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ide Out 2012

from 영화+독립영화 2012/07/19 0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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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ide Out 2010]

[Review-Edie and Thea]

[Inside Out 2011]

 

 

홈페이지: http://www.insideout.ca/torontofestival

 

5월 17일부터 27일까지 열렸다. 올해는 영화를 한 편도 못봤고 자원활동만 이틀 하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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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새 시장이 당선된 뒤로 문화예술 관련 예산과 지원이 계속 줄어들고 있다. 토론토에서 열리는 모든 영화제의 정부 지원금이 줄었고 이에 관해 거리시위도 하고 연대서명도 했지만 전망이 밝지 않다. 이 영화제도 상황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자원활동을 지원, 등록, 배치하는 과정은 간단하다. Police Reference Check, 이런 거 안한다. 위급할 때 연락가능한 지인, 혹은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지인 두 사람의 연락처를 적어 낸다. 온라인으로 신청해서 이메일로 연락하다가 딱 하루, 한 시간 정도 오리엔테이션을 받으면 참여할 수 있다.

 

하루에 적어도 4시간 30분 이상 일하는 조건. 물과 간단한 간식, 일하고 나서 영화 한 편을 볼 수 있는 바우처 제공. 방친구, 교회친구, 나 셋이서 같이 신청해서 같은 날 일했고 내 바우처는 다른 분에게 드렸다. 상영시간표와 내 시간표가 맞지 않아서 그랬는데, 매표소에서 바우처를 내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저 정말 자원활동했니?'하고 물어보지는 않는다.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혹은 전공분야에서 요구하는 자원활동 시간을 채우기 위해 온 학생들, LGBTQ 커뮤니티 안에서 반드시 자원활동을 해야하는 이유를 가진 분들, 그리고 이 영화제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는 분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어서 분위기가 썩 화기애애하거나 적극적이지는 않다. 늦게 와서 대충 시간만 때우다가 가는 이들도 여럿 보였다.

 

아직 영어가 서툰 이민자들이나 아시안에 대한 몇 가지 편견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극히 주관적인 생각이므로 자세히 적지 않는다. 혹시 궁금하시면 이메일 보내주세요.

 

내년에는 자원활동을 하더라도 조금 더 따뜻한 분위기에서, 그리고 영화도 보고 후원금도 낼 수 있는 형편이 되면 더 좋겠다는 바람.

 

 

 

 

 

2012/07/19 03:50 2012/07/19 03:50

Pride 2012

from 토론토 2012/07/17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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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de 2011]

[Pride 2010-1]

[Pride 2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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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oto by Naru

 

행진으로 시작한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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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oto by The 519 centre

 

작년과 마찬가지로 Green Space on Church 에서 금요일과 토요일 이틀 연속으로 일하고

일요일은 깃발을 들고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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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oto by Naru

 

출발하기 전에 만난 분

올해도  팥죽 땀을 흘리며 걷느라 사진은 거의 못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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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oto by Taras

 

일년 반 동안 한달에 한번 만나던 Refugee 모임 친구들, 올해는 각자 국기를 들고 참여했다. 낯이 익을만 하면 이사하거나 연락이 끊어지고 올 봄부터는 모임에 나가지 못해서 낯선 얼굴이 더 많았다. 출발할 때는 긴장한 탓인지 대부분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다. 마칠 즈음에 돌아보니 눈물이 번진 얼굴로 다들 웃고 있었다.

 

내년에 또 만나자, 더 씩씩하게.

 

 

2012/07/17 07:43 2012/07/17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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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희 감독 인터뷰, 미디어 오늘, 2011

 

 

[영화인캠페인 7월의 정기상영회]

 

"영화/희망/나눔" 영화인캠페인 7월 문화나눔회 시사회 

 

2012년 7월 영화인캠페인 정기상영회는

고등어판 ‘쇼생크 탈출’, 애니메이션 <파닥파닥>의  문화나눔 시사회로 진행됩니다!

애니메이션 <파닥파닥>> >은

제13회 전주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한국 작품으로는 유일하게 공식 초청받아

‘CGV 무비꼴라쥬상’ 수상 및 2012년 영화진흥위원회의 애니메이션 개봉 지원작으로 선정된

올여름 ‘주목할 만한’ 애니메이션 작품입니다.

 

영화인캠페인의  7월 문화나눔 시사회를 통해서 

2011년 220만 관객을 동원한 <마당을 나온 암탉>으로 시작,

11년의 제작기간을 거쳐 탄생한 <소중한 날의 꿈>,

제 65회 칸 국제영화제 감독주간에 공식 초청된 <돼지의 왕>으로 이어진

한국 장편애니메이션의 도약이 계속 될지 직접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7월 문화나눔 시사회 개요>

○ 주 최 : 영화인 캠페인(아름다운재단, 여성영화인모임, 영화인회의, 영화제작가협회,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한국독립영화협회, 씨네21)

■ 일 시 : 2012년 7월 17일 화요일, 오후 7시 30분
■ 장 소 : 시네마테크 전용관 서울아트시네마(종로2가 낙원악기상가 4층)
■ 상영작 : 애니메이션 <파닥파닥>

               (연출 이대희/목소리 출연: 김현지, 안영미, 현경수, 이호산, 시영준/78분)

 

○ 문의처 : (사)여성영화인모임 사무국 02-723-1087

 

※ 영화인캠페인 정기상영회는 1천원 이상의 기부입장으로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 기부금은 아름다운 재단을 통해 청소년 문화체험을 위한 활동에 사용될 예정입니다. 

 

※ 영화상영 후에는 관객과의 대화 시간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 영화정보 

   

 

 

시놉시스


2012년 7월, 고등어의 횟집 탈출이 시작된다!

 

자유롭게 바다 속을 가르던 바다 출신 고등어 '파닥파닥'.
어느 날, 그물에 잡혀 횟집 수족관에 들어가게 된다.
죽음이 예정된 극곳에서 가장 오래 사아 남은 '올드 넙치'.
그는 자신만의 생존비법(?)으로 양어장 출신의 다른 물고기들의 신망을 받는 권력자다.

바다로 돌아갈 꿈을 버리지 않고 탈출을 시도하는 '파닥파닥'으로 인해
수족관의 평화(?)는 깨지고, '올드 넙치'와의 갈등은 시간이 갈수록 커져만 가는데...

 

바다를 향한 고등어 '파닥파닥'의 꿈은

과연 이루어 질 수 있을까?

 

■ 신청

 

참석을 원하시는 분은 아래의 내용 작성하셔서 답메일 주시기 바랍니다!


----------------------------------------------------------------------------------------

<영화인캠페인 7월 문화나눔 시사회 <파닥파닥> 신청>

 

■ 이     름  :

■ 연 락 처  :

■ 소     속  :

■ 신청매수 : 본인포함 (       ) 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영화인들의 나눔이, 풍성한 소통이 되어, 아름다운 영화로 찾아갑니다”

아름다운재단, 씨네21, 여성영화인모임, 영화인회의, 영화제작가협회,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한국독립영화협회는

함께 ‘영화·희망·나눔 영화인캠페인’을 펼치고 있습니다.

 

2012/07/11 02:08 2012/07/11 02:08

오늘 졸업합니다

from 토론토 2012/06/14 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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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참석하게 되면 동생 식구들에게 주려고 초대장을 몇 장 미리 예약해뒀는데

결국 안가기로 했다

 

거기 서서 사진이라도 한 장 찍을라치면, 정말 울지도 몰라.

다 잊어버렸는데도 몇 가지, 여전히 가슴 한복판을 콕콕 찌르는 장면들이 있다

이 학교에 다니는 동안, 그래도 나를 아프게 한 사람보다 도움을 준 분들이 더 많았다

 

이토록 느리게 자라는

도대체 언제 사람이 될 지 알 수 없는 이런 나를

지금까지 잘 키워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블로그에 가끔 방문하시는 당신께도 인사 전합니다

오늘 졸업해요

 

 

 

2012/06/14 01:32 2012/06/14 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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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에 관한 다큐멘터리, '자이제댄스타임'이 더 많은 분들의 후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홈페이지: http://letsdance2012.tistory.com/

아래는 제작 블로그에서 (허락받지 않고) 가져온 글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후원요청의 변
손 내밀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거 참, 이런 시국에 후원이라니...아직은 밥 먹고 예술하려니, 뜻이 있는 분들의 도움이 필요하군요.

저희는 지금 '자,이제 댄스타임'이라는 극영화+다큐 형식의 장편 영화를 촬영하고 있습니다. 서로 품앗이 하는 제작시스템을 만들어보자며 '버라이어티 생존 토크쇼'의 조세영 감독이 연출, '모래' 연출한 가람이 구성과 극파트 제작피디, 그리고 '그 자식이 대통령 되던 날'을 연출한 손경화가 촬영과 피디로 공동제작중인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낙태'를 주제로 한 작품입니다. 많은 여성들이 경험했고 지금도 경험하고 있지만, 아무도 이야기하기 원하지 않는 주제이지요. 그래서 더 늦기 전에 반드시 이야기되어야 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다큐멘터리로 시작을 했지만, 얼굴을 드러내고 이야기하는 것의 한계 때문에 극영화를 넣기로 했고, 3월 23일부터 4월 5일 사이에 7회차 극 촬영에 들어갑니다. 네! 극영화 제작비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빌릴 수 있는데까지 빌리고는 있는데, 20여명에 이르는 스탭들 인건비도 제대로 못주고 있습니다. 계약서가 민망해하는 소정의 금액이랄까요.

밥이라도 제대로 먹으면서 촬영하기 위해서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이제 줄일 수 있는 예산은 식비뿐이라...그것마저 줄일 수는 없어 급하게 페북을 찾았습니다. 삼각김밥 먹고 예술하자고 말해야하는 민망함을 좀 덜 수 있길 바라며, 아니 열심히 참여해주시는 스탭분들에게 맛있는 밥이라도 대접할 수 있길 바라며...자꾸 늘어나는 제작비 때문에 얼굴이 어두워져가는 가람의 얼굴이 밝아지기도 기대하며!

이 영화가 잘 만들어지길 바라는 개인, 단체들의 후원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마음 약한 지인들의 후원도 기다립니다. 미리 감사하고 죄송합니다.

후원방법
1. '자이제댄스타임' 극영화 촬영 현장의 밥값을 후원을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목표금액은 극영화 촬영스탭 약20명*3끼*6일*5,000원=1,800,000원입니다.

2. 후원금액은 1인 1끼 밥값인 5천원이상이면 무조건 오케이!

3. 계좌 1002-739-955520 (우리은행, 예금주 손경화)로 송금

4. 송금 후 페북 댓글로 이름, 연락처, 메일주소를 보내주시면 됩니다. 아니면 메일 suzubgirl@gmail.com 으로.

5. 4월 5일 극영화 촬영이 끝나는 날 후원을 마감하겠습니다.


후원해주시는 분들!
0. 영화제작과 밥후원의 취지에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후원금은 오로지 밥값으로 사용하겠습니다. 목표금액을 넘어서면 더 맛있는 밥을 먹는데 사용하겠습니다. 후원금 사용내용은 페북과 메일을 통해 공유하겠습니다.

1. 5천원이상-3만원미만의 금액을 후원해주신 분들께 엔딩크레딧에 [밥 후원]으로 이름을 넣어드리겠습니다.

2. 3만원이상-10만원미만의 금액을 후원해주시는 분들께 엔딩크레딧 [밥 후원]으로 이름 기재 + 시사회 초대를 하겠습니다.

3. 10만원 이상의 금액을 후원해주시는 분들께 위의 내용과 함께, 1회 무료 공동체 상영권을 드리겠습니다.

 

 

 

2012/05/11 00:42 2012/05/11 00:42

[Screening] Red Maria

from 분류없음 2012/03/22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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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22 09:48 2012/03/22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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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ank you for sharing.
I'm afraid I can't attend your screening, though I'm so excited after checking this email.
Have a great time with other supporters.
 
--------------------------------------------
 
 
안녕하세요. 겨울입니다. 이런 날 뜨거운 커피 한잔 그리워집니다.
그리고 이소선 어머니가 그립습니다.
아들 전태일 열사와 오소도손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시겠죠.
 
저는 <어머니> 프로듀서 김화범입니다.  
 
이제 다큐멘터리 <어머니>는 무려 3년이라는 제작기간을 꼬박 채우고 최종 마무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믹싱과 D.I 작업만 마무리 되면 본격적으로 작품 상영회와 극장 개봉 준비 등을 시작할 계획입니다.
그 첫 번째 시작으로 그동안 우리 작품을 응원해주신 후원제작자을 모시고, 마음 떨리는 상영회를 시작합니다.
 
<어머니> 후원제작자와 함께 하는  첫 시사회 안내
 
다큐멘터리 <어머니>를 지지해주시고, 후원해주신 후원제작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큰 절~~!!)
<어머니> 작업이 막바지에 접어 들었습니다. 후반 작업 일부와 최종 마스터링만 진행하면,
3년 간의 작업이 드디어 마무리 됩니다. 늘 제작비가 부족해, 전전 긍긍하던 제작팀에게
여러분들의 후원은 한 줄기 단비 같았습니다.
 여러분들의 성원이 있었기에, 우리는 고비 때 마다 외롭지 않았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에게 제작팀의 작업을 공개적으로 보여드리고자, (두근 두근)
아래의 일정으로 상영회를 개최합니다.
서울(서울 상암동)이고 연말이라, 많이 바쁘시겠지만 함께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번 제작팀을 대신해서, 제가 큰 절 다시 한번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상영회에 꼭 참가해주세요!  

일시 : 12월 16일 (금) 7시 (*영화 상영 시작 7시 30분)
장소 : 서울시 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 2관 (140석)

 
메일만 알려주시고, 전화번호를 알려주지 않으신
후원제작자 분들은 메일 받으시고, 연락처를 메일로 보내주심 좋겠습니다.
 
후원제작자 한분 + 동반 1인까지 (총 2석) 가능합니다.
다음 주 월요일, 화요일 사이에 다시 참석 유무 확인 전화드리겠습니다.
지금 이 메일을 확인하시고 참석이 가능하신 분들은 답장해주시면 제작팀 일이 한결 가벼워질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꼭 참석 부탁드립니다.
 
어머니 제작 블로그 http://sosun.tistory.com/
어머니 극장개봉 지원 프로젝트 https://www.tumblbug.com/sosun_project
 
 

 

 

2011/12/08 21:07 2011/12/08 21:07

Unfinished Spaces

from 영화+독립영화 2011/08/11 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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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페이지: http://www.unfinishedspaces.com/

 

 

 

그것은, 말하자면 혁명이라든가 투쟁이라든가 저항이라든가 하는 말은, 이미 낡아버렸나. 그래서 함부로 조롱해도 괜찮은가. 가끔, 가깝다고 생각했던, 그나마 말이 좀 통한다고 생각했던 이들로부터 소외감을 느낄 때가 있다.

 

 

지인으로부터 받은 어느 책에는, '혁명하자고 하면 할거예요? 하지도 않을거면서'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당신이 지금 내게 묻는다면, 나는 '그래 하자, 그런데 어떤 혁명?'이라고 말하겠다, 친구야. 하자고 하면 할 사람, 여기 하나 있다.

 

여 성과 어린이와 노동자를 위한 예술학교를 만들자, 는 것은 오래전 친구들과 가끔 하던 이야기였다. 2004년, 내 힘에 부치는 작업을 간신히 마치고 상영을 하게 되자, 그 꿈에 한 발 다가가는건가, 생각했다. 2010년, 하던 일을 모두 정리하고 다시 대학생이 되는 바람에 그 꿈은 다시 저만큼 멀어진다.

 

이 영화는 어떻게 시작할까. 결국 무슨 이야기를 할까.

굳세게 자신을 믿고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갔던 이들이 같이 이루고 싶었지만 아직 이루지 못한 어떤 꿈에 대해 뭐라고 말할까.

궁금하다.

 

 

2011/08/11 05:23 2011/08/11 05:23

Pride 2011

from 토론토 2011/07/08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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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글 

Pride in Toronto 2010-1

Pride in Toronto 2010-2

 

 

2009년까지는 사진을 찍으러 간 사람처럼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다

행렬을 뒤따른 적도 있지만 구경꾼에 불과했다

작년에는 가까이 다가가서 보고

행진에 참여한 이들 바로 옆에 종일 서 있었지만

역시 사진을 찍으러 온 사람처럼 움직였다.

올해는 두 달 전부터 준비해서 이틀 동안 자원활동을 했고

거리예배에 참여했고 행진도 함께 했다.

그래서 사진은 거의 찍지 못했지만 참 좋았다

 

혹시 행진이 보고 싶다면 아래 링크한 곳으로.

 

The Globe and Mail

 

blogTO

 

 

 

2011/07/08 08:07 2011/07/08 08:07

Inside Out 2011

from 영화+독립영화 2011/06/15 0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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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페이지     http://www.insideout.ca/21/

Screening  http://www.insideout.ca/21/schedule/index.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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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한 분이 자원활동가 티셔츠를 입고 극장 안으로 입장하는 관객들을 안내하고 있었다. 반가웠다.

당신 덕분에 이 영화제도, 당신이 지금처럼 친절하게 안내했던 사회학 수업도 조금 더 좋아질 거 같네요.

작년에 이어 두번째 방문한, 인사이드 아웃 영화제, 5월 19일에서 29일.

 

 

 

날짜 상관없이 기억나는 대로 대충 나열한, 상영작 초간단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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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phne

표절공방과 연애담 사이로 의미를 잃은 결혼생활에 지칠대로 지친 한 작가의 내면이 얼핏 다가오기도 하고, 2차 대전 이후 유럽과 미국의 출판계와 연극계를 살짝 엿볼 수 있겠으나 . 대저택과 이제 막 전쟁터에서 돌아와 슬픈 표정을 한 채 묘한 태도를 보이는 남편과 지나치게 천진난만해서 어쩐지 현실감이 조금 부족해보이는 아이들로 인해 폭넓은 공감을 얻기는 좀 어려운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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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vening Dress

선생님이 좋다, 선생님이 정말 좋다, 그래서 그만 미워졌다, 그녀가 지나치게 예뻐하는 내 친구도 그녀도... 이런 복잡한 마음을 담은 제 심장소리를 누군가에게 들킬까봐 무섭고, 툭하면 바닥에 굴러떨어졌다가 펑 터져버릴 것만 같은 심장을 어째야 할 지 몰라, 혼자 방에 숨어 스스로 뺨을 때리기도 하는 그런 아이, 그런 나이의 애틋한 마음을 제대로 잘 그렸다. 거짓말만 하는 것처럼 보였던 선생님도, 먹고 사는 일에 치여 다정한 대화따위 할 겨를도 없다는 듯  아이들 앞에서 화만 내는 엄마도, 언젠가는 그런 아이였을텐데 말이다.

