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오브 히스토리

  • 등록일
    2012/06/09 02:01
  • 수정일
    2012/06/12 12:49
  • 분류
    의식주

중학교 1학년 때 나를 좋아한 여자애가 있었다. -_-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인 경험이었다. 초등학교 때도 많은 여자애들이 좋아한다고 난리였지만< 중1 때는 더 씨리어스했다. 친구 사이에서 인기 있는 그런 것과 달랐다 역시 공학이 아니라서...

 

암튼 그때 왜인 걸까 나는 공부해서 서울대 가야 한다는 생각이 대가리에 가득찬 1학년이었다. 봄에 소풍을 갔는데 학교에서 지정한 패션 코드가 상반신은 교복에 하반신은 청바지였다. -_- 당시 공부로 머리속이 가득 차서일까 나는 패션에 일 톨 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언니가 몇 년 전 입다 던진 벙벙한 청바지를 주워입고 소풍 집결지에 갔을 때 실망에 가득 찬 나를 좋아한다던 그 애의 시선... -_- 그 애는 당시 초유행이던 일자 진청바지를 크게 접어 입은 상태였다. 큰 실망에도 불구하고 걔는 1학년 말미까지 꾸준히 나를 좋아하긴 했다.

 

나는 걔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나를 좋아한다고 편지를 한 통에 네 장씩 써대던 애의 실망한 눈빛에 수치를 느꼈다. 그러다 여름방학 때 무슨 어디 가서 조사를 해오라고 해서 같은 조원이던 애들이랑 만났는데 나름 초등학교 때 제일 좋아하던 주홍색 바지와 티셔츠도... 예쁜 거 아직도 기억남 매우 초딩스러운 귀여운 걸 입고 나갔는데 그때 또 다른 나를 좋아하던 여자애의 실망한 눈빛을 넘어 대놓고 너 옷이 그게 뭐냐 초딩이냐라는 말... 둘다 나를 좋아했던 주제에 제기랄 1학년 때 패션에 관한 기억은 그 두 번의 수치가 전부이다.

 

초등학교 때로 거슬러가보면 매우 패션에 관심이 많았다. 매일매일 친구랑 전화해서 내일 뭐 입고 갈까, 하고 같이 커플룩을 맞춰 입고 갔던 게 생각난다. 내 방에 도망가서 무선전화로 내일 뭐 입을지 상의하노라면 안방에서 온가족이 전화를 엿듣다 키득거리던 것도 기억나고(무슨 짓이야 지금 생각해도 시르다). 엄마가 사다주는 옷이나 입었지만 다행히 엄마랑 나랑 취향이 맞았다 노란 디스코바지라든가(지금도 입고 싶다), 투피스, 쫄바지에 엉덩이를 덮는 상의(뭐라고 부르더라?) 등등. 제일 친했던 친구랑도 매일 패션에 대해 이야기했던 게 기억난다. 쟤는 내가 산 옷을 사입고 왔다던가.. 내 친구는 심지어 자기와 똑같은 옷을 산 아이에게 요일을 지정해서 이 날은 피하라든가, 뒤집어 입고 오라든가(양면 옷이었음) 하는 요구를 하기도 하였다. 

 

중학교 2학년 들어서는 본격적으로 놀기 시작해서인지 패션에 신경쓰기 시작했다. 어디서 돈이 난 걸까? 내가 기억하는 나는 분명 청렴하고 돈을 쓰지 않는 아이였는데...; 만화를 사보는 것도 점심 싸가서 반남겨서 저녁 먹고 저녁 먹으라고 받은 돈으로 사고, 버스 안 타고 걸어다녀서 모은 돈으로 샀던 건데 내가 과거를 낭만적으로 추억하는 걸까? 분명히 몇 만원을 들고 다니면서 옷을 사제꼈던 기억도 있다. 그런 돈은 엄마가 줬던 걸까? 아니 아마 설날/추석 때, 가끔 보는 엄마아빠 친구에게 받은 돈들 모아서 샀던 것일 거임. 나도 친구들 자식들 보면 돈 많이 주는 어른이 되어야지 하고 여러 차례 다짐했던 기억이 있다. 그거 아니면 우리 집 오지도 마<

 

중2때는 본격적으로 브이넥 쫄티와 세미힙합바지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브이넥 쫄티 입고다니다가 급우<랑 길에서 마주치면 오오... 너도 좀 입는 애구나 하는 시선을 주고받았을 정도로 일반적이지 않았다. 연예인도 아니고 일반인이 몸에 딱 붙는 걸 입는다는 자체가 신기한 일이었다. 그러고보니 나시티도 그런 급이었는데 언제부터 해금(?)이 된 건지 현대 사회란 실로...<

