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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반유대주의에 맞선 싸움

안녕, 아누라드하? 이 좆 같은 반유대주의 검둥아. 나치 검둥이 원숭이 새끼들의 딸아. 나가 뒈질 때까지 잘 살아라, 이 아이스크림 창녀야.

유대인은 대체로 당신 같은 힌두인을 가장 비천한 인간종으로 여깁니다. 유대인은 엄격히 유일신을 믿지만 당신네 힌두인은 다신교에 코끼리 신 같은 온갖 기괴한 신들을 섬기니까요. 이렇게 역겨운 우상 숭배가 있을까!

(중략)
저는 인도인의 미국 이주를 멈추게 하라고 국회의원들에 편지를 써왔습니다. (중략) 당신 옆엔 자기를 혐오하는 소수의 유대인이 있지만, 유대인 대부분은 당신들 냄새나는 힌두인을 경멸한답니다. 원하는 대로 이스라엘을 보이콧하세요, 추한 싸구려 창녀여!
- 뉴욕 브루클린에서, 랍비 슬로이메 도비드 루이스

2021년 7월 19일, 미국의 아이스크림 제조회사 벤앤제리스가 점령지 팔레스타인에서 사업 철수를 발표하자 이사회장 아누라드하 미탈에게 이와 같은 인종차별적이고 여성 혐오적인 비방 메시지가 쏟아졌다.미탈 개인 트위터 계정에 공개됐던 것으로 현재 해당 포스팅은 삭제됨. 벤앤제리스는 미국 아이스크림 시장 점유율 1위 업체로 “아이스크림이 세계를 바꿀 수있다”라는 슬로건 하에 사회 정의 문제에 활발히 목소리를 내왔다.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에 연대하는 미국 유대인 활동가들은 벤앤제리스에 이스라엘 사업 지속이 기업이 표방하는 가치와 맞지 않다고 오랫동안 지적해 왔다. 결국 벤앤제리스는 이스라엘이 1967년 군사 점령한 이래 팔레스타인 서안지구·동예루살렘에 건설·확장 중인 불법 유대인 정착촌에서 2022년부터 사업을 철수하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유대인 활동가들은 이스라엘 사업 전면 철수가 아닌 불법 정착촌에 국한된 철수이기 때문에 여전히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물론 이스라엘은 입장이 다르다. 벤앤제리스의 사업 철수 발표 후 이스라엘 및 서구의 시온주의 세력은 이것이 반유대주의적 행위라며 회사와 이사진, 협력사를 향해 비방 캠페인을 시작했다. 유대인 창업자들에겐 이스라엘 정책을 비판하는 유대인에게 늘 하듯 “자기 혐오적 유대인”이라 낙인찍었다. 이스라엘 대통령은 이를 “새로운 형태의 테러리즘”이라 규정했다. 이스라엘 언론은 이 결정이 이스라엘 국민의 “아이스크림권 침해”라며 관련 소식을 매일 같이 대서특필했다. 반유대주의자로 낙인찍힌 이들이 으레 겪듯 벤앤제리스 관련자들은 살해 협박마저 받고 있다.

우리가 반유대주의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인종차별에 반대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시온주의 세력은 반유대주의를 이스라엘 국가 및 국가 정책에 대한 비판과 등치시킨다. 잘못된 이 반유대주의 논란의 핵심에는 수년간 유럽과 북미에서 학문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침해를 양산해온 국제홀로코스트추모연맹의 ‘반유대주의 실용정의’가 있다.

IHRA의 “반유대주의 실용정의”

국제홀로코스트추모연맹(International Holocaust Remembrance Alliance, 이하 IHRA)은 1998년 홀로코스트 교육·연구·추모를 위해 스웨덴·영국·미국이 설립한 프로젝트팀에서 출발한 정부 간 조직이다. 현재 29개 유럽국가와 이스라엘, 미국, 캐나다, 호주, 아르헨티나까지 총 34개 국가가 회원국으로 있다.

IHRA의 2016년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총회에서 당시 31개 회원국은 아래의 반유대주의 실용정의(Working Definition of Antisemitism)를 결의했다.

