요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산별운동이 진행되어 왔으나 아직은 넘어야할 산이 더 많아 보인다. 그 넘어야 할 산마다 계급적 연대를 강화할 수 있는 관점에서 사회정책이 제출되어져야 한다.
사회연대가 정치적 힘을 발휘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계급연대로부터 출발한다. 노동운동이 발전하지 않은 곳에서 사회권은 발전되기 어렵거나 매우 형식적인 수준에서 머문다. 노동이 자본과 국가에 대항하지 않고 먼저 타협한 사회복지제도로는 보편적인 인민의 삶의 질 향상은 기대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노동자의 사회복지투쟁은 계급연대를 도모하는 동시에 자본주의 메커니즘을 반대하는 전략이 되어야 한다.
 

제갈현숙(사회공공연구소 연구위원, 한신대 사회복지학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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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문화를 프로파일링해봐?

조직 문화의 스트레스
크리미널 마이드란 미국 드라마는 연쇄살인사건을 해결하는 FBI 행동분석팀의 이야기다. 5시즌이 방영 중이니까 상당히 인기 있는 드라마다. 행동분석팀은 연쇄살인사건에서 남겨진 모든 흔적을 통해 범인의 심리와 행동을 분석하고 범인 행동의 패턴과 소재를 예측해 다음 사건을 예방하고 범인을 잡는다. 이 과정을 한마디로 프로파일링이라 한다. 첨단 전산망과 조직력이 이들의 주요 무기지만, 기본적으로는 범인과의 심리 게임이 주된 내용이다.
도식적으로 표현하면, 대부분의 싸이코패스들은 성장과정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욕망이 억압되었다. 성장 후에 억압된 욕망을 푸는 과정에서 부자연스러운 방법 때문에 스트레스를 경험한다. 그 스트레스 요인은 폭력적 해결방법을 택하게 만들고, 그것이 첫 살인으로 연결된다. 첫 살인의 과정에서 스트레스 요인을 피하고 욕망을 해결하는 일종의 해방감을 느꼈다면, 더 큰 해방감을 위한 계획 살인으로 진화하고, 자신만의 표식을 남긴다. 싸이코패스들의 일반적인 패턴이다.
행동분석팀은 싸이코패스 뿐만 아니라 피해자들의 유형도 분석한다. 드라마가 회를 더해 가며 몇몇 특출한 싸이코패스들은 행동분석팀에게 직접 공격을 감행하는데, 그래서 팀 동료를 프로파일링할 필요가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동료에 대한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동료들 간의 프로파일링은 금지되어 사건 해결을 어렵게 만든다. 이 대목에서 어떤 시청자는 문제 해결이 막혀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다. 이런 걸 계산한 드라마는 동료들 간의 존중을 바탕으로 암묵적 프로파일링 허용을 통해 다시 스트레스를 해소시켜 준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이 드라마를 프로파일링 하는 시청자들은 이 드라마의 패턴을 알고 있기 때문에 돋은 닭살을 비벼 피부의 안정을 취한다.
서설이 길었는데, 키워드는 패턴과 존중이다. 조직 문화의 스트레스를 이야기하기 위해 너무 끔찍한 이야기로 예를 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조직과 조직의 관계, 사람과 사람의 관계, 조직과 사람의 관계들 속에서 나타나는 복잡하고 다양한 충돌들과 그 해결의 노력들에서 섬세한 프로파일링은 기본이 된다. 패턴을 찾는 것은 프로파일링의 기술이고, 존중은 프로파일링에서 상대적인 의미의 정서 같은 것이다.

패턴들
예를 들어, 쌍용차 파업에 여러 단체들이 공동투쟁을 진행하던 상황을 회상해 보자. 자신이 관련 없었다면 상상만 해도 좋다. 단체마다 사람마다 국유화를 두고 조금씩 다른 견해가 있었다. 옥쇄파업 전술을 두고도 다른 견해가 있었다. 어떤 견해가 올바른가 이전에 각 단체마다 사람마다 고유의 경험과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확히는 몰라도 ‘저쪽은 이럴 것이다’는 예상치가 있다. 먼저 주장을 펼친 쪽에게 ‘그럴 줄 알았다, 저 조직이 그렇지’라고 생각했다면, 이미 상대를 분석하고 예측했다는 말이다.
한 조직 안에서도 사람마다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고, 조직의 입장과 개인의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다. ‘조직의 입장이 이러니 조직원은 따라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이 모여 조직을 이루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입장의 차이가 적을 수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직 안에서도 ‘그럴 줄 알았다’는 말이 흔히 나온다.
특별한 상황이 아닌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관계 속에서 예측되는 ‘그럴 줄 알았다’는 패턴의 근거들은 나이, 성별, 계급, 직위, 직업, 경제력, 학력, 지혜, 성격, 외모, 취향, 기호, 출신지 등이다.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위계적인 관계, 억압적 관계, 친한 관계, 불편한 관계, 부적절한 관계 등의 패턴들이 만들어진다. 평등한 관계라는 패턴은 존재할까?

