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분류 전체보기

[논평] 세종시 찬반논란, 지역주의와 보수정치권의 이전투구로 전락

이명박 정권은 지난 11일 세종시 수정안을 발표했다. 수정안의 핵심내용은 행정기관 이전을 골자로 하는 원안 폐기와 혁신도시 계획을 적용해 과학비즈니스벨트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수정안이 발표되자 정치권은 벌집을 쑤셔 놓은 듯 난리다. 지역별로도 수도권은 ‘환영’과 동시에 ‘수도권 지역의 규제완화’를, 수도권 외 지역에서는 ‘세종시 특혜’라며 정부 비판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그 중에서도 언론의 가장 큰 관심은 한나라당 내 친박계의 반대로 불거지고 있는 한나라당 내 반발이다. 이미 충청권 한나라당 기초의원들 및 주요 당직자들의 탈당 러시가 이어지고 있고 수도 이전 반대를 외치며 국회 단상을 점거하고 대통령 탄핵을 진두지휘했던 박근혜는 ‘세종시 원안’ 고수의 선봉자가 됐다. 하지만 대다수 노동자서민들은 정치권의 이전투구가 올 해 지자체 선거를 겨냥한 정치행보에 불과하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다. 실제 세종시를 둘러싼 지방균형 발전, 생태환경을 헤치지 않는 개선 등에 정치권들이 관심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러다보니 각 지역별로 기업유치에 혈안이 되어 있는 주요 도시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로 세종시 문제를 바라 볼 뿐이다.
지역주의가 난무하고, 각 이해관계로 국민들의 여론을 동원하는 정치권의 후진적인 이전투구는 일차적으로 이명박정권이 제공했다. 세종시 수정안을 제출하면서 주요 대기업들에게 반값으로 땅을 제공하고 심지어 사상 초유의 단독 특별사면이라는 결정을 내리면서까지 기업들의 세종시 유치를 강제하고 있는 정부 정책이 온 나라를 두동강, 세동강 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지역주민들의 경제, 생활 등은 그들의 관심사 아닌 지 오래됐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종시 수정안을 반대하면 ‘선’이 되고 다수 노동자서민들을 위한 것이라는 왜곡된 인식은 곤란하다. 또한 지역주의에 가둬진 ‘세종시 찬반논란’은 노동자서민들의 삶과 무관한 것이 대부분이다. 중요한 것은 기업특혜, 부자감세로 기업플렌들리 정책을 관철시켜내고 있는 정권의 정책 자체가 문제시 되고 경제, 사회적 불평등을 근본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공공서비스 확대와 시스템 구축이, 환경에 대한 고려가 전제되는 전략을 마련하고 공론화해야 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난장판의 국가 전도사

[김영수의 세상뒤집기]