 

세미힙합바지는 네 개 정도가 있었다. 당시 패션이라면 무조건 메이커, 메이커!!!! 메이커만이 패션 취급을 받았다. T자로 시작하는 힙합 브랜드를 좋아했는데. 패션 잡지를 탐독하던 시기, 목동에 상설할인매장이 있다고 해서 언니랑 출격했을 때, 양현석 패션이던 p... 머시기에서 대빵만한 가방도 사고(나중에 아빠가 상의도 없이 누구 줘버려서 격노했음) 이후 15년 가까이 입은 벌꿀 티도 사고... 생각해보니 브랜드의 참맛은 언니를 통해 본 것 같다. 이미 중학교 때부터 남자친구를 사귀기 시작하며 끝간데 없이 멋을 부리기 시작했겠지. 너무 비싸서 구경만 하던 서태지의 storm에서 언니는 6만원 넘는 가방을 사기도 했다. 서울 애들은 바닥에 질질 끌릴 정도로 매고 다닌데~!라고 소문이 돌던 그 시커멓고 네모난 사선으로 엉덩이쪽으로 매는 가방. 292513 스톰.

 

나이키 운동화가 너무 신고 싶어서 돈을 모아모아 갔지만, 너무 비싸서 엄두가 안 나서 나이키 중에 엄청 싼 걸 자기합리화하면서 사기도 했다. 예쁘지도 않은 퍼런 걸 나이키 달려 있다고 그걸 사다니. 그때도 10만원 정도 했는데 돈 아꾸워라. 당시 교복 청춘이기도 했지만 패션의 완성은 뭐니뭐니해도 양말이었다. 옷도 브랜드여야 하지만, 브랜드옷을 다양하게 구비할 형편은 안 된다. 그래도 양말, 한 켤레에 4, 5000원 하던 양말만큼은 가난한 학생들이라도 다양하게 구비할 수 있었다. 특히 생일선물 단골 메뉴가 양말이었다. 생일선물도 가볍게 하는 게 아니고, 우리는 어떤 친구가 어떤 브랜드를 가지고 있는지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걔한테 없는 걸 서로 상의해서 사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쯤 되면 감탄스럽네... 친구가 한 두 명도 아니고...-_-

 

내가 아직도 기억하는 당시 어느 시점에 세어 본 나의 브랜드 양말 갯수는 13개이다. 그것도 장농에 박혀 있던 누구 껀지도 모를 르까프까지 합쳐서. 당시에 르까프같은 국산 메이커는 아무도 안 쳐줬지만 아무 브랜드 안 달린 것보단 나았다. 각종다양한 브랜드를 섭렵하다보니 스포츠웨어만이 아니라 골프웨어도 다 섭렵하고 말았다. 양말만큼은 아무리 비싼 브랜드라도 5천원선을 넘지 않았다. 제일 인기 있었던 브랜드는 4,500원짜리 게스였다. 게스 청바지도 완전 죽이지만 그럴 돈은 없고, 게스 양말은 도대체가 번쩍번쩍 윤이 나는 게 너무너무 예뻤다. 몇 번 빨면 빛바래고, 그러면 다시 사거나 선물받아서 다시 번쩍이는 걸 신기도 했다.

 

쨉청바지를 샀던 게 기억난다. 언니 친구 이모가 미국에 산대나? NIX 청바지를 빼돌려서(대체 어디서?-_-) 원래 십만원 넘는 걸 3만원대에 살 수 있다는 거였다. 받아본 닉스는 솔직히 디자인이 구렸지만 닉스, 오직 닉스이기에 당당히 입을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당시에 청바지 가격이 다 십만원이 넘었다는 건... 이 개썅도둑놈들아. 나는 96에서 청바지를 사기 위해 살을 빼고 있었는데(사이즈가 작게 나오기로 유명했다) 결국 살을 못 빼서 입어보지 못 했다.