존중
평등은 사회주의의 매우 중요한 가치다. 사회주의 실현을 꿈꾸는 조직은 평등하지 않은 사회 장치들과 싸우기 위해 사회주의 실현 전까지 전술적으로 부분적인 평등을 포기해야 할까?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내 경험으로 볼 때, 사노준 안에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대단히 평등하다.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그러나 하루에도 수십 번씩 미묘한 위계와 억압의 패턴들을 발견한다. 나와 다른 사람의 관계에서 느끼고,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목격하고, 조직과 사람 사이에서 목격하고 있다. 특히 지난 총회 자리에서는 사람들의 표정과 말에서 복잡한 문양과 수학식이 매우 위험한 곡예 쇼를 펼쳤다.
동지애라는 말이 공식발언으로 몇 번 나오기도 했는데, 그것을 크리미널 마인드에 대입하면, 동료들 사이의 프로파일링 금지에 해당한다. 프로파일링 금지가 공식적 방침이지만 암묵적 프로파일링은 누구나 하듯이, 동지애가 강조되었다는 것은 동지애가 없었거나 발언자의 기대에 못 미쳤다는 뜻이다. 뒤에 동지애가 무시되었던 상황에 대한 사과가 따랐고, 동지애에 입각한 화해도 따랐다. 약간 닭살이 돋긴 했다. 이런 과정도 하나의 패턴이다. 패턴은 복잡한 과정의 한 단면으로 보이지만 그 과정이 경과하는 시간의 흐름이기도 하다.
사노준이 상대적으로 평등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패턴이 흘러가는 방향이 평등을 향하기 때문이다.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이 특별한 상황에서 어떤 발언을 할지 예측할 수 있지만, 그 예측은 언젠가 빗나가고 만다. 그의 패턴이 진화하거나 내 프로파일링 방식이 진화하는 것이다. 그 진화가 좋은 방향, 곧 평등의 방향으로 진행하게 만드는 동력이 존중이라 생각한다. 동지애라 표현해도 무방하지만, 조직에 너무 국한된 느낌이라 존중이란 표현이 더 좋다.


조심해야 할 것들
크리미널 마인드에서 일선 수사관들에게 행동분석팀이 범인의 프로파일을 공개할 때 몇 가지 주의 사항을 밝힌다. 발표하는 프로파일은 부족한 증거를 통해 얻은 결과라는 점과, 범인이 이 프로파일을 미리 프로파일링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점이다. 그 말은 곧 자신을 프로파일링할 줄 아는 범인이라면, 행동분석팀의 프로파일을 조작할 수 있다는 의미다. 정말 특출한 싸이코패스는 프로파일링할 단서를 하나도 안 남겨 자신의 존재를 철저히 숨기고 있을 수 있다. 수십 명을 살해한 싸이코패스 중에 경찰을 수십 년간 농락하다가 끝내 숨어버린 자들이 극소수 실존했다. 가까이서 찾으면 화성 연쇄살인사건 같은.
자신과 주위의 관계 속의 다양한 패턴을 객관화 시켜보는 시도는 평등한 문화를 향한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누구나 그런 노력을 하겠지만, 스스로를 객관화 시키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한편 자신만 잘 객관화 시키는 사람을 사회에서는 바보라 부른다. 바보가 되지 않으면서 훌륭한 프로파일을 만들더라도 상대와 세계에 대한 존중이 없으면 악마적 관계가 만들어질 것이다. 정치조직 안에서 치열한 사상투쟁은 조직이 건강하다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자칫 치열함에 압도되는 어리석음을 경계해야 한다. 상대를 동지라 호칭하면서도 존중 없이 사상투쟁을 일삼는다면, 히틀러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정치조직이 악마가 되면, 싸이코패스의 위험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재앙을 낳을 수 있다. 인류는 이미 그것을 수차례 경험했다.
몇 가지 피해야 할 길은 알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멀고 험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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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글쓰기, 그리고 말하기