2009년 세밑과 2010년 새해 벽두에 국익을 주제로 하는 ‘난장판의 전도사’라는 희극이 공연됐다. 한 번은 중동의 아랍에미리트연합(UAE)에서 또 한 번은 대한민국에서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되놈이 먹는다’는 속담이 있듯이, 2009년 세밑에서 정작 수고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엉뚱하게 이익을 가로치려는 되놈 부대가 온 나라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되놈들의 수장은 이명박 대통령이었고 주류 언론은 그 졸병들이었다.
47조 원 규모인 아랍에미리트연합의 초대형 원자력발전소 건설공사를 헐값으로 수주하여 앞으로 발생하게 될 적자문제나 녹색지속성장에 반하는 원전건설문제를 차후에 말한다 치더라도, 중동의 한 난장에서 자본을 위해 의기양양하게 전도하고 설파하는 우리나라 대통령의 모습이 연말의 TV화면을 꽉 채웠다. 카메라 앵글은 1박 2일 동안 이어지는 주연배우의 일거수일투족을 잡아 온 국민의 눈과 마음을 파고들었고, 마이크는 온 국민에게 승리를 가져다줘 국가의 운명이 바뀌는 역사적인 대사건인양 혹은 에너지 수입국에서 수출국으로 변신하는 대사건인양 전도사의 공로를 보도하는데 열을 올렸다. 국민들은 희극의 주연배우에 대해 정말 ‘CEO출신의 대통령답다’, 혹은 ‘국운과 국익을 위해 헌신하는 대통령’이라는 희극평론가들의 용비어천가를 들어야 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그 용비어천가에 이건희 ‘특별’사면으로 화답한다. 유능한 한 사람이 국민 1만 명 이상을 먹여 살린단다! 개인적으로 이건희가 유능한 사람인지 무능한 사람인지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아주 적은 지분을 가지고 삼성그룹을 지배하면서 온갖 불법만행을 저지른 것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노동자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이건희, 삼성의 무노조 신화를 위해서 노동자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이건희, 대를 이어 자본을 승계하기 위해 온갖 불법을 저지르는 이건희, 돈이 없고 가난한 소위 천재들을 장학금으로 매수하여 권력 망을 구축하고 있는 이건희. 혹시 이명박도 삼성그룹의 장학생이 아닌가? 이건희의 아버지인 고 이병철이 이명박에게 장학금을 수여했는지도 모른다. 하여튼 잘 알기 힘든 부분이지만, 한 국가의 대통령이 한 개인을 ‘특별’사면하는 대사건을 저질렀다. ‘난장판의 전도사’가 국가를 정말 그들만의 난장으로 만들었다.
대통령은 일반사면과 특별사면의 권한을 행사했을 뿐이란다. 이러한 권한은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다. 절차에 따라 권한을 행사한 것 자체를 가지고 문제시 할 경우, 우리는 너무 궁색하고 초라한 것 같다.
이명박 정권이 정말 독재적이고 권위주의적인가? 아니다.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법과 제도를 근거로 지배하고 있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들은 그 동안 드러내지 않았던 자유 민주주의 체제의 반민주적, 비민주적인 법과 제도를 철저하게 사용하고 있을 뿐이고, 자유민주주체제의 전도사로 존재할 뿐이다. 아주 명민한 선교사 정권이다. 더군다나 국민도 이 체제의 선교대상으로 남기를 원한다. 이전의 김대중 정권이나 노무현 정권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노동자들이야말로 이 체제에 중독되어 있는 것 아닌가? 그들은 심지어 희극의 주연배우 팬클럽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국가의 경계가 소멸하지 않는 한,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약 200여 내외의 국가는 국익을 위해 서로 경쟁하거나 협력하면서 존재한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다.
자본뿐만 아니라 국민 아니 노동자들이 그것을 요구하지 않는가. 자본의 왕국을 유지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노동자들의 근본적 인식 전환 없이는 노동자들은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언제든 동원될 뿐이다.  체제 중독을 벗어나지 않는 한 억울해도 하소연할 수조차 없다. 하지만 우리는 자본의 난장과 희극을 기획하고 선도하는 자유민주주의를 넘어서거나 또는 국민이 그 국가를 언제든지 다시 구성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국가와 민족은 새로운 형식과 내용으로 재구성되어 왔고 앞으로도 재구성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김영수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제 발등을 찍는 미국의 대테러 대응 전략