 

고등학교 졸업반일 때는 다시 공부를 하느라고 살이 너무 쪄서 패션에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다(대학교 때도 지금도 가끔씩 살이 찌면 다 집어치고 아무렇게나 입고 다닌다.). 그래도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다시 패션에 스위치가 켜졌다. 지금 생각하면 무난하지만 나름대로 역시, 라는 말을 몇 차례 들을 수 있게 스카프도 열심히 매고 삔도 꼽고 스키니 입고 노력하였다.(당시 진짜 스키니는 아니고 허벅지만 쪼이고 종아리를 헐렁했음) 그러다 살이 찌면 또 만사를 놓아버리기를 수 년을 반복하다가 어느날 남은 20대보다 지난 20대가 많아질 즈음 생각하였다. 20대에만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그런 게 있을까? 그런 것은 없다, 오직 패션밖에. 공부도 사랑도 운동도 뭐든 30대에도 40대에도 아니 늙어죽을 때까지 충분히 할 수 있다. 하지만 패션이라면? 20대에만 소화할 수 있는 패션이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 나는 다시 패션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열심히 20대에만 입을 수 있는 옷을 입어대자라는 기조를 충실히 지켰다. 많은 옷이 필요하게 되면서 드디어 보세옷에 눈을 뜨었다. 보세가 결코 질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후지지 않고 오히려 더 특이한 게 많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게된 것이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진작 알았다면 그따위 몇 십만원짜리 옷 한 두 개 사지 않고 옷을 수십벌을 사입었을텐데... 중고딩때 잘못 박히 보세옷에 대한 선입견이 나를 오랫동안 그렇게 만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유니크하게 입어도 기성품을 만들어입는 것에 한계를 느끼고 옷만드는 걸 배우기 위해 백방으로 알아봤다. 연이 안 됐는지 다 실패하고 결국 30대가 되었다. 20대 말까지는 같은 조합의 패션을 다시 입고나오는 일은 거의 없었으며, 특히 많은 사람을 만나는데도 같은 사람을 만날 때 지난 번에 입었던 옷과 같은 옷은 절대 입지 않도록 항상 모든 나의 패션을 기억하고 있었다. 가끔 여럿이서 만날 때는 큰일이었다. 어, 쟤는 이옷을 아는데 쟤는 모르고... 이런 경우 항상 신중하게 아무도 모르는 옷을 입기 위해 만전을 기하곤 했던 것이다.

 

그런 패션의 계절도 지나고 지금은 어정쩡한 낀 나이가 되어 어물쩡대고 있다. 원래 원색의 블링블링 찬란한 옷을 즐겨입었는데, 실제로 갈색이나 회색옷은 내 얼굴을 '가난해 보이게' 만들었다. 그런데 나이 먹으니까 이런 색도 받고 다 받네 -ㅁ-? 하지만 아직도 나는 30대의 내 패션을 정립하지 못한체 예전에 입던 스타일을 고수하면서 한편으로 아 이런 취향으로, 내가 아무리 동안이라도 이런 취향으로 나의 30대를 돌파할 수 없다는 고민이 있으며 또 한편으로 그래도 아직도 이쪽이 취향이라는 격렬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한 편으로는 기존에 없던 샤랄라한 여성스러운 옷을 좋아하는 취미도 생겼는데, 이쪽은 코디할 고민도 없이 그냥 원피스 하나 입고 머리삔, 귀걸이, 신발, 가방 등으로 집에서 뛰쳐나가기 전에 포인트만 대충 찝어줘도 쉽게 패션이 완성된다는 그 편리함에 빠져들기 시작하여 급기야는 하나의 취향으로 자리잡기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30대의 패션을 그저 샤랄라한 아가씨 패션으로 정립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일단 나의 언밸런스 속에 우러나는 밸런스룩을 생각할 때, 물론 샤랄라도 못할 바도 없다 샤랄라에 마구 귀여운 귀걸이를 배치해도 완전 어울릴 때가 많기도 하거니와 샤랄라 자체가 이미 개변조된 기성품이 횡행한지 한참된 것이다. 30대의 패션도 결국 남은 30대가 지난 30대보다 적게 남아야지 정립하게 되는 거 아닌가 본인은 마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아니하지 않은 것입니다 마...

 

패션의 역사와 나의 취향에 대해 떠들자면 한도 끝도 없으므로 오늘은 이 정도로... 아마 20대 후반에 정립한 내 스타일은 하라주꾸 스타일이라고 쉽게 명명할 수 있을테지만, 그것이 또 오묘히 달라서, 나는 하라주꾸 쪽 조합은 약간 과잉이라고 평하는데, 낱낱의 아이템을 살펴보면 또 내가 하라주꾸 스타일임을 부인할 수 없는 그런 오묘한 구석이 있다. 패션왕... 가히 나도 패션왕을 꿈꾸던 여자라고 적당히 마무리짓자. 네이버 웹툰 패션왕 재미있다. 기안84 화이삼 목요웹툰에 있음 항상 제일 늦게 업데이트되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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