성폭력사건이 발생하면 우리는 성폭력사건을 가해자개인이 저지른 파렴치한 일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많이 변했습니다) 성적권력에 의한 구조적 폭력이 성폭력이고, 그것은 개인의 문제를 떠나 성별위계적인 사회구조적 문제, 가부장제적인 조직문화에 따른 일이라 규정합니다. 그런데 가부장적이고 성별위계적인 조직문화를 어떻게 쇄신하고 혁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논의하지 않습니다. 성평등한 조직문화를 만드는 일이 단순히 반성폭력교육 또는 성평등 교육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매년 교육프로그램을 하는데 머무르구요. 그래서 조직 뒤에 숨은 ‘비주체적 개인’이 조직을 이루는 ‘주체적 개인’으로 조직문화를 혁신하기 위한 실천으로 ‘여성주의적 말하기와 글쓰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주의 글쓰기와 말하기
“여성주의 글쓰기? 그럼 남성주의 글쓰기도 있나?”라는 소리를 하시는 분이 있겠지요. 통속적인 예입니다만, 제주도에서 봤을 때 우리가 소위 말하는 남해(南海)바다는 어디일까요? 제 3세계는 어디죠? 유색인종은 누구인가요? 우리가 아는 언어는 누구의 언어이고, 지금까지 객관이라고 불리던 것은 누구의 시각일까요? 여성주의 글쓰기와 말하기는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기존의 언어와 해석틀이 (남성)지배권력의 경험을 보편화한 것과 다르지 않음을 지적하는 일입니다. 동시에 배제되어왔던 타자의 시선에서 새로운 시각과 언어, 해석틀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남성)지배권력 중심의 기존인식, 언어, 법, 제도, 규범 등의 사회적 구조를 여성중심으로 ‘대체’하자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남성)지배권력중심의 구조가 형성되어 왔는지를 끊임없이 질문하고, 배제되어왔던 타자들의 눈과 목소리로 세계를 인식하자는 것입니다.
그럼 또 다시 질문이 생깁니다. “여성주의 글쓰기와 말하기는 알겠는데, 그게 조직문화랑 뭔 상관?”

여성주의 글쓰기와 말하기를 통한 조직문화 혁신
여성주의 글쓰기와 말하기는 단지 개별 단어들의 표현뿐만이 아니라 문장구조, 사유방식의 변화까지 요구합니다. 노동형제를 쓰지 말자는 주장이 단순히 형제가 남자가족만을 부르는 단어라서가 아니라, 형제로 표현되는 운동사회내의 가부장제적인 문화를 지적하는 일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동안 알았던 하나의 목소리(남성중심)말고도 또 다른 목소리가 있음을 인정하고, 하나의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답과 모색을 가능하게 하자는 겁니다. 권위주의와 성별위계적인 조직문화에서 만들어진 논리적이고 인과관계를 따지는 말하기 방식(report-talk)에서 벗어나 타인에 대해 배려하고 관용하며 공감하는 말하기방식(rapport-talk)가 필요하다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주의 글쓰기와 말하기는 남성위계질서로 굳혀져있는 운동사회 조직문화 전반의 변화와 구조적 혁신을 요구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여성주의 글쓰기와 말하기와 조직문화 혁신은 아주, 매우 상관있는 일이구요.
마지막으로 여성주의 글쓰기와 말하기가 왜 우리가 깊이 고민해야하는 일인지 뤼스 이리가레이의 「나, 너, 우리」의 한 구절로 대신하려 합니다.

“사회 정의, 특히 성과 관련된 정의는 언어의 법칙과 사회질서를 구성하는 진실과 가치의 개념을 바꾸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문화적 수단의 변경은 엄밀한 의미에서 물질적 재산의 분배만큼이나 장기적 차원에서 중요하다. 다른 하나가 없이는 나머지도 얻을 수 없다.”    - 뤼스 이리가레이, 「나, 너, 우리」
 

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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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대화를 아시나요?