성탄절 항공기 테러 미수사건의 배후가 아라비아 반도 알케에다(AQAP)로 드러나자 미국이 예멘에서 대테러 전선을 넓히면서 ‘새로운 전쟁’의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현재 사우디아라비아와 접한 예멘 북쪽 국경지대 사다 주(州)는 사실상 전시상태다. 사다 주 일대는 아프간-파키스탄 접경지대처럼 정부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무법지대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모든 상황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미국 정보기관들과 예멘 정부는 아프간 알카에다 조직원들이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주장하지만 알카에다가 어디에 얼마나 들어와 있는지는 모르고 있다. 예멘의 살레 친미정부는 물밑에서 알카에다 조직과 얽혀 있다. 미국은 이러한 사실을 간과하고 예멘의 정정불안으로 역내 안정이 깨지는 것을 막으려 살레 정부를 밀어주고 있다. 이에 살레 정부는 미국에 등 떠밀려 대테러전에 나섰지만 결과적으로 AQAP를 배신하게 되었다.
예멘의 ‘배신’과 미국의 공세에 몰린 AQAP는 보복을 다짐하고 있다. AQAP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예멘에서 활동하는 테러조직이다. 이들의 목표는 사우디 친미왕조를 몰아내고 아라비아 반도를 미국 지배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복잡한 상황 및 이해관계가 대테러전을 확산시키고 있다. 하지만 그 피해는 고스란히 예멘 민중들이 떠안는다. 예멘 국경지대에서 민간인 살상, 학대, 가혹행위, 폭격, 난민사태 등이 벌어지고 있으며 이라크, 아프간에 이어 세 번째 전쟁이 될지도 모른다.
예멘과 관련해 ‘테러와의 전쟁’ 정책 폐기의 상징적 조처로 추진해왔던 관타나모 수용소 폐쇄도 유동적이라는 소식이다.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풀려난 수용자 5명 중 1명이 테러전에 복귀했다는 확인 불가능한 미 국방부의 비밀정보를 근거로 폐쇄 조처를 당분간 유보시켰다.
미국은 예멘에 육군 특수부대와 정보요원들을 파견했으며 대테러전 무기·자금을 내주기로 결정했다. 또한 앞으로 18개월간 7000만 달러를 들여 예멘 대테러 병력을 훈련시킬 계획이다.
하지만 미국이 예멘에서 전쟁을 일으킨다면 제 발등을 찍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할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치르는 전쟁의 총비용이 3조에서 6조 달러 사이의 천문학적인 액수로 추산되는 상황에서 예멘에서의 전쟁은 오바마로 하여금 그 어떠한 정책도 추진하기 어렵게 만들 것이다. 또한 경제회복이 여전히 불투명한 상황에서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는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오바마는 확실히 국익을 중시하는 실용주의적 미국 대통령이다. 게다가 네오콘을 비롯한 보수세력 뿐만 아니라 행정부 내의 일부 관리들이 오바마를 견제와 감시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 그가 ‘핵 없는 세상’을 주창했지만 아프가니스탄 추가 파병의 필요성을 역설한 직후에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역시 미국 대통령답다.
오바마는 평화상에 부끄럽지 않으려면 민중의 행복은 군대의 폭격과 무력진압으로 민중을 굴복시켜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며, 아프가니스탄과 예멘은 테러리즘의 진원지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테러리즘을 활성화시키는 것은 바로 미국의 군사 행동이며 파키스탄, 이라크 등에서의 군사작전을 확대한 뒤부터 더욱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을 밝혀야 한다.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 <아바타>는 우리가 두른 세계의 폐해를 진단하면서 신인류의 탄생을 촉구하고 있다. 미국에게 신인류의 탄생을 촉구하는 것이 그렇게 무모한 것인가.
 

배성인(한신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그게 나야!

[노동운동 혁신하자!]

슬픈 자화상
복수노조 전임자 임금관련 노동법을 개악시킨 추미애의원이 3자야합안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내비치며 두 노총을 차례로 방문한 적이 있었다. 들은 이야기로는 민주노총 사무총국이 마치 구세주를 맞이하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추미애는 야합안과 다를 바 없는 중재안이 나오기 전까지는 소위 진보진영 내에서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렇게 기대했던 추미애 의원이 그토록 비열한 방법으로 개악안을 통과시켰을 때 그들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상황이 급박하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라지만 보수야당 추미애 의원의 본질적 한계를 모르지는 않았을 터인데 그 길지 않은 시간에 비춰진 우리의 자화상은 너무 슬프다.

3년 전에도, 6년 전에도 이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계급적 단결과 투쟁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노력보다는 허울뿐인 노사정 협상에 매달리다 여러 차례 뒤통수를 맞아왔다. 국가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 수탈의 모순을 숨긴 채 노동자들을 경쟁구도에 몰아넣고 자신들의 부와 기득권을 유지했던 자본의 전략은 관철되고 있다. 반면, 자본에 맞선 민주노총의 대응은 실패를 거듭하고 있고 총노동의 투쟁전선 구축은 고사하고 치열했던 쌍용차투쟁이나, 철도투쟁처럼 자본과 정권의 공격으로 십자포화를 막고 있는 투쟁도 엄호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는 투쟁보다는 교섭을, 국민과 함께하는 운동을 통해서는 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를 막아낼 수 없다는 것을 확인된 것이다.
이번에도 ‘노조법 개악안 통과 시 총파업’이라는 대의원대회 결정은 집행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미집행에 대한 해명조차 없다. 다만 시행까지는 시일이 있으니 준비해서 투쟁하겠다는 변명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조직의 최고 결정이 그렇게 무시당하는 일이 벌어져도 어느 단위하나 문제를 제기하고 항의하는 곳이 없다.
87년 이후 노동자 투쟁의 구심이요, 계급적 단결의 상징이던 민주노총이 어느새 대적전선은 고사하고 자신의 내부조직운용도 어려워진 상황에 처한 것이다. 이번뿐 인가. 아니다. ‘총파업 남발 지향’, ‘준비된 총파업으로 세상을 바꾸는 투쟁’을 선포한 6년, 민주노총은 이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 그렇기에 6년을 관통했던 민주노총 내의 노선에 대한 근본적 변화가 불가피한 시점이다.
얼마 전에 개그프로에서 해서는 안 될 일이나 잘못한 일들을 막 이야기하다가 ‘그게 나야’를 고백해서 웃음을 자아냈던 코너가 있었다.
하나 같이 혁신을 외치며 진행하는 민주노총선거에서 혹은 이명박정권의 무자비한 공세에 밀려서 속절없이 당하고 있는 운동진영 내에서 ‘그게 너야, 너 때문이야’가 아니라 ‘그게 나야, 나 때문이야’라고 말 할 수만 있어도 우리는 새로운 희망을 발견 할 수 있으리니.
 

