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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요시타카 [나의 1960년대] 5장 지구물리학이라는 학문] 에 관련된 글.

 

10장 오지(王子) 투쟁의 충격과 토코로상(所美都子 토코로 미츠코)의 죽음

 

p. 100

67년 겨울, 나는, 우리들 동대 베트남 반전회의는 뭘 하고 있었는가 하면, 삼파(三派)전학련※과 반전청년위원회의 주위를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일련의 투쟁에 대해 우리들처럼 왔다갔다 하고 있던 제군이 많이 있었지 않았을까 지금은 생각하고 있다. 당시 가두투쟁은 삼파전학련과 반전청년위원회와 베평련(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이 했다고 얘기되지만 실제로는 그 외 세력이 그 주위에 - 우리들 같은 소집단, 경우에 따라서는 일인참가의 반전운동이 잔뜩 있었다.

※ 1960년 안보투쟁 당시 ‘전일본자치회총연합-통칭 전학련’은 48년 결성됐으나, 안보투쟁을 둘러싸고 분트, 사학동이 지도하는 주류파와 공산당, 민청이 지도하는 반주류로 분열돼, 반주류파는 60년 7월에 ‘전일본학생자치회연락회의-통칭 전자련’을 결성, 사실상 전학련의 분열이 시작됨. 그 뒤 복잡한 일들이 있었지만, 도중에 전부 단절, 1966년 12월에 전국 35개 대학 71개 자치회의 결집을 통해 재결성된 것인 통칭 삼파전학련. 당파로는 사학동, 사학동ML파, 마루학동중핵파, 사청동해방파, 제4인터 이렇게 5파로 돼 있음. 이 조직이 그 후 쓰나가와, 하네다, 사세보, 오지, 산리즈카와 싸운(たたかわれる) 학생운동을 견인하고, ‘삼파전학련’은 70년 안보투쟁에 이르는 선진적 전투적 학생운동의 대명사가 된다.
‘반전청년위원회’는 사회당과 공산당의 지도를 넘어서 반전투쟁을 싸우는 전투적 노동자 조직으로, 기본적으로는 지역마다 형성되어 있었지만 직장반전도 몇 개 만들어져 있었다.

 

그걸 확신했던 것은 당시 오지 투쟁이다.

 

그 해 연말부터 68년 1~3월에 걸친 북구 오지의 미군 야전병원 철거 투쟁은 나도 거의 연일 참가했었다. 대부분은 ‘분쿄반전 부대’에 들어가 있었다. 당시 우리들 대학원생과 조수로 구성된 동대베트남반전회의와 동대청의련(청년의사연합)은 가두에서는 분쿄반전청년위원회의 일 부대로서 행동하고 있었다.

 

이 오지투쟁의 특이한 양상은 갔던 사람은 잘 알고 있지만, 간 적 없는 사람은 전연 모른다.

 

うろちょろ
うろちょろとは、落ち着きなく、あちこち動き回るさま
-ごと[毎]
(名詞나 또는 그에 준하는 말에 붙여서) …마다.

 

p. 101

예를 들어 삼파전학련의 제군의 야전병원정문앞 연좌시위에 기동대가 덮쳐들려 했을 때, 중간에 들어온 학생을 지키고자 했던 게 그 지방 사람들이었다는 것과 같은 것은 신문에는 쓰여있지 않다. 그래서 또 신문에서는 단순히 삼파전학련이 돌아온 뒤, 덩달아 떠들어대는 자들(야지우마)이 날뛰고 있다고밖에 안 썼었으니까. 사실은 덩달아 떠들어대는 자들이라고 말하기보다 ‘군집’이라고 말하는 쪽이 현실에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현장에는 구경꾼만이 아니라 개인참가 혹은 소집단 참가자가 잔뜩 있어서, 이 때의 삼파전학련은 어떤 의미에서 스케쥴투쟁적인 부분도 있었지만 그렇게 말하기보단, 전년도 2번의 하네다 투쟁과 이 해 1월의 사세보 원자력항공모함(空母:항공모함의 준말)엔터프라이즈 입항저지투쟁에서 많은 체포자와 부상자를 내고 피폐하고 동원력을 떨어뜨렸지 않았나 생각한다 - 전학련과 반전 부대가 철수한 이후에 그 중의 많은 사람이 그 지방 사람들과 함께 남아, 모두 왁자지껄했었다. 많은 경우 만단위로 ‘군집’, 매스컴에서 말하는 ‘야지우마’가 모였던 것이다.