 

 

Animate Pro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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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ulia

     YouTube ; http://www.youtube.com/watch?v=fu5m1fY4cg8

같이 상영한 11편의 단편 애니메이션들 중에서 관객들 호응이 가장 컸던 작품.

객석에서 여자들은 모두 박수를 치거나 깔깔대고 남자들은 침묵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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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Montreal Girl

다큐멘터리처럼 찍은 극영화, 혹은 극영화를 가장한 실화.

감독의 사연과 배우의 소품, 그리고 몇 가지 그럴듯한 에피소드를 버무려, 25년간 살아온 아파트를 떠나야하는 주인공과 주변인물들의 이야기를 맛깔나게 보여준다. 극 중에서 한 친구가 주인공에게 느닷없이 던진 한 마디는 내 가슴에도 잠시 무겁게 머물다 갔다. '넌 변두리로 좀 나가서 살아봐도 돼. 다운타운에서 살만큼 살아봤잖아. 우리가 힘들게 노동하는 동안, 너는 감독이랍시고 느긋하게 특권을 누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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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dvocate for Fagdom

존 카메론 미첼보다 훨씬 먼저 이 세계에 이름을 알렸고 훨씬 더 매력적이었으며 훨씬 더 도발적인 작업을 했다고 평가받는 한 캐나다 퀴어영화 감독의 다큐멘터리.  구스 반 산트 감독이 인터뷰이 중 한 사람으로 등장해 친구이자 동료로 오랫동안 바라본 주인공에 대해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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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ecret Diaries of Miss Anne Lister

친구와 연인의 경계는 자주 명확하지 않다. 다만, 누군가 그쪽에서 이쪽으로 넘어오려 할 때, 도저히 그걸 받아들일 수 없는 순간이 가끔 있다는 것만은 명확하다. 신분질서가 엄격하고, 이웃과 친인척이란 그 마을 주민들의 사생활을 감시하거나 통제하는 존재로 여겨지며,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 부모의 집과 재산을 물려받아 관리할 수 있다는 걸 납득하지 못하던 시대에도, '내가 비록 남자랑 결혼을 할 수 밖에 없지만, 너도 잘 알잖아, 네가 이 세상에 하나뿐인 내 배우자라는 거...'라는 고백을 받는 여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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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ight Watch

가장 가까왔던 두 사람 사이의 비극은 대부분 질투에서 온다. 독점욕보다 질투가 더 크다. 날마다 폭격으로 허물어지는 건물과 건물 사이를 헤치고 사람을 구하다가 사랑을 만나지만... 이미 정리한 지 오래라고 여겼던 예전 관계가 상대방에게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알았을 때, 당신이 이미 잃은 건 뭔가. 곧 끝날 것처럼 파국으로 치닫다가 조금 더 과거로, 다시 조금 더 그 이전으로 되밟아가는 구성이 긴장감을 더하는 영화.

사라 워터즈(스?) 의 소설이 원작.

 

 

 

 

 

 

photo by na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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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vening Dress

마이크를 쥔 분이 감독. 옆에 있는 분은 프로그래머. 감독이 썼던 원안에는  남학생 캐릭터가 없었는데, 시나리오 작가와 같이 작업하는 동안 좀 더 극적인 전개를 위해서 넣었다고. 주인공 선생님 엄마,  외로운 세 여자가  서로 어딘가 조금씩 어긋나 소통하기 어려운 상황이 세심하게 그려져 좋았다고 한 관객이 말하자 몹시 기뻐했다. 누군가 그걸 느껴주길 바랬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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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Montreal Girl

주인공 역할을 맡았던 배우(가운데) 가 관객의 불어질문을 영어로 통역하기도 하고, 적극적으로 질문을 유도하기도 하면서 정말 유쾌하게 관객과의 대화를 이끌었다. 감독(초록색 셔츠, 오른쪽) 의 실제 파트너가 주인공의 파트너로 데뷔한 사연을 들었다. 예전에 홈비디오로 찍었던 장면이며 그 분은 자기 얼굴이 이렇게 온세상에 공개되는 걸 전혀 원치 않았단다. 어떻게 설득했는지 모르겠지만 편집하기엔 너무 아까운 장면 중 하나. 원씬 원컷으로 담은 엔딩에 관해(이제 끝나겠지 하고 일어서던 사람들, 나가려던 사람들이 어정쩡하게 계속 지켜보다가 기다려도 기다려도 계속 엔딩 타이틀이 올라가는 걸 보면서 급기야 폭소가 터졌었다),  후원금을 조금씩 모아서 제작하다 보니 후원자 이름이 너무 많아서 엔딩이 그만 그렇게 되어버렸다고 죄송하다는데 그 말에  다시 폭소가 터졌다. 영화 속에서나 밖에서나 제작진과 관객들이 같이 농담을 즐길 수 있어서 좋았던 시간.

 

 

 

 

2011/06/15 05:38 2011/06/15 05:38

Hot Docs 2011

from 영화+독립영화 2011/05/03 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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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페이지  http://www.hotdocs.ca/

* Volunteers Trailer : http://www.youtube.com/watch?v=3yupHti_A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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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부터 영화제와 인연이 닿기 어려웠다. 올봄, 어쩌다 일터'에서 만난 윗사람이 자신의 그룹활동에 관해 다큐멘터리를 발표한 활동가였다. '영화를 제작하는 동안 당신은 카메라 뒤에서 당신의 주인공들에게 이런 저런 표정이나 대사를 주문한 적이 없나? 다큐멘터리는 가끔 저렴한 극영화가 될 위험에 놓이지 않던가? 당신에게 기꺼이 시간을 내주고 촬영을 허락한 사람들에게 당신은 뭘 줬나?' 일을 시작하기 전, 인터뷰하는 자리에서 오히려 내가 물었을 때 그 활동가는 '재미있는 질문'이라며 같이 일해보자고 했다. 매주 만나는 청소년들이 스스로 자신을 이야기하는 동영상을 만들도록 해보자던 약속도 있었다. 그 약속은 지키지 못한 채로 일을 마쳤다. 그이도 나도 처음에 정한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함께 일했지만 마주 앉아 커피 한 잔 같이 마실 시간조차 만들지 못했다. 그이에게 '대상화'에 대한 숙제만 남기고 헤어진 셈인가. 오랜만에 닿은 다큐멘터리적 인연을 살짝 비켜가면서 어느새 핫 독 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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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 편에 14불, 적어도 7편 이상 볼 계획이라면 패스를 사는 게 낫다.

오전 11시부터 저녁 6시까지는 학생과 노인에게 무료로 상영한다는데 작년에도 그랬나?

그랬더라도 그 시간에 시내 중심가로 영화를 보러 들어오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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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뿐만 아니라 이런 저런 토론회, 설명회, 특강 등을 들을 수 있는 패스.

40일전에 구입하면 50불 할인되고, 다큐멘터리 관련 조직에 소속되어 있으면 50불 더 할인된다.

그래도 만만치 않은 가격이다. 어찌 어찌해서 네트워킹 & 마켓 패스를 손에 넣었으니

여기서 만난 영화제 관계자들이나 다큐멘터리 아카이브에 한국 독립다큐작품들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3주전에 경순 감독에게 부탁했고 다른 분이 소포를 보냈다는데 아직 못받았다. 곧 도착하겠지.

 

 

 

How Are You?

http://www.hotdocs.ca//film/title/how_are_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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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영화는 한 예술가 커플이 베니스 비엔날레에 작품을 전시하기까지, 일상과 활동을 따라가면서 10대와 20대 시절 촬영한 비디오클립을 섞어 구성한 작품이다. 게이라는 정체성과 예술가라는 정체성이 만나 사람들 앞에서 좀 더 예리한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인 듯도 하고, 이런 다큐멘터리로 인해 게이 예술가에 대한 또 하나의 편견이 작동할 수도 있겠다. 나는 꽤 재미있었는데 같이 간 친구는 영 심드렁했다.

 

 

I AM JEJUS

http://www.hotdocs.ca/film/title/i_am_jes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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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여성감독이 세계 각국의 예수들을 만난 이야기.

브 라질, 러시아, 영국에서 '나는 예수다'라고 선언한 사람들이 무얼 먹고 누구와 어떻게 사는지 보여준다. 이들은 진심으로 자신이 부활한 예수라고 믿는다.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감독이 이야기하기로는,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후원자들 덕분에 굶지 않고 체면을 잘 유지하는 편이라고.  영국에서 마약을 하다가 어느날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한 남자, 허경영씨를 생각나게 하는 브라질의 예능체질 할아버지, 러시아의 외딴 마을에서 '여자는 남자를 돕기 위해서 신이 만들어낸 존재'라고 가르치고 '전쟁과 같은 부정적인 역사는 가르치지 않는' 제법 성스러워보이는 한 마을의 지도자에 이르기까지 흥미진진한 상황이 계속 이어진다. 기독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 안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는 여성혐오 혹은 철저하게 종속적인 존재로 '사용'하는 여성의 역할에 대해서도 생각할 기회...가 마련되면 좋겠는데 뒤로 갈수록 점점 더 싱거운 코미디가 되고 만다. 한국에서 이런 영화를 상영할 수 있을까. 상영하면 좋겠다. 친구들 반응이 궁금하다.

 

 

Hot Coffee

http://www.hotdocs.ca/film/title/hot_coffee

공식블로그: http://hotcoffeethemovi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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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 디어 미국에서 마이클 무어를 (긍정적인 면에서) 넘어설만한 신인이 나타났다. (다큐멘터리를 못보고 있는 2-3년 새 훌륭한 신인들이 많이 등장했겠지만.) 설득력있는 정보와 논쟁적인 사례들을 다루는 감독의 공격적인 태도, 주인공들의 훌륭한 증언들이 깔끔한 촬영/편집기술과 함께 명쾌하게 전달된다. 제목이 너무 단순하지 않냐고? 천만에, 저 제목이어야만 한다네. 그리고 마지막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분명히 당신의 어느 나약한 부분을 건드릴 것이다. 다 죽어가는 심장, 혹은 한쪽 눈을 질끈 감아버리곤 하던 빈약한 양심이 있던 자리를 찾아 아프게 꾹 누를 것이다. 이 영화를 꼭 보라구. 거대기업과 싸우는 용감한 소비자들, 혹은 노동자들 VS.  거대기업을 도우면서 엄청난 돈으로 미디어를 활용해 이 멋진 주인공들과 우리 모두를 기만하는 세력의 혈전이 영화 전체를 팽팽하게 긴장시킨다. 발랄하면서도 열정적인 감독과 궁금한 것이 많은 관객들의 논쟁도 인상적이었다.


 

청계천 메들리:   A Dream of Iron

http://www.hotdocs.ca/film/title/cheonggyecheon_medley_a_dream_of_ir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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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 풀이되는 '나'의 악몽과 '욕망'에 대한 문학적 내레이션, 한국 근현대사와 가족사, 쇳물을 둘러싼 노동자들의 이력과 청계천에서 붙박혀있던 남자들의 이야기...들이 능청맞고 육중하게 맞물려 화면 속에 계속 등장하는 기계들처럼 복잡하면서도 정교하게 굴러간다. 내레이션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좋지만,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는 도입부, 그리고 중 후반의 무거운 표현들을 조금만 덜어내면 어떨까. 청계천 사내들이 개불을 먹는 장면도 여러 가지 이유에서 불편할 수 있겠다. 이 감독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 이 사람만이 포착할 수 있는 생생한 장면들, 여러 자료화면들이 지루하지 않게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쇠를 다루는 남성들의 역사가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를 보여주는 단면이 될 수 있는데, 이 영화가 가진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남는다. 핵심이 무엇인가, 어떻게 핵심을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이 저마다 다르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다.
 

 

A Barefoot Friend

http://www.hotdocs.ca/film/title/my_barefoot_fri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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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꾸준히 제작하고 있는 이성규 감독의 신작.

인 물 중심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아서, 아니 그런 영화에 너무 깊이 몰입하기 때문에 화면과 거리를 두려고 굉장히 애쓰면서 봤고 주변 분위기를 더 많이 살폈다. 비 내리는 늦은 밤, 한국인이 만든 인도영화를 보러 올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걱정을 좀 했는데, 객석이 꽉 찰 정도로 많은 이들이 왔고, 대부분 감동받은 표정이었다. 주인공에 관한 후일담을 궁금해했고 보다 광범위한 펀드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이야기도 나왔다. 낮에 먼저 상영한 박경근 감독이 통역을 맡아 다소 흥분한 듯한 이성규 감독의 이야기를 적절하게 잘 전달하는 모습이 좋아보였다. 오늘은 한국인을 셋이나 만났고 커피도 같이 마셨네. 이 영화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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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신작 디비디를 가득 담은 소포가 왔다. 잘 보겠습니다. 그리고 틈 봐서 꼭 전달할께요.

 

*5월 4일밤부터 사진파일 업로드가 안된다. 무선인터넷 신호가 약해서 그런가, 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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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ecret Trial 5

http://secrettrial5.com/

(아직 못봤지만) 홍보 이메일을 받은 여러 영화들 중에서 가장 관심이 가는 작품.

 

 

Little Voice

http://www.hotdocs.ca/film/title/little_voi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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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린이들과 같이 크레파스를 쥐고 도화지에 그려본 다큐멘터리. 백 명이 넘는 컬럼비아의 어린이들(11세에서 13세)이 인터뷰에 응했고 그들 중 몇은 영화의 화자가 된다. 처음부터 3D로 기획한 것은 아니었고, 1차 작업을 완료한 이후에 마케팅을 위해서 3D로 전환했다는데 그 효과는 감독이 예상한 것보다 더 크다. 객석 곳곳에서 어른들이 어깨를 흔들며 앞 좌석에 코를 박고 운다. 전문가의 캐릭터와 어린이들이 크레파스로 그려놓은 (솜씨는 어설프지만 표정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캐릭터들이 코 앞으로 달려와 속삭이기 때문이다. 내가 다리를 잃고 내 친구가 아빠를 잃고 내 이웃들이 이렇게 눈물 흘려도 너희 어른들은 왜 이런 전쟁을 계속하고 있니? 특히 한 주인공이 강아지 두 마리를 마당에 묶어놓고 피난 가는 장면, 그녀석들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 까지 컹컹 짖는 소리를 들려주는 대목에서는 반려동물을 가족과 다름없이 아끼는 이 나라 어른들의 혼을 쏙 빼놓는다. 다 좋은데, 가장 큰 문제점은 영화를 보는 내내'콩사탕은 싫어요'라는 에피소드가 생각난다는 점. 평화로운 시골마을을 마구 파헤쳐놓는 전쟁의 참상에 관해 어린이들이 증언하는 여러 사례들이 감독의 정치적 견해로 인해 '전쟁 반대'가 아니라 '게릴라 반대'로 왜곡되지나 않을지 제법 심란해진다.

 

 

After the Apocalypse

http://www.hotdocs.ca/film/title/after_the_apocalyp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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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소련 체제 하에서 러시아가 여러 번 시도했던 핵실험으로 인해, 그 위대한 과학의 힘으로도 결코 복구할 수 없는 피해를 입은 카자흐스탄의 한 지역과 거기 사는 사람들에 관한 작품. 피폭자였던 엄마, 그 엄마의 (소위 '기형'이라고 부르는) 얼굴을 쏙빼닮은 딸이 '유전자 여권'에 등록되어 '출산과 육아'를 국가기관에 의해 관리(감시?) 당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기이한 모습으로 태어났다가 목숨을 잃은 아기들을 유리병 속에 넣어 보관하고 있는 'Polygon'이라는 곳에서는 이런 아기들을 '괴물'이라 부르며 더 이상 태어나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의사가 있고, 임신했다는 주인공에게 '멍청하게...'라고 힐난하는 의료진이 있다. 생존자들은 오히려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산다'며 덤덤하게 살아가려고 애쓰지만 아이를 인공유산하라고 설득하는 이들을 피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자 눈물을 흘리며 분노한다. 뱃 속의 아이를 살릴 것인가,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카메라를 들이대는 감독에게도 주인공의 원망이 쏟아진다. 공식적으로, 아니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도의적으로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있는 러시아와 그저 이 불안한 여성들을 윽박지르는 것으로 '관리'를 다하고 있다는 듯 뒷짐을 지고 있는 카자흐스탄의 정책에 대해 관객들도 한없이 불편해진다. 원폭으로 인해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으면서도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했다가 최근 대지진으로 다시 한번 위기를 맞이한 일본과 이런 원자력을 여전히 '안전하다'고만 홍보하는 한국에서도 반드시 봐야할 영화.

 

 

Inside Lara Roxx

http://www.hotdocs.ca/film/title/inside_lara_ro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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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성 포르노 스타가 HIV에 감염된다. 그와 같이 작업했던 세 여성배우들이 그에 의해 감염되었다는 것을 확인한 언론은 한동안 이 여성들에 대해 호들갑스런 기사를 연이어 싣다가 더 선정적인 기사에 묻혀 이들을 잊어버린다. 그들 중 하나인 라라 록스의 인생에 관한 작품. 감독은 이전에 성매매 여성들과 같이 작업했고 포르노 영화의 제작현장이 성매매의 현장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내가 어떻게 해볼 수가 없는 애였어. 통제불능이었지.'라고 회고하는 엄마, 열 여섯살에 이미 마약을 하고 있던 라라에게  '넌 가능성이 많은 아이야'라는 격려를 듬뿍 줬다던 사회복지사, 포르노 배우로 오랫동안 일하다가 감염자들을 돕는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선배들을 주인공과 같이 만나면서 감독은 라라가 왜 이 일을 시작했고 감염된 상태에서도 떠나지 못했는지를 5년 동안 귀 기울이며 깊이 들여다 본다. 그러다 어느날 내놓지 못했던 이야기를 털어놓는 주인공의 목소리를 듣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모두가 라라에게 동의할 수는 없겠지만 누군가는 꼭 (이 영화를 만든 감독처럼) 라라의 편이 되어주면 좋겠다. 격렬하게 논쟁할 부분이 여럿 담겨있는 좋은 영화다.