이경수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차라리 국회를 닫아라

 

[논평]

한나라당이 국회 상임위원장을 다수당에서 모두 맡도록 하는 국회법 개정안을 이달 중에 발의키로 했다고 한다. 그리고 한나라당 국회선진화특별위원회에서 연구하게 될 것이라고 하니 여하튼 ‘선진화’라는 이름으로 역사를 뒤로 돌리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지금 MB정권은 어찌됐든 지난 20년간 진전되어왔던 정치적 민주화를 후퇴시키면서 법위에 군림하는 권력을 만들려하고 있다. 지난 상반기에는 검찰을 동원해 언론을 장악했고 국회는 다수당의 횡포 앞에 무기력해졌고 민주주의는 권력을 가진 자의 소유물로 전락해버렸다.
최근 철도파업은 어떤가. 법이 정한대로 합법파업을 해도 불법파업으로 규정되는 것은 정권의 마음이다.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사람들의 권위 따윈 전혀 필요가 없다. 공무원노조 역시 마찬가지다. 기존 법을 바꿔서라도 공무원노조활동을 허용치 않겠다는 발상은 바로 법은 바로 권력의 가진 자에 의해 마음대로 바뀐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러다보니 한 사회에서 법이 갖는 권위는 이제 별로 없어 보인다. 정권이 말하는 법과 원칙은 구성원들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규범이라고 생각하기는커녕 이명박정권의 권력남용쯤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 현 실태다.
상황이 이런데도 한나라당은 이제 국회를 무용지물로 만들려는 법을 상정한다고 하니 무덤을 스스로 파고 있는 꼴이다. 가뜩이나 일반 서민들은 국회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지난 2008년 촛불은 ‘위임정치’, ‘대리민주주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 아니었던가. 이후에도 국회는 MB정권의 반민중적 독주를 막지 못했고 반대로 정권의 거수기로 전락해가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여기다 다수당이 상임위원장을 독식하겠다고 하니 이쯤 되면 국회 무용론이 급격하게 확산될 것이다.
차라리 국회를 닫아라. 그리고 국회 내 정치를 넘어서 MB정권과 노동자민중 사이의 정면대결을 해보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양치기 소년들의 동원령

[김영수의 세상뒤집기]

