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맘대로 베란다 원예

내 맘대로 베란다 원예
내 맘대로 베란다 원예
이토 세이코
플레이타임, 2021

 

아무런 연상 작용 없이 어느날 불현듯 깨달았다. 내가 수많은 식물을 죽인 건 내가 못 배워먹어서였다고. 항상 화분에 동봉된 물 주는 법을 꼼꼼히 읽고 적혀 있는대로 주기에 맞춰서 물을 줘도 모두 시들어 죽었다. 키우기 쉽다는 산세베리아도 선인장도 몇 번이나 다 죽였다. 식물 키우는 법, 아니 식물에 대해서도 공부가 필요하다는 걸 왜 여태 몰랐을까? 한 번 깨닫고 나니 어이가 없다.

십여 년 전 산세베리아가 죽었을 때 나는 생물을 돌보는 데 재능이 없다고 포기했다. 다시는 식물을 키우지 않을 생각이었다. 산세베리아에 배희만이라고 이름도 붙이고, 어디선가 식물도 노래를 좋아한다는 걸 읽고 노래도 불러주고(선곡이 마음에 들었을지는 모르겠다..), 나름 정성을 다해 애정을 쏟았는데 죽었다. 온전히 내 책임으로 뭘 키운 게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그 시든 잎을 보는 게 정말로 시체를 보는 것처럼 무서웠다. 언니한테 SOS 쳐서 몇 번 고비를 넘겼는데도 결국 죽였다는 충격에, 나는 뭘 키울 사람이 아니라고 결론 짓고 다시는 식물을 사지 않았다.

하지만 내 의지랑 달리 식물을 몇 번 선물받았고, 노력했지만 다시 다 죽였다. 마지막으로 선물받은 건 작년 생일 친구에게 받은 "너를 닮아서 사봤"다는 수국이었다. -_-;;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나에게 오기 전 그는 아름답고 싱싱했다..

아 사진 보니까 또 가슴이 찢어지네ㅠㅠㅠㅠ 이렇게 예쁜 수국 원래도 수국 좋아해서 정성껏 물을 줬는데.. 물만 줬다.. 햇빛에도 놨는데.. 예상 가능한 결말대로 죽였다. 한 계절도 못 넘기고 죽었다. 나는 쪼그라들어 밑동조차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수국의 죽음을 지켜봤다.

수국한테 너무 미안해서 빈 화분을 놔뒀다. 집안 잘 보이지도 잘 안 보이지도 않는 데다 빈 화분을 두고 가끔 쳐다보며 내겐 꽃을 키울 자격이 없다고 계속 각인시켰다. 그냥 나는 안 되나보다.

그런데 올해 갑자기 깨달은 것이다. 그냥 물만 준다고 영양이 다 공급되는 게 아닌데. 물조차도 준다고 다 빨아들이는 것도 아닌데. 식물은 물이랑 햇빛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님?ㅋ 하고 무식하게 정말 무지하게 아무 생각도 노력도 안 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돌봄에 재능 같은 소리나 하고 있었던 것도 무책임한 합리화였다. 가까이 아빠가 전에는 화분에, 지금은 옥상에 텃밭을 가꾸면서 약도 치고 비료도 뿌리고 좋은 흙도 가져다 붓고 온갖 노력을 하시는 걸 (쳐다만) 봤었는데 왜 나는 내가 키우는 식물에 그런 최소한의 노력이 필요하단 걸 인식하지 못했을까?

이렇게 자책하기만 한 건 아니고, 그래서 아 나중에 원예를 정식으로 배워야겠다, 배워서 나중에 아파트 베란다에 나도 꽃이랑 허브를 키워야겠다 나름 기운 차리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공부는 뭐~ 베란다 생길라면 멀었으니까 그때 닥치면 할라고 ㅎ 그러다 '베란더'(베란다에서 식물 키우는 사람)의 에세이 «내 맘대로 베란다 원예»를 읽었는데(아직 1/3 남음) 우와 ㅋㅋㅋㅋ 식물 키우는 사람들이라고 꼭 항상 식물을 살리는 사람들이 아니구나. 내가 정말 죄인이 맞긴한데(더울 때 물 주면 미지근한 물이 되어 오히려 식물에 안 좋을 수 있다는 것도 이 책 읽고 처음 알았음. 얼마나 노생각이었던 거냐..) 이렇게 커다란 애정으로 공들여 관찰하며 식물을 키우는 사람들도 정말 많이 실패하는구나. 그리고 화분이라는 조건이 자연에서랑 다를 수밖에 없구나, 왜 반려식물이라고 부르는지 조금 알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정말 자연 동식물에 대해 무지하다. 그래선지 소설에 나오는 자연 묘사를 싫어하는 편이다. 거기 써있는 나무, 꽃, 새가 어떤 모습인지 상상도 안 된다. 꽃의 생김은 좋아하는데 장미나 수국 등 몇 개 꽃 빼곤 전부 내겐 '이름 모를 꽃'이다. 그래서 그런 부분은 아무 상상도 안 하고 다음 단락에 도달하기 위해 대충 읽고 마는데, 이 에세이에서 말하는 식물들도 대체로 뭐가 뭔지 모르는 와중에도 혼자 상상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심지어 죽은 화분을 묘사할 때도! 그의 베란다도 상상하게 되는데, 울창하다기보다 어디는 푸릇하고 어디는 거무죽죽한, 전체적으론 어쩐지 황량하면서 가꾸지 않은 것 같은(아마 잡초 내버려 둔대서 그런 듯) 그렇다고 버려진 정원 느낌은 아니고, 뭐 혼자 그런 걸 상상하게 된다. 실제로 본다면 내 상상이랑은 또 전혀 다를 것 같다. 계절이 바뀌고 또 시간이 흐르면서 또 다채롭게 매일매일 다를테니 내 상상이랑 다를 것도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책을 읽다가 아주 어릴 때, 아마 숙제로 씨앗을 사다 심어서 식물을 키워봤던 게 떠올랐다. 그때 앞면엔 꽃 사진이, 뒷면엔 키우는 법이 빼곡히 적힌 비닐 포장된 씨앗을 몇 포 사서는, 우리도 이 정도 씨앗은 팔 수 있다고 언니랑 의기투합해서 동네를 다니며 맨드라미랑 무궁화꽃 씨앗을 땄던 게 기억난다. 그걸 연습장 찢어서 호치케스 박아서 씨앗 설명 적어서 ㅋㅋㅋ 포장했던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판로를 못 구해서 난처했던 것도 기억이 나는데, 그래서 한 포라도 팔았는지 어쨌는지 모르겠다.

사진은 빈 수국 화분을 찍어서 올릴라다가, 선물 받은 시점이 기억 안 나서 대화를 찾아봤다가.. 사진을 보곤 첨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ㅠㅠ 미안해..

이 책 진짜 재밌다. 한 편 한 편이 짧고, 저자랑 소통하는 느낌도 든다. 장래 유망 베란더가 되면 꽃 옆에 두고 시시때때로 한 편씩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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