법적 구속력 없는 아래의 반유대주의 실용정의를 채택한다 :
“반유대주의는 유대인을 향한 혐오 표현과 같이 유대인에 대한 특정한 인식을 의미한다. 수사적이든 물리적이든 반유대주의 표명은 유대인 혹은 비유대인 개인, 그리고/ 또는 유대 공동체 기관이나 종교 시설을 겨냥하는 것이다.”

해당 정의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 문제는 정의 아래에 구체적으로 제시된 예시들이다. 11개의 예시 중 7개가 현대 국가 이스라엘에 관한 내용이며, 특히 다음의 예시는 노골적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을 금지한다.

  • 유대인의 자기 결정권을 부정하는 것, 예컨대 이스라엘 국가의 존재가 인종차별적 기획이라는 주장.
  • 다른 민주 국가에는 기대 혹은 요구되지 않는 행동을 이스라엘에만 요구함으로써 이중 잣대를 적용하는 것.
  • 현재 이스라엘의 정책을 나치의 정책에 비유하는 것.

실용정의의 일부로 제출됐던 11개 예시는 스웨덴과 덴마크의 반대로 정식 규정에서 배제됐다. 그러나 정식 규정 아래 부기됐고, 시온주의 세력은 본말을 전도해 11개 예시의 위상을 더 높이는 데 주력했다. 게다가 IHRA는 예시도 정식 규정으로 채택됐다고 역사를 조작하고 있다. IHRA는 홈페이지 반유대주의페이지에 “실용정의는 예시들을 포함해 2016년 5월 부쿠레슈티 총회 동안 만장일치로 검토되고 결정되었다”라고 거짓 서술하고 있다. 2021년 1월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IHRA와 공동 출판한 소책자에서도 같은 서술이 반복되고 있다. 한편 독일과 프랑스 의회는 예시를 제외한 규정 부분의 지지만 결의했지만, IHRA는 이에 대한 반박 없이 환영함으로써 실용정의에 예시가 포함된다는 주장의 모순을 스스로 드러냈다.

반유대주의에 맞선 투쟁에 필요한 원칙

내용적 문제를 좀 더 살펴보자. 2020년 11월, 누라 에라캇, 탈랄 아사드, 질베르 아슈카르 등 팔레스타인과 아랍 학자 122명은 반유대주의에 맞선 투쟁이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을 불법화하는 전략으로 전용되는 것에 우려를 표하는 공개서한을 발표하며 7가지 투쟁 원칙을 제시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반유대주의에 맞선 투쟁은 국제법과 인권의 프레임 속에 전개돼야 한다. 이는 이슬람 혐오와 반-아랍, 반-팔레스타인 인종차별을 포함한 모든 형태의 인종차별과 외국인 혐오에 맞선 싸움의 일부여야 한다.

2. 억압당하는 소수자로서의 유대인이 반유대주의적 정권에 지목되는 것은 팔레스타인/이스라엘에서 배타적 팽창주의 국가라는 형태로 유대 인구의 자기 결정권을 실행하는 것과 현격한 차이가 있다. 현대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원주민을 인종 청소하며 들어섰고, 원주민은 군사점령 하에서 혹은 이스라엘 내 2등 시민으로서 여전히 자기 결정권을 부정당하고 있다.

3. IHRA의 반유대주의 정의는 현재 많은 나라에서 팔레스타인 권리를 지지하는 좌파·인권운동단체나 BDS(이스라엘 보이콧·투자철회·경제 제재) 운동을 격파하는 데 이용될 뿐 유럽과 미국의 우파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유대인에 가하는 진짜 위협을 부차화한다.

4. IHRA 회원국이 모두 인정하는바, 이스라엘은 반세기 넘게 팔레스타인을 군사점령하고 있다. 이를 비판해선 안 된다는 예시는 기이하며, 세속적이고 민주적인 장래 이스라엘을 고취하는 반시온주의 관점을 반유대주의로 치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5. 특정 인구집단이 수적 우위를 점하게 하기 위한 자기 결정권이란 없다. 대대로 팔레스타인 땅에 살아온 이들의 고향을 뺏고 추방하는 것이 자기 결정권일 수 없다. 이미 UN 총회 결의안 194로 보장된 고향으로 귀환할 권리를 반유대주의라며 부정해선 안 된다.

6. 이스라엘은 헌법 차원에서 인종차별을 공식화했는데, 이를 비판하는 것이 곧 반유대주의라 하는 것은 이스라엘에 절대적 면죄부를 부여하는 데 불과하다. 실제로 IHRA의 정의는 각국에서 인종·종교 차별적인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어떤 논의도 금지하는 형태로 적용되고 있다.