 

 

*그 외,

  후기를 쓰고 싶지만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는, 재밌게 봤던 영화들

 

 

The Ballad of Genesis and Lady Jaye

http://www.hotdocs.ca/film/title/ballad_of_genesis_and_lady_jaye_the/8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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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phin Boy

http://www.hotdocs.ca/film/title/dolphin_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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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ck

http://www.hotdocs.ca/film/title/b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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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y Cheerleaders

http://www.hotdocs.ca/film/title/boy_cheerleaders/8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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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ol Channing: Larger Than Life

http://www.hotdocs.ca/film/title/carol_channing_larger_than_life/8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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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ff Bell Light Box 는 가장 많은 관객이 몰리는 곳이라서 예매를 못한 이들에게는 가장 피곤한 곳이기도 하다. 밴쿠버와 마찬가지로 이 도시에서도 영화를 상영하는 곳에 좌석번호가 없기 때문에, 예매를 했고 입장권을 받았더라도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면 일찍 가서 서 있는 수 밖에 없다. 누군가가 예매를 취소하거나,  도착하지 못해서 빈 자리가 생기기를 바라며, 러쉬 라인에서 한 시간 이상 서서 기다리던 한 관객은 쓰러지기도 했다. 덕분에 사고를 염려한 사람들이 이들 중 단 한 사람도 건물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았다. 그 사람은 무사히 귀가했을까. 적절한 응급조치를 받았을까. 하루에 천 명 이상이 접근하는 영화제다. 건물마다 구급요원 한 두 명은 있었으면 좋겠다.

 

*패스를 가진 사람들이 먼저 들어갈 수 있으니까, 아직 도착하지 못한 친구들 자리를 미리 맡아두는 경우가 많다. 여기 사람들도 그렇게 한다. 가방이나 자켓을 빈 좌석에 올려두고 누가 물어보면 ;사람 있어요' 한다. 재밌다. 그리고 가끔은 그건 공정하지 않아요, 라고 말하고 싶다. 거의 매일 비가 오는데, 이 빗길을 버스 타고 전철 타고 자전거 몰고 혹은 걸어 걸어 힘들게 와서 줄 선 사람들이 있는데.

 

*Tiff 후원자 리스트를 건물 복도 어느 벽에 새겨놓았다. 구체적이진 않지만 액수도 적혀 있다.  백만원 이상 기부하신 분들, 오백만원 이상 기부하신 분들... 이런 식으로 어떤 이들의 이름을 공개하는 것은 어떤 효과를 가져올까. 저 리스트를 보면서 사람들은, 내 이름도 올리고 싶다, 혹은 저렇게 큰 돈을 후원금으로 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는 생각을 하게 될까? 영화제 주최측에서는 후원금을 투명하게 관리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걸까? 한번도 자세히 본 적이 없는데 가만히 들여다 보니 한국인의 이름도 보인다. 저 사람은 어떤 동기로 여기까지 왔을까. 그래서 흐뭇할까. 어떤 이름들과 그 이름이 노출되는 방법에 대한 짧은 고민.

 

*극장에서 매표원으로 일하는 한 친구는 Hot Docs나 Tiff에 안간다. 얄미워서 한 푼도 주기 싫단다. 겪어보니 조금 이해가 가기도. (영화를 산업으로만 인식하는) 정부에서 지원하지 않으면 당장 내년을 기약하기 어려운 여러 영화제와 몇 몇 영화 제작자들의 운명은 이제 어디로 흘러가고 있나. 날마다 영화를 보고, 영화를 상영하는 곳에서 일하고, 앞으로도 영화에 관련된 일을 계속하고 싶어하는 사람조차 외면하는 이 영화제는 축제가 맞나.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축제일까. 어떤 축제가 되면 좋을까.

 

* Bloor 극장, Innis 상영장(여기는 극장이 아니라 대학 캠퍼스 안에 있는, 영화도 틀 수 있는 강당 같은 공간)의 경우,  내년에는 다른 대안을 찾는 것이 좋을 듯. 화질과 음질 모두에 문제가 있고 좌석도 불편하다.

 

* 어느 영화제나 마찬가지지만, 자원활동가들의 편차가 커서 인종차별적 발언을 무심코 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얼굴에 피곤이 자글자글 접혀있는데도 너무나 친절하게 안내해주셔서 송구스러운 분도 있었다.

 

* 어느 커피집에서 만난 한 한국인 종업원은  단지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만으로도 환대해주셔서 약간 어리둥절했다. 고맙다는 생각도 들었다. 대개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자신이 한국인이면서, 아니 자신이 한국인이기 때문에, 그간 이 나라에서 겪어야 했던 갖은 모욕을 어느 만만해보이는 한국인에게 되돌려주는 분들이 그렇지 않은 분들보다 더 많다.  동전 두어 개를 건네고 커피를 한 잔 사는 그 잠깐 동안에도 선 안에 있는 사람과 밖에 있는 사람 사이에서 복잡한 감정과 수많은 사연들이 덧칠된다. 피부색 다르고 국적 다른 낯선 사람들로부터 욕을 듣는 것보다 그런 묘한 한국인을 한번 만나는 것이 더 서럽고 괴로운 때가 있었다. 지금은 그러거나 말거나 그저 '안녕' 먼저 인사를 건네며 활짝 웃고 말지만.

 

*인터넷 환경 좋은 곳에서 딱 하루만 마음 편하게 서핑 좀 하다가 자고 싶구나. 사진파일 업로드가 여전히 안된다. 아웅...

 

*5월 10일 저녁, 학교에서 사진파일을 올리다.

 

 

 

 

2011/05/03 00:54 2011/05/03 00:54

The Admirable Crichton

from 토론토 2010/11/21 0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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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중간에 휴식 시간, 롬백작 일가의 섬생활을 보여주는 세트.

 

 

학생들이 준비하고 공연한 훌륭한 크라이턴 (The Admirable Crichton).

 

 

 

피터팬의 작가 J.M 배리 (J. M. Barrie) 가  희곡을 썼고 1902년에 초연되었다고. 분명히 주인공이지만 크라이턴에 가려 공연 내내 조연으로 머물고 말 운명에 처한 롬백작은 설득력 부족한 이야기를 떠들어대며 주변 사람들을 귀찮게 하는 경박한 인물. 어찌보면 전형적인 민폐 캐릭터다. 티파티에 느닷없이 집안 하인들을 불러들여, 귀족들과 같이 서로 인사하고 대화를 나누라고 권하는 초반부는 가관이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분들이 떨떠름한 얼굴로 하인들에게 차를 건네고 케잌을 권하지만, 하인들과 한번 악수를 할 때마다 손수건을 꺼내 손바닥을 문지르는 분이 있는가 하면, 그들과 같은 의자에 앉는 것도 불편해서 주위를 빙빙 돌며 난처해하는 분도 있다. 평소에 원하던 일이 아니었기에 그저 명령에 충실할 뿐인 하인들도 피곤하기는 마찬가지다.

 

먹 고 사는 것에 관련된 모든 험한 일을 하인들이 묵묵히 수행한 덕분에 우아하게 살 수 있었던 백작은, 섬에 난파된 이후 생존을 위해 해야할 일들 중 할 줄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걸 깨닫고 (평소 백작일가보다 더 현명하고 우아해보였던) 크라이턴에게 복종한다. 크라이턴이 거기서 평등한 세상을 구현하며 가족같은 공동체를 건설한다면 재미없는 코미디가 되었을텐데, 지금까지 자기가 당한 그대로 톡톡히 백작일가에게 되돌려준다. 하인들 사이에 서열을 정해 조금씩 권한을 늘여 서로 경쟁하게 하는 것도 똑같다. 여기까지만 봐도 의미심장한 대목이 곳곳에 숨어있는데 이들이 구조되어서 다시 상류사회에 복귀하는 후반부에선 크라이턴이 아니라 작가의 입김이 기어이 관객들의 코 앞으로 다가와 다그친다. 너희들, 제법 책도 많이 읽었고 학교도 길게 다녀서 세상을 좀 안다고 착각하는 너희들 말이야, 이 백작 일가랑 다를 게 뭐 있어? 귀찮은 일은 과묵하고 헌신적인 부모나 집사람이나 누나나  오빠나 언니나 동생들, 혹은 후배나 제자들이 다 처리해주길 바라면서 다 미룬 다음에, 자기만 어떻게든 멋지게 살아보려고 발버둥치고 있지 않아?  평등? 네가 정말 평등을 원해? 이 포장지만 바뀐 신분 사회가 영원히 계속되길 바라는 게 아니고?  

 

공연이 끝나자 모두가 일어나 박수를 치고 있다. 등줄기에 쭈욱 돋은 소름을 애써 털어버리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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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마치고, 무대 사진 찍어도 되냐고 안내하시는 분께 물었더니, 원래 못찍게 하는데 그날은 학생공연이라 괜찮다고. 위 사진은 백작 일가의 거실 세트 중 일부.

 

 

 

 

 

 

 

2010/11/21 03:36 2010/11/21 0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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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에 학교에서 본 영화.

 

 

 

 

틀 어주기 전에 선생님이 '로저 무어가 어쩌고 저쩌고...'해서, 아 그 사람도 저런 제목의 영화에 출연했나,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마이클 무어의 영화였다. 감독의 이름과 '로저와 나'라는 다큐멘터리의 제목이 그만 섞여버린 걸까. GM 같은 대기업과도 맞장을 뜨시고, 힘자랑 돈자랑하다 폭삭 주저앉을 뻔 했던 미국 정부와 (특히) 부시를 마음껏 조롱한다는 점 때문에 여기 사람들도 꽤 좋아한다는 마이클씨, 그의 신작은 강의실에서도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선생님이 시간계산을 잘못해서 중간에 끊고 수업을 마치려고 하자, 다른 때 같으면 좋아라하며 슬그머니 일어나 나가버렸을 학생들이 일제히 시계를 가리키며 무슨 소리냐고 아직 많이 남았다고 끝까지 봐야한다고 항의했다.

 

돈 과 자본주의에 대한 성찰이라기보다는, '자본과 권력' 혹은 '권력과 검은 돈'의 밀월은  고대 그리스 로마 시절에도 존재했고, 돈은 늘 '(아주, 대단히) 많이 가진 자들과 권력'을 위해 사용되며, 최소한의 인간적 대접을 요구하기 위해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우다가 나가 떨어져 해고되고 집까지 빼앗겨 망연자실한 못가진 이들에게는   더 내놓으라고 느닷없이 덮쳐 목덜미를 무는 것이 자본의 속성이라는 것을 신랄하게 까버린다. 그의 빠른 호흡과 거침없는 독설은, 보는 동안에는 울분을 달래주기도 하고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듯도 한데, 다 보고나서 며칠 동안 끈적끈적하게 남아 있는 이 앙금은 뭘까. 화면 밖에서 나는, 그리고 당신은 마이클씨처럼 한번 미친 척 들이대 보지도 못한 채 각종 금융상품광고와 높으신 분들의 감언이설에 이리 끌려가고 저리 휘둘리며 살아가기 때문인가. 아니면 나나 당신이 그런 인터뷰 그런 연출을 하기 위해선,  상상할 수 없었던 (겉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압력을 계속 감내해야 하는 건 물론이고 감옥에 갈 각오 혹은 목숨을 내놓을 생각까지 해야하는 현실  때문인가.

 

 

2010/11/19 13:28 2010/11/19 13:28

Free Documentaries

from 영화+독립영화 2010/09/27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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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고, 진보넷에 관련 포스트도 있을 법 한데 미리 찾아볼 새가 없었음.

마이클 무어의 '식코'를 비롯해서 유명한 다큐멘터리들(여러 영화제에서 상영했고 극장에서 개봉도 했던 작품들)을 온라인으로 보거나 다운로드 받을 수 있는 사이트. 6월에 페이스북에 매일 접속할 때 한00이란 분이 알려주신 곳. 한동안 잊고 지내다 오늘 문득 생각났는데 다시 잊어버릴까봐 자료실에 남겨둠.

 

홈페이지 : http://www.freedocumentarie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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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중에서 일부 (클릭하면 작품 리스트로 이동)

 

- 액티비스트 관련

- 인권 관련 

- 환경 관련

- 전쟁 관련

GLOBALIZATION(지구화? 세계화?) 관련

- 여성 관련 (현재 세 작품 밖에 없는데 아마 다른 카테고리에서 관련 주제를 좀 더 찾을 수 있을 듯.)

 

2010/09/27 10:30 2010/09/27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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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회 토론토국제영화제

2010년 9월 9일(목)부터 19일(일)까지

 

* 공식 홈페이지  http://tiff.net/

 

* 보고 싶은 영화들

 

1. 무료 상영 - 지난 상영작들 중 몇 편을 무료로 상영하는 서비스

 

2. 주말 상영

    기후변화 이슈를 비롯, 지구를 지키자는 환경 다큐멘터리가 여러 편 있는데 시간이 전혀 맞지 않다.

    지나간 토요일과 오늘 일요일, 그리고 다음주 주말에 상영하는 작품들 중에서 보고 싶은 영화들 몇 편.

    단 한 편도 못보고 그냥 지나갈 수도 있는 이번 영화제, 아쉽다.

 

   (제목을 클릭하면 홈페이지의 영화소개 화면으로 이동함)

   

Pink Saris   

-  인도,  핑크 갱'이라는 이름의 한 여성 조직, '부끄러운가, 그렇다면 너도 죽으리라.' (예고편)

 

 Rabbit Hole

-  '헤드윅'의 존 카메론 미첼 감독.  니콜 키드먼보다 다이언 위스트가 더 궁금.

 

 매치 메이커

- 1968년 세계2차대전 이후 이스라엘.  한 마을 주민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 (예고편)

 

 노르웨이의 숲

- 트란안홍은 하루끼의 소설을 어떻게 해석했을까.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이 소설은 뭘까.

 

 Beginners   

-  일흔 살 아버지의 커밍아웃은 아들의 인생에 무엇을 남기나.  미국.

 

 Out bound   

-  루마니아에서 법을 전공했던 감독은 왜 미국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이 영화를 만들었을까.

 

 Look Stranger 

- 이것도 루마니아에 관한 영화, 한 여성의 고된 여정을 담은 것.

 

  Inside Job  

-  미국 경제위기에 관한 다큐.  2007년 아카데미 어워드에서 노미네이트되었던 감독.

  

   그 외 올해 101세를 맞은 한 여성감독의 최신작도 있고, 여성 뮤지션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도 여러 편 있다. 한번이라도 극장에 갈, 못가더라도 관련정보를 훑어볼, 시간을 만들 수 있기를 바랄 뿐. 일단 간단하게라도 메모하고.

  

 

 

*결국 한번도 못갔다. '노르웨이의 숲'이라도 보고 싶었는데 아쉽다. (2010.11)

 

  

  

 

 

2010/09/12 17:07 2010/09/12 17:07

마음의 당면

from 토론토 2010/08/20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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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말이를 만들었다.

이 음식의 묘미는 만드는 과정에 있지 않다. 지나가다 눈에 들어왔는데 마침 출출해서 들어선 노점에서,  '떡볶이에 묻혀주랴 그냥주랴' 하는 질문에 미처 대답하기도 전, 옷소매에 간장 한점 흘려가며 먹는데에 있으련만. 이걸 집에서 직접 만들 거라는 생각은 한번도 못해봤다. 부지런한 친구 덕분에 어떻게 하는지 배웠다.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이미 다 먹어 없앤 이 김말이의 이름이 '마음의 당면'이라는 ㅋ.

 

 

여름이 간다.  

마음이 어수선했던 모든 이들에게  선선하고 따뜻한 가을이 어서 오기를.

 

 

 

 

 

 

 

 

2010/08/20 00:23 2010/08/20 00:23

[알림] 어머니

from 영화+독립영화 2010/08/17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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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을 세 줄로 요약한다면

전태일의 어머니,

같은 하늘 아래 서로 다른 길을 간다 해도

당신과 나의 어머니

 라고 할 수 있으려나

 

태준식 감독 '어머니' 작업 블로그

sosun.tistory.com

 

아직 촬영중이라는데

벌써 포스터도 나왔고 트레일러도 공개한 지 오래.

 

근데 아래 포스터에 카피가 너무 많다

나중에 알아서 잘 가지치기 하시겠지

 

 

 

2010/08/17 13:40 2010/08/17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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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병님의 [독립영화와 저작권] 을 읽고

[만화방 앞에서 망서리기]와 관련

 

 

* 인디플러그

 

아직 회원가입 못했다.

가까운 분이 아이디와 비번을 알려줘서 샘터분식을 내려받아 봤는데 그 뒤로는 접속할 겨를이 없다. 몇 년 전, 독립영화 제작자(감독) 몇몇과 함께 제작자들이 직접 배급하는 온라인 공간을 고민한 적이 있었지만 그 틀은 지금 인디플러그와 같은 형태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때 모인 이들은 저마다 배급방식이나 온라인 소통방식에 관해 각자의 의견을 분명하게 내놓기 어려운 입장이었으므로, 만약 뜻을 모아 공간을 마련했다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형태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 모임은 결국 성과없이 끝났다.

모인 이들은 너무 바빠서 시간이 부족했고, 제작자들끼리 새 길을 내본 경험이 없어서 자신감도 부족했고, 무엇보다 '한독협이라는 공식 조직이 있는데 왜 샛길을 내려고 하는가'에 대해 의혹 혹은 부정적인/불안한 견해를 가진 다수의 눈총을 매끄럽게 받아들이지 못해 각자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흩어졌다. 여러 모로 아쉽고 아픈 경험 중 하나였다. 그 때 다큐야 쩜 넷의 온라인 설계를 맡아 수고하셨던 분께 (개인적으로 급히 마련한) 최소한의 수고비만 지불한 채 작업을 중단했던 것이 지금까지 두고 두고 죄송하고, 시간과 정성을 내놓고 마음을 열었던 몇몇 동료들에게도 일일이 만나서 매듭을 짓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린다.