 
기관지 편집팀에서 일하는 동지에게 전화가 왔다. 비폭력대화에 관한 원고를 하나 써달라는 취지였다. 워낙에 글재간도 없는데다 비폭력대화센터에서 초급과정을 잠깐 듣긴 했지만 글을 쓸만큼의 배움도 없다고 나름 정중히 거절했다. 그리고 비폭력대화가 어떤 점에서는 사회적 관계의 문제를 개인화하는 한계도 있어서 소개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한 판단도 안선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나 전화를 건 동지는 ‘부탁’이라는 말을 여러번 되풀이하며 ‘무조건’ 써달란다. 이 경우 그 동지의 요청은 과연 ‘부탁’이었을까? 상대방에게 거부할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요구는 그것이 아무리 공손한 말들로 표현됐다 하더라도 ‘강요’다. 비폭력대화에서는 부탁과 강요의 차이를 그렇게 구분한다.
비폭력대화(NonViolent Communi cation)는 미국의 심리학자 마셜 로젠버그에 의해 제안된 대화방법(말하기와 듣기)이다. ‘관찰-느낌-욕구-부탁’이라는 과정을 거치며 연민이 우러나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과 유대관계를 맺고, 우리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기본 골격은 상대의 행동이나 말을 비디오로 찍은 듯 관찰하여, 그것을 보거나 들은 나 자신의 내면에 든 느낌을 확인한 다음 그 느낌 뒤에 존재하는 욕구를 확인하여 상대방에게 자신의 욕구를 충족할 수 있도록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방식이다.
회의에 자주 늦는 동지가 있다고 치자. 이 동지가 흔히 들을 수 있는 비판은 “넌 왜 항상 늦냐! 너 때문에 짜증이 난다! 그러고도 네가 활동가냐!”라는 것이다. 비폭력대화는 이럴 경우 “지난번에 이어 오늘도 회의에 늦게 오니까(관찰) 무슨 일이라도 있는지 걱정도 되고, 회의 시간 내내 다음 약속 때문에 초조했어(느낌). 다른 일정이 있어서 제때 회의를 시작하는 게 나한테 중요하니까(욕구) 다음부터는 늦지 않았으면 좋겠어(부탁)”라는 식으로 얘기할 것을 권한다. 자신이 회의에 늦게 온 입장이라면 어느 쪽이 더 편안한가? 어떤 말을 들었을 때 변명하거나 물러나거나 반격하지 않고 “다음부터는 회의시간을 잘 지키겠다”는 마음의 다짐을 하게 하는가?
누구에겐가 화가 난다는 것은 사실 우리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해서 기분이 불쾌하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이 우리의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자극은 될수 있어도, 결코 원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충족되지 못한 욕구는 상대방에게 융단폭격같은 분노를 쏟아 붓는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상대방이 내게 화를 낼 때, 그의 진정한 욕구가 무엇인지에 대해 집중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터운 방탄복을 걸쳐 입고 그와의 일대결전에 나서는 것이다. 그 길의 끝에는 결국 피투성이가 된 두 사람의 쓰라린 상처만 남게 된다. 다른 사람은 나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만 사는 것이 아니고, 나도 그 사람의 행복을 창조해주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때문에 우리는 서로 받아주고, 성숙해지고, 사랑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런 관계맺음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게 비폭력대화는 요긴한 지침이 될 수 있을 듯싶다.
집회신고를 하러 경찰서에 갔다가 우연히 보았던 「보고서 작성요령」이란 책자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들의 지침은 “운동권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여 경찰 내부에 운동권의 사상을 자기도 모르게 유포하는 경우가 있으니 순화해서 사용하라”였다. 일테면 ‘가두투쟁’은 ‘가두불법시위’로, ‘민중문학’은 ‘좌경의식화문학’으로 ‘순화’해서 사용하고, 대체할 만한 용어가 없을 때에는 ‘소위’나 ‘이른바’등의 부사를 붙여서 쓰라는 것이다. 이런 그들의 언어정치가 낳은 대표적인 사례가 ‘민노총’이란 불가사의한 명칭이다. ‘민주’노총이란 말을 쓰기 싫어 ‘민노총’이란 신조어를 만들어 썼던 것이 지금까지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저들은 이렇게 단어하나에도 자신의 사상과 계급적 입장을 불어넣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이 내게는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그에 비하면 우리의 말글살이는 과연 어떠한가. 우리가 가진 인간에 대한 사랑과 존중, 자유와 평등의 이념, 그리고 동지에 대한 애정이 우리의 언어에는 얼마나 올곧게 담겨있는가? 이제 동지들과 무심결에 나누는 한마디 한마디에도 차별과 착취의 폭력적인 언어를 버리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사람들다운 희망과 의지를 새겨보자.
 
뭉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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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죽으면 꽃낭구 많이 심어 줘야해


나죽으면  꽃낭구 많이 심어 줘야해

꽃을 어려서 부터 그렇게 좋아했어.

나죽으면  꽃낭구 많이 심어 줘야해
뿌리 뻣는거 말구
금방 금방 커서 꽃피는 걸루
과꽃 채송화 봉숭아 맨드라미 달맞이 제비 백일홍 도라지
모 많잖아…….

할머니가 작년 이맘때 돌아가셨으니까 꼭 일 년 되었군요
한창 겨울로 접어드는 요즘 벌써 봄이 기다려집니다.
할머니가 그립습니다.
 

