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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날 끝이 좋지 않았다.

  • 등록일
    2005/07/10 20:19
  • 수정일
    2005/07/10 20:19

내가 마음이 부족해서 그런지... 욕심이 많아서 그런지 잘 모르겠지만 오늘 좋은 날임에도 끝이 좋지 않았다.

 

오산지역에 모인 동지들이 예상보다 적게 왔고, 예상하였던 시간을 넘어서 행사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지역을 대표하는 동지들을 뽑고, 교육도 받고 행사를 무사히 마쳤다.

 

늘 고된 노동에 일요일을 헌납하여 나오는 동지들의 모습에서 참 힘들지만 열심히 활동하고 있음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확인하고 있지만 오늘은 참 무심하게 생각이 든다. 문화의 차이겠거니 그렇게 넘기면 될 것을 내 주장을 강하게 편것인지 모르겠지만 오늘은 동지들의 모습이 그리 썩 보기 좋지는 않았다.

 

지역을 대표할 동지들을 선출했고, 그 축하의 자리를 마련해 주고 축하한다는 인사차 뒷풀이를 간단히 갖으면 될 것을 일정이라는 이유로 다음으로 미룬다. 다른 행사였으면 흔쾌히 동지들의 바쁜 일정과 일요일 밖에 시간이 없음을 알기에 그냥 보내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내 개인적 판단으로는...

 

동지들의 주체를 뽑고 앞으로 열심히 활동하라는 격려와 함께 앞으로 어떻게 이주노동자노동조합 남부지부를 활동할 것인지... 다음 회의를 잡고, 투쟁계획을 논의하는 자리를 마련하지 못하고 남부지부 창립총회를 마무리 지었다. 동지들이 기리 기억하고 가슴에 새겨질 그 날을 그렇게 쉽게 일정이라는 이름으로 흘려보내는 것 같다는 생각이다.

 

다른 누구에게도 축하를 받을 자리.... 그리고 기간 이주운동이 인권, 그리고 노동자 권리 투쟁을 넘어 이주노동자 스스로가 주체로 서고자하는 자리에서 그 주체가 객체로 전락하는 생각이 주관적으로 들었다. 그래 뒷풀이 자리를 무리하게 잡은 나도 문제이다. 그렇지만 뒷풀이라는 자리가 꼭 술을 의미하지는 않지 않는가? 서로에게 다 나라 사람들이 격려하면서 함께 무엇을 할까? 초안이라도 이야기하는 자리.... 그 자리를 피하는 느낌.... 그리고 내가 머물고 있는 센터는 이주노동자를 도와주는 자리가 아니라 연대단위이다. 내가 뒷풀이가 어렵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지부장 축하를 위한 단결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미덕이지 않을까?

 

경험이 적은 이주노동자 동지들을 격려하고 앞으로 세워 나가는 자리를 마련하지 못한 느낌.... 그리고 들었던 참 서운한 말들.... MTU가 동지들의 조직이고, 동지들이 가꿀 장소인데... 그러면 활동하기 힘들다는 말을 듣는게 화가 났다. 왜 자신의 조직을 그렇게 쉽게 생각하는 것인지 난 모르겠다. 각 나라별 공동체도 중요하다. 그러나 현 상황이 각 나라별 공동체로 극복되고 단결로 극복될 수 없음을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공동체 내에서도 MTU 활동에 대해 전체적으로도 적극적이지 않지 않은가? 서로 일치단결해서도 부족할 판에.... MTU를 센터가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 심히 화가 났다.

 

난 MTU 활동을 연대하는 연대단위이다. 내가 그 MTU에서 활동을 감나라 대추나라 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 센터에 가입하고 있지 않은 동지들을 어떻게 MTU 활동에 결합시키고 조직원으로 만들고 함께 연대할 것인지가 주요한 나의 위치며, 나의 활동이다. 내밀은 손에 손을 잡고자 하지만 나도 아직 부족한 것인지 화가 버럭 오늘 났다. 그 고통을 나누고 싶지만 난 그 고통에 대해 아픔만을 전달받는 사람에 불과하다.

 

출입국관리소의 단속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동지들이 본인의 동의와 다르게 범법자로 낙인되어서 끌려가는가? 그 모습 잘 알고 그 해결을 위해 다나라 이주노동자들이 모이지 않았던가? 그리고 지금 아노아르 위원장은 MTU 탄압 분쇄와 단속추방 반대를 위해 그 지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지 않던가? 참 내가 부족한 것이 많아서 그런지 그럴꺼면 어려우면 활동하지 말라는 말을 하였다. 