 

시간이 흐른 지금, 인디플러그가 등장했다.

회원가입 할까 말까, 고민이 됐다. 이렇게 운영하는 거 맞나, 판단하기 어려웠다. 가까운 분이 그랬듯이, 나도 가입해서 여러 사람들과 아이디를 공유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겠다. 하지만 한 발 더 나아가서, 인디플러그의 존재이유와 운영방침, 그리고 그 다음에 대해 토론하고 합의하기 위해 움직이는 게 더 급한 듯 하다.

 

 

*관련기사1

 미디어스 - 인디플러그의 활동과 독립영화계의 침묵 (2010. 8. 13)

 기사 내용 중 같이 읽고 싶은 부분 발췌

독립영화계에서 저작권 문제가 거론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예전에 이미 <워낭소리>를 둘러싼 논란이 독립영화계를 한바탕 휩쓸었었다. <워낭소리>의 제작자였던 고영재는 영상이 인터넷에 유포되면서 해외 시장 진출의 통로가 막혔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며 저작권법을 위반한 불법 다운로드에 대해 강하게 성토했고, 이를 계기로 독립영화 진영에서 저작권과 관련된 논의가 일었었다.

그런데 그 때 MB의 <워낭소리> 관람과 독립 영화 진흥 정책에 관련된 것으로 주제가 확산되며, 저작권과 관련된 논의는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한
채 묻혀버렸다. 그러다 다시 고영재가 대표를 맡고 있는 인디플러그의 굿 다운로더 캠페인 동참과 불법 업로드 업체에 대한 법적 대응 선언으로 저작권 관련 문제가 독립영화계에 제기 되었다.

 

* 위 기사에서 언급한, '워낭소리' 고영재 피디의 발언을 담은 기사

한겨레 - 정보공유 한단계 성숙하는 계기 되길 (2009년 3월 5일 등록, 3월 13일 수정)

 

 

* 위 상황과 관련해서 [워낭소리 관련]에 보면

당시 고영재의 '디지털 악마' 발언을 비판하는 글이 여러 편 있었다

그리고 독립영화감독들이 연대서명을 받아 질의서를 전달하는 조직적 항의가 있었다

 

라울 -  [새],   [독 08]

슈아 -  [답답한데 졸려]

나루 - [연명을 부탁합니다]

 

이후 한독협 홈페이지 개편작업이 있었고, 공개질의서 및 관련논의가 올라왔던 게시판이 닫힘.

공개질의서 내용은,  '워낭소리' 불법다운로드 사태에 대한 한독협 사무총장 고영재의 대응방식(수사 요청? 경찰에 고발?)과 언론사 기자들이 여럿 찾아온 가운데 어느 대학 강의실에서 공개적으로 발언한 내용에 대한 비판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대통령의 '워낭소리' 관람요청(감독 및 한독협 관계자 참석 하에)과 이후 장관의 대화요청에 응한 것에 대한 비판이 더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 

 

관련기사1 중에서 발췌 조금 더.


당연하지만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인디플러그가 독립영화계를 대표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갖가지 언론들에서는 인디플러그의 사업 정책을 독립영화계로 환원해 보도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문제적인 것은 언론의 보도형태가 아니라, 독립영화계의 반응이다. 그들은 마치 거대한 침묵을 통해 인디플러그의 입장에 암묵적으로 공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침묵은 때로 동의와 같은 것으로 보인다.

 

완전히 상업화된 방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립영화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생산, 유통, 소비 방식을 만들어 왔으며, 그 방식의 다양화를 이루어 왔다. 다시 말해, 독립영화는 획일화된 상업영화의 그것들과는 다른, 대안적인 방식들을 끊임없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만들어지고, 도입된 것이 퍼블릭 액세스이고 공동체 상영 등이다. 그것들이 성공적이었든 아니든, 그러한 기본적 취지와 의도만은 아직까지 지켜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저작권은 상업영화가 가장 전형적으로 이익을 창출해 내는 통로이다. 게다가 그것은 직접적인 생산자나 창작자에게 보상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하기보다는 그것의 투자자들이나 거대 유통 기업들에 이익을 돌려주기 위한 장치이다. 물론 몇몇 이름난 생산자들이 저작권을 통해 엄청난 수익을 얻긴하지만, 대부분의 창작자들에게 그것은 신화적인 것일 뿐이다. 상업영화계에서도 그들은 대부분 영화사에서, 방송국에서 창작 노동을 하며 착취당하는 노동자일뿐이다. 게다가 그것은 문화의 향상발전을 도모하기 보다는 그 반대로 기능하고 있다. 저작권은 디지털 네트워크 환경에서 문화적 생산물들을 확산시키고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기회를 막고 있으며, (때문에) 풍부한 2차 창작물(소위 패러디나 키치 등)들이 산출될 수 있는 통로를 차단시키고 있다. 파생 창작물의 생산을 활성화 시키는 것은 문화(심지어는 산업)를 향상발전 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저작권이 가로 막고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디플러그가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독립영화계가 침묵하고 있는 저작권 단속은 독립영화의 기반 정체성을 위협할 수 있는 중요한 사안이 된다. 그것은 상업 영화의 틀에 독립영화 스스로를 구속시키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만약 이 상태가 더욱 진행되어 독립영화가 저작권 산업에 기대어 생명을 유지해 나가게 된다면, 독립영화는 발명되어야할 미래의 가능성들(퍼블릭 액세스를 포함한 대안적인 영상의 생산, 유통, 소비 방식들)을 미리 포기하는 것이 될 것이다.

 

* 관련기사 2

무비위크 - 온라인 다운로드의 가능성을 보다 (2010. 3)

인터뷰 내용 중 다시 읽고 싶은 부분 발췌

고영재 대표의 답변 중 밑줄 친 부분은 같이 생각해보고 싶은 점들

아래 두번째 답변, 세번째 답변 등은 동의하기 어렵다.


- 유료 사이트라서 시장이나 유저들의 가격에 대한 저항도 예상된다.

가격은 2,000원으로 결정했다. 고민의 산물이다. 유저들은 싼 게 좋다고 하는데, 지금 개봉 영화 가격이 일반 유저들이 바라볼 때 비싸다고 인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디플러그는 그동안의 기술적 이슈였던 DRM(Digital Right Management)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DRM을 건다는 건 ‘대여’ 개념인 거고, 인디플러그는 ‘소장’ 개념이다. 이러한 정책들을 네티즌이 이해하고 인정해 주면 부가판권 시장에서 다운로드 시장이 연착륙될 수 있다.

-독립 영화 유통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온라인 구축을 통해 기대할 수 있는 효과가 있다면?

물론 수익성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철학적 배경으로 몇 가지 고민을 했다. 인디 음악이나 만화, 민중가요는 시장에서 다 실패했다. 적어도 유통의 영역에서는 말이다. 그들은 자기 작업은 열심히 하는데, 나머지 부분은 귀찮아한다. 개인적으로 그것이 불만이었다. 인디플러그는 자체 수익의 일정 부분을 포기했다. 수익의 50퍼센트를 제작사에 제공한다는 철학을 원칙적으로 시행하려고 한다. 그래야 온라인 배급을 통해서 제작자도 수익을 챙길 수 있고, 다양한 작품이 많이 나올 수 있다고 본다.

-온라인 내 독립 영화 활성화를 위한 전략이 있다면?

각각의 독립 영화가 지닌 장점을 가지고 관객들과 만날 수 있도록 그 포인트를 잘 찾아나갈 필요가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독립 영화 진영이 한 단계 질적 도약을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제작 측면에서 장르를 개척하려는 노력을 할 수 있고, 마케팅도 더 적극적으로 모색할 수 있게 된다. 이번에 <경계도시 2>에 김C가 다큐프렌즈로 참여하는 게 좋은 예다.
 

나는 아직 한국독립영화협회에도 가입하지 못했다.

가입하려고 시도했다가 안됐던 그날부터, 가입하라고 권유받던 시간을 지나, 먼 곳에 혼자 떨어진 지금도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개인작업(이라고는 하나 다양한 형태로 수많은 분들이 참여했던) 하나, 여러 감독과 미디어 활동가들이  함께 제작했던 공동작업이 하나, 제작지원 한번 못받고(2007년부터는 응모하지 않기로 했다) 몇 년 동안 혼자 꼼지락거리다가 아프다는 이유로 중단한 작업이 하나 있을 뿐인 초라한 이력에 단 한 줄이라도  더 새기게 될까. 실패의 이력만 길고, 성과없는 시도만 계속하며, 고민만 많은 나같은 이가 과연 독립영화 계속할 수 있을까. 온라인 배급은 물론 독립영화에 관련해서 나같은 이는  더 이상 발언하지 않는 것이, 이 어려운 시절을 딛고 지금 열심히 작업하는 이들에 대한 예의일지도 모르겠다.

2010/08/17 13:17 2010/08/17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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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등 강조는 옮겨오면서 제가 한 것임

말문이 막혀서 이 사태에 관해 따로 할 말은 없다. 

 

* * * * * 

 

출처 : 프레시안

 

 

독립·예술영화 제작 직접지원 폐지, 영진위 의도는?

[뉴스메이커] "특정단체 밀어주기 및 배제 노골적" 영화계 반발

기사입력 2010-07-02 오후 5:58:36

        

 영화진흥위원회(위원장 조희문, 이하 '영진위')의 내년도 영화발전기금 운용계획안에서 독립영화 제작지원, 예술영화제작지원, 그리고 기획개발역량강화 사업의 예산이 전액 폐지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영화계가 또 한 차례 들썩일 전망이다. 또한 영진위 내에서 예산안을 의결하는 과정에서 위원들 간 충분한 논의를 거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져 더욱 논란이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한겨레가 오늘(2일) 오전 보도한 바에 따르면, 영진위가 최근 9인 위원회에서 통과시키고 문화부가 승인해 기획재정부로 넘어간 내년도 영화발전기금 운용계획안에서 올해 12억이 배정됐던 기획개발역량강화 사업과 독립영화제작지원(7억), 예술영화제작지원(32억 5천) 예산이 모두 폐지됐다. 영진위는 대신 이를 '영화유통 및 제작지원' 사업으로 통합해 현물지원으로 보완한다는 계획???이다. 현재 영진위가 작성한 발전기금 운용계획안은 영진위 9인위원회의 의결과 문화부의 승인을 거쳐 기획재정부에 제출된 상태다.

 

이에 대한 문화부의 입장은 "문화예술의 다른 분야에도 그렇듯 영화계에도 직접지원보다 간접지원과 인프라 구축 지원이 늘어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유병한 문화관광체육부 문화콘텐츠산업실장은 이러한 변화가 "갑자기 결정한 것이 아니라 정권 초기부터 영화계에 주문했던 내용"이 라고 밝히면서, "독립, 예술영화를 지원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지원하는 방식이 바뀌는 것일 뿐이다. 영화제작지원의 총예산은 오히려 올해 39억에서 내년 50억으로 늘어났다. 그간 나눠먹기, 편파시비로 잡음이 끊이지 않았던 만큼 이를 개선하자는 취지도 있다"라고 밝혔다.

 

그 러나 영화계에서는 영진위의 이러한 예산계획이 "특정세력을 배제하거나 밀어주면서 '길들이기'를 하겠다는 의도"라고 의심하는 분위기다. 그간 영진위 조희문 위원장을 비판하며 사퇴요구를 해온 영화인들의 선봉에 독립영화계가 있었던 만큼, 실제로 영진위의 이번 기금예산안은 상당 부분 의혹을 살 만한 구석이 있다. 본지가 추가로 입수한 발전기금 운용계획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제작지원' 항목이 통폐합된 것 외에도 영화단체사업지원 항목 중 공모사업선정지원 예산도 4억 6천 가량 줄었고, 시네마테크전용관 지원은 임대료에 해당하는 1억 7천을 삭제하고 2억 8천만 원만 책정됐다. 공교롭게도 영진위는 현재 인 디포럼과 인권영화제 측으로부터 '촛불단체라며 의도적으로 단체사업 지원에서 탈락시켰다'며 소송에 걸린 상태이며, 올해 시네마테크전용관 사업자 공모를 시도했다가 서울아트시네마와 마찰을 겪고 공모마저 유찰되자, 서울아트시네마에 임대료를 제외한 사업지원 부문만 지원하기로 한 바 있다.

 

반면 다양성영화 사업 중 독립영화 관람료지원 항목이 신설돼 3억 5천 가량이 책정됐다. 독립영화전용관의 관람료를 할인하고 이를 영진위에서 지원한다는 이 사업은, 결국 독립영화전용관의 수익을 일정부분 지원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된 다. 사업의 취지 자체야 바람직하지만, 현재 "심사조작까지 해가며 영진위가 특별히 밀어준 단체가 독립영화전용관의 사업자가 되었다"는 세간의 의혹이 풀리지 않고 있는 만큼 뒷말이 안 나올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하다. 올해 초 영진위는 사업자 공모를 통해 새로이 독립영화전용관의 사업자로 한국다양성영화발전협의회(한다협)를 선정했지만, 이 과정에서 논란과 잡음이 끊이지 않아 몇몇 단체가 영진위를 대상으로 '사업자 선정 취소' 소송을 행정법원에 제기한 상태이며, 국내 독립영화 감독 155인은 한다협이 운영하는 '제1독립영화전용관' 시네마루에 "나의 영화를 상영하지 않겠다"며 보이콧을 선언한 바 있다.

 

그런가 하면 '글로벌 스튜디오 건립'을 위해 새로이 35억이 설계비로 책정됐으나 이 '글로벌 스튜디오'라는 것의 정체를 아는 사람도 별로 없다. 유병한 실장은 "아시아 다른 국가에서도 한국에 로케이션을 하러 오는 상황이다. 남양주 종합촬영소의 규모를 뛰어넘는 대규모 스튜디오를 만들어 미래에 대비하자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중국에도 거대 스튜디오가 여럿 있는데 국내에는 없다. 오래 전부터 영화계가 요구해왔던 사항이며, 향후 아시아 시장 전체를 겨냥하자는 의도"라는 것. 그러나 영화계 일각에서는 조희문 위원장이 그토록 밀어부치고 있는 '3D 산업을 위한 스튜디오'일 것이라는 짐작이 떠돌고 있다. 유병한 실장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지만, 영화계에서 그런 루머가 떠도는 것 자체가 영화계와의 소통이 별로 없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다. 본지가 접촉한 영진위의 한 위원은 "나 역시 글로벌 스튜디오의 정체를 모른다. 글로벌 스튜디오는 물론이고, 예산안 전체가 위원들 사이에서 충분히 논의와 검토를 거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위원 3인이 예산안 편성을 위한 팀에 속해있기는 했지만 다른 위원들이 예산안을 리뷰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채 심의 의결 불과 3일 전에 안이 제출됐다는 것. 한 마디로 위원들은 그저 표결을 위한 '거수기'로만 동원됐다는 것이다.

 

한편 유병한 실장은 "이것은 그저 '안'일 뿐, 확정된 것은 아니며 일부 수정될 수도 있다. 9월 정기국회 전까지 계속 논의가 필요하며, 국회에서의 논의와 의결을 거쳐야 확정이 된다"고 밝혔다.

 

 

/김숙현 기자

* * * * * 

 

출처:미디어오늘

 

 

 문화부, 내년도 독립영화 지원금 전액 삭감  

영진위 역할 대폭 축소에 ‘해체’ 우려도…외압시비 위원장은 건재
 
2010년 07월 08일 (목) 17:00:28 김원정 기자 ( mingynu@mediatoday.co.kr)
 
 
문 화체육관광부(장관 유인촌·이하 문화부)가 ‘심사과정’에서 논란을 야기한 영화진흥위원회(위원장 조희문·이하 영진위)의 독립영화지원사업 예산을 전액 삭감키로 했다. 문화부는 지난달 삭감계획이 담긴 ‘2011년 영화발전기금 운용계획안’을 마련했고, 영진위는 지난달 28일 ‘9인 위원회’를 열어 이를 통과시켰다. 계획안은 문화부를 거쳐 현재 기획재정부에 올라간 상태다. 
 
계 획안은 다음해 영화발전기금 전체 예산을 전년대비 5.2%(444억4400만→421억2900만원) 감액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세부적으론 영화다양성사업 예산이 올해 보다 50% 이상 줄었지만, 영화인프라 구축사업은 70% 이상 증액됐다. 문화부는 영화산업의 자생력을 키우기 위해 직접지원 방식을 간접지원 형태로 바꾼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영화계에서는 독립·예술영화의 근간이 흔들릴까 우려한다. 
 
무엇보다 독립영화 제작지원, 예술영화 제작지원 그리고 기획개발 역량강화 부문을 통합해 사업 자체를 없앤 점이 반발을 사고 있다. 해당사업엔 내년도 예산이 배정되지 않았다. 투자조합 출자사업(150억→100억), 예술영화전용관사업(17억1400만 → 13억5500만), 시네마테크전용관사업(4억5천만→2억8천만), 한국영화 해외수출 지원사업(34억→ 14억)은 예산이 크게 깎였다. 
 
한 국독립영화협회(이하 한독협) 관계자는 “독립·예술영화제작지원사업이 사라진 건 심각한 문제”라며 “영진위와 문화부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에 재갈을 물리려는 의도”라고 지적했다. 앞서 조희문 영진위원장은 독립영화제작 지원작 선정과정에서 심사위원들에게 외압을 가한 사실이 알려져 영화인들로부터 사퇴 요구를 받아왔다. 결국 예산 삭감 조치로 이런 요구를 입막음하려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문 화부는 이를 직접지원방식에 수반되는 ‘편파시비’로 규정했지만, 영화계는 문제의 본질을 잘못 짚었을 뿐더러 논란을 해소하는 방법도 잘못됐다고 지적한다. 한독협 관계자는 “사업을 변경하려면 그동안 효과와 문제 등을 면밀히 따지는 게 먼저지만 그런 과정 없이 언론에 ‘추문’이 퍼지니까 덮어놓고 없애려 한다”고 비판했다. 양쪽이 갈등을 빚고 있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논의조차 없었다는 설명이다. 
 
