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

  • 등록일
    2004/10/07 11:51
  • 수정일
    2004/10/07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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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읽었는데 별로 쓸 말이 없어서...

스티븐 킹이 스티븐 호킹인 줄 알고 있었는데; 위대한 발견이었다.

스티븐 킹은 책정리 알바할 때 많이 빌려 보길래 알게 되었다. 그 전에 그린마일같은 건 뽑아서 휘리릭 넘겨보기도 했었는데 이름은 못 외웠었다.

굉장히 유명한 소설가일 쭈리야... 아직도 못 본 영화 <샤이닝> 원작자이고 어, 그밖에 내가 못 본 많은 영화의 원작자였다. 거의 전작이 영화화된 듯.

캐리는 공포영화라서 언제나 위시리스트에 있었는데 여태 안 봤고.

예전에 영화프로에서 본 돼지피를 뒤집어 쓴 캐리를 떠올리며 책을 읽었다.

 

초능력자 캐리는 왕따. 캐리의 엄마는 광신적인 청교도. 왠 싸이코같은 것들이 졸업 파티에서 캐리에게 돼지피를 들이붓고, 캐리는 파티장에 불을 지르고 불이 마구 번져 300명이 넘게 죽는 대형참사가 일어난다. 그 와중에 캐리는 엄마를 죽이고, 엄마한테 칼침을 맞고 죽는다.

 

일단 흡인력이 굉장하고 구성도 재미있다. 중간중간 마치 이 사건이 진실이라는 듯이 사건당시 기사, 사건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자료, 생존자의 인터뷰나 기록 등을 끼워넣는다. 에 또 나는 인물이 생각하는 걸 써놓은 방식이 좋았다. 서술 중간에 괄호를 치고 등장인물의 느낌이나 생각을 적어놓는데 마지막 저 싸이코들이 캐리 죽이려고 할 때 긴박감이 극도에 달했다.

 

 

앞 유리창에 사람의 형체가 확 다가들었으며, 그와 동시에 그 존재가 외치는 소리는

  (캐리 캐리 캐리)

흡사 라디오 볼륨을 끝까지 올렸을 때처럼 커지고

  (캐리 캐리 캐리)

더 커졌다. 시간이 그들을 틀 속에 넣고 문을 닫기라도 한 듯 한 순간 그들은 움직이고 있으면서도 꼼짝할 수가 없었다. 빌리와

  (캐리 그 개들처럼 캐리 그 빌어먹을 개들처럼 해치우는 거야 캐리 브루시 이게 캐리 네놈이었으면 캐리 좋겠어)

크리스와

  (캐리 맙소사 저 애를 죽이지 마 캐리 저 애를 죽일 생각이 아니었어 캐리 빌리 난 그걸 캐리 보고 싶지 캐리 않아 ......)

캐리 자신까지도.

  (핸들을 봐... 생략)

 

하긴 이 부분은 캐리의 외침 캐리캐리캐리 때문에 더 무섭기도 하다.

캐리는 조금은 귀여운 평범한 아이인데 엄마의 강요로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기도하다가 그 때부터 애들한테 왕따로 찍힌다. 가정, 학교 속한 모든 사회로부터 짓이김을 당하다 죽었다. 따뜻한 손길도 있었다. 수지라는 예쁘고 양심있는 미국적인 소녀의 배려, 결국엔 화를 초래했지만. 그런 것은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걸까? 

마지막에 또다른 초능력자 애기의 존재는 진부하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억압과 폭력 속에서 불행이 자라날 수밖에 없다. 하긴 옛날 소설이니까 별로 안 진부한 건가??

 

참 설마 아직도 순수/통속 논쟁을 하고 있진 않겠지? 옛날이었으니까 뭐...-ㅅ-;;; 바보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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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en with Guns

작년에 민언련에서 하는 시민영상제에 가서 아무 생각없이 보게 된 영화.
과테말라라는 나라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었는데 왠지 이 영화를 보고 과테말라와 한껏 가까워진 것 같았다-ㅅ-
웃음의 기호도 맞고. 보통 슬프고 감동적인 건 세계 어디서나 통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웃음은 잘 안 그렇다. 내가 좀 웃음에 엄격하기도 하고; 그런데 정말 웃겼다-_-;
원래 사빠띠스따 보러 간 건데 이 영화가 너무너무 좋았다. 뭐 이런 훌륭한.. 싶었다.