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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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한국노총의 반노동자성과 민주노총의 갈 길

지난 4일 한국노총과 경총, 그리고 노동부는 복수노조 2년 6개월 유예, 노조 전임자 임금 금지를 원칙으로 한 타임오프제를 2010년 7월부터 시행키로 합의했다. 예상대로 한국노총 지도부는 한국노총 소속 간부들의 ‘밀실 합의’이라는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동조합의 자주성과 ‘단결의 자유’ 권리를 자본과 정권에 바쳤다. 동시에 이명박 정권의 ‘민주노조 말살 책동’에 동참함으로서 어용노조로서의 본질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따라서 90%에 달하는 노동계급의 단결권을 송두리째 저버리고 소속 조합원들의 이해와 요구조차 헌신짝처럼 내팽겨 쳐버린 한국노총 지도부는 더 이상 노동조합의 명찰을 달 이유가 없다.
헌법과 노동법에 보장된 노동 3권은 노사정 간의 흥정의 대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권은 부르주아 법이 갖는 최소한의 원칙도 무너뜨리고 있다. 이 역대 정권에서도 정치 권력자들은 노동자의 자주적 단결권을 부정하면서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을 억압해왔던가. 지금도 노동조합을 결성했다는 이유로 해고된 숱한 노동자들이 있다. 이명박 정권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사실상 노동조합을 부정하는 정권의 태도는 이미 철도 파업 파괴와 공무원노동조합 탄압에서 드러났다. 이제는 전임자 급여 보장을 문제 삼아 법으로 이를 금지하면서 노동조합 활동을 무력화시키겠다는 것이다.
말이 필요 없다. 민주노총은 전체 노동계급의 단결권 쟁취를 위해, 민주노조 사수를 위해 전면투쟁에 나서야 한다. 사실 노사정 야합논의가 진행되는 지난 며칠 동안 민주노총의 대응은 사실상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주노총 행보에 노동자들은 민주노총의 투쟁의지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이제 민주노총을 비롯한 산별노조 및 단위노조들은 MB정권의 ‘민주노조 죽이기’ 공세를 정면으로 돌파하기 위한 투쟁을 시작해야 한다. 이 투쟁을 앞두고 단위 사업장의 유 불리를 계산하고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민주노조가 될 수 없다. 현실 동력을 앞세워 투쟁을 회피하고서는 더 이상 민주노조를 지켜낼 수도 없다. 물러설 곳이 없는 상황에서 앞으로 나가는 것. 이것이 지금 민주노총이 선택할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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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김동암동지를 위하여

동지를 보내고 온 날, 계단을 오르려다가 발을 허공에 딛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동지의 영원한 부재 앞에서 저는 그만 길을 잃은 아이처럼 서성였습니다. 그런데, 가족들은 오죽할까요?
이 세상 어떤 죽음이 예고되고 준비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원망이 남습니다. 한이 남아요. 중환자실에서 사투를 벌이는 힘겨운 모습을 보고서도, 의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할 때도 이렇게 속절없이 가실 줄 몰랐습니다. 혹독한 대의와 책임으로 단련된 동지가 아닙니까?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부대끼며 뜨겁게 살던 동지가 아닙니까?
저 세상으로 보낸 동지의 옷은, 결혼식 때 산 양복이라고 하더군요. 15년이 넘은 옷을 여태까지 입고, 아꼈다고요. 김동암동지? 우리에게 ‘운동’은 무엇입니까? 이 땅에 ‘좌파로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정부와 자본가도 꺽을 수 없었던 것을, 제 몸이 녹아내리는 것도 모르고, 끝내 버리지 못한 헌 양복 걸치고, 그 비를 다 맞는 것입니까?
빛깔 좋은 변명하나 준비하지 못하고 도망치는 법도 알지 못하고 끝내 쿨하지도 못하고 수줍고 낯 많이 가리는 사람, ‘시골에서 살고 싶다’면서 고지식하게 꿈꾸는 게 전부였던 이 모자라고 불쌍한 내 동지, 내 선배, 내 가족 동암이형?
 2009년 올해는 연이어 거물들이 죽어갔습니다. 그들의 죽음에 대한민국이 요동쳤습니다. 그러나 민주노조를 건설했던 영광은 어디로 갔는지동지를 돌봐 주지 않고, 버리고 떠나갔습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맹세처럼, 황량한 벌판에 바람만 흩날립니다.
그래요, 어쩌면 이것은 우리가 원한 종착역의 풍경일지도 모릅니다. 특별할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그 뜻과 가치 마지막까지 노동자민중의 품으로 세상의 온기로 스며들기를 바랬지요.산화하는 삶으로, 소외되고 고통받는 세상의 눈물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토록 아픈가 봅니다. 정작 제 눈물 닦아줄 손수건 한 장 마련하지 못하고 부여잡으려 발버둥을 쳐도 의지가지없는 생을 살아가니 말입니다. 그것이 죽음으로서 살고자 했던 자들의 선택이고 숙명이 아니겠습니까?
동지가 가면서 무엇 때문에 눈감지 못하고 통곡했을지 압니다. 부질없는 약속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만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가족으로 옆에 살겠습니다. 제 스승이며, 뜻을 나눈 동지이며, 평생의 벗인 언니와 아이들의 이모로서 그렇게. 그날도 보셨지요? 저를 위로하는 언니를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아무 걱정 마시고 가던 길 편히 가십시오.
이제 이 까마득한 후배에 기대도 좋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쉬셔도 좋습니다. 나눌 영광따위야 없는 것이 우리네들이지만, 험난한 여정 함께 한 우리 동지들이 동지의 가는 길을 밝혀 드리겠습니다. 한 생이 다하도록 시대를 밝히려고 전념했던, 김동암동지에게 세월에 꺾이지 않을 동지애를 바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09년 12월 3일 박준영 올림

