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딸기Smultron staallet, 1957

 

 

연대를 보니 잉마르 베르히만 감독이 29살 정도에 만든 것 같은데 이 노인네... 겉껍데기가 창창할 무렵부터 이미 노인네... 주인공인 70대 할배의 마인드를 고스란히 갖고 있음이 느껴지더라는. 그건 신학을 공부해서일 거라는 숭당의 친절한 설명. 그래도 그렇지 끄악.

 

젊은 시절 약혼녀였던 사라의 환영을 볼 때는 보지 못했던 상처를 보고(형과의 키스) 죽은 아내의 정사 장면은 직접 목격한 기억에 새겨진 상처였다.

라고 지난 번에 썼는데 별로 그다지 아무 생각도 없는 것이다.

 

젊어서 좀 나쁜 사람들이 늙어서 쪼그라들면 약간 불쌍하고 귀엽게 보이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라는 쌩뚱맞은 생각... 이 할배도 의사로서 의도는 아니었어도 자기 아들은 거의 미칠 지경으로 정신적 학대를 가했지만 자기 명예를 소중히 해서 남들에게 평판이 좋은 그냥 위선적인 사람이었다.

 

그런데 늙으니까 그런 건 번데기같이 쪼그라들고 거품의 자리가 불쌍하면서도 쪼금 귀여운 것이... 나만의 감정은 아닐 것이다!!! 라고 한 번 큰소리쳐 본다.

 

 

내용이 너무 재미있어서 아무 생각없이 봤다-_- 약간 스쿠루지 할아범의 모험이랑 비슷하다는 느낌이다. 스쿠르지 할배는 환상이었지만 이 할배는 인생길 반발반발 뒤뚱뒤뚱 걸어가듯 하루를 짚고나서 많이 변했다. 소극이 뭔진 몰라도 왠지 소극일 것같은ㅋ

그래서 아들이랑 관계가 전혀 회복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행복하게 끝난 것같다. 적어도 며늘아기씨는 아버님이 죠타고 뽑뽀해 주지 않던가!

 

그런데 아들 얘기는 정말 무섭고 전체 영화에 낑겨 있다. 잘못 만들었다는 소리가 아니라 그 부분만 튀어나온다고. 아들이 후반부에 며느리의 회상씬에서 갑자기 모습을 나타내는데 아이는 절대 가질 수 없다는 그의 돌출이 영화가 끝나도 매끄럽게 지워지지 않고 까끌까끌하게 남아 있다. 그것에 대해 뭐라고 결론은 못 내리겠다.

 

히치하이커 사라와 내가 과거에 사랑한 사라가 동일인이고 극중에서 닮았다는 것은 패스. 왜냐면 사라는... 너무나 매력이 없었기 때문이다-_-


가정부 할머니 너무 귀여웟!

신승원이 며느리 삼기로 한 마리안느. 지금은 죽었겠지-_-;

참고로 내 며느리는 호미 슈나이더

여기서도 거울 등장... 지젝이 거울같은 거 자꾸 얘기하는데 나는 이제 모르겠다고라...(포기-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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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지구의 덧없는 여름

2003년도 NHK의 다큐멘터리를 KBS에서 작년에 방송한 것을 아름다운 분의 도움으로 팔레스타인평화연대의 자료로 구하게 되어 보았다. 작년에 뒷부분만 보고 되게 보고 싶었는데!!

 

이것저것 많이 보여주는 것보다 두 가족만 찍은 게 좋았다. 또 그 가족들에게 밀착해 세밀한 폭력의 흔적들을 찾으려 하지 않고 거리둔 것도 좋았다.

 

(일주일 전에 보아서 이름은 다 잊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이 부르는) 순교자의 초상을 그리는 화가는 이스라엘이 건국되던 그 즈음에 태어나 점령과 저항을 목도하며 살아왔다. 그는 폭력으로 그들이 저항해 온 방식이 아무 효과가 없었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똑같이 갚아줘야 한다는 그 아들을 설득하려 한다. 그러나 30년형을 받고 이스라엘 감옥에 있는 삼촌을 존경하는 아들은 아버지를 비난한다. 젊은 그는 총으로 대포로 저항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마스의 작전 수행중 전사한 남편을 둔 여인은 전에는 하마스에 그다지 동조하지 않았지만 남편이 죽은 후 생계가 막막한 그녀를 도와주는 하마스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전사자의 가족의 복리후생을 철저히 보살핀다. 가난한 그녀의 딸은 전액 무상인 하마스의 초등학교로 전학갈 수밖에 없다. 반 친구는 왜 쟤가 하마스 학교에 가야 하냐고, 쟤도 가기 싫어할 거라며 눈물을 흘린다.

 

인터뷰할 때 그들의 표정이 선명히 기억난다. 그 어찌할지 모르겠는 절박한 눈빛은 그들의 절망이다. 이 무렵부터 이스라엘은 화해의 제스쳐로(물론 누구나 알 수 있듯이 그냥 제스쳐일 뿐이다) 팔레스타인 수감자들을 조금씩 풀어주기 시작한다.(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화가의 동생은 석방자 명단에 없었지만, 그의 소식을 혹시라도 들을까 석방자들을 마중나가 한 명 씩 붙잡고 동생을 아느냐고 물어본다. 동생을 아는 자가 없다.

 

한층 헝클어진 눈빛으로 화가는 말한다. 어차피 저항해도 저항하지 않아도 똑같은데 저항할 수밖에 없지 않냐고. 그는 공격적 저항으로 아무것도 바꿀 수 없음을 안다. 또 그것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도 안다. 현장에서 이상적인 논리를 펼 수 있을까?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고 하고, 이곳은 가자 지구였다) 무력감보다 더한 절망이 있을까? 없다.

 

 

현댄지 근댄지 지금은 외교술이나 돈이나 미국과의 친밀성이 독립에 대한 열망이나 조직적 활동보다 백배 중요해졌다. 특히 미국의 원조없이 독재자이든 저항가이든 힘을 얻을 수 없다. 힘의 논리에서 벗어나는 꿈을 꾸어보아도 현장에 적용하면 다 뻘소리다. 그래서 내가 아무리 타당한 생각을 해내어도 다 개소리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는 소리다 뭐 그렇다고

 

가자지구의 덧없는 여름은 이스라엘로의 자살폭탄공격과 함께 저물어간다. 저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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