 

나도 그러지 못하지만 나보다 너를 생각하는 사람은 되지 못하더라도.... 활동이라는 이름으로 서로 흠짓이나 상처내는 말을 쉽게 내뱉지 말아야 하는데... 내 귀에 들린 활동은 이주노동자들을 상대로 센터가 뭐 거창하게 발전하는 것이라는 착각을 들게끔하였다. 그래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 투쟁의 당사자가 자신의 문제를 받아들이는 자세에서 주체가 아닌 객체로 전락하는 모습을 보는 느낌을 받았다.

 

앞으로도 그럴것이다, 난 부족한 것은 많지만 투쟁하고자 하고 연대하는 사람의 내민 손은 뿌리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스스로 이 문제에서 객체이고자 한다면... 나 또한 그 관계에서 그냥 그저 아는 이로 남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니다. 뒷풀이를 강요하였던 것인지 모르지만 내 깐에는 동지의 정을 느끼고 앞으로 힘들게 활동을 펼친 지부장을 축하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힘든 자리 선뜻 승락한 그 동지에게 박수를 지역 동지들이 함께 하였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이게 잘못이라면 문화적 차이를 불인정한 강요라면 달게 그 욕 먹겠다. 그러나 누구도 그 자리를 미루고 하지 않으려고 하며 두려워하는데 선듯 그 자리를 승낙하고 그 고단함을 이고 나갈 동지에게 동지들의 격려가 없다면 그 활동이 순탄하지만은 않다.

 

연대해온 동지와 이주노동자 2명이 조촐한 자리를 마련하여 뒷풀이를 조촐히 닭을 먹으면서 끝냈다. 이후 활동이 험난하겠다는 생각과 함께.... 참 기분이 엿같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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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 등록일
    2005/07/03 14:28
  • 수정일
    2005/07/03 14:28

이주활동을 하면서 본의 아니게 이별을 자주한다.

어린이집에 나왔던 방글라데시 아이 라비와 이별을 한다.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간다고 하여, 저번주 수요일 환송해겸 생일파티를 하였다. 액자에 비친 라비의 모습이 눈에 아른 거린다.

 

가냘픈 몸.... 태어날 때부터 인큐베이터에서 있었던 아이 그리고 밝게 자랐고, 방글라데시 말보다 또박또박 한국말을 잘하는 아이이다. 눈도 이쁘게 생겼고 아이들에게 말썽을 부려서 그렇지만 해맑게 자랐다. 아버지가 과로사로 죽은 아이 그래서 목사님과 삼촌들을 보면 아빠라고 서슴없이 말하며 따르던 라비가 이 한국에서의 생활을 접고 방글라데시 집으로 간단다.

 

오목사님과 어린이집 이진희 선생님이 라비에게 줄 선물이라며, 잘 먹는 미역을 한아름 선물하고 옷가지 몇개와 선물을 준비하였다. 이별을 준비하기에 어린 나이... 마냥 엄마와 아이들과 뛰노는 것에 정신이 팔려서인지 천방지축 뛰어다닌다. 라비 안녕이라고 말하지만 라비는 집에 간다는 것에 대해 알지 못한다.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의미.... 그리고 한국에서 떠나면 자신의 모국어를 배우고 한국에서 생활을 기록된 사진 몇장으로 밖에 기억하지 못한 라비에게 잘가라는 인사를 하지만, 라비는 신이나 있어 이도 아랑곳하지 않고 떠든다.

 

아이들과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여러장 찍었다. 라비를 보내는 것이 아쉬움보다는 라비가 이공간에서 함께하였던 시간에 대한 애증이며, 사람과 사람이 헤어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다. 늘 큰 목소리로 아저씨 삼촌을 외쳤던 라비의 음성을 이제는 듣기 힘들다는 생각을 하니 또 이별하는 구나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전에 먼저 귀국한 방글라데시 밈 소식도 들었다.

 

방글라데시 생활에 적응을 못하는 것인지... 자꾸 아프다고 한다. 그래서 라비도 은근슬쩍 걱정이 된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몸이 외소한 라비.... 방글라데시에서 잘 적응하고 방글라데시인으로 살아가는데 불편함이 없었으면 한다.