7. 팔레스타인인의 자기 결정권(여기에는 이스라엘의 군사 점령지 철수와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권 보장이 포함됨)을 전면 보장해야 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 IHRA의 정의는 유대인의 안전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유대인의 우월적 지위와 특권을 보장해 팔레스타인인의 권리를 억압한다. 반유대주의에 맞선 투쟁은 모든 억압받는 사람들의 존엄과 평등, 해방을 위한 투쟁과 함께 가야 한다.

반유대주의 실용정의는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을 탄압하는 것을 넘어 이스라엘 정책에 대한 온건한 비판마저 반유대주의로 낙인찍는 근거로 사용된다. 애초 반유대주의 실용정의를 기초했던 반유대주의 전문가 케네스 스턴은 “우파 유대인들이 (이를) 무기로 삼는 것”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스턴은 스스로 시온주의자를 자임한다. 그러나 미국 대학에서 이스라엘 비판을 금지하며 학문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탄압하는 것은 애초의 취지와 다르다며, 특히 친이스라엘 세력이 반시온주의 유대인 학생들에게 ‘반역자’, ‘카포’(나치 부역자)라는 낙인을 찍는 것에 우려를 표했다.

2021년 8월 현재 IHRA의 반유대주의 실용정의를 채택한 국가는 총 32개다. 그중 가장 최근에 채택한 국가로 알려진 게 한국이다.

FTA에 이어 또다시 친-이스라엘 행보를 걷는 “최초의 아시아 국가”

8월 4일 한국 외교부는 “정의용 외교장관은 8월 4일 야이르 라피드(Yair Lapid) 이스라엘 외교장관과 전화 통화를 갖고, ▷양국 관계 ▷코로나19 대응 ▷교역·투자 증진 등 상호 관심사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는 보도자료를 발표했다. 반유대주의 실용정의에 관한 내용은 보도자료 말미에 등장한다.

“이스라엘 측의 국제홀로코스트추모연맹 반유대주의 실용정의 지지 요청에 대해, 정 장관은 인종차별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하면서 우리 정부도 이를 지지할 것임을 밝혔다.

- ‘반유대주의’란 유대인 혐오로 표현될 수 있는 특정한 인식으로, 예컨대 극단주의에 기반한 유대인 공격·살해, 유대인에 대한 악마화 등이 해당됨.”

보도자료만 봐서는 여러 의문점이 생긴다. 다른 나라에서는 의회 결의를 통해 통과된 것을, 한국에선 외교장관 간의 전화 한 통화로 결정했단 걸까? 국회에서 논의됐다는 소식은 없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 ‘지지’는 어떤 위상을 갖는 걸까? 지지의 범위도 알 수 없다. 독일과 프랑스처럼 예시 11개를 제외한 걸까? ‘반유대주의’에 덧붙인 설명을 보면 이스라엘을 언급한 예시 규정은 의도적으로 제외한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어떤 절차를 거친 후 지지하겠다는 건지, 아니면 이미 지지를 결정했다는 건지도 모호하다. 세계적으로 논란이 되는 정의를 채택하며 한국 정부는 과연 어떤 검토를 거쳤을까?

정 장관의 말처럼 “인종차별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렇다면 건국 이래 유대인 시민과 자국 내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정부가 부르는 명칭은 ‘아랍계’) 시민을 구분해 65개 이상 법규로 후자를 공식 차별하는 이스라엘은 어떻게 정당화될 것인가? 심지어 2018년에는 헌법적 수준에서 “이스라엘은 유대민족 국가”라 규정하며 ‘아랍계’ 시민을 배제한 이스라엘을 말이다. 또 온건한 시온주의자조차 염려하듯 한국에서도 학문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은 과연 검토했을까?


