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아 할머니를 통해 본 팔레스타인 역사

알리아 - 할머니. 76세(1938년생)

 

현재 라말라의 잘라존 난민 캠프 거주 (UN에 난민 등록증 있음).
류마티스 질환이 있어서 한 달에 한 번 예루살렘 병원에 다닌다.
지금은 이스라엘 땅이 된 하이파에 살다가 나크바(=팔레스타인 말로 “대재앙”. 이스라엘 건국 때를 말함) 때 난민 캠프로 이주함.

 

아이들이 다섯 명(아들 셋, 딸 둘) 있고 아들 하나는 감옥에 있었고(2011년 수감자 교환 때 풀려남), 하나는 1차 인티파다(1987년) 때 죽었음. 감옥에서 나온 자식 이외 나머지 자식들은 다 난민촌 바깥에서 산다.

 

1948년 나크바 때 열 살. 다행히 부모님과 다른 7형제들 모두 살아남아 라말라까지 피난을 왔지만 전재산을 잃고 난민촌에서 어렵게 자랐다.

 

스무살이 되면서 하이파에서 함께 피난온 집안의 아들과 난민촌에서 결혼. 남편은 이스라엘에 가서 일하며 자본금을 모아 라말라 시내에 작은 책방을 차림.

 

1967년 점령 때 29살이었다. 당시 남편은 다른 청년들과 전쟁을 반대하는 정치 활동을 조직하다 이스라엘군에 살해됨. 

 

1987년 1차 인티파다 때 49살. 적극적으로 거리로 뛰어나와 인티파다에 참여했다. 이스라엘군에 대항해 시위를 하고, 군을 피해 도망치는 사람들을 숨겨주고 치료도 해 줬다. 당시 큰 아들도 가게를 닫고(상가철시) 자기 아들(손자)와 거리를 뛰었는데, 큰아들과 손자가 이스라엘군의 총탄에 쓰러졌고, 가장 어린 아들 하나는 감옥에 끌려가 최근까지 감옥에 있다가 2011년 수감자 교환 협정 때 풀려나옴. 이 막내 아들이랑 현재 같이 살고 있다.

 

인티파다 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평화 협정(오슬로 협정)을 시작했고, 하이파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오히려 좌절된다. 팔레스타인은 자치 정부를 세운다는데, 왠일인지 자유롭게 다니던 곳에 갈 수 없고, 특히 '아부 디스'로 시집 간 딸이랑은 2006년 5월 고립장벽이 세워진 뒤부터 10년 가까이 만나질 못 하고 있다.

 

딸과 손녀는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는 허가증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노구를 이끌고 혼자 다니고 있는데, 너무 힘들다. 딸과 손녀가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탈 때까지 같이 있어주지만 예루살렘까지는 혼자 와야 한다.

 

아들이 감옥에 있는 동안 수감자 가족들과 함께 단체를 꾸려 활동. 아들은 감옥에서 나왔지만 여전히 집회 등에는 참여하고 있다. 최근에는 몸이 더 안 좋아져서 그마저도 자주는 못 나가지만.

 


저 염병할 놈들. 병원 가겠다고 하는데. 내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병 고치겠다고 이러고 있는지..
아니지. 아니야. 나는 고향 땅에 돌아가 볼 거야. 하이파를 밟아볼 거라고. 그러니까 살아야지, 우리 어머니도 아버지도, 우리 신랑도 밟아보지 못한 땅을 내가 밟아 봐야지. 인샬라.

 

우리 신랑, 우리 난민촌에서 제일 잘생긴 청년이었어. 그래서 우리집에 청혼하러 왔을 때 얼마나 기뻤다고. 얼마나 잘 생겼는지 몰라.. 가난해도 성실하게 일해서, 루카스 거리에 책 가게도 내고 그랬다고. 그랬는데.. 이스라엘 군인 놈들이 이렇게 쳐들어 와서, 그래서 거리를 나다니고.. 그때 싸운다고.. 이스라엘 군인 놈들이랑 싸우다가 죽었지, 알라 이르하모, 젊은 나이에.. 서른 살도 안 됐었어, 불쌍하지 불쌍해.