 

지난 11월 7일 김동암 동지가 갑작스럽게 우리 곁을 떠났다는 비보를 접했습니다. 고 김동암 동지는 유성기업노동조합에서 활동하며, 그 누구보다 민주노조운동과 노동해방 세상을 만들어가는 데 헌신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동지는 떠났지만 그 치열했던 삶과 정신은 언제나 민주노조운동 속에 사회주의운동 속에 언제나 함께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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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도박판에 기웃거려 남는 건 쪽박

[김영수의 세상뒤집기]

대박의 꿈을 갖고 도박판에 기웃거리다 타짜를 만나 쪽박을 차는 사람들이 많다. 도박판이 사기일 경우에는 열이면 열 모두가 쪽박을 차고 도박판 주변을 맴돌다 비렁뱅이가 된다. 사람들은 도박판이 사기인줄 알면서도 일확천금의 대박을 노리고 항상 기웃거린다. 매주 대박을 내는 진짜 타짜가 정부라는 것을 알면서도 로또 한 장을 사서 지갑 속에 고이 접어 확률의 꿈을 꾸게 하는 욕망의 도박판. 여기에서 쪽박을 차는 사람들은 그저 돈없고 힘없는 노동자들이다. 돈과 힘을 가진 자들은 도박판 자체를 조작하거나 아예 도박판을 외면한다. 도박판에서 공정한 게임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그저 우스꽝스러울 뿐이다.
합법적인 사기도박판에서는 돈과 힘이 춤을 춘다. 로또나 경마·경륜·경정도 그렇고 개미군단의 피를 빨아먹는 금융시장도 마찬가지이다. 경쟁의 스릴을 느끼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한다는 레포츠 도박도, 돈 놓고 돈 먹자고 하는 주식시장도 개인의 욕망을 자극하는 합법적인 사기도박판이다. 사회적 합의구조는 어떠한가? 정부와 자본은 노동-자본-정부 간의 합의야말로 민주주의 꽃이라고 하면서 판을 벌린다. 합의라는 말과 제도는 사람들을 미혹한다. 개인과 개인 사이에도 합의를 이루면서 살아가려고 하고 서로 주고받는 상생의 게임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부와 자본은 이러한 사기도박판을 벌려 노동을 유혹한다. 밖에서만 싸우려 하지 말고 제도화된 도박판에 들어와서 한 판 붙어보자는 게임을 제안하다. 도박판에 널브러져 있는 돈과 권력을 은근슬쩍 내줄듯이 말이다.
노동자들은 본래 돈과 힘이 없으니 협상과 합의를 거부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 판에 말려들어 쪽박을 찼던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의 아픔이 아련하다. 1998년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원회에서 정리해고와 노동유연화를 내주는 쪽박신세가 되었다. 한국노총은 과거는 고사하고 2001년 2월에 노사정위원회에서 복수노조 금지조항 삭제와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를 5년 동안 유보키로 합의하였고 다시 2006년에 복수노조 시행을 3년 더 유예하자고 구걸하여 타짜들에게 빌붙어 있다가 2009년 11월에 쪽박신세가 되었다. 민주노총은 한국노총을 정부와 자본의 기생충으로 간주하면서 점거농성까지 했었는데, 이제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다양한 협상창구를 인정하는 복수노조 및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의 폐지라는 도박게임에서 함께 완패하였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함께 쪽박신세가 되고 난 이후에야 피를 토하듯 외친다. ‘사회적 합의나 정책연대는 사기도박판이었다. 빼앗긴 돈과 권리를 되돌려 달라.’ 한국노총은 그러고도 기생충의 근성을 쉽게 버리지 못할 것이다. 단지 제도적인 돈과 힘으로 사기를 친 자본과 정부는 코웃음을 지으면서 그저 어눌한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을 상대로 또 다시 어떻게 사기를 칠 것인가 고민할 뿐이다.
사기도박판에서 쪽박을 차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있다. 가장 쉬운 방법은 판을 뒤집어버리고 다시는 사기도박판을 기웃거리지 않는 것이다. 판을 깨고 난 다음에 다시 기웃거려 타짜들의 즐거운 먹거리로 전락하지 말고, 노동자들이 진짜 투쟁이라는 게임의 판을 함께 벌려 타짜들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제도화된 타짜들을 농락하고 쥐락펴락할 수 있을 정도의 타짜가 되는 과정이다. 다음으로는 헌법이나 노동관계법보다 단체협약을 상위의 규정으로 만들어야 한다. 정부와 자본은 헌법이나 노동관계법보다 더 힘을 발휘하는 수단을 가지고서 도박판을 유지한다. 그것은 각종의 시행령과 시행규칙이다. 노동자들도 이제 단체협약이 헌법이나 노동관계법보다 우위에 있다는 내용의 권리조항을 단체협약에서 규정하자. 제도화된 타짜들이 제발 단체협약을 바꿔달라고 머리 조아리는 판, 이것이야말로 노동자들이 정부와 자본을 자유자재로 요리할 수 있는 도박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김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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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칼럼] 과거는 살아 오르는 오늘