사람들은 대부분 거짓말을 싫어하면서도 한다. 부모들은 자식들에겐 거짓말이야말로 가장 큰 잘못이라고 가르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거짓말에 익숙하다. 가끔은 전체를 위해 ‘선한’ 거짓말을 하는데 그게 무슨 대수냐고 말한다. 특히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더욱 그러하다. 아이들은 기성세대들의 크고 작은 거짓말에 불쌍하게 목숨을 잃는 양의 신세로 전락한다. 시험 삼아 거짓말을 했다가 정작 늑대가 왔을 때는 사람들을 동원하지 못해 양들을 잃어버리고 쫓겨나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살아야만 했던 양치기 소년. 후보 시절에 일제고사를 거부하고 학교의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목소리 높여 외치던 소위 진보 교육감조차 양치기 소년으로 변했다.
이명박 정권은 일제고사라는 ‘시험 동원령’으로 모든 학생과 학부모들을 일제시대의 ‘전시 동원령’과 유사하게 동원하고 있다. 일제고사를 거부하는 선생님들은 징계를 받아야 하고, 시험을 거부하는 학생들은 무단결석으로 처리된다. 그 진보 교육감은 ‘시험 동원령’만이 아니라 최근엔 면담을 요청하는 사람들에게 ‘경찰 동원령’까지 내렸다. 자본주의 교육정책의 파발마만이 학생과 학부모들의 몸과 마음을 짓밟으면서 내달리고 있다.
물론 자본주의 교육은 기본적으로 체제에 순응하면서 자본의 돈벌이에 동원할 수 있는 사람들만을 양성하려 한다. 1994년 자본의 세계화 전략에 부합하는 제7차 교육과정이 수립된 이후, 학생들은 세계의 언어와 전쟁하는 병사로, 자본의 경쟁력이라는 ‘교육의 꽃’을 일구는 예비 노동자로 동원되었다. 이전 정권들도 마찬가지였다. 학생과 학부모들은 최소한 배를 곯지 않으면서 살수 있다는 교육정책의 메시지 앞에 경쟁과 살육의 전쟁터에 나가야만 한다. 그 터는 바로 일제고사 시험장이거나 수능 시험장이다. 이제는 오로지 시험 결과로 개인과 학교를 등급화하거나 서열화하는 교육정책이 전면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특히 서울 지역의 경우, 학생과 학부모들은 보다 높은 서열과 등급의 학교까지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학교선택제도’ 앞에서 등급화와 서열화의 모든 책임을 스스로 떠안아야만 하는 상황이다. 이 양치기 소년들의 ‘책임을 떠넘기는 능력’이 참으로 대단하다.
자본주의 체제는 학력을 추구해야 할 교육의 본질적 기능을 실용주의적인 돈의 욕망으로 변질시켰다. 학력이란 사물과 상황을 보다 과학적으로 인지하고 분석할 수 있는 힘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데올로기적으로 포섭하는 자본주의 교육정책의 능력 때문에 학력을 시험능력으로 오해한다. 그 중심에 양치기 소년들이 있다.
그래서 국가 아니 지구의 천년지대계를 위해서라도 후세대들의 학력을 키울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우선 지식의 전달만을 위해 존재하는 현행 교과목의 형식과 내용을 폐지해 새롭게 재구성해야 한다. 교육방식도 물론 학력을 키우기 위한 차원으로 개선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일제고사만 보지 않는다고 해서 학생들의 학력이 강화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종합대학교뿐만 아니라 종합적인 전문대학을 해체하는 방안이다. 대학교육기관은 전국에 하나면 족하다. 그 기관은 전문적인 영역별 단과대학체제로 전국에 배치되어 운영되고, 학생과 학부모들은 자신의 적성과 관심에 맞는 단과대학에 무시험으로 입학하는 것이다. 대학에 입학한 학생은 자신의 관심과 적성을 극대화하는 차원에서 공부하면 된다. 교육은 자본의 돈벌이에 부적합한 사람들을 만들거나 은연중에 평등의식을 강화·조장시킨다는 자본의 두려움과 그 동안 학교를 매개로 돈벌이가 취약해졌다는 사립학교 재단의 탐욕을 넘어서서, 진정한 삶의 행복을 일상생활에서 추구할 수 있는 사람들이 넘쳐 흘러나는 세상을 만드는 수단으로 존재해야 한다.

김영수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북한의 신종플루 문제와 용산참사 해법은 다르지 않다

결국 예상했던 대로 북한도 신종플루를 피해갈 수 없게 되었다. 예전부터 북한에서는 의약품과 의료시설 등이 부족하고, 위생상태도 엉망이라서 수인성 전염병이 자주 발생했기 때문에 신종플루가 한바탕 기승을 부릴 것이라고 생각 했었다.
그런데 지난 12월 9일 북한이 신종플루 환자 발생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하였다. 지난 여름 이후 북한에서 신종플루가 빠르게 전염되고 있다고 알려졌지만, 공식 확인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북한의 이날 신종플루 환자발생 보도는 전날인 12월 8일 이명박이 국무회의에서 북에 신종플루 치료제인 타미플루 등 지원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한 직후 나온 것이어서 주목된다.

소문보다 심각해 보이는 실제 상황
현재 북한의 신종플루 환자 실태에 대해서 제대로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한 9명의 확진환자, 세계보건기구(WHO) 평양사무소에서의 확진환자만 있고 사망자가 없다는 언급 등이 공개적으로 알려진 상황이며, 반면 대북인권단체인 ‘좋은벗들’이 북한의 내부소식통을 인용해 12월 7일 현재 신의주지역과 평안남도 평성 등에서 4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전했다.
이러한 정황을 종합하면 북한에서 신종플루 환자가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으며 사망한 사람들은 발표된 숫자보다 2배 이상 더 많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신종플루로 인하여 각급학교들이 한 달 앞당겨 겨울방학에 들어간 것은 확실하다. 실제 보건성과 교육성에서는 신의주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매일 독감 환자가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는 1호 보고에 따라, 지난 12월 4일 전국 학교에 방학령을 내린 바 있다.