 

おそう[襲う]
[5단활용 타동사] 습격하다; 덮치다.
おそいかかる[襲い掛かる]
[5단활용 자동사]덤벼[덮쳐]들다.

やじうま [やじ馬]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에) 덩달아 떠들어 대는 일; 또, 그 무리

けんぶつにん[見物人]
[명사]구경꾼.

くうぼ[空母]
[명사]항모(‘航空母艦(=항공모함)’의 준말).

ひへい[疲弊]
[명사][ス자동사]피폐.

ひきあげる[引(き)揚げる] 중요
[하1단 타동사]철수[퇴각]하다. [하1단 자동사]귀환[귀국]하다; 돌아오다.

わいわい [부사]
    여럿이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모양: 왁자지껄; 와글와글.
    시끄럽게 재촉하는 모양.
    목놓아 우는 소리: 엉엉.

 

p. 102

지금와서도 떠오르지만, 전학련 부대가 돌아간 뒤에 남아 있으면 야전병원 정문앞에서 지역민들이 와-와- 하면서 “뺀찌 갖고 와”라고 누군가가 말하면, 누군가가 집에서 뺀찌를 갖고와서 철사를 자르고, “장대! 장대! 장대!”하고 누군가가 말하면 누군가가 집에서 실제 장대를 갖고와서, 그걸로 서치라이트를 부수고, 완전히 어두워지면 탁탁 투석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고 있는 것은 지역민들과 군집이었다.
그 후 전공투운동에서 무당파(논섹트) 제군이 당파 지도를 떠나 활동했다고들 하지만, 67년 정도부터 그 경향이 상당히 현저히 드러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60년 안보투쟁에 없었던 것은 반전청년위원회와 오지에 등장했던 이 군중이다. 실제로는 60년 대중 속에도 그와 같은 래디칼리즘이 잠재돼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60년의 투쟁이 얘기될 때에는 어디까지나 지도부였던 분트의 방침과 전술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대중의 래디칼리즘 자체가 주목되는 적은 없었지 않은가.

 

이와 같이 67, 68년의 가두투쟁에 있어서는 “전위당에 지도된 노동자계급”이라는 거기까지의, 1950년대까지의 고전적인 도식으로부터 누락된 형태로 대중의 래디컬리즘이 분출하고 있었다. 반전청년위원회 자신이 그 하나의 발로였지만, 그 외곽에 더욱 많은 래디컬한 대중이 약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1967년 10월 8일과 11월 12일의 2번의 하네다 투쟁으로부터 다음해 68년 1월의 사세보 엔타프라이즈입항저지투쟁과 동년 1월~3월에 걸친 오지 야전병원 저지투쟁을 거쳐,

 

はりがね[針金] 중요 JLPT N2
[명사]철사.
ものほしざお[物干し竿]
[명사]빨래 장대; 바지랑대.
ぼんぼん
[부사]
    시계 치는 소리의 모양: 땡땡.
    물건을 치거나 던지는 소리: 탁탁; 휙휙.
こぼれおちる[こぼれ落ちる·零れ落ちる] [상1단 자동사]
    넘쳐(흘러) 떨어지다.
    누락되다.(=동의어もれおちる)
ほんしゅつ[奔出]
[명사][ス자동사]분출(噴出); 힘차게 솟아 나옴.
ほこる[誇る] 중요 JLPT N1
[5단활용 자동사]자랑하다; 뽐내다; 자랑으로 여기다; 명예로 삼다.

 

p. 103

동대와 일대의 바리케이트를 거점으로 했던 68년 10월 8일과 21일의 신주쿠 미군탱크차 저지의 실력투쟁에 이르는 삼파전학련/반전청년위원회/베평련 그리고 다양한 소집단의 일년간의 투쟁, 그리고 특히 베평련의 또다른(우라) 조직에 의한 탈주 미군병사 지원의 비합법투쟁은 과거의 일본 반전운동의 안에서 최고 레벨의 투쟁이고,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투쟁이었다고 생각한다.

 

68년 1월의 사세보와 요코스카에서 엔터프라이즈투쟁이 있었고, 그 직후에 동대 의학부와 청의련이 파업에 들어갔다. 68년 1월 29일이다.