 

 

 

작년에 썼던 줄거링~ : 고치기 귀찮다

 


주인공인 의사 할배는 도시에서 부유하게 사는 사람으로 사별한지 얼마 안 되어

 

좀 우울합니다. 어느날 자기가 가르쳤던, 인디언 마을에 의료활동을

하러간 제자들이 어째 편지 한 통 보내지 않을까 궁금해 하다가 우연히 만난

제자 놈이 직접 찾아가 보라고 화내는 걸 보고 휴가 기간 내내 온통 이 마을 저 마을

제자들을 찾아 돌아다니게 됩니다.

가난한 인디언들에게 힘이 되어줄 거라 생각한 제자들은 도통 소식을

알 수 없고 인디언들은 할배를 피하기만 합니다. 웬 꼬마 아이의 도움으로

제자들은 군인이든 게릴라든 양쪽 군대에 의해 총살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한 마을이 아예 전멸되어 뼈가 나뒹구는 폐허를 보기도 합니다.

인디언들은 군인이든 게릴라든 이 "총을 든 사내들"에게 된통 당한지라

낯선 사람은 무조건 경계하고, 어느 전설적 부족은 산꼭대기에 통하는

길 없이 숨어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설인지 뭔지 아무도 실체를

확인할 수 없어 할배는 이들을 찾아 갑니다. 이 부족에 살아있는 마지막

제자가 함께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와중에 탈영병이 할배를 이용해 어딘가로 떠나려고 시도하기도 하고

총살리스트에 오르자 마을에서 도망친 한 신부님을 만나기도 하고,

강간 당한 뒤 말을 못 하는 한 처녀와 함께 미지의 부족을 찾아 가기도 하며

의료의 화신답게 많은 사람을 치료해 주기도 합니다.

줄거리를 이렇게 길게 말하다니..-_-

길안내하는 어린이의 대사들이 압권입니다. 순진한 할배와 세상 다 산 것 같은

어린이. 살인하고 강간하는 일들이 괴롭고 힘들었던 탈영병의 신앙 고백,

스스로 신부의 직을 져버렸다는 이유로 신앙 고백 안 듣고 구원 안 해 주려는 신부님.

(나중에 목숨구원하는 데 도와주긴 하십니다^^)

정확한 대사는 아니지만 "모르는 것도 죄인가" 신부님께 부끄럽지만 나직히 묻던

할배의 말에 뜨끔했습니다. 알고 가만 있는 것만 하겠습니까. 게다가 이 시대엔

모르는 것이 죄니깐요.

영화가 그 미지의 부족을 찾아 울창한 산속에 들어온 뒤에 주최측의

사정으로-_- 불시에 끝나 버려 끝에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는데

처음에 이 이야기를 인디언들의 구전 동화인 냥 엄마가 아이에게 해 주던

것으로 보아 이 세상 물정 모르던 할배는 해방전사가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물론 의학의 화신으로^^ 해방전사라는 말은 어감이 좀 그렇긴 하네요-_-

제목의 살벌함은 영화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났지만 이 영화는 할배가 뭐랄까

각성해 나가는 과정도 자연스럽고 관객에게 분노를 강요하지 않은 채

인디언 양민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보여주는 점도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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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영화 본 미련한 소님의 말씀대로 자율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얼마나 많은 희생이 따르는가. 얼마나 많은 희생이 따르는가. 그런 것도 값진 희생일 수 있겠는가.

그래서 차라리 무저항에 솔깃하다. 시몬느 베이유 전기에서 한 때 그녀가 억압하는 그대로 그에

저항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가졌었는데 그 뒤 2차 세계대전인가

그 때의 만행을 보고 이 생각을 포기했다고 한다.

 

지금 팔레스타인에서 어린이들이 죽는 것을 보면 하마스의 반격에 화가 치민다. 물론 이스라엘이 잘못 했다는 건 더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다만 대항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한 명이라도 잘 살자고 하는 거 아닌가? 근데 하마스의 대항하는

방식이 어떠한가? 한 명이라도 더 죽어도 상관없다는 거 아닌가?

하마스의 강령도 싫다. 이스라엘 완전히 나가라, 사라져라! 그걸 바라는 마음을 감히 욕할 수는 없다. 문제는 그것이 언젠가 먼 훗날 실현가능하더라도 그로 인해 당장 너무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인간답게 도저히 살 수가 없는 것이다. 하마스의 공격으로 이스라엘 민간인과 군인이 몇 명 죽고, 이것을 빌미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수십 명을 살해하고 있다. 이런 빌미를 주는 자체가 너무 싫다. 저것들은 인간이 아니야. 똑같이 대응해 봤자야. 양민만 죽어 나간다 양민만 오로지 양민만 죽는다.

 

 

이런 생각들을 하다보면 왜 이 지랄인가 이스라엘이 증오스럽고 다 죽여 버리고 싶고 그렇다.

내가 미워하는 상대를 닮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인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나는 아직도 이 안에서 헤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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