용산참사는 어디에 가고 신종플루만 남았는가
문제는 북한의 병원에서는 새로운 치료제가 없기 때문에 급한 대로 중국산 레보사신이라는 항생제를 처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약이 치료에 효과가 있다는 소문이 나서 너도나도 이 약을 찾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신의주에서는 이미 동이 난 상태며, 빈민층에서는 당장 약이 없어 큰 야단이란다. 세계보건기구가 지난 5월에 타미플루를 북한에 제공했음에도 약이 없다는 것은, 환자가 많아서 주민들에게까지는 타미플루가 전달되지 않거나 아니면 평양을 중심으로 고위급들이 독점했기 때문이다.

북한이 이렇게 신종플루 발생 사실을 발 빠르게 확인한 것은 상황이 매우 다급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적 의료 인프라가 극도로 열악한 북한으로서는 대외적 위신만 신경쓰며 방치하다가는 자칫 손쓰기 어려운 곤경에 처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작동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런 위험을 자초하느니 남한과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아서라도 일단 ‘급한 불’부터 끄자는 현실적 판단을 했을 공산이 크다.

다행스럽게도 남한에서는 18일 개성에서 타미플루 등 신종플루 치료제 50만 명분을 제공할 예정이란다. 예전 같으면 복잡한 행정절차로 인해 최소 몇 주에서 몇 달 걸리는데, 이번에는 절차를 간소화해서 북한 주민들의 생명을 소중하게 하는 기이한(?) 현상을 보여주었다.
용산 참사는 벌써 1년이 다되도록 어떠한 반응과 관심이 없고 오히려 탄압으로 일관하면서, 남한 노동자 민중들의 인권을 무참히 짓밟으면서까지 이렇게 발 빠르게 움직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 최근에 북미관계가 탄력을 받으면서 새롭게 전개되는 동북아 정세에 소외를 당하지 않으려는 자구책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이명박 정권의 대북정책과 한미관계가 시종일관 경직성을 보이고 있으며, 일종의 알박기(?)로 인해 오히려 변화하는 동북아 정세에서 소외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현 정권이 인도적인 차원의 접근이라고 반박할 수도 있겠지만 지난 2년 동안의 반민중적·반인간적 탄압의 일관성에 비춰보면 어불성설이다. 용산참사야 말로 현 정권이 만든 신종플루의 최대 희생이다. 이 신종플루가 기승을 부리면서 한국 사회 여기저기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사회적·인간적인 타미플루를 개발해서 공급해 줘야 한다. 결국 용산참사와 북한주민의 신종플루 해법은 전혀 다르지 않은 것이다.
 

배성인(한신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노동자들이 투쟁하지 않아도 될 만큼 좋은 시절이 있었던가요?

[노동운동 혁신하자!]

노동운동을 십 수 년 한 노동자들이면 요즘처럼 답답한 상황을 보면 96-97총파업을 한 번 쯤 떠올리곤 할 것이다. 당시 노동자총파업은 노동법을 개악하려는 자본세력의 야욕을 거꾸러트렸다. 물론 더 잘 투쟁했으면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복수노조, 전임자임금 문제도 해결했을 뿐 아니라 노동운동도 좀 더 높은 위상을 가지고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었으리라는 아쉬움도 있지만 제법 훌륭한 투쟁으로 기억된다.