▲  이스라엘 국기 모양에 이스라엘의 상징인 '다윗의 별' 대신 나치 문양을 그려넣은 시위대가 국기 모양의 포스터를 태우고 있다. [출처: 미국유대인위원회(AJC)]

여러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주한 이스라엘 대사 아키바 토르는 한국이 “혐오에 맞서 중요한 한 걸음을 내디딘 첫 번째 아시아 국가!”라며 트위터에 찬양하는 포스팅을 남겼다. 보도자료 말미 몇 줄의 소식이 한국에서 화제성이 없었던 것과 달리 시온주의 세력들은 아시아 국가가 처음으로 채택했다며 널리 회람했다. 미국의 로비단체 미국유대인위원회(AJC)의 사이트에는 한국이 채택 국가로 바로 등재됐다. FTA 체결에 이어 또다시, 이스라엘과 시온주의 세력에 어필하는 최초의 아시아 국가가 된 것이다.

진짜 반유대주의와는 연합하는 이스라엘

이미 알려진바, 적어도 이스라엘 정치가들은 대대로 반유대주의에 관심이 없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식민 정책을 지지해주기만 한다면 악명 높은 반유대주의자와 손잡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얼마 전 실각한 이스라엘의 최장 집권 총리 네타냐후는 특히 노골적이었다. 헝가리의 오르반 총리는 2차 세계대전 중 히틀러와 연합해 수십만 유대인을 강제수용소에서 죽게 만든 헝가리 정부를 찬양했다. 또 유대인 ‘조지 소로스’가 유럽의 안전을 위협한다며 유대인이 세계를 조작한다는 전형적인 반유대주의적 음모론을 제기했지만, 네타냐후는 오히려 이에 동조했다. 네타냐후는 폴란드 총리와 함께 2차 세계대전 중 폴란드가 나치의 박해를 피할 수 있게 유대인들을 대피시켰다는 내용으로 역사를 왜곡하는 공동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스라엘을 건국한 시온주의 지도부가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취약함을 이용해 시온주의 국가 건설에 활용한 전사를 생각할 때 어찌 보면 일관되기까지 하다.

유대 민족은 서구사회의 뿌리 깊은 인종주의 속에 가공할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유대 민족만이 피해자의 위치를 특권적으로 독점하는 것은 아니다. 1930년대 나치는 독일과 미국에서 유대인이 러시아 혁명을 일으켰다는 음모론을 퍼뜨렸고(judeo-bolshevism),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는 동시에 탄압받았다. 유대인을 악마화했던 음모론은 이제 유대인 자리만 이슬람으로 바꿔 재생산되고 있다. 프랑스에서 ‘이슬람-좌익’(islamo-leftism)은 서구 문명을 무너뜨리려는 좌파와 이슬람 연합이라는 음모론에 기반해 팔레스타인 연대 세력을 가리키는 신조어였다. 2021년 2월, 프랑스 교육부 장관은 ‘이슬람-좌익’ 사상을 프랑스 국내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의 공범으로 지목, 이를 뿌리 뽑겠다며 대학 캠퍼스를 전수조사했다. 걷잡을 수 없는 인종주의와 혐오의 확산 속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입장은 분명하다. 반유대주의에, 이슬람 혐오에, 모든 형태의 인종주의에 맞설 싸울 것. 이 싸움에 아파르트헤이트 식민국가 이스라엘이 낄 자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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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200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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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와’는 두 집 살림을 하는 팔레스타인 여성 노동자이자, 가장이다. 하루 겨우 2시간 잠을 자며 일하고, 아이 셋을 돌보고, 아이들을 데리고 주기적으로 거대한 장벽을 너머 남편이 기다리는 집으로 간다.

거대한 장벽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 집엔 남편 ‘무스타파’가 산다. 무스타파의 삶 역시 쉽지 않다. 두 집의 직선거리는 200미터에 불과하지만 무스타파는 살와처럼 장벽의 군사검문소를 쉽게 통과할 수 없다. 이스라엘군의 허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왜 군대의 허가가 필요할까? 무스타파가 ‘테러범’이라서? 물론 아니다.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에 군사점령당하고 있기 때문에 팔레스타인 사람 누구나 이스라엘군의 허가 없이는 장벽을 건널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무스타파가, 이스라엘이 장벽의 구실로 내세운 ‘테러범’이었다면 애초 이스라엘에서 일할 수 있는 노동 허가증을 받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노동 허가증이 있어도, 새벽 군사검문소에서 2시간을 기다린 끝에 무스타파는 통행증 기간 만료란 이유로 장벽 통과를 허가받지 못했지만.