일 각에선 ‘2011년 영화발전기금 운용계획안’에 따른 예산으로 영화 제작·유통산업을 진흥해야 하는 영진위가 역할을 다할 수 있을지 의문을 표하기도 한다. 예산이 전액 혹은 대폭 삭감된 영화 다양성 사업 부문은 영진위의 핵심 사업이란 이유에서다. 결국 독립성을 보장받도록 설립된 영진위를 문화부가 사실상 해체, 장악하려는 수순 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조희문 영진위원장의 처신도 도마에 올라 있다. 그 는 영화계 다양성을 구현한다는 명목으로 이른바 진보적 인사들을 영화계에서 축출·배제해 논란을 일으켰으며, 이 과정에서 기관장으로 부적절한 무리수를 동원해 사퇴 압박을 받고도 꿈쩍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2011년 영화발전기금 운용계획안’에 동의하면서 ‘자리를 지키려고 영화를 팔아 넘긴다’는 비판까지 받고 있는 상황이다. 
 
영화인들은 기획재정부에서 국회로 넘어가는 동안 시간이 있는 만큼 대응 수위를 조만간 결정해 대중들에게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 토록하겠다는 방침이다.
 
 
* * * * *
 
출처 : 미디어스
 
 
 
영진위, 영화진흥기관 맞나?
[기고]2011년도 영화발전기금 예산안을 뜯어보니
2010년 07월 08일 (목) 18:04:00
 
최현용/한국영화단체연대회의 사무처장  mediaus@mediaus.co.kr
 
 
  지 난 6월 28일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는 2011년도 영화발전기금(이하 영발기금) 예산안을 의결했다. 이어 문화부 장관의 승인을 받아 기획재정부(이하 기재부)로 예산안을 송부했다. 이제 2011년도 영발기금 예산안의 향방은 기재부에 달려 있다.
 
문제는 예산안의 내용이다. 다시 말하면, 영화진흥정책의 방향성이다.
 
언 론에서 알려진 바대로 독립영화제작지원사업, 예술영화제작지원사업, 기획개발지원사업 등 주요 직접지원사업이 폐지되었다. 그리고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장비를 대여해주고, 후반작업을 현물지원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자랄 것으로 보이는 장비를 더 사겠다고 예산을 배정했다. 장비를 대여해주고, 후반작업을 공짜로 해주면 독립영화, 예술영화가 절로 진흥이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새다.
 
특 정 정책이나 사업이 영속적일 수는 없다. 필요하다면 사업을 폐지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영화진흥’을 목적으로 하는 정책이라면, 이런 식은 아니다. 민간업체와 무료라는 비용을 무기로 경쟁하는 영진위, 도대체 이게 무슨 영화진흥정책인가. 이건 영화업계와 싸우자는 것이다.
 
지 원사업 폐지의 대안이라는 ‘제작지원 (인건비 지원)’ 사업도 마찬가지이다. 기업단위로 인건비를 보조하겠다는 사업이다. 현재 영화산업에서 투자자본은 전방위로 제작비를 줄이라는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저예산영화가 범람하는 이유이다. 문제는 부당한 방법으로 제작비를 줄이고 있다는 점이다. 인건비를 투자비로 돌린다든지 등의 불법이 횡행하는 상황에서, 이런 식의 인건비 직접 보조사업이 추진되는 건, 그만큼 투자자본에게 제대로 된 투자(혹은 제작예산책정)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콜싸인이나 마찬가지이다. 도덕적 해이를 요구하는 영화정책이라니, 이건 영화산업을 불구로 만들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에 다름 아니다.
 
다른 사안을 보자. ‘독립영화 관람료 지원’이란 신규사업에 예산을 배정했다. 독립영화제작지원은 폐지하면서 이런 사업을 만든 것이다. 사업내용은 “독립영화전용관 상영 독립영화 대상 관람료 할인 지원”이다. 즉 논란과 의혹 속에 제 식구를 챙겨준 지금의 독립영화전용관 시네마루에 관람료를 별도 지원한다는 것이다. 사실상 독립영화전용관사업의 일부인 셈이다. 그럼에도 별도의 사업으로 분리시킨 이유는 명백하다. 관람료는 극장의 수입으로 계산되기 때문에, 인건비 전용이 가능하다. 일반 지원사업의 경우에는 인건비 전용이 불가능하는 점을 고려한다면, 명백히 시네마루의 경영난을 지원하기 위한 사업에 불과하다.
 
문 제는 제식구챙기기보다 더욱 심각하다. 시네마루가 아닌 다른 극장에서 상영되는 독립영화는 독립영화가 아닌가. 온라인과 같은 가격 수준으로 극장에서 영화관람료를 할인해주는 것은 관객들에게 가격정책의 혼선만을 야기할 뿐이다. 정리하자면, 결국 영진위가 위원장 개인의 식구를 챙기기 위해 독립영화계와 싸우자는 것이다.
 
또 다른 사안을 보자. ‘국제공동제작센터 운영’이란 명목의 사업이 있다. 4년 전부터 각 지역의 영상위원회들이 공동으로 추진해온 ‘국제공동제작센터-전국영상위원회’ 사업에서 이름만 빌려온 셈이다. 영진위와 영상위원회들간의 관계 정립에 대해 토론회 한번 주최하지 않은 영진위가 넉살좋게 사업성과를 가로채려는 것 아닌지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이런 식이다. 도대체 영화진흥을 위한 정책인지, 그나마 어렵게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영화인들의 기를 꺾고 하는 일마다 훼방을 놓기 위한 정책인지 알 수가 없다.
 
그 나마도 각 사업의 세부적인 내용을 영진위 실무자조차 알 수 없다는 상황이다. 문화부가 작성한 예산안을 조희문 위원장이 그냥 통과시켰다고 밖에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영진위가 영화계와 싸우겠다는 예산안을, 영진위가 진흥기구가 아니라 후반작업업체가 되라는 예산안을 조희문 위원장이 통과시킨 것이다. 스스로가 “독립기구의 장”이라며 사퇴를 거부하고 있는 그토록 당당한 조희문 위원장이 허수아비 역할을 자임하며 이런 내용의 예산안을 통과시킨 것은 분명 자리보전 때문일 것이다. 체면과 염치가 있다면 그리고 생각이란 게 있다면, 제발 책임질 일 좀 하시라고 권고하는 바이다.
 
마지막으로, 조직도 생각을 해야 한다. 그래서 정책연구개발이나 R&D사업이 늘 중요하게 인정되는 것이다. 2011년도 예산안을 보면, 영진위의 정책연구 및 통계조사사업 순 예산이 3억이 채 되지 않는다. 어떤 조사를 하고, 무슨 연구를 하고 어떤 정책을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하지 말고 ‘까’라는 문화부의 의중인가. 하긴 영화제작부문 종사자가 1900명이라는 통계(“2009 문화산업백서”)를 들이미는 문화부가 도대체 뭘 알기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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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문화체육관광부는 진정 한국영화의 공적이 되려 하는가?!
 
한국독립영화협회 소식 / 2010.07.16
 
[성명서]
 
문화체육관광부는 진정 한국영화의 공적이 되려 하는가?!
- 2011년 영화발전기금 운용계획에 드러난 일방적 영화정책을 철회하고,
즉각 재편성하라 -
 
새 정부 출범 이후 영화계의 잡음이 끝이 없다. 한국영화 발전에 이바지해야 할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는 일치감치 영화계의 외면을 받고 있는 모양새다. 강한섭 위원장이 불명예스럽게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사퇴했으며, 후임 조희문 위원장을 둘러싼 구설은 올해 초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독립영화전용관, 영상미디어센터, 시네마테크 전용관의 불공정하고 무리한 공모 심사 과정. 칸영화제 수상작 <시>에 대한 ‘0점’처리. 독립영화제작지원 심사과정에 외압 등 다시 언급해도 낯 뜨거운 사건들의 연속이다.
 
현실은 부끄럽지만 한국영화는 희망적이다. 2009년 독립영화 <워낭소리>을 보기 위해 관객 300백만명이 극장을 찾았다. <낮술>, <똥파리> 등 독립영화의 잇단 성과에 대해서는 뜨거운 갈채로 화답하고 응원해 주었다. 2010년 <시>, <하녀>, <하하하>는 나란히 칸국제영화제에 진출하여 의미 있는 성과로 한국영화의 위상을 드높였다.
 
그러나 최근 공개된 영화발전기금에 대한 2011년도 기금운용계획안(이하 ‘예산안’) 공개 이후 영화계는 현 정부의 영화정책에 다시 한 번 심각한 우려를 표할 수밖에 없다. 아니 영진위와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광부’)가 진정 한국영화 진흥을 바라는 지 허탈하게 의심하게 됐다.
 
2011년 예산안에 따르면 한국 영화의 다양성에 기여해 왔던 영진위의 핵심 사업의 예산이 대거 삭감 되었다. 특히 한국 독립․예술영화 제작의 근간이 되었던 ‘독립영화제작지원’과 ‘예술영화제작지원’ 등은 전액 삭감되었다. 뿐만 아니라 독립․예술영화 상영에 앞서왔던 예술영화전용관 사업, 시네마테크전용관 사업, 영상문화의 저변 확대에 앞장섰던 영화단체들의 사업지원 부분이 모두 크게 감소하였다. 다양성사업 부문은 총 63억 가량 감소하여 2010년 대비 55% 축소되어 있다. 예산안 작성 이전 문광부는 영진위 직접 사업을 간접 지원 사업으로 전환할 것을 수차례 예고한 바 있다.
 
영화인들은 간접 지원 자체에 대해 문제제기 하지 않는다. 인프라 증진 사업 또한 매우 중요한 사업이다. 그러나 제작 및 배급 지원 사업 등 직접 지원 사업 부분이 일방적으로 삭감 조치 된 것에 대해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이 사업들은 2000년 초부터 실시, 수년간 영화계와 조율하며 발전해 왔던 사업이며, 10년간의 독립영화와 예술영화 등 다양성 영화의 산실이 되어 왔던 소중한 사업들이다. 특히 독립영화제작지원 사업은 한해 20여편의 독립영화를 생산케 하는 중요한 견인차 역할을 해왔다.
 
지금 영화계가 분노하는 것은 비단 중요 예산이 삭감되었다는 것만이 아니다. 이것이 결정되는 과정에 주체인 영화계가 철저히 배제되고 있다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이다. 심지어 예산안의 작성주체인 영진위 조차도 2011년도 예산안에 들러리였다는 내용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고 있다. 지속적으로 직접 지원을 간접 지원 방식으로 바꿀 것을 표명해 왔던 문광부는 이에 대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만약 영화계의 의견 수렴 없이 일방적으로 강행되고 있는 2011년도 예산계획의 중심에 문광부가 있다면, 문광부는 이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민간적 자율기구인 영진위의 위상을 보장하지 않는 상급기관에 대해 대한민국 영화인을 비롯한 국민들은 냉소적 조롱을 보낼 수밖에 없다. 문광부는 지금이라도 영진위 독립성을 존중하고, 영진위가 영화인의 의견을 수렴하여 세부적인 사업을 집행할 수 있도록 최대한 조력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를 기본으로 문광부 장관의 의무인 ‘영화진흥계획’을 조속히 마련하라! 2011년 예산계획의 파행적 충격은 여기에서 멈춰져야 한다. 이에 대한 피해는 고스란히 기금의 주인인 국민에게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영화의 10년의 미래에 대해 지금 영화인들은 중대한 책임을 느끼고 있다. 그 영화인들이 문광부에 정중히 묻는다. 문광부는 진정 한국영화의 공적이 되려 하는가?! 한 나라에 문화 사업을 책임지고 있는 기관에게 던져지는 이 모순 가득한 질문이 당장 중단되길 독립영화계는 진심으로 바란다. 2011년 영화발전기금 운용계획에 드러난 일방적 영화정책을 철회하고, 즉각 재편성하라!
 
 
2010년 7월 16일
(사)한국독립영화협회
 
2010/07/30 08:22 2010/07/30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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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과 관련한 논쟁, 그리고 어떤 충격적인 정보를 접한 뒤로 다시 찾지 않게 되었지만, 1998년과 1999년에 접한 김규항의 글은 가끔 가슴을 저몄고 충분히 재미있었다. 음악(특히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외치다 대중문화평론가가 된 이들에 대한 회고), 교회, 학교(특히 폭력적인 교사들에 대한 회상), 그리고 영화계에 대한 지적은 공감하기에 충분했다. 아래에 퍼온 어느 글에서처럼, 나도 아버지에게 태백산맥을 구해드린 적이 있는데 (그의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지만) 그렇게 비슷한 경험들이 떠올라서 그의 글이 잘 읽혔는지도 모르겠다. 특히 한대수에 관해서는, 독립영화를 제작하는 한 동료가 ' 박정희 정권의 한국에서 죄없는 사람들-  특히 시인, 소설가, 가수 등 - 이 잡혀가고 매맞을 때 미국으로 도망가서 편하게 음악한 인물' 이라고 거침없이 말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던 게 떠오른다. 한대수의 자서전을 구해 읽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씨네21에 연재하던 그의 짧은 글 한 편 정도는 접할 수 있었을텐데 어찌 그리 무서운 오해를 했던 걸까, 아쉬운 대목이다. 암튼, 문화운동에 관련된 몇 가지 자료를 뒤적이다가 그의 오래 전 글 몇 편을 남겨둔다.

 

그 즈음 내 생각이 어디로 어떻게 흘러갔는지 알 수 있는 몇 가지 흔적들 중 하나. 자신이 통렬하게 비판하던 어떤 무리들 속에 들어서버린 한 인간을 보는 것이 나인지 아니면 바로 그 인간이 나인지 생각해봐야할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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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인들, 록을 고르다

 
한국의 지식인들이 록에 열중하고 있다. 노래라곤 <광야에서>나 <아침이슬> 밖에 안 부르던 사람들이 록을 듣는다. 한국의 지식인들을 대변한다는 한겨레신문사는 '신중현 헌정공연'을 주최했다. 한국의 지식인 사회에서 록은 지적이고 저항적인 음악으로, 쓸 만한 예술양식으로 여겨지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90년대 들어 게임이 끝났음을 감지한 80년대의 문예활동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변신을 서둘렀다. 조직활동을 내세우던 사람들답게 청산 속도도 빨랐다. 문화예술 활동가들 가운데 순진한 몇몇은 절망감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기도 했으나 인생을 경영할 줄 아는 이들은 자신들이 버린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적당히 차용하는 대중예술 평론가로 명함을 바꿨다. 강철 같은 '사회주의 문예활동가'가 시침 뚝 떼고 '의식 있는 대중예술 평론가'로 변신하는 모습은 분명 보기 민망한 일이었지만 피차 살아보겠다고 작정을 하고 한 일이니 만큼 서로 지난 일을 언급하는 일은 금했다. 

대중음악 부분은 틈새시장이었다. 김현식이 죽자 상황판단이 빠른 이가 재빨리 대중음악 평론이라는 아이디어 상품을 내놓았고 언더그라운드 음악이 각광을 받는 분위기와 맞물리며 히트상품이 되었다. 80년대 운동권 노래를 계속 부르기도 썰렁하고 무식하게 대중가요를 무작정 따라 부르기도 난처한 지식인들에게 대중음악 가수나 곡에 대해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의미를 부여해주는 평론과 연구들은 위안을 주었다. 

언더그라운드 대중음악이라는 소재가 재탕 삼탕 되다가 대중음악계를 무협지로 묘사하는 과정을 거쳐 자연스럽게 록으로 옮겨갔다. 처음엔 '이승철과 다섯 손가락'하는 식의 실수가 빈번했지만 역시 고도의 지적 기능 훈련을 받은 사람들답게 금새 '문제는 록정신이다'라는 구호로 발전되었다(10여 년 전엔 '문제는 리얼리즘이다'였지 아마). 록의 불량함과 저항성은 사회적인 것으로만 해석되었고, 거기에 힘입어 텔레비전 카메라에 침을 뱉는 밴드가 나오고 음악은 엉망이지만 밴드의 존재 이유는 멋지게 설명하는 희한한 지식인용 밴드가 양산되었다. 

그렇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70년대엔 탈춤과 마당극을, 80년대엔 소비에트나 북조선의 집체극을 진보적인 예술양식으로 선택했던 지식인들은 이번엔 록을 고르게 된 것이다. 이해하기 힘든 일은 지식인들의 끊임없는 변화에도 대중들은 한치의 동요나 불만이 없다는 것이다. 언제나 지식인들은 대중성의 문제를 고려해 왔고 대중을 선도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심지어는 대중성에 대한 의견 차이로 조직이 깨지는 것도 불사했건만 슬프게도 뒤에 따라오는 대중은 단 한 명도 없었던 모양이다. 

알고 보니 대중예술 평론이란 실제 대중예술이나 대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으로 지식인이 쓰고 역시 지식인들이 읽기 위해 만들어 낸 대중예술의 해석판 같은 것이었던 모양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역사'가 아니라 '역사책'이었던 것이다. 

논리적인 근거나 타당성 없이는 행동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지식인들이, 익숙하지 않은 대중예술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평론과 연구라는 고유의 해석판이 필요할 것이다. 또 한때 혁명을 꿈꾸던 사람들이니 만큼 끊임없이 '대중'을 이야기하고 연구하는 행위가 마음의 편안함을 준다는 것도 인간적으로 이해 안가는 바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로 대중을 선도하거나 아주 조금이라도 연관되어 있다는 기대는 버려라. 어차피 다시 혁명하자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 씨네21 1998년_3월
 

 

"이걸 읽으면, 이 양반이 뭔가..." 10년쯤 된 일이다. 선배한테 빌린 <태백산맥> 열 권을 아버지께 내밀었다. 읽을거리를 구해 오라는 아버지의 부탁을 이용하여 아버지의 소시민적인 의식에 파문을 일으켜 보려는 수작이었다. 그런데 웬걸. 다음날 아침 그 책들은 모두 내 책상 위에 쌓여져 있었다. 