그 투쟁 이후 10년하고도 두해를 더 보내고 있는 지금까지 민주노총은 한 번도 제대로 된 총파업을 조직해보지 못했다. 조합원은 두 배 가까이 늘었고 자본에 효과적으로 대응 하기위해 산별로의 조직전환도 거의 완료했는데 말이다. 오래된 기억도 아니건만 이번에도 민주노총은 복수노조·전임자임금 문제에서 과거의 실패한 방식을 똑같이 반복하고 있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말이다.
사실 노동운동이 소홀히 했던 촛불투쟁이나 용산투쟁이 사실은 이명박 정권의 노동운동에 대한 공세를 지체시키는 방파제였다. 하지만 그 방파제 역시 전체노동자민중 운동의 힘이 결집되지 못함으로 조금씩 무너지고 있고 특히 노동운동에 대한 이명박정권의 태도는 노동조합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그저 지금 투쟁을 이어나가는 것으로는 막아내기 어렵다. 그런데 그 둑이 무너지고 알몸으로 저들과 마주하고 있는 민주노총의 대응은 정세에 비해 긴장감이 작아 보인다.
총파업을 준비하는데 총연맹의 의지와 결의를 각 산별조직이 적당히 잘라 먹고 또 아래로 내려가며 조직 상태나 집행부의 의지에 맡겨 둠으로써 총파업을 선언하고도 대공장 몇 개가 파업에 들어가느냐 마느냐로 성패를 가름하는 것이 지금까지 총파업이었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지 않는 한 민주노총 총파업 선언은 정권과 자본에게 위협이 되지 못한다.
복수노조·전임자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거듭되고 한국노총이 굴복하자 한국노총 홈페이지는 분노한 조합원들의 글로 북새통을 이룬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 역시 민주노총을 믿지는 않는다. 오히려 한국노총 뒤에 숨어 있다가 뒷북만 친다는 냉정한 평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할 뿐이다.
민주노총이 제대로 된 투쟁전선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각 산업별로 흩어져있는 전선을 단일화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공무원노조, 전교조, 공공부문, 구조조정 등의 문제들을 각 조직의 수준에서 대응할 것이 아니라 정권과 자본에 맞선 총노동의 투쟁으로 전국적 전선을 형성해야 한다.

이번 투쟁에서는 조직의 상태를 핑계로 투쟁에 나서지 않으려는 연맹지도부와 일신의 안위나 챙기고 있는 상층관료들을 조합원들에게 공개해서 물러나게 해보자. 또한 조합원들의 개인주의화 보수화를 탓할 것이 아니라 간부부터 앞장 서 의지를 모아나간다면, 전국 곳곳에서 이명박정권의 ‘노조 없애기’에 맞선 노동자투쟁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만들어나간다면 명실상부한 총파업은 만들어 갈 수 있다.
이번 투쟁을 통해서 그동안 저들에게 빼앗겼던 노동자 권리를 찾아오고, 더 이상 노동자를 배신하는 권력이 발붙일 수 없도록 노동정치를 강화해 나가기를 희망한다.
 

이경수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논평] 한국노총의 반노동자성과 민주노총의 갈 길

지난 4일 한국노총과 경총, 그리고 노동부는 복수노조 2년 6개월 유예, 노조 전임자 임금 금지를 원칙으로 한 타임오프제를 2010년 7월부터 시행키로 합의했다. 예상대로 한국노총 지도부는 한국노총 소속 간부들의 ‘밀실 합의’이라는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동조합의 자주성과 ‘단결의 자유’ 권리를 자본과 정권에 바쳤다. 동시에 이명박 정권의 ‘민주노조 말살 책동’에 동참함으로서 어용노조로서의 본질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따라서 90%에 달하는 노동계급의 단결권을 송두리째 저버리고 소속 조합원들의 이해와 요구조차 헌신짝처럼 내팽겨 쳐버린 한국노총 지도부는 더 이상 노동조합의 명찰을 달 이유가 없다.
헌법과 노동법에 보장된 노동 3권은 노사정 간의 흥정의 대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권은 부르주아 법이 갖는 최소한의 원칙도 무너뜨리고 있다. 이 역대 정권에서도 정치 권력자들은 노동자의 자주적 단결권을 부정하면서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을 억압해왔던가. 지금도 노동조합을 결성했다는 이유로 해고된 숱한 노동자들이 있다. 이명박 정권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사실상 노동조합을 부정하는 정권의 태도는 이미 철도 파업 파괴와 공무원노동조합 탄압에서 드러났다. 이제는 전임자 급여 보장을 문제 삼아 법으로 이를 금지하면서 노동조합 활동을 무력화시키겠다는 것이다.
말이 필요 없다. 민주노총은 전체 노동계급의 단결권 쟁취를 위해, 민주노조 사수를 위해 전면투쟁에 나서야 한다. 사실 노사정 야합논의가 진행되는 지난 며칠 동안 민주노총의 대응은 사실상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주노총 행보에 노동자들은 민주노총의 투쟁의지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이제 민주노총을 비롯한 산별노조 및 단위노조들은 MB정권의 ‘민주노조 죽이기’ 공세를 정면으로 돌파하기 위한 투쟁을 시작해야 한다. 이 투쟁을 앞두고 단위 사업장의 유 불리를 계산하고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민주노조가 될 수 없다. 현실 동력을 앞세워 투쟁을 회피하고서는 더 이상 민주노조를 지켜낼 수도 없다. 물러설 곳이 없는 상황에서 앞으로 나가는 것. 이것이 지금 민주노총이 선택할 길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故김동암동지를 위하여