이스라엘의 불법적인 점령 정책에 따라(장벽은 이미 2004년 국제사법재판소가 불법이라 결정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일상은 하루하루 침식된다. 출근을 못하고, 약속을 못 지키고, 하루하루가 예측불가능한 요소로 가득 차 있다. 영화의 주된 플롯은 아들 ‘마지드’의 입원 소식을 접한 무스타파가 병원에 가는 여정을 좇는다. 아들이 얼마나 다쳤는지 모른 채 불안한 마음을 안고 200미터 거리를 온종일 돌고 돌아가며 마주치는 사건마다 군사점령의 현실이 드러난다.

보면서 궁금했다. 관객들은 이걸 영화적 과장이라고 생각할까? 실제로 저 정도는 아닐 거라고 생각할까? 지구 한 쪽에선 나처럼 평범한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 드물게 겪는 일이라고 생각할까?

그렇다면 ‘살와’와 아이들은 어떻게 장벽 너머 ‘이스라엘’에서 살고 있는 걸까? 이스라엘은 1948년 원래 팔레스타인이었던 땅 위에 들어섰다. 이스라엘은 건국을 전후해 팔레스타인 원주민을 학살/추방하는 대규모 인종청소를 저질렀지만 다 죽이고 내쫓지는 못했고, 그래서 지금도 이스라엘 인구의 20%는 팔레스타인 사람이다. 즉 이스라엘 시민권을 가진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있고, 살와는 그 중 한 명이다.

장벽은 땅만이 아니라 사람 사이를 가른다. 이스라엘 쪽에서 학교를 다니는 아들 마지드는 
‘더러운 서안지구놈’이라며 팔레스타인 아이들로부터 학교 폭력을 겪는다. 자식들 교육 문제를 가지고 살와와 무스타파는 계속 갈등한다. 아픈 몸을 돌보지 않고 무리하게 일하려 들면서도 막상 이스라엘 시민권을 얻어 가족과 함께 살지 않는 무스타파에게 살와는, 그리고 자신과 상의 없이 이스라엘 유소년 축구 캠프에 마지드를 보내겠다는 살와에게 무스타파는, 실망하고 화낸다. 기본 플롯이 무스타파의 여정이라서 영화가 두 사람의 관계를 자세히 보여주지는 않지만, 단편적 장면만으로도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나 어떤 시간을 통과했을지 머릿속에 선명히 그려졌다. 이스라엘 시민권자들은 서안지구 출입이 자유롭기 때문에, 아마 살와는 서안지구의 대학에서 무스타파를 만나지 않았을까? 학생 시절 점령자에 비타협적이던 매력적인 모습이, 함께 삶을 나누며 이젠 고집불통으로 여겨지진 않을까? 그러면서도 그게 옳으니까 전면적으로 설득할 수도 없고.. 생각을 같이 하는 부분이 생활에서 빛바래고 퇴색할까 두렵지 않을까? 등장인물의 전사가 그려진다는 점만으로도 이 영화는 볼 가치가 있다.

이 뿐 아니라 영화는 어떤 과장도 없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잘 그려냈다. 예컨대 무스타파가 일자리를 찾아 이스라엘로 건너가, 당연하다는 듯이 히브리어로 자기 할 말만 하는 이스라엘인의 집을 지어주는 일용직 건설 노동자라는 점도 그렇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경제구조를 조직적으로 무너뜨렸고, 점령자의 집을 지어주는 것이 다른 취업 자리를 찾기 어려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선호도 높은 직업이 되고 말았다. 아침 저녁으로 4시간 동안 군사검문소에서 시간을 낭비해야 하는데도 말이다.

무스타파의 여정에 들어있는 한 ‘외국인’을 관객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도 궁금하다. 스포라서 쓸 순 없지만, 일단 외국인도 팔레스타인 가면 정말 흔히 보이는 전형적인 서양인 스타일 찰떡이라서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 존엄을 지키는 무스타파에게서 내가 아는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의 모습을 보았다.

결국 무스타파는 여정에서 만난 동료들을 챙기며 가족들에게, 목적지에 도착하고 만다. 무스타파가 처한 군사점령의 부당한 현실의 벽은 견고하고, 그래서 살와와의 갈등 또한 완화될 조건 자체가 없지만..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즉 존재가 저항이라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외침이 또다시 와닿는다.

무스타파처럼 팔레스타인 민중은 종국에는 해방이라는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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