(의아한 표정의 아들)"왜, 재미없으세요?"/(조금 미안한 표정의 아버지)"응"/(의혹에 찬 표정의 아들)"왜요?"/(귀찮은 표정의 아버지)"조금 읽어 봤는데, 너무 뻔해..."/(이 양반이 보수성을 드러내는구나 하는 생각에 열 받은 아들)"뭐가 뻔해요."/(딴 데를 보며 그러나 단호한 목소리의 아버지)"아, 옛날에 다 본 얘기야"/"(아들)..."

아차, 아버지의 고향이 거기였구나. 일단 꼬리를 접긴 했지만 기분은 개운치 않았다. 400만이 넘는 사람들이 읽고 감동했고, 파시스트들의 집요한 공격으로 그 빼어난 '리얼리즘'이 방증되었다는 이 대작품이 뻔하고 재미없었다... 아버지의 반응은 나에게 오랜 의문으로 남았다. 

"청년이라면 밤을 새워라/이제 대학생이 되셨다면/조국의 교과서로 불리는/조정래 대하소설/태백산맥과 아리랑을 읽어 주십시오." "끝없는 감동의 물결/독자 400만" "선배들이/인간을 사랑한 순정/태백산맥의 골짜기마다 숨어 있다./선배들의 조국에 대한 고뇌/태백산맥만이 증거 한다."

며칠 전 신문에서 본 <태백산맥>의 광고 덕에 나는 묵은 의문을 풀 수 있었다. 좀더 정확히 말해서 나는 리얼리즘에 대한 한 '편견'을 마련함으로써 내 속을 다스릴 수 있었다. 98년도 대학 새내기들에게 소설책을 팔기 위해 "조국의 교과서"라는 표현을 쓰는 업자들에 대한 언짢음 때문이었을까? '편견'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리얼리즘은 지식인을 위해 마련된 장치이다. 비록 책상에 앉아 담배나 빨고 있지만 마음만은 칼바람 부는 벌판과 총탄이 빗발치는 계곡을 달리고 싶은 지식인의 당연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가상현실 체험이다. 

광고는 계속된다. "98년도 대학 새내기 여러분. 여기에 <미스트>나 <레이븐>을 능가하는 자랑스러운 우리의 리얼리즘, <태백산맥>과 <아리랑>이 있습니다. 누구든 책장만 펼치면 '선배들'과 함께 '태백산맥 골짜기와 만주벌판'을 누비며 그들의 '순정과 고뇌'를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신통한 리얼리즘도 아버지를 흥분시킬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짐작컨대, 열 권의 책을 받아든 아버지는 첫 권을 펼치자 이내 "옛날에 다 본" 이야기임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의식'에 어떤 형태로든 적극적일 수 없는 소시민인 아버지의 유일한 선택은 그 소설을 피하는 것이다. 결국 아버지는 <태백산맥>이 '뻔하고 재미없었던' 것이다. 어제 저녁에 구한 책을 날이 새기 무섭게 돌려 줄 만큼. 

그러나 영상시대 지식인의 머리통은 그리 단순하지 않아서 <태백산맥> 같은 유장한 리얼리즘만으론 모자람이 있다. '책상 위의 역사'를 더욱 장엄무비하고 의미심장하게 만들기 위해선 바로 지식인 자신의 '일상의 진실'을 그린 리얼리즘이 곁들여져야 한다. 

먼저 책장을 넘겨 태백산맥이나 만주를 달려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뭔가를 한껏 느낀 다음, 바로 리모콘을 눌러 힘있는 강원도나 우물에 빠진 돼지에 낄낄거리며 담배연기를 길게 뿜는다. 비로소 지식인은 비분강개에다 나약한 자신을 자조하는 웃음마저 곁들인 완벽한 지성미를 갖추게 된다. 리얼리즘은 리얼하다. | 씨네21 1998년_3월
 
 
나는 하드록이 좋다. 레인보우의 8분 27초 짜리 <스타게이저>를 틀고 눈을 감으면 심장 근처로 고압전류가 흐르고, 드럼을 두들겨 살아있음을 확인하던 20여 년 전으로 돌아간다. 그 시간만큼은 개점휴업 중인 출판사의 알량한 발행인이 아니고 한달 내내 이자 챙기기에 녹아나는 불량거래 직전의 채무자도 아니다. 그 시간만큼은 나도 한 록 하는 로커이고 국가와 사회가 감당 못할 날라리이다. 

1985년의 청년은 하드록을 들을 수 없었다. 식민지에는 민족적인 문화와 매판문화가 존재할 뿐이었다. 나는 하드록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의 오염된 육체와 정서가 부끄러웠다. 어느 날 밤, 나는 책상 옆에 놓여져 있던 스네어 드럼을 치우고 분연히 일어나 민족음악을 찾아 나섰다. 맨 먼저 한 일은 마샬 앰프의 살인적인 출력에 늘어나 버린 나의 귓구멍을 대나무와 오동나무 그리고 쇠가죽 따위에서 내는 단출한 소리에 맞춰 다시 뚫는 것이었다. 휴학생이었고 시간은 많았다. 매일 밤 FM의 국악 프로그램을 듣고 또 그걸 녹음해선 온종일 듣기를 여러 달, 내 귀는 드디어 새로운 음악을 즐겁게 수용하기 시작했다. 

내 귀는 민속악보다는 정악을 좇았다. 김성진의 정악 대금은 나를 사로잡았다. 몇십 년을 주인의 침에 삭은 쌍골대가 어떤 관념적인 틈새도 없는 윤기로 <상령산>을 울리자 나는 전율했다. 얼마간의 미장 데모도 노릇으로 나는 대금을 살 수 있었다. 단단하고 묵직한 몸에 삼현육각이 새겨진 놋쇠 덮개가 덮인 대금을 손에 넣고는 감격의 눈물을 찔끔거렸다. 입대가 한달 앞으로 다가오자 나는 최선을 다했다. 국악원에 출근하다시피 열심히 강습을 받고 밤새 혼자 연습하고 대금의 조카뻘인 단소를 수십 개씩 만들어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도서관을 뒤져 대금에 관한 온갖 문헌을 찾아내기를 계속했다. 

군대 내무반에서 대금 연습을 하리라는 내 계획은 대한민국 육군을 졸로 보는 꿈이었음이 입대하던 날 밤 밝혀졌다. 무슨 운명인지 대금 연습을 포기한 건 저 산밑의 일이고 나는 다시 드럼을 치게 되었다. 사병들의 춤을 위해선 <젊은 그대>, <아파트>, <배드 케이스 오브 러빙 유> 따위를 연주하고 이따금 지원되는 스트립걸을 위해선 <모나코>를 깔았으며 장교놈들 회식을 위해서는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로 봉사했다. 군부정권하의 군대를 위해 문선대 노릇을 하는 일에 대한 거리낌은 없었다. 나 또한 군바리였고 나는 나의 드럼에 맞춰 미치게 몸을 경련하는 불쌍한 전우들을 위해 기꺼이 팔다리에 쥐가 나도록 드럼을 두들기고 또 밟았다. 

3년을 총 대신 드럼스틱으로 때우고 나와선 이른바 노동자 문화운동 하는 조직에 들어가 보니 음악팀에선 놀랍게도 전기기타 신디사이저 드럼을 사용하고 있었다. 몇 차례 공연을 따라다니며 드럼을 치기도 했지만 내 생애에 가장 불편한 드럼이었다. 나의 음악정신은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얼마 후에 거길 그만두고 다시 한 해를 놀 때는 또 대금을 만지작거렸다. 90년대로 넘어와 이른바 진보적 영화도서 출판을 시작하고부터는 맥없이 여러 음악을 전전했다. 퓨전재즈, 다음에 블루스, 다음에 서양 고전음악, 그 다음에 재즈 하는 식이었다. 그리고 1998년, 나는 다시 하드록을 듣는다. 

대금을 꺼내는 일은 드물어졌고 <영산회상>도 일주일에 한번 들을까 말까다. 대금을 꺼내고 <영산회상> 시디를 넣고 하는 일이 피곤하기 그지없고 그 이유를 생각하면 더욱 피곤해질 뿐이다. 하여간 당분간 '우리 것'은 그다지 듣고 싶지 않다. <서편제>가 뜨고 이른바 국악붐이 일면 명절날 방문객을 맞는 고아가 된 것 같고 쇠락한 고향을 밝히기를 부끄러워하는 잡놈이 된 것 같다. 나의 음악유전이 이 나라의 역사와 조금이라도 관련을 맺어왔을 거라는 공상을 하면서, 파시즘이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이 염병할 나라에서 정악처럼 사람을 정갈하게 만드는 음악을 듣는 일은 코미디이고 잔혹극이라는 생각도 든다. 

나에게 아직도 한줌의 음악 정신이 남아 있다면 얼마간 어질러진 채로 놔두고 싶고 그래서 거듭하는 게 하드록이다. 한없이 몽롱해 하면서도 머리와 입으로 록에 붙어먹으려는 놈들에 대한 살의를 풀지 않는 걸 보면 아무래도 나의 음악유전은 몹시 피곤했고 음악에 관한 한 나는 임포 증세를 보이는 것 같다. | 씨네21 1998년_4월
 
 
한총련을 보면 기분이 좋다. 그들의 노선이 아니라 'GUESS' 모자와 'NIKE' 티셔츠를 입고도 '자주'를 외치는 그들의 분방함이 정말 좋다. 필자가 학교 다닐 무렵의 운동권 학생들은 밝고 화사한 빛깔이나 영문이 들어간 옷을 입는 것은 금기였다. 집회에 모인 학생들은 모두 '심각한' 빛깔의 옷을 입었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마치 유니폼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 같은 담배를 피웠고 같은 음악을 들었으며 같은 노래를 부르고 같은 소설을 읽고 같은 공연을 봤고 같은 어휘로 말했다. 

파시즘은 어디에 있는가. 파시즘은 이른바 5,6공 인사나 한국논단 같은 극우집단에만 남아 있는가. 천만에, 파시즘은 우리 안에도 남아 있다. 파시스트 치하에서 몇십 년을 보내면서 우리는 파시스트와 닮아 갔고 파시즘은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있다. 구제금융을 부른 '국가'가 그 원인을 '국민의 과소비'라 둘러대면 '국민'은 가슴을 치며 금가락지를 빼들고 방송국에 간다. '국민'의 대다수인 근로대중들이, 30여 년을 경제개발 현장에서 뼈빠지게 고생만 하던 사람들이 요 몇 년 아이들과 놀이동산 몇 번 가고 갈비도 사먹고 한 것이 구제금융의 원인인가. 우리 안의 파시즘은 우리를 한없이 비굴하게 만든다. 

한 대중음악 평론가가 말한다. "우리 나라에서 뜨는 노래 절반이 일본 곡 표절인데 지금 전면 개방하면 그게 다 밝혀질 거고 그러면 국민들은 배신감 때문에 우리 가요에 등을 돌릴 거다. 개방을 미뤄야 한다." 이런 게 바로 우리 안에 남은 파시즘이다. 여당 쪽에서 일하는 선배가 개인 의견임을 전제로 물었다. "미국영화 막는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잖아, 자생력을 길러야 한다고 하지만 개방해서 경쟁하게 하는 게 근본적으로 자생력 기르는 거 아니냐?" 그 선배는 나를 일종의 영화인으로 보고 물었지만 그다지 영화인이 아닌 나는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러고 얼마 동안 만나는 사람마다 그 문제를 물었다. 놀랍게도(아무래도 나만 놀란 것 같다) 하나같이 개방이 바람직하지만 그걸 '주장'할 순 없다고 답했다. 이런 게 바로 우리 안에 남은 파시즘이다. 이젠 물어야 한다. 이른바 '민족'의 이름 하에 덮어 둔 한국 대중문화 '업자'들의 '무능'과 '배신'에 대해 물어야 한다. 그들의 정조가 과연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 정조인지 따져봐야 한다. 

세상의 모든 파시즘은 언제나 '민족'이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강북에 가본 강남의 중딩이 통신에다 소감을 썼다. "강북 형들 넘 무섭게 생겼당. 다신 안 간당..." 이 중딩과 점심을 거르는 강북의 고딩이 과연 같은 민족인가? 오늘 아침 농성장에 출근하는 노동자와 반성하지 않는 자본가가 굳이 같은 민족이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이라는 테두리 안에 사는 사람은 무조건 같은 민족이라는, '한국'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생겨나는 것은 모두 민족적인 것이고 보호할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파시즘을 부른다. 전두환이 광주를 토벌하며 더러운 집권욕을 드러낼 무렵 주한미군 사령관 위컴이 지껄였다. "한국인들은 들쥐와 같다. 들쥐의 습성은 한 마리가 맨 앞에서 뛰면 덮어놓고 뒤따라가는 것이다." 위컴은 '망언'을 사과했지만 '들쥐들'은 18년 동안 덮어놓고 맨 앞에서 뛰는 놈만 따라다녀 왔다. 파시즘은 우리 안에 남아 있다. | 씨네21 1998년_5월
 
 
거들고 있는 웹진의 인터뷰 리스트에 한대수를 올려놓고 이 사람은 뉴욕에 사니까 팩스나 인터넷으로 인터뷰를 해야겠구나, 그런데 연락처를 어디다 알아보나 하며 혼자 흥미진진해 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한대수가 자서전을 냈다. 나는 인터뷰 계획을 취소하고 대신 한대수의 자서전을 읽는 기쁨을 얻기로 했다. 한대수가 자서전을 내다니. 

초등학교 5학년 때던가. 나이에 걸맞지 않은 실존적 고민에 빠져 꼬박 1년을 가위눌려 살았던 일이 있었다. 어느 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고 '낭만적인 힘'을 얻었다. 누구 노랜지 제목이 뭔지 알 도리가 없었지만 그 노래에 감사했다. 그 노래는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였다. 10년쯤 전. 열정의 음악사가들(모든 음악 생산물에 역사적 의미를 잣대로 별을 매기는 사람들. 신중현에게 '이제 보니 위대한 록'이라고 적힌 별을, 산울림에게는 '다시 보니 창조적 록'이라는 별을 달아준 바 있다. 이제 그들은 한대수에게 '돌아온 포크록의 생부'라고 적힌 별을 달아 준다.)이 한대수를 "이 땅의 현실에 뿌리박지 못하고 행복의 나라(미국)로 떠나 버린" 쪼다로 폄하한 글을 읽었다. '반동으로 몰린 은인'을 바라보며 나는 절망했다. 그리고 지난 해, 이소라 숀가 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드디어 한대수가 노래하고 자기 얘기를 하는 걸 볼 수 있었다. 

한대수는 좀더 살이 붙고 좀더 이마가 벗겨졌지만 여전한 장발과 부츠 차림이었다. 그는 특유의 걸걸하고 강한 경상도 억양으로 자신의 옛 노래들과 <노 릴리전>, <에이즈 송> 같은 새 노래들을 불렀고 사회자의 질문에 따라 예술과 자유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바람'처럼 '자유'롭게 그러나 기품 있게 말함으로써 깊은 울림을 얻고 있었다. 나는 지식인이 혹은 예술가가 입을 벌린다는 게 발언한다는 게 저런 거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 깨달음은 내가 서른 일곱 해 동안 이 나라의 사람들로부터 전혀 얻을 수 없었던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나의 초등학교 1학년 담임은 자기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잃어버리자 아이들을 하루 종일 변소에도 못 가게 하고 교탁에 엎드려 울었다. 울다가 한번씩 우리를 노려보던 그 추한 눈빛을 난 잊을 수 없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선생들은 언제나 자기 한 몸 건사하기 힘든 인격을 폭력으로 벌충하는 그런 인간들이었다. 학교 다니는 일이 끝나고 문화계 언저리에서 건달 노릇을 하게 된 후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사회의 선생'이 학교 선생과 다른 건 때리지 않는다는 점뿐이었다. 장엄한 예술가 선생은 알고 보면 장엄한 정신지체아였고 존경받는 인격자 선생은 실은 공명심과 출세욕만으로 채워진 인격장애자였고 입만 열면 역사를 말하는 열혈지사 선생은 자기 아내와 자식한테서조차 존경받지 못하는 불쌍한 생쥐였다. 이 나라의 더러운 역사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기로 했지만 그들 덕분에 나는 적을 보며 비분강개하는 일보다는 우리 안의 위선을 조롱하는 일을 더 즐기는 비틀린 사람이 되었다. 

한대수의 자서전은 정직했다. 그는 쪼다가 아니었다. 그가 이 나라에서만 살던 사람들보다 먼저 '자유'와 '바람'을 먹었다는 게 언제나 문제였지만 그 역시 그의 죄는 아니었다. 그는 가슴 아픈 성장기를 거친 한국 소년이었고 '빳다'를 치는 한국 군대에 다녀 온 유일한 뉴요커였다. 한대수는 남자가 생겨 자기를 떠난 전처의 '그 남자'가 곤경에 처하자 그를 집으로 데려와 먹이고, 나중엔 '그 남자'와 헤어지고 신경쇠약에 걸린 전처를 새 아내와 사는 집으로 데려와 보살피는 어처구니없는 사람이었다. 불의 열정으로 인생을 채워 온 그 '야수'가 말이다. 한대수의 50여 년 생애의 얼개가 한 조각씩 드러날 때마다 나는 '인간 한대수'에게 한걸음씩 다가가고 있었다. 최영미는 죽은 김남주에게 "선생님 차라리 잘 돌아가셨어요"라고 적었지만 나는 여전히 살아 있는 이 멋진 사나이에게 무릎 꿇고 말한다. "형님, 절 거두어 주십시오." | 씨네21 1998년_7월
 
 
박노해가 다시 세상에 돌아오는 과정은 몇 가지 단계로 이루어졌다. 먼저 박노해는 나오기 일 년쯤 전에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수상집을 펴냈다. 추기경이 추천사를 쓴 그 책은 박노해에 대한 세상의 경계심을 풀어주었다. 정권이 바뀌고 양심수 석방문제가 불거질 무렵 박노해는 법무부장관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편지 내용은 "공개할 수 없다"는 말과 함께 공개되었는데 "한 때 극단적이고 편협된 사고를 가졌던 점을 인정하며 새 삶을 모색하고 싶다"는 반성문이었다. 뒤이어 박노해는 '준법서약서'를 썼다. 그는 준법서약서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으며 그걸 안 쓰는 건 "유연하지 못한 태도"라고 했다. 출감하는 날, 박노해는 '다시' 언론사에 편지를 돌렸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입니다. 힘내십시오. 사랑합니다." 파시스트들이 애독한다는 <조선일보>는 그 편지를 '감동'이라고 뽑았다. 모든 단계는 주도면밀했고 매체를 다루는 솜씨는 그가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임을 방증했다. 