동지를 보내고 온 날, 계단을 오르려다가 발을 허공에 딛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동지의 영원한 부재 앞에서 저는 그만 길을 잃은 아이처럼 서성였습니다. 그런데, 가족들은 오죽할까요?
이 세상 어떤 죽음이 예고되고 준비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원망이 남습니다. 한이 남아요. 중환자실에서 사투를 벌이는 힘겨운 모습을 보고서도, 의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할 때도 이렇게 속절없이 가실 줄 몰랐습니다. 혹독한 대의와 책임으로 단련된 동지가 아닙니까?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부대끼며 뜨겁게 살던 동지가 아닙니까?
저 세상으로 보낸 동지의 옷은, 결혼식 때 산 양복이라고 하더군요. 15년이 넘은 옷을 여태까지 입고, 아꼈다고요. 김동암동지? 우리에게 ‘운동’은 무엇입니까? 이 땅에 ‘좌파로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정부와 자본가도 꺽을 수 없었던 것을, 제 몸이 녹아내리는 것도 모르고, 끝내 버리지 못한 헌 양복 걸치고, 그 비를 다 맞는 것입니까?
빛깔 좋은 변명하나 준비하지 못하고 도망치는 법도 알지 못하고 끝내 쿨하지도 못하고 수줍고 낯 많이 가리는 사람, ‘시골에서 살고 싶다’면서 고지식하게 꿈꾸는 게 전부였던 이 모자라고 불쌍한 내 동지, 내 선배, 내 가족 동암이형?
 2009년 올해는 연이어 거물들이 죽어갔습니다. 그들의 죽음에 대한민국이 요동쳤습니다. 그러나 민주노조를 건설했던 영광은 어디로 갔는지동지를 돌봐 주지 않고, 버리고 떠나갔습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맹세처럼, 황량한 벌판에 바람만 흩날립니다.
그래요, 어쩌면 이것은 우리가 원한 종착역의 풍경일지도 모릅니다. 특별할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그 뜻과 가치 마지막까지 노동자민중의 품으로 세상의 온기로 스며들기를 바랬지요.산화하는 삶으로, 소외되고 고통받는 세상의 눈물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토록 아픈가 봅니다. 정작 제 눈물 닦아줄 손수건 한 장 마련하지 못하고 부여잡으려 발버둥을 쳐도 의지가지없는 생을 살아가니 말입니다. 그것이 죽음으로서 살고자 했던 자들의 선택이고 숙명이 아니겠습니까?
동지가 가면서 무엇 때문에 눈감지 못하고 통곡했을지 압니다. 부질없는 약속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만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가족으로 옆에 살겠습니다. 제 스승이며, 뜻을 나눈 동지이며, 평생의 벗인 언니와 아이들의 이모로서 그렇게. 그날도 보셨지요? 저를 위로하는 언니를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아무 걱정 마시고 가던 길 편히 가십시오.
이제 이 까마득한 후배에 기대도 좋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쉬셔도 좋습니다. 나눌 영광따위야 없는 것이 우리네들이지만, 험난한 여정 함께 한 우리 동지들이 동지의 가는 길을 밝혀 드리겠습니다. 한 생이 다하도록 시대를 밝히려고 전념했던, 김동암동지에게 세월에 꺾이지 않을 동지애를 바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09년 12월 3일 박준영 올림

 

지난 11월 7일 김동암 동지가 갑작스럽게 우리 곁을 떠났다는 비보를 접했습니다. 고 김동암 동지는 유성기업노동조합에서 활동하며, 그 누구보다 민주노조운동과 노동해방 세상을 만들어가는 데 헌신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동지는 떠났지만 그 치열했던 삶과 정신은 언제나 민주노조운동 속에 사회주의운동 속에 언제나 함께 할 것입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