 

그 직전, 전년도 연말부터 교원병으로 요코하마의 병원에 입원 중이었던 토코로상이 돌아가시고, 이 의학부 파업 돌입의 날에 어디(번역 암 함;)에서 고별식이 있었다. 향년 29세였다. 이것은 우리를 포함해, 베트남반전회의의 모든 멤버에게 있어 충격이었고, 큰 상실이었다. 그 후, 동대투쟁의 각각의 국면에서 나는, 혹은 우리들 베트남반전회의의 멤버는, 토코로상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토코로상이라면 뭐라고 말할까 하며 종종 생각하며, 얘기했다. 동대투쟁의 전과정을 거쳐, 토코로상의 사상과 정신은 우리들을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こうげんびょう[膠原病] 교원병; 피부와 근육이 붙거나, 근육과 뼈가 이어져 붙거나 세포와 혈관 사이가 메워지거나 하는 병의 총칭.
はんぎゃく[反逆·叛逆]
[명사][ス자동사]반역.(=동의어むほん)
みちびく[導く]
인도하다;이끌다

 


토코로상 궁금해서 찾아보니 별로 정보가 없다. 보봐르보다는 시몬느 베이유를 좋아했던 듯.. 그런 식의 책 광고 문구가 있음;

 

베평련의 탈주 병사 지원 투쟁 얘기가 다른 챕터에 조금 나왔는데, 나는 그 운동을 전혀 몰랐었어서, 재작년에 알고 큰 충격을 받았었다. 발제문이 있는 글:  베트남전쟁, 다양한 경계 넘기 ― 전쟁 거부를 가능케 한 사람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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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05 14:58 2016/02/05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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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강독하는데 맡은 부분을 조금 번역하고 있다. 초벌 번역에다 일부이고 중간에 빼놓은 문장들도 있지만 올려놓으면 검색해서 방문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니까 올려봄. 야마모토 요시타카는

 

1941년생으로 전공투의 '안보투쟁'을 이끌었던 인물입니다.
도쿄대 물리학과 출신이다보니 그 이후 정치평론가뿐만 아니라 과학사저술가로서 잘 알려져있습니다.
일본에서 1960년대에 대해서는 "60년대론"이라고 해서 일정하게 형성된 역사적 담론이 있습니다.
전공투의 지도부였던 야마모토 요시타카가 2015년에 이르러 무슨 이야기를 할까 궁금합니다.

-by 선생님

 

5장 지구물리학이라는 학문

지진학, 해양학, 기상학, 지구전자기학 등 지구물리학이란 학문은 돈벌이는 어쨌든 군사와 그 시초부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예를 들어 동대(=동경대) 물리교실 창시자로 일본 지구물리학을 개척한 동경제국대교수 다나카 다테아이키츠(1856~1952)가 지도했던 전국적 지자기 측정은 일러전쟁 당시 해군의 필요성과 밀접히 연결돼 있다. 자침(磁針, 콤파스)이 정확하게 북쪽을 향하지 않는 동서에 조금 빗나간 자기편각(편각: 자침이 가리키는 방향과 지리학적 자오선 사이에 생기는 각; 방위각)은 지구상 각점에서 다른데, 해상의 각점과 그 편각의 정확한 값이 당시는 항해에서 중요시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물리학사>에 따르면 다나카는 1904년 발표한 이 측량결과를 인쇄중의 원고 그대로 해군수로부에 제공했다. 그 해에 시작된 일러전쟁을 위해 훨씬 새로운 지자기 관측자료로 역할해, 후에 해군수로부의 대규모 지자기 측량사업의 동기가 되기도 했다.

 

이과계 학자에 대해 “옛날 학자는 일러전쟁 개전도 모른 채 연구실에 틀어박혀 시험관을 만지작대며 계산자를 사용해 오직 연구에 몰두하는 은자라고 세간에 간주되고 있다”고 잘도 쓰고 있는데, 메이지 시대 물리학자는 전쟁에 솔선해서 협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막부로부터 메이지유신을 거쳐 ‘해방(海防)’이라는 말이 있었다.1855년에 설계된 ‘해방국’은 요즘말로 외무/국방성임. 사방이 바다로 둘러쌓인 일본에서는 국방이란 단적으로 말해 ‘해방’이었다. 페리가 태평양을 넘어왔을 때부터 막부가 중요성을 인식. 근대 일본의 해양학은 군사상의 필요성으로부터 생겨났다.  당시 해양연구를 추진한 해군수로부는 1871년 전쟁 전 일본 ‘해군해도’라는 해도를 만들었다.

 

제국주의 일본이 해외에 진출하는 것과 관련해 해양학의 중요성이 더 높아짐. <과학지식>에서 한 학자는 해군수로부에서 본인이 시작했던 쿠로시오 해류 조사에 의해 대만 동쪽 해안부터 보소 반도 앞바다까지의 소위 쿠로시오 해류의 정체가 명확해졌다고 밝히고 있다.