 

불쌍한 걸로 따지면 우리 애들도 불쌍했지 아빠도 없이.. 아니, 이스라엘 놈들이랑 싸우다가 죽어서, 그래도 영웅의 자식들이라고, 없이 자라지는 않았어. 애들이 아빠 없어도 하나같이 착하고 성실했는데. 애들이 다 잘 컸어. 첫째는 죽었지. 그때, 그 인티파다 때 말야. 나도 싸웠었어. 너나 할 것 없이 다같이 싸웠었어. 근데 첫째는 총에 맞아 죽었지, 그때 많이 죽었어.. 손자도 죽고... 알라 이르함홈,  이 아이들이 신의 품속에서 편히 쉬길.

 

우리 막내아들은 최근에 돌아왔어. 그때 형 죽는 자리에서 끌려가서 감옥에서 이렇게 오래 있었는데 이제 돌아왔어. 지금 나랑 같이 살아. 이제 장가 보내면 내 할 일은 다 했어. 오십은 안 됐는데 나이 많아도 얘가 딱 지 아빠를 택해서 잘 생겼어. 우리 동네에서 영웅이야. 이제 장가 들고 자리잡고 살아야지.

 

그때 인티파다 끝나고는 이제 하이파로 돌아가는 줄 알았어. 애들한테도 다 얘기했었어, 하이파로 돌아가자고. 텔레비전에서 매일 나왔어, 평화 협상이 진행 중이라고, 저기 오슬로인가 하는 데서 아부 암마르가 평화 협정한다고, 그래서 나는 이제 돌아가는 줄 알았어. 그런데 지금도 난민촌에 살고 있어. 신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거다. 알라후 아크바르, 신께서 우리를 하이파로 인도해 주실지어다.

 

우리 애들이 참 착해. 우리 딸이 나 여기 병원 가라고 항상 버스 정류장에 데려다 주고 마중나오고 그래. 우리 딸이 예루살렘에 들어갈 허가증을 못 받아서 항상 나 혼자 다니는 거야. 우리 애들 안 그래, 정말 착해. 다녀와야지, 다리 나아서 돌아가야지, 고향 땅에 돌아가야지. 우리 애들 우리 증손주들까지 다 데리고 돌아가야지.

 


이렇게 준비해갖고 알리아 할머니가 되어 연극을 했다. 팔레스타인의 역사를 한 인물의 삶을 통해 설명해 봤는데, 그리고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 봤는데 새로운 경험이었다. 정보의 양은 적어도, 어떤 식의 다른 전달력이 있구나 하고.. 좀더 구체화된 역사랄까. 그런 걸 전달하는 내가 느꼈다 -ㅁ-;; ㅎㅎ

 

 

나란 알리아 할머니 열연중

 

이건 10월에 있을 진짜 연극 전에 몸풀기? 겸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야기 나누는 자리 겸 마련했었는데 최근 가자지구가... 상황이 이렇게 되기 전에 준비했던 거고, 그리고 실은 7월이 국제사법재판소 고립장벽 불법판결 10주년 되는지라, 고립장벽 규탄으로 준비했던 건데.. 고립장벽 얘기는 별로 못 했다. 연극을 보면 궁금한 게 많을 것 같으니 우리가 강의를 하는 것보다 사람들 질문을 받는 게 좋겠다고 연출 다다녀가 제안했는데 과연 적절한 질문이 많이 쏟아져서 질문답변만으로 할 만한 얘기 다 나와서 좋았는데 개인적으로는 팔레스타인 역사...를 훑지는 못해서 아쉬웠지만 그렇게 좔좔 말한다고 어차피 기억하긴 힘드니까.. 암튼 해야 할 얘긴 다 하기도 했곰.

 

이것저것 참 하고 싶은 얘기가 항상 많으니 먹고 싶은 것도 많겠다(나<)? 사실이다 배고팜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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