"7년 살고 박노해처럼 된다는 보장만 있다면 감옥살이 못할 놈이 누가 있냐." 초장에 한대 패서 재우는 건데. 친구는 민망하게도 장세동이 옥살이할 때마다 전두환으로부터 위로금을 받았다는 얘기를 박노해한테 빗댄다.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건 박노해만 몰랐던 거 아냐." "농촌 공동체? 소리 없이 하고 있는 양반들 많아. 하루 다섯 시간 노동? 쌍팔년에 러셀이 한 얘기고. 도대체 새로울 게 하나도 없잖아." 틀린 얘기는 아니었다. '돌아온' 박노해는 '변화'가 가장 주요하다고 했지만, 정작 그가 정색을 하고 하는 얘기들 가운데 새로운 건 없어 보였다. 나는 십오 년 전의 김지하를 떠올렸다. 오늘 김지하와 그의 생명사상은 어디 가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주인이 서비스라며 비단조개를 몇 개 갖다주자 친구의 목소리는 한 단계 높아지고, 소주잔만 비우며 "조개나 먹어 자식아" 하던 나도 왠지 울컥해서 거들기 시작했다. "<노동해방문학>하던 아무개는 종적을 모른다더라. 그래도 염치를 아는 사람이지." "사노맹도 다 나온 게 아냐. 한 명은 안 썼어." "준법서약서 얘긴 하지마 자식아." "썼다고 욕하는 게 아니라, 쓴 게 자랑은 아니지 않느냐는 거야. 안 쓴 사람들이 엄연히 있는데 말야." "강용주라고 우리하고 동갑내기 장기수 말야. 자기 어머니한테 쓴 편지 읽어봐라. 너나 나나 대가리 박고 칵 죽어야 돼." "이상해. 독립운동이고 민주화운동이고 어떤 놈은 3대가 망하고 어떤 놈은 혜택받는단 말야." "그게 바로 인생 경영 아니겠냐. 그것만 되면 맑스주의 아니라 친일 경력도 일생에 보탬이 되는 거야." 우리의 삶이 버려진 조개 껍질보다 시시해서였을까. 우리는 점점 취해만 갔고 주장은 주정으로, 주정은 다시 공전해갔다. 

돌아오는 길. 사지를 못 가누며 연신 "조개나 먹어라 새끼들아"만 되내이는 친구를 부축하다가 나도 힘이 빠져 주저앉았고 이내 둘은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별이 총총하게 박힌 하늘을 보며 친구가 중얼거렸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었다. 망할 자식. "하나님의 나라는 여러분 마음속에 있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싸우는 사람의 영혼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랬다. 유토피아는 점심을 거르는 아이들을 알면서도 오늘 점심은 뭐로 때우나 고민하는 시민들의 구차한 삶 속에도,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전직 혁명가의 새삼스러운 외침 속에도 없다. 유토피아는 "아무 것도 아닌" 준법서약서 한 장 못 쓰고, 아들을 기다리는 칠순 어머니에게 "오래 사셔야 돼요."라고 말하는 내 동갑내기 장기수의 영혼 속에, 사람들이 '미망'이라 비웃는 그 고결한 영혼 속에나 있다. 주여, 갇힌 자에게 은총을. | 씨네21 1998년_9월
 
 
외할아버지는 한일합방 되던 해 태어나 해방되던 해 돌아갔다. 일제 치하에서만 살았던 셈이다. 내가 볼 수 있는 유일한 외할아버지의 모습은 면사무소 앞에서 일본 관리들과 찍은 사진이다. 가운데는 콧수염에 긴칼을 든 순사가 근엄하게 앉아 있고 그 옆에 외할아버지가 사진 찍기 싫은 얼굴로 앉아있다. 초등학교 때 이 사진을 처음 보고 어머니에게 외할아버지는 친일파였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웃으며 말했다. "글쎄, 일본 사람들하고 일했지만 그 사람들이 가장 불편하게 여기는 분이기도 했다. 밖에선 한없이 고지식했지만 집에선 믿기 힘들만큼 부드러운 분이었지. 항이가 외할아버지 닮았구나." 

외할아버지는 도벌꾼을 막기 위해 산골마을을 찾아다니면서 실사를 벌이다가 트럭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고 결국 늑막염이 되어 돌아갔다. 전라도의 덕망 있는 유학자였던 외증조 할아버지는 공부를 작파하고 돈놀이로 연명하기 시작했다. 남편의 모든 것을 불태운 외할머니는 어린 자식들에게 당신의 처지를 한탄했고 아버지의 무덤에 못 가게 했다. 감성적이고 예민한 어머니에게 그것은 그대로 상처가 되었다. 다섯 해 후 내려온 인민군은 '지주이자 고리대금업자'인 외증조 할아버지를 가두고 재산을 몰수했다. 집안의 젊은이들이 모조리 좌익이었음에도 외증조 할아버지를 빼주진 않았다. 그들은 대부분 산사람이 되어 싸우다 죽었다. 토벌대에 잡힌 몇몇은 '와이로'(우익 고유의 생활문화인)를 써서 살아남았다. 외증조 할아버지는 얼마 못 가 화병으로 돌아갔고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어머니가 나를 당신 아버지와 닮았다고 한 얘기에 '닮기를 바라는' 소망이 더 깊게 베어 있음을 깨달은 건 서른이 다 되어였다. 어머니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지만 좌익에 대해 뿌리 깊은 선망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간 다음 의지하고 따랐던 집안의 좌익 오빠들 때문이다. 그들이 인간적으로 얼마나 멋진 사람들이었는지 떠올리는 어머니의 눈은 꿈을 꾸는 듯 하다. 어머니는 그렇게 외할아버지의 추억에 좌익 오빠들의 추억을 보태 놓고 당신 아들이 그리 되기를 바랬던 것 같다. 자라면서 어머니로부터 뭘 하라거나 하지 말라거나 하는 말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어머니의 가르침은 언제나 같았다. "정의롭게 살아야 한다. 불의를 보고도 참는다면 남자가 아니다. 어떤 경우에도 비굴해지면 안 된다." 그 말을 매일 같이 들을 무렵엔 그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 그 말을 충분히 이해하는 나이가 된 나는 그렇게 살지 않는다.

어머니는 (요즘 말로 하면) 당신 아들이 좌익 인텔리가 되기를 바랬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좌익도 인텔리도 되지 못했다. 좌익인 듯할 뿐 좌익이 아니며 인텔리인 듯할 뿐 인텔리가 아니다. 글만 쓰면 파시스트를 저주하고 중산층을 까고 지식인을 비꼬고 근로대중을 한없이 지지하지만, 그 글은 방구석에 앉아 세상을 재단하는 부도덕을 깔고 있다. 어머니의 가르침은 실패했다. 이제 늙고 병든 어머니는 아들의 곤궁함에 노심초사하면서 출근한 며느리를 대신해 조용히 아이를 본다. 어머니는 더 이상 '불의'나 '비굴'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대신 나는 일용할 양식을 벌기 위해 거의 매일 그 '불의'와 '비굴'과 교접한다. 돈이 된다면 재벌에도 몸을 팔고 파시스트에게도 웃음을 판다. 다만 이따금, 아주 이따금씩만 더러운 꼴에 생지랄을 할 뿐이다. 어머니의 가르침은 흔적으로만 남아있다. 

정말이지 어머니의 가르침은 실패했다. 그 가르침을 떠올리면 눈물이 난다. 그럴 때면 나는 다섯 살 짜리 딸, 김단을 방으로 부른다. 그리고 김단을 안아 올려 입을 맞춘 후 말한다. "단아, 힘없는 동생들한테는 친절하고 나쁜 오빠들하고는 용감하게 싸울 줄 알아야 훌륭한 언니가 되는 거야." 김단은 그 말을 할 때면 세 번에 두 번은 딴전을 피우고 한번쯤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본다. "그럼 용감한 사람이야, 아빠?" 김단은 겁이 많지만 그 겁만큼이나 용감하다는 말을 좋아한다. 나는 비로소 안도한다. "이 아이가 나보다는 낫겠구나." 가르침은 계속된다. | 씨네21 1998년_10월
 
 
게이 후배가 있다. 칠 년 전 어떤 책을 번역해보겠다고 찾아 왔을 때 해사한 얼굴에 주황색 사파리가 인상적이었다. 바로 일을 진행했으나 얼마 후에 다른 출판사에서 책이 나오는 바람에 중단되었다. 딱히 볼일이 없어졌지만 워낙 똑똑하고 호감 가는 친구라 언젠가는 같이 일할 기회가 있기를 기대했다. 그 녀석을 다시 만난 건 삼 년 전이었다. 나는 근근히 버텨오던 영화전문도서 출판을 지속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고 있었고 그 녀석을 찾았다. 

저녁 무렵 대학로에서 만난 그 녀석은 살이 붙고 안색이 안 좋았지만 지적인 분위기를 더하고 있었다. 밥 대신 맥주를 먹기로 하고 골뱅이 집에 들어갔다. 일 이야기에 간간이 '깃발 꼽는 지식인들'을 안주(참으로 질긴 안주) 삼아 네댓 시간을 보냈다. 그 녀석은 내가 말을 하면 조금은 부끄럼 타는 듯한 얼굴로 잠자코 듣고 있다가 선량하게 웃었으며 이따금씩 손뼉을 쳤다. 그날 그 녀석으로부터 받은 느낌은 특별했다. 처음엔 '매력 있군' 했지만, 며칠 후 나는 그 '매력'이 성적인 지점에 닿아 있음을 깨달았다. 성적 취향의 경계란 얇디얇은 것이었다.

그 후론 그 녀석한테서 그런 느낌을 받은 기억이 없다. 그 녀석은 내 앞에서 더 이상 부끄럼을 타지 않았고 술만 먹으면 악을 쓰고 차도에 오줌을 갈기곤 했다. "형, 나 남자 좋아해요." 한달 쯤 지났을까. 그 녀석은 포장마차에서 만취한 채 내게 커밍아웃했다. 나는 그제야 내가 받은 느낌의 원인을 알게 되었다. 그 녀석은 제 애인을 나에게 소개했고 며칠 후 생일파티에 초대했다. 낙원동의 아담한 게이 카페에서 열린 생일파티엔 열댓 명이 참석했다. 열 명 남짓한 게이들이 짝을 이루어 참석했고 '일반'(그들은 이성애자들을 '일반'이라고 자기들은 '이반'이라고 부르더라)은 그 녀석의 여자 친구 둘과 나, 그 녀석의 남자 친구 그렇게 넷이었다. 게이들의 생일파티(네 가지 성이 참석한)는 유쾌했다. 적극적인 이성애자일 뿐인 나로선 그들 가운데 이정섭씨처럼 간드러지게 말하는 친구가 없다는 것부터 신기해 보였다. 돌아가면서 준비한 선물을 내놓고 덕담을 하는 식당 지배인, PD, 철인 경기 선수, 스튜어드, 학생에 백수까지 그들은 그저 건강하고 예의바른 남자들이었다. 그들의 짝짓기가 가진 원시성은 나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들은 성적 매력(육체적 의미만이 아닌)을 기반으로 짝짓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짝짓기에 돈과 계급은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정말이지 그들에게 결혼이 없는 것은 축복이었다. 

그 녀석은 첫 키스를 초등학교 5학년 때 했다고 했다. 남자와 말이다. 내가 여자에게 느끼는 성욕과 안타까움을 그 녀석은 남자에게 느끼는 것이다. 그 녀석과 내가 다른 건 단지 그것뿐이다. 그 녀석은 엑스포만 피는 나를 '변태'라고 놀리곤 했다. 맞는 말이다. 게이가 변태라면 남들 디스 필 때 엑스포 피는, 딱 그만큼의 변태다. 그 녀석은 아직 공식적으로 커밍아웃하지 못했다. 그 녀석이 난 남자가 좋다라고 맘놓고 얘기할 수 있는 세상은 올 것인가. 퀴어 영화제가 번듯하게 열리고 게이 담론이 늘어나는 건 그런 세상이 오고 있는 징표다. 하지만 이미 찬성하거나 이해할 채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끼리 생각을 재확인하고 학습을 늘리는 일이 세상을 개선시키는 건 아니다. 퀴어의 세계는 문화 담론으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과연 누가 변태인가. 꼴리면 하고 땅기면 살고 싫어지면 헤어지는 그들이 변태인가, 돈 때문에 하고 계급 때문에 살고 싫어져도 못 헤어지는 우리가 변태인가. 정말이지 누가 더 변태인가. | 씨네21 1998년_11월
 
 
술자리에서 내가 기독교인임을 밝히면 사람들은 당황한다. 그런 자리에서 그런 얘길 꺼내는 일이 웃기는 데다 나라는 인간이 도무지 교회 나가는 사람처럼 보이는 구석이 없기 때문일 거다. 사람들 짐작대로 나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기독교인이다. 아이가 경기라도 하면 나는 며칠 사이 지은 죄를 떠올린다. 나는 예수에 의지한다. 내가 가진 단출한 지식과 사상을 통틀어 예수의 삶만큼 나를 지배하는 건 없다. 나는 진정으로 사회주의를 소망하고 내 나머지 삶을 연관시키려 하지만 사회주의가 인간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회주의는 영혼을 따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며 나는 기독교인이다. 

내가 처음 교회에 나간 건 중학 2학년 때였다. 교회는 나더러 믿으면 축복 받는다고 약속했는데 그 믿음의 세기와 축복의 양은 정비례한다고 했다. 믿음이란 교회에 열심 하는 것이고 축복이란 돈이나 명예, 건강 따위의 것들이었다. 교회는 욕망으로 물든 담장 밖을 말했지만 실은 담장 밖의 욕망에 찌들어 있었다. 교회는 언제나 영혼을 말했지만 영혼을 얻는 일이 돈을 잃는 일이라면 그마저도 없었을 거였다. 머리가 커가면서 나는 교회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나는 제 새끼만 챙기는, 내 아버지보다 더 이기적인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여전히 교회에 다녔지만 교회가 내 삶에 끼치는 영향은 적어져 갔다. 교회에 다님으로써 일어나는 삶의 변화란 교회에 다니는 일 외엔 없었다. 

내가 한신에 들어간 건 우연이었다. 나는 그곳이 문익환이나 장준하 같은 거인을 배출한 곳이라는 것, 인권운동의 젖줄이자 민중신학의 본산지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고등학교를 마쳤을 때 내 관심은 오토바이와 음악, 그리고 여자에만 있었다. 내일이 없는 삶을 하루하루 태워가던 건달이 그래도 대학은 다니라는 권고를 받아들였을 때 나는 한신에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머리통이 뒤집히는 충격을 받았다. 교회의 사회 참여. 정의의 하나님. 비천한 자들의 예수. 한 소년의 삶에조차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던 교회가 세상의 한 가운데서 세상의 바닥을 갈아엎고 있었다. 나는 비로소 내가 기독교임을 사랑하게 되었다.

보수 교회의 건물에 진보 교회를 칠하는 일은 무리였다. 경악한 목사와 장로들은 내게서 청년부 회보를 만드는 권한을 빼앗았고 나는 교회를 나왔다. 아버지가 눈물을 보였지만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친구 소개로 찾아간 교회는 작았다. 목사는 알려진 소설가였고 50명 남짓한 신도는 지식인들이었다. 나는 지쳐 있었고 새로운 교회의 진보적이고 지적인 분위기는 잠시 나를 편안하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다시 교회를 의심하게 되었다. 광주항쟁 3주기가 되는 예배 시간. 목사는 감동적으로 설교했다. 목사가 눈물을 흘리자 신도들도 울기 시작했다. 예배가 끝나도 흐느낌은 그치지 않았다. 땡. 교단의 종이 울리고 목사는 웃으며 야유회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신도들은 이제 야유회에 맞는 얼굴이 되었다. 장소에다 회비까지 정해지고 드디어 신도들은 개운한 얼굴로 집으로 돌아갔다. 교회는 한줌의 양심과 사회의식을 마스터베이션하고 있었다. 징그러웠다. 나는 교회 문 앞까지 왔다가 되돌아가기를 거듭했다. 나는 청년부 총무였고 두 달만에 교회에 나갔을 때 회원들은 해명을 요구했다. 내가 그들을 바라보았을 때 그들은 모두 내 눈길을 피했다. 

교회에는 예수 대신 맞춤식 예수상(像)들만 모셔져 있었다. 나는 신학을 공부하려던 나의 소망을 접고 입대했다. 그곳에서 세 번의 살인과 세 번의 자살을 생각했고 김씨 성을 가진 여자를 떠나보냈으며 김씨 성을 가진 창녀에게 구혼했다. 이제 십 년이 더 흘러 나는 며칠 후면 서른 여덟이다. 나는 이제 나보다 다섯 살이 적어진 예수라는 청년의 삶을 담은 마가복음을 읽는다. 내가 일년에 한번쯤 마음이라도 편해 보자고 청년의 손을 잡고 교회를 찾을 때 청년은 교회 입구에 다다라 내 손을 슬그머니 놓는다. 내가 신도들에 파묻혀 한시간 가량의 공허에 내 영혼을 내맡기고 나오면 그 청년은 교회 담장 밑에 고단한 새처럼 앉아 있다. | 씨네21 1998년_12월
 
 
전세계 영화인들의 저주와 전세계 영화팬들의 찬미를 먹고사는 20세기의 에덴 동산, 할리우드의 연례 재롱잔치. 오스카 수상식은 보는 사람의 오감을 사로잡는 마력이 있다. 그것은 그 자체로 모든 할리우드 장르 영화의 온갖 컨벤션들을 화사하게 배열한 최고급 종합선물이다. 오스카 수상식은 서너 시간 넘어 하기 때문에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는 버릇을 가진 나는 챙겨보지 않아도 해마다 보게 된다. 그리고 매번 쇼가 무르익을수록 볼거리가 쌓여갈수록 불편함도 같이 쌓여 간다. 자본주의를 거부하기로 한 내가 자본주의의 꽃을 감상하고 있기 때문이며, 전세계 피압박 영화를 지지하기로 한 내가 가해 영화의 자축연에 참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스카는 자족적인 불편함에 기대어 구경을 지속하는 나 같은 사람을 위한 메뉴까지 준비한다. 올해의 메뉴는 엘리아 카잔의 공로상 수상.