 

일본해양학회가 창설된 것은 1941년, 태평양전쟁이 시작한 해. 그 발족총회에서 동대, 경대, 구대 외에 해군수로부가 인사를 했다. 지금도 방위성과 문부과학성 소관의 독립행정법인 해양연구개발기구와의 제휴가 논의되고 있다.

 

해양학과 군사 관계는 물론 일본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1940년 유럽 전쟁에 미국의 참전이 얘기되기 시작할 때 미합중국정부는 국방연구위원회를 설치했고, 그것은 일본개전 당시, 즉 2000명 이상의 과학자가 관계한 450 건의 계약을 체결하고 있었는데 거기엔 (소수의 해양생물학자를 제외하고) 모든 해양학자가 포함돼 있었다. 미국에서도 해양학자들이 전쟁에 전면 협력함.

 

기상학도 군사와 밀접. <과학펜> 1940년 12월호에 실린 글은: “독가스 발사에 즈음해 그 구름이 낮게 떠다니는* 기상적 조건을 고려한 전대전에서의 독일군의 활약은 실제로 눈이 부셨다. 그 성공은 국부적 풍향과 접지기층에서의 기온분포, 난폭한 소용돌이(乱渦)의 성쇠를 예측하기 시작한 성취에 있다”

(* 迷低란 단어는 없고 ていめい[低迷]저미;구름이 낮게 떠돌아다님;향상이 여의치 않음)

 

<과학지식>에 1938년 5월호부터 연재된 조선총독부관측소 소장의 “전쟁과 기상”이란 글에 전쟁과 기상이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제외국에서도 군비의 충실을 꾀하는 것과 함께 착착 기상관측망의 충실정비를 행해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청일전쟁 후 히로시마는 해외파병의 거점이었따) 메이지 27년 7월 청일전쟁 중 대본영은 히로시마로 나아가(?) 9월 16일 이후 전국의 기상요소를 매일 히로시마 관측소에 전보로 보내고, 기상도를 만들어 대본영에 뽑아 보냈다. 메이지 37년 1월 일본-러시아 사이에 전운이 감돌며 조선과 청나라에서 기상 조사에 임해 2월 이후 기상관측원 및 기상관측소를 증가시켰다. 전선의 확대되는 것과 함께 점령지 부산, 목포, 인천, 원산 등지에 임시관측소를 지정하고 관측결과를 전보로 보냄. 이 사람들 나중에 훈장 받음

 

이미 청일-러일 전쟁에서 기상학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 해외 관측소는 전쟁의 결과로 설계되어 오직 다가올 전쟁을 위해 설치되었던 것.

 

기상학자 오카다는 일본의 기상사업의 근간을 구축한 사람으로 불리는데, 1874년 생이다. 그 다음 해에 기상관측이 메이지 정부의 사업으로 시작. 1923년에 중앙기상대 대장으로 취임해 쇼와 원년부터는 동대 교수를 겸임, 전후 1956년 83세로 사망. 발틱 함대와 일본해 결전의 날의 연합함대사령장관으로부터 대본영에 타진된 유명한 전문(電文)의 말미에 “오늘 날씨 ??”*는 오카다에 의한 그 날의 요동반도 부근 해상 기상예측을 받아적은 거였다.

* 「本日天気晴朗ナレトモ波高シ」、連繋機雷作戦使えず


단어

かねもうけ[金もうけ]
[명사,ス자동사]돈벌이.
いい金かねもうけがある좋은 돈벌이가 있다.

くさわけ[草分(け)]
[명사]황무지를 개척함; 또, 그 사람; 전하여, 창시(創始)함; 또, 창시자.

とじこもる[閉じこもる·閉じ籠る]
[5단활용 자동사]틀어박혀 나오지 않다; 두문불출하다.

いじる[弄る] 중요
[5단활용 타동사]

    주무르다; 만지작거리다; 만지다.
    애완(愛玩)하다.
    (제도·기구 따위 개혁에) 손대다.

よすてびと[世捨(て)人]
[명사]속세를 떠난 사람(승려나 은자(隱者)).

かいぼう[海防]
[명사]해방; 바다[해안]의 방비.

めざましい[目覚(ま)しい] JLPT N1
[형용사]눈부시다; 놀랍다.[문어형][シク]めざま-し

欲を言えば
욕심을 부리자면; 욕심 같아서는

しょうちょう[消長]   소장; 성쇠.

かみひとえのさ[紙一重の差]
종이 한 장 (두께)의 차이; 근소한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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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05 14:44 2016/02/05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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