친일 인명사전 발간
지난 11월 8일,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 인명사전’을 발간하면서 사회적 파장이 일고 있다. 민간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가 8년간 조사해 4,383명의 친일인사의 명단과 행적을 담은 이 ‘친일 인명사전’은 그 동안 친일논란의 핵심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롯해 장지연, 안익태, 홍난파, 김동인, 서정주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일본의 압제로 죽어간 조선 노동자, 민중의 숫자가 4백여만 명, 조선 땅에 들어와 활개 친 일본인 수가 8십여만, 거기에 기생했던 ‘친일반역자’가 1백 6십여만 명이었다. 이들 가운데 99%가 지식인이었다. 때문에 너무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일본제국주의에 편승했던 반역자들이 공개적으로 밝혀지는 건 ‘과거는 살아 오르는 오늘’이기 때문에 더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다.
애써 ‘친일인명사전’이라고 책 이름을 붙인 건 오히려 아쉬운 일이다. 사전에 들어간 자들은 일본제국주의를 찬양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노동자, 민중의 기본권 유린은 물론이고 억압과 탄압, 심지어 목숨까지 앗아가지 않았는가. 이들에게 친일파라고 하기보다 ‘인민의 반역자’가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반대하는 자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아 보인다.

과거를 숨기고 싶은 사람들의 궤변 
친일 인명사전이 발간되자 난리가 났다. 일본어를 배우는 것도, 일본에서 활동하는 것도 모두 친일파냐며 억지를 부리기도 하고 유명한 보수논객 조갑제는 “국가가 없었을 때 친일은 생존수단”이라며 정당성을 들이밀기까지 한다. 또 어떤 이들은 ‘독립운동가’가 아니었다면 ‘친일파를 비난할 권리조차 없다’며 자격시비까지 건다. 억지를 부려도 먹히지 않자 이번에는 마녀사냥을 준비하고 나섰다. ‘왜 친북좌파가 친일파보다 더 나쁜가’라며 ‘친일’의 반대말이 ‘친북’으로 둔갑하며 친일을 감추기 위해 친북좌파를 들이댄다. 심지어 뻔뻔해지기로 작정한 듯 ‘반공으로서 이미 친일을 극복했다’며 온갖 궤변을 쏟아내고 있다.
이렇듯 ‘친북’과 ‘친일’을 반대개념으로 이해하는 건, 상식과 지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반공의 대가로 안락을 누렸던 오랜 습성이 사고를 지배한 결과다. 또 법이라는 이름으로 공안의 독안에서 향응을 누린 자들이기에 일본, 미국의 공산당과 유럽전역에 숱하게 존재하는 사회주의정당들이 한국에만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듯하다.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민주주의 후진국인 한국사회가 세계적인 조롱거리가 되는 것도 그들에게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러더니 이제는 본격적으로 ‘친북좌파사전’을 만들겠다고 한다. 선정기준은 “북한노선을 고무, 찬양 선전동조자와 민중권력, 노동자권력 수립을 주장하는 자와 민중민주주의, 사회주의 실현을 선동한 자”란다. 
국제적 망신도 아랑곳하지 않고 ‘친북좌파인명사전’의 발간하겠다는 주장 속에 친일인명사전에 대한 대응의 의미도 있으나 이명박 정권의 사찰과 공안체제 구축이 눈에 보인다.
‘과거사진상규명’을 통해 밝혀진 많은 간첩단 조작사건이 ‘국가정상화위원회’에 이름을 올려  놓은 바로 그들에 의해 조작됐다. 반공이데올로기를 앞세워 노동자민중을 때려잡은 바로 그 당사자들이 다시 노동자민중을 때려잡을 책을 만들겠다고 나서는 것이다. 공안체제를 구축해야만 이 정권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세계의 조롱거리가 될 책을 만들겠다면 반대해도 아무 소용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명심해 둘 일이 있다. 그 명단에는 오랜 기간 비합법조직에서 혁명을 외쳤던 수 십 명에 달하는 한나라당 국회의원들과 민중권력쟁취를 주장하다가 현재 이명박 정권에서 제2인자를 자처하는 자는 물론이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주장하며 활동했던 한나라당 소속의 도지사를 그 명단에서 빼면 안된다. 아마도 그들 밑에서 운동경력을 팔아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는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사전하나 만들 수 있겠다. 이 정도면 만들어도 되겠다.
 