 

내일이면 또 함께하였던 이를 보낸다. 며칠전에 환송해를 해주었으니 오늘 고국땅을 그리고 있을 라비의 엄마와 라비를 생각해 본다. 그렇게 센터에 있으면서 이주동지들과 이별을 늘 준비하며,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이 마음 한켠이 불편하게 다가온다. 달에 한두명 아는 이들을 보내는 것도 그리 썩 기분내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고국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뒷모습이 쓸쓸하지만은 않아서 다행이다.

 

온갖 어려움을 몸소 꿋꿋히 버텨왔을 그/녀들의 삶이 고국 땅에 돌아가서도 노동자로 살아왔던 삶을 되세기며 살아갔으면 하는 바램과 노동자의 현실에 대해 생생히 알고 떠나갔으면 한다. 또 그/녀들이 방글라데시에서도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동지가 되었으면 한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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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먹은 다음날...

  • 등록일
    2005/07/02 10:43
  • 수정일
    2005/07/02 10:43

술먹은 다음 날은 하루가 망가진다.

오늘도 마찬가지이다. 늦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시계를 보니 10시더라 허걱.... 일하는 시간중 2시간을 날려 버렸다.

 

늘 그렇게 산다. 어제 자중하고 술을 먹었어야 하는데... 그놈의 술이 입에만 닿으면 자제가 안되니 허걱이다. 오늘도 공친다. 또 오후에 신탄진을 내려가야 하는데... 어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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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방위 훈련...

  • 등록일
    2005/06/29 00:13
  • 수정일
    2005/06/29 00:13

민방위 훈련 4년차...

한동간 가지 않았던 민방위 훈련을 올해 상반기 마지막 훈련이라는 통지서를 받고 갔다왔다.

민방위 훈련 교육... 너무 무미건조하다. 강사들의 자기 자신에 대한 자랑과 호국애가 넘쳐나는 충정때문에 짜증을 잠으로 대신하고 나왔던 자리... 민방위 훈련에서 나는 또다시 반공소년으로 과거의 회귀를 한다. 그렇게 대한민국은 사람을 정훈훈련 시키고 있다. 그러나 무섭게 다가온다.

 

이를 뒤로하고 오늘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났다.

그리고 술한잔 하고.... 나만 술을 먹었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다. 간만에 만난 자리... 내가 그나마 연락하면 만날 수 있는 사람... 만나도 부담없는 사람과 함께 쓰잘대기 없는 이야기를 하고 시간이 되어 오산으로 내려왔다.

 

그래도 만남을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만나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한다. 간만에 만나 이야기는 많이 하지 못하였지만 그래도 함께 그런저런 잡스로운 이야기속에서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조금이나 한게 기분좋다. 다음에도 그렇게 만나는 시간이 주어졌으면 한다.

 

막연히 다음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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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도시화가 나주를 바꿔놓았다.

  • 등록일
    2005/06/26 15:32
  • 수정일
    2005/06/26 15:32

알엠님의 [해남여행] 에 관련된 글.

 

내가 알고 있는 나주는 인심이 많이 흐르는 곳이였다. 나주군 영산포를 일년에 몇번 오고가는 자리 그 자리엔 서울에 상경한 자식을 보기 위해 올라가는 할머니,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늘 기차를 기다리며, 이야기가  도란도란 흐르는 공간이였다.

 

영산포역 근처 국밥집에 들어가면 어디올라가냐고 물어보고, 서울에 가서 공부를 해서 집에 내려왔다 올라간다고 하면 아주머니, 찐개란과 갖은 반찬은 더 주시며 많이 먹으라고 이야기해주던 국밥집 아주머니, 매점에 가면 껌이라도 더 주던 아저씨가 있던 공간이다. 내 유년 그 시선은 늘 힘내고 공부하라고 격려를 받던 공간이다.

 

내가 사는 영암군은 호남선을 타기 위해 반드시 나주에 있는 영산포역이나 터미널에서 차를 타고 올라가야 한다. 그래서 난 내가 자란 공간이 아니지만 영산포역 주변과 터미널 주변에 있는 밥집과 매점들에 대한 기역이 새롭다. 늘 격려해주시고, 혹시나 서울로 돈벌러 가지는 않는 것인지 물어보는 다정다감한 분들이 있던 공간이다. 우리 동네 형, 누나 그리고 친구들이 이 곳을 통해 서울로 올라와 고된 노동자로 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거쳐 가는 곳이였다.