알다시피, 엘리아 카잔은 빨갱이 사냥이 극에 달한 1952년, 이른바 하원 반미행동조사위원회에 나가 자신이 좌파임을 시인하고 동료 8명을 밀고했다. 카잔은 54년 <워터프론트>로 오스카 감독상을 받는 등, 영화와 연극을 넘나들며 활동을 계속했지만 '밀고자'로 손가락질 받아왔다. 그를 불리한 처지로 몰아넣은 건 그 자신이었다. 카잔은 52년 하원 증언을 마친 직후 '공산주의는 위험천만한 적들의 음모'라는 광고를 <뉴욕타임스>에 싣는가 하면, 88년 발간한 회고록에선 "그런 기회가 또 다시 오더라도 똑같이 명예로운 행동을 하겠다"고 밝히는 배 째라 식의 행태를 보여왔다.

72년, 좌파라는 이유로 미국에서 쫓겨나 20년 동안 망명생활을 해오던 찰리 채플린이 '영화를 20세기의 예술이게 한 공적'으로 오스카 공로상을 받았다. 채플린의 공적은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그 상은 할리우드가 매카시즘의 피해자에게 정중하게 용서를 구하는 절차이기도 했다. 영화 <채플린>에 묘사된 대로, 채플린이 83세의 노구를 끌고 입장하자 할리우드 영화인들은 열광적인 기립 박수를 보냈고 채플린은 눈물을 흘렸다. 

오스카가 FBI에 의뢰해서 좌석 배분을 한 걸까. 카잔이 입장했을 때, 객석의 오른쪽은 거개가 기립했지만 왼쪽은 팔짱을 끼고 있거나 박수치지 않았다. 머리가 비었을 거라 여겨지던 할리우드 영화인들의 만만치 않은 사회의식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일이었고, 역사 속에서 '이미 확보된 이성'이 '우상이 남긴 상처'를 지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일이었다. 카잔은 "아카데미의 용기와 관용에 감사한다"는 짤막한 인사말을 하고 서둘러 퇴장했다. 

<조선일보>는 그 일을 두 번 언급했다. "엊그제 열린 71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엘리아 카잔 감독이 특별공로상을 받았다. 매카시 광풍에 의해 채플린이 추방된 1952년, 카잔 감독은 자신의 동료였던 공산당원들의 이름을 의회 청문회에 밝혀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카잔의 원죄는 '마녀 (공산주의자) 사냥'이 극에 달했던 52년, 한때 공산주의자였던 동료 영화인 8명을 밀고한 것."

도무지 <한겨레>와 구분할 수 없는 이 공평무사한 표현은 <조선일보>와 그들의 보수 사상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그들은 왜 52년 미국의 메카시즘을 '광풍'이며 '마녀사냥'이라고 하면서, 오늘 한국의 '광풍'과 '마녀사상'을 요구하는 걸까. 그것은 그들의 보수 사상이 세상을 판단하는 신념체계가 아니라, 가진 것을 내놓지 않으려는 혹은 더 많이 가지려는 동물적인 욕망 체계이기 때문이다. 52년 미국의 메카시즘은 내 돈궤하고 아무 상관이 없지만, 오늘 한국의 메카시즘은 내 돈궤를 보존하거나 늘리는 일인 것이다. 새삼스런 얘기지만, 보수 사상이 진보 사상과 대립한다 해서 보수 사상을 진보 사상과 같은 층위에 놓는 일은 터무니없다. 그것은 순수한, 매우 순수한 욕망이다. | 씨네21 1999년_3월
 
 
알고 보면 이번 스크린쿼터 파동이란 골 때리는 일이었다. 스크린쿼터는 GATT는 물론 그 후신인 WTO에서도 인정하고 있는 '문화적 예외 조항'으로 볼 때, 현재로선 어떤 '경제 논리'로도 축소나 폐지를 거론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문제가 안 되는 일이 문제가 된 셈이다. 내막은 문화 의식이 결여된 한국 공무원들이 '공정 무역'이라는 채찍과 '5억 달러 투자'(외자 유치!)라는 당근으로 꼬드기는 미국 공무원들에게 은근슬쩍 땅문서(스크린쿼터라는) 내주려다 소란이 난, '실화'보다는 '야담'에 가까운, 그런 일이었다. 

영화인들은 전례 없이 단결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들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싸웠냐 하면 '자신들의 모습에 자신들이 놀랄 정도'라고 했다. 두 달이 넘게 계속된 영화인들의 싸움은 공무원들이 꼬리를 빼고 국회 결의안이 관철되고서야 일차 마무리되었다. 농성을 풀며 영화인들은 "국민의 지지를 얻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영화인들이 제아무리 열심히 싸웠던들 국민들이 외면했다면 결과는 전혀 달랐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이 왜 이리도 민망한가. 

과연 한국 영화인들은 '국민의 지지'를 받을 만한 사람들인가. 제 밥그릇이 걸린 일에는 '자신들이 놀랄 정도'로 열심인 영화인들은 남의 밥그릇에는 어떤 관심을 보였던가. 자신들의 불행을 언제나 민족이라는 이름에 호소하는 영화인들은 정작 민족이 불행할 때 어디에 있었던가. 이번 싸움에서 할리우드 영화를 '독점 자본'으로 해석하는 참신함을 보인 영화인들은 다른 업종의 노동자들이 진짜 독점자본과 싸울 때 무엇을 도왔던가. 이번 싸움에서 한국 영화를 '민족 고유의 것'으로 해석하던 영화인들은 농민들이 신토불이를 외치며 미국쌀과 싸울 때 어떤 지지를 보냈던가. 이 나라의 유한 계급을 뺀 모든 백성들이 불행해진 구제금융 시대가 일년을 넘기고 있지만 그 동안 영화인들은 그 잘난 영화 예술로 세상의 어떤 모습을 그려냈던가. '경쟁력'을 이유로 직장에서 쫓겨나고 가정이 풍비박산이 나고 길거리를 헤매는 이 나라의 백성들이 그런 염치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경쟁력'을 유보하는 아량을 베풀 이유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한번도 사회적이지 않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사회적 혜택은 과연 공정한가. 

이번 싸움을 통해 개발된 영화인들의 자기 논리가 전례 없이 정교함에도, 이번 싸움의 열기가 밥그릇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체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냉소하고 일상의 우연에 천착한다는 지성파 감독까지 연단에 오르는 이변이 생길 리 있었겠는가.('정치 의식'을 초월한 듯 행동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경제 의식' 아래에 머물 뿐이다.) 나는 영화인들의 '경제 투쟁'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 다만 그 경제투쟁이 경제투쟁에 머물지 않기를, 제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그들의 열정이 남의 밥그릇도 함께 생각하는 사회적 지평으로 확대되기를 바란다. 영화인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억울함과 고통을 이 나라의 백성들이 겪는 보편적인 억울함과 고통 속에서 재발견하여야 한다. 영화인들은 이번 싸움을 통해 지켜낸 스크린쿼터가 오로지 영화라는 업종에만 주어지는 소중한 혜택임을, 그들의 장사가 매우 특별한 장사임을 다시금 생각하여야 한다. 그것은 산업의 문제이자 예술의 문제지만, 오히려 '염치'의 문제이기도 하다. 

사족 : 이 만큼 말하고도, 내 속은 여전히 찜찜하다. 한국 영화인들이 농성장에서 함께 흘린 눈물은 모두 같은가. 영화 자본가의 눈물과 영화 노동자의 눈물은 싸움이 끝난 다음에도 연대하는가. 싸움의 성과로 얻어지는 산업적 이익은 함께 흘린 눈물처럼 공정하게 분배되는가. 한국영화인들은 같은 민족인 동시에 같은 계급인가. 한국 영화인들에게는 '상식선'의 정치의식이 필요하다. | 씨네21 1999년_3월
 
 
기독교인임을 자처하는 내가 나라가 시끄러울 만큼 못된 짓을 한 인물이 나오기만 하면 "또 교인이군"하는 게 버릇이 되고 말았으니 정말이지 하느님께 민망할 따름이다. 좌우간 저 옛날 부천서에서 여대생 취조하는 데 희한한 도구를 사용한 문귀동 집사로부터 빨갱이 대통령을 막는답시고 바람을 일으키다 잡혀 들어가 오늘도 성전에 성전을 거듭하고 있는 권영해 장로라든가 소싯적부터 오로지 대통령이 되기만을 간구한 끝에 진짜로 대통령이 되어 끝내 나라를 부도 낸 김영삼 장로를 비롯, 국가적인 규모로 사고치는 인간 치고 교회 안 다니는 인물이 드무니 낸들 어쩌겠는가. 

사정이 그러한데 그 아줌마들, 이른바 낮은 울타리 아줌마들이 교인인 건 되레 당연했다. 낮은 울타리의 모태는 '수요 봉사회'라 하며, '수요 봉사회'란 박정희 시절 만들어진 장관집 아줌마들의 사회봉사모임으로 매주 수요일에 모여 "주머니를 만들고 그 안에 치약이나 칫솔을 넣어 일선 장병한테 보내는"(한겨레) 식의 활동을 해왔다고 했다. 고매한 장관집 아줌마들이 하잘것없는 군바리에게 보낼 치약 칫솔을 주머니에 담는 일을 주마다 해왔다니 건국 이래 이런 갸륵한 미담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 아줌마들이 라스포사니 앙드레 김이니 하는 옷가게에서 50% 할인 혜택을 받았다거나 그마저 다른 돈 많은 이들이 내주곤 했다는 건 그런 노고에 대한 당연한 사회적 보상이라 할 만하다. 하여튼 낮은 울타리는 '수요 봉사회' 아줌마들 가운데서도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아줌마들의 모임이라 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말하길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어찌 그럴 수 있냐지만 그 말씀은 교회가 어떤 곳인지를 몰라서 하는 말씀일 뿐이다. 예수는 부자가 천국에 가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가는 일보다 어렵다고 했지만, 교회는 물질축복은 성실한 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가르치지 않는가. 예수는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언제나 세상에서 천대받는 사람들과 어울려 살았지만, 교회는 세상에서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어선 안 된다고 가르치지 않는가. 예수는 세상으로 나가 세상을 섬기는 빛과 소금이 되라 했지만, 교회는 세상의 더러운 죄를 들어와서 씻어라 하지 않는가. 예수는 집도 절도 없이 동산과 벌판에서 하느님 말씀을 전했지만, 교회는 성전을 짓고 찬란하게 치장하는 일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라 가르치지 않는가. 그 아줌마들, 이른바 낮은 울타리 아줌마들은 결단코 교회에서 가르치는 대로 지키고 실천한 참 신자들인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또 말하길 교회의 가르침이 세상의 욕망과 다를 게 무어냐 하고 심지어는 예수와 가르침과 교회의 가르침이 온통 거꾸로라고도 하지만, 그 말씀 역시 참 신앙의 경지가 무언지 몰라 하는 말씀일 뿐이다. 2천년 전 이스라엘의 가르침은 오늘 대한민국의 생활 형편에 맞추어 살아 숨쉬는 가르침으로 재해석되는 게 당연하며, 백 번을 양보하여 대개의 한국 교회가 수천만을 상대로 하는 거대한 사기조직일 가능성이 있다손 치더라도 하더라도, 진실을 밝히는 게 언제나 은혜가 되는 건 아니다. 만일 기독교인의 삶, 예수를 따르는 삶이 돈과 명예 권력 따위를 얻는 일과는 애당초 거리가 먼 삶이라는 사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조롱 당하며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죽기 십상인 삶이라는 사실이 밝혀질 때의 대혼란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하느님을 경배 드리는 거룩한 성전에 날품팔이 거지 양아치 장애자 매춘부 따위들이 예수의 동무랍시고 몰려들고, 대를 이어 뜨겁게 믿고 정확히 바쳐 온 집사 권사 장로 목사들의 신앙적 프리미엄이 하루아침에 깡통주가 된다면 그 억울함을 무슨 수로 보상할 것인가. 근대 이후 교회를 핍박한 건 언제나 빨갱이들이었고, 성도들은 순교자의 본을 받아 죽음으로 교회를 지키고 또 지켜낼 뿐이다. 할렐루야. | 씨네21 1999년_6월
 
 
지난해 초여름 어느 날이던가. 전화응답기엔 자신들을 독립 프로덕션 '빨간 눈사람'이라 소개한 메시지가 녹음되어 있었다. 다음 날 나는 그들에게 전화했고 <애국자 게임>이라는 다큐멘터리 제작과 관련하여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그들의 요청에 응했다. 광화문 근처 북카페에서 진행된 인터뷰는 어느 새 긴 대화로 이어졌다. 대화는 주로 80년대 문화운동과 그 주역들이 90년대에 어떻게 적응해왔는지 따위였던 것 같다.

그날 이후, 그들은 나를 형이라 불렀고 이따금씩 자신들의 근황을 알려오곤 했다. 올해 초 그들은 <애국자 게임>을 잠시 접고 유가협(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독재정권 시절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목숨을 잃었거나 의문의 죽음으로 세상을 떠난 자식들의 명예회복과 진상규명을 위해 1986년 발족되어 10년이 넘게 싸워 온 사람들)의 여의도 천막 농성을 다큐멘터리로 만들고 있다고 알려왔다. 
올해 5월, 그들은 인디 포럼에서 다큐멘터리 <민들레>를 상영했고 나는 얼마간의 의무감을 안고 그 영화를 보러갔다. 푸른영상의 김동원 선배나 눈에 띨까, 300석 규모의 극장 객석은 거개가 비어 있고 그나마 한편은 유가협 어머니 아버지들이 메우고 있었다.(하긴 90년대 후반의 한국에서 유가협 농성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를 보러 올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민들레>는, 정확히 말해 <민들레>의 소재는 이른바 90년대 후반의 미감을 거스른다.)

<민들레>가 시작되자 이내 나는 그 영화에 빠져들었다. 그것은 영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내가 잊고 살던 '현실'이었다. 내레이션도 어떤 종류의 연출이나 기교도 생략한 채 피사체의 일상을 차갑게 담아낸(이런 걸 두고 다이렉트 시네마라 하던가. 현실을 단독 유치하기 위해 모든 형식적 가능성을 포기하는 영화 말이다.) <민들레>는 내게 치명적인 고통을 주었다. 물론 그 고통은 영화보다는 영화 속에 담긴 현실로부터 오는 것이었다. 

나는 잊고 살았다. 전태일의 어머니가 차디찬 여의도 천막 속에서 한군데도 빠짐없이 골병이 든 육신을 한으로 견뎌가며 일년 째 농성중이라는 사실을. 이른바 지식인 사회(이런 게 있긴 한 걸까)에선 이미 세 번쯤 유행이 지난 그 전태일의 어머니가 말이다. 나는 잊고 살았다. 우리가 달라진 세상을 구가하며 달라진 세상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지껄이는 이 순간, 그 달라진 세상을 만들다 죽어나간 자식을 안고 여의도 길바닥에 화석으로 남은 사람들을. 

<민들레>가 상영되는 내내 나는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웠고, 이 영화가 끝난 후엔 이 고통이 내내 계속되기를 기도했다. 나는 내가 얻은 고통에 어떤 식으로든 보답하고 싶었고 다음 날 가장 신뢰하는 녹음기사 친구에게 <민들레>의 사운드 보정을 부탁했다. 친구는 한푼의 대가도 없이 동료들이 모두 퇴근한 밤시간을 몇 번씩이나 투자하여 정성스레 <민들레>의 사운드를 다듬어주었다. 

며칠 전, 어느 대학에 강연을 갔던 나는 전날 <민들레> 상영에 단 한 명의 관객이 왔었음을 알았다. 그 한 명의 관객은 행복했고 그 영화를 볼 것을 고려하지 않은 수많은 관객들은 불행했다. 나는 독자들께 <민들레>를 볼 것을 권한다. '삭발 시퀀스' 혹은 <민들레>의 다른 모든 시퀀스에 대한 설명을 부러 생략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민들레>를 보는 우리는 90년대 후반의 정신적 더께를 벗겨낼 수 있다. <민들레>는 영화가 아니라 현실이다. 우리가 잊고 사는 바로 그 현실 말이다.

추신 1 : 축하 전화 없음에 항의하는 '빨간 눈사람'의 연락을 받고서야 나는 <민들레>가 제4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다큐멘터리상을 받았음을 알았다. 3년 전 그 영화제의 머슴 노릇을 하던 나는 이런 몰개성한 국제 영화제가 하나 더 존재할 필요란 주최자들의 문화적 허영이나 위한 것이려니 했는데, 어느새 그 영화제는 이 나라의 평균정신을 넘어서고 있다. 

추신 2 : 11월 4일은 유가협의 여의도 천막 농성 1주년이 되는 날이다. 우리는 그날 여의도에 가는 게 좋겠다. 가서 전태일의 어머니나 이한열의 어머니나 박종철의 아버지, 아니 그들보다 덜 알려진 자식들을 담고 화석으로 남은 어머니 아버지들의 손을 잡고 "힘내세요."라고 말하는 게 좋겠다. 그 순간 우리는 우리가 한번 더 힘을 내 살아야 하는 이유를 깨닫게 될 것이다. | 씨네21 1999년_11월
 
  
2010/07/19 14:47 2010/07/19 14: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