양규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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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노준 4차 총회 결과

사노준은 지난 11월 28일 4차 총회를 열었다. 이번 총회의 주요 안건은 <강령토론안> 심의 건과 <추진위 건설 일정과 사업계획안> 심의 건이었다.
먼저 <강령토론안>은 3차 총회에서 제출된 <강령초초안>을 중심으로 그 동안 조직 전체에서 수차례 토론을 진행하며, 조직의 긴장감을 한껏 고조시킨 바 있다. 3차 총회 직후, <강령초초안>에 문제의식을 가진 회원 2명은 각자 다른 강령초안을 제출했고, 모두 3개의 안을 놓고 팽팽한 논쟁을 시작했다. 3개의 안을 하나로 합쳐 회원들이 쟁점 내용을 집중 토론할 계획으로 논의가 진행됐지만, 강령특위는 끝내 하나의 안으로 합치는 데 실패했다. 어쩔 수 없이 3개의 안으로 전체 회원 토론을 시작했고, 토론의 양상은 강령특위의 토론과 다르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많은 회원들이 하나의 안으로 합칠 것을 다시 요구했고, <강령초안>으로 그간 회원들의 쟁점과 의견을 수렴해 수정작업을 진행했다. 그러나 새롭게 정리한 <강령초안>으로 회원토론을 거치기엔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에, 전국집행위원회에서 <강령초안>이 아닌 <강령토론안> 채택 건으로 총회에 상정했다. 안건 상정 과정 자체가 꽤 복잡했고, 본 안건 심의 과정에서도 내용 토론 보다는 형식에 대한 여러 의견들이 나와 토론은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결국 다음 총회에서 강령초안을 채택하기로 하고 <강령토론안>을 채택했다. 그리고 그간 활동했던 강령특위도 재구성하기로 결정했다. 자세한 과정과 이후 토론 과정은 본 신문에 차근차근 실을 계획이다.
두 번째 안건인 <추진위 건설 일정과 사업계획안>은 4차 총회가 열리기 직전에 조직의 긴장감을 폭발시킨 안이었다. 추진위 건설에 대해 ‘5차 총회(2010년 2월)를 기점으로 사노련과 노투련이 함께하는 새로운 조직체를 통해 추진위 건설을 2010년 내로 연기한다’는 안이다. 좌파재조직화 사업이 사노련, 노투련과 급물살을 타며 총회 사전 순회토론 직전에서야 새로운 조직체의 위상과 구성, 활동에 대한 상이 드러나면서, 속도감있는 논의와 정치적 판단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이 안건은 총회에서 치열한 논쟁이 예상되었다. 그러나 의외로 반대없이 원안을 통과시켰다. 총회 전 사전순회토론을 거쳐 회원들의 견해를 수렴하여 안을 보완한 점이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이유로는 좌파 공동의 추진위 건설을 위한 새로운 조직체 건설안에 대해 사노준이 역량을 총동원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후 새로운 조직체 건설 과정에 대한 사노준의 입장과 타 조직과의 논의진행도 본 신문에 차근차근 실을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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