 

영산포역은 나에게 작은 꿈을 주었다. 우리 동네형들 대부분이 집안사정 때문에 고등학교를 인문계로 진학하지 못하고, 수도공고나 철도공고에 입학을 하였다. 방학때면 교복을 입고 오는 형들의 모습이 좋아 어린 나에게 있어 꼭 수도공고나 철도공고에 입학해야지 하는 꿈을 주곤하였던 공간.... 이 당시 우리 집은 순전히 외가가 서울에 있고, 친척이 광주에 없어서 서울로 유학아닌 유학을 하였다. 형은 서울중학교에 시험을 보고 입학을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과 도시화는 나주를 돈이 만능인 사회로 만들어버린 것 같다. 알엠님 포스트를 보면서 변해버린 나주시내를 상상해 본다. 나주군에서 금성시로 금성시에서 나주시로 이렇게 바뀐 영산포는 그렇게 그렇게 사람이 번잡하고, 새로운 꿈을 꾸고 떠나는 이가 머물거나 도시의 삶에 지쳐 고향으로 귀향하는 이들이 교차하는 공간이었다. 그래도 인심과 사람의 웃음이 끊이질 않던곳.... 국밥집 어디를 가던 어린 것이 고생한다며, 뭐하나라도 더 집어주지 위해 분주했던 국밥집 아주머니의 손길이 느껴지는 곳이며, 고마움이 저절로 보따리에 챙겨주신 꽃감이나 기차간에서 먹으라고 싸준 과자 봉지를 작은 손을 내밀며 건냈던 기억... 어머니 처럼 환대를 해주었던 그리움과 고마움이 배겨난 공간이었다. 어린 눈에는 커다랗게만 보였던 역이 나이가 먹으면서 작게 조그맣게 다가온 그 영산포역..... 그 공간은 내가 서울 올라올때면 늘 어머니에게 환송을 받는 느낌을 받게 하던 공간이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간이역 규모이지만 그 공간을 통해 무수한 사람들이 오고 갔음을 짐작해본다.

그 공간이 비둘기호가 없어지고 통일호가 없어지면서 그 인심 또한 사라졌음이 안타깝다.

 

비둘기호를 타고 올라오는 풍경 모든 역에 정차한다. 매 역마다 시암닭과 찬기름 그리고 쌀과 갖은 채소를 갖고 올라타는 풍경은 정말 정겹다. 그 정차역마다 서울 또는 지역에 있는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전개주기 위해 바지런히 식품들을 챙겨다 주고자 하는 부모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그 기차역에서 까먹는 찐계란과 사이다는 기차여행의 백미이다. 저녁 8시에 타서 아침 8시 용산역에 도착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그리고 기차역에서 친해진 사람과 짧은 만남이지만 어느지역에 사는 누구라며 통성명하고 함께 기차타는 시간동안 친구가 되어 이야기 정겹게 하기도 하고, 음식을 나누어 먹기도하는 그 기억들은 유년시절의 정겨움으로 남는다.

 

간혹 통일호를 타고 올라오는 길.... 그 풍경 또한 좋다. 비둘기호에 비해 빨라서 돈이 좀 있으면 통일호를 타고 올때가 있다. 고속버스는 요금이 비싸서 자주 타지 않았지만 정겹게 안내를 해주던 고속버스 안내양 누나가 생각난다.

 

아마도 집에 내려가거나 서울로 올라오는 일들은 나에게 있어서 유년시절 여행으로 기억된다. 그 기차여행에서 사이다와 찐계란 그리고 오징어를 먹으면서 내려오는 여유... 사이다와 찐계란 그리고 오징어 등등 과자봉지를 들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본다. 어린 학생이었지만 그래도 혼자 그 먼 고향 길을 오고 갔던 생각을 하면 간혹 아찔하던 생각이 난다.

 

그 기억의 흔적은 KTX라는 고속철도가 생기면서 사라졌다. 서울역 역사도 함께 잊혀지고 있겠지.... 지금 시대 모두 빨리빨리 시간 단축이나 효율성을 강조하지만 느림의 미학 여유롭고 다채로왔고, 정겨웠던 우리내 일상 소소한 정들을 시간의 빠름과 함께 잊혀지고 있다. 아쉽다. 그 정을 품었던 분들이 기차와 함께 떠올리게 한다.

 

덜컹덜컹 기차를 타고 12시간을 잠자다 일어나서 제잘제잘 거렸던 그 유년의 시절... 집에 내려갈때의 설레임과 올라올때의 아쉬움이 반복되었지만 그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 나에게는 행운이었다.

 

늘 내 고향 영암군 시종면을 갈때면 들렸던 그 공간이 이제는 자본에 찌들어 각박함많이 흐르고 있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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