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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9/06
    만가 - 상실의 시간들
    뎡야핑

만가 - 상실의 시간들

  • 등록일
    2014/09/06 22:04
  • 수정일
    2015/05/19 14:37
  • 분류
상실의 시간들 - 제19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상실의 시간들 - 제19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최지월
한겨레출판, 2014

 

벌초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는데 그게 엄마 산소를 관리하는 공원 측에서 주기적으로 벌초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데에 뒤늦게 생각이 미쳤다. 일년에 세네번 가면 잡초나 좀 뽑을 뿐 항상 깨끗하길래. 하지만 겨울에 쌓인 눈까지 치워주는 것 같진 않다. 흰 눈에 덮여 십센치쯤 높아진 무덤은 왜 그렇게 추워 보일까. 어느날 ㅁ이가 무슨 얘기 중이었는지, 무덤 속에 너네 어머니가 계시냐고 핀잔을 줬던 일이 있다. 개숑키야...<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마치 그런 듯 느껴왔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그러니까 무덤 위 꽁꽁 언 눈을 맨손으로 쓸어내렸겠지. 책을 읽으면서 엄마를, 엄마가 죽고 내가 겪었던 시간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엄마가 갑작스레 돌아가셨다는 것 외에 공통점이 있었던 건 아니다. 장례행위의 주체가 되기에 사회적으로 나는 어렸고, 그래서 나는 사회적 죽음으로서 엄마의 죽음을 경험하지 못했었다. 엄마의 죽음은 나에게, 우리 가족보다도 나에게 닥친 지독하게 개인적인 불행이었다.

 

죽은 사람이 정말로 죽기 위해선 그가 죽은 뒤 사회적으로 그를 살아있는 사람들이 죽여줘야 한다. 사망 신고를 하고 보험을 해지하고 인터넷 아이디들 삭제하고. 시신을 깨끗이 닦아주고. 장례식을 치르고 왼갖 방문자들을 맞이하고. 나는 어떤 행위에도 관여한 바가 없어서(있다면 장례식장에 와서 우는 내 친구들을 웃겨 주려고 노력했던 것 정도) 책을 통해 알게 된 과정들이 흥미로웠다. 수동적으로 겪어냈던 과정을 반추하며 그때 이런 게 있었겠구나 아빠가 혼자 이런 걸 다 겪었구나.. 아빠는 내게 언제나 아빠고 처음부터 어른이어서 그냥 당연하게만 생각했었는데.

 

너무 내 얘기만 하는데ㅡㅡ 소설 속 엄마, 우리 엄마랑은 전혀 다른 엄마의 죽음 통해 우리 엄마의 죽음, 내가 제대로 겪지 못했던 죽음을 다시 겪을 수 있었다. 단지 간접체험이 아니라, 소설을 읽으면서야 내가 엄마의 죽음을 지금까지도 받아들이지 못 하는 게(마치 화자 석희의 아빠처럼 말이다) 내가 그걸 한 번도 직시하고 마주한 적이 없어서라고, 제대로 겪어내서 소화(?)하고 화해한 적이 없어서라고 알게 됐다. 이젠 뭐 다 겪은 것 같고 이런 게 아니고ㅡㅡ 엄마의 죽음을 조금은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어른이 되며 엄마의 얼굴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엄마가 궁금해지고 그런 엄마를 알 수 있는 기회가 없어서 아쉬워하긴 했지만, 여전히 엄마는 나에게 우리 엄마로, 나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내게 존재하고 있었고 그래서 여전히 엄마의 죽음은 내 가장 개인적인 사건이고 고통이었다. 나는 엄마를 잃은 경험을 한 이들과도 나의 경험을, 고통을 나누는 것을 너무나 끔찍하게 여겨왔고 전애인의 조언에 따라 이걸 남들에게 아무렇지 않게 조금씩 얘기하며 무게를 덜어보고자 시도한 적도 있었지만 다 실패한 상태였다. 아무렇지 않은 듯 얘기할 순 있는데 그 이상은 조금의 진전도 없었다. 그게 이십년 가까이 내가 엄마 죽음을 내 개인의 불행으로 규정하고 그걸 꽁꽁 싸매고 있었을 뿐이란 거,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한 시간을 겪어보지 못해서라는 거, 우리 엄마라는 사회적 존재가, 나하고, 언니하고, 아빠하고, 엄마 친구들하고 관계를 맺고 이 나라의 국민으로, 현대사를 담지한 결과물로, 인류가 쌓아온 관습 속에 존재해 왔던 유적 존재가 소멸했다는 거, 내가 세계의 일부이자 세계가 나의 일부이고 엄마는 내 세계의 일부이고 반대도 마찬가지고 세계가 붕괴되지 않은 게 이상한 게 아니라는 거. 몇날 며칠을 몇년을, 몇십년을 생각하고 곱씹어도 이해할 수 없었던 엄마의 죽음의 의미를 조금은 이해한 것 같다.

 

장황하게 쓰자니 쑥스럽구만. 그래서 나는 누군가의 부모가 죽을 때마다 엄마를 생각하며 속이 문드러지게 한 번씩 울었었는데 소설을 읽으면서는 문드러지게 울지 않고 조금씩만 울 수 있었다. 굉장한 경험이었다, 오히려 이 글 쓰는 게 더 눈물이 나네ㅡㅡ

 

이게 가능했던 것은 소설의 화자 석희가 신랄하리만큼 꼼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비슷한 과정들, 모든 것이 엄마의 죽음으로 귀결되는 모든 종류의 생각들을 적당한 슬픔으로 뭉개지 않고 꼼꼼하게 꼼꼼하게 더듬어서 기원을 추적하고 맥락을 구체화하고 현재적 의미를 되짚고 연결 고리를 찾아내고 그렇게 찾아내서 피하지 않고 적어내려간 글들이다 이게 다 읽어 꼭 읽어봐봐 ㅠㅠㅠㅠ 엄마의 죽음을 내가 비겁하게 회피해 왔구나, 나 원래도 어리광 개심한데 자기한테도 어리광(우웩) 부리며 슬픔과 고통에 날 방치하며 변명해 왔구나.. 참 많이 깨닫네 ㅡㅅ ㅡ

 

신랄함은 아버지에 대한 평가에서 가장 두드러지는데, 그래서 석희는 두루뭉술 엄마를 잃은 아버지를 연민하거나 효심 돋으면서 적당히 타협(!)하고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찰나생 찰나멸, 아빠의 삶과도, 엄마의 죽음과도 꼼꼼한 화해를 하는 것이다.

 

소설을 두 번 읽었는데 처음 읽을 때는 매일 팔레스타인에서 사람들이 살해당하고 있었고 세월호 관련 작업을 (지금도) 하고 있어서 죽음과 애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두번째엔 내 생각을 어째 더 많이 했고 결과적으로 책에서 배웠던 소설의 순기능을 문자 그대로 경험했음.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아서 이것저것 메모해놨었는데, 특히 주옥 같은 문장들. 넘 주옥이 많아서 세 개만 적는다. 나중에 또 다른 얘기를 적어야지.

 
 
- 누군가 죽은 사람을 죽여야 한다. - 17쪽
 

- 엄마는 목숨을 잃었다. 남편을, 자식을, 친척들을, 친구들을, 고향산천을, 평생을 살아온 원주를, 집을, 기억을, 감각을, 욕망을, 시간을……, 엄마는 생을 통째로 잃어버렸다.

 

- 엄마는 원래 엄마로 태어나지 않았다. 아버지를 만나 우리를 낳아서 키우느라고 엄마인 엄마가 되었다. 모든 존재엔 역사가 있다. - 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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